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에 대한 공격

2010년 5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8-20

(렘 18:18, 개정)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렘 18:19, 개정)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렘 18:20, 개정)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선지자가 파견될 때에는 기존의 세계관은 이미 시효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바꾸기 위함으로 선지자를 보내지만 지상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현재 자신들이 구축한 인생관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선지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다면 이는 기존의 지식에다 더 보태기 위해 주신 줄로 압니다.

전면 교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상의 인간들은 새로 추가된 하나님의 뜻과 기존에 자신들이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겁니다. 그런데 안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찰과 충돌을 일으킬 요소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처단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현재 자기들 동네에서 제사장이나 지혜자나 선지자로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새로운 선지자가 추가적으로 더 올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새로 추가되는 선지자는 기존 인간들이 내세우는 하나님의 뜻이 실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신다는 겁니다.

물론 이 사실조차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지자의 말씀을 전면 거부하고 나섭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긴 모든 사상을 자진해서 죄악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함을 전제로 하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의 공격에 대해서 참된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특별히 자기 방어를 위한 대책이 없습니다. 당하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위인들이 주변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를 이토록 방치하시는 걸까요? 마태복음 11:7-9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상을 보내시는 형식이 ‘본다’에 중점을 두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선지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엄연히 보이는 양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선지자를 볼 때에, 기존에 자신들이 보아오고 들어오고 알고 있는 바와 얼마든지 견주어 볼 수 있는 대상체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즉 “저 인간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처단해? 아니면 말어?”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료거리가 되는 겁니다. 처분의 대상으로 충분히 검토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선지자 본인은 어떠합니까? 자신은 남들로부터 ‘보이는 대상’으로 존재하지만 막상 선지자는 마음의 결정을 나름대로 내릴 그 어떤 재료거리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을 둘러싸고 유대인들이 다음과 같이 비난합니다.  “누구냐, 너를 선지자로 보낸 작자가?”라고 할 때에 세례요한은 기껏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선지자 입장에서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그 어떤 눈에 보이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선지자는 그냥 혼자말로 중얼거릴 뿐입니다. 과대망상가로 취급받기 적당합니다. 즉 자기 자신의 발언 이외는 자신을 도와줄 그 어떤 세상적인 인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당히 불쌍하다고 여기십니까? 실은 오늘날 참된 교회가 이런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교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이 일곱교회마다 저마다의 도시에 저들을 위하여 이동되지 않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교회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혹은 언제든지 이동되고 제거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동 가능한 교회와 이동 불가능한 교회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형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은 자기네들 동네에서 자기들이 구원을 위하여 자신들이 세웠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뜻만이 확고하다면 이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달리 말해서 그 현지민들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교회란 사람들, 혹은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란 기존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얼마든지 옮길 필요없는 합당한 교회라고 장담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산이었습니다. 교회됨이란 사람들의 결심이나 마음가짐에 의해서 확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어지는 겁니다. 7교회의 편지마다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기는 자’는 후렴입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운다는 말입니까? 뭘 이겨야 된다는 말입니까? 쳐들어오는 적들도 없는데 누구를 상대로 한단 말입니까?

교회는 교회를 이겨야 합니다. 교회의 적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의 적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이동이 있을 수 없는 교회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의 자유로움이 교회가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공되어 있는 그런 교회상을 고집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파견한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란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의 차이점은 교회에 대한 집착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뜻과 관련된 말씀 전달에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말씀 자체를 위한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교회는 예수님이 파견한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이 파견한 교회일 뿐입니다. 이런 교회는 그 지역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소위 촛대가 옮겨지는 겁니다. 비록 여전히 교회가 운영되어 교인들이 움집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는 참 선지자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오로지 말씀만이 전달해야 하기에 어제의 교회가 자동적으로 오늘의 교회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발생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매일같이 말씀 때문에 존재하고 발생하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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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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