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15 겨울 수련회 교재
불편한 여정
-민수기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미혹과 눈속임
기원전 4세기 초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였던 파라시오스와 제욱시스가 자신들 중 누가 더 뛰어난 화가인지 내기를 벌였다, 결전의 날이 되었을 때 제욱시스가 파라시오스에게 보여준 그림은 포도송이가 그려진 매우 정교한 벽화였다. 얼마나 치밀하게 그렸던지 새들이 날아와 포도를 쪼아 먹으려고 할 지경이었다. 이에 제욱시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의기양양해하자 파라시오스가 그에게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베일이 그려진 벽화였다. 하지만 제욱시스는 그 베일이 그림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그 베일을 걷고 자네가 무엇을 그렸는지 보여주게.” 제욱시스가 새를 속였다면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의 눈을 속임으로써 파라시오스가 내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우화의 핵심은 누가 더 대상을 정확하게 그렸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화가가 그린 그림이 대상과 서로 다른 형태의 관계를 정초시킴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방식으로 덫에 걸려들게 했다는 점이다.
우선 첫 번째 그림에는 포도의 이미지를 포도 자체와 혼동해 벽화에 머리를 찧은 새들이 있다. 이들은 대상과 표상적 관계를 맺고 있다. 표상관계는 어떤 하나의 물리적 대상, 즉 포도송이의 소비를 갈구하는 욕구의 관계에 근거한다. 즉 새들은 욕구의 덫, 소위 ‘미혹’에 걸려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제욱시스는 표상된 대상 ‘저편’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욕구의 관계를 넘어 욕망의 관계로 들어가고 있다. 파라시오스가 그린 베일은 사실 그 뒤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다시 말해 단지 그림일 뿐인데도) 그 자체로 제욱시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욕구가 물리적 대상에 의한 만족을 추구한다면, 욕망은 이렇듯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유물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제욱시스가 베일을 걷기 위해 손을 뻗었다면, 이는 ‘눈속임’이라 부른 욕망의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2. 진리와 몰인식
욕구의 덫과 욕망의 덫 -‘미혹’과 ‘눈속임’-, 이 두 개의 덫은 두 관람자를 속임수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개의 덫이 시각의 위상과 관련해 서로 다른 전제를 함축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욕구의 덫에 빠진 ‘새들의 사유’는 바로 앞에 그려진 포도송이의 정확성(그럴사함)에 현혹된 사유이다. 이는 시각의 자명성에 현혹되어 있는 ‘보이는 것이 전부’임을 전제하는 전통적 인식론을 대변한다. 여기서 시각은 자명하고 투명한 도구로서 ‘보이는 것이 전부’임을 전제한다. 반면 제욱시스가 빠진 욕망의 덫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의 독특한 사유 방식을 대변한다.
이는 단순한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무언가’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더 강력한 믿음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보이는 것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너머’에 대한 믿음이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원동력이 된다.
3. 두 가지 시선이 만나는 곳에 진리 있음
시각의 투명성의 신화 속에 감춰져 온 시각의 진리, 그러한 진리에 의해 일깨워진 주체와 대상의 새로운 관계로 접근하는데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우화는 더없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출발점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진리가 스스로를 계시하는 지점이다. 그림 속에서 탄생한, 새들의 사유에 가까운 시각론이 파열되면서 어떻게 시각의 진리가 드러나는지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체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언뜻 보면 주체는 신을 대신한 자리에 위치하는 듯 보인다. 즉 그는 신으로부터 세계를 탈취한 세계의 주인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오로지 ‘바라보는 주체’로 위치해야 한다. 내가 보는 곳에서 나는 단 하나의 주인, 절대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시야, 말끔하게 봉합된 시야 속에 작은 틈이 생기며 그 틈으로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타자의 응시가 남긴 ‘얼룩’이 생긴다.
나는 나의 시야 속에서 제왕적 위치에 있다고 믿지만, 시야의 꿰맨 부분이 터지는 순간 불쑥 튀어나온 타자의 응시에 의해 꼼짝없이 갇혀버린다. 주체로서의 우리가 말 그대로 그림 속으로 불려 들어가 마치 그 안에 붙잡힌 것처럼 표상된다. 이 세계에는 나의 시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타자의 응시에 의해 관통되고 있는 이상, 결국 나 자신이 그림이 되어 그림 속의 얼룩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베일이 그 무언가의 자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베일 뒤에 있다고 가정된 그 ‘무엇’은 베일이 없다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음으로 인해 굉장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제욱시스를 유혹했던 무엇, 소위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X이다.
인식론적 주체의 경우 시작의 출발점은 주체, 즉 시각적(視覺的) 관점에서 ‘나는 본다’이다. 반면에 시관적(視觀的) 장(場)에서는 응시가 바깥에 있으며 나는 응시된다는 것을, 즉 나는 그림이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주체의 경우 출발점은 주체의 시각이 아니라 그에 앞서 존재하는 타자의 시각, 소위 ‘응시’이다.
타자와 주체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다. 시각 장에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언어의 장에서 그 둘의 관계는 연동적이다. 언어의 장에서 나는 말하기 이전에 말해진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이름이 호명되는 나에 관한 말들이 나를 에워싼다. 마찬가지로 시관적 장 속에서 나는 보기 이전에 보인다. 내가 눈을 뜨기 이전에 나는 누군가에 의해 주시된다.
하지만 주체의 시선에 타자의 시선이 선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타자의 시선이 선재하지만 주체의 시야가 확보되기 위해서는 그 타자의 시선이 상실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나의 시야는 나 자신을 타자의 응시로부터 분리해야만 성립된다. 타자의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을 떨어뜨려야만 주체로서의 ‘나’를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타자 자신이 주체의 위치에서 대상의 위치로 전락함을 함축한다. 타자가 나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타자 자신이 주체로서 지닌 속성들이 나의 시야 밖으로, 다시 말해 시니피앙의 장 밖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떨어져 나간 타자의 (주체적)시각이 나 자신의 관점에서 ‘실재’ 속에 있는 대상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타자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내가 볼 수 있는 시선과 내가 볼 수 없는 시선, 즉 응시로 분리된다. 이것이 바로 눈과 응시의 분리이다.
나는 타자의 눈을 볼 수 있지만 그가 나를 어디서부터 바라보는지를 알 수 없다. 내가 볼 수 없는 타자의 시선,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타자의 시선, 이것이 바로 타자의 응시이다. 내가 주체로서 나의 시야를 구성하는 이상 타자의 응시는 상실된 것으로만 존재한다. 바로 이렇게 해서 나를 욕망하던 타자의 응시, 그 상실된 응시는 나의 욕망을 부추기는 욕망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시각의 분열은 무엇보다 나보다 먼저 존재하고 내가 보기 이전에 먼저 나를 바라보던 타자 자신이 이미 분열되어 있다는데서 비롯된다. 언어의 질서 자체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즉 그 자체 안에 언어에 의해 표상될 수 없는 지점을 담고 있다. 그리고 주체의 분열과 타자의 분열의 교차 속에서 ‘보다’와 ‘바라보다’가 눈(시선)과 응시로 분할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보다’와 ‘보지 못하다’가 중첩된다. 즉 무언가를 ‘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시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곳에 얼룩이 낀다.
얼룩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얼룩’이란 우리 시야 속에서 시야의 자명함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안경을 예로 들어보자. 말끔하게 잘 닦인 안경을 쓸 경우, 우리의 시야는 맑고 투명하다. 렌즈와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도 없다. 하지만 작은 벌레 한 마리라도 렌즈 위에 달라붙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렌즈는 곧장 투명성을 상실해버리고 두께를 얻게 된다. 그리고 나의 시선이 전부가 아니었음이, 나는 타자의 시선 속에 감싸여 있음이 드러난다.
얼룩은 나의 시야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응시가 계시되는 지점을 표현해준다. 따라서 얼룩은 오로지 부정태로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상징계의 일그러짐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얼룩의 역할은 얼룩이 나타나는 순간, 그것을 보는 나 자신이 얼룩이 된다는데 있다. 즉 그림을 보고 있던 내가 누군가의 그림, 누군가가 관람하고 있는 그림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자명한 시야 속에 작은 흠집이 나자마자 나 또한 하나의 광경임이 계시된다. 내 눈 깊은 곳에서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은 분명히 내 눈 속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림 속에 있다. 얼룩은 내가 그림 속에 있음을 계시한다.
4. 성경은 얼룩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진리와 인간의 무지가 만나는 얼룩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본다고 하니 못보고, 안다고 하니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얼룩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분리와 분열이 십자가 사건으로 구체화되고 거기서 나오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진리가 성도에게 분열의 방식으로 전달된다. 숨겨진 천국 복음, 예수님에 의해서 다음 같이 경위를 밝히시면서 완성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태 13:11-14).”
Ⅱ 본론
1.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동기
레위기에서 철저하게 다져온 사상 하나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중심체제의 국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출 19:6). 이러면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어떻게 되느냐?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전면에 나서면 모세의 지도체제가 2분화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하여 명확히 해둘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코 모세를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신다. 하나님 편에서 귀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언약이다. 더 풀어서 소개하면 아브라함 언약의 구현체로서의 모세언약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또는 아론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모세언약만큼은 양보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모세언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모세언약은 모세와 아론을 데리고 만들어졌다. 언약의 구성은
(1)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제시됨
(2) 그 말씀의 상대자가 실패함
(3) 그 실패의 대가를 대신해줄 희생물이 등장함
(4) 언약 상대자는 기존의 자기 운명을 버리고(죽음) 이제부터는 그 희생물의 운명에 계속 참여하도록 되어 있음
(5) 그렇게 해서 참여된 자들을 가지고 ‘언약공동체’라고 명명함
(6) 이 언약공동체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언약’이라고 함.
자, 이렇게 볼 때 모세와 아론을 데리고 언약을 제조했다는 말은 그들이 첫 번째로 하나님의 희생사역에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모세언약이란 모세와 아론을 재료로 등장시켜 이스라엘의 실패가 그들의(혹은 그들의 지파인 레위지파) 희생을 기사회생의 기반으로 하여 회복된 채 계속 언약정신인 대속희생의 사상을 역사 속에 펼쳐나가겠다는 하나님의 구속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은 첫 희생자를 장자라고 부르시는데(출 13:1-2, 민 8:16-8)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창조차원에서 보시기 때문이다. 첫 창조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 의사(意思)가 첫 번째로 담긴 것을 첫 형상이 담겼다고 복 맏이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광야의 여로에서 맏이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독특한 책임이 부여되는데 그 역할은 아버지의 형상을 보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법궤를 보존함으로써 맏이인 자신들이 어디서 출생했기에 자연적인 출산순서와 달리 취급받는지 그 원인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장자개념이 정리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신약저자들의 깊은 안목에 못 미칠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은 단순히 존재론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구속 기능적 차원에서 봐야한다(마 3:17).
애굽에서 나올 당시만 해도 하나님은 자연적인 출산에 의한 장자를 원하셨다(출 13:1). 그러나 민수기에 와서는 바뀐다.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책임지고 가는 장자지파가 된다. 그 이유는 그들 지파에서 모세와 아론이 나왔고 또한 그들이 이스라엘의 실패(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를 보상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출 32:29에서 레위지파만이 헌신했다고 되어 있다). 한 지파 전체의 선택은 자연적으로 그전까지 이스라엘 전체의 장자 노릇하던 르우벤지파(민 1:20)의 위치를 선택된 지파인 레위지파와 대조가 되는 위치에 놓이게 한다(민 3:11-12). 이러한 대조는 다른 여타의 지파가 한 지파에 종속되는 형식을 취하기 위함이며, 또한 앞으로의 전쟁에 원칙을 세우기 위한 포석이 된다.
지파 대 지파의 분류는 이스라엘을 다루는 새로운 시점에서 주어지게 된 것이다(출 18장에서의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선출은 지파 이야기가 없으며 같은 사실을 두고 신명기 1장에서는 각 지파별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으로 뽑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민수기에 오기까지는 지파구분이 별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법궤를 어느 지파가 지키느냐가 결정됨으로 자연히 법궤를 지키는 지파와 그렇지 못한 지파가 구분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법궤를 지키지 않는 지파에게는 땅이 기업으로 돌아가고 법궤를 지키는 레위지파에게는 기업이 없는데 이는 땅 공여자(供與者)와 공여 받은 자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즉 땅을 받은 자는 자기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에 의해 분배받은 사실을 같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면서도 누가 땅이 없는가를 통해서 늘 확인하기 위함이다. 레위지파로 표상된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우리가 지금 이 기업을 공짜로 누린다는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법이다.
위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민수기에서는 레위기에 설정된 모세언약의 규례들을 다시 재확인하고 재 다짐한다(5장-9장, 15장, 18장-19장, 28장-30장). 이러한 언급들은 꼭 그 가운데 이스라엘의 실패가 등장된다. 민수기는 마치 시내산을 통째로 들고 이동하는 것과 같다. 시내산은 이제는 이별한 산이 아니라 오히려 시내산 밑이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실패는 시내산 밑에서 세운 원리에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좌우된다. 이점이 옛날 시내산 이전의 아말렉과의 전투 때와 다른 점이다. 그 때(시내산 도착 이전) 모세가 든 것은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혈통적 애굽과 혈통적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구출한 지팡이였다. 그러나 시내산 이후의 전쟁은 그렇지 않다. 언제까지 하나님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다. 모세언약을 준수하겠느냐 아니면 믿지 않겠느냐 사이를 구분하신다. 그 구분의 중간에 놓여 있는 것이 시내산의 산물인 증거막(민 1:54) 즉 법궤이다.
전에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결코 여호수아 장군이 대적을 물리친 것이 아니다. 온 백성들은 그 원인을 여호수아에게서 찾지 않고 산 위에서 모세가 쳐들어 보인 지팡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시내산 계약 이후의 여호와 전투는 지팡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법궤에 달려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5-36).”
모세가 든 지팡이에는 출애굽 사건이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면 법궤에는 시내 산에서 맺은 계약이 함축되어 있다. 즉 혈통적 이스라엘 국가의 승리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이 중심원리가 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의 승리를 원하고 계시다.
시내산 출발시점부터 그들이 전투대열에 들어서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를 하나님께서 하나의 군대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긴장된 움직임은 하나님께서 보복 내지는 복수를 꼭 해야만 되는 상대가 지상에 현존할 때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군대란 적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 집단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누가 싸워야 될 상대인가? 무엇이 하나님을 그토록 화나게 했는가? 도대체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축복한 나라를 압박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요 저주를 받아야 한다. 즉 창세기 12:1-3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복의 전달매체로서의 이스라엘은 그 고유의 특성을 상실했을 경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민 1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든지 거룩한 군대라고 명명할 때는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얽매여 있어야 한다. 즉 복의 근원다워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따라서 민수기 1장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로 선포한 정신은 그 자체로서 이미 군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가 될 수 있는가를 기존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의도가 계신다. 그 증거로서 레위지파를 제외하고 다른 지파들은 미리 출발 전에 수를 세어두는데 그 이유는 그 숫자에 변동사항이 있음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된 기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리기 위함이다.
그 예로서 이스라엘의 혈통적 장자인(민 26:5) 르우벤 지파의 수가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는 46,500명이었지만 그 후에 다시 세어보니 43,730명이 되어 2,770명이 감소되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되었다.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인 염병을 무사히 통과한 자들이다(민 26:1). 이들에게만 기업이 돌아간다. 민수기는 그 자체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공동체로서 행세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2. 모세언약의 역사현장에로의 적용
언약의 신실함이 확실히 드러나는 때는 인간이 실패했을 경우이다. 언약에 대하여 실패했다는 말은 그 정신을 구현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민감한 반응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역사현장에서 어떤 곤궁한 일을 만나느냐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예들이 민수기에 깔려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순히 언약에로 복귀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언약에로의 복귀보다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언약의 상황 안에서의 다양성이 인간들의 실패를 출구로 하여 활짝 세상에 선보이는 계기로 삼는다.
언약이란 세상에서의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서 고정되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변화하는 것보다 변화하지 않는 것에 영원성을 부여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의 제도나 질서체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순간의 문화를 가지고 영원불변의 의미로 승화시켜 그것만 붙드는 것이 무지몽매한 인간의 습성이다.
언약이 가지는 본질의 비양보성은 형태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형식의 절대성은 언약의 절대성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치 십자가 사건을 믿지 않고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은 언약으로부터 오히려 고발당한다. 물론 언약형식의 변천은 인간을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천사들의 장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약형식의 변천과정 안에 들어 있는 인간의 거역과 원망과 과오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의 배은망덕은 모두가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절대화 시키려고 고집부린데서 비쳐 나온다. 거룩이 거룩다운 것은 형상화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에게 다가서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건이며, 만남이며, 교제이며, 심판이며 그리고 굴복을 통한 용서이다.
이제 민수기에서 우리는 거룩이 스쳐 지나간 흔적을 추적해 본다. 이 흔적들은 이스라엘 사회를 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용납되는 행위와 될 수 없는 행위의 결정은 제사장이 내리는데 그때 제사장은 거룩의 이미지를 풍기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죄악 그 자체가 아니라 제사장이 어떤 식으로 죄악에서 회복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첫째 예: 민수기 5장의 간통 혐의를 쓴 여인에 대한 판결
여기에서는 제사장이 여인에게 저주의 글을 빤 적이 있는 쓴물을 마시게 한다. 만약 여인에게 잘못이 없으면 아무 일도 없으려니와 만약 여인에게 잘못이 있으면 그 저주가 여인에게 임하게 된다. 이 저주의 글은 제사장이 책임지고 남편에게 의심받는 여인의 진상을 가려 그 의심에서 해방되게 한다. 즉 제사장의 확고한 직분관이 여인에게 미친 의심을 자기 책임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에로의 회복이며 진정한 뜻에서 성결 된 사회조성이다.
둘째 예: 민수기 6장에서의 나실인 제도의 등장이다.
나실인 제도의 주안점은 그의 서원 기간 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이 화목제물의 일부로 참여된다는 사실에 있다(6:18). 원래 제사의 제물은 인간의 죄악을 대신하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의 신체일부라도 포함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실인의 경우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제물에 섞어 넣는다는 것은 그동안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타인과 특별히 구별된 생활한 그 자체를 하나님이 거룩으로 인정하여 기쁨으로 받아 드린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도 또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한 한 통로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기한을 정해 지킨 나실인의 거룩을 회복의 담보로 간주해 주시는 것이다. 누가복음 22:18에는 예수님의 피를 나실인의 피로 여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도록 했다.
셋째 예: 민수기 7장에서 각 지파의 대표로 족장들이 그 지파를 대신하여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침으로 모세언약의 유지와 회복을 기한다. 온 이스라엘 전부가 다 모세언약 밑에 복종해야 됨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넷째 예: 민수기 8장에서는 전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선택해서 장자로 인정해 줌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지를 다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막 일을 함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다섯째 예: 민수기 9장에서는 타인이든 본국인이든 관계없이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재다짐하고 있다.
여섯째 예: 민수기 11장에서 고기 달라고 떼를 쓰는 이스라엘의 탐욕에 대하여 모세는 자기 권한 밖이라고 하나님께 항변한다. 그때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 70명을 모아놓고 그 모두에게 성신을 내려 모세의 단독 책임만이 아님을 보여 주신다. 이스라엘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지는 존재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 되기를 원한다.” 언급하셨다.
즉 이 말씀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가 다른 나라에 대하여 선지자 나라가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여호와를 알리는 역할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골고루 짊어지고 있다. 이 역할분배는 바로 정상적인 관계의 한 단면이다.
일곱째 예: 민수기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고 비방한 후에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백성들은 행진을 멈추고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12:15). 미리암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는 온유한(12:3)자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인상(印象)을 대중들 속에 깊이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미리암이 시범자가 된 것이다.
다른 이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본 모세(12:8)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유성을 실천에 옮긴 행위였다. 그러나 아론과 미리암은 자신의 위치와 위신을 하나님의 마음보다 우선한 것이다. 미리암이 자신의 처벌의 정당성을 충분히 수긍하고 특정기간 수납한 후에 이스라엘의 행진은 정상을 찾을 수 있었다.
여덟째 예: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 족장의 한 사람씩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는 대부분 하나님께 원망하는 소감을 발표한다. 이러한 반역에 대하여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사정을 한다. 제발 전염병으로 이 백성들을 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갈렙이 속한 지파만큼은 전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여 정탐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갈렙의 지파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출을 꿈꾸고 계신 것이다(14:24). 그 갈렙이 속한 지파는 바로 유다지파이다. 이 또한 갈렙에 의한 이스라엘의 건재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차원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아홉째 예: 민수기 16장에서는 같은 레위지파 중에서 고라가 주동이 되어 모세와 아론 중심체제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건이 벌어진다. 고라 자손들은 주로 성막에서 향로를 다루는 일에 종사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취급한 향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줌으로 모세와 아론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은 각기 자기네들이 들고 있는 향로불이 얼마나 무서운 불인가를 그들을 멸하므로 보이고자 하실 때 모세가 나서서 그 제안에 반대한다. 모세 생각에는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다른 일반백성 모두의 죽음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임을 보여주기 위해 희생의 불이 아닌 땅의 절개에 의한 집행을 요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안을 따라 고라 자손을 죽이되 땅이 갈라지게 함으로 죽인다. 이로써 그들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진노는 그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이 들고 있던 향로의 형태를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 향로들은 제단에 사용되는 편철로 바뀌는데 백성들은 이 편철을 볼 때마다 모세언약이 지닌 일관성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하던 자들은 염병이 돌아 죽게 된다.
열째 예: 민수기 17장에서는 아론의 지팡이에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통해서 레위지파 내의 우열관계를 다시 한 번 확신시킨다. 레위인들이 있음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파는 레위지파를 위하여 십일조를 바쳐 그들의 생활을 도와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된다(18:24-26).
열한 번째 예: 민수기 21장에서는 험난한 여행코스로 인해 하나님께 원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불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놋뱀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다.
열두 번째 예: 민수기 22장-25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코자 했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발람으로 하여금 함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했고 오히려 축복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에 무지했고 급기야 발람이 계략을 세워 추진한 음란의 자리에 이스라엘이 빠져 미디안 여인의 유혹에 넘어갔다(민 31:116). 이로써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즈음 제사장 엘르아살 계열에서 용감하게 이 미디안 여인과 간음한 남자를 창으로 죽이니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염병을 그쳤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즉 모세와 아론으로 대변되던 모세언약의 시대가 물러가고 여호수아와 엘르아살로 대변되는 모세언약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숫자 점검을 하게 된다(민수기 32:17에 보면 이 두 사람에 의해 땅이 분배된다). 엘르아살 제사장의 질투심이 바로 하나님의 심사를 잘 헤아린 질투심이었다(25:11). 이 희생적인 질투심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케 했다.
그리고 난 뒤 새로운 세대를 계수하니 이는 여호와의 전쟁이 무엇인가를 아는 백성들이다(26:65). 이 계수에 따라 기업이 분배됨으로 레위인은 그 계수에 포함되지를 않는다(33:54). 기업을 주는 이상 이 기업에 관한 규칙이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기업(基業)이란 각 지파마다 야곱의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상속정신 하에 주신 것으로서 이 증여의 의미가 제거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다른 지파에게 줄 수 없고 본 지파에 전수해야 한다(27:1-11). 여호와가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되고 난 뒤(27:12-23) 다시 한 번 제사와 절기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거룩하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드디어 땅 분배에 들어간다. 이미 약속을 믿는 그들에게는 정복 이전에 자신의 기업이 된 것이다.
Ⅲ.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야 될 땅은 약속의 땅이며, 그 약속의 땅은 언약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땅이다(레 25:18, 26:34). 그 땅에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성읍을 마련하고 도피성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언약을 잊지 말라는 조치이다. 그 땅은 또한 언약을 위해 희생한 자들의 차지이다. 지파별로 희생한 대가만큼 그들 차지가 될 것이다. 열조에게 한 약속의 땅이 민수기에서는 모세 언약의 구현으로 성취될 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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