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으로 떨며 즐거워하라 (시편 2)


길에서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진노가 급하리라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 개역)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2,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2:3, 개역)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2:4, 개역)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2:5, 개역)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2:6, 개역)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7, 개역)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2:8, 개역)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개역)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2:10, 개역)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2:11, 개역)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제목이 무시무시하지 않나요?

그리고 얼마나 모순되지 않나요?

 

두려워 하고 떨림으로써 구원을 이루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라?

 

이게 말이 됩니까?

벌벌벌 떨고 두려워 떠는데 그것이 즐거움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행함론자 즉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에서는 이 두 모순되는 것 까지

그냥 행해라 이유없이 행해라 라는 식입니다.

 

그럼 본이라도 보여주면 참 좋겠는데

본도 안 보여주면서 무조건 지키라 라는 식입니다.

 

자기도 천국에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식인 거죠.

 

그런데 이것은 모순인듯 모순아닌 모순같은 내용인 겁니다.

 

두렵고 벌벌 떠는데 즐겁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앞뒤 모순이 아니라

그렇다고 논리에 의한 용어로 모순이 아니니까 일관성이라고 말하는데

일관성도 아닌 겁니다.

그냥 말할수 없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두 상반된 내용을 그냥 적은 겁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즐거운 구원을 이룬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가 그렇다는 겁니다.

 

사실 구원이라는 결과는

원인이 즐거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나온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죠

 

즉 구원은 그냥 증상일 뿐입니다.

콧물은 몸에 감기가 걸렸는지 안걸렸는지를 알수 있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몸 자체에는 없고 몸에서 밖으로 빠져나오는 콧물로써 아는

구원은 곧 즐거움은 증상이다는 겁니다.

나타난 증상

나타난 결과

 

그런데 원인은 없는 거죠.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즐거움의 증상이 나타났는데

정작 본인은 벌벌벌 떨었다 라는 겁니다.

두렵고 벌벌벌 떨림으로써 생뚱맞은 결과인 증상이 구원이라는 즐거움이였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제가 생각이 났는데

내용은 역시나 같은데

바로 얼발란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전혀 안 어울리고

맞지도 않는 동질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 볼수 없는데

그런 결과가 나타나서

원인이 없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악인 다윗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 이유가

바로 다윗에게는 아무리 그 원인이 있을수 없다 라는 것에서

얼발란스 라는 용어가 나중에서야 생각났습니다.

 

몇 년전의 광고에서 엄청나게 키큰 여친과

억수로 키 작은 남친이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는

그 멋진 장면에서 클로즈업이 된 화면이 뒤로 물러가면서

키 큰 여친은 다리를 억수로 낮추어서 무릎도 꿇고 허리도 굽혀서 아주 아주 불편한 자세였고

키 작은 남친 또한 발가락을 있는데까지 높여서 키 큰 여친의 입술 위치에

자신의 입술 높이를 맞출려고 아주 힘겹게 애를 쓰는 장면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 클로즈업 하면

아주 멋진 선남선녀가 아주 기쁘고 즐거운 사랑의 즐거움을 누리는 증상인데

정작 화면을 백업하면 전혀 안맞는 화면이 얼발란스(모순) 되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얼발란스의 증상이 바로 클로즈업 된 화면이다는 거죠.

 

뭔가 얼발란스 하다는 것은 단절된 느낌

빈 간극의 구멍이 뻥뻥 뚫힌 느낌

그런데도 즐거움은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그 증상을 즐기고 누리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럼 시편 1편의 내용도 전혀 안 맞는 얼발란스 한데

결과는 이미 쳐들어와 버린 겁니다.

 

마치 사도 라는 직분도

또는 참선지자 라는 직분도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는 설명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왜 참선지자 인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들 참선지자 편에 섰다고 여기나

정작 이사야 6장만을 보더라도

정작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적으로 삼아서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조상들은

참선지자의 편에 섰다고 늘 주장을 하나

역사에 나타난 결과 곧 증상은

참선지자를 죽이는데 한치도 벗어난적이 없었던 겁니다.

 

동일하게

그 참선지자의 죽음의 사건이

사실상 미리 앞당겨진 예고편이였다면

진짜 본 실상은

참선지자의 죽음을 보고서도

우리는 절대 그런 조상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예수님 이라는 실상을 드러내는데는 오히려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라는 겁니다.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1:47,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11:48, 개역)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여러분 안 이상한가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몇 번이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이 했던 일을 반복하면서

나머지 그 양을 반드시 채우는 짖을 역시나 하더라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룟유다에게 어서 너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라고

그 일을 너는 피할수 없을 거야 라는 식입니다.

 

(13: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13:27, 개역)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경고를 했다 라는 것은 그 경고를 통해서 고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가 아니라

경고 자체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증상을 오히려 재촉하면서 드러내는 양상이다는 겁니다.

 

마치 금기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전혀 그런 생각 조차도 하지 않았을텐데

하지마라 라는 명령을 듣는 순간

그 경고를 듣는 순간 하지말라를 더 빨리 재촉하면서 그 하지말라는 것을 더욱더 하게 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지말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유대인이 성경말씀을 모르면 참으로 다행인데

구약성경말씀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참선지자의 죽음을 모르는 이가 없기 때문에

 

하지 말라 라는 명령어를 듣게 되면

저절로 그 증상으로써

그냥 원인 없는 결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오히려 재촉성이 더 발휘되는 일에 말려들 수 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안 휘말려야지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말려드는 겁니다.

차라리 말려들어서 그것보다 더한 증상이 뭔가를 보면 차라리 나은데요

그런 지혜를 가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헛 똑똑이들이라서 어리석은 지혜를 원치 않고

걸리끼는 지혜는 원치 않기 때문에

걸림돌 속의 걸림돌

폭력 속의 폭력

부정함 속의 부정함 속으로 들어갈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말려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너희 조상이 했던 것처럼 너희도 그럴려고 하느냐 말을 듣는 순간

더욱더 재촉하는 구조에 말려드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속에 두려움으로

떨림 속에 떨림으로

진노 속에 진노 로 들어가 보면

 

내가 당하는 것 보다 더한 결과의 증상으로써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면

이것은 기쁘지 아니할 수 없는

구원의 만개이다는 겁니다.

 

빌라도가 유대인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방해하면서

유대인을 죽이기 까지 하니까

이 진노 속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유대인이 예수님 당신은 메시아 구원자가 맞다면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라고 말해버림으로써

모든 결과의 증상은 기쁨으로 게임오바가 된 겁니다.

뭐가 심각한데? 심각한 것 없음 이라고 선언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누리는 것 뿐입니다.

 

심지어 죽음도 누리는 하나의 즐거움꺼리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느닷없이 변화산에서 나타나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로써

모세가 대표적으로 발언합니다.

주여 어서 죽어주시옵소서

즉 십자가에 빨리 달려 죽으셔서

모든 언약을 다 이루소서 라고 요청합니다.

 

즉 모세가 단절이 되버린 자입니다.

그럼 그 단절의 빈간극을 유대인의 영웅인 모세라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모세가 아무리 과거의 믿음의 영웅인들

참선지자인들

율법의 대표자인들

모세는 그저 이 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자일 뿐인

그림자이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말했지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인들

정작 본인은 그림자요 악인일 뿐이며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일 뿐인 자이다 라는 것을

의사 구원자는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이것을 이스라엘이라는 적 속에서 외쳐야 하는 증인이다는 겁니다.

복있는 사람이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이요

그럼 다윗은 뭐냐? 악인의 꾀를 쫏는 자였을 뿐이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그 죄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시편 2편은

허사를 경영하는 세상의 임금들 속에서도

다윗 본인도 허사를 경영하기는 매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대로 4배나 갚으라 라는 명령이

허사를 경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더더욱 감추어진 죄악의 길이였으나

 

주님은 내어버려두시지 않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다윗을 건지시는 겁니다.

죄의 길에서

악인의 꾀에서 말입니다.

 

그 결과물로써 다윗이 지금 외치는 겁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을 일인지

아니면 이미 벌어지는 일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그저 묵시 곧 말씀의 배경판대기일 뿐입니다.

배경그림일 뿐이니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벌어졌던

안 벌어졌던

그 사건 자체가

정작 실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것이 언제 들통이 납니까?

제대로 된 기준이 확립이 되면

그 잣대 기준으로 허사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2편의 본문이 인용된 곳이

신약의 사도행전 4장입니다.

 

한마디로 시편 2편 자체에서도 그렇지만

사도행전 4장에서도 졸지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준이 생겨서

그 새로운 기준에 의해 지적받는 상황이 되니

불편하고 불쾌한 입장에 놓여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셨다 라고

사도들이 외치게 되니까

유대인들이 예외 없이 어떻게 해서든 이 복음의 외침을 막고자

고소가 벌어지고 사도들을 가두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퍼지게 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풀어주면서 제발 빈다 제발 그 소문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려내었다 라는

그 간극의 3일 만큼은 제발 제발 전하지 말아다오 라고 하니까

 

아니 본 것이 이것 뿐인데

본 것은 안 봤다고 하면

홍씨 맛이 나서 홍씨 맛 난다고 했을 뿐인데

그런말 하지 말라고 하면 소녀 어찌하옵니까

이 사도는 어찌 하옵니까 말이죠.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4:1, 개역)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4:2, 개역)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4:3, 개역)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4, 개역)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4:5, 개역)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4:6, 개역)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4:7, 개역)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4:8, 개역)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4:9, 개역)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4:10, 개역)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4:13, 개역)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4:14, 개역)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4:15, 개역)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4:16, 개역)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4:17, 개역)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4:18, 개역)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4:19, 개역)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개역)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4:21, 개역)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4:22, 개역)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4:23, 개역)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4:24, 개역)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4:27, 개역)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4:28, 개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4:29, 개역)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4:30, 개역)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4:31, 개역)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시편 2편을 인용한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부분에서 구약의 말씀성취가 이미 증상으로써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을

오히려 저들의 더욱더 재촉해 보여주는 겁니다.

 

유대인과 이방 왕들이 이 구약말씀을 무시하고서

원인 없는 결과를 어떻게해서든 방해를 할려고 해도

방해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갑절로 불어나게 되니

자기들이 가두어 놓고서도

자기들 손으로 오히려 풀어주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 중간에 낑긴 사도들은 무엇을 격게 될까요?

바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의 즐거움을 매번 시시각각으로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상하게 죽음으로 몰리는데 오히려 결과는 모순된

그 간극을 아무도 채울수 없는 모순된 결과 즐거움만 누리게 되는 겁니다.

성령의 충만만 더욱더 넘치게 되더라 말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왜 다른 곳은 안되는 것입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하셨는데

그냥 땅끝까지 라고 앞의 온 유대를 빼고 즉 그 대표성이 예루살렘이지요

온 유대를 빼고

사마리아 곧 이방인의 대표성이니가 사마리아

그 사마리아 빼고

땅 끝까지 곧 죽음의 세계 심지어 지옥도 포함되는 사망의 권세가 있는 곳까지

 

라고 어차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 하면 될 것을

앞의 두 장소를 왜 구지 왜 하필이면 구지 언급이 되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단절성입니다.

꽝꽝꽝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칭조의 원리이기도 하고요

즉 창조를 하는데 너는 하등 보탬이 된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나는 도대체 뭡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증상들을 누리라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막살아라 라는 겁니다.

너 자체가 그 증상물이다 라는 겁니다.

막하신 분의 빗어낸 창조의 결과물이 너 이다 라는 겁니다.

토기장이 마음대로 하심의 결과물이 너이다 라는 겁니다.

너는 결과물 곧 그릇일 뿐이다는 겁니다.

긍휼의 그릇이면

긍휼만을 드러내는 그릇

 

진노의 그릇이면 진노를 말할 수 밖에 없는 증상으로서

결과로써의 그릇이다 라는 겁니다.

 

왜 나를 긍휼의 그릇으로 만듭니까? 내 허락도 없이

왜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듭니까? 내 의견도 묻지도 않고?

 

토기장이에게 따질 권한이 없다 라는 겁니다.

힐문할 자격이 있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달음박질 함도 아니요 원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히려 정작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떨고 진노(단절, 십자가)를 보는 자는 긍휼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에 이용하고자 임금삼고자 했던 자들은 진노를 보게 된 겁니다.

 

왜 이 거친 반석인 십자가 곧 하나님의 진노를

부딧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 곧 예루살렘에 둔다는 겁니다.

 

얼마나 불쾌하고 불편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즐거움이다는 겁니다.

마치 아버지의 매가 있는 자식은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인 것처럼

사생아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증거로 그 증상으로 매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주 되심을 시온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반복의 단 한번의 주사위 놀이와 같다는 겁니다.

딱 한 번의 주사위 놀이인데

이것이 무한 반복이 되면서 n-1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단번에 모든 것을 이룬 이 십자가의 사건이

2000년 전에 벌어진 것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그 단번의 명료한 완료가 무한반복으로 지금 현재도 앞으로도 벌어진다 라는 겁니다.

 

어떤 사건?

십자가 사건이라는 부딧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써 십자가의 용서가 말입니다.

주의 진노하심을 봐야 긍휼을 바랄 것 아니겠습니까?

뭘 해도 죄인데

주의 진노하심이 안 보이는 자는 바로 긍휼을 쟁취 소유할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유대인이였듯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 유대인이 당한 꼴을 보라는 겁니다.

 

허사를 경영하다가 당한 꼴 말입니다.

 

허사 헛된짓 아닙니까?

다윗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 보세요 율법을 네 배나 그 죄인에게 물으라 라고 합니다.

너야 너

나단 선지자가 말합니다. 그 놈이 너야 너

율법 네 배나 갚겠다는 것이

폭력 인데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겁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런데 율법대로 네 배로 갚으라 라고 선언했을때에

폭력을 제대로 갚는 것이 폭력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폭력 속에 폭력을 가합니다.

진짜 폭력은 사랑입니다.

 

폭력 속의 폭력이 바로

너야 너! 다윗 그 놈이 바로 너야 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 이미 용서가 들어간 겁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폭력 속에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전혀 폭력적이지 않는 것이

진짜 폭력이 된다는 겁니다.

 

 

말이 어렵나요?

똑같은 의미로

베드로가 남을 용서하는데 7번까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몇 번 더 해야 하느냐 라고 묻게 됩니다.

 

남을 용서하는데 있어서 7번까지 했던 베드로는 남을 꺽고자 그 이상으로 해야만 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이 폭력을 없애 버리는 방식이 폭력 속에 폭력을 가하는 겁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린다 라는 말과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폭력 속에 폭력은

마치 부정 속에 부정으로써

어떻게 보면 산상수훈이 율법 속에 더 율법적인 것으로써

율법을 찢는 의문의 증서를 찢는 겁니다.

원래 취지를 엉터리 취지로 율법화 한 엉터리 해석에

진짜 해석을 듣고 보니

벌벌벌 떨게 되니

엉터리 율법해석으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었는데

진짜 제대로 된 진짜 율법해석에 의해 구원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진짜 율법 해석이 뭐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율법실천의 달인들이 유독 딱 하나를 못하는데

남을 사랑하는 겁니다.

 

7번 용서하는데 있어서 주변인들 모두다 경쟁자로 삼거나

아니면 나의 용서의 대상물로 삼아 버렸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6번 용서한 놈 보다는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대상물이

곧 나보다 못한 놈이 생겨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충족물 나의 결정적인 용서실천이 있어야 하고요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말이죠.

 

그래서 더 초과잉적인 용서가 폭력적으로 등장합니다.

770 번 용서

아예 용서 시도 자체를 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엉터리 이데올리기에 더한 법 진짜 이데올로기 맛좀 볼래?

너나 770번 용서 받으세요 라는 겁니다.

너가 대상물이야 어딜 감히 남을 대상물로 삼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니까

남을 사랑하는 자가 되자 라는 엉터리 해석을

성화론자들이 하는 겁니다.

 

자기도 못 지키는 율법을 남에게 덤핑으로 뒤짚어 씌우는

연자맷돌을 씌워 물에 빠뜨려 참수시키는 살인마들인 거지요.

?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단 한번이라도 이웃을 사랑하기나 했을까요?

지도 못하면서 왜 남에게 강요할까요?

거기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손양원 앞장세워서 말이죠.

 

앞장 세울것이 없어야 하는데

졸지에 카톨릭도 앞장세우는데 우리는 뭐 없나 싶어서

졸지에 어 손양원이가 있네 하니 이 기독교가 마귀 집단

곧 카톨릭과 똑같은 집단이 된 겁니다.

얼마나 부러워 했으면 기여이 하나를 만들어 세운 겁니다.

우상을 말이죠.

 

폭력 곧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져서 그런 겁니다. 마약이지요.

종교는 마약입니다.

 

복음은 그 마약이라는 종교 속에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폭력

시편2편에서는 허사를 경영하는 그 허사 속에서

저들이 여기는 허사로 여기는 십자가의 저주를 행사 합니다.

폭력(허사) 속에서 폭력(십자가, 부딧히는 돌, 거치는 반석)을 행사합니다.

반드시 앞의 폭력이 나와줘야 그 상대적인 폭력이 그 속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인 거죠.

부정의 부정

이것이 초긍정입니다.

7번 용서(허사) 속에서 770번 용서(율법의 완성)을 펼치시는 겁니다.

 

왜 예루살렘만 빼고 다들 떠나버린 사람들을

부활 소식을 들어도

어떻게 해서든 예루살렘만을 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일부러 예루살렘만으로 다 모으시는 겁니다.

 

이 걸림돌을 왜

이 부딧히는 돌을 왜

이 거치는 반석을 왜

손에 놓으려고 하느냐 말이죠.

손에 쥐라 라는 겁니다.

이 반석을 쥐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수시고 돌아다니면서 그 돌을 쌓는 겁니다.

12개의 이스라엘이라는 돌을 말입니다.

교회라는 돌을 말입니다.

교회라고 하니까 또 엉터리 교회를 주장할까봐

신부라는 돌을 방방곳곳에 쌓는 겁니다.

 

그럴 때 십자가 사건이 어 또 벌어지는 겁니다.

그 장소에서 그 시간에서

장소를 초월해서 시간을 초월해서 부지불식 간에

막 뻥뻥뻥 터지는 겁니다.

불꽃놀이처럼

이 증상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속은 다음 시간에 또 다루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이 마태복음 21장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와 연관이 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너희가 조상의 일을 마저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 일이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비유 속에서 언급이 됩니다.

시편 2편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아니 초장부터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쫏지 않는다고

다들 복된 소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올시다

초장부터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복음이다는 겁니다.

감추고자 하는 것들을 다 들추어내는 복음

들추어내지 못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삼일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 라는

그 십자가의 사건을 거치지 않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사생아도 다 알아먹는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편과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겼건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왜 매를 대시는지

그 매를 대심 자체가 자녀이기 때문에

 

당장은 그 매가 싫겠지만 불편하겠지만 불쾌하고 아프지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라는 것은

헛된 광명한 천사인 마귀와의 차이성으로써

시편 2편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편을 초반부터 진노를 퍼붓는 이 내용을

무시하지 말고 다시 보자 라는 겁니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나봇의 포도원,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 구멍가계 하나 무너뜨릴려고 갑의 횡포가 이 얼룩이 된 미끼를 덮석 무는 바람에 땅콩항공사 전체가 다 무너지게 되는 상황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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