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사 62, 1-12)

(아 2:10,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사 62:1, 개역)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2, 개역)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 62:3, 개역)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사 62:4, 개역)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사 62:5, 개역)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6, 개역)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사 62:7, 개역)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사 62:8, 개역)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사 62:9, 개역)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사 62:10, 개역)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사 62:11, 개역)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 62:12, 개역)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 62:1, 새번역)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사 62:2, 새번역)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사 62:3, 새번역)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사 62:4, 새번역)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 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 ㉠히, '아주바' ㉡히, '셰마마' ㉢히, '헵시바' ㉣히, '쁄라'』
(사 62:5, 새번역)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 / ㉤히브리어 자음 본문의 발음을 달리하여 '너를 지으신 분께서'로 번역하는 역본들이 있음』
(사 62:6, 새번역)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사 62:7, 새번역)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 62:8, 새번역) 『주님께서 그의 오른손 곧 그의 능력 있는 팔을 들어 맹세하셨다.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식량으로 내주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 사람들이 마시도록 내주지 않겠다."』
(사 62:9, 새번역)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
(사 62:10, 새번역) 『나아가거라, 성 바깥으로 나아가거라. 백성이 돌아올 길을 만들어라. 큰길을 닦고 돌들을 없애어라. 뭇 민족이 보도록 깃발을 올려라.』
(사 62:11, 새번역) 『보아라, 주님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신다. 딸 시온에게 일러주어라. 보아라, 너의 구원자가 오신다. 그가 구원한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그가 찾은 백성을 앞장 세우고 오신다.』
(사 62:12, 새번역)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라 부르며 '주님께서 속량하신 백성'이라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너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랑한 도성' 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도성' 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 21:5, 공동) 『"㉠시온의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이사 62:11; 즈가 9:9.』

(슥 9:9, 개역)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새번역)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 21:5, 새번역)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 ㉢슥 9:9』
(요 12:15, 새번역)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슥 9:9』

(겸손 곧 온유=사랑 즉 긍휼을 베푸시는 자)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미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즉 율법의 기능은 평준화입니다.
창녀와 제사장을 일반으로 만드는
높은자 낮추고 낮은자 높이심입니다.

이것이 진짜 율법의 기능인데
이 율법의 기능이 무엇과 대조를 이루는가 하면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자들과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목적은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우상숭배였다는 거죠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혼합적인
무녀의 자식 곧 독사의 자식처럼 말이죠

그래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고
완전케 하러 왔다고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마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렘 8:8, 현대어) 『[백성을 오도하는 스승들]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습니다. 우리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어떻게 너희가 주장할 수 있느냐? 너희의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율법을 완전히 변조하여 위조된 율법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있다.』
(렘 8:8, 개역)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렘 8:8, 새번역)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렘 8:8, 공동) 『너희 가운데 지혜 있다고 스스로 나설 자 있느냐? 야훼의 법은 우리가 맡았다고 할 자 있느냐? 보아라, 거짓 선비의 붓끝에서 법이 조작되었다.』
(렘 8:8, 쉬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는 지혜롭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말하느냐? 실은 서기관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거짓말로 기록하였다.』
(렘 8:8, 우리말) 『보라. 서기관들의 거짓된 펜이 여호와의 율법을 그릇되게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지혜롭다. 우리에게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라고 어떻게 너희가 말할 수 있느냐?』
(렘 8:8, 킹흠정) 『어찌하여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지혜롭고 주의 법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하느냐? 보라, 그가 분명히 그것을 헛되이 만들었으니 서기관들의 펜이 헛되도다.』
(렘 8:8, 한글킹)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현명하며 주의 율법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보라, 그가 확실히 그것을 헛되이 만들었으니 서기관들의 펜이 헛되도다.』
(렘 8:8, 현대인) 『너희가 어떻게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고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보라,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요 7:23, 개역)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갈 2:21, 개역)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원수 된 것 곧 의문의 반복인
우상을 더더욱 쌓게 되더라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랑은 두려움이 없기에
일반화 즉 제사장과 창녀가 일반이 되는
첩경을 평평하게 하는 1층인데

강도 만난 자를 제사장이 왜 못 만지는 이유는
사랑이 없이 율법을 지킬려는 의문 때문에
두려움 곧 율법을 어길까 봐 두려워서
더더욱 율법을 엉터리로 가르친 거짓영을 따라간 것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는 대부분 이런 식이니까 말이죠
본인 목사가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자임을
죄인 중의 괴수 임을 일반화 하기는커녕 도리어 더더욱 높이 세워서
뭐 목사 건드리면 3대가 망한다는 미신을 퍼트리니
이건 뭐 미신이 교회에 더 강하게 작용하더라 말이죠
교회가 아니지요 산당이지요
이것을 비판할 줄 안다는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은 더 심해요
저런 노골적인 미신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 뒤에 숨어서
장사를 할려고 해요
교회를 손 못 놓겠다는 운동을 한다는 자체가 역시나 똑같다 말이죠

아무튼 율법의 기능은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평준화 곧 모조리 불도저로 밀어버려서 첩경을 평탄케 해서
높은 산당을 가루로 만들고(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전재산 헌금이 성전을 허물기 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도록 모조리 다 1층 높이 펄쩍 뛰어도 1층 낭떠러지 떨어져도 1층

이런 일반화 평준화시키는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바로 공의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이오팔 25장 8절 이라고 외우면 쉽죠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사망이라는 죽음의 권세를 멸하는 것이 진짜 살아있는 거룩이다 말이죠
산자의 하나님이고
죽은자의 하나님은 이런 1층을 만들 줄 모르는
냅따 자신의 의만 쌓기 하는 산당을 높이 세우기 밖에 안 되는 거죠
이 시온에서 나오는 공의 가 바로
죽음을 멸하고자
하늘 영광 버리고 즉 전재산 다 버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바로 사랑이자 막사는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는 이런 막살기는 할 줄 몰라요 글쎄

전재산인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
왜? 원수 된 것을 자신의 육체로 이 의문의 증서인 율법을 폐하셨다 말이죠
아까 말한 폐함과 다르죠 완성했기에 책거리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율법의 숙제가 여전히 아직도 남아있는 자들에게는
평준화시키고자 하는 용도로써 여전히 남아서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누워서 침 뱉는 
헛된 자기 맹세라는 부메랑에 되돌아오도록 만들어 버리셨다 말이죠
효력이 없는 율법을 좇으니까 말이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갈 5:4, 개역)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5, 개역)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 5:6,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러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쳐다보지 않는 자는 이 의문의 반복에
곧 올무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의미 두도록 되어 있는 이 의문에서 못 벗어나는 거죠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때려 죽어도 못 보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본다고 낫겠는가 라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동일하게 지금도 작용합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게 되면 쪽팔리잖아 
그래서 성화해야 한다고
안 그러면 방종하게 된다고

마치 이것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식입니다.

방종이라는 의미는 마치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용어를 만드는
종교지도자들 뿐입니다.
즉 목사 라는 무녀의 자식 곧 독사의 자식들 뿐이다 말이죠

그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교회 밖에 몰라서 갇혀버린 겁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미 다 완료된 새 이스라엘을 봐 버렸기에
오히려 눈에 보이는 국가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시온에서 나오는 공의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운율이 있는 것처럼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라임을 타고 있습니다.

(사 62:1, 개역)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1절  1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2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1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2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절  1 열방이 네 공의를                                  2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3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절  1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2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절  1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2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1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2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1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2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절 1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2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12절 1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2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1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2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사야는 이미 다 완료된 새 이스라엘을 어떻게 봐 버렸나요
이스라엘 국가와 그 속에 있는 성전이라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졸지에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도 
안전빵 속에 있다고
거룩한 장소에 있다고 안 타죽을줄 알았는데
졸지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장소 조차도 못 된다는 것을 알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비로소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말이죠

어 그런데 심판 속에 즉 제대로 된 심판과 거룩인
계시록으로 치면 일곱 속에 들어가게 되어서
심판받아 마땅한 부정한 입술을 가진자로 죽는 줄 알았는데

부정함을 제거해 주시는 긍휼을 베풀어주시더라 말이죠

화로다 라고 울었는데
내 속에 거룩이 거하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되어
죽는줄 알았는데

그 슬픔 대신에 희락을
잿더미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주시더라 말이죠

이 탕자 같은 이사야에게 말이죠
자신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맏아들 같은 이사야 인줄
이사야 본인이 알았는데
공의가 임하니까 택도 없더라 말이죠
졸지에 탕자라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

주님의 거룩 곧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에 의해서
평준화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덮쳐지니까
비로소 울게 되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말이죠

철저하게 갇혀버린 죄인인 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죄 아래 가두고자 가입이 된 율법 말이죠
그럼 율법은 내 속에 선은 없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누구를 가리키는 화살표 즉 몽학선생 노릇을 하는 것일까요?
누구를 가리키는 화살표 입니까?
누구?

바로 율법은 이렇게 외칩니다.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치더라 말이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라고 외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안식일을 지킬게 아니라
안식일이 자꾸 누구를 외쳐요 누굴까요?
안식일 날만 골라서 병 고치는 안식의 주인을

안식이가 외치고 있는데
안식일을 지키니까 때려 죽어도 안식일이 외치는 저 분을 못 보는 겁니다.
율법을 지켰다고 안식일 지켰다고
도리어 높은 산당만 잔뜩 시온에 세우는 꼴이더라 말이죠
강도의 소굴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는 이 역사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그 속의 성전
비록 강도의 소굴 답지 않도록 깨끗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지금 이사야는 택도 없는 가짜 거룩으로는
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서
다 타 죽어야만 하는 상황인 진짜 현실 앞에 놓여지게 되니
그동안 다 엉터리였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즉 인간 쪽에서 의를 거룩을 갖추어서 다가가는 방식은 이제 끝난 겁니다.

도리어 종말을 끌어와야만 할 판국이 된 겁니다.

이 이사야의 개인의 경험이 사실상 이스라엘의 대표성으로써
곧 있으면 한 100년 뒤입니까?
바벨론 포로 라는 진짜 현실 속에 놓여짐으로써
이스라엘 국가 라는 역사는 이제 사라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가 되어도 회복 안됩니다.
이미 다 이루었는데요 뭘
그러니 가룟유다의 소원을 들어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독립운동인 곧 하나님 나라 운동 말이죠 묵시문학운동 말이죠

그 뒤에 현대사로 넘어와서 이스라엘이 독립운동을 여러 연합국에 의해
이스라엘을 회복해 본들 그거 이스라엘 아닙니다.
꼭 굳이 공산당 빼고 무신론자가 80% 넘는 무신자의 천국이라서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인 무녀의 자식이라서
그 땅에 집착을 하는 겁니다.
땅을 차지해야만 구원이 되는
메시아를 영접해야 하거든요
메시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땅을 글쎄 못 차지하고 있는 빼앗긴 상태라면
무슨 수로 구원이 됩니까
그러니 기여이 땅을 차지하고야 마는 겁니다.

결국 아무리 무신자가 많아도
그 무신자들 조차도 역사 곧 민족이라는 혈통은 포기 못하겠다는 거죠

아무튼

이사야가 이미 완료된 새 이스라엘을 봐 버린 이상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미련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사 62:2, 개역)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새 이름 으로 일컬음이 된다고 [새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이전의 이름은 이제 안 된다는 겁니다.
효력이 이제는 없다는 거죠

보라 내가 새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이미 완료를 했데요 글쎄

그런데 이전의 이름은 완료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헛된 맹세처럼 부메랑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겁니다.

그럼 새 이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시온에서 나온 공의가
잃어버렸는데 다시 되찾는
이 간극을 벌림으로써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온에서 나오는 뜨인돌 곧 공의는
빛을 비추임으로써 모든 것이 어두움이었음을 들추어냄으로써
다 죽여버리는 심판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 곧 모조리 다 평준화시키는 일반입니다.
잘난 놈도 다 죽이고 못난 놈도 다 심판 속에 집어넣어서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비로소 포로 잡혀가서 울게 만드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드는 겁니다.
슬프게 만들고
잿더미 되고 만들고
근심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곧 평준화입니다. 불도저로 다 밀어버리는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도록

잃어버리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죽은자와 방불케 만들어 놓고서는

다시 살리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
곧 산자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만이 산 자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분입니다.

나머지 인간들은 모조리 다 죽은 자의 하나님만을 좇아서
우상과 하나님을 섞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마귀에게 다 장악당한 상태였음이
마태복음 4장 마귀의 세 가지 시험에서 나타난 겁니다.

정작 예수님은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물리치시고
정작 이스라엘이 아닌
죽음의 땅인 납달리 땅 스불론 땅 갈릴리 땅에 희년 곧 빛을 비추이시는 겁니다.
곧 잃어버린 자에게 가신다는 겁니다.
다시 되찾고자 말이죠

이것이 새 일
곧 새 이름을 부여하시는 시온에서 나오는 공의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는 겁니다.

분명 땅 지명인 유대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말이죠
지명이 날라가 버리고 시공간이 날라가 버리고
새 이름만 남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어진 이름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보라 새 이름 말이죠

그래서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사단도 물리쳤다고 했을 때에
주의 이름이라는 새 이름은
정작 사단을 물리는 치는 용도가 아닌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주어진 이름이라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새 이름 곧 새 일로 인해서 나온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즉 시온에서 나온 공의 로 비추인 빛과 예루살렘에서 나온 영광 이라는
이 두 꼭짓점을 잇는 이 간극에서 나온 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입니다.

두 꼭짓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두 꼭짓점을 잇는 
선을 그어버리면 바로 변이 되지요
이 변, 이 선을 잇는 이 간극, 이 사이, 이 틈, 이 빈터가
십자가 라는 긍휼이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첫아담 곧 그저 산 영 이라는 좀비에게서는 구원이 나올수 없습니다.

(사 62:1, 개역)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살려주는 영인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구원의 횃불로써
산 자의 하나님으로 오시는 새 일을 다 이루어야 합니다.

즉 시온의 공의가 없었고 빛이 없는 패역하고 어두움이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구원자가 없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눅 9:31, 개역)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눅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3, 개역)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눅 13:34,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9:37, 새번역)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눅 19:38, 새번역)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 ㉡시 118:26』
(눅 19:39, 새번역)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눅 19:4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눅 19:41, 새번역)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눅 19:42, 새번역)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눅 19:43, 새번역)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눅 19:44, 새번역)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눅 19:45, 새번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눅 19:46,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눅 19:47, 새번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눅 19:48, 새번역)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사 2:3, 미 4:2
(눅 24:47, 새번역)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 ㉧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눅 24:47, 쉬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자 그리고 다시 1절

(사 62:1, 개역)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사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이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심을 미리 맛보기로 이사야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먼저 뜬 예수님의 노선을 선지자 이사야가 따라 하는 겁니다.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쉬지 않겠다 즉 살아있다는 겁니다.
즉 반대로 인간은 아무리 예루살렘에 살아도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멈춰 버린 앉은뱅이와 같다는 거죠
그러니 하등 이 구원에 보탬이 된 적 없는
주님이 혼자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사 62:2, 개역)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열방이 공의를 즉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내리는
율법 외에 한 의가 옴으로써 높은자 낮은자가 일반이 되는
사랑이라는 불도저로 잃어버렸다가 되찾고
사망의 권세를 멸하는 의가 온다는 겁니다.
열왕이 모든 입술이 주라고 시인하는 영광이 나타난다 말이죠
이 새일에 의해서
다 이루었다에 의해서
새 이스라엘이 그 증상물로 나타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이죠

(사 62:3, 개역)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욥기를 보면 면류관이 도리어 머리에 재를 뿌린
우는 자에게
즉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신다고
머리에 재를 뿌려 머리를 처박고
생일을 저주했던 그 욥이 
예수님을 쳐다보게 되는
신부로써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는 신랑이 왔다는 거죠

(사 62:3, 새번역)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사 62:3, 공동) 『너는 야훼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 너의 하느님 손바닥에 놓인 왕관처럼 어여쁘리라.』

즉 너는 화관이 된데요 글쎄
사람이 물건이 된데요 이것은 물건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기능이다는 겁니다.
즉 의사가 떴기에 그 의사의 기능에 의해서
환자로써의 기능을 하듯이

새 일을 다 이루신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새 이스라엘 새 이름을 갖게 된 자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에 탕자가 그러합니다.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이죠
너는 나의 왕관이다 라고 말이죠
사람이 어떻게 왕관이 됩니까 그 정도로 시적인 표현을
아주 아주 극적인 최고의 표현으로 기록하신 겁니다.

그다음이 제일 하이라이트 인데요

(사 62:4, 개역)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다시는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 이전에는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 이전에는 황무지로 만들었다는 거죠

즉 이것을 지난 시간에 접촉점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먼저 떴기에
불뱀에 물려 다 죽게 했듯이
오히려 불뱀에 물린 것이
환자가 된 것이
의사를 쳐다보게 되는 접촉점이 된 것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비정상적인 
부정적인 것이 접촉점으로써
예수님의 자작극으로써 십자가가 만들어낸 겁니다.
그것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 이라고 했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게 되어야
그 죽음이라는 사망의 멸하는 의를 쳐다볼 것이 아니겠냐 말이죠

이 의가 옳았다고 말이죠
사망의 멸할 줄 모르는 인간의 의, 인간의 거룩 실천은 가짜입니다.
뭘 해도 가짜임을 아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의를 쳐다봤기에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역사라는 시공간에서는 없고
묵시가 역사를 찢고 쳐들어오는 방식뿐이다 라고
비로소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 일반화시킨다 말이죠

자 그럼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서는 바로
그 산당들 하나 하나가 바리새인과 대제사장과 제사장 율법사 사두개인 서기관
유대인 관원(지도자) 등등
이들 사람 하나 하나가 산당으로써 작용하고
예수님만이 참성전으로써 돌 위에 돌을 나 예수도 헐고 너 산당도 헐어서
누가 삼일 만에 다시 세워지는지 보자 라는 식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시온의 산당 곧 강도의 소굴 하나 하나를 허물어 가면서
양파껍데기 벗기듯이 예루살렘을 쳐들어가시는 겁니다.(천국 침략)
이것이 진짜 말씀(산자의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이유겠죠

그러면 그 이전에는 이 예루살렘을 산당들인 바리새인이 차지하고 있어야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허물어졌다가
황무지가 되었다가 다 이루었다 라고 다시는 황무지로 놔두지 않겠고 부르지도 칭하지도 않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새 이름에서 나타난 새 일의 기능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었다의 다 이룬 증상물이 바로 새이름인 새이스라엘입니다.

그것도 이방인에게 비추인 구원의 빛이 떴기에 말이죠

(사 62:4, 새번역)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 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 ㉠히, '아주바' ㉡히, '셰마마' ㉢히, '헵시바' ㉣히, '쁄라'』
(사 62:4, 공동)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라 하지 아니하고 너의 땅을 '소박데기'라 하지 아니하리라. 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 너의 땅을 '내 아내'라 부르리라. 야훼께서 너를 사랑해 주시고 너의 땅의 주인이 되어주시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헵시바
아가서가 여기에 해당 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신부 라고

(아 2:10,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즉 버림받은자 였는데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여인이 되었다 라고
잃어버렸는데 다시 되찾게 된
이것을 의 이라고 했다 말이죠
찢으셨으나 다시 꿰매어 주시고
치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것이 바로 쁄라 
마침 야다 라는 말과 연관되는가? 싶었는데 누가 연관되는 의미로 설명을 하던데
즉 야다 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듯이
(호 4:6, 개역)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 11:9, 새번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합 2:14, 새번역)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 위에 가득할 것이다.』

[안다, 알다] 라는 것은 머릿속에 집어넣는 지식적인 학문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남자를 안다 곧 성적인 동침을 말한다 말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 이지 아가페가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임금 되어 주지 않겠다고 도망쳐 버리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수 없고
도리어 예수님이 너를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
곧 절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오병이어의 남은 12 광주리가 바로 새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임금 삼고자 예수님을 좇은 자는 예수님이 도망칠 정도로
나는 너의 남편이 되기 싫타 라고 도망치시고
반대로 나는 너의 남편이 되겠다 라고
죽기까지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다 내어주시는 분에게서 나온 것이
바로 신부인 아내 곧 새이스라엘 12 광주리,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잉여)이다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 곧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구역을 유대인들이 절대로 가지 않고 삥 둘러 가는
그 버림받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아내로 삼겠다고 말이죠

이 잃어버림 이라는 비정상적인 부정적인 것이 접촉점으로써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 이렇게 사랑 곧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겁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절

12절 1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2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1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2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사 62:12, 현대어) 『이제부터는 세계 만민들이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며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백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너 예루살렘의 이름도 `하나님이 찾아오신 도성'이라는 뜻으로 `드루샤'가 되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지 않은 도성'이라는 뜻으로 `이르로네에자비'가 될 것이다.』

바로 지난 시간에
눈물을 씻겨 잔치를 베푸시는 여호와의 구원 (사 25, 1-12)
[단절의 여호와의 신]과 [신원의 날] (사 61, 1-11)

눈물 곧 단절이, 잃어버림이 접촉점이 되듯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거룩
도리어 인간의 본질은 다윗처럼 정직한 영이 없는
항상 주의 목전에 항상 죄 밖에 없는
산당만 가득한 죄인 일 뿐임이 들통나는 데 있어서

비로소 정직한 영이 없다고 상한 심령이 되었을 때에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했을 때에

비로소 3초도 안되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네버 정죄함이 없다고
졸지에 이 부정한 입술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로 인해 다 씻겨짐으로 인해서

졸지에 탕자가
거룩한 백성이라고
거룩이 없는 개 같은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구속이 떴기에
여호와의 구원이 떳기에
이유 없이 무조건 잔치를 벌리심으로써

눈물 흘리는 자에게 눈물을 씻겨주는 혼인잔치를 벌리시는 겁니다.

눈물을 흘려서 혼인잔치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
혼인잔치가 먼저 떴기에
눈물 흘리는 자 곧 탕자를 베드로(오죽하면 닭을 세 번 울게 만들어서라도)를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 두 렙돈을 바친
전재산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머리로 씻긴 창녀 마리아를
간담이 녹아 40년 동안 여호와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면서
자기 재산도 아닌 자기 나라 토지, 집문서, 전국 국토 전국 전체를 냅따 팔아버린 기생 라합을

예수님의 구원이 먼저 떴기에
이들이 이 새 일의 증상물로써
새 이름 새 기능으로써 새 이스라엘 첫사랑으로써 나타나도록 하신 겁니다.
첫사랑은 이유 없이 무조건 용서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았던 때가 바로
처음 사랑이다 말이죠
그 처음 사랑의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이듯이
평준화로써 발생한 우발적인 집단이 바로 새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심으로써
값없이 구원받은 자 말이죠

이 관계를 새 일을 다 이루신 예수님에 의해
새 이름을 받은 자
곧 다시는 황무지
버림받은 자로 부르지 칭하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나타나는 자들인 겁니다.

얼마나 주의 십자가가 또렷했으면
아무런 조건 없이 나타날 정도로

주님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으로써
나타난 구원 이기에
그 당위(기능)로 인해
나누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피로 묶인 신랑 신부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