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히브리서 주보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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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히브리서 주보요약

2001년 7월 1일                   히브리서 1:1-2  만사의 후사되시는 아들

인간은 철저하게 악의 도구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으로 도망친다고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교회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고 교회마다 악의 아지트로 만들어버립니다. 더 이상 도망칠 피난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성’이라는 가치로서 이 세상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계는 은혜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경쟁과 대결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마치 깊은 밀림이나 사막 한 가운데서 내가 어디쯤 있는가를 알려고 애쓰는 자들과 같습니다. 그것 알아서 어디에 써먹으려는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은혜성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을 모르는 인간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행한 행동밖에는 모릅니다.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한 것만을 사수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것이나 소유한 것 모두다 자신의 후사인 셈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은혜성은 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런 비은혜를 본질로 하면서 세계에 등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 그 본래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남들 보기에 예수님은 고립되고 쓸쓸해 보입니다. 진리를 전해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잠언 1:20-26) 이것은 곧 그분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 땅에서 죽음과 의로움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이 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려 하십니다. 죽지 말아야 될 분이 죽은 것이고 우리는 사실 살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 전체로 그분의 은혜성을 드러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2001년 7월 8일                    히브리서 1:3-9                  아들의 위엄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타인이 한 일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들이 도저히 못해 내는 일을 예수님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일입니다. 첫째, 만물을 붙드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것을 편안히 믿고 살아도 좋을만큼 예수님이 대단한 분입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예수님을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 인간에게 다가올 때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 본인도 ‘능력의 말씀으로’ 이런 모든 일을 수행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유감없이 적용됩니다. 즉 만물을 예수님이 붙드시는지 아니붙드시는지 여부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봐야하고, 그리고 과연 우리의 죄가 진짜로, 그리고 제대로 씻어졌는지 아닌지도 말씀을 통해서만 확인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도 천사를 부리시지면 이 모든 활동은 항상 말씀을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실제적인 말씀의 능력이 성도의 마음에 닿을 때 그 성도는 그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기쁨으로 수용하겠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말씀을 안믿는 자들은 말씀 외에 자신의 종교적 기술들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기대하고 결과들을 얻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을 내고, 신에게 헌신도 하고, 심지어 모든 것을 희생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당당한 위상과 위엄에 대해서 결국 못믿겠다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말씀 완성은 오로지 예수님 담당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001년  7월 15일                  히브리서 1:10-14    아들과 창조 세계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새로운 옷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뜻하겠지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새로운 옷을 마련했다고 하십니다. 새로운 옷이란 하나님에 관련된 옷이 아니라 아들과 관련된 옷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옷은 이제 낡아지면서 무엇으로 바뀌느냐 하면 이제 아들을 위한 옷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아드님의 영원하심으로 전 우주와 피조 세계를 한데 모으시는데 있습니다. 빌리보서 2:10-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주관심사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있습니까?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섭리에 위반하며 사는 자가 됩니다. 세상의 다랄짐은 아드님이 지닌 영광과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아드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정복하고 승리하는 직책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감탄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2001년 7월 22일             히브리서 2;1-4              구원 정신

구원이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나누어 주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이 주사는 일과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할텐데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는 포부와 뜻을 성취하는데 목숨을 바치고 그 일에 매진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있다’, 혹은 ‘구원이 된다’라는 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구원에서 탈락된다’. 혹은 ‘구원에 해당이 안된다’라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되는 것이 인간의 노력과 애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9: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 본문에 봐도 ’응분의 보응‘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응받는 대상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게 미리 보응을 가한다고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보응으로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아는 것조차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을 이루어집니다. 인간 자신이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관점과 다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의 관점을 접한 사람은 그 세계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당부하고 무엇을 지시를 하는 것을 통해서 은혜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접하지 않은 사람같으면 하나님의 당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려는 방식으로 구원에 나설 것입니다.


2001년 7월 29일            히브리서 2:5-9           죽음을 맛보심

하나님의 말씀과 천사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분은 마땅히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만 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에게 또한 다른 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경을 받으실 만한 것이 그분이지만 잠시 고난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맛보기 위함입니다. 왜 그분이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실행에 옮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대할 수 있습니다.
 시편 8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화나님의 ‘사람 사랑’이 극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늙음과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기 자신의 운명만을 탓해서는 아니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천사를 비롯해 모든 피조물들이 흠모하고 찬양할 만한 분이 예수님인데 유독 인간들만큼은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생존과 영광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에수님께서 일부러 인간의 죽음까지 맛보시려 한 그 취지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정말 영광과 존귀를 받아야만 합당한 그분조차 이 땅에서 서슴없이 죽음의 길로 가셨다는 것은 죽음조차 이제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커스가 지나가는 곳에 글자가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죽음을 맛보신 예수님과 같이 인생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지워지고 영광과 존귀가 기다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2001 8월 5일                히브리서 2: 10-13                  형제

한 부모밑에서 태어난 사람들 사이를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는 공동 운명체 속에 속합니다. 예수님과 구원받은 백성들 사이에도 공동 운명이 형성됩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따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행함’이 들어가야 될 자리는 없습니다. 거룩하신 분에 의해서 부름을 받으면 그것이 곧 거룩한 상태에 놓인 것이 됩니다. 믿음없이 자기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만들어내고 달성하려는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행함으로 예수님의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란 하늘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태어남의 토대에는 예수님의 고난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함으로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온전케 되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고난 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모든 인간을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니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8:18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메시야에 의해 구원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철저하게 따로 분리되어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될 자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자 한 그 은혜만으로 인간은 구원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형제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2001년 8월 12일                   히브리서 2:14-18            죽음과 예수님

인간이 혈육에 속해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혈육으로 구원이 가능치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살고자 하는 성향 때문에 죽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이점을 악마가 주목합니다. 살기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마다 죽음으로 위협하고 겁주는 것이 악마입니다. 악마는 죽음의 세력을 잡고 있습니다. 죽음은 곧 실패이며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라고 죽어서는 아니된다는 의식으로 지배합니다. 자연적으로 죽음 앞에서 인간들은 고개숙이고 굴복하게 됩니다. 죽음의 힘이 시키는대로 다 하게 됩니다. 그로나 여기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동일하게 같은 혈육에 속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던 분입니다. 환경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불가능 해보이는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악마의 협박이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을 다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최후로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잔까지 수용했습니다. 에수님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혈육은 부활의 혈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자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거뜬하게 구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혜택은 아무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해당됩니다. 물론 그들에게 고난이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들을 붙잡을 죽음은 더 이상 없습니다.


2001년 8월 19일             히브리서 3;1-6                        하나님의 집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염두에 두고 매시에 일하십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집이 사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환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 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나 하나님의 사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환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할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모세가 비록 사환이지만 이 지상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뿐만아니라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님을 보여주었던 사환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집을 어떤 식으로 보존하고 유지했습니까? 모세가 한 것은 말씀 순종이었고 그 말씀 순종은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의 생활관하고도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했고 모세를 미워했고 모세의 가치를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장차 오실 메시야의 가치를 부정하고 소중함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바로 이러한 모세의 고난을 통해서 도리어도 하나님의 집은 착실하게 건설되어 갔습니다. 즉 참된 성도는 이런 고난 속에서 옥석으로 가려지는 법입니다.


2001년 8월 26일              히브리서 3:7-14              무엇을 잡나?

소유는 인간의 천성입니다. 매일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얻어진 것이 우리를 정말 완전한 영생인으로 만들어 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소유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잃게 만들어 버립니다. 버리지 못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소유가 우리 자신을 해롭게 했다는 것을 절감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얻을 생각보다는 붙잡을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붙잡을 것은 물론 우리의 소유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 것이 되라는 생각에서 붙잡아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유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속 인정하면서 그것을 붙잡을 때는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잡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붙잡아라고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매일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환경이 어려워 옴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악심이 일어나자 하나님의 음성을 놓쳐 버리고 자신의 의지력에다 전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친히 마련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과 약속의 땅 사이에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 밖에 없습니다. 이 음성을 외면하고 사람의 음성과 사람의 위협과 유혹에 넘어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붙잡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001년 9월 2일                              히브리서 3:15-19          믿음과 구원

성경이라는 것이 왜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경고하시려는 겁니까? 인건들의 안일한 구원관을 공격하고 것도 성경에 담고 있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을 강팍케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들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이 강퍅입니까? 그것은 자기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길 때면 이런 마음이 나옵니다. 즉 사회에서 타인과 더불어 싸우고 비교하고 경쟁했던 그 품성을 그대로 지닌 채 하나님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서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대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강퍅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퍅한 마음을 지닌 자를 계속 화낼 수 밖에 없는 그런 말씀을 하나님 쪽에서 계속 내려보냅니다, 즉 마음이 바뀌지 않는 채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품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광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은 채 적당하게 구원을 받고자 하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용납해 주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가진 것과 그리고 자신의 몸과 모든 것이 하나님 소우인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처럼 오직 믿는 자에 한해서만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 즉 천국이란 영원토록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고마워 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관권이기에 하나님도 오로지 믿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오게 하시는 겁니다.


2001년 9월 9일                  히브리서 4:1-12             복음과 안식

복음은 목적이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들을 고려해서 만드신 것도 아니요 어느 피조물의 의견을 조눙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창조란 원래 안식을 목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안식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안식과 무관한 사람이 됩니다. 안식의 정신은 곧 복음의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복음을 받아드린다는 말은 곧 안식의 정신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의 안식의 정신에 무지한다든지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음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안식의 정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이하나님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위해 창조되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 7일을 강조합니다. 7일 간의 세상 창조에 있어 인간은 그 어느 것에도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은 바로 이 점을 부닥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행함에 의해 창조가 된다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하나님의 안식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항상 허무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그 인간도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이 쉬는 것만을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쉼을 생각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01년 9월 16일                        히브리서 4:12-13       말씀의 힘

이 세상에 피조물과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도 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피조물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목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모세 언약에 의하면 인간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숱하게 많은 말씀에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무시하고 또한 하나의 말씀이라도 위배하면 거룩한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처음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말라”였습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나무 실과를 먹으면 모든 것이 신처럼 위세를 부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고부터는 선과 악의 모든 완벽하게 처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선을 채워야 하고 반대로 모든 악은 결코 범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과연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완벽하게 선을 행하고 악을 안지울 수 있는지 모세를 통해 말씀을 내려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인간 내부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2001년 9월 23일         히브리서 4:14-16             연약한 인간

구세주의 역할은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데 있습니다. 탈출해야 될 그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출해 내기에는 너무 연약합니다. 인간들이 대단히 강한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 하나도, 그리고 욕심하나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군가 이끌어주어야 되고 누군가 그들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록 애굽의 굴레에서는 홍해를 통해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글레에서는 못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계속 구원자에게 매달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도리어 구원자에게 온갖 원망을 다 퍼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악한 환경과 악조건 속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 못지 않게 이스라엘 본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본인들 조차도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나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근본적인 악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구세주를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는 자만이 제대로 구세주를 계속 붙들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갖가지 힘든 환경과 고생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너끈하게 이겨내었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만을 굳데 붙들어야 합니다.


2001년 9월 30일                      히브리서 5:1-5               대제사장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란 이 세상 나라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대대로 혈육을 통해서 내려오고 있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 세상에 혈육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백성입니다. 혈육ㅇ로 태어날 수 없는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대제사장도 인간들이 투표해서 선출한 자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은 대세사장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모든 조건은 사람들의 선호도나 인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조건 하에 매여 있는 자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은 모두 영원하지도 않았고 완전치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언약에 의해서 온전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따로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등용된 자들입니다. 비록 이들은 연약하고 흠있는 대제사장이지만 완벽하게 흠이 없는 분이 장차 오실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라고 주신 자들입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자기 선에서 처리하는 일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온전하게 죄를 처리하면 그 예속 하에 있는 백성의 죄는 완벽하게 제거되는 것입니다. 완벽한 대제사장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2001년 10월 7일              히브리서 5:6-14             아들의 순종

예수님의 지상 생활과 예수님의 원래 신분과 상당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 본문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라 것을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차’라는 말은 ‘그 족보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이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영원함이란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하나님다운 영영광성마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 지상에 와서는 그 누구 못지 않게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여기에 심오함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영원함이란 그 제사장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게 하는 영원함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일을 구원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다른 근원으로 구원받는 경우가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순종과 자신의 노력과 희생과 제사장 역할로 구원받은 자가 있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의 근원이 아에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근원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해야하고 그 중에서도 온전한 제사장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나타나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에수님은 단순히 모범적인 분에만 머문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순종하고 온전하게 통곡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식이 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란 단지 모범적이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근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2001년 10월 14일                  히브리서 6:1-8           완전한 것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초보와 완전한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것은 멜기세딕에 관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완전한 것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초보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일을 지상에서 지상으로 끝나는 것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루 하루가 지옥 같이 이 세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의 힘으로 편하고 쉽게 살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아직도 끝난 일에 미련을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초보란 무엇이 이미 끝난 일인가에 대해서 감이 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확정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 늘 예수님의 고난과 수모와는 상관없는 것이 이해되기 쉽습니다. 거라다보니 예수님의 제사장적 희생과는 점차 거리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신앙 자랑이나 자신의 비범함에 대해서 스스로 도취되기 일 수입니다. 그러다가 그러한 현상이 계속 이어지지 아니하면 강제로 그런 현상에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교적 유희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완전데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의 종교적 체험에 머물러 있는 것에 경고를 합니다. 완전한 것은 자신의 지상적 생활을 위한 예수님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지상의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에수님께서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죽으셔야 했다는 것을 절감하며 사는 것이 멜기세덱적인 신앙입니다.


2001년 10월 21일        히브리서 6:9-12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지 아니하면 천국이라는 과연 있는지 없는지도 우리 인간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만이 각자 차별하는 상상의 이상 세계관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제 허상이 아니라 실제의 하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취미나 교양으로 하나님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끄는대로 사느냐 마느냐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약속된 것을 상속받는 자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부지런함과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늘 즐거움이 수반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즐거움이란 타인의 시선이나 비난이나 공격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얼마나 소망이 즐겁고 실제 상황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즐거웠으면 외부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게 될 정도입니까 바로 이런 경지에 있을 때 스스로 부지런함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이러한 자세는 성도 본인의 자질의 훌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성도를 섬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바로 부지런함과 소망의 풍성함입니다. 참으로 천국이 있다는 것이 실제 상황으로 이해되십니까? 그렇다면 그 열매는 게으르지 않는 부지런함입니다. 끝까지, 참으로 끝까지 이 소망을 소망되게 하셔야 합니다.


2001년 10월 28일                      히브리서 6:13-20              소망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하고 맺은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거짓말 일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바라보면서 맹세한다는 것과 그리고 최종 보증은 맹세로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맹세가 누구보고 맹세한 것인가 하는 점을 알아야 되고 과연 맹세를 분명히 달성하셨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먼저 알았던 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의견이나 사람들의 동정을 살핀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알아주든 안알아주든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하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보고 맹세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망세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책임지고 자신이 내놓은 맹세를 필히 지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 한해서 새로운 소망이 발생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자는 소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맹세하신 그 소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소망은 하나님께서 맹세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을 달성하는데 전력을 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니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인내로서 구원을 기다립시다.


2001년 11월 4일                         히브리서 7:1-3            멜기세덱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소개하는데 멜기세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멜기세덱과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드님에 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그 창조의 원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형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원형을 기준으로해서 이스라엘이 참다운 이스라엘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1:3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안다고 자부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하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내세울 수 있는 분은 멜기세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멜기세덱의 비밀을 가지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상을 구축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멜기세덱의 속성으로오신 분입니다. 다른 식으로 오신 분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종교 아이디어나 신비적 발상과 무관하게 나타나신 메시야가 누군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터무니없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알지 못하면 구원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2001년 11월 11일                           히브리서 7:4-10       허리와 십일조

하나님은 자신이 맹세한 바를 나중에 제사제도나 제사장직까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허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허리란 자손이 그 조상과 연결을 꾀하는 장소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상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이 자손에게 이어지는 점을 말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아무리 자손이 선조로부터 멀어져도 선조는 자손이 해야 될 사명을 전부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허리란 일종의 본체에서 뻗어나온 줄기의 이음새과 같은 겁니다. 보통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조상의 일과 자식의 일이 철저하게 분리되어도 상관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모의 운명이 곧 자식의 운명일 리가 없지요.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은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출생은 하나님의 맹세 성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는 그들이 지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와 연관있습니다. 장차 오실 분인 메시야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이 인간 세계에 나타는나는지는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타나는 레위인들의 말해 줄 것이고 더나아가서 그런 메시야가 어떤 위치에 계신 분인가 하는 것도 아브라함 허리에서 난 자의 역할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멜기세덱의 속성을 실현하려 오신 분입니다. 이런 관계를 십일조라는 것을 통해서 점검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메시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바치게 되면 받은 분은 어떤 일을 하셨기에 받게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2001년 11월 18일               히브리서 7:11-17               레위지파와 유다지파

하나님은 멜기세덱이라는 족보를 따르는 제사장직 말고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직을 또하나 출발시켰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동안 실시된 제사장 제도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레위지파의 제사장직이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사해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율법을 인간이 지킴으로서 온전하게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 하나의 제사장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멜기세덱에서 나온 제사장직입니다. 레위지파에서 제공하는 제사와 멜기세덱에서 제공되는 제사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멜기세덱에서 나온 제사장은 인간의 육체로 실시해야 하는 계명의 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근거를 둔 제사장직입니까?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찾아온 제사장입니다. 이런 흔적이 구약 때 이스라엘 지파에도 있었습니다. 분명 제사장직이 당연히 레위지파에서 나와야 하는대도 불구하고 제사 지파인 레위지파와 상관없이 유다 지파를 통해 제사장직이 나타난 겁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직이 변이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이하리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변하리라고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하셨을까요? 그것은 율법이 주어진 것이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충동 밑에 죄가 깔려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레위지파를 무효시키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2001년 11월 25일           히브리서 7:18-25                하나뿐인 제사장

구약에는 연이어 숱한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죽음으로서 그 제사장직이 마감이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본인들조차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씨어준다는 이들조차 죄에게 이겨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들의 죄 씻음의 영원한 효력도 역시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진정 영원한 죄 씻음의 효력을 내기 위해서는 본인들부터 먼저 죽음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는 그것을 이루할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본인 스스로 극복했습니다. 이러한 죽음에서의 승리는 예수님 본인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그분을 제사장이라고 믿고 있는 성도에게도 동일한 혜택이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성도의 노고가 아니라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수행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게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는 멈춤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이해할 때에 구약의 제사장직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적인 욕심이나 세상적인 탐욕을 달성시킬 분으로 여긴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는 일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와서 기도하고 무엇을 알려고 교회 나와야 하는 지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만인의 제사장이 되시지만 아무나에게 제사장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지닌 진정한 제사장직을 이해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2001년 12월 2일              히브리서 7:26-28            단번에 구원

인간들은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변명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기에 약점 가진 것이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인간이란 인간 자신의 소속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에게 소속된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약점을 지닌 것을 부끄럽거나 죄송스럽게 생각할 차원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는 약간의 약점을 용납하는 식의 인간을 염두에 두고 만들지를 안했습니다. 하나님 입장부터 먼저 생각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단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니께 동정받아 버티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한 자기 변명 위주의 생각이 사실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 구약 때에 많은 제사장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대대로 말입니다. 그들은 남의 죄를 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죄부터 처리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온전치 못하고 남에게 자신의 의를 전가시킬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오신, 역사의 최후에 오신 제사장은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이 또다시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인간의 죄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단번’이라는 효과가 성립됩니다. 인간 본인의 행함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요 도 다른 분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분의 행하심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저주는 없습니다.


2001년 12월 9일    히브리서 8:1-5                모형과 그림자

하나님 보좌 우편은 아무나 앉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전권을 다 맡길 분만 그 자리에 않습니다. 그 자리는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마무리하고 완성시키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대제사장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말씀은 어떤 쪽에서 해석을 해야 하는 겁니까? 대제사장적 일을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모형과 그림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모형이란 말은 실제 원형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여인이 남편의 실체를 놔두고 남편의 그림자만을 붙들고 산다고 하면 아마 정신병자 취급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실체되시는 분은 안믿고 그림자만 붙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만큼 실체되시는 분에 대해 신뢰성 없다는 말도 됩니다. 실체가 오면 더 이상 그림자를 섬기는 것운 살아져야 합니다. 예수님 이외에 모든 것이 그림자입니다. 율법도 그러하고 성전도 그러하고 안식일도 그러하고 십일조도 그러합니다. 모두 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실체는 어떻게 알까요? 그림자를 통해서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림자를 무시한다든지 외면하면 진정한 실체를 모르게 됩니다.


2001년 12월 16일       히브리서 8:6-13       새 언약의 중요성

신약을 알려면 구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사람들이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적으로 미리 예언한 바 있는 옛 언약을 완성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옛 언약이 완성되었음에 주어진 결과요 열매로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옛 언약은 흠이 있다고 했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약속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흠이 있어 결국 옛 언약이 와해되고 말압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거룩하라는 겁니다. 즉 언약의 정신이 마음까지 파고들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자리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강히 거부하는 세력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겉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척하는 것이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만이 거룩의 흉내는 낸 것을 가지고 언약이 완성된 것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아예 마음 전체가 의와 거룩에 의해 지배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옛 언약의 흠을 없애고 완벽한 거룩을 성취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이 차이는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겁니다. 옛 언약은 모세의 가지고 내려온 돌판에 기록된 문자로 보여주고 그것을 인간의 선한 능력으로 지키기를 요구했지만, 새 언약은 돌판에다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음에다 말씀을 기록해 버리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마음은 더 이상 인간 본인의 것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에 의해 장악되기에 항상 하나님의 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01년 12월 23일     누가복음 2:8-20             아기 예수님의 탄생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날이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는 날이었습니다. 모든 이는 고요히 잠들었고 베들레헴 동리에서 그 시점에 깨어 있던 사람은 양때를 지키던 목자들 뿐이었습니다. 은밀한 축복, 은밀한 영광이 그들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그들 목자들은 무서웠습니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찬란함이 그 현장에 뒤덮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못들어 본 음성까지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들러오는 말씀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었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목자들만이 이 은밀한 기쁜 소식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잠을 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슨 기쁨에 휩싸여 삽니까? 무엇이 인생의 즐거움이며 행복입니까?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감사할 것이 없고 오로지 스스로 즐길거리만 찾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구에게 감사하기 보다는 우리들은 철저하게 홀로 삽니다. 심지어 여럿이 모여 살아도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혼자이기에 감사할 대상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면 그만입니다. 목자들은 새로운 감사해야 될 분을 방문하게 됩니다. 찾아가보니 강보에 싸여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 아기는 하늘의 영광과 그리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태어난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영광과 평화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택하을 입지 못한 자입니다. 즉 아기 예수님에게 무관한 자입니다. 은밀하고 조용스럽고 요란하지 않게 우리 주변에 오신 예수님을 감사하는 성탄의 마음을 가집시다.


2001년 12월 30일             히브리서 9;1-7                  성도와 지성소

엣날 이스라엘 나라가 있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고 또한 그들이 성소와 지성소를 만든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외면하기만 하면 그뿐인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 의미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 세계에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그냥 보통의 나라가 아니라 천국을 대변해주는 특수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내막을 모르면 곧 천국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요 또 비록 거기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지만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성소란 공간적으로 비록 인간 세계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감치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해서 인간들이 함부로 그분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특성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성소란 이 지성소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온갖 깨끗함과 거룩함을 다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하여 저주받아 죽습니다. 실제로 성소의 불로서 죽은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안됩니다. 만약 알지 못한다면 결국 교회라는 것이 인간들의 자기 즐거움을 세운 친목 모임에 지나지 않고 여전히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에 불과합니다.


2002년 1월 6일                히브리서 9:11-14                  성령

성령이 등장한다는 것은 인간이 못해내는 일에 관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든 일에 관여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자신을 헌신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일이나 어느 일이든 인간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일을 벌리려 합니다. 이런 현상은 불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관심두고 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나옵니다. 이런 불신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라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이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그 어떤 하나님의 일도 성사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며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성령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되돌리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마저 자기 소유물로 삼아야 안심들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자신을 내맡길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외에 누구를 안심놓고 믿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하신다는 것이 이 성경의 말씀은 곧 과연 진실로 하나님은 믿고 사는 자가 누구냐를 제대로 판별하게 합니다. 순교를 하든지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든지, 몸으로 봉사를 한다든지 어쨌든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성령으로 할 때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참 성도입니다.


2002년 1월 13일          히브리서 9:15-22            유언과 죽음

이 세상의 모든 약속은 죽음과 함께 종결됩니다. 이미 죽은 자의 말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언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언은 그 본인이 죽어야 비로소 효력을 나타내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에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치 유언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도리어 본격적으로 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옛날 하나님이 내려주신 약속에 준해서 반드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속한 모든 계명은 희생 제물의 피와 관련지어서 하늘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으로 시내산 밑에서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계약에 나섭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계명을 낭독하고 그 계명이 흐지부지 않고 반드시 실시된다는 것을 무엇을 가지고 나타내느냐 하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나타냅니다. 모세는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말씀과 그리고백성들 머리 위에 뿌림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이 죽은 계명이 아니라 산 계명이다는 점을 확실히 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는 곧 희생제물의 피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피흘리심을 알리기 위해서 하늘에서 계명을 내려주신 겁니다. 죄용서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피흘림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외면하고서 구원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는 이제 유언으로 전 우주에 그 효과를 드러냅니다.


2002년 1월 20일                  히브리서 9:23-28            세상 끝 

사람들은 세상에 끝이 오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물론 자기만 살아남고 세상이 끝나는 것이라면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없어져야 될 그 세상 속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불쾌하기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세상 끝을 미리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염두해 놓았던 일이 예수님을통해서 성취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오해해서 더 오래 간직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원래부터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종결되면 세상도 이제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사함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죄사함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론 다 죄사함의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로 분류되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죄와 상관없는 운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를 위하여 예수님은 두 번째 나타나십니다. 결국 세상이란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살고 싶다고해서 더 살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님 보고 싶다가 다시 에수님을 이 땅에 불러 내릴 자격이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재림하시는 것도 순전히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믿음으로 찬양합시다.


2002년 1월 27일                  히브리서 10;1-7                    율법과 한 몸

옛날 이스라엘에는 제사가 빈번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사를 행하므로서 자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구원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율법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적 활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행함으로서 종교생활을 총족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림자를 붙잡는 것밖에 안됩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실체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한 몸’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한 몸 되시는 분은 여타의 모든 몸과 차별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할 수 있는 한 몸을 따로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한 몸이 되시는 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래 율법은 제사 제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제사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한 몸 되시는 분의 가는 길도 희생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을 자기 몸으로 완벽하게 준수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율법의 취지도 모르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 점을 알아차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진정으로 받아드리는 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2002년 2월 3일                히브리서 10:8-14                 하나님 우편

하나님 우편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리신 약속들은 실제적으로 성취할 자를 세우는 자리입니다. 예수님 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구약 때부터 줄기차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제는 실현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 대체할 수 없고 구약이나 신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약솓들을 시행하신다고 우리 인간에게 남겼느냐를 주목해 봐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붙잡고 있다가 하나님이 무슨 일을 벌러시면 단번에 그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하기 싶상입니다. 인가이 자가에게 물어보지도 아니하고 일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억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 실천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요?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 자신의 거룩한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자기 백성이 같이 거룩해지는 일을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원수, 즉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적이 하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적은 물론 악마입니다. 악마의 계획과 술책에 대해서 사도는 이미 안다고 했습니다.(고린도후서 4:4) 악마의 술책은 이러합니다. 죄 문제는 죄지은 당사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악마의 제안에 당해 낼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이 악마에 대항할 수 있는 분인데 그분에게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됩니다.


2002년 2월 10일                히브리서 10:15-18                     새언약

언약이란 인간이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우습게 여기느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다룰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해와 달과 별이나 비, 구름 같은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그것들에 대해 공포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간파했다고 여기는 순간부터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얕잡아 보게 되고 동시에 인간의 지혜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3;18에 보면,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다”고 되어 잇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게 되니 사람들은 아무 것도 자신의 진보를 가로막고 나설 세력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이름을 하늘에게까지 닿게 하겠다는 의지가 아직도 여전히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단한 인간도 자기 마음을 바꾸는데는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해도 자신의 마음은 과거와 연결된 마음이지 결코 새 마음일 수 없습니다. 즉 다른 인간으로 살기 위해 과거와 단절되고 과거의 나와 늘 항상 죽음으로 끊어져야 하는데 인간들은 도리어 과거를 밑천으로 하여 현재의 목표를 쌓아나가려고 합니다. 마치 인생을 바벨탑 쌓듯이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언약은 바로 인간은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자체적 능력만으로 거뜬하게 달성하게 해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성령의 중생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디도서 3:5)


2002년 2월 17일             히브리서 10:19-25                  산 길

누가 어떤 지점을 통과해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에게 완전히 가능치 않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기준의 것을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통과하고 새로운 세게에 들어가더라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유지한채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라는 기존의 것이 거기에 합류되기 때문이지요. 천국이 좋다고해서 막무가내로 그냥 들어가리라 여기기 마시고 무엇이 없어져야 하고 무엇이 부셔져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천국의 좋음을 기존의 내 생각에 준해서 좋다고 여기는 것도 사실 버려야 생각입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맨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 안으로 통과시킵니다. 여러분들이 세차장에 설치해 놓은 자동 세차장을 본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차는 안으로 통과하고 세제와 물은 밖에서 퍼붓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세차장을 통과하면 겉은 매끈하게 닦겨졌지만 차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중고가 새 차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마음 자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마음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어떤 마음 말입니까? 믿는 마음말입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는 마음이 아니라 에수님의 피의 속죄함을 의지하는 마음 말입니다.


2002년 2월 24일             히브리서 10:26-31          무서운 하나님

진리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 몸이 실제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몸만 있다는 것이 진리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진리를 전부 알고자 한다면 우리 몸이 왜 있게 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으며, 이 몸이 어떻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다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진리와 죄와의 관계가 정립됩니다. 진리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라면 진리를 모르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직업과 사업에 종사하든지 상관없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진리를 모르게 되면 우리의 몸은 무서운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엣날 모세에게 하나님의 법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죽음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즉 모세의 법을 거부한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두 세 증인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에는 하나님은 어떤 원칙을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법을 주었습니다. 그 법은 오직 하나, 거룩한 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세운 법은 결코 다른 거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되어서 이 법을 무시하면 이는 하나님의 거룩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이 없는 몸은 하나님께서 사람 취급을 안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 원칙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초월해서 성경 말씀으로만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정말 진리에 대해서 관심있습니까? 그렇다면 살아있는 자신의 몸이 과연 진정 살아있는 몸인지 예수님의 진리 앞에서 판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2년 3월 3일              히브리서 10:32-39            구원의 확신

예수를 과연 자신이 제대로 믿고 있는지 아니 믿고 있는지를 스스로 어떻게 점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인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내라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습니다. 견디기 힘드니까 그냥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서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애초부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 왔으니 인내로서 견디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을 말할까요?
 사람에게는 각가지 견디기 힘든 상황잉 있습니다. 육체적인 통증이나 물리적인 상처를 입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뿐만아니라 심적으로 매우 속상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체면이 구겨지고, 품위가 손상되고, 사랑의 대상들이 하나 둘 씩 없어지고, 주위로부터 호감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받을 때, 우리들은 심적인 괴로움을 느낍니다. 과거와 다른 상황에사 박탈당했다는 인식 때문이죠. 그런데 믿음이란 것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이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따돌림 받지 않는 것이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보고 세상과 단절된 존재라고 일러주어도 우리의 근성은 이 사실을 단숨에 발아들이기에 너무 큰 장애가 됩니다. 이 장애로 인해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주신 그 크신 배려를 우리 쪽에서 그동안 너무 소홀히 여기지 않았나 하고 다시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2002년 3월 10일     히브리서 11:1-3    믿음과 창조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어느 정도되는 인물인지를 알기 위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자연을 통해서 자기를 알고 우주를 통해서 자기를 알고 그 자연과 우주마저 정복하므로서 자신의 위대함과 그 한계까지 파악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모두 신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표출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나의 스테미나를 축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또 하나의 신으로 자신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말고 자신을 의지할 다른 대상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위대해지고 완벽해지고 철두철미해지려는 사람에게 있어 믿음이란 가장 나쁜 악습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믿음 대신에 이런 사람은 신념 쌓기에 몰두 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신념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격상시켜 주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러한 도전 정신과 거기에 오는 정복의 쾌감에서 인간들은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비신앙적인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도 가만 있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는 이 한마디로서 인간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켜 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오기와 신념과 노력으로 얻어진 것을 자기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지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바로 믿습니다. 보이는 것들로 전투를 벌리고 시합을 벌리는 이 시장터 같은 세상에서 그들의 게임에 신앙인들이 같이 놀아나서는 아니됩니다.


2002년 3월 17일               히브리서 11:4                  아벨의 믿음

옛날에 아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가 그의 이름을 지어줄 때는 마치 장래의 운명을 미리 알고나 있는 것처럼 짓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벨, 곧 ‘허무’입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이 어떻게 허무하게 끝나는 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허무한 인생 한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에 의해 아벨은 ‘믿는 자’, 혹은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인생이 비록 허무하게 끝났다고해서 그것이 곧 실패한 인생이라고 간주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허무하기 때문에 허무의 내막을 보여주는 믿음을 갖출 수가 있는 겁니다. 비록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도 결코 신앙만큼은 허무한 신앙이 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아벨의 인생이 도중 하차한 이유는, 사실 그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제사가 하나님에게는 인정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이라는 형이 먼저 이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출생했는데 그의 이름 곧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비로소 얻어진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크게 쓰실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무슨 큰 일을 저질을 사람처럼 예언되었습니다. 맞습니다. 큰 일을 저질렸습니다. 자칭 신앙있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로 전환되는 가를 시범조로 보여주는 큰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진 존재가 자기 자신이기에 이제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마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주는 것이 순리라고 그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착각이었습니다. 이런 가인의 모습을 보게 되면 마치 우리들으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유없이 내 편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거만한 생각에 우리들은 시달리고 있습니다. 허무한 아벨보다 차라리 이 땅에 살면서 큰 일이라고 한번 저지르고 싶은 건방진 가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가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믿음’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2002년 3월 24일                  히브리서 11:5-6            에녹의 믿음

인간은 다같이 그렇게 그런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별난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각자의 운명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편에 따라 대처하는 것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비록 힘들게 살더라도 얼마든지 자족하며 행복에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신의 인생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을 몰고 갈 때면 사태가 달라집니다. 누구나 누리는 평범한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꼭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매사가 자신의 욕망대로 허락되지 않는데서 오는 울분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어떻게 느꼈던 상관두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일을 추진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자는 본인이 어떠한 고통을 느끼느냐 하는 점과 상관없이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녹도 그 중의 한 분입니다. 남들과 같은 인생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서 1:14-15에 나온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편에 서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눈총과 질시 참으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수준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쉽게 비난합니다. “왜 남들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느냐?”라는 질타입니다. 본인인들 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 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에녹이 보여주는 신앙생활이요 신앙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하고 싶은대로 삽니다.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추진하는 재미도 느낍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이미 확정되어 버린 그 하나님의 뜻만을 보여주는 생활을 강요받습니다. 과연 이 생활이 싫습니까 아니면 평안한 가운데 만족하십니까?


2002년 3월 31일             히브리서 11 : 7                       노아의 믿음

노아가 살던 사회는 지금 이 사회나 속성상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종족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믿는 자들이 어떻게 대처할까요? 그것을 향하여 선전포기를 하고 전쟁을 벌릴까요? 아니면 최고 권력자 위치로 출세해서 강제로 그들에게 세례를 다 베풀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에 취직도 되지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몰아세워 하나님 무서운 점을 그들에게 알려줄까요? 아니면 신자들까리 따로 모여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될까요? 참된 구원자라면 그 사람 속에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따라 만들려고해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신자에게만 있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에는 그것이 방주라는 괴상한 배였습니다. 이 괴상한 배는 평상시 뱃노래 하는데 전혀 유익이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미래에 들어닥칠 큰 대 홍수 때나 유용할 뿐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방주는 사람들의 오락과 정신적인 안식과 편히 쉴 공간용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교회가 사람들의 사교용으로 조직되어서는 아니될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방주나 교회나 오직 미래에 들이닥칠 하나님의 심판의 성질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방주가 물심판으로 인해 만들어진 구조라면 오늘날 장차 올 불심판은 어떤 구조로 대처해야만 합니까? 더 이상 물량적인 번창이나 조직의 큰 세력이 자랑하거나 보람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정말 기뻐할 것이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만 쳐다보고 산다는 이 점입니다.


2002년 4월 7일            히브리서 11:8-12             아브라함과 사라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았던 약속의 사람들은 지상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자신의 근거지를 버리고 떠날 때에는 그들이 잃어버린 그 이상으로 굉장한 것을 얻은 줄로 기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과 수고에 바탕을 두고 손해날 일을 하지 않는 바입니다. 만약 손해가 난다면 그것은 낭패요 인생 실패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호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고대한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나그네로만 살아야 될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막’입니다. 땅을 버리고 ‘장막’으로 인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땅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잃어버림과 상실은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태가 닫힌 것에 견줄만 합니다. 과연 왜 자신들이 이런 수모와 낭패를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사라에거 찾아야 했습니다. 사라는 어머니로서 이미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사는 자가 진정 믿는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이 도착했던 약속의 땅은 참으로 하늘의 약속과 연계되는 땅이었습니다. 만약 기존의 세상과 연계되는 땅이라면 그들이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날 하등의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존의 믿던 것에서 떼어놓게 되는 능력이 발휘됩니다.


2002년 4월 14일                  히브리서 11:13-16          더 나은 본향

살고자 애쓰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어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죽어야지 믿음없이 죽어서는 아니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목표점이 아니다보니 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단지 나그네이며 남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이방인체로 한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타국인이 남의 나라에게 세월을 보낸 셈이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고향이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사람들도 자신의 고향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하면 고향 땅에 묻히느냐를 염두에 두게 됩니다. 고향에서 시작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에 대해서 그들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신앙인들도 고행이 있습니다. 땅에 있는 고향을 고향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살 생각이 없습니다. 더 나은 고향을 역점을 두고 힘차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사모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모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모할 게 있으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소망이 신앙인의 일방적인 자기 생각에 한정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구절이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런 신앙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 말씀입니까 뿐만아니라 그들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한 성을 하늘 나라에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2002년 4월 21일              히브리서 11:17-19                 도로받은 생명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인 동시에 사실상 인간의 전부입니다. 죽음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고민도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고 그 끝에서 자아가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인간들이 어떤 목표를 정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호소를 한들 없어지는 자아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생겼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생길 수 없는데서 도리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이삭에게 일어난 현상은, 현재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 어떤 희망을 제공하게 됩니다. 비록 아브라함 본인이 도로 살아나지는 않았어도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진정한 생명의 맛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이란 이삭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아브라함이나 이삭 자체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나야  했고 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습니다. 이 모든 계획에다 아브라함은 전부를 걸어야 했고 전부를 바쳐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이 살고 죽는 것은 모두 이 계획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먼저 제시된 하나님의 행함에 대해 자신의 뜻을 포기했기에 구원받은 겁니다.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육신 세월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아브라함은 새로 생긴 아들을 통해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따로 고집할 운명은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2002년 4월 28일            히브리서 11:20-21            언약적인 축복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게 두 아들이 생겼습니다. 어느 쪽이 진정한 약속의 계통을 따르는 자인지, 그리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하나님은 새삼스럽게 알려주시려고 합니다. 과연 고정된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고정된 운명을 일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인생을 주도하십니다. 이점을 아직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담고 있는 그 깊은 뜻을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 유리한대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모든 탐욕과 개인적인 여망을 밝혀내면서 그 속을 통과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의 결과를 보고서 비로소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됩니다. 그제사 후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고 전달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축복의 내용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들은 자신의 포부나 희망 사항을 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마련인데 이런 와중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만 성취시켜 나갈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욕삼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되겠지요. 이러한 충돌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가운데서 진정한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구분하게 됩니다. 지식으로 성경 내용을 안다고해서 제대로 생활에 옮겨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삶으로 나오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래서 축복받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2002년 5월 5일                   히브리서 11;22             요셉의 믿음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영구 불변의 세계라 간주하지 않았던 자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지만 거기서 자신이 누리는 각가지 혜택과 권력의 맛에 푹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현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단지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환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천국의 자녀들이 따로 있는데 이들은 기껏 이 세상 삶을 한껏 즐기기 위해서 선택된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들은 이 험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될 책무가 자로 뽑혀 나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빠져 나가야 될 운명의 사람들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 봐서 개인의 기쁨과 행복의 종결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요셉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죽음조차 극복되는 세계를 따로 마련해 두셨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자기 해골을 애굽에 그냥 방치하지 않도록 당부했습니다. 요셉의 해골이 인도하는 곳, 요셉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요셉의 후손들이 살아야 될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됩니다. 이처럼 요셉의 해골이 애굽 땅에 머물지 않고 떠나야 하듯이 지금의 하나님의 백성도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최후의 운명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조차도 회수해서 떠나야 될 곳이 이 세상입니다. 요셉의 해골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여호수아 24:32에 보면, 과연 무사히 요셉의 해골은 약속의 땅에 와서 묻히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도 구원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002년 5월 12일               히브리서 11:23            모세의 어머니

모세가 태어나지 전에 애굽나라에 새로운 바로왕이 등장했습니다. 왕의 임무는 국력을 최고로 끌어올리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추진해야 될 많은 국가적 과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바로 왕은 자기 종족에게 맡기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타민족에게 맡겼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우선 자기 종족과 타민족과 구별지어져야 했고 더나아가서 혈통이 섞이는 것을 방비해서 순수한 자기 종족을 따로 추려 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숫적으로 자기 종족의 번식률보다 애곱의 후손들, 즉 히브리인들의 번식률이 월등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이 히브리인들의 인구를 조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정책을 수행하고자 하는 이 바로왕은 전에 요셉이라는 히브리인의 혜택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을 대할 때 이러한 비은혜적인 정책을 그대로 실시하게 됩니다. 물론 은혜라는 것이 인간들의 능력에서 나왔다면 그저 과거사로 덮을 수도 있지만 전에 애굽나라가 받은 은혜는 지금도 살아있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를 잊는다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여호와와 자신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남의 나라에 살고는 잊지만 차라리 바로왕의 명을 어기면 어겼지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모세를 낳은 어머니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고해서 하나님께서 똑같은 존재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모세의 어머니는 믿었습니다. 국가라는 울타리든 혹은 교회라는 울타리든 그 어떤 힘도 인간의 믿음을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참 신앙을 확인해주고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2002년 5월 19일              히브리서 11:24-26           모세의 거절

사람마다 자신만의 특색을 갖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 타고난 본능을 누가 감히 극복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이처럼 불가능한 일이 모세에게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굳게 박아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과 결심 여하에 따라 재차 수정해서 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런 반성해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은 믿음의 대상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흔히 성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서 과연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인지 아니면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과 과연 일치되는 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모세가 결코 모든 면에 있어 완벽한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완벽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 안에서 모세 스스로 불가능한 그 무엇이 들어 있음을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세를 흉내내거나 모방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변화시킨 분이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편에서 믿음을 새로이 만들거나 조작해 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난데없이 믿음이 생긴 것에 대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세상적인 귀한 것과 아름다움이 하늘의 가치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가를 보여주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모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2년 5월 26일           히브리서 11:27-29                모세의 믿음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같이’, 과연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그것도 계속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있는 것만 신경쓰고 챙기는 자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없는 것으로 봅니다. 없는 것을 상대하는 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보고 여깁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인간다움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알았던 것입니까?
 모세가 보았던 것은 이 지상에 던져진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의 기존의 모든 것을 교체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엄포라고 여겼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던 겁니다. 모세는 거침없는 애굽 임금과 그 군대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란 인간들이 힘을 가지고 달성케 하려는 것인데 모세가 믿는 하나님은 이것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지 않기에 모세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모세의 무리는 애굽 군대에게 패배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알았습니다. 모든 전쟁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어디있습니까? 물어보나마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모세 자신의 전쟁이었다면 모세는 승리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 개인의 전쟁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님의 전쟁터에 모세는 무리들은 그저 초청받은 것 뿐입니다. 목격자와 증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형편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결코 개인적인 용도나 활용성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그 약속을 위해 전적인 헌신으로 연결될 뿐입니다.


2002년 6월 2일           히브리서 11:30-31           라합의 믿음

 무엇을 정복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개인적인 야심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가 가는 길에는 일체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인적인 포부라는 것이 고려될 수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성 점령은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꼭 그 성을 정복해서 소유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리고성 점령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이와같이 일이 진행되는 것을 가지고 ‘붙여주는 전쟁’이리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참전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에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생각해 놓은 방식은 일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 방식까지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단면을 보여주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이 결코 인간의 힘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기에 필히 정복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속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은 거룩에 의해 정복당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을 인정하는 자만이 구원받습니다. 여리고성에서 기생 짓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라합이 자기 딴에 완벽해봤자 얼마나 완벽하게 살아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이스라엘의 신에 대해서 공감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해 극진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급니다. 그녀에게 있어 여호와는 자기가 속해 있는 민족이나 종교보다 우선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절대적인 순종이 곧 구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2002년 6월 9일                히브리서 11:32-34            사사와 선지자들

사사들은 전쟁이 하고 싶어 환장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도 하지 아니하려는 희생적인 일 때문에 간택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하기를 원하는 일을 하고자해서 나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들이 당한 고난의 깊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모두다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되면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곤궁에 처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짓게 됩니다. 이 고통에서 변제되려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대신 고통을 받을 자가 등장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바로 사사들입니다. 그들이 초인처럼 행동했다고해서 그들의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초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면에 있어 대단한 압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든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라든지, 자신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것을 결코 미련두지 말라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시련이겠습니까. 물론 본인의 결심 여하에 따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강력하게 작용하십니다. 이러한 결과로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평화가 찾아듭니다. 하지만 사사나 선지자가 당한 시련은 곧장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신의 고통은 오래가지만 타인이 자기로 인한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 만한 육체를 인간들은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선지자나 사사의 고통에 동참시키기 위해 새로운 어려움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고난도 이같은 원칙에 의해서 성도에게 임하게 됩니다.

 
2002년 6월 16일                     히브리서 11:35-39                믿음과 시련

시람들은 평생을 편안히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인생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범벅이 된 채 다 보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고생 안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고생은 그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고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전혀 상관도 없는 일 때문에 죽기까지 고생하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순교이며 무엇을 위한 고생입니까? 이 세상에는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할 무서운 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참된 신앙인에게만 그 실체가 보이게 됩니다. 악마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한결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에는 전혀 관심두지 않고 살아가기를 악마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사회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가 생겨버리면 모든 권력과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이 사회에서 도태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을 톱으로 켜서 죽이고, 또 박해를 피해 광야에 유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도의 힘든 일생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수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정체와 실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성도는 비록 수난의 세월을 보내지만 오히려 이 현실성을 미워하지 않고 기뻐합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영혼의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사사로운 일에 주눅들지 않는 인생이란 비록 남들보기에 저주받은 사람같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2002년 6월 23일               히브리서 12:1-3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아는 자는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세상의 형편을 모르게 되면 제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할지라도 모든 것이 헛걸음 한 것이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과연 세상 형편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마다 각자 그들이 목표로 삼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본인들 보기에 성공했다고 간주되는 인물들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목표로 삼은 그 위대하다는 인물들이 죽음까지 뛰어넘어 선 자일까요? 인간이 아무리 성공했도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면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평생을 싸우며 얻으려 한 것이 죽음 앞에서 모두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로하여 따라 붙으려는 인물이 적어도 죽음을 능가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증인’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앞서 신앙을 가졌던 분들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과연 그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했을까요? 예수님은 부끄러운 십자가 형벌을 통과해서 하나님 우편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종교적입니다. 내심 기대하고 좋아하는 타잎이 다들 갖고 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봉하는 인물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인들은 믿음의 주인 예수님처럼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기피 인물로 취급합니다. 그 대신 세상 것을 채워준다는 신비적 존재만을 염두에 두고 교회에 나옵니다. 믿음의 주가 아예 없는 자들이지요.


2002년 6월 30일                히브리서 12:3-13             하나님의 징계

사람은 자신을 측정하고 평가하고 점검하는데 있어 주위의 상황을 고려하게 됩니다. 자식이 소속해 있는 세계에서는 그 세계의 원칙에 맞추어 자신을 조절하고 변신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목표나 목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소속해 있는 조직의 눈치를 보며 저아려고 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것이 뭡니까? 구원이란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자기 세계의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나서 예수님이 통치하는 세계로 넘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기존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에는 영의 아버지가 계시다고 오늘 본문 말씀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의 아버지는 명목상으로만 계신 것도 아니요 아무런 활동도 아니하시고 이름만 걸쳐놓은 꼴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 영의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자녀들을 다스리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나 목적이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징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의 아버지의 목표나 목적에는 무관심하고 계속해서 기존의 자기 세계에 부합하고자 한다면 여기에 징계가 딸게 됩니다. “즉 너는 남의 자식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그저 하나님만 믿는다는 사람끼리의 모임이 아닙니다. 영의 아버지를 경외하고 크게 의식하며 모이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영의 아버지와 무관한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영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 차라리 기쁜 소식에 해당됩니다.


2002년 7월 7일                   히브리서 12;14-17           에서의 운명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말고 육과 영혼을 당연히 지옥에서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거나 혹은 자기 마음에 드는 식으로 살아가면 그만인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라는 분이 따로 있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만 운명이 결정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점을 인정하려 않으려 합니다. 자기만 편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다고 여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려워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주를 만나 보지도 못할 주가 있는가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곧 은혜의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없이는 거룩도 없고 은혜가 아니고서는 주를 만나 뵐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무관심하고 관계를 끊고 살면 반드시 망령된 자가 됩니다. 즉 은혜없이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다 하다 안되면 결국 아예 하나님도 없고 주도 없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은 완전히 망치는 게 됩니다. 육만 건재하고 튼튼하다고해서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육과 영론을 멸하시는 분입니다. 회개란 사태를 바로 파악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세상과 인간을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보셔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육과 영혼을 책임질 수 없는 세상을 따라가서는 아니됩니다. 나중에 눈물로 한꺼번에 회개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에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2002년 7월 14일                 하브리서 12:18-29                 무서운 진동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에게 어떤 현상으로 다가오는 겁니까? 우리가 딛고, 또는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그 모든 것조차 하나님에 의해서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그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진동’이리고 표사하고 있습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변해야 될 것은 결국 변하고 만다는 겁니다. 영원한 것도 아니요 고정된 것이 아닌 것이 이 세상입니다. 만고 불변이 아닙니다. 소멸하는 불에 의해 해체될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위엄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조금 보여주신 일이 바로 시내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인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다린다는 그 시내산까지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무서움으로 진동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 계신 곳이 엄위하고 무서운 걸까요? 거기에는 하늘의 총회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언약의 중보이신 에수님도 계시고 그 분의 중보의 피도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곳입니다. 거기에 비해 이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총회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들의 사회일 분입니다. 전혀 위엄스럽지도 않고 그리고 고귀함으로 충만한 안전한 곳도 아닙니다. 튼튼한 세상이 못됩니다. 게다가 하늘의 총회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향해 경고를 하십니다. 거역하면 큰일 난다고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통째로 흔들린다고 하십니다. 이것 또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할 일을 중도 포기할 분이 아닙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도 그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아니됩니다.


2002년 7월 21일                 히브리서 13;1-6         성도의 생활 모습

하나님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나갈까요? 그것은 원래의 인간의 참모습을 다시 파악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생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어떠어떠한 인간상을 갖추어라고 했을까요? 그 본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이외의 모든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고 원래의 인간됨에서 이탈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죄인으로 등장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항들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빠짐없이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계셔야 합니다. 첫째는 형제 사랑이요, 둘째는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는 당부에, 세째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렇게 함으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당연히 이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힘으로 이런 지시를 이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의 의의를 무산시키는 처사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바는 우리로 하여금 원해 인간됨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력으로는 이러한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형제를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안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사람이 돈을 사랑치 않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 수가 있단 말입니까?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요구됩니다. 만약 이런 기적적인 마음과 행위가 나타나거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2002년 7월 28일  히브리서 13:8-15   영문 밖의 제물

에수님의 고난과 피 흘리심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하기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이 제물은 아무나 먹을 수 없습니다. 식사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희생용입니다. 마치 옛날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위해 희생의 제물을 잡는 이치와 같습니다. 피는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보비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원칙을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는 겁니까?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죄로 인해 능욕을 받으시고 불사름을 당하신 예수님이 육체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도성에서 사는 사람들도 결코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다른 인간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이 중요한가가 관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는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 뿐입니다. 다른 방식은 용납이 안됩니다.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못합니다. 이는 은혜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도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의지하는 것은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능욕을 홀로 지신 예수님의 피만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는 곳을 사랑하지 마시고 은혜가 주어진 것을 더 찾아갑시다.


2002년 8월 4일               히브리서 13:16-19           선한 일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세상 양상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한 진리처럼 강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심지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해서, ‘소유’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됩니다. 소유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전혀 따지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선한 일일까요? 하나님은 달리 보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옹호하는 주장이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 해답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위하여 생을 사셨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몸과 목숨을 남을 살리기 위한 대속물로 제공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희생’입니다. 이러한 희생의 삶이 되려면 우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이 선과 악의 문제를 놓고 그 당시 인간들과 많은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이란 사실은 자기 의이며, 자기 자존심의 고취이며, 자기 영광성과 궁극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자신이 위대함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것을 그들은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만이 선하시며 악이 없으시며 잘못이나 흠이나 실수나 실패가 엇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포기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곧 선한 마음입니다.


2002년 8월 11일              히브리서 13:20-25                 양의 큰 목자

하나님은 자기 뜻만이 최고로 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 최고의 뜻은 오직 자신이 살아남는 일입니다. 소위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둘 사이의 갈등이 끊임없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그리고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양인 자와 자기 양이 아닌 자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십니다. 과연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가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으십니다. 목자란 양을 의해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내놓은 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이용하고 양을 밥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성도는 어떠합니까? “빌립보서 2: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이릉ㄹ 위하여 죽기에 으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워려 함이니라“ 에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소원 성취용으로 예수님을 목자로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이 남기시고 보여주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남은 일생마저 과감하고 소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어떤 때 가치를 느낍니까? 과연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버티며 살았다고해서 성공적인 삶이겠습니까? 혹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기억한다고 보람있는 인생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생명과 귀한 목숨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퍼져나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입니다. 즉 양은 목자가 어떠한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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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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