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거슬러서 베푸는 구원

 

구원이란 이미 죽은 자를 거슬러서(불쾌하게 역행하는, 거룩한 숭고의 역행으로) 다시 살려 베푸는 긍휼

 

주의 심판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6)

 

(6: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6: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6:3, 개역)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6:4, 개역)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을 구원하소서

(6:5, 개역)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6, 개역)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6:7, 개역)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6:8, 개역)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6:9, 개역)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6:10, 개역)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6:1, 현대어) [살려 달라 외치는 소리; 다윗의 노래. 팔현금에 맞추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노여우시더라도 나를 나무라지 마소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신다 해도 나를 벌하지 마소서.

(6:2, 현대어) 이렇듯 기진맥진하오니 이 몸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덜덜 떨리오니 이 몸 고쳐 주소서.

(6:3, 현대어) 너무나 떨리어 이 몸 가눌 길 없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6:4, 현대어) 오소서, 여호와여! 구해 주소서. 한없는 사랑으로 건져 주소서.

(6:5, 현대어) 죽으면 어찌 주님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스올에 빠져 어찌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6:6, 현대어) 흐느껴 울다가 울다가 지쳤습니다. 밤이 되면 밤마다 흘러 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여 침상은 흥건히 젖고 이부자리도 눈물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6:7, 현대어)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러워 눈에는 진물이 흐르고 원수들 등살에 견디지 못하여 앞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6:8, 현대어) 하느니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아, 없어져 버려라. 여호와께서 흐느끼는 내 목소리 들으셨다.

(6:9, 현대어) 여호와께서 애타는 나의 간구 들으셨다. 나의 기도를 받아주셨다.

(6:10, 현대어) 원수들아, 너희가 고개를 들 수 있을 성 싶으냐? 너희가 무서워 떨지 않을 듯 싶으냐? 없어져 버려라. 더 창피당하기 전에 물러가버려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인애와 자비 곧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왜 제사를 원치 않고

왜 인애와 자비를 원할까요?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서에서 흔히 나오는 두 세계에서 끌어 당기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 차이를 알수가 있습니다.

 

항상 4복음서에서는 물론 구약에도 나옵니다만 역사와 정치를 깔아서 복잡하지만

그 역사와 정치를 더 역사적으로 더 축약해서 더 정치적으로 초과잉적 정치적으로 간택해서

노골적으로 사복음서에서는 두 인물들을 대립시키는 겁니다.

 

지옥세계에서 땡기는 인간과 천국세계에서 땡기는 인간

 

구약에서는 가인 vs 아벨/ 에서 vs 야곱 / 애굽왕 바로 vs 모세 / 사울왕 vs 다윗 / 거짓선지자 vs 참선지자 등등

 

신약에서는 맏아들 vs 탕자 /

부자청년 vs 소문난 죄인 삭개오 /

밤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3) vs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4) 또는 참이스라엘 나다나엘 (1) 등등등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차이성이 없는 별반 차이없는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이 개입하니까 이 양쪽의 인물들은 두 세계를 발설할 수 밖에 없는 큰 초과잉의 간극으로써 자리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개입하지 않으면 그 속성이 나타나질 않으니까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 상의 두 강도와 같습니다. 둘 다 강도요 둘 다 지옥 가도 마땅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이 개입이 되니까 둘은 천국과 지옥을 발설해야만 하는 자로써 배치 당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개입입니다.

 

제가 어제 글을 올렸지요

예수님을 알기 싫어서 예수믿기를 한다고요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물이 우리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 패로 갈려지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두 패로 갈라지지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출발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인간의 믿음을 해체하는 의미인 겁니다.

천국에 다다를수도 없는 믿음을 가지고서 출발하니까 말입니다.

 

위에서 구약 신약에서 나타난 두 인물들의 대조는

바로 한 쪽은 제사요

다른 한 쪽은 인애와 자비 이다는 겁니다.

 

한 쪽의 제사는 인간의 믿음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인간 몸이지요.

그런데 다른 한 쪽의 인애와 자비는 예수님의 믿음이 개입한 겁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제사로 출발한 자들은 예수님이 시작하는 출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애와 자비로 분류된 자들은 예수님이 출발했기에 자신의 믿음은 오히려 부정 당하는 식입니다.

 

오늘 시편 6편을 보십시오

시편 1편부터 계속해서 부정적입니다.

 

다윗은 부정 당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로부터 부정 당하고

이스라엘로부터 부정 당하고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부정 당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십자가를 거두지 마세요 제발 주의 인자로 그 심판으로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몸에 닥친 상황인데

 

역시나 다윗 또한 지옥이 땡기는 신체의 특성을 보여주는데

 

예수님의 믿음이 미리 앞당겨 개입하다 보니

다윗은 개인의 신체에서 비롯됨이 아니라

예수님이 격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들로부터 부정 당하고

이스라엘로부터 부정 당하고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부정 당하는 예수님 말입니다.

 

졸지에 천국이 땡기는 몸인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더라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는 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몸

 

? 제사가 아니라 인애와 자비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라는 이유 만으로 말입니다.

 

즉 불쌍히 여겨주심이다는 겁니다.

 

불쌍한 상태란 어떤 상태 입니까?

저주요 심판 속에 있음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만 희년이 의미 있다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누누이 언급했습니다.

 

즉 희년은 포로된 자들에게만 의미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 드리는 자에게는

즉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 흘리심 곧 복음, 은혜의 해, 희년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인간은 이미 저주와 심판을 다 피해버린 상황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당하는 자를 저주하는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니 뭐가 아쉬워서 살려달라고 외치겠습니까?

 

제가 의아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지금 다윗의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왕 되기 전의 모습이 아니라

 

왕이 된 이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저런 상황에 놓여진 것일까요?

 

쿠테타를 일으키는 압살롬 자식을 초반부터 재압했으면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욱더 쿠테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권력을 잡도록 다윗이 오히려 방치를 합니다.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물론 밧세바 취한 사건으로 인해 다윗의 집안은 피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겠다 해서 나온 결과인지?

 

아니면 왕이라는 직책이 비록 그럴 수밖에 없지만

비록 왕이지만 비록 짐승짖만 하는 자이지만

새로운 왕이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개입이라면

다윗 왕은 왕 답게 자기자신을 완벽하게 왕다움을 표출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것은 사울왕이 예민하게 평생 그런 강박증에 시달려 살았던 겁니다.

 

그래서 왕이기 때문에 다른 왕에게 살려달라고 목놓아 우는 겁니다.

 

이 장면을 우리가 옆에서 본다면 의아해 할 것입니다.

 

왕이여 이스라엘 왕 중에 더 위의 왕은 없습니다.

다윗 왕 당신 뿐입니다.

 

그런데 왜 더 높은 왕이 있는냥 알수도 없는 그런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십니까?

 

의아해 할 것이다 말입니다.

 

종교꾼이라면 바로 하나님 여호와 라는 용어로 다른 왕이 바로 여호와 라고 신앙의 영역으로 돌려서 제사를 잘 드린다거나 제물을 잘 바친다 거나 그런 쪽으로 빠질 것이다 말이죠.

 

누구처럼? 사울 왕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인간의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의 개입 때문에 실제적으로 다른 보이지도 않는 왕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겁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품이 좋으나이다

라는 내용은 그야 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표현인 겁니다.

 

아파트에 불이 아침에 나서 재앙이 닥친 것처럼

 

아침부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겁니다.

밤마다 나의 모든 죄악을 도말해 달라는 성실하심 전능하심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얼마나 살벌 합니까?

 

아침부터 죽음에 몰린 자 만이 외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아침부터 눈뜨자 마자 벼랑 끝으로 몰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마가 15: 25 :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 중략 -

33 :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아침에 눈 뜨자 마자 제 삼시 곧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제 육시 곧 정오 12시에 태양이 가장 뜨거울때에 오히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합니다.

빛은 다 사라지고 태양은 가리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제 구시 오후 3시 총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 달았는데

제 구시에 다 이루었도다 외치시고 죽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인간의 믿음입니까? 그렇게 역사 역사 역사 정통 정통 정통 우려먹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딸랑 6시간 만에 해치워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요 성화요 행함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이런 모양 밖에 없습니다.

뭘해도 인간은 다 이 짖 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아침부터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오전 9시에 인간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재판하여 후다닥 속전속결로 6시간 만에 죽여버립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안식일을 피해서 말입니다.

인간의 믿음 곧 살인의지는 제사드리기 위해 안식일 피하기 이고,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날 살려 달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안식일날 맞추어서 드리는 기도 곧 부르짖음 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19:1, 개역)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19:2, 개역)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19:3, 개역)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19:4, 개역)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19:5,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19:6, 개역)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19:7, 개역)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19:8, 개역)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19:9, 개역)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9:10, 개역)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9: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19:12, 개역)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9:13, 개역)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19:14, 개역)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5, 개역)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9:16, 개역)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인간의 믿음이 과연 일부러 자신의 믿음을 안식일날 맞추고자 할까요?

생각을 해 보십시오

 

교회 사람들이 때거리로 주일 전날 토요일 아침에 몰려와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을 하는 상황을


못 박아라! 못 박아라!
 

아침에 눈 뜨자 마자 그 상황을 격게 된다면

 

바로 이것이 제사가 아닌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의미라면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사실 아무도 격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격습니다.

죽음이란 의미는 예수님만 제대로 격지
인간은 정녕죽으리라를 격은 적도 없습니다.
제대로 저주를 받은 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맛배기 샘플만 당하고 있어도

지금 온 몸이 바르르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처럼 당한다면

즉 다윗도 주의 자비와 인애가 없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기는 매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아내 보세요 얼마나 제대로 말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극심했으면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게 차라리 백배 천배 낫다는 겁니다.

아무 이유 없는 저주이니 답도 없으니 그냥 죽는게 속 편하다 라는 거죠.

그러나 다윗은 제발 그렇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사실상 아침부터 그렇게 당하는 자 유일하게 이스라엘 속에서의 다윗을

살려내시고자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심판 속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런 요청도 할 수 없고

왜 저 다윗이 저런 소리를 하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왕의 신분인데
가장 이스라엘 중에 비천한, 가장 저주 받은자가 외치는 소리를 설마 왕이
가장 높은 왕이 하겠는가 말이죠. 왕은 배부른 입장이기에 배고픈 백성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벌벌벌 떨면서 온 신체가 불쌍히 여겨달라는 긍휼을

온 전신의 떨림으로써 요청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온 몸으로 떨고 있습니다.

제발 저들의 죄악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사실 알 수가 없는 불가능한 지혜가 십자가 지혜입니다.

 

알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인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모르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안다 알수 있다 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주님 쪽에서 마련했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의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알 게 됩니다.

 

알게 되니

 

지금 다윗은 웁니다.

놀라운 탄식으로 상하고 썩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알게 되어서 우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미리 앞당겨서 우는 울음입니다.

 

저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도들의 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려서 주가 되게 하셨다 라는 외침을

왜 우리는 그 의미를 도통 알려고 하지 않느냐 말이죠.
사실 불가능 합니다.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지식이 안되니 금새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


결국 안다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짖입니다. 무의미 하다는 거죠.

그런데 그 하나 마나 한 짖을 하는 자들이 바로 성령을 받은 자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왜 알려고도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원천적으로
근본 태생이 왜 원래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다른 것이 그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지식도 있겠다.

성전도 있겠다

율법도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야 합니까? 숙제만 더 늘어나는 짖을 왜 하겠냐 말이죠.

더 골치아픈 것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기존의 것과 대 충돌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 짖을 일부러 하겠느냐 말이죠. 그것도 목숨까지 왔다갔다 할 정도의 충돌인데 말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들추어 지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응하는 겁니다.

 

저들에게는 제사가 있기 때문에

인애와 자비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도 그들은 실천하면 그만 이거든요.
자신만의 따로국밥처럼 인애와 자비를 갖추면 되거든요?
왜 구지 예수님께 새삼스럽게 인애와 자비를 구걸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구걸 합니다. 내 속에 인애와 자비가 없다 라는 것을 알고 심각함에 빠진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다고 탄식하는 자가 있냐 말이죠? 속이 썩어들어가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되느냐 말이죠?
정직한 마음이 없으면 수련 하고 도 딱고, 교리 플러스 실천 하면 되잖아요? 그게 불교 아닙니까?
종교 중에 최고의 종교는 불교이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그거 안해봐서 구걸 하겠습니까?
그게 바로 거짓이다는 것에 실감했기 때문에 정직한 영이 없다고 탄식하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를 아무리 눈 씻고 쳐다봐도 다윗 속에는 없기에
아침부터 눈 뜨자 마자 애걸복걸 합니다.
안 주시면 저 죽어요 제발 인애와 자비를 허락하소서 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 성전에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인 바리새인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주여 저는 저 다윗 세리 와 같지 않게 해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죠.

 

뭣 땜시 새삼스럽게 인애와 자비를 애걸복걸 하면서 달라고 하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왕 다윗왕은 애걸복걸 합니다.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달라고

 

즉 없다 라는 것을 직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눈 뜨자 마자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없다 라는 실제상황이 실제적인 심판으로 다가 왔다는 직시를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고쳐 달라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만이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지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건져주세요 라고 하겠냐 말이죠.

 

그럼 누가 빠뜨린 겁니까?

 

베드로를 누가 빠뜨린 겁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건져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온 몸이 상했고 온 마음이 피폐해졌다는 겁니다.

 

(6:1, 공동) 야훼여! 노여우시더라도 나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나를 벌하지 말아주소서.

(6:2, 공동) 야훼여! 힘이 부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쑤시오니 나를 고쳐주소서.

(6:3, 공동)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6:4, 공동) 야훼여! 돌아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제발 진노하심을 거두어 달라고

제발 이제 더 이상 그만 벌을 내려달라고

뼈 마디 마디가 자기 뼈요 자기 살인데 원수들에게 치여

이제는 자기 뼈가 자기를 찌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발 고쳐달라고 합니다.

지체하지 말고 빨리 급히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사울왕이 던지는 창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다윗이

이제는 벌벌 떱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에도 전혀 요동함이 없었던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제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다윗의 눈물이 담요를 다 젖게 했다고 합니다.

눈물이 마시는 잔을 채우는 음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썩어 문들어지는 상한심령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살과 피인 고난의 잔을 마시라고 합니다.

 

즉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제사 보다 나은 순종이다는 겁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번제나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거부한다는 겁니다.

 

애초부터 상하고 통회하는 정직한 영이 없었음을 비로소 인애와 자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는 때려죽어도 몰랐던 마음이였습니다.

 

? 번제와 제사가 왜 이렇게 비하 되는 것일까요?

? 7번 남을 용서하는 것이 비하 되는 것일까요?

 

죽은자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770번 용서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절대로 비하 되지 않던

모든 사람들의 이상향 이였는데

졸지에 770번이나는 인애와 자비 곧 인자하심이 등장하니까?

번제와 제사는 하급으로 취급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으로 잉여(자본)을 챙기던 자들은 졸지에 복이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번제와 제사로 지금 현재 현대에까지도 챙겨먹고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만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 조차도 그의 왕 됨이 날라가 버릴 판국인 겁니다.

 

정작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 왕으로써

 

이미 죽은자에 놓여져야 할 판국이였던 겁니다.

 

이미 죽은자

 

그래서 이 이미 벌써 죽은 자를 거슬리는 역행하는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함을 요구하는 겁니다.

 

죽은자도 살려달라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긍휼은 이미 죽음 속에 갇혀 버렸기에

살려달라는 겁니다.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은 한낫 판타지 소설일 뿐입니다.

할 짖이 없어서 판타지 영화를 보듯이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실상인 십자가를 증거하십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그 순행을

 

역행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도리어 불쾌한 역행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이미 죽었고

죽음 속에 갇혀 버렸고

그 죽음의 저주와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거슬리는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신구약을 통한 두 패의 사람들 중에

 

한 쪽은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번제와 제사의 달인입니다.

또 하나는 그와 전혀 무관한 매국노 세리입니다.

 

하나는 순리대로 법대로 하자 라는 식입니다.

또 하나는 순리대로 하심이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다만 하실 수만 있다면 그 순리를 역으로 역행해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나는 갇혀버렸기에 이미 죽은자에게 다시 살려내시는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한국교회가 마귀들인 이유가

부끄러운 구원을 세뇌 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데 그 영광스러운 구원을 얼마나 모독했으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했을까요?

 

즉 종교꾼들로 세뇌 시켜 이용해 먹어야 하는데

그것을 성경을 이용해서 세뇌 시켜야 하는데

다들 눈도 있고 하니

구약에서는 부끄럽지만 신약에서는 구원이 되었더라 말이죠.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붙여 버리는 겁니다.

부끄러운 구원 이라고

 

그래서 교인들에게 부끄러운 구원 받지 말라고 사기를 치는 겁니다.

목사의 사람으로 만들어 밥뚤떼기로 이용해야지

진짜로 예수님을 알아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말이죠.

 

목사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예수님의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참 너무 너무 일을 잘하시는 증거인 겁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구원 맞습니다. 맞고요. 정말 제대로 본 것 맞습니다.

 

반드시 부끄러운 구원이어야 구원 답습니다.

 

그런 구원을 엎어버리는 구원을 거슬리는 구원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역행한 불쾌스럽기 짝이 없는 숭고한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자요 그 죽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를

순리대로 하지 않고

인애와 자비로 역행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저들은 애초부터 무슨 의미인줄 몰랐던 겁니다.

 

제대로 순리대로 구원을 행하면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자 없습니다.

한 쪽 기생이 솔로몬의 판결에 박수를 칩니다.

잘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짝짝짝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않게 하는 판결 대단하십니다. 지혜의 왕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다른 한 쪽 기생은 그런 판결을 거두어 달라고

거슬려 달라고 합니다.

 

다 죽으면 누가 주를 기억하며

누가 지옥에서 주님께 감사하겠느냐고 합니다.

 

(6:5, 개역)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4, 개역)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을 구원하소서

 

맞습니다 저 개같은 이방인 맞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제사와 번제로 구원을 뚫을려고 했던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그러나 사랑 없이)

그러나 정반대로 인애와 자비로 우리는 구원으로부터 770번 뚫힘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자 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리는 자가 의미 있는 겁니다.

내가 왜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도리어 770번 살려주심을 당해야 할 판국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은 겁니다. 그래야 죄인을 부르는 구원자가 의미 있는 겁니다.

구원은 역행이였던 거슬리는 행동인 겁니다.

거슬리는 불쾌한 역행이 아니다면 구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고로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구원은 다 날라가 버린 겁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불쾌한 구원만 남았다는 겁니다.

 

바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만이 다시 살려서 주가 되게 하셨다는

 

불쾌한 구원

역행하는 구원만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자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여 구원받는데 아무런 불쾌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기적 때문에 따라왔던 자들이 다 떠나버리는 겁니다.

 

남아있던 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재촉합니다.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지 왜 남았느냐 라고 말입니다.

 

겨우 성령께서 붙들어서 그들이 남아서 하는 말이

주께서 여기 계시는데 우리가 어딜 갑니까 라고

뜻도 모르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죽으신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뒤에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이란 주님만이 이루신 마음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정직한 영이 없음이라는 단절성을 직시하는 그 심각성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그 상한심령을 누리는 겁니다.

 

주여 통촉해 주소서

 

통촉이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발하리이다

 

시편 5편 아침부터 탄식합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탄식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거부하시겠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번제와 제사는 다 거부하시고

 

오로지 상한심령인 성령으로만

인애와 자비로만

단절로써만

차단으로써만

심판으로써만

 

구원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으로써 구원인 겁니다.

 

구원을 거스르는(불쾌하게 역행하는) 구원 (시편 6)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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