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 압축파일 올립니다 다운 받으셔서 푸시면 됩니다.

2019십여수(이사야강해,말씀의움직임).zip
0.27MB



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이사야 ; 말씀의 움직임)

십자가 마을 수련회 안내

여름수련회 안내일시: 7. 28(일)~30(화)

장소: 가야산호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제목: 말씀의 움직임 (이사야 강해)

강사: 이근호 목사

회비: 참가비 : 10만원 (유치, 초등 5만원)

수련회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7월 20일까지 해당 지역 담당자께 신청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역 담당자께서는 21일까지 알려주세요. 
(명찰 제작 및 방 배정을 위해서 성명, 성별, 직분, 교회명 등을 파악 바람)

-------------------------

서울 경기지역 : 이미아 성도 (010-9998-4171)

부산 경남지역 :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지역 :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지역 :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지역 : 김종인 집사 (010-8808-7111)

강원 지역: 정인순 목사 (010-2676-6823)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2019 여름수련회 교재

말씀의 움직임

               말씀의 움직임 

         -이사야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정신치료와 현실치료 

(1)개인적 정신치료 

정신적으로 문제를 느끼는 환자가 자신을 치료해 줄 치료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욕망의 반복되는 문법에서 특정 부분이 삶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반복되는 패턴이 주체의 환경과 충돌하는 경우이다. 또는 주체의 마음을 찾아온 뜻밖의 새로운 욕망이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욕망의 구조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치료자는 분석 주체에게 자유로운 발화를 유도해냄으로써 그가 사로잡혀 있는 욕망의 반복적 패턴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게 된다. 환자의 무의식이 어떤 문법으로 표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치료자가 사용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자가 소유한 정신분석 이론은 단지 일반론이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각각의 환자가 소유한 고유하고 특수한 문법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포기해야 한다. 신경증의 히스테리나 강박증에 관한 지식은 단지 환자의 무의식에 접근하는 단초의 역할 이상은 될 수 없다. 치료자는 환자의 말 속에서 무의식의 문법에 연결된 지점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치료자의 주체 역시 이 같은 시도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그 역시 치료자가 주목하는 말의 지점들-말실수의 기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단어, 배제되거나 우회되는 단어, 수렴되는 단어, 또는 특별히 과도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은폐된 무의식의 담화로, 과도한 향유의 중심핵으로 접근하는데 참여한다. 

그리하여 근본환상이라 불리는 최종적인 기호 연쇄에 도달하게 되면 이른바 공백의 연안에 이르게 된다. 이때 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욕망의 건축물을 구성하던 마음의 기둥들이 초라한 환상에 근거한 지푸라기였다는 사실에 직면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분석 주체에게 일종의 각성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분석 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신화가 몰락하는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도, 끝도 아니다. 분석은 계속 진행된다. 왜냐하면 분석 주체는 자신이 도달했던 무의식의 장소를 다시 부인하고 억압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환자의 자아는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환자가 공백에 도달하는 횟수를 늘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반복이 가져올 효과가 치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공백에 도달하는 반복 속에서 분석 주체의 의식에 다른 기표가 개입해 들어오는 우연적 사건이야말로 치료의 핵심이다. 

이미 환자는 주어진 자아의 좌표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것을, 제아무리 또 다른 억압을 불러올지라도 어쨌든 새로운 현실 지배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제 환자는 하나의 자아와 그것을 생산해내는 현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다. 정신분석 임상으로 환자가 경험하는 이러한 빠져나감은 이후 또 다른 대타자의 권력과 그것이 야기하는 환상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한 존재를 가능하게 만든다. 

환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고정된 자아로서가 아니라 텅 빈 공백으로서,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균열의 틈으로서, 혹은 아주 상식적인 표현을 쓰자면 미래를 향해 개방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파악하는데 익숙해질 것이다. 

여기서 환자는 자신의 무의식의 문법을 구성했던 핵심적 단어연쇄 구조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치료가 되는 마지막 순간은 증상이 소멸되는 순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분석의 끝에서 증상은 주체에게 긍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증상을 지탱하던 기표 배열의 변화를 모색하는 분석은 증상 자체가 주체의 삶을 지탱하는 쾌락의 지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환자 자신이 비로소 자신의 증상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충동의 자리에 접근하여 그것이 발휘하는 힘을 새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충동과 주체 사이를 가로막는 법의 장벽들을 넘어서야만 한다. 위반을 장치화하는 임상이란 바로 이것을 법이 남긴 장벽을 위반하고 넘어설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도달된 공백, 충동의 가장자리에 새로운 자기 설명을 성사시키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자에게 갑작스럽게 부정적인 전이감정을 드러내며 분석을 중단하려고 할 경우, 이는 낯선 사실에 대해 분노의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치료자의 해석이 환자의 무의식적 충동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해 계속해서 딴소리만 늘어놓을 경우 환자의 의식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환자의 무의식은 새로운 현실이 주는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다. 

현실의 볼트가 낯설게 다가선 새 현실의 너트에 들어맞지 않아 헛도는 경우에 감정적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보다 일반적인 경우로 확대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분노란 무의식적 충동이 적절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의 흐름과 연결되지 못할 때 출현한다. 따라서 분노조절장애는 엄밀한 의미에서 충동조절장애라고 불리는 것이 정확하며 이에 대해서 언어적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로 인한 긴장을 다양한 대화의 실천을 통해 완화하도록 하는 것은 무의식의 충동을 지표의 풍요로움에 개방하는 효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치료법들은 단지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환자의 충동을 설명하는데 실패했던 것은 의식차원의 어법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도 몰랐던 과거 기억의 어법 때문이다. 

유년기에 충동을 둘러싸기 위해 형성된 무의식적 대화 패턴이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을 경우 환자의 분노조절장애는 외부의 특별한 영향 없이도 증상으로 출현할 수 있다. 이 경우 환자의 충동을 포획한 근본환상의 지점으로 하강해 들어가는 정신분석 임상의 절차만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환자의 무의식의 중핵에 존재하는 충동과 이를 사로잡는 최초의 설명들이 서로 헛돌지 않도록 위치를 조율하는 것이 곧 분노조절장애를 해결하는 유일한 정신분석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동과 관련된 이 모든 논의에서 치료자는 결코 환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환자가 우울증을 호소한다면 충동을 우회시킬 자기 설명들의 연쇄기능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실제 사건 때문에 그러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세로토닌의 결핍으로 우울 증세를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울증과 관련한 세로토닌의 감소는 그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다양한 단어들을 사유에 참여시켜 충동을 억압하는 현실적응 기능에 장애가 일어난 것이 우울증의 원이이며 세로토닌의 감소는 그 결과이다. 격렬한 운동이 원인이 되어 엔돌핀이 발생하는 것이지, 엔돌핀 때문에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따라서 환자에게는 항우울증제라는 약물 처방이 아니라 단어 연쇄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욕망이 단어 연쇄의 끝없는 표현 기능 속에서 갈아탈 수 있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단어들이 필요하지 억지로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2)현실치료와 그 한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병리적이라면 어떤 식으로 치료가 가능할까? 세상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내뱉은 상징물로 스스로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 병리적이다. 

인간 문명의 시작도 상징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발길이 쉽사리 닿을 수 없는 깊은 동굴의 벽과 천장에 이미지들을 빼곡히 그려 넣으면서 고대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 당시 인류가 욕망했던 성스러움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현실적인 질서를 초월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표현인데, 그 대상이란 묘사될 수 없는 것,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 오직 공백의 형태로만 출현하는 무엇이다. 

이러한 관점은 동굴벽화를 그렸던 선사 인류의 행위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며 벽화를 일종의 제례 의식적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한다. 인간의 심리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불안의 감정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예술과 제례의식은 모두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려는 실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세계의 이미지는 충동이 발생시키는 부정적 효과, 즉 불안의 감정이 메아리치는 스크린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불안의 근원을 테두리 치고 가두며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동굴벽화의 이미지들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백의 심연을 벽화로 둘러싸는 과정에서 인류는 세계에 대한 불안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어하기 위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백을 억압하려는 방어적 행위, 강박적 행위만은 아니다. 깊은 동굴의 심연으로 내려가 벽화를 그리는 실천은 또한 불안의 공백을 드러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림 그려진 장소가 음침한 동굴이기 때문이다. 텅 빈 심연을 이미지로 둘러싸면서 인류가 출현시켰던 성스러운 공백은 또한 세계 너머의 초월적 영역을 표상하는 듯 보인다. 

동굴벽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심연에 숨겨진 공백을 드러내는 동시에 억압하는 예술의 가장 원초적이며 기원적인 기능을 암시한다. 이 모든 행위의 가장 주요한 감정적 불안은 인류에게 ‘성스러움’이라는 특별한 감정으로 다시 해석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는 동시에 불안 자체를 향유하는 승화의 특수한 양식이었다.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은 바로 이것, 성스러운 공백을 중심으로 구성된 승화의 다양한 형식들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동굴 천장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신을 ‘보이지 않는 거주민’으로 간주해서 현 인간이 사는 현실에 소속시켜주고 그렇게 해서 신을 고정화하려는 기능하다. 이 ‘함께 살게 된 신’이 큰 능력으로 자신들을 응시하며 지켜주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현실은 어떨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사상이 지닌 ‘보편성’이 진리로 행세한다. 이 보편성을 구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국가주의다. 고대인으로부터 흘러내린 동굴 신화적 요소가 정치사상 안으로 전수된다. 이것이 국가주의를 지탱한다. 이것은 환상이며 그들의 권위는 텅 빈 동굴 속처럼 공백이다. 하지만 이 텅 빈 내용을 감추고자 하는 방식으로 국가는 비로소 국가로서 가동이 되고 유일한 절대기관으로 행세한다. 

쉽게 말해서 국민들을 하여금 안심하고 믿을 만한 ‘믿음의 토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병리적 증상이다. 이 믿음의 연결망은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 상호 통한다. 즉 “내가 믿고 있는 이 절대적인 것을 다른 누군가도 어디선가 여전히 믿고 있을 것이다”는 여론 조성으로 절대적 보편성을 유지토록 작동한다. 신념의 연대이다. 

텅 빈 이 세상이 인간들의 연결된 믿음 망으로 충만해진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완전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전에 보이지 않는 위협 요소들이 자꾸만 발생되는 것이다. 이 우연적 요소를 강제로 메워 절대적 보편성을 지탱하려고 힘쓰는 가운데서 현실이 주는 불안 증세는 집단적으로 퍼져나간다. 

오늘날 주체들이 인식하는데 실패하는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이다. 정치사상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을 구성한다. 포괄적 정치사상은 사회적 적대의 부정성을 가려 감추는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을 계속 상징적으로 재생산하고 구조화한다. 

환상은 완전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빈틈을 억지로 메우는 것이다. 아무리 완전하고 절대적이라고 상상을 해도 그러한 노력은 헛되다.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은 억압된 빈틈이 언제나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종로 바닥에 깡패들이 설치고 다녀 민생에 지장을 주기에 일본 경찰이 나서서 깡패들을 소탕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당해 보이는 조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을 계속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사상은 여전히 병리적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세상을 제대로 치료해서 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적 명분과 시도들이 오히려 초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세상 변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짓인 것이다. 이 사실이 병리적이라서 세상은 세상 힘으로 스스로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스스로 주체로 자임하는 국민정서에 비추어 볼 때, 고정되고 불변하는 현실을 갖기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폭력을 함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속한 권력은 절대 권력이어야 이 주체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보다 과도해지는 동일화와 통일성에 대한 환상으로 말미암아 자꾸만 적들을 찾아내고 되고 도처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했다고 우긴다. 언제나 가공적 타인을 위조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불안해한다. 

모든 절대적 힘이 자기 쪽으로 와서 완결해야 한다는 욕망이 멈추지 않고 갈수록 급해지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적절한가를 따질 보편적 기준도 없다. 단지 ‘내가 그것을 원한다.’로 논리는 마감된다. 보편성에 핑계를 대다가 결국에는 자기 절대성으로 모든 것이 닫히는 것이다. 

매사가 비일관성으로 흐르는 환경 속에서 강제적으로 일관성을 고집하는 것은 주체가 패권추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방식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개인적으로 세상도 모두 ‘끝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상대로 해서 심판자로서 우위에 서는 초연함이 주는 자기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말씀의 실재성이 주는 여파에 심하게, 정신없이 호되게 당하라는 말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조성해 온 게 아니었다. 인간들은 인간들을 상대로 하지만 성도만은 이미 하나님 세계와 접선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내리신 맹세를 이루는 과정에서 성도는 감겨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 6:13)” 

이는 곧 성도에게 있어 ‘자기 치료’나 ‘현실 치료’ 같은 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이다. 말씀으로 인해 죽은 자로 가담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말씀의 실재함으로 인해 성도를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말씀의 주인공에서 인간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말씀이 인간을 겨냥해서 찾아오는 것 같지만 말씀은 늘 잠긴 상태를 유지한다. 말씀이 먼저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취지를 쉬운 예로 설명하면, 멀쩡한 피부 위에 화상 연고 바르고, 그 다음에 실제적으로 그 부위에 화상을 입도록 하여 미리 발라놓은 화상 연고의 효과와 능력을 나타내려는 일련의 의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성도를 말씀과 직면하여 죽은 자로 간주하므로 써 성도는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떠   안게 된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순간,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다. 떨기나무에 불이 타면 이미 그 떨기나무는 ‘죽은 나무’가 된다. 하지만 그냥 죽어 있는 나무가 아니라 ‘불이 꺼지지 않고 타는 형식의 죽은 나무’다. 

이런 나무의 모습이 모세의 실존이 되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낸 형상이다. 그래서 ‘말씀의 살아계심’을 위해 말씀을 접했던 자는 이 땅에서 ‘죽은 자’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노선에서 등장한 선지자다. 그래서 그의 할 일은 ‘치료’가 아니라 ‘확정된 심판’이며 ‘말씀 세계의 공격’을 예고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모든 것을 말씀대로 갈아엎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죽음’에 참여된 자만이 메시야를 증거하는 용도로 새 삶을 산다는 것이다.  

 Ⅱ 본론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현 역사에 있어 두 극단을 체험한 자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남(南)의 유다나 북(北)의 이스라엘이나 가장 국력이 신장된 그 시절을 통과했으며 예언 활동을 하던 무렵부터는 양대 국가의 영웅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남:웃시야 왕이 죽었고, 북: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라 국내적으로 통치권에 공백 상태를 초래했고 대외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이 출현하여 바벨론과 시리아를 정복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주변에 정치적 힘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엿보인다. 이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평성대를 누리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가장 안일할 수 있었던 시기에서 갑자기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못하는 시기로 변한 것이다. 이런 시기에 누가 나서서 이런 상황을 해명해 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과연 왕이란 존재는 무엇이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선택하여 영영히 왕의 지파로 고정시키신 그 약속이 이러한 위기 정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명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가 보낼 선지자에게 자신의 본심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6:1-13). 

그래서 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 언약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정정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왕과 다윗 언약을 새롭게 정리하는 길만이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극도의 사치를 안겨 주었던 소위 능력 있는 왕(?) 웃시야가 죽던 해에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그것은 곧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가 있었다. 그 거룩과 영광과 위엄은 이사야로 하여금 성전이 안고 있는 최후의 경지를 말해 주고 있고 도달점을 보여준 것이 되었다. 이사야는 그 성전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그리고 그 보좌에 비춰서 자신을 살피게 되었다. 거기에서 자기가 발견한 것은 자기 부정이었다. 

이러한 추함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는 불같은 화요 영원한 멸망뿐임을 실감했다. 이러한 선지자의 경험은 불법과 불의로 충만한 세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이 어떤 차원에서 수행되는가 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율법이니 다윗언약이니 하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본래의 의도를 밝힐 수 있는데 그 취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위해 언약을 남겼으며 그 언약 본래의 의도를 이루기 위하여 인간에게 기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그 자를 위한 언약임을 알려 주고 있다. 

결국 언약이란 인간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도한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한 것이다. 특히 이사야가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정화될 자, 혹은 이미 죽었다고 말씀으로 규정된 ‘남은 자’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사야가 활동할 시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미래에 되어 질 일이다. 여하튼 언약의 제공은 하나님의 선택이 결코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조건을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그 언약의 복과 상관없음을 인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이사야 7장에서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유다를 치고자 하는 일 가운데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치고자 하는 것은 유다 왕 아하스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아하스가 아니라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이다(7:3). 스알야숩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존 왕들이 알고 있는 다윗언약관을 부정하고 변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 와중에 징벌이 삐져나온다. 7:11에서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고 한다. 그 때 아하스 왕이 하는 말이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한다.

결국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윗과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하스 왕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니까 징조를 구해도 징조가 나타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 유다 나라 왕 체계와 혈통은 아하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윗 가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주장이 가능한가? 이사야가 웃시야 왕 죽던 해에 성전에서 본 그 거룩의 보좌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약속은 인간의 부족으로 취소된다는 것인가? 아니다. 다윗 언약은 스알야숩으로 전수되어 유효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7:13-17에 보면 스알야숩에게 기대를 거는 이사야의 ‘나의 하나님’과 아하스로 대변되는 ‘너의 하나님’으로 나눠지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등장한다. 

그 진위를 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사야처럼 또 성전에서 거룩을 보여 준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다르다. 거룩을 보여주되 다른 징조로 그 거룩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는’ 징조다. 이 징조로 인해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다. 즉 ‘너와 나’로 나눠지기 이전 상태인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왕족이라는 거창한 가문을 따라서 다윗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존 왕권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 아기를 통해서 다윗 언약이 성취된다. 

미래에 있게 될 다윗 언약은 인간들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성된다. 이스라엘이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홍해의 갈라짐이 인간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 아니듯이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능력에만 신뢰를 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앗수르 침범은 임마누엘의 성격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며(10:24), 하나님 보시기에 선택될 남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 돌아오는지를 알게 한다(10:20-22). 기존의 이스라엘이라고 자처한 자들이 그 임마누엘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파멸되며(8:15) 오히려 말씀권 밖에 있기에 흑암과 고통의 이방 지역이 복음 지역으로 달라지고 빛이 비쳐 나온다(9:1-4).

다윗 반열은 그들을 통해 이어진다(9:7). 그래서 현 이스라엘과 유다를 애굽으로 간주하고 그 가운데 남은 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 다윗 나라를 구축하게 된다(9:13-21/ 11:1,11,16). 따라서 임마누엘의 기능은 현 이스라엘로부터 참된 이스라엘을 분리해 내는 것이며 현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죄함으로 그 작업을 이행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백성 아닌 자를 백성 삼으심으로 말미암아(19:24) 이스라엘이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여호와께 대한 죄책으로 간주하는 누구에게나 다 해당이 되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이 임마누엘로 말미암아 다시 전 세계를 통치할 때가 오면 세계는 여호와의 천지가 된다(11:9).

그 때에 창조도 동시에 일어나는데(65:17/45:7-13/45:18/48:12) 그 창조는 새로운 여호와의 종에 걸 맞는 양상으로 일어난다. 새 창조에 대한 언약적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있었던 언약가운데 창조가 두 번 일어난다는 대목이 어디 있던가? 이사야는 대체 무엇 때문에 새 창조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인가? 옛 질서를 하나님 스스로 파괴하시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64:6-8에 나와 있는 대로 죄를 정화한다는 차원에서의 의의 창조에 따른 후속 조치이다(45:8).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사야의 계시의 흐름은 유다를 움직여 이방인들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의 정당성까지 확보하는데 이른다. 그 통치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심판으로 작용되는데 그 심판 행위 뒤에는 새로운 세상의 창조가 기다리고 있다. 

새 창조질서 건설에 따른 언약적 근거는 의의 창출, 즉 언약이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에 대해 마땅히 주어지는 결과이다. 이 흐름을 좀 더 분명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맨 먼저 유다의 실책에 대하여 나온다. 자기를 양육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1:3), 그리고 헛된 제사를 드리는 것(1:13-14), 우상 숭배하는 것(2:20),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23) 등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닌 본래의 영광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웃시야가 죽고 난 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만 자신의 영광을 성전을 통해서 공개하는데 이는 영광을 본 자가 바로 유다에게 멸망을 선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의 기능에 관한 것으로 유다는 언약으로부터 제외되고 남은 자만 그 언약에 소속될 것이다(7:3). 

그 남은 자를 가려내는 징조로서 임마누엘이 나타날 것이다(7:14). 또 임마누엘은 참된 남은 자를 버림받은 땅에서 찾게 된다(9:1-7). 그들의 주가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과 또 유다는 징벌 받아 마땅하다(9:12). 비율법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은 앗수르를 통해 이루어진다(10:5-7). 그리고 징벌에 가담한 앗수르도 같은 기준에 의해 징벌 당한다(10:12-15). 

이 사실은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 책임을 져야 될 입장에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 공의로 인한 징벌의 와중에 비로소 남은 자만 드러나게 된다(10:20-23). 그 남은 자가 기대하는 약속은 다윗언약의 회생에 관한 것이다(11:1-15). 진정한 왕은 바로 남은 자와 연관을 지으며 역사 속에 나타나시는데 그분이 바로 제 2의 출애굽을 이루실 분이다(11:16). 

이사야에서의 다윗언약은 창조언약의 성취를 포함하고 있다. 진정한 안식을 이 언약이 이루어 준다(12:1-6). 이러한 미래를 위하여 앞서 이루어질 행위는 언약적인 기준에 의한 단호한 심판이다. 바벨론, 블레셋, 모압, 구스, 애굽, 에돔, 아라비아, 두로 이러한 나라들에 대한 창조가 가지고 있는 공의적 차원에서의 심판은 결국 다윗언약의 완성이 곧 창조언약의 완성과 같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묵시적인 모습으로 심판이 진행되는 것은(24:3,21,23/25:11/26:5,
14/27:1) 역사 이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의중이 비로소 역사 안으로 노출됨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서의 구원도 시온을 중심으로 하여 다윗언약 방식으로 이루어진다(28:16).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예루살렘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29:1,5).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은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케 한다(29:22). 이러한 미래상을 알지 못하니 현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는 범죄를 저지른다(30:3/31:1-3). 
 
그들은 애굽 대신에 진정한 왕과 성신과 여호와의 나타남을 고대해야 한다(32:1/33:17/32:15/ 33:21-22). 바로 이러한 기다림에 마음을 둔 남은 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된다(34:14). 

천지가 사라져도 그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천지가 주어진다(35:1-10). 이러한 예언이 있은 후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가 유다를 공격한다.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있어 왕의 의미를 재확인한다. 왕 즉 여호와의 종과 이스라엘의 구원과의 관계는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38:11).

여기서 제대로 중보 역할 할 수 있는 중보자적 왕을 고대하게 된다. 예언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떤 절실함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왕이 회개할 때 적은 물러갔으나 그러나 히스기야가 자기의 가진 것들에 기대를 걸 때 유다를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게 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전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새로운 약속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약속은 바로 창조하신 하나님(여호와 아님)으로 부터 나온 약속이다(40:12-26). 그러나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을 조성하고 선택하여 불러낸 여호와 하나님이다(40:28). 여호와는 새로운 출애굽에 앞서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생각하고 있었다(41:9).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다루어왔던 그 선택적인 특별난 언약의 방식을 전 세계에 적용하고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창조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속에 관여한 구속의 하나님 방식을 빌어서 탄생되는데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만들기 위해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이용하고 바벨론의 고레스 왕이 메시야 역할을 하게 된다(45: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조성하시되 자신의 형상(여호와의 형상)을 담게 하신다(44:24).

이스라엘을 잡아 간 바벨론이 오히려 도망가게 생겼다(43:14).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로 다스려 나가려고 한다(45:8,13). 이 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계속 이스라엘로 지탱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45:8). 그 의로 또한 구원을 이룬다(45:22).

이러한 의의 등장은 역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46:3-7). 이러한 차원에서 바벨론의 구출은 이루어진다(47:1-7). 뿐만 아니라 현 이스라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48:6-7). 그 새로운 일이란 여호와의 종이 하실 일이다(49:5-7). 그 종이 새로운 언약으로 등장된다(49:8-13). 

그 종은 꼭 여호와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나시는데 마치 여인이 젖먹이 자식을 대함같이(49:15) 대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학대하게 된 것이다.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뺨을 치며 침을 뱉으면서 말이다(50:6). 그러나 모든 율법이 그 분에게서 나오게 되며(51:4) 의도 나오게 된다. 그 의가 구원을 이룬다(51:5-6). 

또 그분이 역사의 타락의 배후 조정자인 용을 멸하게 된다(51:9-10). 이로써 그분이 구원을 완성시킨다(51:11). 이것은 바로 복음, 구원을 가져오는 좋은 소식이니 이스라엘은 여기에 눈을 떠야 한다(51:17/52:1,7).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분을 대할 때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는데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여호와의 종이 존귀를 받을 것이다(52:13-53:3). 그분의 그런 비참한 모습은 사실상 자기 양을 위하여 죄책을 대신 지신 속건제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53:4-10). 그 여호와의 종과 연관이 있는 자는 이제 그분의 신부 자격으로 창조된다(54:4-10). 이 언약은 창조의 언약을 능가하는 확고한 것이다(54:9-10). 그 이유는 노아 언약적 내용을 빌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또 다윗언약 같이 조건 없는 무조건 언약이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진다(55:1-5). 여호와가 제시한 명예를 건(55:13) 언약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와 구원이다(5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러한 언약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무리가 있지만(57:3) 반면 통회하고 겸손한 자는 여호와로부터 거룩함을 입을 것이다(57:17).

그리고 참된 금식이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랑에 감사해서 주린 자에게 기쁨으로 음식물을 나누어주는 것이다.(58:3-7) 참된 안식도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일을 기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죄의 개념을 새롭게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죄이며(59:6)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막아 왔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구속자는 임하는 것이다(59:20).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은 빛나고 만국 중에 일어나게 된다(60:1-3). 모든 민족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몰려온다(60:5).  이들은 이제 해와 달의 빛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다(60:19). 또 그들에게만 땅이 영원히 돌아간다(60:21). 

그 때가 언제일까?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한 그분이 등장될 때이다. 그분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와 포로 된 자에게 은혜를 선포한다(61:1-3).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창조를 능가하는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61:10). 드디어 열방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되며 공의를 보게 되며 땅과 더불어 혼인을 하게 된다(62:5). 

이제 그분은 심판에도 관여하는데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적들에게 복수하신다(63:4). 이 사건은 마치 옛날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것과 같을 것이다(63:11-13). 우리는 다 죄인들이고 스스로 주를 붙잡지도 않았지만 진흙을 빚듯이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구원이 가능했다(64:6-9/
65:1). 다 죄인들이지만 그 중에 택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65:6). 다른 이들은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살육을 당한다(65:12). 이러한 심판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된다(65:17).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홀로 이루신 것이다(66:2). 이스라엘이 시련을 당하기 이전에 이미 이 분(남자)을 따르는 자국민이 생겨났다(66:8). 그들은 그와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와 함께 슬퍼했기 때문이다(66:10).

새 하늘과 새 땅과 함께 선택된 자도 제대로 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채워진다(66:21-22).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불로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었다(66:15,24).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과 연관되어 있다. 이사야가 보았던 그 거룩 말이다.

Ⅲ  결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직도 나 중심이 해체되지 않았다는 말이며, 이는 곧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대결상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내가 세상사는 즐거움이 훼방 받고 감소되는 것을 느끼며 내부적으로 분통이 일어난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내부적으로 공격성이 은밀한 가운데 증강되기 때문이다. 이사야에서 보여주시는 예언은, 인간 세상 전부가 벌써부터 이런 공격성향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점을 폭로함과 동시에 여기에 합당한 조치인 심판을 기정사실화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참을 만하면 끝까지 견디는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언을 함축한 새로운 존재자(아이)를 언약 완성 차원에서 세상에 침투하게 하므로 써 말씀에 입각한 심판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임을 분명히 하신다. 

심판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합당한 행사다. 그 전에 이 지상에 근거를 확보하시려는 것이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메시야가 합류한 세상’을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말씀 완성은 지상을 통해 그 완성된 본질이 개방된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시 85:10-11).”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