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러진 길

2010년 2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0-12

(렘 14:10, 개정)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렘 14:11, 개정)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렘 14:12, 개정)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선지자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백성들에게 있어 선지자란 축복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인식을 견지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대로라면 선지자란 축복주려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를 주기 위해 등장하신 분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면 으레 축복주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저주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날때부터 자기를 ‘선한 의지’를 가진 자로 규정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변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다 자신의 선함에 협조하기 위해 벌어진 일로 간주하고 맙니다. 즉 그 어떤 경우도 자신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럽고 저주받아야 함을 알려주는 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 오류가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비롯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처단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 눈에 뜨이는 사람들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경유해서 눈에 보이는 자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신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에는 아무런 하자나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관계가 정상적이라고 간주하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자를 판단하게 되는 그들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악마적인 요소라고 단정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들었습니다. 이 때 사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순되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즉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분명히 사울은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놓고 곧 이어 “누구십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울은 자기에게 찾아온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한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입니다. 이로서 그동안 사울이란 사람이 경유했다는 그 하나님은 실은 악마가 심어준 허상적인 여호와였습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의 모든 신 개념은 다 악마가 심어넣어준 개념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사울이 경험한 바와 같은 경로를 거쳐야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으로부터 인하여 밉상받고 핍박받는 그런 분‘으로서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흠모할 거리가 있는 메시야를 메시야로 모시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흠모할 것이 없는 분’입니다. 이로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구약을 해석하면서 인간에서부터 출발해서 바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을 잘못된 하나님이 되고 반드시 십자가 새언약을 통해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주하시는 하나님이고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어서도 아니되고, 그들의 금식이나 기도도 듣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나타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로 인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즉 새언약으로 들어가서 구약을 해석하게 되면, 이 땅은 쉴새없이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곳입니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그들은 저주 천지의 세계에서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생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운명입니다.

이 생존차원에서 사람들은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면서 신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해석 오류가 발생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광야 시절의 경우를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게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그들은 자기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만나 주심은 생존차원에서의 인간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차원에서 주시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존차원에서 생각하기를, 이 땅에서 고생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죽어서는 천국, 곧 생명의 나라에 넣어주리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 과실을 아예 못먹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고생을 근거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광야를 거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의 땅이란 약속+땅입니다. 곧 저주가 뿜어져올라오는 땅이 약속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서 덮어지는 겁니다. 이 약속은 바로 생존이 아니라 생명차원에서 거저 주시는 것이요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의미를 잊어버리면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에 그대로 노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란 그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라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자매가 예수님에게 화를 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차원에서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차원에서 볼 줄 모르는 이 자매를 보고 예수님은 도리어 우십니다. 즉 나사로는 생존의 차워에서 죽어야 생명의 차원에서 사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주의 땅에서 죽으시고 생명의 나라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생존차원 밖에 모르기에 차라리 이 땅에는 죽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랑에게 신부란 자신의 영광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자기 신부를 위하여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해주시게 되면 이제 신부는 생존의 세계에서 죽어도 생명의 세계에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 생존차원에서 축복이라고 여기는 그 껍데기는 과감하게 벗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저주성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의 차원이 따로 있음을 압니다. 이럴 경우에만 진짜 은혜가 뭔지 축복이 뭔지를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갖고 사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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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4:10-12/어그러진길)

2010-02-06 09:14:42   녹취 : 오용익
 
20100203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예레미야 14장 10-12절/어그러진 길(이 근호목사)

(기도)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시 105:30,31)

하나님, 저희들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의 즐거움 이전에 하나님의 자기즐거움의 일인 줄, 행사인 줄 압니다. 성령 받은 자로서 우리 즐거움보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눈치 채고 느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다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이 우리한테 있으려면, 또 있다는 증거는 자꾸 우리가 낮아진다는데 있습니다. 낮아지면 우리의 마음은 자꾸 비워지고 빈공간이 생기고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의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높아지고 교만하면 주님의 사랑이 추방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사랑 증거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 증거 하려면 우리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의 사랑이 많이 증거 된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낮출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마음이 텅텅 비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세상 것들이 우리의 구석구석을 몽땅 다 차지해서 주님 생각할 시간도 없고 하나님께 감사할 시간도 없고 세상과 경쟁에 나서기에 분주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투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그런 식으로 세월 보내는 저희들 되지 말게 하시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그런 사건인 줄 알고 주님의 사랑만 듬뿍 증거 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4장 10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4:10-12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선지자한테 여호와하나님께서 방금 우리가 읽었던 이러한 계시가 직접 주어졌습니다. 선지자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백성들은 이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그런 잘못된 선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판하러 왔다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이 그런 모양입니다. 자기주변에서 뭔가 일이 터지고 신기한 일이 생기면 무조건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들어 있어요. 이 땅에 사는 나의 잘못된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 날 저주하기 위해서 왔다는 생각을 추호도 먹지를 않습니다.

축복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셨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몰라서 그래요. 우리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주변에 대해서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부르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은 구약의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선지자가 때문에 예수님 계통에 속합니다. 노선이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 있습니다. 그 증거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 이야기하실 때 엘리야가 나타나고 모세도 나타났어요.

그래서 신약의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모세에 관해서 또는 엘리야에 관해서 구약전체에 관해서 해석할 때, 인간 쪽에서 직접 모세가 엘리야를 해석할 수 없고 예수님 쪽으로 가서 예수님과 그들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가지고 해석이 되어야 그것이 사도들의 해석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해석한다든지 이해하려고 하면 일단 자기 자신이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것을 바탕에 깔고 누구를 해석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밑바탕에 들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역시 나는 착해.’ 이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착한 내가 착하게 너를 해석해주겠다.’ 라는 식으로 자기착함을 견지하는 쪽으로 그렇게 주변을 이해하지요.

그런데 예수님 쪽으로 가서 구약의 성경과 선지자들을 생각해버리면 우리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무엇으로 발각되느냐 하면 우리가 죄인으로 발각됩니다. 죄인으로 발각되면서 더불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채 해석했다면 그것은 백 프로 거짓말이고 그것 또한 죄가 된다는 거죠.

쉽게 예를 들어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 거기에 찬동했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스데반 집사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어디를 경유해서 나온 해석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어디를 경유했느냐 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이에요. 여호와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냥 믿은 것이 아니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으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서 여호와를 섬겼던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유해서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보이는 예수 믿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유했다고 생각하고, 신을 경유하고 참되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유했다고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하고 있는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믿는 하나님 앞에 더욱더 충성하고 신앙생활 잘 하려면 어떤 조치를 해야 되느냐 하면 저 나사렛 예수를 믿는 이단을 척결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공식이 자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울은 분명히 생각했을 겁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 어떤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그 돈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내 자존심을 건드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그렇게 단정을 지었지요.

그것이 사울에게는 진리가 되는데요. 자기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사이에는 정상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믿어졌기 때문에, 자기와 하나님사이가 정상적이라면 거기에 반대하는 예수 믿는 자들의 출현은 용서가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나오지요. 사울이 다메섹에서 내려가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사울이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발언을 해요. ‘주여!’라고 했고 그 다음에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아저씨, 누구십니까?’ 아저씨 누구십니까, 이것은 말이 되는데 주여, 라고 해 놓고……, 그러니까 사울은 자기에게 찾아온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았어요. 주여, 라고 해놓고 하는 말이 누구십니까, 라고 한 거예요.

주여, 라고 할 때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는 말인데,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울이 자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세계를 충분히 경유했다, 그걸 통과했다고 해서 자기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경유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여호와세계에 무엇을 바꿔치기 했느냐 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을 바꿔치기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할 때 주여, 라고 하는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예수다.”라고 한 겁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가 지어낸, 악마가 지어낸 하나님입니다.

모든 인간의 하나님은 마귀가 집어넣은 인간들의 상상에 의한 신 존재였습니다. 나사렛예수와 만나려면 반드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는 기존에 잘못된 하나님 때문에 나사렛예수를 시시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세월을 지금까지 보냈습니다.’라는 것을 사울처럼 자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나사렛 예수를 만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만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경과했던 그 과정을 빼놓고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경우에는 나사렛 예수도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핍박받고 저주받는 그런 대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관계를 뒤집어놓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정말 여러분이 나사렛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한테 공격당해야 됩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대로 진짜 십자가한테 공격당해야 돼요. 그 공격을 사울당시에 사실은 누가 했는가?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공격을 했습니다. 성도들이 공격을 하니까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저 인간들을 때려죽이는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견지할 수 있는, 확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사울에게 맞아죽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고 잡혀간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사울에게 맞아죽는 바로 그 자리에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집어넣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이해한다고요? 무슨 수로 우리가 예레미야를 이해합니까?

예수님 새 언약 쪽으로 가지 아니하면 예레미야가 이해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옛 언약, 구약 속에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새 언약의 완성자인데 우리가, 인간이 직접 구약을 해석할 수 없어요. 해석하면 전부 다 잘못된 선입감입니다. 기껏 해석해 봐야 우리는 사울같이 되어버려요. 그냥 사울 짝 나는 겁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 잘 믿는다고 우기지만 그거 주님한테 안 통합니다.

자기가 이단이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이단이에요. 처음부터 이단이기에 이단 짓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이단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은 예수님만나는 그 순간 이외에는 안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예수님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납득이 되는 예수인데 테레사수녀, 김수환 추기경 비슷한 사람들, 온갖 거룩하고 성스럽고 고상한 것,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을 만나면 폭 빠질 정도로 흠모할 만한 것이 있는 사모할 만한 장점이 있는 그런 분을 메시아로 구성을 해놓아요. 그것은 이사야 53장하고 다릅니다. 흠모할 것이 없는 분이 예수님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흠모할 요소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의 구주라고 일방적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예수님을 몰라요. 예수님을 전혀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속으로 반박하기를 ‘그러면 진짜 예수가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오늘 본문이 그것을 답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가 처음부터 이야기했지만 난처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선지자란 항상 이스라엘을 돕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본문에 보시다시피 ‘내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합니다.

만약 우리교회 예배당을 새로 짓는다면 기둥에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하면 참 좋겠어요. 뭐냐 하면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멋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부르짖는다는 말은 도고, ‘네가 도고나 간구를 할찌라도 듣지 않겠다.’

기둥에다 아예 타일로 붙여버려야 돼요. ‘기도를 듣지 않겠다. 금식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저주하시는 하나님, 결정적입니다. 저주하시는 하나님, 아예 이렇게 적어놓아야 돼요. ‘저주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면 자꾸 복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구원을 하시는 분은 맞습니다. 분명히 우리 예수님이 우리 구원자인 것은 맞아요. 그런데 복 주지 않습니다. 복 안주고 구원하시면서 그걸 복이라고 간주하시는 주님이에요.

구원을 하시려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저주를 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도무지 챙길 수 없는 발언을 제가 해 버렸는데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요,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광야 같은 곳이 분명한데 이 지상에는 저주가 뿜어져 올라옵니다. 제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저주를 싫어하지만 그 싫어하는 것은 저희들 취미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저주가 뿜어져 올라옵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그래서 제가 주일 아침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고 하니까 자꾸 불평을 하는 것이 ‘은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은혜는 공짜로 주는 것인데 은혜로 산다면 사는 게 왜 그리 힘드냐?’ 이거예요.

재래시장에서 추운데 장사하는 아주머니한테 ‘아주머니, 은혜 입었지요?’ 하면 그 아주머니 욕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은혜가 이렇게 고생시키는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은혜로 구원한다고 해 놓고는 고생만 직사하게 하고. 이 땅에서 저주가 뿜어져 올라오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축복이라고 하느냐 하면 저주받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을 축복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저주와 나름대로의 살고 싶은 본능과 싸우는 겁니다. 이런 세계를 가지고 생존의 세계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차단했습니다. 광야 위쪽의 노선, 언약노선은 생명의 차원입니다. 밑에는 생존의 차원이에요. 생존하는데 힘들다고 그들은 이걸 저주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축복이 아니고 은혜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힘들게 살면 천국에 넣어줘야지, 라는 말이 우리 맘속에 널려 있어요. ‘이만큼 고생했는데 천당까지 안보내주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 말은 ‘이왕 선악과 따먹은 것 생명나무 따먹고 영원히 살게 해주면 안 됩니까?’라는, 그 창세기 3장의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유도 모르는 채 생명나무와 차단되었다는 그 사실을 인간들이 자꾸 위배하려고 해요.

그 원칙을 자꾸 취소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생존하기 힘들었다고 해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이 힘든 것은 살라고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칵 죽어버리라고 힘들게 하시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제발 좀 죽고 죽은 다음에 생명나무 줘서 영생 얻게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에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에요.

예수님도 그냥 올라갈 수 있지만 십자가 죽음을 경과해서 그래서 부활에 참여한 겁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신 거예요. 부활을 만드신 거죠. 예수님도 그런데 우리가 무슨 통뼈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죽인 겁니다. 죽여 놓으니까 마리아 마르다는 생존차원에서 평소에 늘 했던, 24시간 하루 종일 생각했던 생존차원에서 오빠를 생각하면서 “우리 오빠 살려내요. 우리 오빠 물어내요. 우리 오빠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믿었는데 왜 죽이느냐?”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예수님이 우시잖아요. 운다고요. 우리 같으면 우는 것이 아니라 쥐어박았을 거예요. 그토록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인간들은 마리아와 마르다는 생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교회 문 열고 들어오면서 벌써 생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얼마나 날 고생시키려고 이 고생을 시킵니까? 나 고생시켜서 하나님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예수 믿지 말라고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 겁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고생했다고 해서 천국 넣어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주님은 ‘선악과 따먹었나? 그럼 선악과 하나 더 심으면 되지. 이리 오너라. 생명나무 줄게.’ 이렇게 해 줬을 거예요. 아예 질이 다릅니다. 인간의 질 자체가 달라요. 생존차원에서 살다 보니까 자꾸 자기 고생한 것만 추억이 되고 기억에 남아요.

‘주님, 헌금한다고 고생했습니다. 봉사한다고 고생했습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제 생존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만나에요.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를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차원에서 공짜로 주는 거예요. 광야에서 고생한 대가로 만나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대라면 제가 이유를 댈게요.

광야에서 원망을 해도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만나가 있습니다. 원망하나 안하나 애초부터 주님이 우리의 생존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생존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뚝, 끊으라고 오신 거예요. 만나가 저녁에 내리지 않고 아침에 내리지요. 현대인들은 큰 저녁을 위해서 아침부터 빵 한 조각으로 때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침부터 큰 은혜, 큰 아침이고 저녁엔 제가 보기에는 자라고 작은 저녁이에요. 아침부터 생명에 눈뜨라는 거예요. ‘생명에 눈떠라. 생명에 눈떠서 그것이 저녁까지 계속 이어져서 잠자고 나면 그 다음날 아침은 또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모세한테 원망하고 이스라엘한테 원망해도 하나님이 만나를 줬으면, 인간적으로 그 정도 했으면 ‘야, 내가 생존 때문에 이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릇으로, 내가 하나님의 그릇으로 생명나무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될 텐데,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꾸 생존만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요. 약속과 땅은 결합된 겁니다. 땅은 저주가 뿜어져 오르지요. 그들이 약속 안에 있으면 그 저주가 스톱이 되어 버립니다. 저주위에 축복이, 삼겹살처럼 아래쪽 비계위에 고기가 딱 붙어 있는 거예요. 붙어 있는데 저주받은 땅 위에 유일하게 약속이 첨부되어서 약속이 붙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축복의 땅, 천국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주 위에 약속이 붙어 있거든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무엇이 뜯겨 나가느냐 하면 이 저주위에 있던 축복이 뜯겨나가요. 그 대목이 오늘 본문의 대목입니다. 그들이 이방나라처럼 생존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축복이 뜯겨나가지요. 그런데 뜯겨 나가야됩니다. 뜯겨 나가야 자기 주제파악을 해요.

자기들은 생존차원에서 금식하면 복주겠지, 여기서 복이 뭐냐 하면 생존이죠. 기도하면 들어주시겠지, 그것도 간절히 기도하면.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는데요. 어느 정도 해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되는지 아직도 저는 알 수 없어요. 어떤 것이 간절히 인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 없어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분만이 간절히 기도했지 다른 사람은 간절히 기도 안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사장님, 전화 왔습니다.” 하면 “예, 전화 바꿨습니다.” 하면 그게 무슨 간절히 입니까? 자기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도해야 간절히 인데 그것은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없느냐? 성령께서 그런 간절한 기도를 시키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내용인데 천국에서는 그걸 사랑이라 하지요. 사랑이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처녀 총각이 연애할 때 사랑하는 여인을 보고 여신처럼 느껴지는 것, 남자가 그 여신한테, 여시인지 여신인지 모르겠는데 그 여자한테 어떻게 빠졌느냐 하면 돈 다 빼앗기고 아파트 다 빼앗겨도 그게 좋아서 더 빼앗아갈 것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물론 결혼하고 나면 통장 따로 다 챙깁니다만 하여튼 연애할 때는 누구한테 반해서 빠져버리면 상대방이 내 것을 더 빼앗아 가기를 원해요.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할 적에 주님이 너무 좋아서 자기처신이 생각도 안날 정도에요.

이것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생명이 찾아올 때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여, 누구십니까?’ 하는 거예요. ‘주여,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주여, 누구십니까?’ 내 인생을 망가지게 하시면서도 내 인생 망가지는 그 자체가 축복이 되게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사울로 하여금 말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눈이 멀게 하시는 그 대단하신 분, 그 고마우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는 조금 전까지 네가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다.’

결국 축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심판받아야 마땅하고, 우리가 금식을 해서 구원받아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받아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던 축복이라는 것이 뜯겨 나가야 됩니다. 그게 뜯겨 나가서 내 사랑이 내 사랑을 덮지 않도록, 주님의 사랑이 이 저주받은 나를 덮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그렇게 주님을 비난하고 원망했던 사람들, 약속의 땅에 가니까 주께서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어요. 알 굵은 포도나무부터 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생명이라, 영생이라 하는 것은 우리 행함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어요.

제가 어제 부산강의하면서 그랬어요. 화목제물, 주님 앞에서 우리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주님이 준비하신 만찬을 우리가 즐기는 것이지 우리가 애써서 준비한 만찬은 아닙니다. 그처럼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해요. “목사님, 천국 가서 우리가 과거에 죄지은 것 생각나면 괴로워서 어떻게 삽니까?”

천국가면 과거의 기억도 다 빼앗겨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면류관도 반납하고 싶어서 환장해요. ‘주님, 다 가져가세요.’ 여러분, 그런 사랑 해 봤습니까? 지금도 그런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실수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랑 하고 싶습니다. 다 가져가세요. 명예고 이름이고 뭐고 다 가져가세요. 몽땅 빼앗기는데서 오는 즐거움,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작품이라 하는 거예요.

자신의 작품을 다 쏟아내서 만든 것이 교회고 그 사랑을 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교회야, 아무것도 하지 마라. 이 신랑, 내가 있잖아. 이 예수가 있잖아.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내가 너의 사랑으로서, 아가서에 나오는 대로 나의 신부로서 예쁘게 만들어줄게.’ 바로 그것은 생존차원이 아니라 생명차원에서 거저주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뜯어낸다고 예레미야는 이런 격한 말을 자기백성에게 해아만 했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맨 날 생존과 하나님과 결부시켰습니다. 예수 잘 믿는데 왜 고생시키느냐고 따졌습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아니고 바로 나 사랑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패역한 증거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우리 목숨을 위하여 사랑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주님의 사랑에 깊이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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