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강의 2009-07-06  피7강 광야에서 선지자의 예언과 마주침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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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90706피p026광야에서선지자예언과마주침

피 7강 광야의 선지자 예언과 마주침 and 분리작업

[09 대구강의 12] - [피 7] - 광야에서 선지자 예언과 마주침
                                                                                
                                                           09,07,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 여기도 휴전선 철책이 !!

오늘은 교재 26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이처럼 인간은 항상 경계선 순찰에 나서는데, 그 경계선은 곧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선이다.

여기 ‘경계선’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보다 오히려 ‘국경선’ 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당하지 싶은데, 국경선에는 철책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철책순찰에 나서는데, 마치 국군이 휴전선의 철책 순찰을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국경선의 철책은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선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의 국경선 순찰을 !!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아침에 눈을 떠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자기 것과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말이다. 쓰레기를 하나를 분리해도 자기 쓰레기와 남의 쓰레기를 분리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만약에 남의 쓰레기를 자기 쓰레기 봉투에 넣으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물론 나중에 다시 나오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이 땅에 보내셨는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해서 살다가는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이 땅에서 아무리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해도 천국에 가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런 교회는 그냥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지, 전혀 주님의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가?

내일 모레가 되면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이 거행된다고 하는데, 약 20만 명 정도가 모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20만 명의 엄청난 숫자가 모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가? 그렇게 많이만 모이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켜준다고 하면, 우리는 지금 만사를 제쳐놓고 그 장례식에 참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말이다.

분명히 그렇게 모인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어떠한가? 일단 많이만 모이기만 하면 구원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숫자만 많이 모아놓으면 말이다. 그래서 개척교회를 해도 일단 많이 모아야 큰 교회에서 보조도 해준다는 것이다.

◈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광야에 무엇을 위해서, 즉 무엇을 보려고 나갔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광야에 사람들을 보려고 나갔다는 말인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런 다른 쓸데없는데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다시 말해서,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없다고 하면 광야에 나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 것은 그냥 바람을 쐬려고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 나간 사람들을 보고 비꼬아서 말씀하시기를, “화려하고 세련된 옷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런 것은 왕궁에 있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광야의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갔는가?” 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갈대는 가을이면 항상 있는 것인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말이다.

◈ 구원의 기준은, 선지자의 말씀 !!

그러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광야에 나가서 항상 있는 것이 아닌, 즉 흔들리는 갈대가 아닌, “너희들이 선지자를 만났는가?” 라고, 즉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선지자의 말씀을 만나서 들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자기가 몸이 아파서 교회에 나가지 않고 병원에 갔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선택인가? 이 세상에는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원도 있는데, 그것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험회사도 필요하기에 존재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보험회사에 나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두가 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자기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고 하면, 그것이 분명하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 그것은 맞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해서 병원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구원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 오잉, 실존(實存) !!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참 어려운 말을 했는데, 잘 쓰지 않는데 할 수 없이 ‘실존(實存)’ 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넜는데, 그것을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세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 그 당시로 봐서도 약 1500년 이전에 일어난 옛날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출애굽 사건을 BC 1440년으로 보니 말이다.

(고전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홍해바다의 사건이, 곧 오늘 우리들의 사건 !!

우리는 세례를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 홍해사건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운명이 지금 우리의 운명과 똑같다는 말이다. 즉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있었던 그들의 운명이, 설마 대구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운명과 같은 운명이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은 바다로 갔으니 거기에 물이 있었고, 또한 자기들의 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세례가 되는가? 지금 성령이 있고 몸들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곧 세례라는 말이다. 그들이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 빠진 것처럼, 오늘 우리는 성령에 빠졌다는 것이다. 

◈ 과연 무엇이 구원의 기준인가?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이 곧 구원의 기준이 되기 때문인데, 그러니 구원의 기준은 몸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몸 위에 뭔가가 덮쳐져야 하는데, 그것이 위로부터 덮쳐져야만 그것이 곧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몸을 기준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몸에 뭔가가 덮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몸의 가지고, 즉 지식으로서 구원을 알려고 하니, 그것이 전혀 구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제가 강의를 하면서 구별을 하기 위해서 칠판에 빨간색 펜을 쓰고 싶어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오히려 구별을 하지 못하는 분이 있어서 말이다. 광주에 계신 김을수 집사님이 빨간색 글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아무튼 별 희한한 몸이 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빨간색을 볼 수 있는 몸과 볼 수 없는 몸으로 나눌 수 있는가?(ㅋㅋ)
 
◈ 몸 - 덮쳐지지 않은 몸, 이미 덮쳐진 몸 !!

그건 그렇고, 여기에 이렇게 두 가지의 몸이 있는데, 하나는 덮쳐지지 않은 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뭔가가 이미 덮쳐진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 몸은 서로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뭔가가 덮쳐진 몸은 구원이 되지만, 덮쳐지지 않은 몸은 구원이 되지 않는데, 그렇게 덮쳐지지 않은 몸 속에는 소위 말하는 ‘지정의(知情意)’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믿음의 구조인데, 즉 믿음에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을 때, 그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런 구조를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개혁주의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정의를 믿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 이 몸에 뭔가가 덮쳐지게 되면, 이 지정의가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말씀의 칼날로 다 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정의가 날아가면, 덮쳐진 몸도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즉 덮쳐진 것에 의해서 이 몸이 날마다 잘리고 또 잘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덮쳐진 것으로 인해서 잘리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가 덮쳐지지 않은 몸이 어떻게 구성이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덮쳐지지 않은 몸은 어떤 특징이 있는고 하니, 매일같이 국경선 철책을 순찰한다는 것이다. 그냥 순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면서 순찰을 돈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렇게 구분하기 위해서 순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의 것’이 무엇인고 하니,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그 경계선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은 모든 하나하나에 나의 손때가 묻어있다. 즉 나의 관리가 가능한 대상들이라는 말이다. 나의 행함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고, 나의 노고와 나의 희생적인 기도의 응답들이라고 해석해버린다. 만약에 이 경계선 안에 들어있는 대상들이 나로서는 관리 불가능한 것들이라면 ‘나의 것’ 안에서 ‘나의 것’이 하나도 없는 모순이 생긴다. 그렇다면 ‘나’ 라는 존재의미는 과연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존재의 의미는 오직 ‘나의 것’들이 모여있는 그곳이며, 그곳은 모두 나의 가능성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다. 

말이 조금 어려운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영역 안에 타인의 것이 들어오게 되면, 다른 것은 관리를 하더라도 그것은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의 것을 공격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 몸 속에 벌레가 들어오면, 자기의 모든 것을 갉아먹듯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어서, ‘남편’ 이라는 직함은 가정(결혼) 내에서 내게 붙는 직함이다. 만약에 내 가정이 없다고 하면, ‘남편’ 이라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그러면 나는 ‘~의 남편’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계속 ‘남편’ 이라는 가능성으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어디를 가도‘~의 남편’ 이라는 소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남편이고, 간혹 남편이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지 아니한가?

◈ 인간의 모든 행함은, 반드시 ‘자기 것’에 초점이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인간들의 모든 행함이란 반드시 ‘자기 것’이 된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한 행함이기에, 그래서 십자가와 부딪치면 반드시 깨어질 수밖에 없는 행함이기 때문에,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곤 하는데, 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데, 그런데 사람은 제 아무리 위로 높이 쏘아 올려도 중력에 의해서 그만 도로 자기에게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는고 하니, 위에서 떨어지는 것은 은혜가 되지만, 그러나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자기 영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수고가 되고, 그 수고의 열매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쏘아 올린 자기 것들이 자꾸만 떨어지면 그 영역이 확대가 되고, 그것이 자기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교재 27페이지 중간에 나오는데, 미리 한번 살펴보자.

** 예수님의 말씀은 무소유로 살면 구원이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의 불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26절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즉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던지시면, 제자들이 탁탁 알아듣고 “왜 사람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라고 나와주면 참 좋은데, 물론 목사들이 설교할 때도 교인들이 그렇게 반응을 하면 주고받고 하는 것이 되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27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인간들이 발휘라는 모든 행함이란 반드시 ‘자기 것’이 된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 행함이다. 도둑이 자기 물건을 훔쳐도 자기 것이 된다고 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도적질한 것이지, 결코 남의 것이 되기 위해서, 즉 훔친 물건을 내가 갖지 않겠다고 하는 취지로 도적질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도적질이 나쁜가? 아니면 자기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나쁜가?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상식에 의하면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을 결코 악한 짓이라고 비난하진 않는다.

여기에 도둑이 등장하는데, 그 도둑이 물건을 훔쳐서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넘겨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그냥 놉(?)한 것에 불과한데, 즉 촌에서 모심기를 할 때에 그렇게 자기가 모를 심는 일군이 되어서 그냥 일만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문제는 ‘내 것’ 이라는 사고방식 자체 !!

일지매나 홍길동도 그런 종류의 도둑 아닌 도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훔친 물건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도둑질이 나쁜가? 아니면,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 나쁜가?” 라는 것이다. 과연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나쁘냐는 말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바로 자기 소유로, 즉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바로 생각자체가 나쁘다는 말이다. 그러니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자기가 열심히 회사에 일하고, 공장에서 야근을 하면서 일을 해서 받은 월급봉투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바로 그것 자체가 전혀 천국의 기준이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그렇게 했으면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 머리 위로 공을 쏘아 올리면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인간은 바로 그런 짓을 매일같이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 내 영혼아, 이제 걱정하지 마라 ??

그런데 이 인간사회에서는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을 악한 짓이라고 하지 않는데, 오히려 “아이쿠, 훌륭하십니다” 라고 하지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자기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자기 창고가 가득하다면,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것이다. 자수성가한 아주 착실한 모범적인 인간으로 여기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고, “내 영혼아, 이제 걱정하지 마라. 평생 먹을 양식이 창고에 가득하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하는가? “이 어리석은 놈아, 오늘밤에 니 영혼을 데리고 가면 이 창고에 있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는가? 그래도 니 것이 되겠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맏이는 잃어버림의 경험이 없어 !!

그러니 탕자의 비유에 있어서, 아버지를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은 맏이는 어떠한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집안 일을 잘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맏이는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집을 떠나서 방탕하게 살았던 탕자가 오히려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다 날린, 말 그대로 탕자인 그놈이 받느냐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던 맏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이 탕자의 형인 맏이는 ‘잃어버린 적’이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덮쳐져서 자기 몸이 잘린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덮쳐진 것은 덮쳐지지 않은 몸을 잘라내는데, 즉 죽여버리는데, 그러니까 탕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덮쳐짐이 없으면 여전히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기 때문에, 즉 맏이처럼 자기가 탕자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전혀 구원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니들이 언제 콘크리트 맛을 봤어야지 !!

개콘에 보면 “하기야 너희들이 언제 콘크리트 맛을 보기나 했니?” 라는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데, 여자들이 완전히 망가진 분장을 하고 하는 코너인데 말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콘크리트가 떨어져서 우리 머리통이 박살나야 구원이 된다고 하면, 제가 감히 바라기는 지금 이 자리에 하늘에서 콘크리트가 떨어지기를 소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머리통이 박살이 나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콘크리트가 아닌, 십자가의 피로서 우리가 박살이 나야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누가복음 14장 33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기준인데, 그런데 목사들이 겁이 나서 이것을 교인들에게 설교시간에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왜 그런가? 지금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모두 점쟁이 집이 다 되었고, 그러니 교인들은 하나라도 더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나왔는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많이 끌어 모으는 방법을 이야기해야지, 기존의 있는 것마저도 버리라고 하니, 도대체 누가 교회에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 목사가, 구원을 포기하면 교회는 부흥 !!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목사가 자기를 포기하는 설교를 하면 목사는 구원을 받는데, 교인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반면에 목사가 자기가 살려고 하면 그 목사는 지옥으로 가지만, 하지만 교회가 부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들을 끌어 모으려면 서로 통하는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그렇게 통하면 온다는 것이다. 케이블 TV에 ‘통하였는가?’ 라는 드라마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의 말씀은 ‘무소유’로 살면 구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불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법정스님이 주장하는 그런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타고난 것이 바로 자기 머리 위로 던지는 것이니 말이다.

◈ 됐나? 됐습니다 !!

하지만 이렇게 우리 인간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라, 그냥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인데, 최고로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즉 “니 힘으로 구원을 받지 못해” 라는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우리에게 와서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데, 즉 “됐나? - 됐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냥 구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너무 싱겁나요?

그것을 조금 늘려서 이야기하면 “내가 너를 일방적으로 구원을 시켜줄게? 됐지?” 라는 것인데,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면 되는가? “되었습니다. 기분 정말로 댁길입니다(좋습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 자기 자랑은 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하루에 2.5동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됐나?” 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즉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런 낭패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니, 그때부터 웅크리고 있던 마귀들이 다 달려들어서 뭐라고 하는가? “조금만 더 노력하세요. 기도시간을 조금만 더 늘이세요” 라고 하면서 약을 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날을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지 말이다. 고생만 실컷 하지 말이다. 그러니 “됐나? - 됐습니다!” 라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꽝’ 이라는 것이다.

◈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여기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으니 망정이지,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없는데, 제가 서울의 큰 부자교회에 가서 이런 설교를 했으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성경에 있으니, 저 양반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부자 교인들만 모아다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즉 “여러분, 낙타가 바늘구멍이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는데, 마찬가지로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이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목사가 설교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교인들을 추방시키는, 그러한 과정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엉터리 설교를 하면, 정당화시켜주는 처방전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저희들의 한(限)을 풀어주세요 !!

대장간에 가면 그런 느낌을 받는데, 그들은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말씀이 틀렸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들의 한(限)을 신께서 어떻게 풀어주는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설교도 그런 설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한을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치를 해서 없애버리는지, 그렇게 해서 한이 없이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저는 성경말씀을 전하려고 갔는데 말이다. 그러니 저는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이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서로 튕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자들의 이단성은?

그런데 성경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교인이라고 하면, 그것은 분명 자기만의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것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고 하니,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고, 오늘날에는 개혁주의 신학을 주창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성경말씀은 믿지 않고서, 자기 것을 챙기는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 과분한 평가가 아닌가?)

이것은 제가 자신 있게 큰소리 칠 수 있는데, ‘양의 탈을 쓴 무리’ 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그것을 줄여서 ‘양무리’ 라고 하는데, 아마 여러분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그들은 성경말씀을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말씀 하나하나가 다 자기들을 부정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말씀을 포기하고 신학을 주장하는데, 그것이 마지막 이 시대의 모습이란 것이다. 그야말로 수거해서 폐기처분을 해야할 대상들 중에 하나인데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사람이 할 수가 없으면 가만히 놔두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왜 굳이 오셔서 “사람은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 라고 하면서 약을 마구 올리느냐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다. “야, 이리와 봐. 니는 안 돼. 할 수 없어” 라고, 일부러 그러한 이야기를 하시느냐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그런데 할 수 없는데, 왜 굳이 찾아오셔서 그렇게 하시느냐는 말이다.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할 수 없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 이유가 교재 28페이지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악을 찾기 위해서, 즉 악을 규정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일단 교재 28페이지를 보자.

** 그렇다면 구태여 이미 불가능성을 확정받은 인간들(제자들)에게, 꼭 이런 불가능성을 통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냥 홀로 가능하신 예수님이나 조용하게 하시면 되지, 왜 이러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그동안 불가능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뒤바꿔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시도 때문이다.

◈ 예수님은, 악을 찾으려 다니는 악취미를 ??

이렇게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불가능성을 인간의 가능성으로 뒤바꿔놓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시도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취미가 참으로 독특하고도 고약한데, 그렇게 악을 찾으러 다니니 그야말로 악취미가 아니냐는 것이다. (‘악을 찾으려 다니는 취미’를 세 글자로 줄이면, ‘악취미’ 인가? ㅋㅋ)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이 어둠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는데, 그러니 결국 예수님은 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이 자기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일부러 그렇게 유도를 하신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모든 움직임은 십자가를 향해서 !!

그것을 수학적으로 어렵게 ‘벡타장’ 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그래프로 그리면, 아무튼 그러한데(?), 그러니 이것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운동을 하면서 퍼져 나온다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이 벡타장은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는데,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이런 벡타장은 전기의 흐름을 설명할 때 동원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이것을 강의할 예정인데, 그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기에 신기하다고만 생각하지, 그것을 벡타장으로, 즉 움직이는 장으로 여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것은 어디로 향해서 걸으신 것인가? 결국 십자가를 향해서 가기 위한 움직임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다.

◈ 가지무침을 먹는 것도 구원받기 위해서 !!

어제 점심시간에 가지무침을 해서 먹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아니, 가지무침을 반찬으로 해서 먹는데, 그것이 무슨 구원과 상관이 있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즉 가지무침을 먹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면, 그것은 주님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냥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면서 먹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즉 가지무침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그 주님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하면, 그것이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기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가지무침을 먹는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구원과 연관을 시킬 수 있는 의미를 깨닫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 것이 말이다.

녹매교회의 구 목사님은, 척수에 문제가 생겨서 제대로 걷지 못할 때, 자기가 그동안 평소에 걷었던 것에 감사하지 못했음을 회개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수술을 하고 나아서 걸어다니는데, 아직도 과연 그런 감사가 여전히 터져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더라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학이 이러한 벡타장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신학이 아니라 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덩어리라는 말이다. 즉 ‘십자가’ 라는 것은,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의 탄생이나 그분의 모든 것과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 즉 예수님의 탄생과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한 통속이 되어서, 그 십자가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동일한 성령 안에서의 일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은 구원 문제를 두고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도란도란 의견조율을 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 문제는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나있다. 인간들 치고 영원히 살고 싶고, 고통 없이 살고 싶고, 신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다. 하지만 그런 종교적 염원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도리어 배척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져야만 진정 이 세상은 그냥 구원 불가능으로 남아있는 세상답다.

◈ 신처럼, 고통도 없이, 영원히 살고 싶어 !!

여기에 인간의 소망이 세 가지 나오는데, 첫째는 영원히 살고 싶고, 둘째는 고통이 없이 살고 싶고, 그리고 셋째는 신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을 합치면 인간은, 신처럼 고통도 없이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가 마귀가 유혹해서 따먹게 된 선악과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신처럼 고통도 없이 영원히 살고 싶다고? 영원한 고통 속에 살게 해줄게” 라고 하시면서 저주를 해버리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죽음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창세기 3장에 있는 그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한 상태에서 그 무엇을 따먹어도, 제 아무리 오래 오래 살아도, 그것은 고통 속에서, 즉 저주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 인생이란,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는 한 토막 !!

그렇게 고통 가운데 오래 사는 한 토막이 바로 ‘인생’ 이라는 말이다. 유행가 노래도 그런 것이 있는데,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한 방의 부루스라고 하는데, 즉 부루스를 한번만 잘 추면 팔자가 편다고 그런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인생이란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는 한 토막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죽어도 저주를 받도록 되어있는데, 즉 저주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즉 생명나무가 없는 이상, 그런 사람의 인생은 살아도 저주이고 죽어도 저주라는 것이다. 밖에 나가도 저주를 받고, 안에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도 저주를 받고 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밥그릇이든, 국그릇이든, 냉장고이든, 세탁기이든 간에 말이다. 판사가 되어도, 의사가 되어도, 대기업의 사장이 되어도,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업에 성공을 하든지 실패를 하든지 간에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인생이 끝나고 나면 저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은 이상, 우리가 노벨 문학상을 타던, 청룡열차를 타던,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악마는 인간들의 종교성을 ‘구원 가능성’의 출발점으로 속여왔던 것이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여망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거꾸로 인간은 악마의 인질로 자처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러니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방금 말한, 영원히 살고 싶고, 고통이 없이 살고 싶고, 신처럼 살고 싶은, 바로 그 세 가지가 뭉쳐서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굳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찾아서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 앤 불교” 라든지, “집나간 석가모니를 찾아서” 라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아니, 예수님이 인질로 !! 

이렇게 구원받기를 열망하는 최고 집단에서 인간은 악마의 인질로 되어있고,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인질의 자리에 예수님도 같은 인질로 잡혀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도 잡혀있고, 예수님도 잡혀있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연약하지만 아버지의 능력으로서 사흘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인질로 잡혔다가 빠져 나온 그분의 공로가 아니면 아무도 이러한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외치고 있는 복음이란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 능력으로 나온 것이 “세웅아, 십자가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를 구멍으로 보는데, 유일하게 빠져 나올 수 있는 구멍이라는 말이다. 즉 부활의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유일한 구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간다” 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정확한 표현인데, 이러한 점에서 사도바울은 천재라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서 부활의 세계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았는데, 그것은 십자가밖에, 즉 주님의 ‘피’ 밖에 없다는 말이다.

◈ 당신은 왜 십자가에서 한 발자국도?

정낙원 목사님이 이 십자가를 이야기하니 양의 탈을 쓴 무리들이 시비를 걸었다고 하는데, “왜 십자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벗어나면 정말로 큰일난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에서 벗어나면 종교가 기다리고 있고, 또 개혁주의 신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십자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자아가 생기는데, 그러면 여기에는 마귀들이 수두룩하게 달라붙어서, “좀 더 완벽해라, 성화가 되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질문을 하기를, 이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즉 “성도가 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이 곧 교재 29페이지의 제목인데, 즉 ‘거꾸로 사는 삶’ 이란 말이다. 이와 같은 제목의 책이 박기삼 씨에 의해 나왔었는데, 그런데 ‘거꾸로 사는 삶’은 몸 자체가 거꾸로 되어야 하는데, 머리만 거꾸로 뒤집어지면 그것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전체가 모두 거꾸로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무슨 보일러인가?)

이제 교재 29페이지를 살펴보자.

** [거꾸로 사는 삶] -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거꾸로 사는 것으로 대응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 정반대로 사시는 것이다. 거꾸로 산다는 것은, 세상 끝자락을 휘어지게 해서 지금 자리와 겹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이로서 이 세상이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 끝과 현재를 중첩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거꾸로 사는 삶 !!

여기에 보면 “거꾸로 산다는 것은, 세상 끝자락을 휘어지게 해서 지금 자리와 겹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베이비 원 모어 타임’ 이란 노래가 저절로 생각이 나는데, 양 손가락 끝을 서로 이렇게 붙이는 율동이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도 제대로 잘 안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예수님에게 있어서 거꾸로 사는 삶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 이 세상에서 여기가 창세기이고, 또 여기가 요한계시록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끝을 잡아서 뒤집어서 휘게 해서, 지금의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과 만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거꾸로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묵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이 세상의 끝이 종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 안에 종말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런 역사 끝의 삶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벌써 살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힘이 들어서 그러한데, 주님이 영생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미 역사의 끝의 삶을, 여기서 역사 끝은 역사의 거의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심판 이후를 의미하는데, 그렇게 심판이 이미 끝이 난 삶인데, 그것을 두고 ‘자유’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것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의 상태 !!

그래서 간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데, 분명히 간음을 했는데 놀랍게도 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죄를 지었는데, 그 끝이 괜찮다는 말이다. 분명히 자기는 지금 교도소에 있는데, 그런데 죄가 없다는 것이다. 즉 거지인데 천국에 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종말이 겹쳐서 그러한데, 그렇게 겹치는 것을 어떻게 받는고 하니, 성령 안에서 한꺼번에 다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종말의 영인데, 즉 이미 겹쳐진 예수님의 영인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간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닌데, 그 상태를 의의 상태라고 하고,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두고 의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했다고 의인인가? 무엇을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믿었다고 의인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가? 그것은 문자적으로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양 몇 마리의 차원이 아니라, 또한 마누라를 몇 명 더 거느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조금은 부럽기는 하지만 말이다(ㅋㅋ).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즉 오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믿게 된 것이 복이라는 말이다. 그 복이 곧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다고 놀리는 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는 자들의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까, 삼위일체를 모르느냐는 것인데, 즉 성부, 성자, 성령을 골고루 다 균형이 있게 이야기해야지, 왜 예수님만을 그렇게 강조하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또 십자가 중심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근거가 바로 신학이라는 것인데, 그런 신학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그 신학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도 바로 유대인들의 신학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고 말이다. 그러니 “세호야, 신학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물 속에서는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데, 따라서 물 속에서 바로 보이는 것이 있다면, 실은 그것이 굽어진 것이다. 물이 가득한 그릇처럼 죄로 가득히 차 있는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분이 오셨을 때, 모두들 그분을 오해했다. 
 
◈ 엄마, 젓가락이 그만 휘어졌어요 !!

여기서 제가 물 속에서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죄 속에서 메시야가 휘어져 보인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보고서 아이는 “엄마, 젓가락이 그만 휘어졌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뭐라고 하겠는가? “물 속에서 빼봐” 라고 하면, 다시 아들은 “어, 젓가락을 빼니 그만 괜찮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만물의 ‘차이’가 과연 ‘죄’ 인가?

그런데 그렇게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 것은, 그 젓가락 주변에 물이 있기 때문인데, 그 물로 인해서 빛의 반사하는 각도가 달라서, 즉 차이가 나서 말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는 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차이’ 라는 것인데, 물론 들뢰즈는 그 차이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차이 자체를 ‘죄’ 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죄는 모든 개념을, 즉 율법 개념, 땅 개념, 복 개념, 저주 개념, 구원 개념, 생명 개념, 선악과 개념, 계시 개념, 신 개념, 우상 개념 등등, 그런 모든 것들을 휘어지게 만다는 것이다. 즉 천국을 지옥이라고 하고, 지옥을 천국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것을 모조리 다 바꾸어 놓는데, 즉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아무도 모르게 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맹세한 것은 지키라고 했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고, 또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리고 하고, 그런 식으로 말이다.

◈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넓은 길을 보장받기 위해서 나오는데, 그러니까 점 집이고 무당 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교회의 목사가 “여러분,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라고 하면, 누가 그런 교회에 가겠느냐는 말이다.

교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김 집사, 대구 지묘동에 가면 좁을 길로 가야한다고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그 교회에 한번 가자” 라고 해서 교회에 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온 사람들조차도 “그 목사는 너무 부정적이라서 안 돼” 라고 하면서 빠져나간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교회 교인들의 경우에는, 자기들은 오기 싫은데 주님께 사로잡혀서 할 수 없이 오지 싶은데, 아닌가요?

흔히들 어떻게 교회에 가는가? “야, 저기에 있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모두 다 들어준다고 하는데, 우리 저 교회에 한번 가자” 라고 해서 간다는 것이다. 마치 갓바위처럼 말이다. 저 갓바위는 바위가 갓을 쓰고 있어서 유명해진 것이 아니고, 노태우 대통령의 어머니가 거기서 기도해서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래서 저렇게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 교회에 안 나와도, 즐겁게 안 나오시기를 ??

이런 것이 정말로 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닌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요일이고 수요일이고 간에 항상 모이기를 힘썼는데, 그런데 억지로 모인 것이 아니라 즐겁게 모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목회방침도 그러한데, “교회에 안 나와도 좋은데, 즐겁게 안 나오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제가 강제로 “여러분, 좁은 길로 갑시다” 라고 해서, 그런 기준을 만들어버리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양심이 고와서 억지로 거기에 따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건 좁은 길도 아니고, 억지로 가는 ‘억지 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좁은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인도하는 가짜 교회가 되고 마는데, 그러니 교인들이 조금이라도 하기 싫어하고 머뭇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인다면, 목사는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도 당장에 걷어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생각에는 옳은 것이라고 여겨져도 말이다.

◈ 웃으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

그러니 진짜 좁은 길을 만난 사람은 “야, 나에게 웬 영생의 길이,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즐겁게 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오후예배도 즐겁게, 또 수요예배도 즐겁게, 물론 헌금을 해도 즐겁게 하고 말이다. 즉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즐겁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잘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웃으면서 기쁘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얼마나 복음의 빛난 광채를 보았으면 이 세상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던 것처럼 말이다. 교회에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정작 본인이 망하게 된 인간인데, 그렇게 망해버린 인간에게 무슨 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쁨,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세상이 모두들 넓은 길로 찾아 나설 때, 신앙인은 좁은 길을 가게 된다. 일부러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만나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길이란 내 쪽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길의 끝 지점에서부터 거꾸로 뻗어 나와서 나를 찾기 때문이다.  

◈ 어느 틈에 그만 넓은 길이 !!

우리가 찾아서 가는 좁은 길은, 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인가 그만 넓은 길이 되고 마는데, 즉 사람의 습관은 힘든 일도 자꾸만 하면 말뚝을 박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는 굉장히 수월하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교도소를 하도 들락거려서 집을 교도소 안에 구입했다고 하는데, 교도소 안이 편하다고 하면서 말이다(ㅋㅋ). 마치 교도소가 자기 집처럼 편안하다는 것이다.

왜 ‘쇼생크 탈출’ 이라는 영화를 보면, 35년인가 복역한 노인이 사회에 나와서는 그만 교도소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보다 교도소가 더 편안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알고서 교도소에는 받아주지 않는데, 그러면 교도소가 아니니 말이다. 교도소는 힘들게 교화를 하는 곳이어야 하니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만 자기 습관화가 되는데, 그러니 좁은 길이 그만 자기도 모르게 넓은 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불치병에 걸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극적으로 그 병에서 낫게 되어서, 그것을 간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병에 걸렸을 때는 좁은 길이었지만, 그러니 병이 다 나아서 간증을 하면서 돌아다닐 때부터는 이미 그 길이 넓은 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목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목사를 시켜놓았더니만, 그런데 목사들이 그만 넓은 길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말씀을 보는 것보다 등산을 더 좋아하고 말이다.

◈ 앞으로, 간식은 강의가 끝나고 ??

물론 저도 그러한데, 어디 강의를 하려고 가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강의보다도 그 음식이 더 당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넓은 길인데, 그런데 다행하게도 저는 강의를 하기 하기 전에는 무엇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를 않는데, 긴장이 되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강의가 끝나고 나면 그만 맛있는 것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로서 신앙인은 늘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며 그 길을 간다. 세상이 세상 것을 달라고 기도할 때 성도는 말씀의 세계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성도의 기도는, 말씀의 세계를 알게 해달라고 !!

이렇게 말씀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교회에 와도 항상 설교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말씀이 증거되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제가 그렇게 설교를 잘 들으면 제가 원하는 것을 줍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로 챙겨놓고는, 그렇게 그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목사가 시키는 것을 힘이 들어도 할 수 없이 한다는 말이다. 헌금이나 봉사가 다 말이다.

그러니 목사도 무엇을 시킨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데, 그렇게 시키지 말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말씀을 듣고 그것이 좋아서, 또 말씀을 듣도록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목사의 시키는 것을 그대로 순종하는데, 그것은 노림수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시키는 데로 해서 복을 따내려고 말이다. 자식을 시집을 잘 보내려고 한다든지, 물론 목사는 교회가 부흥이 되게 한다든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때, 성도는 그 판단으로서 다른 메시야가 행세함을 안다. 성도는 장님처럼 세상이 깜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다.

성도는 가짜 메시야가 누구인지도 아는데,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깜깜하게 바라볼 줄도 아는데, 즉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다이아몬드에 미쳐서 날뛰어도 그것이 돌로 보인다는 것이다. 복음의 더 빛난 광채에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말이다. 최영 장군이 “황금을 보기는 돌같이 하라” 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물론 그 양반은 전혀 복음은 모르고 자기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을 했겠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 두 개의 상이한 세계가 생겼다. 한 쪽은 예수님이 있으나 없으나 무관하게 그냥 지내왔던 것처럼 그대로 사는 세계이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한 쪽은, 기존의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그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세계이다.

◈ 퀴즈 - 사도행전과 한일전 축구의 관련성을 쓰세요 !!

저는 이 짧은 문장을 쓰면서 큰 은혜를 받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지금 한일전 축구를 한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사도행전의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강도사 고시로 기가 막히는데 말이다. 도대체 야구경기가 사도행전과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교인들이 평소에는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중요한 야구나 축구경기를 하게 되면, 거기에 신경을 더 쓴다는 것이다.

◈ ‘무심코’ 살아가는 사람들 !!

그런데 이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복음을 처음 안 목사들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무심코 살아가는 사람들을 복음의 세계로 끌어당기려고 하니, 여기에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무심코’ 라는 것은, 죄 의식도 전혀 없이 평소에 자기가 하던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연속극을 좋아하고, 야구를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또 여자를 좋아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연속극을 좋아하는 것을 죄라고 여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는데, 왜 그런가? 무심코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심코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와,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는 두 종류의 세계가 이 사도행전에 나란히 나와있다는 것이다. 무심코 살아가는 사람들 뭐가 답답해서 굳이 예수님의 세계를 찾겠는가? 그야말로 무심코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러니 주일날에 교회에 와서도 집으로 부리나케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 말이다. 기껏해야 등산이나 가고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느 세계가 더 중요한고 하니까, 무심코 살아가는 자기 일상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에게 사도행전을 이야기하게 되면, 무심코 살아가는 자기의 세계가 잘못된 것을 모른다고 하면, 이 사도행전을 제 아무리 목사가 열심히 설교해도 그런 사람은 이 사도행전의 세계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가 무심코 살아가는 이상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한 쪽은 예수님이 있으나 없으나 무관하게 그냥 지내왔던 것처럼 그대로 사는 세계이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한 쪽은, 기존의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그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세계이다.

아무튼 한 쪽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해서는 돈을 벌고 말이다. 또 집에 와서는 밤에 잠을 자고 말이다. 그리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바둑이나 두고, 영화나 즐기면서 말이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 그러니 이제는 아니야, 아니냐 !!

그런데 다른 한 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답답해서 “그게 아니야. 그렇게 살면 안 돼. 그쪽은 전혀 살 수 있는 길이 아니야” 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무심코 사는 이 세상을 묵인했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묵인을 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심판을 준비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은 너무나도 답답해서 자기 감정을(?) 마구 분출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묵인하고 봐주었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날은 다 끝나고 심판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곧 사도행전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은 매일같이 한쪽 세계, 곧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 안에 있는 것들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사는 중이다. 따라서 이런 자연스러운 세상관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다른 쪽 세계가 무척 건방지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세계인가? 왜 이처럼 두 개의 세계로 나눠지게 되는가? 왜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가? 왜 선택을 강요하는 부담을 주는가?
 
◈ 왜 선택을 강요하는 부담을 주는가?

그러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 살아가는 자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이렇게 자기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다른 쪽 세계가 너무나 건방지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시건방을 떠는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사고방식이냐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학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리는 복음만 들으러 왔으니, 복음만 듣고 가면 된다” 라고, 즉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고, 너거는 너거 갈 길을 가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가 시비를 거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과연 사도행전이 그러하냐는 것이다.

◈ 봉사 - 아, 저것은 아닌데 !!

물론 그렇게 하면 서로가 편하고 좋은데,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말씀에 부합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그것이 아닌데, 사도행전은 무심코 사는 사람들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아하, 저것은 틀렸는데” 라고 하면서 제대로 지적해주는 것을 봉사라고 한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봉사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즉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봉사가 아니고, “그것은 아닙니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봉사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외친 것이  또한 그것이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그동안 다정했던 친한 친구들이 한두 명씩 다 떨어져 나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교회에서 조용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니, 나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잘 살아가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가?” 라고 한다면,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세상을 둘로 나누어서 하나가 되어서 다같이 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고 부담을 주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교재 31페이지에 있는 사도행전 17장 30절과 31절 말씀인데, 한번 찾아보자.

(행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믿음의 내용은 이미 확정 !!

그러니 자기가 병이 낫고 복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믿음은 그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의 내용은 이미 하나로 확정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을 믿는 것을 곧 믿음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리 믿어도 믿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우에도 보면, 특히 천태종에 소속된 절에 가면 그런 병을 고치는 기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간증을 모아놓은 책자도 이미 다 나와있고 말이다. 심지어 방언까지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사실 모든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비록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한 분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이 세상을 멸망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외치는 세계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불이 떨어지지 이전에 단 한 사람만 이 멸망을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같은 집안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마치 밑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솥두껑 위에 놓여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 단어 하나, 문자 하나,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 문제는, ‘~전에(before)’ 때문에 !!

지금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이 ‘~전에’ 라는 것 때문에 말이다. 현재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데, 그래서 힘들게 모이는 것이고 말이다. 아직도 예수님은 재림할 기미조차도 전혀 보이지를 않는데, 그런데도 왜 우리가 이렇게 외치고 또 외쳐야 하느냐는 말이다. 역시 이 ‘~전에’ 라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선지자가 왜 오는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전에’ 라는 것 때문에 말이다. 즉 선지자가 나팔을 불지 않으면 종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논의가 가능한데, 그렇게 선지자가 외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종말이 오는지, 아니면 이미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렇게 외치는지 말이다.

◈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선지자를 보내서 원인을 !!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이미 결정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된 원인을 만들고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미 결정이 다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이 되는 원인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고, 그래서 선지자는 와서 외치고 또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인을 일부러 만드시는데, 즉 이미 결정이 되었기에, 그 원인도 결정이 된 상태에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뭐가 잘났다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전에’ 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말이다. 지금은 이렇게 ‘~전에’ 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지,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열 처녀 비유 - ‘~전에’ !!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전에’ 라는 것을 아주 강조한 비유가 나오는데, 소위 ‘열 처녀 비유’ 라고 하는데, 이 열 명의 처녀는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사실은 모두가 다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자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어나서 그 다음에 등불에 기름이 준비되어있다면, 비록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을 자더라도, 몰론 “신랑이 온다” 라는 것을 들러리 천사가 이야기를 해주니 되고 말이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나서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인데, 즉 “준비된 기름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다섯 처녀는 기름이 준비되어서 구원을 받았고, 그런데 그렇지가 못한 다섯 처녀는 유감스럽게도 그만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나’ 라고 하는 존재는 바로 그렇게 기름을 준비하라고, 그 자리에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로서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구원을 받으려고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실 신랑이 기름을 준비하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들이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은 전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것을 제가 수천 수백 번을 이야기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 오게 되면, 그냥 그대로 주님의 뜻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이 아니면 등기이전을 마음대로 못하듯이 말이다.

◈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이기에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도둑질이 나쁜가? 아니면 그것이 ‘내 것’ 이라고 여기는 것이 나쁜가?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나쁜데, 왜냐하면 자기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소유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도둑질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가?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착한 자기 자신이 자기 것이 되고 마니,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착함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것이 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전에’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미리 구원을 받았는데, 즉 주님이 맞이할 그 장치가 주님의 뜻에 의해서, 즉 주님이 주신 약속에 의해서 들어와 버렸다는 말이다. 우리가 들어오게 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그 주님이 미리 주신 약속을 끄집어내어서, 그래서 신랑을 맞이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름은 약속을 의미?)

그렇다면 비참하게 쫓겨난 다섯 처녀는 왜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는가? 혼인잔치에 참석하려고 했다면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아마 오늘(?) 준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기들 생각이고 말이다.

◈ 여기서 ‘농담’ 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질 때 롯을 구원한 것은, 이 롯이 바로 그 당시의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롯이 자기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 있으면 오거든” 라고 말이다. 즉 “천사가 와서 이제 이 성은 멸망을 당한다고 했으니 빨리 떠나자” 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농담’ 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이냐는 것이다. 왜 사위들이 그런 말을 했느냐는 말이다. 

잠시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기존의 언어에는 의미가 있는데, 하지만 언어 자체의 의미는 무시되고 문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문법은 그 당시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사과’ 라고 했을 때, 이렇게 “ㅅ+ ㅏ,  ㄱ+ ㅗ+ ㅏ” 라는 글자와 실제 사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사과는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사과인데 말이다. 이 글자는 먹어도 전혀 맛이 없는데, 물론 먹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분명히 안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사과’ 라고 표현할 수 있는고 하니,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ㅅ+ ㅏ,  ㄱ+ ㅗ+ ㅏ” 라고 하자고 약속이 된 체계가 있는데, 바로 그런 체계가 문법체계이고, 언어체계라고 할 수 있데, 바로 그 체계에 인간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 뭉쳐져 들어있다는 것이다. 기존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말이다.

◈ 디비디바비디부 ??

그렇다면 거기에다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농담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요즘 유행하는 ‘디비디바비디부(?)’ 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그러니 전혀 서로가 일치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즉 전혀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혹시 니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아나?” 라고 하면, 상대방은 “나는 몰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을 보고 “니는 아나?” 라고 하면, 그도 역시 “나도 모르는데” 라고 하면, 그러면 “이것은 틀렸네” 라고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롯이 평소에 삶에 있어서 모범을 보이지 못해서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다고 하는, 그 따위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말씀에 무지하면 그런 소리가 다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분명히 롯이 선지자인데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선악구조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엉터리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 아니, 성도가 지옥으로 보내는 원인 제공자라고 ??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 3장에서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된 개념들을 이야기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전한 복음 때문에, 그것이 바로 원인이 되어서, 즉 그렇게 거꾸로 된 개념의 복음을 전했다고 핍박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들이 지옥에 가도록 하는, 그런 원인 제공자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모습이고,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마지막 때에 말이다. (갑자가 머리가, 띵!)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용이 조금 복잡해졌는데, 하지만 제 아무리 복잡해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농담이라는 것은,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듣지 못하던 이야기인데, 그것은 자기들에게 전혀 부합이 되지 않기에 그들은 농담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위들은 무엇을 더 믿겠다는 것인가? 천사를 만나서 전하는 장인 어른의 말보다도, 오히려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기존 세상인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사람들의 의견을 그대로 인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이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언어가 문제가 아니고, 또한 원어연구가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심봤다!” 라는 것인데, 즉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뛰어가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 외침이 나와야하는 것이지, 신학적으로 어떻게 맞는지 틀리는지,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여기에 대해서 기존의 세계는 농담, 농담, 온통 가벼운 농담으로 처리한다. 즉 심판에 대한 가벼움이다. 지옥이란, 그냥 고요히 있는 동네가 아니라 반(反) 천국운동을 벌이는 곳이다.

◈ 농담, 농담, 농담 !!

요즘은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데, 즉 설교시간에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가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데, 흔히들 말하는 존재에 대한 가벼움이 아니고, 심판에 대한 가벼움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지옥에 속한 자와 천국에 속한 자는 모두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구성원이요, 조직원들이다. 또한 그들의 소유주가 각각 다 다르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다. 반면에 불신자는 사나 죽으나 악마의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성도는, 약속이 덮쳐진 사람들 !!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유월절이 왜 생겨났는가? 그 유월절을 우리가 전혀 만들지도 못하는데, 왜 그런 유월절이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유월절이 있어야 애굽인들과 히브리인들이 서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약속이 덮쳐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까 덮쳐진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될 약속에 대해서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러니 마지막 죽음의 사자가 왔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그 대처 방식조차도 자기가 지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통성기도를 하고 부흥회를 열어도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심판의 천사 앞에서, 구원을 받을 그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집어넣어지는데, 즉 충분하게 문설주에 피를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면 안 되는데, 물론 그때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 당신은 이단이야 ??

그러니 지옥에서 “너는 이단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냐는 말이다. 당연히 지옥에서는 “너는 우리와 같은 편이 아니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이단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양의 탈을 쓴 무리에서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도 안티가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인데, 교회 안에 안티가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을 통해서 항상 연단을 받게 하시니 말이다. 그렇게 안티가 있어야만, 약속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약속이 아닌 것과 구별이 되면서 말이다.

◈ 성도가 내세울 것은 오직 ‘약속’ 밖에 !!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을 서로 경계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성도는 약속과 약속이 아닌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저들과 너무나도 똑같은 인간이기에 말이다. 성격도 엄청 급하고, 고집도 나무나 세고, 또한 자기 것밖에 전혀 모르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내세울 것은 오직 약속밖에 없는데, 즉 무엇을 해도 약속을 내세워서 해야만 하는데, 그런데 약속이 아닌 다른 것을 내세우게 되면, 그만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답답해지고 마는데, 그러니 약속을 제발 좀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의 설교는 교회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약속만을 내세워야 하는데, 복음만 말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엇이 겁나서 하나님의 약속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악마의 종들이 하는 일은 목적이 있다. 어떻게든 선택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천국으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꾸 가짜를 생산하는 것이다. 가짜 사도, 가짜 교회, 가짜 천국, 가짜 십자가, 가짜 성화, 가짜 예수, 가짜 성령 등등, 이런 것들을 대규모로 유포를 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 양 현혹을 시킨다.

◈ 외로워 외로워서 !!

마귀는 이렇게 가짜 명함을 마구 뿌리는데, 가짜 사도, 가짜 교회, 가짜 천국, 가짜 성화 등등을 자기 스스로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도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자로 자기와의 싸움인데, 왜냐하면 진짜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상대방과는 지진이 일어나서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혼자 남게 되니 그만 외롭다는 것이다.

정낙원 목사님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번에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 서울에 계신 목사님들이 몇 분 내려오신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너무나 외롭다는 것이다. 외로워서 참석을 한다는 말이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겠어요” 라는 노래도 있는데, 아마 문주란이 불렀지 싶은데, 아닌가요?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주위 사람들이 아무리 주목해주지 않은 내용을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권태로운 짓인가! 당장 땟거리가 없이 온 가족이 거리에 나가서 앉게 된 마당에 아직도 예수 타령이나 한다고 해서 현실이 속히 달라질 리는 없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배부를 때나 복음이 아닌가?

◈ 찬양은 ‘나다나엘’ 처럼 !!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조 장로님이 질문을 올린 것이 있는데, “찬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해서, 아마 신학생들이 질문한 것을 장로님이 다시금 정리를 해서 올려놓았지 싶은데, 조 장로님이 요즘에 인터넷으로 신학교 강의를 하니까 말이다.

거기에 대한 제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나다나엘을 이야기했는데,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젊은 아이들이 자꾸 분위기에 휩쓸린다는 것이다. 박수도 쳐야되고, 소리도 질러야 하고 말이다.

그러니 나다나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가 아니라, 그야말로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이라는 말이다. 어떤 경웅에는 마치 이승철의 리사이틀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에게 찬양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혼자서 하라고 하면 하지 않는데, 그러니 그것이 무슨 기도이고 찬양이냐는 것이다.

◈ ‘제임스 리’ 목사를 기억하며 !!

‘제임스 리’ 목사가 자기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 마을에 올린 글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교인이 있던 없던 간에 자기 혼자 죽어야 하는데, 바로 그러한 ‘제임스 리’ 목사의 글처럼 말이다. 즉 “나는 요럼시롬(요렇게?) 죽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서 “아무리 주목해주지 않은 내용을 혼자 중얼거리고, 당장에 땟거리가 없이 온 가족이 거리에 나가서 앉게 된 마당에” 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거지 나사로라는 것이다. 거지가 찬양을 한다고 해서 거지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복음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가 배가 부를 때, 그럴 때 말하는 그러한 복음이 아니냐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데, 목사가 되어서 교인이 없다고 삐쳐서 성경말씀도 전혀 보지 않고 말이다. 아니, 성경말씀을 보는 것과 교인이 있고 없고 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 목사가 말씀을 보지 않는다면?

그런데 목사가 되어서 교인이 없다고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면 그동안 성경말씀을 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니 은근히 노리는 것이 바로 영업을 위해서, 교회장사를 하려고 말씀을 본 것에, 아니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마케팅 서적은 얼마든지 그렇게 봐도 되겠지만, 그러나 이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돈까스 집을 해도, 그 바쁜 와중에서도 성경말씀을 매일 착실히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저의 일방적인 주장인데, 아마 이 부분을 녹취하면서 뜨끔할 수도 있지 싶은데 말이다. (돈까스 집 주인장 - 전혀 뜨끔하지 않습니다. 녹취를 하려면 성경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습니다. 강의도중 말씀하신 것과 성경구절이 다른 것이 많아서 확인한다고 말입니다.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도행전 5장을 보면, 하루 동안 두 사람이 교회에서 죽어서 나간다. 돈의 일부를 감추어놓고서 헌금을 한 죄였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은 사람을 속임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였다” 라고 말이다. 성령님이 계시는 교회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가볍고 만만하게 본 것이다. 당연히 사단의 역사이다.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이다.

(행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주여, 우리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게 하소서 ??

여기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는 우리교회의 윤덕귀(?) 집사님의 기도가 생각하는데, 그분이 주일오후 예배시간에 뭐라고 기도했는고 하니, “주여, 우리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게 하소서” 라고 했다는 말이다(ㅋㅋ).

그러니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사단이 주의 영을 시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렇게 시험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전혀 시험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믿음은 말씀자체가 덮치는 것이지, 자기가 믿어주는 식이 아니기에 말이다. 자기가 측정하고 판단해서 말이다. 이것은 그냥 말씀이 덮치는 방식인데, 아까 말한 것처럼 “됐나? - 됐심더!” 라고 말이다.
 
◈ 됐나 - 됐심더 !!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 이삭을 바쳐라. 됐나? - 됐심더!”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빵빵한 에어컨보다도 더 시원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시원한지 속이 다 시릴 정도라는 말이다.

사랑이 임하게 되면 두려움이 없듯이, 그렇게 속이 시원한데 뭐가 겁이 나고 말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즉 “됐나? - 됐심더!” 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 괴물이 있는지 몰라도, 자기 속에서  “됐나? - 됐심더!” 라는 것이 자꾸 들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는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노’가 아니라 ‘예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목회실패나 인생실패, 그런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를 받은 사람은 성공을 해도 그것이 독 실패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 자체가 실패한 한 토막에 불과하니 말이다.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현대인들의 삶은 목적도 이유도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부터 가볍게 다룬다. 그 버릇이 교회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농담과 가벼움으로 성령의 일하심을 테스트한다. 진지한 것은 오직 돈을 세는 떨리는 손 느낌뿐이다.

그러니 돈이 진지한 것이지, 성경말씀을 펴놓고는 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진지해야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성경말씀인데, 그것이 곧 생명인데,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쏟아 부어주시려고 성경말씀을 펴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목사가 헌금에 신경을 쓴다고 하면, 그 자체가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교회에서 성경책을 펴고 설교하는 자도 복음과 세상 멸망을 농으로 여기고, 그 밑에서 성경책을 펴들고 듣는 그들도 역시 농으로 받아넘긴다. 너도 농담, 나도 농담, 모든 교회가 진지함을 상실하기로 작심했다. 화끈한 기적의 이벤트가 벌어지면 그때야 진담으로 믿겠다는 것이다.

여기 ‘그 밑에서’ 라고 하니 생각이 나는데, 경북 청도에 가면 각북교회라고 있는데, 강대상이 얼마나 높은지, 그야말로 삼층천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실제로 그 강대상에 올라가 보았는데, 거기서 교인들이 앉는 의자를 쳐다보면, 저기 아래로 보인다는 것이다. 바로 그 밑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강대상에 있는 목사도 농담으로 설교하고, 물론 그 밑에 있는 교인들도 농담으로 듣고, 그렇게 모두가 다 농담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농담 따먹기를 하듯이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기 직전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북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말이다(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누구 하나 세상 멸망과 십자가 피를 진지하게 여기는 자가 있다면, 추방당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왜 눈치 없이 부담을 주는 언행을 일삼느냐는 죄목이다. 성경을 펼쳐놓고 둘러앉아 주고받는 대화는 “성경을 진담으로 여길 근거가 희박하다” 라는 체험담뿐이다.

교인들이 모여 앉아서 예배를 마치고 밥을 먹으면서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진담이 아니라 농담이라는 식으로 대화를 몰고 가는데, 그리고 나서는 세상 이야기로 입가심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에피타이저(디저트?)로 말이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무리 기적을 모른다. 그것은 요나의 기적이다. 죽음으로 인해서 땅에 묻히는 행위가 곧 기적이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사라져주는 기적, 이것이 이 세상의 종말을 말해주는 진정한 기적이다. 이것보다 더 적절한 기적은 없다. 이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메시야마저도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악하고 악한 세상인데, 그러니 멸망을 당해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흔적들, 그런 것만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도는 그런 기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참으로 위험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주님이 주신 생명나무가 아니라고 하면, 저희들도 역시 무심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그런데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십자가를 알게 해주시고, 그 메시야가 바로 저희들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저희들을 떠나는 자들로 만들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희들 앞에 다가오는 것이 모두가 다 좁은 길이고, 또한 그 길이 영생의 길이고 구원의 길임을 알고,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6 오후 11시 30분에 마침.

                                                 요즘 십자가 마을이 강사문제로 조금 뜨거운데,
                                        이런 강의를 과연 누가 또 할 수 있을까?  바로 여러분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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