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불평

2010년 3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0-14

(렘 15:10, 개정)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렘 15:11,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렘 15:12, 개정)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렘 15:13, 개정)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 15:14, 개정)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이 말씀이 예레미야 개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유다 나라 전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지 모호합니다. 초반에는 예레미야 개인이 하나님에게 따지고 자기 어머니에게 따지면서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주성의 결말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유다 나라 전체에게로 퍼집니다.

왜 이런 식으로 선지자와 유다나라가 얽혀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가 참으로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축복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느냐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믿고 얼마만큼 욕보지 않고 많이 얻었느냐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레미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과 자신이 남들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이 하나님이 구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자기 어머니에게 원망투로 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 하나님에게 원망하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망은 실은 예레미야가 대변하고 있는 이스라엘 전체가 평소에 하나님에게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바를 나타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모릅니다. 자신만큼은 불행한 경우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단정짓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까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한 예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번에 다음과 같이 반발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네?”라고 말입니다. 이런 대꾸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기 구원과 자기 축복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 드러납니다.

로마서 11:32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라는 말까지를 봅시다.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극렬히 반발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을 보면,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람 차별없이 긍휼을 줄 자, 모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아무도 자신이 구원받아야 될 자라고 외칠 자격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구원됩니까?”라는 식으로 자기 구원에 관심 두어서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참으로 우리 피조물이 관심 두어야 될 사항은, 자기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일하시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등장입니다. 남이 예레미야를 저주하니 예레미야의 성질이 발칵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이란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이 천하의 제일도 하나님 믿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몽땅 하나님에게 다 바쳐서 자기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천사같은 존재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인이 내 앞에 등장하게 되면 그 타인으로 인하여 사라졌다고 여긴 자아가 같이 출몰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자칭 신앙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산을 팔아라 고 하셔서 자신은 그냥 순종할 따름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 교회를 세워주셨다고 고백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른 장로가 그 교회에 와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자, 공적 예배 시간에 그 기존 장로가 벌떡 일어나 교인들에게 외쳤다. “다 나가라. 이 교회 내가 세웠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란 홀로 있을 때는 참으로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죽은 자라고 간주하고 싶어하지만 막상 타인이 자기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핍박하고 저주하면 십자가 밖으로 튀어나가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즉 “누가 센 지 한번 붙어봐?”라고 말입니다.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난데없는 고통에 시달리자 처음으로 죽여달라고 하다가 친구들이 옆에서 하도 구박을 하고 약을 올리니 급기야는 누가 바른지 하나님 앞에서 따져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 때,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욥과 너희들 친구들은 하나님의 대속물을 잊었구나”라고 말입니다.(욥 36:18)

이처럼 우리들은 타인의 약올림에 대해서 참지 못하면 십자가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하나님과 대화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복을 온 우주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지옥 갈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에게 부르짖어봤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줄 곧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스스로 선택하면서 초라한 자기 인생을 건설하다가 지옥불 속으로 던져져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사람에 비해서 예레미야는 얼마나 다행한 처지입니까!

로마서 8:34에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이 조롱하고 놀리더라도 이미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어떤 분이 오늘 저에게 전화하기를, “곧 죽어가는데 어떤 성경 본문을 보고 기도를 하면 됩니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5:1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해드렸습니다.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의 귀중함이 크고 넓게 다가오기에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저주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살기만을 원한다면 결국 십자가로부터 점점 멀어질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유다 나라를 분리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힘들게 한 유다나라에 저주의 불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는 복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이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비난 받는 힘든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 속이라서 더욱더 대속물의 가치가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민이 무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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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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