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6-02  피5강 죄를 지적하는 대신 피 흘리심

(그냥 피흘림아닌 죄로 인한 피흘림과 죄를 지적하는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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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조(강퍅vs긍휼) 완료 로써의 피 흘리심

두 구조

땅의 구조이냐? vs 천국 구조이냐?
역사냐? vs 묵시냐?
선악나무냐? vs 생명나무냐?
진노의 강퍅이냐? vs 긍휼의 선하심이냐?
아담 안? vs 예수님 안?
[이미와 아직] 이냐? vs  [이미 완료] 이냐?
인간 존재 부터 인 역사 이냐? vs 인간 존재 없음의 창세전 묵시 이냐?

한 발짝 도 벗어난 적이 없는 에덴동산의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의 두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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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602피p016죄를지적하는피흘림

피 5강 그냥 피흘림아닌 죄로 인한 피흘림과 죄를 지적하는 피 (대신 피 흘리심)
 
[09 대구강의 10] - [피 5] - 죄를 지적하는 피흘림
                                                                                
                                                           09,06,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을 향하여, 고고 !!

오늘은 교재 16페이지를 살펴보자.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할 한 분을 보내셨다.

이 문장 자체는 아주 간단하지만,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우리 인간들은 여기에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을 항상 시도했던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야기했기에 말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일단 말씀이 있는데,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해줄 선지자가 있으니, 즉 모세의 십계명이나 제사, 성전과 같은 율법 등등,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라고 하신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있는 이상,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에서 할 다니엘서나 스가랴서 같은 선지서들이 있으니 말이다.

인간들은 이렇게 갈 수 있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외려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할 분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간은 이쪽으로 들어가는데, 예수님은 저쪽으로 와버리셨다는 것이다.

◈ 우리는 죄인이 아니야 !!

그러니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기준인고 하니, “죄는 결코 아님”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선지서와 같은 것이 있고,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결코 죄는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전제 아래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나는 죄인이 아님” 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는 죄인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말씀을 지킴으로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전체구조가 결코 죄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여기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은 싸움의 책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한 분을 보내셨는데, 하지만 그 하나님은 보이지를 않기 때문에 여기 윗동네에 그냥 계시고, 아랫동네에서는 두 개의 대립되는 의견충돌이 일어나는데,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 아주 치열하게 전개가 되는데, 12장까지 그렇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축제인 초막절에 깽판을 놓으려 올라가셨고, 또 8장에서는 “너거 애비는 마귀다” 라고 했고, 9장에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거부하는 인물을 하나 등장시켜서, ‘안식일’ 이라고 하는 그들의 율법의 마지막 보루를 그만 무시해버렸는데, 즉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또한 10장에서는 거짓목자 이야기를 해서, 아예 그들을 사기꾼으로 간주해버렸고 말이다.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울고 있으니, 울지 마라고 하면서 윽박질렀고 말이다. 그리고 12장에서는,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고 하시고, 또한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영광만 취한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 13장부터는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천국의 구조물 !!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객(客)이 되는 것인데, 저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최근에 어떤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고 하니까, ‘천국의 구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의 구조라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가 이미 어떤 구조화가 된 정신세계 안에서 자기가 자라나고 있고, 거기에서 한껏 배우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자기가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의 복음서들을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던 것들에 의해서 세뇌를 받고 영향을 받아서 그 유행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하면서 헌화를 하듯이, 그렇게 따라한다는 것이다. 물론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바로 이 세상의 그런 것이 하나의 오락이고 취미라는 말이다.

그러한 것이 이 땅에서 이미 구조화가 되었다고 하면, 즉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님” 이라는 구조가 있다고 하면,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낼 때는 기존의 이 세상의 것과 정반대가 되는 구조로서 보내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왜 자꾸만 ‘구조’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이 구조를 모르고 자기가 알아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니, 역시 예수님도 자기가 알아서 믿는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독자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는 자기가 알아서 산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 왜 ‘구조’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지만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권면 등은 전부가 다 이러한 천국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대가 예수님을 믿었는가? 이제 잘 걸렸다. 지금부터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해야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말이다. 잘 알겠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그분에게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 글자로 ‘교회’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여럿’ 인데, 그런 여럿을 두고 교회라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임이라는 의미이니 말이다. 교회가 그러한 모임이라고 한다면, 결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말이다.

◈ ‘나 홀로’가 아닌, ‘여럿’ !!

그러니 이러한 ‘나 홀로’ 라는 개념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그런 개념이 형성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도,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자기 혼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웃사랑이나 형제사랑이 왜 있겠는가? 자기 혼자 달랑 천당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이웃이나 형제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니 ‘여럿’이 성립되려고 하면 개인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가? 먼저, 이렇게 개인이 남아있어서 여럿을 상대하게 되면, 그 여럿은 개인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존재하는 타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나는 너를 사랑해줬어. 너에게 할만큼 다했어” 라고 하게 되면, 아무리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해도 역시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악마의 최후의 속삭임 - 나는 나다 !!

바로 이러한 “나는 나다” 라는 것이 악마가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것인데, 예수를 믿든지, 교회에 다니든지 간에 아무튼 “나는 나다” 라고, 그렇게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즉 “내 인생이니, 내가 알아서 살겠다” 는 말이다. 이것이 99.99% 순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 목사들의 본심인데, 그러니 결국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말이다.

물론 교인들도 목사들 못지 않은 99.99%의 순도를 자랑하는데, 즉 그 목사에 그 교인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제 아무리 성경말씀을 공부해도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한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녀도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이미 이 세상에 악마에 의해서 구조화가 !!

그렇다면 이렇게 천국을 구조 덩어리로 본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 동안은 왜 몰랐는가? 바로 그것은,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똑똑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줄로만 알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악마에 의해서 이미 구조화가 된 상태에, 그런 상태에 우리가 놓여있기에,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이 이미 구조화가 되었기에, 여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자신들의 구조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해서, 즉 “당신은 홀로 존재하는가?” 라고 비난을 받았는데, 소위 요즘 말로 하면 “니가 통뼈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 예수님의 구조 - 그리스도의 몸 !!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내뱉으셨는데, 그 예수님의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구조가 형성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나중에는 ‘교회’ 라고 하는데 말이다. 예수님 자신은 머리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체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지체가 된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모두가 다 우상이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런 성령의 받은 사람의 특징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 라는 말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아하, 하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처음에 사울 때는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누구를 믿게 되었는가?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면서, 갑자기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고 핍박하던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러니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인데, 그러니 예수님을 자기의 ‘주’ 라고 인정하지를 않으면, 하나님도 역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이니 말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아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의 종착점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아하, 나는 혼자가 아니라 아담 안에 있었구나 !!

그러면 여기에 예수님의 몸이 있고, 또 사도바울은 자기 몸이 이렇게 있으니, 이러한 두 몸 가운데서 예수님의 몸은 구조가 되고, 사도바울 자신의 몸은 아담의 구조 안에 놓여있었음이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물려준 죄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게 되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 때문에 자기가 그런 짓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니 사도바울은 과거에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나는 나다” 라고 하면서 자기 혼자 폼을 잡고 살았는데, 그런데 성령이 자기에게 와서 무엇을 깨달았는고 하니, 자기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었고, 그 아담 안에서 악마를 자기를 지배해서 자기로 하여금 악마의 하수인으로, 즉 악마가 잡고 있는 그 공중 권세 안에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죄라고 하는 것을 성령이 오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나’ 만의 인식론은 성립될 수 없어 !!

이렇게 보면 무엇이 빠져버리는고 하니, 자기 인식론이라는 것이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즉 “나는 이렇게 본다” 라고 하는 ‘나만의 인식론’이 말이다. 즉 “나는 뭐라고 본다, 나는 뭐라고 판단한다, 나는 뭐라고 행한다” 라는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고, 그리고 예수님이 밝히신 바에 의하면 “아담은 뭐라고 보게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즉 인간은 아담에 의해서 무엇을 보고 판단하게 되어있는데, 즉 아담에 의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전체가 모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나는 뭐라고 본다, 나는 뭐라고 판단한다, 나는 뭐라고 행한다” 라는, 그런 ‘나의 인식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인식론’이 성립이 되려고 하면, “나는 뭐라고 본다, 나는 뭐라고 판단한다, 나는 뭐라고 행한다” 라는 것이 참이 되어야 하는데, 즉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인간이 어떻게 사물을 아는가? 인간은 어떻게 진리를 파악하는가?” 라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앞에 하나같이 ‘나’가 붙는다는 것 자체는,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고, 그분의 영인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예수님에게 귀속이 되어버리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문제는, 전적으로 예수님이 알아서 할 문제로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는 예수님 안에서 통 채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혹시, ‘구조학’ 이라고 하시는지?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의인으로 삼아주는 구조 속에 있게 되는데, 왜 그렇게 되는가?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담 때문이기에, 그래서 그 아담이 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소위 ‘구조학’ 이라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해놓고 진도를 나가겠는데, 거기에 앞서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 라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데, 그러나 자기 인생이 아니라 결국 아담의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밖에서 보기에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역시 고민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 아담전체를 사망이 왕노릇 !!

여기서 조금 진도를 조금 더 나가보면, 무엇이 중요한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할 분, 즉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원래 그 전체가 어디에 있었는고 하니까, 로마서 5장에서는 그것을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라고 하는데, 즉 아담 전체를 죄가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 로마서 5장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기서 “사망이 왕 노릇한다”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아담의 구조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은 도저히 이 죄에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자살을 해서 죽든, 실족을 해서 죽든 간에,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아담의 구조 안에는 결국 마지막에는 다 사망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구조 안에서는 사망에서 부활로 !!

그러나 예수님의 구조 안에서는 그 사망을 딛고 부활로 이어진다고 해서, 사도바울은 이 둘을 합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인류전체를 다 파악할 수 있는 기준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쪽을 사망으로 하고, 다른 쪽을 부활로 해버리면, 그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데, 하늘이고 땅이고 하나님이고 마귀이고 간에, 그 모든 것을 다 십자가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

이번에 이상규 집사님이 자기 어린 조카가 죽고 나서 애통해하니, 이미아 씨가 전도서 3장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얼마나 잘 증거했는지 말이다. 제가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았는데, 즉 “사람이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사람이 울고 웃는 것보다도, ‘때’ 라는 것이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울 때는 울어야 하고, 웃을 때는 웃어야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하나님이 제시하신 그 ‘때’에 따라서 종속이 된다는 것이다. 즉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또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말이다. 즉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면 슬퍼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그렇다면 사람이 이렇게 울고 웃을 때는 무엇을 의식하는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런 ‘나’ 자신은 ‘때’로 말미암아서 사라지고, 결국은 구조가 남게 되는데, 그러니 이 ‘아담’ 이란 것은 하나님의 때, 즉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셔야 되는 그러한 섭리(?), 즉 복음을 위해서 도구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아담이 말이다. 

◈ 예수님과 함께 울고 웃는 새로운 구조가 !!

그러니 이러한 울고 웃고, 웃고 울고 하는 모든 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그것이 제대로 된 예수님의 구조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울고 웃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울고, 예수님과 함께 웃는 새로운 구조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물론 전도서가 쓰여진 700년 이후에 말이다.

그것이 곧 종말의 세계인데, 그것을 전도서에서 이렇게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새로운 구조에서는 예수님이 아담의 자리에 들어가고, 우리는 그 이전까지는 아담에 속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담에게 속해서 죄가 왕으로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의가 왕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울고 웃어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과거처럼 자기 자신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즉 복음 때문에 울고 웃는, 그러한 새로운 구조로 마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조? 패러다임?)

◈ 복음 때문에 온유해야 !!

그렇다고 하면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명령을 비롯한 모든 말씀이 다 어떻게 드러나는가? 예를 들어서, “너희는 온유하라” 라고 하면, 그것을 그냥 ‘온유하라’ 라는 것으로 나타나면 안 되고, 구조를 생각해야하는데, 즉 새로운 구조에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 때문에 온유하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웃든지 울든지 간에 항상 그 기준점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그 기준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한번 찾아보겠는데,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17절을 살펴보자.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

여기 12절 마지막에 보면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라고 하고, 또 13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라고 하는데, 그 전신갑주의 내용이 14절 이하에 나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자아, 즉 ‘나’ 라고 하는 것은 진리로, 즉 복음으로서 뒤집어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만든 새로운 구조로 말이다.

바로 그렇게 진리로, 즉 주님의 복음으로 뒤집어쓰는 것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이고, 그것이 영적인 싸움에서의 군사가 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구조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새로운 구조 안에서 말이다.

만약에 여기서 자기 것만 가지고 버티다가는 누구에게 지는가? 악한 영들에게 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복음의 전신갑주를 벗어버리고, 아무리 자기가 온유하고 착하고 겸손하다고 하더라도, 또 자기에게 제 아무리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백전백패라는 것이다. 즉 자기는 악마의 종이라는 것을 표를 내는 셈인데, “저는 악마의 종이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악마의 종들과 싸울 때는, 우리 자신의 열심과 같은 것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뒤집어써야 하는데, 그것이 곧 전신갑주라는 말이다. 무엇의 전신갑주인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인데, 즉 복음의 전신갑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이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새로운 인간상이 여기에서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전신갑주를, 즉 갑옷을 입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갑옷이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주님의 것인데, 어디 주님의 것이 덜 된 것이 있고 더 된 것이 있는가? 그러니 주님이 시키는 데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오늘이 6월 2일이란 사실 !!

예를 들어서, 오늘이 6월 2일이라고 하면, 어린아이가 그렇게 말하던지, 노인이 말하던지 다 맞다는 것이다. 6월 2일인 것은 말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아하, 오늘이 6월 2일이 맞구나. 내가 졌다” 라고 한다면, 그것을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오늘이 6월 2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마귀가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조, 즉 십자가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그 얼마나 선명하고 간단하냐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왜 간단하지를 않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은 갑갑하다고 하면서 그 갑옷을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하면서 갑옷도 입지 않고 그냥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만든 갑옷을 입고 폼을 잡으니까 마귀가 웃는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는 누꼬?”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미 아담 자체는 악마의 졸개인데, 그런데 그런 아담의 것을 가지고 버틴다면 악마가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는 것이다. 졸따구가 폼을 잡으니 말이다.

◈ 나다나엘의 경우에 !!

그런데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을 뒤집어써야 하는데, 그런 자가 바로 나다나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따르는 자라는 말이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가?

사도바울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 명령은 사도바울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 자신의 주체를 가지고 말이다. 그것이 전혀 아니라, 이미 준비된 것을 뒤집어쓰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사도바울의 이런 명령이나 권면을 설교하면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당신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가?” 라는 점인데, 즉 자기에게 관심을 두면 안 되고, 예수님이 만드신 천국의 구조에 관심을 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구조와 자기가 몸이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그것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이다. 몸이 아픈 것이 마귀의 역사인가? 그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은 우리가 몸이 아프든 어떻게 되든 간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뒤집어쓰고 있는지, 그것을 묻고 계신다는 말이다. 자기 몸이 건강해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전혀 복음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 도대체 죄가 어떻게 퍼지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의 방향이 어디로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즉 “우리의 죄를 대신했다” 라고 함으로서, 그 죄가 어떻게 확대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죄’는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를 말하는데, 즉 우리가 공통적으로 다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죄가 어떻게 확대되는가? 그것을 알려고 하면, 철학과 과학과 같은 모든 학문을 다 공부해야만 하는데 말이다. 그런 것을 공부해보면, 마치 우리가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서 물을 바닥에 부으면 퍼지듯이 그렇게 마구 퍼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철학이나 과학이, 물론 신학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뒤집어보면 온 바닥에 퍼져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것으로 말이다. 우리가 그런 것을 당연히 공부를 해야하는데,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담에 속한 다양한 성격들이, 즉 그러한 속성들이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본성을 거스릴 수가 없어 !!

제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말씀으로 봉사하고 또 이렇게 강의를 하면서 느낀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본성을 거스릴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제 아무리 복음을 듣고 강의를 하고 해도, 결국 자기 본성은 자기가 가지고 간다는 말이다.

그 본성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관심사가 예수님에게 있을 것이고, 자기가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우겨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제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이것 하나 건졌는데, 인간은 자기 본성대로 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가르쳐도, 결국 인간의 본성은 어찌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본인도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복음에 대해서 옳다고 인정을 해도, 하지만 자기 본성이 예수님을 별로라고 여기고,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면,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이 복음을 전하면 교회를 부흥시켜줄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그것도 전혀 안 되고, 돈도 벌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러니 나 말고 믿을 놈이 어디 있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본능대로 간다는 것이다.

◈ 수많은 변명과 핑계로 !!

그렇게 이 세상에서 믿은 놈은 자기밖에 없으니 수천 수만 가지의 변명과 김건모의 핑계가 난무하게 되는데, 그러니 아무리 뭐라고 해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데, “야, 대단해요” 라고 하면서 자기를 스스로 위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에게 잘못된 점이 있고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은 수정하고 고치면 되지,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은 과거에도 많이 느꼈지만 지금도 엄청나게 느끼는데, 우리 인간은 자기 본성을 결코 거스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 왜냐하면 ‘나’ 라고 하는 자아가 제일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본성이 더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본성은 성경말씀에 의하면 바로 아담의 본성인데, 이 아담이 자아를 지배하니, 그만 자아는 꼼짝달싹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때때로 “성질대로 사세요” 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에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 복음은 질리지 않는다 !!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즉 “복음은 질리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서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하면 안 되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자기 본성이 되었으니, 그래서 매일같이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인천에 있는 어느 양반은, 피곤하고 해서 아무리 잠이 오지 않아도 저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곧 바로 잠이 든다고 하든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인간은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질리지 않는데, 그것은 자기 본성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니 당연히 그렇다는 말이다. 또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에 10번을 가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은, 노무현이 자기 본성이 되었으니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본성을 말릴 수가 없는데, 물론 거스릴 수도 없고, 또한 극복할 수도 없고 말이다.

여기서 고린도전서 10장 22절을 한번 살펴보자.

(고전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 멤버쉽과 불쌍한 신부들 !!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천주교의 신부들이 생각나는데, 왜 그들을 연상하는고 하니, 신부들은 교회, 즉 교황청이란 조직에 꽁꽁 묶여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신인 주제에 배운 기술이 그것밖에 없는데, 밖에 나와서 어떻게 먹고살겠느냐는 것이다. 우리처럼 마누라도 있으면 기대서 살면 되는데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들은 교회에서 시키는 데로만 해야하는데, 설교도, 기도도 말이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교회가 주님을 노여워하게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라고 하는데, 그러니 신부들의 본성은 주님이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체인데, 이것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멤버쉽 의식’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참 무서운 말이라는 것이다.

‘멤버쉽’이 무엇인가? ‘우리끼리’ 라는 것인데, 우리 집단, 우리 단체, 우리 공동체라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교회는?) 그러니 그들은 이 성경구절을 고쳐야 하는데, “멤버쉽 의식보다 강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즉 지금 우리의 조직보다 더 강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아담의 구조화는, 예수님에게 ‘죄’ 라는 지적을 당하기 위해서 !!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개인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조직의 멤버라고 하는 개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바로 이미 아담에 의해서 구조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조화가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조에 의해서, 즉 전체 아담의 구조가 바로 죄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말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멤버쉽을 구성하게 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리에 로고스, 즉 말씀을 집어넣고, 그리고 하나님은 위에 계시니,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멤버쉽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멤버쉽 의식을 가지고 교회에 오게 되면, 그런데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결국은 자기 믿음을 자랑하게 되고 말이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이고, 인간의 ‘정(精)’ 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기 존재의 확인, 혹은 정체성 확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17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피 흘리고,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을 공연히 일어난 쓸데없는 일로 취급한다.

◈ ‘죄’로 인해서 피 흘림을 !!

이 문장도 참 그러한데, 여기 피를 흘렸다고 하는 그 앞에 뭐가 있는가? ‘죄’로 인해서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걸음걸이 하나 하나와 그 행하신 모든 기적과 말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죄를 알리기 위한 기적과, 또한 죄를 알리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다고 해서 자기도 한번 걸어보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물위를 걸음으로서 “너는 죄인이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예수님의 그러한 죄를 지적하는 그 죄, 죄, 죄의 마지막 결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가 다 죄인이다” 라는 의미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가로막는 것이다 !!

그래서 지난 주일에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가로막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즉 “너희들은 천국에 오지 마라” 라는 것이다. 그런 표시가 바로 피 흘리심이라는 말이다. 죄인인 주제에 어디 감히 천국에 온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죄인인데 말이다. 

그런데 신학자들과 같은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상하다. 희생을 하려면 그냥 하면 되는데, 하필이면 왜 피를 흘려서 희생을 하지?” 라고 말이다. 땀을 좀 흘리고 고생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피까지 흘린다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피 - 너희들은 무엇을 해도 죄인이다 !!

신약성경에서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니, 사람들은 피를 찍어 바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이 피의 의미를 알아야만 하는데, 즉 “너희들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죄인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없다. 오직 주님의 구원만 있다” 라는 뜻인데,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역시 죄가 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죄이고, 천당에 가려고 하는 것도 역시 죄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겨서 영광을 돌리려 하는 것도 죄이고 말이다. 그러니 도무지 죄가 아닌 것이 없음을, 바로 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피 흘리고,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을 공연히 일어난 쓸데없는 일로 취급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죄인이 아님을 견지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피해서 우회한다.

◈ 십자가를 우회하는 인간들 !!

그러니 인간들이 참으로 교활한데, 그 십자가가 자신들을 가로막으니까, 즉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라고 하니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이 십자가를 그만 피하게 되는데, 즉 예수님에게서 인간 예수를 분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 예수의 사랑으로, 그러한 사랑으로 구원을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예수의 희생, 의로움,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 등등, 그런 것을 예수님에게서 그만 분리를 시키는데, 그렇게 해서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을 자기의 이상형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를 비켜나가게 되는 것인데, 즉 ‘피’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예수, 그래서 “내가 너의 죄 때문에 죽었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이야기만 하는 예수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할 것 없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엄마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듯이, 그러한 엄마보다도 더욱 더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분이 말이다.

◈ 프로이트 - 인간은 사랑의 결핍으로 신을 섬기게 되었다 !!

그래서 프로이트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사랑의 결핍으로 신을 섬기게 되었다” 라고 했는데, 즉 사랑에 목마르고 정에 목말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니 프로이트가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뭔가 분리가 되고 깨어진 관계를, 이 ‘사랑’ 이라는 것으로 때우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 신비주의 - 이제 신과 합일을 !!

이것이 바로 요즘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그냥 ‘하나’ 라는 것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함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야, 이제 신과 우리는 합일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불교가 다 되었는데, 그러니 요즘은 절인지 교회인지 구별이 안 된다는 말이다.

신비주의가 중세 때 엄청 유행을 했는데, 지금도 그런 인간들이 있지만, 즉 신비주의를 주장하는 인간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바로 이 ‘하나’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신비주의는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쿰란 공동체에 비하면 게임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는 도사들인데 말이다.

◈ 각 고원(?)에 도사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

그러니 팔공산 등정에 성공했다고 ‘야호!’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높은 산인, 10좌를 다 등정한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말이다. 등산을 한번 해보라는 것이다. 등산의 도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이다. 잘 모를 때는 대충 대충 등산을 하는데, 그런데 막상 가보면 미친놈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직업도 포기하고, 히말라야로 가는 인간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설을 보면 소설에 미친 인간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음악이면 음악에 미친 인간들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의학분야에도 도사들이 있고, 물리학에도, 법학에도, 다 각자의 분야에 도사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의 분야에도 도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이단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놓은 행함의 열매들을 보라고 아우성이다. 그들은 말한다. “예수님의 피 없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하다” 라고 말이다. 하늘에 신이 있고, 지상에는 인간이 있는 이상,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 하늘에 신이 있고, 지상에 인간이 있으면, OK ??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피 없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능하다”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의 피는 여러 가지 신학적 개념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과연 그러한가?

그들은 신은 하늘에 있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죄송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그러한 신은 하늘에 없다는 것이다.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데, 즉 성령 안에만 있다고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오직 성령님 안에 !!

그렇게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성령 안에 계시는데, 그러니 성령 바깥에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신을 찾아도 찾지를 못하는데, 즉 성령 바깥에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자들이 곧 신비주의자들인데,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하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은 20장에서 예수님이 도마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기적을 받았다는 말이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해서 말이다.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리고 이방인들은, 하늘에 신이 있고 지상에 인간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는데, 물론 유대인들도 그렇게 보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만 피를 흘리심으로서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니, 도대체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은 다 마귀의 짓이었다” 라는 말이다. 즉 “마귀가 너희들의 눈을 흐리게 해서, 그래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주님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땅에다 자기들만의 교회를 세워놓았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예수님은 지상에 피만 남겼다. 장차 그 피를 겨냥해서 다시 오신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예수님이 왜 두 번을 오시는가?

이번 십자가마을의 강의안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는데, 즉 “예수님이 왜 재림을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의 문제를 언급해놓았는데, 즉 “예수님은 왜 딱 두 번만 이 땅을 방문하시는가?” 라는 것인데, 한 번만 방문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 번, 네 번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왜 두 번이냐는 말이다.

그것이 복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언급을 해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아담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그런 아담의 구조를 없애버리고, 예수님의 구조인 아들의 나라인 천국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런 아담의 구조를 하나님께서 활용해서, 즉 이 세상의 아담의 구조, 즉 죄의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더 예수님의 나라가 빛이 나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 오잉, 무슨 쓰레기 재활용 ??

그럴 때 비로소 창조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쓰레기 재활용’ 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그 자체를, 즉 지옥에 가는 인간을 만든 것을 두고 실패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에 가는 인간을 왜 태어나게 했는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지옥에 안 가도 되는데, 물론 그런 것은 개인적 사고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마의 존재를 왜 만드셨는가? 즉 악을 왜 만들고, 죄를 왜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신의 자체적 모순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담의 죄악 된 그런 구조가 있어야만, 그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이 부각될 수 있는 멋진 구조로서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씩 오신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이 땅을 한번 다녀감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가 확실하게 아담의 구조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오니 제대로 안 되어서, 그래서 다시 준비를 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꺼벙한 우리 인간들이 하는 짓이지 말이다.

◈ 아하, 그래서 ‘환상 속의 그대’ !!

이것을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이 이번 여름 수련회의 주제인데 말이다. 그렇게 ‘환상’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두 개로서 말이다. 수평적으로 두 개가 아니라, 수직적으로 두 개인데, 즉 밑에는 역사가 있고, 위에는 환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구조가 바로, 예수님의 두 번 오신 사건을 통해서, 옆으로, 즉 수평적으로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것을 세우게 되면 두 개의 층이, 즉 역사와 환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직적 막대기를 옆으로 자빠뜨리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처음 오시고 두 번 오시고, 그렇게 수평적으로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니엘서의 ‘인자’ 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라는고 하니까, 먼저 오신 분과 나중에 오신 분을 합쳐서 ‘인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인자가 하늘의 보좌에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로 오시고, 또한 두 번째로 오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첫 번째로, 두 번째로 오신다” 라고 하는 표현방법이 곧 아담의 구조를 활용하는 것인데, 그러한 아담의 구조를 두 글자로서 ‘역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역사’ 라고 하는 아담의 구조를 통해서 하늘의 구조인 환상을 소개하니, 이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혹시나 여러분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아담의 구조 속에 있으니 역사만 알지, 어떻게 환상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라는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서 환상을 이야기하니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그래서 제가 제목을 “환상 속의 그대” 라고 붙였는데, 제목 하나도 쉽게 붙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아니, 웬 불 속에 ‘그대’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면, 불 속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누가 계시는가? ‘그대’가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고 싶은 ‘그대’가 말이다. 역사라고 하는 물리적 구조에 저촉이 되지 않는, 즉 불을 가지고 태우려고 해도 태울 수가 없는, 그런 환상의 구조가 앞으로 역사 속에 따로 준비가 되어서 온다는 것이다. 즉 역사 바깥에 있던 구조가, 이제 예수님이 처음 오심으로서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역사 속의 환상으로서 구체화가 되는데, 그것이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인데, 그러한 두 번째의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아하, 역사가 환상이었고, 그 환상이 정말 실체이고 현실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그러니 역사를 자빠뜨려 보아야 하는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눕혔을 때의 모습과 세웠을 때의 모습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말이다. 물론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혹시 강의를 듣다가 옆으로 그만 자빠뜨려지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하는데(ㅋㅋ),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주께서 허락하시면 말이다.

여기서 다시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자.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이 말씀 속에 !!

여기에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라고 하는데, 어떻게 구름을 타고 오시는가? 구름은 수증기이고, 또 예수님이 아무리 가벼워도 60KG은 나가지 싶은데 말이다. 그리고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에 오느냐에 따라서 볼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남반구에 오면 북반구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보겠는가? 그렇다고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모든 사람들이 다 보려고 하면 둥근 지구에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라고 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구름을 타고 오면 물리적인 중력의 문제가 충돌이 되고, 또 각인이 그를 보고 찌른 자도 본다고 하면 시각적으로 역사와 환상이 그만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데 여기서 애곡하는 자들은 또 무엇인가?

그 동안 역사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인 줄 알고 잘먹고 잘살았다는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을 보고서 반갑다고 하지 않고 울기는 왜 우느냐는 말이다. 그만큼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즉 죄를 지었기에 예수님을 보고 엉엉 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 7절의 이 짧은 문장을 통해서도, 물리적인 한계와 시각적인 한계를 모두 다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죄라는 문제, 가치의 문제, 도 진리의 문제도 이 문장 속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 아이쿠, 내 인생 헛살았구나 !!

그리고 여기서 ‘애곡한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좋아서 우는 것이 아니라, 너무 슬퍼서 엉엉 운다는 것인데, “아이쿠, 내 인생을 헛살았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조명 시설을 환상에 비추게 되면,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애곡할 만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린 조카가 죽은 것만 슬퍼할 게 아니라,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울 일들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거치지 않고 보게 되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다 인상을 쓰고 울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복음을 거치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 즉 예수님의 그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의 즐거움과 행복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애곡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과거사이겠지만, 하나님에는 영원한 현재로 굳어져 버렸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하루가 천년 같다 ??

여기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라고 하는데, 즉 천년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년과 같다고 했는데, 즉 사람들이 보기에 하루는 자기가 알 수 있는데, 천년은 길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간적인 감각은 하루인데, 그래서 하루는 기억이 나는데 천년은 기억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천년이 하루 같다” 라는 것은, 우리가 실감하는 그 하루가 천년이 될 것인데, 즉 천년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마치 우리가 하루를 사는 것과 같이 천년이 실감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현실을 우리가 보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한계는 그야말로 한계인데, 즉 허구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방식 외에는 인간의 죄의 진실을 드러낼 수 없다. 십자가의 피를 앞세울 때만 인간들이 저지른 죄의 본질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인간들의 죄를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이 피를 피해가면 인간들이 열심히 탐구하고 연구한 것이 나오기에 말이다. 즉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 웅장한 예배당 건물에 감탄하고 있을 때, 피는 오직 인간의 죄를 파헤친다. 성가대 화음의 아름다움이 종교적 희열을 자아낼 때, 피는 죄를 찾아 파고들뿐이다.

헤롯이 성전을 몇 년 동안이나 공사를 했는가? 40년 이상을 지었는데, 그야말로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설교가 그것인데, 감람산에서 내려다보니 그 성전이 참으로 멋지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가지고서 단호히 인간의 죄를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어떤 것에 감탄하고 ‘뿅’ 가는지, 예수님은 충분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환상을 보고 ‘뿅’ 가고, 십자가를 보고 ‘뿅’ 가는 것이 아니라, 깨어져서 없어질 것을 보고 ‘뿅’ 가고 매료된다는 것을 잘 아신다는 말이다.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서로가 서로를 속일 때도, 피를 앞장세운 하나님의 작업 앞에는 그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는 이 마지막 때에 피만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으니, 아예 그것을 미리 일고 속일 생각일랑 하지 말고, 속이지 않고 살면 그야말로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남을 속이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또 속이고 또 속여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속이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저는 이런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 했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속이고 또 속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앞장세운 하나님의 솜씨 앞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들의 종교유흥에 하나님은 장단을 맞춰주시는 분이 아니다. 즉 피란, 종교 놀이판을 뒤집는 하나님의 과격함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인간들의 판을 뒤집은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모든 종교유흥을 다 뒤집은 것이라는 말이다. 결코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종교적인 놀이판에 장단을 맞추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하나님이 이 땅에서 피를 흘렸다면, 이로서 인간 세계는 영원히 가해자로 남아야 한다. 이 땅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피 흘리게 해서 돌려보낸 그 본성들이 강줄기가 모래 속으로 잦아들어 가라앉아 있듯이 잠복해있다.

여기 ‘가해자’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제가 종종 사용하는 용어인데 말이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심으로서, 거기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역시 가해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피를 흘렸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성이 강줄기의 모래처럼 가라앉아 있기에, 약간만 파보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강의 모래처럼 말이다. 그냥 조그만 손을 가지고 파면 그 촉촉한 모래가 숨지를 못하고 나온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의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다는 말이다. 마치 강속의 모래처럼, 혹은 용수철처럼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위장한 본심들을 꺼내들고 교회에 와서는 자랑들을 한다. 진짜 심성은 본인들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본질을 미워할 수가 없다.  

이것을 제가 아까 “인간은 자기 본성을 거스릴 수가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성질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질을 내더라도, 아니 그렇게 성질을 낼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떠한고 하니, 성질은 성질대로 내면서, 그것을 죄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그런 속성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명과 핑계를 하면서 자기가 잘났다고 밖에는 달리 다른 무엇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위대한 신 앞에서 오직 자신도 위대한 성도가 되겠다는 목표 외에 다른 목표는 없다. 신 앞에서 훌륭한 자로 부각되기 위해서 오늘도 성경을 본다. 피는 안중에도 없다. 피는 성경을 펼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목표에 준한 자신과 신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 점점 더 멀어져간다 !!

인간은 신을 마치 자기 라이벌처럼 생각해서, 자기의 모델을 하나 만든다는 것이다. 요즘 태국의 아이들이 원스걸스와 소녀시대의 춤을 배운다고 난리라고 하는데, 그때는 밥도 먹지를 않고 돈도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매진을 하고 몰두할 때는 반드시 뭔가 모델이 있는데, 즉 반드시 되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고맙게도(?) 김광석의 노래처럼 “점점 더 멀어져간다” 라는 것이다. 따라가려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멀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어느 정도로 멀어져 가는고 하니까, 도저히 따라가고 싶은 마음조차도 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점점 더 멀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우리가 그냥 믿을 뿐이고 사랑할 뿐이지, 그런 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만 잊어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주님의 것으로만 남아야지, 자기 것을 챙기고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주위에 자기 것을 전혀 두지 말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바퀴벌레만 나오니 말이다.

◈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장독대 밑으로 !!

제가 어릴 때 친구들과 공차기를 하게 되면, 조그마한 고무공을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저는 차기만 하면 공이 장독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만 공놀이는 김이 다 빠지는데, 왜냐하면 그쪽으로 공이 가면 공을 찾는데 시간을 다 보낸다는 것이다. 장독대가 한 두 개 아닌데, 족히 30개는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또 공을 작아서 그 밑으로 들어가면 찾는 것이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들과 장난을(?) 치는데, 우리는 마치 공과 같아서 우리를 차서 장독대 밑으로 넣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찾는다고 바쁜데, “내가 누구이지? 오늘은 뭐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찾았다 싶으면, 주님을 또 발로 차서 장독대 밑으로 밀어 넣어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것이 없으면 허전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공놀이를 하는 재미가 없으니 인생을 재미가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음을 대하고 말씀을 대하면서, 왜 그것이 재미가 없게 느껴지는고 하니, 자기 것이 없다고 여기니 그렇다는 말이다. 전부가 다 주님 이야기만 하니,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런 자기만의 고무공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대하고 질리지 않는 사람은 왜 그런고 하니, 주님의 것을 본다고 자기 것을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의 것만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전혀 질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19페이지를 보자.

** 그들은, 이미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십자가 피는 적용될 일이 없다고 여긴다.

◈ 탱큐, 지저스 크라이스트 ??

이 문제를 말로 표현하기가 좀 그러한데, 이것을 그림을 그려보면, 아무튼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는고 하니, 십자가라는 것이 예수님만을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 십자가를 ‘헐낏(?)’ 보고서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만 하고, 자기는 그냥 무사통과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은 살아있는 채로 십자가의 뒤쪽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헐낏 보면서 “아, 주님이 대신 죽었구나. 그러니 나는 안 죽어도 되지요?”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 십자가라는 경계선을 무사통과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십자가의 피가 용납하겠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이렇게 거울이 있는데, 사실 이 거울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참 많다는 것이다. 거울은 보는 사람의 얼굴만 비추게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거울귀신이 있어서, 즉 지금 자기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거울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비추어진다고 하면 그야말로 기겁할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 거울을 통해서 살펴보는 복음 !!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예수님을 마치 거울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거울에 이미 들어온 사람은 이 세상을 볼 때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세상 사람들이 거울을 어떻게 보는고 하니,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 보는데, 즉 사람들은 ‘예수 = 죽은 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자로 간주해서, 거울 속에 죽은 자로서의 예수로 집어넣어 놓았다는 말이다.

◈ 어, 예수님이 살아있네?

그런데 막상 거울 속에 들어와 보면,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에, 그들이 불 속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죽은 줄로 알았지만, 그런데 막상 불에 들어가니 한 명이 더 늘어나서 네 명이나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은 2000년 이전의 사람이니, 이순신 장군이 이미 죽은 것처럼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막상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니, 예수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울 밖에서는 예수님이 분명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로밖에는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울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거울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산 자가 되고 말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립을 해보라고 하면 전혀 안 되는데, 이 세상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들을 제 아무리 동원해도 표현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묵시적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즉 인간 이성이 이것을 도저히 쫓아가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이성은 죽어야 하니 말이다.

◈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 ??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헐낏 보고는 그냥 지나가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자기는 이미 죽은 자가 되는데, 그런데 십자가를 우회해서 가니 그 따위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거울 안이니 말이다. 즉 죽은 자가 되어야만 거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 자가 되면, 자기가 살아있는 것만 보인다는 것이다. 거울은 다시 비쳐서 보여주니 말이다. 그러니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안에 예수가 살아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살아서 버티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째로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과, “내가 죽어있다” 라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자기가 살아있으면 지시와 명령을 하는 그 판단의 주체가 누구인고 하니, “내가 나를 지시한다” 라는 것이다. 즉 “힘이 들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양심적으로 살아야 해”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를 한다는 것이다.

◈ ‘나’의 모든 판단을 누가 하시는가?

그런데 자기가 죽어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처럼, 즉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명령하고 지시를 하는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나를 판단한다” 라는 것이다.

우리를 지금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그 모든 것을 다 주께서 알아서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행동을 더 이상 자기가 알아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미 죽은 놈이 무슨 판단을 하고 말고 하느냐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오늘은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되어야만 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교통사고를 내어야만 했었다” 라고 하는, 그러니 자기가 교회에 가는 것이 선이고, 가지 못하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시를 누구에게 받느냐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가 판단하면 죄가 되기에, 주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제가 오늘 착한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사실 죄가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체로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죽었다는 것은, 시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입은 살아서 나불나불 거리면서, 그렇게 자기 판단과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입’, ‘코’, ‘귀’ ??

이번 광주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참 재미있는 그림인데, 이렇게 입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그리니 6살 먹은 아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입’, ‘코’, ‘귀’ 라고 아는 척을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 아이의 말이 맞는데, 이렇게 입과 코와 귀는 있지만, 그러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입과 코와 귀만 있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입만 살아있어서 입만 나불거리고, 또 코만 살아있어서 냄새만 맡고, 또한 귀만 살아있어서 쫑긋 쫑긋거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주장하셔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죽은 우리 자신이 입을 주장하고, 코를 주장하고 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말을 하고, 냄새를 맡고, 들으면서 판단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하셨는데, 그 귀가 우리가 주장하는 그러한 귀가 아니라, 주님이 알려주시는 귀라는 말이다. 그러니 과연 지금 우리에게 주님이 사용하시는 귀가 있느냐는 것인데, 그런 귀가 있어야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죄이다 !!

다시 말씀을 드려서, 우리가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나불 나불거리고, 컹컹거리고, 쫑긋 쫑긋거리는데, 그러니 주님께서는 바로 죄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나불 나불거린다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되는데, “아하, 내가 죽은 인간인데 왜 판단을 내가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괴로운 것인데,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선악적인 판단을 날마다 자기가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한 순간도 에덴동산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어 !!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왜 죽었는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로 인해서 죽었는데, 그리고 주님이 그것을 용서하신 것은 예수님의 생명나무 때문에, 즉 주님의 은혜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단 한 발자국도 그 에덴동산의 범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나무를 그대로 유지함으로 말미암아, 이 에덴동산의 구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에덴의 구조는 마지막까지 그대로 가는데,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보면 선악과는 없어도 생명나무는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역사가 40억 년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또 우리나라가 반만년이 어떻고 하면서 아무리 유구한 역사라고 해도,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발자국도 에덴의 구조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역사라는 것이다. 그 생명나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인간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역사를 만드는데, 즉 진화론이 어떻고, 40억 년의 지구의 역사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자들에게 “앞으로 지구의 역사가 어떻게 될지 아세요?” 라고 하면,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들만 모르지, 성도들은 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역사를 끄집고 와봐야, 나중에 보면 예수님의 생명나무 앞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9페이지를 보자.

**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를 탐색한다면, 그 어느 인간치고 예수님에 대해서 격분하지 않을 위인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분은 인간에 대해서 근원적인 무시와 모멸감과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마구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말씀에 격분하지 않으면 가짜 !!

‘박쥐’ 라는 영화를 보면, 거기서 인간을 격분시키는데 말이다. 인간들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격분하지 않는다면 가짜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 원래 가짜인데, ㅋㅋ) 중세를 비롯해서 모든 철학의 기본은 존재론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 발언을 하니, 즉 아담의 구조로서 깡그리 쳐버리니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싫어했다는 것은, 예수님은 그 어디를 가더라도 엄청나게 밉상을 받을 짓을 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가 예수님을 상상만 하니 좋은 분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막상 그런 예수님을 대하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도 앞장서서 ‘바나바’를 선택했으면 했지, 결코 예수님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럴 정도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근원을, 그야말로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가지고 말이다. 즉 “너희들은 역사에 속했고,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안 돼!” 라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부정을 당해도 너무나도 당연한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면 숨기에 바쁜 놈들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위에 있다고 여기고 나불 나불거리고 까불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막상 주님을 만나면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저희들을 십자가의 피로서 용서해주시고, 또한 함께 하시고 인도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이게 하시고, 또한 그 모든 공로를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2 밤 11시 55분에 마침.

                                                                         복음은 질리지 않아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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