예정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예정
선민(선택)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한 처음자리
오늘날 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십자가라는 걸림돌
예정을 깨뜨리는 예정 (왜? 진짜 예정은 안 깨어지니까?)
어제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라는 내용을 듣고
창세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유행하는 성도의 지금 현재의 실제적인 삶과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를 사소하게 취급하고, 도리어 우리가 귀중하게 취급하지도 않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인류 이전의 창세전의 것만 귀중하게 여겨버리면 인간은 그야말로 붕떠버린다.
인간들이 아무리 신앙의 업적과 실적, 행적을 아무리 쌓아도 바로 저런 내용을 언급하면 모조리 다 거짓으로 판명이 난다고 주변의 친척 중에 이단 사상에 빠진자들과의 어쩔수 없는 충돌 사건으로 인한 복음 논쟁 속에서 예정을 말해주면 저들의 사상이 송두리째 흔들린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아 이거구나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한 소리를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것이다. (도화선을 건드렸으니 죽을만 했다.)
구약의 참 선지자들도 이런 소리를 하다가 목베임을 당했다. (한결같이 융통성 없이 도화선을 건드렸다. 요셉이 꿈으로써 형들을 자극해서 미움을 유발했듯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정중앙 선악과 나무를 건드렸다. 오늘날 교회의 도화선이 뭔가를 밝히기 위해 건드려야 한다. 십자가 라면 아무리 건드려도 상관 없다. 도리어 그 처음사랑의 처음자리만 생생하게 실제상황으로 나타나지만, 엉터리 가증한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면 그 도화선을 통해서 짜증내는 안색의 변함이 드러날 것이다.)
즉 오늘날 교회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다.
처음자리다. 도화선 심지이다. 너의 심지가 어느나라에 연결된 심지이냐 라는 것이다.
항상 선지자들은 처음자리인 근본의 자리를 이야기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이스라엘 손에서 말이다.
공든탑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실적 업적 성화마일리지
부자청년의 공든탑을 무너뜨려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소리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고 도리어 근심하고 돌아섰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이나, 새생명의 삶 운동 펼치는 놈들이나, 하나님 나라 운동 펼치고,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놈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바로 죄인 죄인 그만 하라는 것이다.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 소위 선택된 선민 이기에 자구 죄인 죄인 이라고 하는 것은 실족케 만드는 것이다 라는 소리이다 라고 말한다. 마치 십자가 십자가 그만 하라는 것이다. 이미 십자가를 통과 했기에 성숙으로 자기 삶을 돌아봐야지, 언제까지 십자가를 운운할 것이냐? 라는 소리와 함께 투덜거린다.
그러나 바로 그런 짜증을 통해서 저들의 마음속에 예정을 얼마나 사적으로 챙기고, 그런 놈들끼리 모여서 사조직을 교회라고 우기면서, 소위 영적 아버지 따르기 놀이, 영혼의 치유자 놀이로 장난들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 당시나 구약의 참선지자들의 활동시기에 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복음 선포의 핵심이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즉 일방적으로 선민이다 라고 선택된 자 라고 우기는 그런 입장에서
넌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도 모르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돌삐 맞아 죽을 소리일 뿐이다.
세례요한이 그러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예수님은 더 심했으면 심했지 아예 근본의 자리를 마귀새끼 라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
차라리 소경이라고 하면 고쳐주실 것을
예정 된 자라고 우기니까 모세의 제자, 루터의 정통개혁을 주장한다는 둥 등의 가장 좋은 거룩한 포장을 위선적으로 깔아 버렸기에
그들을 들추어내는 가장 좋은 미끼는 실로암 소경이였던 것이다.
마치 율법을 선민이라는 이유로 그것도 가장 완벽하게 꼭 쥐고 있었던 그들의 거짓을 가장 발가벗기기에 좋은 가장 훌륭한 미끼는 저들의 솜씨를 가장 잘 드러낼수 있는 율법의 집행 기술을 써먹을수 있는 자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이다.
과연 누가 발가 벗은 자이고, 과연 누가 뒷걸음질 쳐서 덮이움의 가리움을 받은 자 인가 라고 내기를 하자는 식이다.
(노아는 사랑 안에서의 허물은 허물이 아님을 더더욱 발가벗겨진 모습을 통해서 증거했다. 예수님도 그러하다 얼마나 진짜 믿음이였으면 버리움을 당해도 끝까지 순종하셨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고백한다. 차라리 내 지옥 갈게 너 천국 가라 라고 외친다.
즉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정반대이다. 앞의 허물 버리움 지옥갈게 라는 부정적인 것을 빼버린다. 아니 해석을 못한다. 그리고 이 불가능을 가능한 해석으로 바꿔치기를 해서 결국 속내를 비추이기를 종교장사를 하는 강도의 소굴인 사조직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의 실천력이 크면 클수록, 율법 지킴이 완벽에 가까우면 그 효과는 만빵이다.
율법은 감사하게도 인간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이런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보라는 누구를 쳐다 보라는 취지를
율법 지킨다고 자기 실천에 빠져서 자기 쳐다 보기에 빠져서 자기 중독이 된 도리어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된 것이다.
즉 우상을 섬긴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당사자가 바로 우상숭배자 였던 것이다.
이런 기가막힌 인간의 위선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율법을 저들에게 안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 엉터리로 지켜서 거룩을 호작질 한다고 피해케 만든다고 처음부터 안줘버리는 우리 인간들의 생각처럼-선악과 왜 심었느냐 처럼),
오히려 율법을 줘서 얼마나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삼아버리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먼저 주어진 특혜였다. 남들이 지적 받지 않는 죄를 지적받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차 버린다.
마치 발가벗은 노아가 은혜 앞에서는 그 발가벗음 조차도다 덮고도 남는 무지개가 떳음을 함은 쳐다보지 않고 도리어 자기와의 차이성을 자기 사적인 선택과 비교로 통해서 발가벗음이 아무 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법이 된 자기에게서는 도리어 악이 되고 만 것이다.
바로 악으로 보는 그 시선을 주님은 노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엉터리 법 기준 보다 더 나은 모습이 있다.
바로 뒷걸음질 쳐서 덮어주는 더 나은 제사 곧 십자가의 사랑이다.
함의 발가벗음에 대한 해석에
더 나은 뒷걸음질 쳐서 덮어주는 해석이 극대화되는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감히 선악에 대해서 안다고 우겼는데 더 나은 긍휼이 덮치니 번데기 앞에서 자기 주름을 자기 선택을 자기 사적인 구원을 예정을 선민을 자랑하게 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얼마나 제대로 된 번데기 였으면 주름을 단 하나도 자랑하지 않는 도리어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는 주름 확 펴진 번데기의 모습으로 와도
버림 받는 모습, 발가벗겨진 모습, 싫어버린바 된 아름다움이 일체 없는 추한 모습으로 와도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형용 못할 영롱함 그 자체이다.
진짜 번데기임을 주름 확 빠진 번데기로 오셨어도 전혀 손색이 없음이다.
이런 넉넉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나타난 인간들에게 심겨진 마귀가 심은 메시아와 정반대의 메시아 즉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아 이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의 집단 이스라엘을 어떻게 모으실까?
어리석음으로 모으신다.
모으고 보니 어중이 떠중이다.
허물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런 성화론자들의 주름 확 펴진 올곧고 누가 봐도 예수 믿는 자 다운 모습을 갖춘자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누가 봐도 가짜 예수쟁이 적그리스도 다운 모습 뿐이다.
늘 저 바리새인 과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라고 결국은 바리새인처럼 고백하는 그야말로 아름다움도 없고 누가 봐도 가짜 신앙만 다 끌어 모은 것이고, 선민은 커녕 선택 꼬라지는 일체 없는, 어쩌면 그리도 버림당할 짖만 골라 골라 모여진 집단이스라엘처럼, 원망한 하는 짖만 골라 골라서 광야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선을 유발케 하는 죄인을 새로 창조 하신 것이다.
수요 설교에서 엿던가?
상상도 못한 메시아 즉 하나님의 요소 + 인간의 요소으로 오신 메시아
바로 이 인자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해석불가인 아무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인간이 주장하는 그 하나님 개념을 모조리 깨어버리는 거짓이요 우상임으로 밝혀버리는 인자의 활동 (모든 인간의 하나님 개념은 곧 우상)
어떤 인간이 주장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라는 인간 개념을 모조리 다 깨어버리는 거짓이요 신이 된 마귀새끼임을 밝혀 버리는 인자의 활동 (거짓 인간, 피조물은 없고 모조리 신됨을 감추는 신 섬기기로 피조물 흉내내는 사적인 피조물, 사적인 한 몸 만들기)인 것이다.
오로지 이런 인자만이 만들어내는 성도는 똑같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방식과 같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차이성을 담은 성도이다. 즉 믿음의 열매이다.
즉 죄인 요소 + 천사의 요소 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그야말로 허물 투성이인 우상 조각가 인데
이상하게 주변사람들은 이 아브라함 때문에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두 패거리로 나누어 진다. 그야말로 복의 근원처럼 아브라함을 뒷걸음질 해서 덮어주는 영접자는 복이고, 노아처럼 발가벗은 아브라함을 손가락질 하는 그 자는 저주에 저주가 퍼부어진다.
아무리 봐도 아브라함에게서는 그런 능력이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동행하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서는 숨어있는 모습으로써 나오게 된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발가벗겨진 허물많은 우상 조각가 (처음모습=죄인중의괴수)를 무슨 수로 해석 할 수 있으랴? 해석 못하면 박살내겠다는 취지이다.
너희들의 처음모습이다 라고 아브라함을 앞장세워서 (마치 없음의 부재성으로 다가오듯이 모세의 지팡이는 아무것도 없는 무능의 모습이다. 이 지팡이가 주인공인데 이 주인공인 지팡이를 해석 못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취지와 같다.) 아브라함 영접 할래 영접안하고 거부할래 라고 들이내미시는 것이다. 이런 우상조각가 아브라함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모든 인간의 하나님을 교체해버리신다. 해체
아무도 그 당시 해석할 자가 없었다.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더군다나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그 모습을 갖추면 갖출수록 거리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단절적이다. 해석불가이다.
차라리 주여 해석 못하겠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면 되는 것을, 도리어 예수님 마자도 해석할려는 그 뭔가를 쥔 소유를 반드시 끄집어 내도록 유발케 하신다. 무엇을 쥐었는가? 마귀를 쥐고서 해석하겠다는 꼬락서니이다.
차라리 해석 당해야할 판국이다. 즉 무조건 지옥 감이 마땅하다. 삭제 안 당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정말로 법적이다면 우리는 벌써 삭제 당해야 한다.
정말로 율법을 본 자라면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비로소 알려주신 그 예수님이 너무 너무 크게 보이고 감사할 뿐이다.
그거 알려주실려고 불뱀의 모습으로 달렸다. 인자 다. 아무도 해석 못하는 불뱀의 모습, 어리석은 모습, 걸림돌의 모습, 창녀 다말의 모습이다. 아무리 아무리 모든 해석을 동원해도 해석 할 수 없는 모습인 비밀이다. 만약 해석이 된다면 해석되는 메시아는 가짜다. 해석 하겠다고 다가가는 그 해석을 손 놓게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순종의 모습이다. 자신의 해석을 포기해 버리셨다. 자신의 메시아 이다 라는 듣지도 못할 인간들에게 향한 외침을 포기해 버리셨다. 오히려 다 이루었다 라고 더욱더 해석불가의 단절성을 확대 시켜버리신다.
뭐 다 이루었다고? 뭘 ?
뭘 다 이루었는데?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것을 다 이루었다.
참 웃끼지도 않는 소리 이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핍박 안하면 되고 상관없이 지내면 그만이다.
즉 관계성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면 아무 연관성이 일체 없는 방식이 된다. 참 쉽죠잉
맞다 아무도 상대 안하면 그만이다.
아무리 오지랖이 넓은 인간도 멀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주님이 기가막힌 것을 심으셨다. 마귀다.
마귀는 시체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는 곳에는 기가 막히게 냄새맡고 몰려드는 독수리와 같다.
즉 마귀에게 맡겨진 사명은 딱 하나다. 누가 시체인가 라는 것이다.
마귀는 산 자를 겁을 낸다. 그리고 죽은 자에게는 겁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자와 방불한 자를 아무리 시체로 만들려고 해도 무용지물이다.
도리어 건강하다 라고 예정된자 선민이다 라는 자들에게는 일곱 귀신을 심어 넣을 정도로 원래 시체 덩어리인 자를 뜯어 먹고자 달려든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20:28, 개역)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바로 이런 마귀가 심은 메시아와의 차이성이 바로 죽고자 오신 예수님이다. 아무도 해석을 못한다. 아니 해석할려고 끝까지 따라 갈려는 베드로 조차도 떨어뜨린다. 예수님의 새창조 영역에 건방지게 베드로가 한 수 거들겠다고 하는 것을 도리어 무능한 피조물의 자리로 제발 좀 돌아가세요 라고 베드로를 낮추신다. 아마 베드로가 거들게 되면 제 2의 창조자로써 도리어 마귀가 탄생했을 것이다. 바로 이 제 2의 창조자가 될려는 교리를 퍼트린 것이 기독교교회 2천년 역사이다. 우리는 베드로 꼬끼오 닭을 통해서 그들의 꼼수인 2천년 역사의 숨은 마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광명한 천사가 그야말로 교회라는 이름하에 활동했던 것이다. 그런 정통을 잇겠다고 나서는 미친놈들이 한 둘이가 아니다.
그런데 동변상련이라고나 할까? 똑같은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는 산상설교가 어쩌면 그리 딱인줄 모른다. 의사가 왜 있는가? 환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환자 없는 세상에서는 의사 라는 용어를 쓸 이유가 없다. 차이성 때문이다. 구원자는 죄인에게만 해당된다.
이것을 엉터리로 해석한 놈들이 성화론자들이다. 얼마나 산상설교로 얼마나 사기를 치는지 그야말로 산상설교의 복음을 사적인 자랑, 사적인 구원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의사다 라고 서슴없이 사기를 쳐도 더 신비로운 것은 그 뻔한 사기에 뻔하게 넘어간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마치 야곱의 편애를 해석할 길이 없듯이 만약 해석 되는 편애라면 가짜이듯, 에서의 미움도 해석할 길이 없는 신비이다. 만약 에서의 미움도 해석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것을 해석했다 라고 하는 그 놈이 해석한 자기를 반드시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 있는 악령 들린 모습을 틔 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으로써 편애와 미움을 해석 못하도록 하셨다.
(사 29:16, 개역)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예수님의 거저 주신 긍휼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는 토기장이를 해석한 적이 없다. 거저 주신 것에만 감사하기 바쁘다. 감사함을 다 못다해서 잠못 이룬 설레임으로 이룬 밤을 지나 또 한량없는 은혜를 눈뜨자 마자 퍼붓는데
그야말로 입에 숨 쉴 틈이 없이 긍휼의 생수를 퍼붓는데 우리는
그저 꼴까닥 꼴까닥 숨넘어가는 모습만 외부인에게 비쳐질 뿐이다.
그러니 아무도 해석 못하지, 누가 건방지게 꼴까닥 하는 숨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으랴? 백날 해석 해 본들 노아처럼 발가벗은 모습으로만 비춰질 뿐인데?
주님은 신이 나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라고 넉넉하게 당당하게 다 주고자 해도
인간들은 자기 이미지 관리함에 걸림돌이 된다. 어떻게 피를 먹고 살을 먹으랴? 당장 율법에 걸린다. 그리고 남들이 보는 이미지에 식인종과 같은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마치 그동안 살인자 아닌 듯이 살아온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살인자이거늘 살인자 아니다고 우기니 그 놈이 살인자 맞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1, 개역)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3, 개역)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24, 개역)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5, 개역)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개역)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 5:27, 개역)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율법이라는 해석 불가를 더더욱 구약의 불연속성으로써의 신약이 엎친데 덮친격으로써 율법의 강화로써 비밀을 더더욱 비밀로써 아무도 못 풀도록 자물쇠를 어떤 누구도 풀 수 없도록 가로막아 버리신다. 두루도는 화염검을 든 천사를 두어서 생명나무를 지키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금지된 것이 그 막힘과 단절과 금지성이 크면 클수록 그 결핍성을 더욱더 채울려고 산상설교를 지킬려는 악마들이 등장한다.
간단하다 마귀들은 그들 뿐이다. 참 쉽다.
멀리서 볼 필요 없다. 교회에서 법을 쥔 자들의 특징이 반드시 법을 실행하는 위치에 서서 법을 발설하고파서 입이 건지러워서 못 살 정도이다.
차라리 그 법에 찔림을 당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솔로몬 재판에 나타난 지혜이다.
왜 그런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임을 비로소 보는 위치이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우리를 늘 처음 자리로 무능한 위치로
어린아이의 자리로 낮추는 자리로 되돌릴려고 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처음자리로 되돌려 놓는 위치에 서고 싶다고 또 성령이 직접 하시는 일에 성령의 훼방자로 나설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의 훼방자는 먼데서 볼 필요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남에게 적용하고 이단감별사의 위선을 부릴 필요가 하등 없다. 우리가 다 성령의 훼방자 이다.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가 싫기 떼문이다.
신앙도 남과 비교해서 꿀리기 싫어서 성숙을 하고 명령어를 지킬려고 하고
남들에게 그런 믿음을 과시하고 어떤 위선으로 감추어도 우리는 그 짖 외에는 다른 하는 짖이 없다.
그렇다고 토기장이가 어떤 방해를 받느냐? 안 받는다. 그래서 주님은 이 처음자리만 예정 하신 것이다. 창세전이다. 처음자리 이다.
그래서 예정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예정이다.
예수님만 예정 하셨다.
여기에 자기의 사적인 예정에 관심둔 자들이 반드시 화를 내도록 되어 있다.
짜증내면서 왜 나의 예정은 받아주지 않느냐 라고 도리어 아벨을 편애한 하나님을 죽여버린다.
우리 모습이다.
예수님의 예정으로만 족하지 않는 자는
사적인 예정을 챙길수 없도록 하신 그 단절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이 발가벗겨지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늘 그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일만 남겨져 있을 뿐이고 (패하고)
그런 발가벗겨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뒷걸음질 쳐서 덮으시는 일 만을 하시는 그만이 예정(피) 되어있을 뿐인 일용할 양식인 한 알의 밀알만 우리 마음판에 새기신다. (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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