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함 속에서의 구원 (시편 3)

 

상처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3:1, 개역)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3:2, 개역)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3:3, 개역)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3:4, 개역)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3:5, 개역)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개역)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3:7,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개역)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중에(삼하15:118:33)

적은 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한국인은 효 사상 때문에

불효자식 보다 더 골치 아픈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불효의 차원이 아니라

 

원수의 차원으로 까지 성경말씀은 불효보다 더 심하게 초과잉 오바를 하면서

과장하는 과잉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불효 보다 더 나쁘다는 거죠.

 

불효자식이여도 원수는 아니다 라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입니다.

자식이 원수다 라고 말은 분명히 말로 표현을 하지만 역설적으로 원수는 정작 아니다,

진짜 원수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진짜 원수가 맞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원수로 취급하면서 이 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자기 자식 압살롬 개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겨냥한 겁니다.

아니 왜? 개인을 전체로 확대할까요?

 

압살롬은 타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증상일 뿐입니다.

사울이 죽은 그 빈자리를 인간들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누구 하나 나타나 주길 바랬고 기다리고 기다린 압살롬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대변해 주듯이 등장했던 겁니다.

 

심지어 사울왕의 친척 사람 시므이가 마침 이런 말들을 합니다.

 

(삼하 16:5, 쉬운)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의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습니다. 시므이는 나오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삼하 16:6, 쉬운) 시므이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군인들이 빙 둘러서 다윗을 지켰습니다.

(삼하 16:7, 쉬운) 시므이는 이런 말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이 살인자야, 이 나쁜 놈아, 가거라,

(삼하 16:8, 쉬운) 네가 사울의 집안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너에게 벌을 주고 계신다. 너는 사울의 왕 자리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네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주셨다. 너 같은 살인자는 망해야 한다.”

(삼하 16:9, 쉬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왜 저 죽은 개만도 못한 자가 왕을 저주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제가 가서 저놈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습니다.”

(삼하 16:10, 쉬운) 그러나 왕이 대답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이여, 이 일은 그대들과 상관이 없소.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도록 여호와께서 시키셨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소?”

(삼하 16:11, 쉬운) 다윗은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판인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시오. 나를 저주하게 놔 두시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이오.

(삼하 16:12, 쉬운)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 비참함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말한 저주 대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나에게 복을 주실지도 모르지 않소?”

(삼하 16:13, 쉬운) 그리하여 다윗과 그의 신하들은 계속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다윗을 계속 따라왔습니다. 시므이는 길 맞은편 언덕 위를 걸었습니다. 시므이는 계속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돌과 흙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쫏아내는 위치가 아닌

정반대인 아들로부터 쫏겨남을 당하는 아버지입니다.

시므이가 그것을 꼬투리 잡은 겁니다.

과연 다윗의 단점인 것일까요?

누구를 겨냥한 겁니까? 누구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선취입니까?

 

지난 시간에 애굽이라는 함 땅과 이스라엘이라는 가나안 땅

그래서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에게 대적을 하는 강퍅함을 분노를 허사를 경영함을

예외 없이 나타낼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즉 노아가 자기 자식에게 그렇게 심한말을 하면서까지

저주를 원수개념을 나타냈다는 겁니다.

일반 아버지 개념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스라엘 내부, 한 민족, 한 국가, 내부에서

정작 하나가 아닌 둘이 그 동안 있었는데

드디어 물과 기름처럼 분리와 단절이 나타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자에 대한 대적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표출 되는 갈라짐입니다.

이 갈라지는 틈사이에서 창조의 은혜가 나타나는 겁니다.

 

괜히 비참함에 놓여지는게 아닙니다.

 

(삼하 16:12, 개역)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삼하 16:12, 공동) 혹시 야훼께서 내가 당하는 이 비참한 꼴을 보시고 오늘 받는 이 저주 대신에 복을 내려주실지 알겠소?"

(삼하 16:12, 쉬운)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 비참함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 말한 저주 대신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나에게 복을 주실지도 모르지 않소?”

(삼하 16:12, 킹흠정)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삼하 16:12, 한글킹) 주께서 혹시 나의 고난을 살펴보시고, 오늘의 그의 저주 때문에 주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실까 하노라." 하더라.

(삼하 16:12, 현대인) 어쩌면 여호와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시고 오늘의 이 저주로 인해서 나를 축복해 주실지도 모른다.'

(삼하 16:12, 현대어) 내가 지금 이 수모를 그대로 다 받으면 여호와께서 혹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시므이의 모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는지 누가 압니까?'

 

비참함, 고통, 원통함, 상처, 고난이 바로 구원이라는 틈 사이의 간극에서 창조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버지 노아는 선지자로써 약속에 대적함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표현한 겁니다.

진노 속에서 여호와의 긍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개 언약의 은혜성을 거부하는 강퍅한 함과 가나안을 저주한

그들의 원수성에 대한 강퍅케 하심이 애굽에서 표출되도록 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고 유대인들의 분노를 통해서 십자가의 영광을 다 이루신겁니다.

 

압살롬의 대적을 통해서, 다윗은 비참함 속에 놓이지만 그것이 바로 구원이 여호와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아주 좋은 기회? 사건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오늘 시편 3편은 좀 평상시와는 다르게 보입니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막상 다윗의 오늘 고백이 청승맞아 보입니다.

아들에게 쫏기는 신세라는 겁니다.

너무 너무 비참한 신세인 거죠.

 

한 순간의 방심? 아님 실수? 아니면 자신과 상관없이 악의 번성에 의해

비참함에 놓이는 겁니다.

 

아버지로써 차마 할 말이 없는 그야말로 비참함 속에 비참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치는 무의식적이다는 겁니다.

나의 뜻과 무관하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아니! 자식 교육을 잘못한 부모라면

자식을 엄하게 매를 대어서라도 호통을 치거나

호된 매로 다스리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아들에게 당하는 것 이상의

원수에게 당한다고

주여 제발 도와달라고

그것도 남도 아닌 자식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쫏기는 신세로써 말이지요.

 

그러나 노아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노아는 자식의 실수를 단순한 한번의 실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다렸다는냥 저주를 퍼붓는 식입니다.

 

내 너 그럴줄 알았지롱 옳지 옳지 내 기다렸다. 저주난 받아라 라는 식입니다.

 

그런 입장과 너무 비슷한 내용이 오늘 시편 3편이 아닙니까?

가시에 쪼매 찔린 것 가지고 온 오도방정을 떠는 것 같이

오바 액션으로 과잉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노아 사건과는 어찌 서로의 위치가 반대인 것 같지요?

저주 받은 놈이 저주를 하고

저주를 해야 할 자가 저주를 달게 받는 식입니다.

십자가 사건처럼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 전체는 성경말씀을 의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서로 서로가 자기가 옳다 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사사기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들 압살롬에 대한 것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 속에 압살롬과 같은 사고방식을 겨냥한 겁니다.

이미 사울왕을 통해서 다윗이 경험한 겁니다.

즉 이스라엘 전체의 사고방식에 대한 원수성을 지금 지적하는 겁니다.

이것 또한 오바 해석이 아니냐 말이죠.

 

개인 가정사의 문제가 이스라엘 전체의 앞으로 미래의 모습까지 다 담겨져서

표현되는 것으로써의 원수성이다는 겁니다.

 

뭔가 성경말씀 자체가 압살롬과 다윗을 배치시켜서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추어진 뭔가를 끄집어 내고자 끊임없이 정치의 판과 사건으로써 쉴새 없이 파고드는 겁니다.

 

노아가 함과 가나안에 저주를 예수님때 까지를 염두하고서 예언한 선지자였듯이

예수님 이후이 시대까지 더 확대 되듯이 예수님이 더욱더 뻥튀기로 부풀려 버리는 것이 십자가이듯이

 

다윗은 지금 개인 가정사의 문제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 역사요

인간의 전체 역사로써 뻥튀기 해서 들추어내는 선지자로써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역사를 보는 시선이 우리랑 정반대일까요?

마치 묵시라는 무의식을 의도적으로 형성하는 식입니다.

아니지! 무의식이라는 묵시(현실)를 의도적으로 형성하는 겁니다.

시므이가 많은 사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저주 하듯이
마치 노아의 아들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모습을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시 3:2, 개역)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시 3:2, 현대어) 『`하나님이 너를 구해 줘? 어림도 없지!' 이렇게 빈정거리는 자가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요. (셀라)』

(삼하 16:5, 쉬운<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다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나왔습니다그 사람은 사울의 집안 사람이었습니다그는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습니다시므이는 나오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삼하 16:6, 쉬운시므이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백성들과 군인들이 빙 둘러서 다윗을 지켰습니다.

(삼하 16:7, 쉬운시므이는 이런 말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이 살인자야이 나쁜 놈아가거라

(삼하 16:8, 쉬운네가 사울의 집안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여호와께서 너에게 벌을 주고 계신다너는 사울의 왕 자리를 빼앗았다그러나 이제 주께서 네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주셨다너 같은 살인자는 망해야 한다.”

(창 9:20, 개역)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개역)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개역)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개역)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4, 개역)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개역)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26, 개역)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개역)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강퍅케 만드시는 분은 결국 여호와 였다는 겁니다.

깨작 깨작 열받게 분노를 반드시 하도록 만드시는 것처럼

 

다윗이라는 선지자는 지금 자기 아들의 문제를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다 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듯이 원수성을 언급합니다.

걍퍅케 하듯이 말입니다. 분노케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고도 뭐 너희가 분노 안한다고? 뭐 너희가 강퍅하지 않을거라고?

 

하늘이 비웃는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웃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속을 빡빡 긁고 긁고 어쭈 이래도 화 안낸다고 어디 안내나 보자 라고 깨작 깨작 속을 긁는 겁니다.

 

즉 이것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자작극이다 라는 겁니다.

설사 비참함 속에 놓여져도 시므이의 저주처럼 저주 속에 놓여져도

이것이 주님이 벌리신 사건이기 때문에

주님이 혹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그 저주도 은혜로 돌아온다고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애굽의 재반복으로써 이스라엘 출, 출이스라엘로써 시편 2편이 언급이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출세상 출저주 출애굽 출악마 출이스라엘 출지옥은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데

그 외부는 정작 세상 속에서의 세상

저주 속에서의 저주로써 구원을 펼치는 겁니다.

 

애굽에서 출애굽 했건만 광야 속에서는 더한 애굽으로써 목이 곧은 이스라엘이였다는 것이 들통난 겁니다.

 

그러니 외부 개념이 아닌 비내부, 내부 보다 더 깊숙한 내부로써의 외부로써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인 남은자로써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속의 교회 로써 교회의 온갖 추악한 부패성과 무관함이 아닌

더 깊은 교회의 부패와 대적함을 거쳐서 교회 속의 교회로써 구원이다는 겁니다.

깨끗해서 구원이 아니라 너도 저런 썩어빠진 교회와 다를바 없는데

주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시겠다는 겁니다.

 

 

시편 3편은 왠지 노아언약을 상기 시키는듯한 모습입니다.

노아 개인 가정의 문제로만 보입니까?

다윗과 다윗의 자식 압살롬만의 문제로만 보입니까?

왜 개인의 가정사를 확대해석해서

 

마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인간들이 늘 꿈꾼다고

유대인들도 이 범주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 해석을 하시듯이 뒤짚어 씌우냐 말이죠.

 

이스라엘은 선민이다고 좋아라 했는데

저런 굴레에서 벗어난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무관심한 이방인 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 굴레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배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먼저 배반의 역사를 표출한 것일까요?

마치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라고 강퍅케 하시는 애굽의 상황과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이 별반 다를바 없는

 

약속이 벌리는 전쟁 앞에서 속속히 그 속내가 다 드러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누가 그의 손에서 벗어날수가 있단 말입니까?

 

다윗은 마치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냥 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예수님을 버리는 모습 또한 동시에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인간 자체의 분열입니다. 균열인 거죠.

 

왠지 엄살이 심하게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다윗의 입장에서는 심각합니다.

 

그럼 상대방 입장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뭔가 자식으로써 아버지 다윗에 대해 잘못한 것은 있으나

아버지 라면 용서해 줄만 한데

그렇지 않다 라는 겁니다.

왜 나의 개인 문제를 이스라엘 전체 문제로 확대 과장 증폭 시키느냐 말이죠.

압살롬 본인도 왠지 자신이 점점 미친짖을 하는 것도 인식할 겁니다.

사울왕에 대해서 모르진 않잖아요 그런데 점점 닮아 가더라 말이죠.

아버지를 닮는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더 아버지 다윗에 대한 살인의지를 더욱더 불태우고 있습니다.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는 거죠.

 

강퍅케 하시는 이가 따로 있기 때문이니까 말입니다.

 

정치로 인해 그 권력의 맛을 누리니까

중독이 되어 점점 빠져들게 되는데

자신이 주인공이 된냥 착각하겠지만(이것이 게임의 중독인 거죠.)

항상 이미 결과는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 결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자기가 원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결과가 부재가 되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세워진 자라서

여호와가 항상 옳았다고 이런 저주도 주님의 뜻이라면 달게 받을 뿐이다 라고

비참함을 오히려 긍정하고 있습니다.

즉 비참함 속에 비참함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긍휼 곧 은혜를 바라게 될 수 밖에 없는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미 원인 없는 결과를 봐 버렸기 때문인 거죠.

 

즉 이렇게 다윗이 격는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윗 본인도 역시나 예외상태인 겁니다.

다윗이 이 잉여성을 다를수가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저 압살롬에게 당하는 입장 뿐입니다.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는 방식으로써의 빛

 

자기 자식에게 왔는데 자기 아버지를 영접지 않는 방식으로써의 말씀

 

(1:1, 개역)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개역)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개역)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개역)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개역)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결국 말씀과 생명과 빛은 어두움과의 대조로써만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가?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십자가로써만 설명이 된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자체가 해석 불가능 하기에

불가능성으로만 증거 된다는 거죠.

 

지난 시간에 말한것처럼

진노로써만 증거되는 기름부은받은자

두려움과 떨림으로만 증거되는 기쁨과 즐거움의 복음

심판으로써만 증거되는 구원

 

오늘 제목처럼

비참함 속에서만 증거되는 복된 구원이

다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제목을 말이 비참함 이지만

다윗이 비참한 신세이지만

사실은 비참한 것은 다윗이 아니다 라는 것을 눈치 채셨지요?

그럼 누가 비참한 것일까요? 다윗을 쫏고 있는 압삽롬이요

압살롬으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원수 이스라엘의 비참함 이다는 겁니다.

 

다윗 하나 죽일려고 이스라엘을 전체가 허사를 경영하는 애굽의 강퍅함과 같다는 겁니다.

정말 비참함이지요?

 

나봇의 포도원 하나 빼앗을려고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는 비참함!!!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라고 해도

 

저쪽 조그마한 동네의 구멍 가게 하나 빼앗고자

가던 항공기까지 멈춰서서 나봇을 죽이고야 마는

모든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이런 악마성

 

얼마나 땅콩하나 빼앗고 싶었으면

자기도 모르게 뭔가 덮쳐져서 땅콩을 탐내는 겁니다.

 

자기 손에 아무리 땅콩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질수 있는 권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거죠.

얼룩이라는 응시물을 하나 만나버린 이상 기어코 죽여버려야

잠이 오니까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누가 더 비참함이다고요?

 

그러니 다윗이라는 미끼를 참지 못하고 덥석 물어버린 셈입니다.

 

다윗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구원의 역사가 비로소 발현된다고 외칩니다.

 

아니 방금 고통을 호소했는데, 원통함을 호소했는데?

그 고통이 사실은 마귀가 미끼를 덮석 물어버린 상황으로 빼도박도 못하도록

알리바이를 형성하면서 오바액션을 하는 겁니다.

 

진리는 과잉된 제스쳐에서 온다고 했던가요?

 

비참함에 놓여졌습니다 주여.

사방으로 원수들이 나를 애워샀습니다 라고 했던 것이 언제였습니까?

3초도 되지 않아서

이것이 구원의 역사 라는 겁니다.

 

비참함이 없다면 오히려 구원을 설명할 길이 없다 라는 식입니다.

 

그 비참함도 자신이 당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미끼를 설치한 함정이고

저들이 이 비참함을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비참함 속에 비참함인 거죠.

 

저에게 주님이 머리도 나빠 공부도 할 줄도 모르는데

책 한권에 꼿히게 하셔서

자본론 맑스에 대해서 맛을 좀 보게 하셨는데

(천하의 무식한 김대식이가 그 어려운 자본론을???)

자본론은 놀랍게도 돈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문제였다는 겁니다.

 

전집을 사고 싶은데 주님께서 책 사주시겠지요 ㅋㅋㅋㅋ

 

우리가 알고 있는 육적 유대인 문제가 아니라

진짜 잉여(자본)의 문제는 내적 할례인으로써의 유대인

곧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의 다윗이 결국 잉여의 참 의미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유대인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잉여 속의 잉여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

얼룩 속의 얼룩

 

돈 문제로써의 자본이 아닌

진정한 흐름으로써의

고정되어 고인물처럼 썩지 않는

늘 흐름을 만들어내는

아니다 흐름을 창출하는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닌 흐름 그 자체로써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자본 곧 잉여이다는 겁니다.

 

무능할수록 그 잉여성이 큽니다.

(무능 속의 무능)

 

자식에게 쫏겨다니면서 살아남을려고 미친척 거지인척 하는 왕

그런 왕이 비참하기는커녕(실제로 비참했지만)

오히려 흐름(전복적 잉여)을 창출하고

 

이스라엘 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은 마귀들이 심은 환상을 가로지르는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이라는 남은자 그루터기를 몰래 감추어놓은 겁니다.

 

다윗이라는 공인이 아무리 공개된 인물이여도 그 속에 예수 라는 씨앗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다윗을 닮고 싶어서 아무리 시편을 그대로 외워도

다윗이 시편을 통해서 그렇게 외쳤던 예수님을 아무리 봐도 못 발견한 것이겠죠.

 

소경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그 어떤 민족 보다 시편을 달달외워서 여호와에 대해서 잘안다 라고 했는데 정작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더 소경이였던 겁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인 원수들의 대적이

구원을 더욱더 구원답게 하는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더라 말입니다.

애굽왕과 그의 군사들이 강퍅케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짝꿍개념(정념)인 겁니다. 정념 곧 울림통 되받아서 서로가 주고 받는 핑퐁처럼 말입니다.

 

그 대적의 짝꿍들은 이스라엘과 압살롬이요

다윗의 짝꿍은 바로 여호와였던 겁니다.

 

그 짝궁되신 여호와께서 다윗은 의도적으로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쫏겨다니는 비참함 속으로 몰고가는데

 

마치 아버지 노아가 술먹고 벗은 몸을 미끼로

함과 가나안이 약속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게 함으로써

대적케 하고 강퍅케 하듯이

 

그 노아언약이 함땅 애굽에서 벌어지고

역시 가나안 땅 이스라엘에서도 벌어지는 겁니다.

그 수천년전의 노아언약을 기억도 못하는 가운데

주님은 실시하는 겁니다.

몰랐다고 핑계 될 수 없는

일방적인 편파 강행이 구원입니다.

구원의 뿔이 이렇게 모두다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지식을 쫏는다고 라고 하면 교만하다고들 표현하는데

지식을 쫏거나 쌓는 것은 지식 자체를 소유함이 아니라

지식이 만들어내는 잉여성 곧 빈자리 구멍을 뻥뻥 뚫는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을때에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지식 개념이 아니라

지식 자체가 지식(잉여)을 추구하면 할수록 구멍이 뻥뻥 빈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말려드는 거죠.

지식 자체가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겁니다.

지식은 결국 빈자리가 목적이였던 것이니

지식 소유하는 자는 빈자리를 소유하게 되니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는 거죠.

누가 손해 볼려고 공부하거나 지식을 쌓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지식 자체가 잉여적(결여성, 동시에 초과잉성)을 추구하니

인간은 그저 지식의 배치물인 겁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결국 지혜는 십자가 라는 빈자리였던 겁니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인데

오히려 가장 지혜로운 지혜

세상의 그 어떤 지혜보다 더 높은 지혜였던 겁니다.

어리석다는 것이 어떻게 세상의 가장 높은 깊은 넓은 지식이 되었을까요?

지식 스스로가 빈자리를 만들어 창출하여 흐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누구도 이 단절의 빈자리를 넘어설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채우기는커녕 말려들어서 그 구멍의 진가인 뻥뻥 뚫는 뿔의 위력만을 더욱더 맛볼뿐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참 다행이겠지만

대부분 강퍅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럼 누가 이들 애굽왕이든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든

누가 강퍅케 하느냐 말이죠.

지혜 곧 지식인 겁니다.

빈자리 그 자체인 지혜 곧 십자가입니다.

 

비참함은 결국 지식이 깔아놓은 배경인 겁니다.

구멍을 뻥뻥 뚫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구멍을 보고

이 응시물을 보고 다들 달려들어서

우겨쌈을 당하도록 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구원을 보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참함 속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는 은헤를 누리고서

그 증상으로써 표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벌리신 일이라는 겁니다.

 

사방이 원수들에게 애워 싸이는 비참함에 놓이지만

정작 그것이 여호와의 구원을

오른편에 서신 주님의 우편에 앉으심을 목격하게 되는

주의 사랑의 넉넉한 승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시편3편은 다윗의 처음 시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에게는 다윗의 시가 맞는가? 다윗이 작사자인가 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초반부터 이렇게 비참함으로 표현하는게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모양인데

 

오히려 이것이 다윗의 처음 시 다운 모습인 겁니다.

우겨쌈을 당함이 오히려 여호와의 구원의 승리가 넉넉함을 표현하는 거지요

 

어떻게 사도들이 도살장에 끌려 죽게 되는 것이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절망 밖에 없음이

오히려 주의 사랑의 넉넉함에서 끊을자 있으리요 라고 외칩니다.

역설적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지혜 지식이 이렇다 라는 겁니다.

너무 너무 전복적으로 역설적이다는 겁니다.

 

비참함 속이 오히려 주의 구원을 또렷하게

넉넉하게 명료하게 분명하게 명확하게

만개함으로 가득함을 충만함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외침이

오히려 비참함 속에서 우겨쌈을 당함 속에서의 외침이다는 겁니다.

 

비참함이 더 또렷한 여호와의 구원을 보여주는 것이다는 겁니다.

선취로써 말입니다.

 

주의 사랑의 넉넉한 승리가 비참함과 우겨쌈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톱에 몸이 짤리는데

누가 주의 사랑에서 끊울자 있느냐 라고 더욱더 당당하게 외치듯이

그들을 아무리 죽여도 칼로 위협해도 죽음으로 겁을 줘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주의 사랑에 감격해 끊을 자가 없게 되는

불난 집에 석유 끼얹게 하는 짖일 뿐임이 드러나게 되듯이 말입니다.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끊을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두고보자 라는 식으로

비참함 속에 우겨쌈 속에 도살장에 끌려가 개죽음 당하는 그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의 주 되심을 막기는커녕

더욱더 활활 타오르게 한다는 거지요.

 

저는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초반부터 뭐 이래? 왜 이렇게 우울한 거지 라고

별로 좋아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인기있는 드라마는 현실적인 사실을 다루었고

주인공이 일반 평사원이다는 점에서

또 현대의 청년들이 사랑한번 못해보고 연애도 못하는 입장이다는

그런 대변성을 나타내는 지금의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인기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흔한 사랑이야기 하나 없는 거죠.

 

즉 상대적인 드라마는 사랑의 관계를 집어넣어야 하고

회장() 중심과 지위와 권력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화 신데렐라

바로 환타지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에서

미생은 환타지를 배제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환타지를 아무리 제거했다손 치더라도

정치는 더 임금 중심 보다 더 치열하게 나타나더라 말이죠

철저하게 정치적인 드라마로써의 미생이다는 겁니다.

 

그 부분을 볼 때 고릴라였던가? 침팬지였던가? 우랑우탕이였던가?

과거에 티비에서 본 동물의 왕국이 생각났습니다.

 

아니 글쎄 그들의 정치적인 활동상을 티비에서 보여주는데

미생이 구지 인간이 아닌 고릴라가 할수 있는 것을 그대로 하더라 말이죠.

고릴라는 인간이 되지 못한 미생인가요?

완생이라는 인간 답게 사는 것을 꿈꾸는 것은 역시나 환타지 아니냐 말이죠.

 

환타지 라는 마약을 제거한다고 홍보하면서 역시나 마약을 보여주는 겁니다.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니 새로움보다 뻔한 어둡고 우울한 드라마인 미생이 인기 있었나 봅니다.

 

그런 우울함과 어두움의 절망과

오늘 본문 시편 3편의 비참함은

 

같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정반대인 180도 다른 이야기인 겁니다.

 

인간의 우울함은 미끼도 될수 없고

함정도 팔수 없고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지혜가 가장 높은 지혜의 최고의 사랑이 될수 없는

우울함이다는 겁니다.

 

막힌담을 헐기는커녕

막힌담을 더욱더 쌓는 식이다는 거죠.

 

현대인 곧 근대인의 피곤함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는 거죠.

원망과 원통함 복수심만 가득한 드라마가 미생이다는 거죠.

(물론 마지막회는 결국 환타지로 귀결이 되더군요. 인간은 꿈이 없으면 죽거든요.)

 

그 탓을 위의 권력자들 탓으로 돌리는 식인 겁니다.

 

더 테러 라이브(하정우 주연)에 나오는 대사처럼 범인이 모든 탓을 대통령탓으로 돌리는데

그러면 대통령과 같은 사고방식이 아닌 겁니까? 대통령과 자기는 다를까요?

자기 자신은 독재와 부조리를 과연 하지 않을까요?

나봇을 죽여서라도 포도원을 빼앗지 않을까요?

우리야 장군을 죽여서라도 밧세바를 취하지 않을까요?

 

대통령에서 뒤짚어 씌운다고 해서

자신은 깨끗하다는 것일까요?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세간의 입장이지

주인의 입장이 아닌 겁니다.

 

그저 도둑이 와서 주인을 결박하여서

세간을 빼앗고자 하는 사건

곧 구원의 사건만을 간담이 녹듯이

썩어문들어진 마음으로 기다르는 것 뿐입니다.

기다린다고 되겠느냐 라고 말 할게 아니라

인간 쪽에서는 그 어떤 것도 바랄게 없다 라는 뜻인 겁니다.

철저한 단절의 단절입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오히려 유일한 희망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단절의 단절이 유일한 희망인 겁니다. 폭력 속의 폭력 말입니다.

 

이 땅은 허사를 경영하는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자를 대적하는

강퍅함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이기는커녕 오히려 최전선에 앞장서서 나서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는 아들 압살롬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습인 겁니다.

그들이 다윗이라는 이 응시물에 이 다윗이라는 얼룩을 제거할려고

모두다 달려드는 모습인 겁니다.

 

이것이 구원의 승리이다는 겁니다.

 

이 얼룩이 바로 구원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잉여란 흐름을 만드는 것이라고 레비 스토로스가 여성을 예로서 설명했는데

얼룩이 유일한 소통의 흐름을 만드는 겁니다.

 

막힌 담을 헐어버는 것은 얼룩이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려냈다 라는 겁니다.

 

죽었는데 살았다는 겁니다.

비참함 뿐이였는데 구원이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다윗의 구원입니다.

다윗 자체의 구원이 아닌 예수님만 구원한다는 겁니다.

비참함 속에 놓여진 자는 너희가 죽인 예수

그 예수 뿐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

이스라엘도

아들도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그 예수를 하나님은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넉넉히 땅땅땅

삼일만에 다시 살려냈었다는 겁니다.

이 구원의 뿔이 다윗의 입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시편 3편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전개입니다.

비참함 속 뿐인데 어떻게 구원이 되었는가?

그 중간은 단절이요 단절이요 단절 뿐인데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8장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 제가 자주 언급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설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앞 뒤가 안 맞거든요

어떻게 그 곤고함에서 그 사망의 그늘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한탄하던 바울이

8장에서 느닷없이 주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고 이전 것은 다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합니다.

그 새 피조물 됨의 초과잉성은 8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런 주의 사랑에서 끊을자 누가 있냐고?

 

비참함 속에 넣어 볼테면 넣어보라고 당당함을 나타내는 겁니다.

 

끊어지기는커녕 더욱더 그 사랑의 불에 기름 끼언게 될 것이다 라고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런 구조와 똑같게 시편 3편도

괴롭힐려면 괴롭혀 봐?

과연 주의 구원의 역사를 끊을수 있는지 라는 당당함입니다.

 

 

(3:3, 개역)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3:4, 개역)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3:5, 개역)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개역)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3:7,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개역)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미 확정된 구원이라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들의 행동이다고 더욱더 매를 더 버는 말만 골라하는 겁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주의 사랑을 끊을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완료를 봤습니다.

 

예수님만 구원하시는 성경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의 구원을 넉넉히 이룬 겁니다.

그 잉여성의 여파가 반복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다윗도 얼떨결에 우연히 이 역사를 비참함 속에 놓여지면서 보게 된

행복을 누리게 된 겁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을 본 겁니다.

 

유대인들이 시편을 달달 외워서 시편 대로 살아도

때려죽어도 못 봤던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역사를 보고서 말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피해서 오는 구원

구원의 구원

구원 속의 구원

구원을 거부하는 구원

구원을 단절시키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다윗을 구원하는 구원을 피해서 오는 구원

곧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그 구원을

다윗이 외치는 겁니다.

 

비참함 속에서

곧 십자가 속에서 말입니다.


(시 3:1, 공동) 『야훼여! 나를 괴롭히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나를 넘어뜨리려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시 3:2, 공동)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 (셀라)』

(시 3:3, 공동) 『그러나 야훼여! 당신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들어주십니다.』

(시 3:4, 공동) 『나 야훼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들어주십니다. (셀라)』

(시 3:5, 공동) 『자리에 들면 자나깨나 야훼께서 이 몸을 붙들어주십니다.』

(시 3:6, 공동) 『적들이 밀려와 에워쌀지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

(시 3:7, 공동) 『야훼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느님, 구하여 주소서. 당신은 내 원수의 턱을 내리치시고 악한 자의 이빨을 부수시는 분,』

(시 3:8, 공동) 『야훼여, 승리는 당신께 있사오니 당신 백성에게 복을 내리소서. (셀라)』



(시 3:1, 쉬운) 『<아침기도-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부른 노래>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나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시 3:2, 쉬운) 『많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주시지 않을 거야”라고 합니다. (셀라)』

(시 3:3, 쉬운)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며,나의 영광이시고, 내 머리를 드시는 분이십니다.』

(시 3:4, 쉬운) 『내가 여호와께 큰 소리로 부르짖을 때, 그분은 그 거룩한 산에서 내게 응답하십니다. (셀라)』

(시 3:5, 쉬운) 『내가 저녁에 누워 잠을 자고, 아침에 다시 깨어나는 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3:6, 쉬운) 『수천 수만 명의 적들이 사방으로 나를 둘러싸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 3:7, 쉬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해 주소서. 내 원수들의 턱뼈를 부수뜨리고, 악한 사람들의 이를 부러뜨려 주소서.』

(시 3:8, 쉬운)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 주소서. (셀라)』



(시 3:1, 한글킹)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주여,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나를 대적하여 일어서는 자들이 많나이다.』

(시 3:2, 한글킹) 『많은 자들이 나의 혼을 가리켜 말하기를 "그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 하나이다. 셀라.』

(시 3:3, 한글킹) 『그러나, 오 주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들어올리시는 분이시니이다.』

(시 3:4, 한글킹) 『내가 내 음성으로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거룩한 산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도다. 셀라.』

(시 3:5, 한글킹) 『내가 누워 자고 또 깨었으니, 이는 주께서 나를 붙드심이라.』

(시 3:6, 한글킹) 『수만이 나를 대적하여 포위해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리이다.』

(시 3:7, 한글킹) 『오 주여, 일어나소서.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는 나의 모든 원수들의 턱뼈를 치셨으며, 주께서 악인들의 이를 부수셨나이다.』

(시 3:8, 한글킹) 『구원은 주께 있으며, 주의 복은 주의 백성 위에 있나이다. 셀라.』



(시 3:1, 현대인)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원수가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대적하는 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 3:2, 현대인)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나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 3:3, 현대인)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십니다.』

(시 3:4, 현대인)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가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시는구나.』

(시 3:5, 현대인) 『내가 잘 자고 다시 깨었으니 밤새도록 여호와께서 지켜 주셨음이라.』

(시 3:6, 현대인) 『수천만의 대적이 나를 포위할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 3:7, 현대인)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하소서! 주께서는 내 원수들의 뺨을 치시며 그들의 이빨을 꺾어 놓지 않으셨습니까?』

(시 3:8, 현대인)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에게 주의 복을 내리소서.』



(시 3:1, 현대어) 『[하나님께 의지하면;다윗의 노래-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 가야 하였을 때 지은 노래] 아, 여호와여! 이것에게 대드는 적들이 어찌 이리 많은지요.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기만 한지요.』

(시 3:2, 현대어) 『`하나님이 너를 구해 줘? 어림도 없지!' 이렇게 빈정거리는 자가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요. (셀라)』

(시 3:3, 현대어) 『그래도 여호와 주께서는 언제나 나를 지켜 주시고 어떤 위험이 밀려와도 막아주시는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나의 머리를 쳐들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시 3:4, 현대어) 『도와달라고 이것이 간청할 때 그러마고 거룩한 산에서 대답하며 지키시니 (셀라)』

(시 3:5, 현대어) 『아무런 걱정 없이 잠자리에 누워 자고 아침 되어 편안히 눈뜨며』

(시 3:6, 현대어) 『제 아무리 수많은 원수들이 이 몸을 내리치려 사방으로 둘러싼다고 해도 무서워할 것 없어라. (셀라)』

(시 3:7, 현대어) 『일어나소서, 여호와여. 오, 나의 하나님 구해 주소서! 제발 원수들 뺨따귀 후려치소서! 그 못된 것들 이빨을 부숴뜨리소서!』

(시 3:8, 현대어) 『승리는 오직 여호와께만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백성이 잘되게 하소서! 번영하게 하소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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