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하 19장11-15절
제목 : 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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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강-삼하19장11-15(왕의귀환)-2sa100815

왕의 귀환

2010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11-15

(삼하 19:11, 개역)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삼하 19:12, 개역)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삼하 19:13, 개역)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삼하 19:14, 개역)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삼하 19:15, 개역)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육적인 사실이 어떻게 영적으로 전환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반대로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가는 것도 환각이나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실제로 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적 세계인 부활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그 경로를 우리 성도의 입에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다윗의 왕 자리는 분명 육적인 자리맞습니다. 하지만 그 육적으로만 알고 그 자리에서 어떤 영적 지혜가 작용하게 될까요? 모세 시대에 있어 이스라엘이 나라 체제는 왕 체제가 아닙니다. 대제사장 책임제였습니다.

왕이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육적인 현실에서 영적 세계로의 진입은 오로지 대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계시로 국한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제사장이 제대로 유지되면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고 대제사장이 허물어지면 그 나라도 허물어지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이라는 직위가 따로 필요했을까요?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으신 왕께서는 제사장 구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계셨습니다. 이 의도는 백성들이 채택한 의사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아무런 재산이 없습니다. 단지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쳐야 살아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선언해 버리는 순간, 제사장은 굶어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애써서 번 돈에서 10%를 제사장에게 상납하는 겁니까?

원래 그 약속의 땅이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 얹어서 자기 백성을 그 땅에 들여놓았다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거나 침범될 장소가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방적 사랑으로 그들을 그 땅에 쏟아놓았으니 그 땅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금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남의 땅, 임대해서 농사짓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있어 품군입니다.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나머지 아홉은 농사꾼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실은 나머지 90%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몽땅 다 하나님 것인데 단지 하나님께서 봐주어서 10%만 받겠다는 겁니다.

이 은혜가 유지된다고 제사장들도 얼마든지 “하나님 덕분에 삽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이 이웃 이방민족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법으로 존재하는 나라들을 본 겁니다. 얼래? 하나님 믿는 나라보다 더 잘 살고,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있어 언제든지 힘으로 이스라엘 정도로 밀어붙일 태세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믿음을 철회하기 시작합니다. 십일조 바쳐서 복받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안 겁니다. 차라리 애굽식으로 차라리 이방나라 식으로 사는 것은 자기네들 타고난 인간 본성에 합해서 좋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십일조거 원활하게 거두지지 않게 됩니다.

생계 위협을 느낀 쪽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 둘씩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고용한 개인이나 단체의 복이나 빌어주는 고용인 변해갔습니다. 군대에 근무하는 군목, 사학에 근무하는 교목, 병원에 근무하는 원목, 교회에 근무하는 회목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냥 개인 사업체의 직장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다윗을 왕으로 간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옹립하는 왕이 아니라 도리어 왕이 백성들을 새로 생산하는 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일방적으로 뽑는 것이 왕 역할의 주안점이 아니라 필히 제사장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아는 자들만이 백성이 되는 것이 주안점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 덕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그들 손에 안수당하고, 그들 손에 희생당하고 불에 태어지는 그 제물의 운명을 자신을 운명으로 일치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0:26-28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본 원칙은 희생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강탈당하는 행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잃는 쪽이 아니라 끌어모으는 쪽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을 통해서 선택받은 왕을 이해한다는 것은, 밑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는 그 길이 바로 메시야가 거쳐지나간 노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에서 영적 세계로 빠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다윗왕은 자기주변에서 벌어지는 권력장에서 바로 이 메시아의 경로를 알아 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되 잃었음을 경험하는 자는 자기 직속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힙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마사입니다. 다윗은 자기 조카를 자리를 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요압이라는 위대한 장군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를 적군의 장수에게 내어줍니다.

그는 전에 압살롬 진영에서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권력 끌어 모음과 반대되는 행정처리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그 어떤 시혜나 자비는 장래를 생각해보면 위험한 짓이 됩니다.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삶의 경험이요 지혜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뒤엎습니다. 그렇게 뒤엎을 때, 진정 하나님의 왕되심을 이해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6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잃어버리는 체험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로를 가면서 바깥에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경로는 천국으로 통하는 경로입니다. 육신적인 것이 늘 삭제당할 때 그 배후에서 영적 세계의 면면이 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십자가 지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함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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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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