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하게 아름다운 이름 앞에 비천한 인간의 노래 (시편 8편)
(시 8: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3, 개역)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 8:4, 개역)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개역)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개역)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시 8:7, 개역)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시 8:8, 개역)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8:9, 개역)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1, 공동)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시 8:2, 공동)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시 8:3, 공동)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시 8:4, 공동)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시 8:5, 공동)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 ㉠"천사들", "신들"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시 8:6, 공동)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시 8:7, 공동)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시 8:8, 공동)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 8:9, 공동)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노래란 즉 찬양이란 비천한 자가 죽게 되었을때에 만나는 아름다운 거룩한 이름 때문에 저절로 튀어나오는 증상이 찬양입니다.
자기가 기분 좋아서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기도랑 똑같죠.
누가 밟으니까 으악 하고 저절로 튀어나오는 증상인 겁니다.
찬양이란 계시입니다. 계시의 증상이 찬양이라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하는게 아니라
나의 찬양의 대상이 주님이 아니라
내가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주님이 나를 부를 때 으악 하고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주님이 찬양코자 계시코자 하심의 대상물로써 튀어나오는 증상인 겁니다.
부르짖도록 만들어서 부르짖게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주님께서 말이죠.
결국 자작극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서
부르짖으니까 오냐 내가 너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애굽왕 바로와 그의 군사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마
라고 드디어 나서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안듣습니다.
포기하니까
저절로 바로왕을 강퍅케 하니
안 부르짖고는 못살거든요
짖밟이니까 아이고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저절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럼 누가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지근 지근 밟도록 했는가?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도록 하셨는가?
주님이시죠. 그러니 자작극입니다.
여기에 인간은 보탬이 된 적도 없고
노래 찬양 기도 부르짖을 생각 조차도 한 적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가만히 서서 주의 영광을 쳐다보기만 하여라
그 영광이 바로 주의 이름으로서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
확실하게 제대로 보여주마
아마 너희들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을 것이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놀래 자빠져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놀래 자빠지는데 노래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겁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왜 내 입술에서 안 나오던 노래가 나오지?
노랠 부를 상황이 전혀 아닌데 왜 노래가 나오지
지금 노래가 아니라 정반대의 한탄이 나와야 하고 원망만이 나와야 하지 않는가?
어 그런데 왜 기쁨이 샘솟는 것이지????
그렇죠!!
방언과 같습니다.
지난 시간 시편 7편까지만 해도
주여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했던 다윗이
오늘은 완전 정반대입니다.
그 어떤 연결 고리 하나 없이
완전 대 반전의 모습으로써 시편 8편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에 대한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꼭 로마서 7장과 8장의 원인 없는 결과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연결점도 없이 오히려 철저하게 모순되는 것처럼
시편 8편은 온통 기쁨이 꽉 찬
노래와 춤과 기쁨과 감사만이 흘러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랩소디 광시곡 식가욘 이라는 음악용어를 말했는데
급하게 미친 듯이 문자를 날리는
정열을 쏟아부어서 그 정도로 다급하게
119에 sos sos 긴급상황 발생이라고 문자 메시지 신고를 날려서
불났어요 불났어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제발 살려주세요 지금 당장 살려주지 않으면 저 죽어요 저 죽는다니깐요? 라고
다급하게 적는 시 노래가 식가욘이라고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아침부터 주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행함을 한 후에 그 행한 것에 따른 상벌의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닌
행함 자체가 시작 되기도 전에, 아직 행동하기도 전에,
진노가 닥쳐서 죽게 되었사오니 제발 살려주세요 라는 것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을 할 배부른 여유 자체가 없습니다.
살려달라는 말 밖에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외친 노래가 식가욘 광시곡 랩소디
그만큼 다급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깃딧 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나오는데
악기 이름입니다.
수금이라는 악기와 비슷한 것인데
요즘으로 치면 흔하게 생각하면 기타 통기타에 맞춘 노래
또는 가야금 주법에 맞춘 노래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거문고 장단에 맞춘 노래 라는 겁니다.
(시 8:1, 쉬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람의 가치-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주님께서 하늘 위에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두셨습니다.』
(시 8:1, 킹흠정) 『(깃딧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뛰어나신지요! 주께서 주의 영광을 하늘들 위에 두셨나이다.』
(시 8:1, 현대인)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깃딧'이란 곡조에 맞춰 부른 다윗의 노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위엄이 있습니까! 주를 찬양하는 소리, 하늘까지 울려퍼집니다.』
(시 8:1, 현대어) 『[높으신 하나님, 비천한 인간; 다윗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깃딧 가락에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 우리 주님, 온 누리에 주님의 이름이 어찌 그리도 장엄한지요. 주님의 영광 하늘 위까지 두루 가득 차 있습니다.』
마리아! 싸가지 스타일! 곡의 춤에 맞춘 노래 이렇게 되는 거죠.
오빤 싸가지 스타일 욱 욱 워 워 웍 말춤을 추면서 말이죠.
그 정도로 신났다 라는 겁니다.
완전 반대로 [그 정도로 다급하다 ; 식가욘] 와 [그 정도로 신났다 ; 깃딧] 라는 것은
완전 정반대의 대조를 이루는 차이 곧 극과 극의 간극입니다.
이 간극을 만드신 이름이 바로 여호와 라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이 간극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어떤 간극?
분열 분절 단절이 무엇이냐?
위엄하고 장엄하고 숭고한 이름이 나 같은 벌레 만도 못한 놈에게 노래를 주셨다 라는 겁니다.
완전 언발란스 안어울리는 가장 잘 어울리는 정념 곧 커플 짝꿍이다는 겁니다.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 이름과 가장 비천한 인간의 노래와의 만남이다는 겁니다.
거룩과 비참함의 만남
사랑과 원수와의 만남
도저히 안 어울린다고 미리암이 반대를 하다가 도리어 정작 본인도 저주를 받아보니
주의 온유하심 때문에 그렇게 가장 안 어울린다고 여겼던 것이
당사자 본인이 누리게 되니 찬양이 안나오고는 못배긴다는 겁니다.
어떤 노래 ? 이 이름을 감히 감히 부를 수 있는 입술을 주셔서
감히 감히 건방지게 소나 키울 것을
감히 감히 뻔뻔스럽게 주의 이름을 부르짖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신약으로 치면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은 새로움을 말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새로운 것은 예수 이름 밖에 없거든요.
그 이름만이 새로운데
죽음을 이기고 죽음 위에서 있는 새로운 이름은 예수 라는 이름 뿐인데
감히 죽음 아래에 있는 우리가 이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즉 죽음에서 건지신 예수 라는 새 이름 때문에 새롭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 부를래야 안 부를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뱃노래에서 노동가처럼 배를 저을때에 어야 디야 어야 디야 라고 부르면
신이나서 뱃노를 젓는 것이 하나도 힘이 들지 않고 오히려 힘이 불끈 불끈 나고 새로움에 벅차 올라서 설레임이 가득해 지는 겁니다.
깃딧은 주로 포도즙을 짤 때 사용하는 악기로써
깃딧을 연주하면서 포도즙을 짜면서 불렀다는 거죠.
얼마나 신이 납니까?
맛있는 포도주스를 먹기 위해서 신나게 노래 부르는 거죠.
포도주를 마시기 전부터 말입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에 에 에 ~~~
나팔 비파 수금 등등의 악기들은 소위 미리 앞당겨서 기쁨을 선취하는데 사용합니다.
특히 전쟁에서는 미리 종언 종결 종말을 선언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전쟁도 안 끝났는데 미리 갈라먹기 하는 거죠. 뿌 뿌 뿌 나팔 부는 겁니다.
이겨라 이겨라 라고 응원가를 부를 때
이미 이겼다고 선언하면서 선취를 부르는 것이 찬양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건방지게 천국에 와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삶은 누구 말 마따나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지난 시간의 베냐민 사람 [구시]나
사울 집안 [시므이]나
그들 손가락질 마따나 피폐하기 짝이 없는 비천한 모습이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처참함 속에서도 오히려 천국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신나는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주의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 기도를 듣고 원수들이 조롱을 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너가 부르는 하나님이 어디있느뇨?
어디 있느뇨?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밤낮으로 불러도 대답없는 너를 아직도 부르냐? 이 어리석은 자야? 라고 조롱을 합니다.
왜 남은 구원하면서 너 자신은 못 구원하냐고 예수님을 조롱하듯이
왜 너의 하나님은 왜 너를 구원 못하지 라고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너가 부르는데도 안 나타나는 하나님은
없으니까 안타나난다고 가짜라고 거짓이라고 가짜한데 부르짖지 말라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비참함 속에서도 말도 안되게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언발란스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도
믿음이란 이성이나 논리로 파악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전부를 걸어버리기 때문에 이해 자체가 안되는 의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 없이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은 이해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부를 다 걸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를 다 걸었는데
무슨 믿어줬으니 보상을 바란다는둥의 노림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바로 철저하게 모순적인
전혀 나같은 죄인을 용서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자기 목숨을 이유없이 전부 다 걸어서 용서하신
그 언발란스 원수와 사랑의 커플로의 완성으로 인해
그런 기쁨이 상대적인 저들의 원수됨과 맞물려서 나오는 숭고함
곧 불편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이름이다는 겁니다.
거리끼는 지혜요
어리석은 지혜로 펼쳐지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냥 아름다우면 저들도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텐데
구름타고 왔으면 믿음의 달인들이 전혀 의심없이 당장 믿어버렸을텐데
일부러 짐슴 구유에 태어나서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와 버리니까
도통 믿고 싶어도 안 믿겨지는 겁니다.
누가 알았으리요? (이사야 53장)
그는 질고(병자의 모습)을 지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고
싫어버린바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숭고하다라는 거룩은
오히려 저들에게 거리끼는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걸림돌 같은 까시와 같다는 겁니다.
찔리고 실족케 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곧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저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인데
오히려 십자가가 무한한 영광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아름다움 보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십자가에서 발현되는 예수라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숭고한 위엄한 장엄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아주 아주 불쾌한 아름다운 숭고인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거짓선지자는 이 불쾌함을 제거하기만 하면 장사가 되는 것이겠죠.
그러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확정적인 사랑이 십자가에서만 드러났는데
어딜 감히 사기 구라를 치느냐 라는 거죠.
다들 한결 같이 자꾸 구라를 치고 사기를 치는 것이
결국은 사람은 가능성이 있다고 사기를 친다는 겁니다.
그 가능성을 도와주는 것이 십자가 라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집어넣으면서 자기들의 가능성을 썩어 혼합하는 방식의 구라를 치는 것입니다.
불쾌한 십자가를 빼버리고
편안하고 온순한 십자가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그러니 이해 시켜 줄려고 난리입니다.
그것을 반대하니까
교회에서 쫏겨나게 되는 것이고
“너무 부정적이다” 라는 말 외에는 달리 공격하는 말이 없으니까
장사에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결국 돈입니다. 돈 안되는 인간은 제발 교회 나오지 마세요. 라는 겁니다.
저들의 말이 맞아요
너무 부정적 이거든요.
저들 말이 맞다니깐요.
돈이 안되는데 왜 오냐 말이죠.
저런 식으로 십자가를 썩어서 인간에게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그런 십자가를 말하니까
어딜 가도 성도는 밉상받을 뿐인 겁니다.
밉상 받는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다고 정당한게 아닙니다.
그저 주님 때문에 아 이런 현실 뿐이구나 라는
항아리 구조를 느끼는 겁니다.
누구나 다 포함해서 그런 구조에서 벗어날수가 없기는 매 마찬가지이다는 거죠.
그래서 이전 것과 새 것이라는 것은
[항아리]가 [판대기]가 [세계]가 바뀌어졌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유 없이
원인 없이 그 판대기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판대기 곧 철저하게 마귀에게 갇혔고
포로되었고 억눌린 그 항아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유 없이 전부를 다 걸어 버린 그 아름다운 이름 때문에
졸지에 무시험 합격 곧 [새 것] 이라는
예수 안 으로 교체, 팔을 어긋맞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정죄함 뿐인 이전 것 이라는 세계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 불가능한 간극을 뛰어넘어서
정죄함이 없는 새 것이라는 예수 안 이라는 세계로 옮기워진바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기쁘고 배기냐 라는 거죠.
7편까지에서 8편으로 옮기는 그 고리가
전혀 연결점이 없이 그냥 옮기워진바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의 불가능성이다 라는 겁니다.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가능성의 세계는 또 미흡하면 정죄함 뿐인 겁니다.
왜 미흡하니까 정죄하는 겁니다.
그러나 단절의 단절인 세계는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미 완료됨을 누릴 뿐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자꾸 흐릿한 것을 보느냐 말이죠.
그냥 손 털고 가면 됩니다.
결국 인간 세상은 [이전 것]
전혀 새로움도 없는 곳에서
모호하고 흐릿하고 미흡한 짖만 반복하면서
새로움을 거부하는 세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도 이 새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들 새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불쾌하거든요.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아 보이거든요
오히려 새롭기는커녕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만들려고 하고
미련한 것을 똑똑한 것으로 채우고
거리끼는 걸림돌을 다 제거하는 식으로
교회가 되다 보니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가인의 성, 에녹 성, 영웅의 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삼일 만에 다시 짖겠다고 하신 겁니다.
맞아 죽어도 싸죠.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왜 저런 지옥을 만들어 놓고서는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는지 원
그래야 지옥 갈자는 지옥 가주셔야만 하거든요.
천국 갈려고 교회에 간줄로 알았는데
강도의 소굴에 들어가서 한 통속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과연 자력으로 빠져나올수 있을까요?
갇혔는데?
포로되었는데?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을 할 뿐인데?
하나도 숭고하지 않거든요
다들 그 겉모양에 다 퐁당 빠져서
빠져나올자가 없는 겁니다.
나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를 진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런 교회 없지요.
완벽한 교회를 요구하는게 아닙니다.
교회란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증거하는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곳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조건들이 그리 많은지
온갖 조건들을 다 붙여서 조건화 시키더라 말이죠.
즉 정죄함 뿐인 세계인 [이전 것]을 반복하더라 말입니다.
모호한 짖을 또 하는 거예요.
별에 별 조건을 억지로 급조해 만든다고 참으로 수고들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면 참 고맙죠.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 주니 말입니다.
아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구나.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인 성령의 전이 아니구나
어떻게 물과 기름이 섞일 수가 있느냐 말이죠.
주님 감사합니다. 다만 악에서 빼내주시니 감사합니다.
바로 그때 숭고한 이름에 맞딱뜨렸을때에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
이것이 안전 빵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옥이였네
역시 기대했던 내가 가짜였구나
그 지옥에서 건져내 주셔서 이 비참한 자를 건져내 주시는 이름이 있으니
어찌 아니 찬양할꼬? 라는 겁니다.
방금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즉 좀전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참혹할 정도로 비참합니다. 그런데 기쁩니다 라는 말과 같죠.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는 겁니다.
비참해 죽게 되었습니다. 뭐하십니까? 저 죽는다니깐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오호라 나는 그야말로 곤고한 자로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주여 저 지옥에 빠지고 있어요 안건져주시고 뭐하십니까? 주무십니까? 빨리 깨세요 라고 고함을 치는 겁니다.
그래놓고 전혀 상황이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와 신났다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구나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피조물이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도대제 뭐가 휙 지나가긴 지나간 것일까요?
눈으로 누가 포착한 자가 있긴 있나요?
포착이 안된채로
그냥 원인 없이 그 결과물만 냅따 선물 받아 버린 겁니다.
시편 1편부터 7편까지 그리고 로마서 7장
계속 살려달라고 눈물이 담요를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이 마실 음료수처럼 가득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다윗이 갑자기 헤헤헤 신난다 라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8편에서는 신나게 지루박을 추는 것이 아닙니까?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 ~~~~~
로마서 8장에서는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아주 신났어요 신났어
이 어떤 연결고리 하나 없이 우찌 이렇게 된 것일까요?
아니 살려달라고 할때는 언제고
누가 왔나? 살려주는 자가 오긴 왔나?
그래서 저렇게 신나게 콧노래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왕이시여? 혹시 헤까닥 정신줄을 놓은 것이 아니신지요?
방금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이제는 먹고 마시며 노래 부르면서 춤을 추시는 군요.
혹시 미친 것이 아니신지요?
마이크 빼앗지 말아라 내 노래를 끊지 말아라
난 안 미쳤다 멀쩡하다
안 미쳤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내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해도
그 꺽으신 뼈를 다시 살려낼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 꺽으신 뼈로 기뻐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즉 계시입니다.
찬양은 나의 노래 나의 기도 나의 금식 나의 눈물이
그 꺽으신 뼈를 다시 붙도록, 원래대로 꺽이지 않도록,
꺽은 것을 도로 펼수있도록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 꺽으심 자체가 기쁨이다는 겁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다는 겁니다.
꺽으신 뼈가 불쾌하고 거리낌이지 어떻게 기쁨이 되느냐 말이죠.
저번에 누가 그런 말을 한적이 있는데 인생 자체를 리셋을 했으면 좋겠다. 재부팅.
과거의 인생을 돌이켜서 리셋을 하던가
타임머신으로 돌아가서 고칠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나비효과 라는 영화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것 자체가 오히려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돌이켜서 그것을 고칠수 있는 편집을 하고픈데
오히려 건드리면 더 엉킨다는 것이 세상영화의 내용이더라 말이죠.
그래도 인간은 달리 다른 희망이 없으니 기여이 그 빈자리를 건드리는 겁니다.
사실 과거는 없어요
과거를 회상 또는 기억할 때 자꾸 사실로 여겨서 기억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서 편집한 과거일 뿐이다는 겁니다.
막상 과거로 돌아가 그 기억대로 가 보면 또 다르게 편성이 되어 재배치가 되어 있을 뿐인 겁니다.
왜?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런겁니다.
그럼 마음들도록 백날 해 보라 말이죠.
역시나 마음 들도록 했어도 돌아서면 마음에 안 듭니다.
찝찝합니다. 모호합니다. 미흡합니다. 또다시 갑니다.
역시나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갇혔다 라고 합니다.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에서
[이전 것] 이라는 항아리(판대기, 구조) 이다는 겁니다.
즉 선악적으로 판단해 볼 때 더럽다 부정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터미네이터 라는 영화도 그런 식이고
얼마전에 톰 크루즈 나오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그렇고
(‘오늘과 내일의 경계’라는 뜻으로, 주인공이 겪는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어바웃 타임 인가? 엄청나게 그런 내용들을 다루는 거죠.
(시간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제목 뜻이 “진작 했었어야 했던” “지금이 바로 그 때”)
시간에 갇혔는데 그 갇힌 것에 대한 해방을 말입니다.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 결핍상태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타자의 욕망인 거죠.
뭐더라! 광고 문구
아! 피할수 없다면 누려라
달리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런 겁니다.
또 자꾸 미루다가 드디어 보게된 데쟈뷰 라는 영화도 그렇고요.
난 심리 영화인줄 알고 대충 세 번 찍어 클릭해서 보니 재미없다 싶어서 안봤는데
심리영화가 아니라 공상과학 영화이더군요. 전혀 예상 밖이라서 오히려 재미있게 봤는데
하여튼 다들 과거를 자꾸 손대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현재도 자꾸 손대어 보고
심지어 미래도 자꾸 손대어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과거 일까요?
과거에 대한 집착성은 이루 말도 못할 정도입니다.
인간은 왜 과거에 대해 집착할까?
알고보니 과거 때문에가 아니라
그렇다고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 곧
현재도 정확하게는 아니고
지금 현재의,
아냐 아냐 이것도 좀 부족한 표현인데 그렇다고 달리 뭐라고 표현하기도 그렇고요?
참으로 난감한데 시간이라는 굴레를 확 벗어버리면
표현하기가 쉬울텐데 시간 자체를 벗어난 용어가 없기 때문에
달리 다른 언어가 없어서 그냥 적어보면
왜 과거에 집착하냐?
과거에 내가 자유가 아닌 포로된 상태로 잡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은 곧 과거가 아닌 지금 내가 포로된 갇혀있는 [이전 것]이다는 증상인 겁니다.
그래서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자꾸 손댈려고 하는 거죠.
결국 지금 현재를 바꾸고 싶은 겁니다.
지금 현재가 아무 문제 없으면 과거를 손댈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거든요.
아무리 과거가 엉터리였다손 치더라도 지금이 괜찮으면 전혀 손댈려고 하지를 않는 겁니다.
지금이 불만이라서 자꾸 과거 탓을 하는 겁니다.
결국 [이전 것]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과거가 아닌 지금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 연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지금 이 순간의(어쩔수 없이 모조리 시간적 표현이긴 하지만 하여튼 다 누락 배제 된다고 보고 물론 그런 입장에서 인간도 배제 당연히 되는 거죠.)
지금 이 순간의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연결 고리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배제된
원인 자체가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이 말이 얼마나 모순 되나요? 철학에서나 써먹을 뿐이겠지만 과학시대에는 택도 없는 겁니다.)
남자 없이 아기를 낳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새것이라는 의미는 말입니다.
씨 없이 생명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오이디푸스의 뫼비우스 띠를 끊는 방법인 거죠)
이것은 이해를 요구하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어라 라고 대상물 취급하는 믿음의 대상물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의 등장이다는 겁니다.
내가 믿을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행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대상물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믿음의 대상물이 된 겁니다. 믿음 자체의 등장 때문에 ...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우리 보고 믿어라 라는 소리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 이신 예수님이 저질러버린 결과가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냥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이시다 라는 겁니다.
국어문법에서 어긋났다고 하는 놈들은 지극히 당연한 공격이다 라고 하겠지만
맞죠 어긋났죠.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그 동안 장사꾼들로써 강도의 소글을 운영해 왔다 라는 것이 들통나는 순간인 겁니다.
이전 것 이라고 과거를 표현한 것 같지만
과거가 아니라 새로움이 없으면 모조리 과거가 아닌 이전 것이 되는 겁니다.
갇혔고 포로되었고 얽매인 세계는 다 [이전 것]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아니 [이전 것]의 세계의 문법에서 벗어난 용어라고
잘못이다 라고 할 정도이니
얼마나 [이전 것]을 반복했으면(달리 반복 되는 것이 없기에)
얼마나 [새로움= 매일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 없었으면
그것으로 테클을 걸까요?
인간의 지식과 신학에 예수님이 포착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으니 원!
인간의 믿음에 포착 안되는 예수님이라고
가짜라고 몰아 붙일 수 있냐 말이죠.
오히려 안 되어야 진짜 예수님이잖아요.
사실은 그들은 나누고 가르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조작한 예수만을 만난 거죠. 우상 예수.
그러니 같은 용어 같은 단어라도 정반대로 극과 극으로 갈라버리는
그 주체 당사자 예수님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갈라버렸어요
그 가름을 숭고 곧 아름답다 라고 다윗이 지금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전 것과 새로움으로 나뉘어진다는 겁니다.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지요?
그럼 이 둘로 갈라지는 기준은 무엇이며
어떻게 갈라지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오늘 바로 시편 8편에서 말하는
위엄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영광받으실 이름의 등장이요 개입이다는 겁니다.
이 이름 때문에 갈라지는 겁니다.
그것도 매일 매일 갈라지는 겁니다. 끊임 없이 무한 반복으로 말입니다.
이전 것과 새로움으로
그럼 또 인간들은 자신은 어디에 속했느냐 라는 것만 관심 두는데
간극 자체가 새롭게 생겼고
그 간극 사이에 누구 라는 이름이 있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이미 나누어졌고 각자의 간극에서 이미 땡기고 있는데
뭘 새삼스럽게 자신이 어디에 속했느냐를 따질려고 하느냐 말이죠.
정작 그 간극 사이에 누구 라는 인물을 지금 다윗은 찬양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걸어버린 그 믿음이
그 간극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지
나의 믿음도
나의 노래도
나의 기도도
나의 금식도
나의 눈물도
그 간극의 빈자리를 채울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롬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왜?
[이전 것]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롬 8장은 대 반전입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둘로 갈라졌도다 이전 것과 새 것
그러니 나 라는 존재는 이 이름에 의해서 갈라짐을 당하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모든 이름은 이 이름에 의해 찢겨져야 할 입장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전 것과 새 것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니 새것이 되었는데 아니 기쁘고 배기냐 말이죠.
그 찢겨진 틈에서 새것이 나오는 겁니다.
새 이스라엘이 나오고
찢겨진 증상이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기쁩니다.
휘장이 찢어지니까
막힌 담이 허물어 지니까
위에서 그 동안 가로막혀서 안나오던 것이
막 흘러 흘러 온 땅에 피를 흥건하게 뿌리는 겁니다.
거룩해서 거룩한게 아니라
거룩 자체가 뒤짚어 씌워버리니까
거룩에 풍덩 하고 빠지는 것을 누릴 뿐이다는 겁니다.
옷 만 젖을까요?
시계도 잠겨 빠져서 고장나고!
스마트 폰도 빠져서 고장나버리고!
쫄딱 망하게 됩니다.
이전 것은 완전히 망가져서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되는 겁니다.
아니 세계 자체가 달라졌다니깐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거룩 속에서 잠식이 되다 보니
이전 것이 시시하고 재미도 없고 반복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바닥을 친 겁니다.
뭘해도 실패입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제발 살려주세요 죽게 되었사오니 살려주세요 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먹고 마시고 포도주를 먹고 막살기를 하고 있더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새 것이라는 새로움을 부각 시키는데 내가 동원이 되더라 말이죠.
거룩의 잠식성이 어떤 것인가를 부각 시키고자 내가 졸지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나의 허락도 없이 나의 전체가 그 새로움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 새로운 세계의 증상이 바로
이유 없이 기쁩니다.
아무런 연고 없이 찬양 합니다.
원인 없이 새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시험 합격이다 말이죠.
즉 누구는 교회에 새가빠지게 다녀서
십일조 건축헌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는 부재 곧 지옥게 가게 되었고
또 누구는 단 한번도 교회에 다닌 적이 없는데 천국에 냅따 가버렸더라 말이죠.
사도들이 자꾸 이런 말들을 하기 때문에 거부 당하는 겁니다.
그것도 유대인 회당 앞에서, 코 앞에서 말이죠.
교회가 그런 소리를 제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감히 교회에 도전을 하고 있다고 말이죠.
오히려 교회라면 이런 소리만 해야 합니다.
사실상 성경 전체가 이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야기 자체가 없어요.
주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는 자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더라 말이죠.
아무 연고 없이 말입니다.
목사가 사람들을 꼬셔서 자꾸 일시킬려고 하는데
저런 소리를 하면 초 치고 있다는 거죠.
목사 밥풀떼기를 만들려고 하다가
도로국밥이 되니 말입니다.
아니 성경 보세요 특히 복음서에는 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를 이레에 두 번 금식을 그런데 지옥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생전처음 교회에 와서 딱 한번 기도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베푸소서, 곧 인애와 자비를 베푸셔서 제발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싸가지 없이 그 말 한 마디만 하고서는 다시는 교회 다닌 적이 없는데 천국에 갔더라 라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는 겁니다. 다 그런 같은 해석들로의 비유들이다는 거죠.
아니 교회가 오히려 그런 소리를 외쳐야 하는데
정반대로 외치지 못하도록 입을 가로막고 있으니
모조리 다 인간 손으로 지은 전인 강도의 소굴에 빠져 사는 겁니다.
그런 말을 하면 조직이 붕괴 된다는 둥
교회질서가 엉망이 된다는 둥
유대인들이 그래서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사도들을 방해하고 옥에 가두어도
결국 자신들의 손에 의해서 풀어주겠끔 되더라 말이죠.
그러나 다만 이 말만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시사 주가 되게 하셨다.
이 말 만큼만은 말이죠.
왜 그런 걱정을 주님도 안 하시는데 왜 하는 것일까요?
주님 보다 더 걱정하더라 말이죠.
결국 그래봤자 자기들끼리 등쳐먹고 사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밥풀떼기로 삼아서 서로 이용해 먹을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기에 가장 좋은 것이
성경이요
더군다나 요즘 시대는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면 가짜로 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말해야 돈 되는 세상입니다.
그 정도로 악한 세대입니다.
기적으로 구하니까 말입니다.
주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법궤 뒤에 숨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결국 법궤의 배신때리기로 인해 들통 나는 겁니다.
사실은 들통 나면 안되는데 들통나버려서 감사해야 하는데
또 다행히 감사할 틈도 주지 않고 죽여버리시는 겁니다.
혹시나 돌이켜 회개해서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를 할까봐
후딱 죽여버리시는 겁니다.
빨리 그런 십자가로부터 배신 당하는 것이 감사함이 덮치는 겁니다.
거룩이 덮치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인간의 신학이나, 신앙이나, 종교성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거꾸로 놀아나도록 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그 속에서 다윗 또한 놀아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그를 빼내시는 방식이 바로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급히 진노가 임하는 겁니다.
덩치 큰 골리앗도 아닌데
베냐민 지파 사람 구시의 말을 듣고
바짝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시므이나 구시나 그들을 움직인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윗은 바짝 엎드려서 더 낮고 더 낮게 실패 속에 놓여지게 함으로써
주님은 다윗을 이스라엘로부터 빼내시는 겁니다.
사실상 애굽이나 마찬가지인 이스라엘이였으니까 말이죠.
교회도 자꾸 개혁할려고 사기 치지 말고
교회로부터 빼내시는 주님의 숭고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지근 지근 밟아버리심, 배신 때리심을 당하자 말이죠.
마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빼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막상 죽임 당하시니까
그제서야 냅따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안 도망쳐도 상관 없을 정도로 그들은 유대인이였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쳐야 할까요?
졸지에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새로운 신분 때문이였습니다.
이전 것의 신분과 새것의 신분의 차이가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생겨버렸기에
어쩔수 없이 도망치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새긴적도 없는 신분입니다.
새로움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찬양이라는 계시는 바로 이런 겁니다.
자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쳐 가는 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새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 이름은 너희가 죽인 예수를 다시 3일만에 살려낸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새 이름을 만나게 되니까?
예루살렘으부터 도망쳐서 더 멀리 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서 예수의 죽음을 등에 지게 됨으로써
공간을 새롭게 편성케 하는 자들로써 성령을 받게 되는 겁니다.
졸지에 이제는 예루살렘을 도망치는게 아니라
예루살렘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로부터 도망쳐야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왜냐하면 새것이 와버렸기에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이전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니 사마리아로 사마리아를 치는 땅 끝까지 아름다운 소식
그 불쾌하기 짝이 없는 거리끼는 지혜가 지옥의 죽음 세계까지
구석 구석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는 자인 겁니다.
안 기쁘고 배기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움을 새롭게 편성하는 겁니다.
이전 것은 물러가 버리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들이대면서 말입니다.
그럼 우리 눈으로 보기에 권력이 바뀌고 정치세력이 체인지 되는갑따 싶지만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사도들의 죽음만이 오히려 더해지는 겁니다.
즉 계속해서 새로움이 발생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새가구 새신상품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사도들에게도
성도들에게도 십자가의 사건이 반복이 되더라 말입니다.
이런 새로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에게 에게 이게 무슨 새로움이야? 라고
전혀 풍채도 아름다움도 흠모할 모양도 없는
오로지 싫어버린바 되는 것만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반복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세워지는게 아니라 말이죠.
교회 라고 하니 헷갈릴테니
예배당건물 지어서 뭐하게요
모든 천지가 주님의 전인데 말이죠.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배당이 세워지는게 아니라
사람 곧 죄인 하나가 돌아오는 겁니다.
이것만이 새로움입니다. 죄인 하나 돌아오는 것
천군천사들이 반기면서 노래 부르는 죄인 하나 돌아옴 말입니다.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공동)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곧 성령의 전인 죄인 하나 말입니다.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결국 사도들이 죽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이유로 죽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파괴 때문에 죽는 겁니다.
교회 거부 때문입니다.
죄인 하나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전도해야 된다니깐요.
그렇다고 신천x 이단처럼
이놈들은 오히려 교회를 빼앗을려고 하니까 파괴 해체 개념이 아니라
더욱더 키우기 위한 짖을 하니 똑같은 놈들이지요.
같은 강도의 소굴 구역 땅 따먹기 할 뿐이지요.
신천x는 교인 빼앗기 때문에 틈새시장에서 살아남았다고 좋아라 하지만
결국은 자기들끼리 배신당해 더 나쁜놈에게 잡아먹힐 뿐입니다.
그들은 백날 해 봤자 이전 것이지 새것이 없어요.
신천x 욕할 입장이 아니라.
기존 교회도 다 그 짖을 하지요.
제가 아무것도 모를 때 금요철야를 대구에서 많이들 다녀봤는데
있는놈들이 더 해요(큰 교회)
그저 교인 빼앗기에 정신이 없어요.
서로 서로 마귀 빼앗기 게임만 하더라 말이죠.
그것이 몇십년 전인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도 변한게 없다는 거죠.
다 [이전 것]만 가득할 뿐이지
[새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새 것]은 뭐냐? 전혀 새로워 보이지도 않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입니다.
교회들은 온갖 프로그램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교인을 꼬시느냐 뿐입니다.
기존의 십자가는 구원용이라 가짜인데
진짜 십자가는 구원은커녕 너무 너무 무능해요
우리를 구원하기는커녕
그 어떤 보상도 없어요.
독생자 예수님도 구원 못하는 십자가 라는 겁니다.
자기아들 독생자도 구원 못하는 십자가예요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이게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이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버림받았다고 그 어떤 보상이 없어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보상이 없다 라는 것이 십자가의 외침이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못박아 죽여라 죽여라
에잇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뿌라 라고 방금 외쳤던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십자가 믿어줄테니 구원받게 해 주세요 라고 하느냐 말이죠.
십자가란 그 어떤 보상도 없음 이라는 선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가능성 없어요
여기서 종교꾼들은 십자가마저 동원해서 가능성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결국 신학이요 종교요 철학이요 교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강도의 소굴이며
또 모호한 의문의 짖을 또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결과는 부재한채 그 원인만을 계속적으로 쥐고서 반복하는 겁니다.
그 원인이 결국 나에게로만 회귀하니
결국 이전 것 만 반복할 뿐이지
새것은 없는 거죠.
아니 이전 것과 새로움이라는 갈라짐 자체가 없는 상태이니
이전 것만 반복한다는 말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둘로 나누어져야 말이 통하지
아무리 봐도 둘은커녕 하나 뿐인데
뭐가 나누어지고 뭐가 갈라지냐 말이죠.
갈라진 입장에서 나오는 말인데 말입니다.
그 가름은 예수님의 믿음 뿐
십자가 뿐이다는 겁니다.
단절
가능 가능 외치고 있는 판국에
개방 개방을 정신없이 외치고 있는 판국에
단절이 무슨 소리이겠느냐 말이죠.
뭐 갈라져야 둘을 가지고 차이나도록 설명하는게 가능하지
차이가 나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않는데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결국 하나로만 보일텐데
신천x나 안상x이나 신흥이단도 이제는 한 물 갔고
역시나 성화론이 제일 사람들 마음에 희망을 줄테니 말이죠.
성화론은 결국 불교이거든요. 유대교도 불교에 속하는 행함이듯이
최고의 종교인 불교를 따라갈 자들이 없어요.
늘 회개하고 늘 차이의 반복의, 무한 반복의 주사위를 던지고 있으니
밑도 끝도 없는 모호함 의문 미완료 뿐인거죠. 이미와 아직처럼
이미도 아니요 아직도 아니요 늘 모호하다 보니 갈라짐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도 이미와 아직을 해결 못함 ㅋㅋㅋㅋ
계속 계속 모호한 의문만을 남겨서 뺑뺑이 돌려야 돈을 뜯어먹는 거죠.
불교도 결국 장사죠. 기독교도 강도의 소굴
예수님의 죽음이 명료한 것은 바로 그것을 찢은 겁니다.
모호함과 의문을 말입니다.
그래서 밝히 보인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장본인 아닙니까? 미흡한 모호함의 달인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아닙니까!
그래서 모호함과 의문인 것들에 의해서
미련함으로 취급받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십자가,
실패로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이름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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