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 : 기적, 소용없음을 도리어 원망담는 표적으로서 죽는 십자가

기적,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원망을 유발케 하는 표적으로써의 십자가

2010년 8월 21일 토요일 오후 3:53:19   김대식


본문 : 마가복음 1장 16-45절

(막 1:16, 개역)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막 1: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8, 개역)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막 1:19, 개역)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막 1:20, 개역)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21, 개역)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2, 개역)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3, 개역)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막 1:24, 개역)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5, 개역)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6, 개역)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 1:27, 개역)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28, 개역)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막 1:29, 개역)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막 1:30, 개역)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막 1:31, 개역)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막 1:32, 개역)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3, 개역)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막 1:34, 개역)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막 1:35, 개역)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6, 개역)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막 1:37, 개역)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막 1:38, 개역)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9, 개역)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막 1:40, 개역)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1, 개역)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2, 개역)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3, 개역)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막 1:44, 개역)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막 1:45, 개역)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기적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눈에 보이는 가능성으로 보여준
마치 무미건조한 역사 속에 묵시가 흡집내는 흔적으로써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역사 속의 곧 시간과 공간이 묵시개입으로 흡집난 흔적입니다.

그것을 인간들은 하나의 통로로써 묵시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로써
그런 기적의 장소를 기념비화 하는
그럼으로써 꿈과 희망과 소망을 잊지 않고 기다리는 장소로 시간으로 삼아버립니다.
(노아 홍수를 펼치니까 한템포 늦은 묵시에 대한 포착을 놓침으로써 그 대안으로 바벨탑이 건립이 된다. 거기에 역청과 벽돌까지 기술이 도입된다는 것은 그만큼 급박하다는 것이다. 결핍이 생겨버리면 동시에 힘의 결집이 생기는 몰입 곧 집중력이 생긴다. 왜 사람들이 성전짖기에 몰입하는가? 왜 기적의 장소를 찾기에 집중하는가? 왜 복이 되는 장소와 시간을 소유할려고 하는가? 자본주의란 그것은 좀더 수월하게 해준다. 왜 돈을 끌어모을려고 하는가? 집중력이다. 바벨탑에서 인간의 이름이 집중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은 곧 기적은 집중력으로 해석하는 부류가 반드시 심판의 결핍을 통해서 생성이 되는 것이다.)

유난히 마가복음은 기적이 행해지는 것이 많다고들 마가복음의 한가지 특징으로 언급하는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복음서 보다 많은 것일까요?

저는 기존의 글에 반대로
그것은 기적을 베풀어도 소용없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참 재미있는 것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라고
노아 홍수 심판을 펼치고 난 뒤에 물로 심판 후에 심판 않겠다는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무지개 언약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 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은혜라기 보다는 완전히 약올리는 겁니다.
진짜 은혜라면
심판 전에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치 용서의 왕 중의 왕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용서 해야죠.
그런데 용서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취지가 바로 때려죽어도 용서하지 않는 심판이 바로
용서의 왕 중의 왕 이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힌트가 되었죠,.

왜 무지개 언약을 펼치실까요?
물 심판 이후로 죄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취지는 결국은 더 깊은 죄를 파고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물로 아닌 불로 심판한다는 취지로 더 깊게 들어가는 겁니다.

용서의 비유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왜 이런식일까요?

하나님 곧 토기장이가 잘못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용서를 말하면 용서를 고지 곳대로 듣는 인간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용서를 더 응용화 하는 죄가 더 깊게 펼쳐지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말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육 때문입니다.

영이란 육을 겨냥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말로만 영적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육에 철저하게 갇혀버린겁니다.

그래서 그런 육을 겨냥해서 육의 죄를 유발케 할려고 일부러 그런 표현들을 펼쳐지는 겁니다.
결국 포기하라는 겁니다.

죄 안짖는게 아니라 죄가 더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성화론자인 마귀자식과 주님의 자녀의 차이점이 뭔고하니
죄가 더 깊게 들어갈수록 은혜가 더 크다 라는
주님이 하실 일에 맡겨진바 된 주님의 숙제를 보게 된다는 은혜를 고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화론자는 여기서 죄가 더 깊게 들어가서 은혜를 도출해 내는 주님의 숙제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항상 염두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믿음이 펼치는 예수님의 숙제에 자신의 믿음은 거들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예수님의 그런 믿음(죄를 더 깊게 해서 은혜를 도출하는 방식) 십자가의 예정 보다
자신의 믿음이 더 믿음직 스럽게 보이니
예수님의 믿음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수님한테 모든 것을 맡기다가는 거들날 수도 있거든요.
아니 거들내는 방식 외에는 하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내 믿음 말고는 안믿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할게 아니라 차츰 차츰 자신이 스텝을 수위에 맞게 펼쳐보이겠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스텝 바이 스텝

그러나 그 상대적인 인물로써 대조를 이루는 자가 개같은 이방 여자 사마리아 여인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여자로써 그것도 힘도 없는 여자로써 모든 것이 거들난 여자입니다.

니고데모는 남자로써 그것도 바리새인으로써 그것도 밤에 몰래 선생으로 삼아서 지식이라는 집중을 위해 한 수 배우고자 다가온 겁니다. 몰래 몰래 남보다 과외 수업 더 받아서
지식 그것도 성경 지식에 한 수 위의 집중력 권력을 추구하겠다는 발상이였던 겁니다.

그런 자기 알리바이와 자기 믿음을 자기 스스로 구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소용없다 라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 다는 말은 죽었다가 다시 라는 심판과 죽음을 거친 의미인데
니고데모는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 합니다.

성화에 성화를 추구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살아 있는 가운데서 더 거룩한 살아 있음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거룩은 거꾸로 해석한 겁니다.
거룩이란 죽음을 염두한 겁니다.

죽으라는 것이 거룩인데 안 죽고 거룩하겠다는 발상을 하니

어머니 뱃속에서 어떻게 다시 들어갔다 나오냐 라고 묻는 겁니다.


우와


이게 우리입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는 사고방식을 펼치는 것이 인간의 믿음의 도출 방식인 반면에

예수님은 지금 모든 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는 방식으로써 모든 말씀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다시 태어난다 라는 중생 도는 부활 의미를 아무리 말해도 오늘날 개혁주의이든 성화론자들이든 모조리 죽음을 빼버리는 식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 종파도 자칭 기독교인도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도
그 어떤 인간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의 인간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다시 태어난다 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은 막으시는 겁니다.
성경 지식요?

막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 라는 호세아 말씀을 듣고

그래 지식이 없어서 망했으니 지식을 갖추면 안 망할꺼야 라고 생각해서 성경의 지식을 쌓지
누가 그 말씀을 보고 나도 망하는 것은 마땅하네 라고 생각하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죽음을 자꾸 심판을 자꾸 저주를 자꾸 피할수 있다 라고
그 반대의 급부를 추구하면 피할 수 있다 라고
가능성으로 보는 겁니다.

불가능성으로 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의미를 끝까지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집요합니다.
권력이란 집중력입니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자 라는 식입니다. 이것이 성화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더 이상 따라 올 수 없게 됩니다.

진작 그라지?

진작 따라 가지를 말지.

어차피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다 홀라당 벗겨질 것인데
그 예수님의 죽음이 진짜 현실인데

지식이 없어서 망했으니 안 망하는 방법을 추구했고
수준 높은 성경 지식 쌓으면 좀 더 나은 자아를 추구할 수 있다고 가능한 것이라고그런 의식 자체가 바로 주님께서 겨냥한 말씀이라는 것을 왜 몰랐냐 라는 겁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육이 그런 권력을 포착했고
그 권력에 탐심이 눈을 떠 버린 이상
예수님을 끝까지 따먹어야 하는 선악과로 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푼 기적을 봐 버렸거든요.
예수님이 해석한 그 해석에 뿅가 버렸거든요.
이제 그것을 내 쪽으로만 나 라는 육의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된다고 본 겁니다.
뿅 가버린 이상 못 말립니다. 마약 보다 더 한데요 뭘.

이것은 마치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퍼부어 버림으로써
장정 60만명의 잡족들이 자기 가족 구원은 이미 확보 했다 라는 확신이 안들고야 안들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무지개 언약으로 다시는 심판 안하겠다 라고
노아 홍수를 방금 펼친 후에 말씀 하셨으니
방금 애굽 10가지 재앙으로 보여주셨으니
홍해 가르는 기적에다가
그 10가지 재앙에서 빼 내어 주었다면
아무리 다른 신을 믿고
자기 민족의 신을 믿는 절대신앙의 믿음 좋은 자 라고 해도

지금 자신이 놓여진 구조 속에서 펼쳐진 사건으로써
애굽 10가지 심판과 그 속에서의 구원인 홍해 사건을 직접 체험한 이상

안 믿고는 못 배기는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일을 제대로 하신 겁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니고데모와 같은 자를 제대로 만들어 놓았다 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다시 광야 속으로 들어가니

그 가정의 구원을 담당하는 장정 60만명 중에 다시

청함을 받은 자 중에 다시

택함을 받은 자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소용 없는 그 택함 받은자를 광야 라는 본격 게임에서 펼치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은 나자빠져 버립니다.

아무도 접근 할 수가 없습니다.
접근 불가입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이라는 그 기적은 어디 간데도 없고
14번 이상의 원망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만 몰고갑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이것은 애굽 보다 더 심한 겁니다.

더 강퍅하게 만들려고 작정하듯이 다가오는 겁니다.

원망 안할래야 안할수 없는 상황으로만 몰고 간다는 겁니다.

아니 일부러 원망을 담을려고 다가 온다니깐요?


그것도 모르고 수준 높이겠다고
성경의 지식을 한 수 위로 수준 높이겠다고 착각했으니

지금 놓여진 광야 라는 장소를 모르고 있다 라는 겁니다.

노아 홍수로 이미 심판성을 거친 역사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심판성을 거친 땅 속에서도 기여이 구원성을 펼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등장한 것이 바벨탑입니다.

애굽이라는 인간 스스로가 인간 자체가 방주 덩어리가 되어서 추구되던 그 애굽을 족쳐버리니까

광야 라는 공간 에서는 그 인간방주 건립을 멈추느냐 라는 겁니다.

천만의 말씀 오히려 더 잘 또렷히 명료하게 펼칩니다.
마지막에 이름만 여호와 라고 붙이면 되는 식입니다.
꼭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형성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딱 이런 식입니다.

교회를 짖든
예배를 하든
찬양을 하든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사랑을 하든

모든 이런 목적은 죽음이 오면 안된다는 발로 멀찌감치 밀쳐버리는 방식이 바로
저런 것들로 대신 채우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광야란 일체 양보 없습니다.

바로 어린양의 죽음에 대해서 일체 양보없습니다.

그래서 원망 안하고는 못배기도록 몰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해석을 하고
저런 예배드릴께요 교회다닌께요 찬양할께요 전도할께요 봉사할께요 기도할께요 사랑실천할께요 이웃사랑할께요 내몸과같이 할께요 로 대신 채워버리겠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런 것에 양보 안 합니다.

오로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을 도출 하는 방식 뿐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십자가의 죽음을 도출하는 것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반대로 해석을 해서
자기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반발하고
그런 믿음은 싫다 라고 반발하고
여쨋든 저쨋든 저런 것으로 때우겠다 라고 갈때까지 가보겠다 라는 식입니다.

그런 인간의 발상에
십자가는 관심 없습니다. 자신이 펼치러 하신 그 언약에 고지곳대로 실행하실 뿐입니다.

도리어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 결부된 원망한 자가 용서를 받게 되는 그 피흘리심 앞에서

놀랍게도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재현이 됩니다.

그 용서를 받은 자의 용서를 부당하다고 외치는 자가 맏아들처럼 갑자기 돌출 되고

그 용서가 가만히 보이 창세전에 예정된 십자가의 피였음을 비로소 아는 자가 탕자처럼 갑자기 돌출 되니

가인과 아벨 사건이 재현 되지 않고서야 안될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펼쳐지는 언약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적을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많이 펼칠까요?

기적을 많이 베풀면 많이들 따라오고 많이든 믿을까요?

더 더욱 안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소용없는 겁니다.

기적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용서
고침받음
몇 번 용서할까요?
몇 번 담그면 몸이 깨끗하게 고침받는가?

이 모든 것 포기 하라 라는 겁니다.

몇 번 기적 체험하고
몇 번 봉사
몇 번 사랑
몇 번 전도
몇 번 성경지식의 어느정도의 수준?

이 모든 것 다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눅 10:15,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마태 누가 복음에서 동일하게 가장 많이 기적을 베푼 장소가
가버나움이라고 언급 합니다.

왜 언급하냐 하면 그런 많이 기적을 베풀어도 도리어
소돔과 고모라가 더 낫다 라는 식으로 비아냥 거립니다.
(기적이란 지옥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동원된 것인데)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한 곳이라는 것을
기적을 다른 도시 보다 많이 베품으로써 드러낸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말로는 많은 사랑 받았다 라고 합니다만
어느 누구도 죽고자 하는 자는 없습니다.

많는 사랑 받았다 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증거를 드러내기 위해서
더더욱 자신의 살아있음을 정당화 하는 모습만 완고하게 더 또렷해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늘문이 열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소리로 인해 졸지에 경쟁자로 삼고 살인의지를 비로소 펼칩니다. 하늘 문이 열려서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전혀 그런 마음이 있는 줄 조차도 몰랐는데 말이죠.)

성화론자가 성화한 업적을 죽음으로써 허무하게 소진해 버릴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성화 로 인해서 자신의 삶의 정당성은 더더욱 구체화 시키는 식입니다.

그런 모습을 저는 성화론을 주장하는 목사에게서 소름끼칠 정도로 보게 됩니다.

모조리 다 언어로 사기를 친 겁니다.
딱 깨놓고 너거들은 다 죽어도 나 목사는 목사이기 때문에 살아야만 한다 라는
그런 고집 똥고집의 언어로만 들리는데
놀랍게도 그 말에 다들 뿅 가버리는 겁니다.
고집에 센 말을 더더욱 고집스럽게 펼치면 펼칠수록
더더욱 넘어가버리는 참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바로 이거였어 이거야 이거

(기적이란 지옥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서 동원된 것인데 그들에게는 도리어 올무였습니다. 그래서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한 겁니다. 힘이 되고 집중력이 되는 권력이 되니까요? 왜 니고데모처럼 성화 할려고 할까요? 행함에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돌려고 할까요? 예수님을 사랑해서? 아닙니다. 권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봉사 사랑실천 심지어 성경해석 이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힘으로 본 겁니다. 예수님은 엉뚱한 소리 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행함과 상관없는 창세전의 십자가의 예정을 거쳐서 언급합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은 것은 소용없다 라고요?)

기적을 행하면 행하실수록 어린양의 피 흘리심과 더욱더 밀착이 되어버어야 합니다.

그러나 육이 자신의 신체에 기적을 담아버리게 되니
어린양의 죽음은 담지 않고
기적만 딸랑 챙기게 됩니다. (올무를 챙기는 식입니다. 하나님을 왜 챙깁니까. 왜 선악을 괜히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될려고 할까요? 왜 자기가 사랑이 될려고 할까요?)

마치 선악과를 따먹는 식으로 챙기게 되니
하나님과 같이 된 정당성을 추구하듯이 안 죽을려고 합니다.

맞습니다. 어린양의 피흘리심과 결부시키기 위해서
심어서 베푼 기적인데
엉뚱하게 기적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어린양의 죽음과 결부 시킬려는 그 기적을 괜히 따먹는 바람에

왜 날 원망케 만드느냐 라고 이건 함정수사다
괜히 쓸데없이 자살요청을 하는 겁니다.

채널 획 돌려버립니다.

어린양을 죽여 버립니다.

어 날 죽이는 줄 알았는데 어린양이 대신 죽네?

괜히 심각했네 내 죽음인줄 알고
괜히 심각했네 내 아픔인줄 알고
괜히 심각했네 내 심판인줄 알고

나의 죽음을 보라고 광야로 몰고간 것이 아닙니다.

내 죽음은 죽음이라고 가치도 안쳐줍니다.

오로지 예수님
곧 어린양의 죽음에만 가치를 두기 위해서
광야로 몰아간 겁니다.

광야에서 펼쳐지는 기적은 바로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기적을 베풀면 베푸는 쪽쪽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바쁘니
완전히 쇼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정작 그 기적은 예수님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아무도 그 죽음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만이 그 창세전의 십자가 예정을 이루신다는 것인데

내 숙제로 착각한냥 니고데모처럼 한수 배워서 이루겠다라고 또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우리는 철저하게 육에 갇혀버린 생각만 할 수 밖에 없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특이한 예수님의 믿음으로써만

갇혀버렸고
포로되었고
빠져나올수 없는 육이라는 감옥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믿음을
또 기여이 인간의 믿음으로 또 다시 가두어 버릴려고 발악하는 것을 봅니다.


좀처럼 인간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은 단 하나도 한 올이라도
한 머리카락도 일치하는 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든 말든지 결부 시켜보고자
그런 애씀을 보여주면
권력의 집중과 돈의 결집이 생긴다는 것을 기가막히게 돈 냄새 맡아서
하이에나처럼 코를 킁킁 거리면서 멀리가지도 않고 늘 주변에서 맴돕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줄 아시겠지요?

저런 하이에나에게서 벗어날 길이 우리에게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죽으러 오신 예수님이

저런 마귀 보란 듯이
너끈히 그 사랑을 넉넉히 이루셨습니다.

어떤 누구도 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능성을 부여하는 인간의 말속임수 보다

불가능성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믿음이

나의 믿음보다 더 믿음직 스럽다는 것을
더 미쁘시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매일 시험드는 가운데서도 알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왜 나의 믿음 보다 옳으심을
우리는 광야 속에서도
그렇게 많이 베푸시는 기적 속에서도
도리어 늘 원망하고 엉뚱하게 피 보다 다른 것을 더 집중해 보는 행동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에 대해서 일체 양보 없다 라는 주님의 고집 앞에서
두손 두발 다 드는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지는
모조리 다 빼앗김 당하는
그래서 주님은 나 보다 옳습니다 라고 빼앗김으로써 기뻐하는 그 십자가 앞에서

넉넉한

풍요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용서를 마시게 됩니다.


이 사랑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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