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누가 선을 보일자 있느냐? (시편 4)

 

(4: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4:2, 개역)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4:3,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4, 개역)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4:5, 개역)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4:6, 개역)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4:7, 개역)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4:8, 개역)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4:1, 공동) 내 무죄함을 밝히시는 하느님, 부르짖사오니 들어주소서. 이 곤경에서 나를 빼내 주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내 기도를 들으소서.

(4:2, 공동)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 (셀라)

(4:3, 공동) 알아두어라, 야훼께서는 경건한 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내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들어주신다.

(4:4, 공동) 무서워하여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자리에 누워 반성하여라, 고요를 깨지 마라. (셀라)

(4:5, 공동) 『㉠제물을 바쳐 죄를 벗어라. 그리고 야훼만을 의지하여라. / "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쳐라."라고 옮길 수도 있다.

(4:6, 공동)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

(4:7, 공동) 이 마음에 심어주신 당신의 기쁨, 곡식이다, 포도주다, 풍년에 흥겨운 저들의 기쁨보다 크옵니다.

(4:8, 공동)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4:1, 쉬운) <저녁기도-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춰 부른 노래> 내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에 응답해 주소서. 나의 의로우신 하나님 내 근심을 덜어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4:2, 쉬운) 사람들이여 언제까지 나를 부끄럽게 하려는가? 언제까지 잘못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된 신들을 따르려는가? (셀라)

(4:3, 쉬운) 여호와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내가 기도할 때에 여호와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4:4, 쉬운) 화가 난다고 죄를 짓지 마라. 너희는 잠들기 전에 조용히 생각하며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라. (셀라)

(4:5, 쉬운) 주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여라.

(4:6, 쉬운) 많은 사람들이 누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여 주겠는가?”라고 물으니 여호와여, 주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소서.

(4:7, 쉬운) 주께서 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채워 주시니 이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가득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큽니다.

(4:8, 쉬운) 내가 평안히 누워 잠을 자니 나를 이렇게 안전하게 돌보아 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십니다.

 

 

(4:1, 현대어) [비방을 해도 기뻐하여라; 다윗의 노래. 현악기에 맞추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부르짖을 때 대답하소서! 이 몸이 바르다 하시는 하나님, 어려움 속에 빠진 이 몸 자유케 하신 것 기억하고 있사오니 안됐다 여기시고 내가 두 손 모을 때 들어주소서!

(4:2, 현대어) 권력 잡아 힘깨나 쓴다는 자들아! 언제까지 내가 받드는 그분을 우습게 여기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것만을 좋아하려느냐? 언제까지 거짓말을 따라 가려느냐? (셀라)

(4:3, 현대어) 이것만은 알아라.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진실한 이들을 위해 놀라운 일 베푸신다는 것을 그분께 이 몸이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들어주시리라는 사실을.

(4:4, 현대어) 그분 앞에서 무서워 떨어라. 바르지 못한 길로 가지 말아라. 밤에 홀로 있을 때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침묵하여라. (셀라)

(4:5, 현대어) 여호와께 제물을 바쳐라. 정의를 제물로 바쳐라. 믿음을 제물로 갖다 바쳐라.

(4:6, 현대어)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 보여주라.' 사람마다 탄식하오니 여호와여! 주님의 환한 얼굴 우리 위에 비추소서.

(4:7, 현대어) 많은 곡식 걷었다고 수많은 포도송이 따들였다고 즐거워하는 이들보다도 이 마음 더욱더 흐뭇하게 하시니

(4:8, 현대어) 주께서 이 몸을 안전하게 지켜 나 평화로이 자리에 눕고 잠들게 하시니 오직 여호와만이 홀로 곁에 계십니다.

 

 

 

 

(42: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2, 개역)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42:3, 개역)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4, 개역)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5,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3, 쉬운) 낮이면 낮마다, 밤이면 밤마다 내 눈물이 양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지?”

(42:4, 쉬운)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 가슴이 찢어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들어가곤 했습니다. 기뻐 소리를 지르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그 행복한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42:5, 쉬운) 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슬퍼하는가? 왜 그렇게 속상해하는가? 하나님께 희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마땅히 찬양해야 할 것이 아닌가?

 

 

(42:1, 현대어) [2; 고난속에서 주님 기다립니다; ) 고라 사람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암사슴이 시원한 시냇물을 애달아 찾듯 하나님, 이 몸 주님 그리워하기를 그리합니다. 그렇게 애달아 주님을 찾습니다. (. 히브리어 성서(마소라 본문)에는 42편과 43편이 본디 한 작품으로 되어 있다)

(42:2, 현대어) 살아 계신 하나님! 주님이 그리워 이리도 애가 탑니다. 언제나 되어야 주님 앞에 이르러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요?

(42:3, 현대어) 하루종일 온종일 사람들 나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네가 섬긴다는 그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오니 주님이여, 이것은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밥 먹듯 눈물을 하염없이 흘립니다.

(42:4, 현대어) 그날, 하나님의 집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그들을 이끌고 가던 날, 함께 다같이 좋아라 소리 지르며 고마운 마음 어찌할 줄 몰라하던 날, 축제 행렬에 끼여 가던 그날을 생각하면 이 마음 한없이 찢어집니다.

(42:5, 현대어) 그러나 내 어찌 슬퍼하기만 하랴. 어찌 괴로워하기만 하랴. 나는 하나님만 기다리리라. 다시 한번 그분을 찬미하리라. 나를 구원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지난 시간에 비참함 속에서 구원 에 대해서 어머니와 대화를 했습니다.

다윗은 자식에게 쫏겨다니면서 이스라엘의 속성을 보게 됩니다.

곧 원수성입니다.

그것은 다윗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속성이 아닌 겁니다.

본인의 속성 또한 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런 속성을 가만히 두시는 주님은 아니다는 겁니다.

비록 자식에게 쫏겨나는 신세이지만

비록 그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입장이지만

여호와의 구원은 취소되거나 멈추거나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참함 속에서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냥 구원 보다 더 구원의 초과잉적인 역량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두 사람 곧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이 죽어서 이 사건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서 제가 말해 봤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아버지?

왜 그러니!

 

어차피 죽일 것, 심판할 것, 법 대로 죽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비참함을 구지 거치시느냐 말이죠.

결론은 비참함을 거치든 안거치든 결국 법 대로 죽이잖아요?

그러니 내가 봐도 나 압살롬을 하나님께 대들었으니까 죽어야 함이 마땅한 것 맞으니

법 대로 잘 하신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르다 라는 겁니다.

자식이 도저히 경험하지 않은 것

절대로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비참함을 집어 넣겠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너를 낳을때에 법으로 낳지 않았다는 겁니다.

 

조건을 따져서 낳은 법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아비와 지식의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어차피 하나님은 노아홍수로 타락한 인간을 심판해서 홍수로 쓸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법 대로 얼마나 시원합니까? 법 법 법

말 안듣고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마땅히 싹 쓸이 하는 것 속이 다 시원하지요

압살롬이 그런 식이다는 겁니다. 법 대로 잘 하셨습니다 주님

 

그런데 다윗은 그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비참함 곧 인간을 지으신 것에 대한 후회가 반드시 노아홍수 전에 있다는 겁니다.

아니 신이라는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인간의 품성처럼 후회 라는 것을 하다니????

신 맞냐고요 !!!!

 

오히려 그런 다윗 보다 압살롬이라는 인간이 더 신같이 법대로 하는 것이 신 답다 라는 겁니다.

 

후회 같은 것을 왜 하냐 말이죠.

하나 마나 결국은 홍수 심판 이라는 결과는 똑같다는 겁니다.

 

다윗의 비참함 이라는 있으나 마나 하는 것을 왜 하냐 말이죠.

결론은 어차피 압살롬이라는 자식은 법대로 죽게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비 다윗의 사고방식과 차이나는 자식 압살롬의 사고방식이요

지금 이스라엘의 속성이 되어버린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부모는 말합니다.

너를 법으로 낳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오늘 시편 4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선을 보일자 있느뇨 라고 사실상 교회 속에서

이스라엘 속에서

다윗이 저주 받는 모습을 보고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다들 선이 부재 된 채 하나님이라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한 적응력으로 살아가는 거지

선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눈뜩 생각난 것이 시편 42편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 부분을 고등부에서 청년부로 옮길때에 얼마나 많이 보았던 내용인지 모릅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안믿는 자들이 공격하고 고함을 지를때마다 마음 아파서 봤던 내용이였는데

 

너무 너무 놀랍게도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였습니다.

안믿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다윗에게 공격하는 겁니다.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가 아니냐

그러니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저주를 내리지 않는데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구나

그러니 너의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너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보여봐 보여봐?

라고

 

안믿는 자들의 세계에서 요구하는게 아니라

정작 이스라엘 내부에서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공격하는 내용이였다는 겁니다.

 

시므이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그런 공격을 다윗에게 하는 거죠.

 

욥기가 생각나죠?

욥의 세 친구가 그렇게 공격 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공격받으면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라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어제 신년이라고 형님네가 와서 같이 식사를 한 후에

압살롬 이야기 잠간 나왔다가 아름다운 머리와 미모 그리고 서울에서의 동성애 문제로 인한

갈등의 이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러더니 역시나 흥분하는 포인트가 된 시점이 있었는데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 였습니다.

 

마침 얼마전에 그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로부터 듣고 난 뒤에

형님은 동성애는 잘못 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오늘 방금 인터넷 뉴스를 보니

미국 10대 소년이 14세인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부모로부터 거부를 당해서

결국 자살을 했는데

이유는 트랜스 젠더

이것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호모 게이 동성애와 같은

정상적인 성정체성이 아니다는 겁니다.

머슴아가 어릴적부터 자신은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고

부모는 그저 예쁜짓으로 취급하다가

이렇게 깊게 빠질정도인줄도 모르고

14세에 아이가 고백을 하니가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추구한 적이 없다고 라고 하니

아이는 결국 자살을 한 겁니다.

 

큰형님의 말은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서

성적인 욕구를 채우고자

아브라함 조카 롯에게 그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저는 롯을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세뇌 시키는 교회의 사기치는 그런 이야기로 빠질줄 알았는데

서울시장이 동성애라는 성소수자를 동조한 내용과 결부시켜서

큰형님이 동성애는 아주 나쁜 것이라고 얼마나 흥분을 하는지

 

그래서 제가 형님 그렇게 생각할게 아니라

동성애는 성경을 인용해서 생각할게 아니라

그냥 일종의 장애와 같은 겁니다 라고 해서

보는 시야를 좀 넗히고자 했는데

자꾸 성경을 언급하길래

제가 한 마디 했던 겁니다.

 

형님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안하는 사람이 10명이 없어서 망한 겁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 19명이 없어서 망한 겁니까?

 

교회가 얼마나 나쁜짖을 하는가 하면

자신들은 안하는 짖

그래서 자신은 안정 빵에 넣은 것을 가지고 마치 구원의 조건에 맞고

반대로 자신들은 안하는 짖을 저들의 구원탈락 조건에 붙여서 행한다 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써 먹었던 짖이다는 거죠.

 

의인 아브라함이 묻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의인 10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습니까?

오냐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10명 안될 것 같아서 깍습니다.

5? ok

5명도 안돼

32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브라함 자신도 아니야?

 

그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동성애 때문에 망한게 아니라

동성애 안하는 자 10명이 없어서 망하는게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없어서 망한 것이다는 거죠.

 

더 심한 말 할까요?

 

가버나움이라는 중소도시가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한 장소인데

소돔과 고모라가 당한 멸망보다 더 심하게 멸망시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동성애 때문에 망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너무 잘 믿어서 탈일 정도로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망하느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없어서 망한다는 겁니다.

 

자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말이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는 말이 먹혀들까요?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했다 라는 말이 먹혀들까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은 동성애 라는 겁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안 믿어서 망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으냐?

자신이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왜 설득력이 있으냐?

자신이 포함되지 않아서 이다는 겁니다.

해당 사항이 없으니 안전빵에 놓였다는 사실인 거죠.

 

두 사람이 성전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

또 한 사람은 매국노 세리

 

바리새인은 안전빵을 강조 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심판의 주를 강조 합니다.

 

형님이 말문이 막혔던 겁니다.

형 제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말을 한 겁니까?

 

장애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갑자기 닥칠지 모르는 겁니다.

공황장애 저번에 말했잖아요?

아무도 모르기에 장담을 못하는 겁니다.

 

몇 년전에 나온 드라마에 어머니가 동성애를 얼마나 반대를 했는데

알고보니 자기 자식이 동성애에 빠져 버리니까

그 동성애를 이해하고 하더라 말이죠.

안그러면 살 길이 없거든요

모순이죠. 부조리하죠. 그런데 그렇게 뻔뻔해야 자식을 살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또 한 5-6년쯤 전에 인터넷 상에서 20살 청년이 기독교 상담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상담을 받더라고요

 

괜히 제가 그 근처에서 상담 따위를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라고 한번 시비를 거는 바람에

그 청년과 심심하면 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결국은 나에게 와서 큰 고민이 있다고 상담을 해 달라고 하더라 말이죠

저는 상담 따위는 안하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얼마나 본인이 다급하고 급했으면 거부하는 나를 마다하고 기여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담은 안하고 저는 당신에게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늘 주장했듯이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증거하는 복음이 다 옳았느냐? 아니죠.

제가 아는 부분을 다 쏟아 부은 겁니다.

늘 충돌했지만 말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고민이였는지 나눌 사람이 없어서 그 때에 가장 저와 적대시했으면서 저에게 털어놓는 말이

 

자신의 누나가 결혼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형이 누나를 손지검하고 패고 해서

꿈에도 몰랐는데 참다 참다 못해서 누나가 가족들에게 알려서 이혼을 하겠다는 상황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정작 이혼은 당연하겠지만 그 자형을 가만히 둘 수가 없을 정도로 미워 죽겠다는 거죠.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 동안 속았다는 그 억울함과 분노를 어떻게 감출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당신에게 그런 문제를 가지고 상담했던 자들에게 어떻게 상담해 줬냐 라고 물으니

당연히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그럼 답이 나왔네요 그렇게 하세요 라고 하니

그럼 말라고 당신에게 나의 이런 마음을 치부를 드러내듯이 말하겠냐고

그래서 말했죠. 왜 그럼 저에게 말했습니까?

아니 인터넷 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듯이 저와 당신은 보통 적대 관계가 아니게 다툴정도로 다들 알고 있잖아요 왜 저에게 털어 놓느냐 말이죠.

저는 늘 하던 대로 말 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 내용은 당신도 잘 알 듯이 말이죠.

복음을 증거해야지 왜 상담을 하냐 말이죠.

 

또 그 동안의 말 다툼 식으로 가는 방향이 되니까 그 청년이 왠만하면 휙 나가 버리는데

끝까지 참고서 그래 그래 알았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라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빨리 답이나 내놓으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말했지요

당신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상담한 내용의 반대로 하시면 됩니다.

제가 평상시 님에게 사랑하라 참아라 용서하라 라는 그런 사기를 치지 말라고 했을 때 님이 무시했잖아요

 

그렇게 무시했던 그 말을 지금 님이 받아들여시면 되는 것이 저의 답변입니다.

 

그럼 사랑하지 말고

참지 말고

복수 하라 말입니까?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또 또 또 말장난 식으로 빠지지 말고 답이나 말하세요

점점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만

 

제 말은

님이든 저든 모든 인간이든 이때까지 사랑한 적이 없었고요

참은 적도 없었으니 구지 참지 말라고 해서 안참을 자가 되자가 아니라

원래 참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라 말이죠.

복수하라 라는 말이 아니라 여테껏 용서한 적도 없으니

늘 복수를 해 왔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제 말을 듣고 그럼 복수하라 로 듣는 다는 것은

마치 그 동안 복수를 행한 적이 없다 라는 핑계인거죠.

 

누나에게 참으세요 원수를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 라고 다른 사람에게 늘 말했듯이 말할 수 있느냐 말이죠.

 

본인도 자형을 지금 죽이고 싶을 정도인데???

 

그게 다 사기친 것인데

님이 나빠서 사기친게 아니라

사기치는 환경 속에 있다 보니까 그것이 맞는줄 알고 오해한 것이죠.

인간은 참은 적도 없고 원수를 사랑한 적도 없고 용서한 적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놓고 복수할 자격이 있느냐 말이죠.

복수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님이 미워하는 자형이나

님이나 뭐가 다르냐 말이죠.

저도 그 자형과 같은 놈인데 말입니다.

 

다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님의 교회의 목사도 과연 다른 자 맞는지?

아무도 없습니다.

 

맨날 짱돌 던지듯이 휙 나가버리더니

답변 하지도 않았는데 고맙습니다 라고 하고 나가더라 말이죠.

그런데 눈치 없이 제가 또 비수를 꼿았지요

제발 기독교 상담 따위 하지 마세요 제발 ~~~~

 

즉 어떤 인간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동성애 안하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안 품은자로써 천국 갈 수 있는 자격이 될까요?

역시나 지옥 가는 것은 매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청년에게 벌어진 사건이

나중에는 저에게도 역시나 벌어지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 였던 겁니다.

그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 뿐인

뭘 해도 다 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 믿어서 이고

그렇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자신만만했던 해석이

졸지에 불편해 지는 겁니다.

 

나는 예외 라서 자신만만 했는데

예외 이기는커녕 가장 한 복판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 보이니까

가장 불편한 입장이 되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가 사실은 나 자신의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특정 지역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 지면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여건이 되니까

 

나에게 유리했던 해석이 졸지에 불쾌하고 불편한 해석이 되니

나 또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자가 되고

멸망의 기준이 동성애를 했냐 안했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되니

하나님은 안 믿는 것은 매 마찬가지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여기에다 더 깊이 파 버립니다.

하나님은 믿어도 이젠 안 된다.

나 예수를 믿어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유대인들의 안전빵이 다 날라가 버린 겁니다.

 

 

지금 시편 4편에서 다들 안전빵을 확보하고 소유한 입장에서

다윗을 공격합니다.

 

다윗아 다윗아 누가 제대로 된 하나님을 보일자 있느냐?

너도 안되잖아?

우리에게 선을 보이라고 하지 말아라

 

그냥 종교적 환경의 신 곧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종교 환경만 있으면 되지

왜 구지 진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이라고 하느냐?

너도 안 되면서?

왜 우리에게 요구하느냐?

너 밧세바 사건 알지?

그래 너도 안되잖아 거봐 거봐

 

압살롬의 발란을 촉발시킨 하나의 비유가 있는데

드고아 여인이 연기를 해서 압살롬을 자극 시키는 내용인데

지난 번에 언급한 사무엘하 1415장 이전의 1013장인가? 하여튼 나옵니다.

 

밧세바 사건으로 인한 나단 선지자의 용서가

역이용되어서 압살롬은 자극을 받아서 동기유발이 되어버린 거죠

자기 여동생이 강간당한 그 사건에서 다윗은 아무 답이 없이 무능하게 행동했다는 것에 대한 복수심이였다는 겁니다.

마치 야곱의 딸 디나 강간 사건과도 같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내용입니다.

바로 자식과 아비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자식은 법대로 하자 법대로

그러나 아버지는 법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와 용서 라는 겁니다.

 

자식은 어쩔수 없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아버지의 비참함 속에 거하는 것을 이해 못하고

끝까지 법대로 하자 라는 의식 뿐이기에

 

아버지의 마음 성령이 들어가지 않으면 알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비참함 속에 거하고

실패 속에 거하고

진노 속에 거하는

 

후회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즉 왜 십자가의 저주를 예수님이 당하는지를 알 길이 없기에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7번 용서하는 것이 맞을까요?

770번 용서 받는 삶이 맞을까요?

 

형님이 또 헷갈려 하더라 말이죠.

 

당연하게 여겼던 7번 용서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770번 용서받는 것을 동의 할 수가 없는 겁니다.

 

?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숨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시를 좋아라 하면서 달달 외우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있더라 말이죠.

그것도 자신들의 원수 빌라도와 헤롯과 손을 잡고 말입니다.

 

십자가는 법 지키는 모범 백성이 되자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고맙게도 철저하게 모순 적인 나의 실상을 밝혀 버리는 겁니다.

아니 내가 이런 자였어? 라고 자기도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철저한 모순적 모습을 들추어냄으로써

 

그 무엇보다 이것은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이것은 나를 절대로 배신 때릴 이유가 없을거야 라는

 

이것

 

예를 들면 성경 이라든지

하나님 이라든지

윤리실천이라든지

자식

또는 부모

율법 지키기

선한 행동하기

난 절대로 동성애를 안했어 라는 것

성전

거룩한 율법

 

등등의 이것

 

바로 이것이라고 여겼던 그 무엇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 당하고 속았을때에

결국 자기자신이지요 그 모든 것은 결국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것들이니가?

믿음도 말씀실천했다는 것도 다 결국 자기에게 회귀하니까 믿었던 것이지

나를 배신 때릴 것 같으면 말라고 믿겠습니까? 그러니까 다 사기친거죠.

자기가 자신에게

 

 

바로 그 무엇으로부터 배신 당하고 속았고 사기 당했을 때

즉 실패 했을때에

 

성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기는 거죠,

그런 것들로부터 단절 당했을때에 말입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감사하게도 그런 나를 꼭꼭 수셔대면서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역시나 너도 법 법 법 으로 따졌다는 것을

 

인간은 법 밖을 상상도 못하고

빠져나올수가 없으며

법 외에는 다른 것이 발설 된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 다윗과 자식 압살롬의 차이는

비참함이라는 하나 마나 한 아무 쓰잘데 없는 있으나 마나 하는 것을

반드시 거치고

차이로써 중간에 걸쳐져 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후회가 있을 필요 없이

그냥 법으로 홍수 심판 하면 될 것인데

 

왜 구지 후회라는 것을 반드시 그 간격에 있어야 하느냐?

 

 

십자가 라는 것

구지 거치지 말고

3일만에 어차피 살아날 것

3일이라는 참 의미 없다 땡 탈락을 왜 구지 거쳐서

살아나야만 하느냐를 통해서

 

법적인 부활이 아니다 라는 것이고

인간의 부활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다 라는 것에서

 

3일이라는 간극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냐 말이죠.

어차피 하나님으로부터 주 라고 오른편에 두시고자 되찾고 살리시는데

왜 구지 쓰잘데 없는 과정을 왜 구지 넣느냐 말이죠.

 

사람들이 그것도 이스라엘이 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왜 남은 구원한다고서는 왜 자신은 구원하지 않느냐?

 

니 하나님이 어디 있노? 너가 선하다고? 이봐? 너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자들이

유대인 헤롯 빌라도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일반인 할 것 없이

다 너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모습을 봐? 어디 선을 찾아?

이것이 현실이야? 너를 믿는다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 또한 너 예수를 죽일려고 하지 않느냐? 이것이 현실이야? 이런 판국에 선을 찾아?

누가 선을 보일자 있느냐? 그냥 적응해? 종교에 적응하고

교리에 적응하고

교회에 적응하고 살아야지

 

율법의 참 취지인 사랑 따위는 없어

 

그냥 남들이 하니까 그 속에서 적응하면 그만이야?

부활 믿으라 카면 부활 믿어주면 되고

십자가 믿으라 카면 십자가 믿어주면 그만이지

 

진짜 부활 진빠 십자가? 저들도 어차피 몰라

다들 가식적이잖아

다윗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도 밧세바를 취했잖아

너도 못 보여주는 선을

왜 우리에게 요구하니?

그냥 우리가 믿는 신이나 믿으며 대충 대충 살아!!

 

왜 이렇게 불필요하게도

인간들의 예수님에게 대한 조롱을 꼭 구지 상세히도

낱낱이 기록하냐 말이죠. 쫌생이도 아니고 말이죠.

용서한다메?

 

제가 그래서 지난 시간에 다윗이 아주 청승맞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당하는 것을 가지고 온 이스라엘로 확대 시키질 않나

그리고 놀라운 점은 초반에 쿠테타를 다 잠재울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냥 일부러 피해주고

일부러 피난받는 것처럼

오히려 저놈의 자식을 더 키워주는 꼴이다는 거죠.

 

그런데 시편 3편이나 4편이나

중간에는 완번 반대가 되는 겁니다.

꼭 로마서 7장과 8장의 정반대의 상황처럼 원인 없는 결과와 같이

그 어떤 연결 고리 하나 없이

단절된 그 상태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넉넉한 승리를 보여준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강조한 것처럼

왜 쓸데 없이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이것을 히스테리 증상 이라고 하는데

요랬다 조랬다

 

괜히 비참함 속에 거하고

오늘 시편 4편은 괜히 누가 선을 보일자 있느냐 라는 피해자의식을 보여주느냐 말이죠.

어차피 심판하는 것은 압살롬의 주장이 맞잖아요

 

법 대로 하더라 말이죠.

어차피 법 대로 할 꺼면서

 

왜 구지 하나님의 후회 눈물 한탄 이라는 것을
꼭 구지 기록하느냐 말이죠.

 

그래놓고 요랬다 조랬다

 

그래서 제가 청승맞아 보인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모라는 선지자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비록 자식이지만 그 속의 악마를 심판하는데는 일체양보가 없는 약속이지만

그 약속은 바로 비참함

아비로써 법으로 낳지 않았고 은혜와 자비로써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상한 마음을

부모라는 선지자는 보여줘야만 한다는 겁니다.

 

자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세계라서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십자가로 가시면 안된다고 말렸을때에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라고 하신 겁니다.

 

남을 7번 용서 하겠다? 법 추구입니다.

이런 법 추구 앞에서

오히려 770번 용서 받는 탕자가

 

맏아들에게는 불쾌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거룩이라는 아름다움은 결국 숭고한 거룩인 겁니다.

불편한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거룩추구는 이 불쾌함이라는 숭고를 빼버리는 그냥 아름다움 추구입니다.

 

형님이 참신기하다고 하나 또 물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다윗의 아들이 아름다운 머리카락 때문에 나무에 걸려 죽은 것을 보고

왜 머리카락이 그렇게 아름다웠고

왜 그렇게도 아름다운 얼굴을 남자가 했을까?

 

형님!!

 

은사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부족한 기술이나 모자라는 결핍을 채워주는 그런 기능이나 재주가 아닙니다.

 

은사란 상대적인 저들과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갈라놓기입니다.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서

이 사람이 날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죄는

자기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인가?

아니면 부모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이냐 라고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물었을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소경이 되었다고

마치 소경이 은사인냥 영광 돌리기 위함이라고 하니까

 

졸지에 건전하게 논하고자 하는 죄문제 라는 교리가

졸지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살벌한 복수의 현장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저 예수를 죽일꼬 하는 속내가 드러나는 현장이 되어버렸던 겁니다.

 

차라리 소경 되었다면 고침을 받을 것인데

소경이 아니다고 하니까 소경이구나 라고 하심으로써

 

은사는 있으나 마나 한 저들이 덮썩 무는 미끼로써 작용하는 하나의 얼룩과 같은 겁니다.

얼룩을 보면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 미치거든요?

아름다운 그림에 꼬추가루 덩어리 하나가 붙어있으면 당장이라고 빼버릴려고 노력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은사를 마치 결핍 채워주는 기술 부여 기능 능력 부어넣기가 아닌 겁니다.

 

사도들이 핍박 당하게 됨이 저들에게는 풍요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찔림이 우리에게는 나음이 되었다는 겁니다.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비참함 속에 거하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될 수 없습니다.

괜히 그렇게 되고자 하지 마세요. 위선입니다.

 

인간 밖의 인간을 보면 됩니다. 참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저 가짜 인간일 뿐이다는 것만 누리면 됩니다.

오직 참 인간, 인간 외부의 인간만을 쳐다보면 됩니다.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7번 용서하는 그런 마귀짖 하지 말고

770번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심판 속에서의 구원을 보라는 겁니다.

 

빼내시고자 말입니다.

 

어디서? 7번 용서하겠다는 세계로부터 빼내서

770번 용서 받는 예수 안으로 거하게 할려고

 

비참함 이라는 십자가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구원은 인간의 믿음이 아닌 여호와께 있기 때문에

다윗은 그 이유로 인간들의 믿음으로 부터 거부 당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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