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예수님과 악인(죄인) 다윗의 꾀 (시편 1편)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오늘부터 시편을 시작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한번 해 볼까 하다가
갑자기 시편이 생각나서 시편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이 시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시편과 무관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히려 시편을 삶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유대인들 에게서 시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왜 예수님이 시편과 가장 무관한 자로 취급받았는가
가장 시편 대로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눅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개역)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개역)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것은 마치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아벨도 제사를 드렸는데
졸지에 아벨이 더 나은 제사가 되어버렸기에
가인은 아벨을 제사와 무관한 자로 취급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살인사건이 벌어졌듯이 말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하늘에서 직접 오신 분과
땅에서 하늘로 향하겠다는 인간과의 충돌에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하늘 이야기로 하다가
거짓말쟁이로 취급받아 죽은 사건
그 증거가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런다고 그 더 나은 제사가 취소가 되느냐 말이죠.
십자가가 취소 되겠는가 말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기에 인간의 제사가
과연 아무리 바르게 드려도 과연 열납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단번에 끝난 게임 오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제사를 바르게 해 본들 소용 없는 짖만 하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제사드린답시고
그것도 바르고 올바르게 드린답시고
무시해버린 단번의 제사를 자신들의 모호한 제사로 대처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취소시켜 버린 그 단번의 제사를 주님은 다시 살려내시더라 말입니다.
우리는 과거로 취급해 버렸는데 말이죠.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사랑의 시작
십자가 용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다 라고
왜 기쁜소식이냐?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이 하나도 안 기뻤다 라는 것이
그 증거로 엠마오로 돌아가는 예루살렘을 떠나는 모습과
사도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도 모른채
여인들의 예수님 부활 소식을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도 안 기뻤다 라는 겁니다.
사도란 예수님의 다시 사심만을 증거함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은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직접 하나 하나 찾아가셔서 직접 알려주셔야만 하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아니 웃기죠?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죽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사망의 권세에 짖눌려서 다 등돌리고 돌아서는 자를
하나 하나 일깨워주는 겁니다.
목숨을 빼앗긴 죽은 자가
죽을까 싶어서 목숨을 취한 가해자 살인자들을 도리어 살리는 깨우는 식입니다.
산 사람이 죽은 자를 깨워야 하는데
물론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죽은자가 도리어 살았다는 자를 깨우는 식이 되는
주객전도처럼 모순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진짜는 정작 가짜로만 취급받아야만 하고
가짜는 이 진짜만을 유일하게 가짜로만 봐야만 하는 그런 입장에서
가짜로 취급받은 자가
진짜라고 우기는 자를
도리어 살려주더라 라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시편을 복음서와 대조하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부분에서 다들 다윗을 좋아라 하는 입장에서
다윗을 따라하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다윗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라고 했을때에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복있는 사람은 이라고 기록된 시편말씀을 보고
자기자신을 복있는 자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들어갑니다.
누가 봐도 예외는 없습니다. 항상 자신은 무조건 좋은 쪽에 놓고 들어가는 겁니다.
반칙이지요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자신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들어갈 수 있느냐 말이죠.
이것은 교만이요 뻔뻔스럽고 자유를 빙자한 방종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와의 선언에서 비롯되었음을
다윗이 약속에 기대어 외치는 겁니다.
뻔뻔스럽게 말이지요.
뭔가를 거쳤던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삼일만에 살아나심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일방적으로 따라하기처럼 생각하다 보면
자신을 일방적으로 복있는자 라고 선언하는데 있어서
정작 악인 또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졸지에 복 또한 모호해져 버리는 겁니다.
악인은 누구인지 모른채 그냥 복만 딸랑 설정하다가
누구 하나가 나를 괴롭히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때서야 악인이 나중에 설정이 되고
그로인한 정당성으로써 복있는 자로써 나는 복의 사람 맞잖아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게 되는 겁니다.
안 그러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여 주여 제가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치니까
마귀가 나가 떨어지더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고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개역)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즉 원인 있는 결과를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가 자신을 복있는 자라고 설정을 하지
자신을 악인이다고 하겠습니까?
악인이면 복있는 자를 반드시 핍박하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니
더더욱 그러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입장에서 다른 차이성을 보인다는 겁니다.
즉 복있는 자 라고 했을때에
여호와의 일방적인 선언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악인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인 하면 다윗의 입장에서 사울이라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사라진 이후의 악인은 그럼 누굽니까?
다윗 자신 아닙니까? 그럼 복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야 장군 아닙니까?
그것을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버린다는 겁니다.
다윗을 빼버리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 빠져야 할 입장인 겁니다.
여자의 후손의 족보에 남자는 빠져야 하거든요.
14대 14대 14대 라고 해 놓고서는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버립니다.
바로 이런 삼의 간극을 무슨 수로 메우냐 말입니다.
이 삼이라는 간극을 거쳐서 보니
즉 다윗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보니
복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다윗은 복있는사람과 악인에 대한 구별성을 다르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그 악인에 대한것 조차도 누가 설정한 것인가
바로 여호와 이시다 라는 겁니다.
그 여호와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거쳐서 곧 죽었다가 다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을
다시 거쳐서 이 시편 1편을 보면
아니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을 거쳐서 보게 되면
유대인들의 실수가 바로 진리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놓쳐버린 것이 바로 진리였다는 겁니다.
누구를 놓쳤습니까?
예수님을 놓치고서 시편 1편을 보았기에
예수님을 거쳐서 시편 1편을 보면
다윗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정작 예수님을 놓치고 복있는 사람을 보았기에
다윗이 정작 예수님이 복있는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시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엉터리로 보는 셈입니다.
즉 시편 1편을 새로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새롭게 안 보이면
백날 봐도 예수님이 어디있느냐 라는 유대인의 실수를 그대로 격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도 그런 실수를 통해서
왜 저들이 놓쳐버린 예수님이
백날 봐도 안 보이는 예수님이
정작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 곧 유일한 딱 한분인 복있는자인지
왜 예수님이 진리인지를
다윗은 왜 아닌지를
오히려 다윗은 복있는 사람인 유일한 한 분 예수님을 보고서
증거하고 있는지
그 시편1편의 배후 인물을 놓치지 않고 다윗은 증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문자를 뜯어봐도 유대인들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시편1편을 적은 당사자 다윗은
예수님만을 적었다 라는 겁니다.
이 간극을 무슨 수로?
유대인은 간극도 안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실천으로 꽉꽉 채워버렸지
누가 그 간극을 벌리고 다시 채우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있는 자와 악인을 우리 멋대로 설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 놓쳐버리고서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다윗은 악인이 사울에서 다윗 본인으로 규정이 된 이상
복있는 사람을 새롭게 설정해야 합니다.
과연 누구 입니까?
다윗은 그 복있는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자 이런 입장에서 복음 곧 약속은 약속 스스로가 약속을 이루지
다윗이라고 해서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한치의 도움이 있었느냐 ?
없었다 라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사도라고 직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사도답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사도에게는 없다 라는 사실
이것이 사도 라는 의미이듯이
다윗이라는 이스라엘 왕직분으로써 이 시편을 기록함에 있어서
다윗 스스로 이스라엘 왕 다움이 단 한 개라도 있었느냐?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도 단절성이듯
다윗이라는 이스라엘 왕도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스라엘 왕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복있는 자가 아니라 무엇입니까?
목격자 바로 증인입니다.
(눅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개역)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개역)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복있는자가 누구인지를 보고서 증거하는 목격자 곧 증인
복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분입니다 라고 외치는 증인이다는 겁니다.
복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 그럼 여기서 복있는 사람을 볼려면
우리 또한 복있는 사람의 위치에서 봐야 합니까?
아니면 그 반대인 악인의 위치에서 봐야 합니까?
복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인데???
마치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단번에 드린 더 나은 제사를 볼려면
우리도 더 나은 제사를 늘 드리는 위치에서 입니까?
아니면 그 더 나은 제사를 전혀 기뻐하지 않는
엉터리 제사의 위치에서 이겠습니까?
차이성을 볼려면
곧 거룩성을 볼려면 말입니다.
이것을 복음서 곧 예수님에게 대조를 해 봅시다.
과연 복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윗이 복이 있는 사람 속에 있어서 봐야하는지?
아니면 차이라는 단절, 시차, 간극에서 봐야하는지?
이 차이, 이 단절, 이 간극, 이 시차를
어떤 철학자는 진리이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인물로써 말입니다.
약속의 민족인 이스라엘 유대인이
자신들을 선민 곧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써 복있는사람에 두다 보니
반드시 악인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놀랍게도 그 악인이 곧 예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알세불 걸린 마귀의 대 마왕 이라고 바리새인들이 붙인 것은
그냥 단순히 화가 나서
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화를 부추겨서가 아니라
그들의 교리나 신학과 성경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귀신들린 마귀의 왕이 아닐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들의 실수는 오늘날 모든 인간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 실수는 예수님을 악인으로 두었다는 것인데
바로 예수님이 진리였는데 말입니다.
실수가 진리이다는 겁니다.
실수 자체를 두고 진리다 가 아니라
실수로써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악인으로 두는 바람에
그래서 자기자신을 복있는사람으로 두는 바람에
예수님이라는 진리를 실수로 놓쳐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 실수가 바로 진리이다는 겁니다.
가장 단순한 예로써 안식일을 어기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나
성전을 헐라 파괴하라 라는 겁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성전을 삼일만에 세우겠다 라고 단서를 붙이지만
앞의 것이 틀렸다고 인식이 되어버린 이상
뒤의 것은 들을 필요조차도 안 느껴버리고
무슨 거룩한 성전이 장난감도 아니요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는 기적을 보여주는 교보재도 아닌 입장에서
예수님의 발언은 그야말로 성경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는
긴박한 위기감에서 십자가사건은 마땅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마치 정당방위처럼 또는 자동반사처럼 등장하는
전혀 예상한적 없는 우발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설마 나는 악인으로 몰아버려서
복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보게하는 원리
그런 약속의 원리를 누가 알아먹겠습니까?
복이 있는 자가 다윗이였듯이
다윗과 별반 다를바 없는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그런 복이 있다 라는 조건을 못 갖추겠느냐 말이죠
그래서 그 복이 있다 라는 조건들을 마구 마구 수집 끌어모아서
복이 있다 라는 정당성을 확보했거늘
정작 악인이 누구인줄 몰라서 찝찝한 그 여운을
마침 예수 라는 작자가 채워줘서
그 예수라는 악인을 악인으로 채웠건만
오히려 더 복이 있다 라는 것이 더 모호해져 버렸던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복이 아니였다 라는 것이지요.
복은 그야말로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원인이 없어야 합니다.
원인 부재
그런데 복을 다들 육체의 버릇대로
원인을 모으다 모으다 밑도 끝도 없이 모으다
결국 불안하다는 증거죠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복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라는 겁니다.
마치 유대인 곧 유다!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악한 이방여자로 몰아버리는 장면과 똑같은 식인 겁니다.
시편은 이렇게 저들에게 오해를 유발케 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중요한 것
바로 우리 자신을 바로 바로 악인으로 설정해서 예수님을 도출해 낼 수 있느냐?
그것 또한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결과가 부재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체가 원인이 있고, 결과의 부재로써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을 우리와 같은 인물로 볼 수 없게 되는
차이나는 인간인 겁니다.
그 차이를 우리 쪽으로 냉큼 오시오 라고 어서 오시오 라고 웅이아버지처럼
땡길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격었던 그 사건들을 우리가 격기나 하냐 말이죠????
다들 삼이라는 빈공백에 턱턱 막혀버려서
다 단절 당해 버리니까
비로소 본심인 살인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쩌다가 한번 비슷한 일들이 생기면
억지로 끼워맞춰서 다윗이 격었던 일과 일치하다고 우기지만
단순히 딱 하나가 아니잖습니까?
그의 삶 전체가 다 녹아져서 나온 것이 십자가 속의 그리스도인데
우리가 흉내낸다고 되느냐 말이죠.
그렇다면 그 빈간극을 채울수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모순입니다.
원인 과 결과 사이의 그 간극은
그냥 그대로 간극 그자체로 내버려둔채로
다윗은 복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원인 없는 채로 결과로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악인의 꾀로써 우리야 장군을 죽인 자입니다.
그런 자가 악인에서 복있는 자로 옮겨진 것은
바로 십자가의 용서를 거쳤다 라는 겁니다.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말씀 성취였지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도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도대체 이 모순의 간극 앞뒤가 안맞는 간극을 설명할 자가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그냥 그 빈간극 그대로 가는 겁니다.
설명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그 모순 그 불륜 이 말도 안되는 용서 그대로 가는 겁니다.
사랑은 가장 불합리한 말도 표현할 수 없는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복있는 사람 되기를 실천해서가 아니라
원인이 없는 채로 결과로써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다윗은 이제 거꾸로 소급해서
원인 없는, 원인 부재의 결과물을 누리면서
어디서 왔는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거꾸로 시편을 보자 라는 겁니다.
[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것은 결국
원인 없는 결과의
일방적인 선포 선언
빛이 있으라 라고 선포하는 약속 그 자체 인 겁니다.
결과적입니다.
그리고 왜 복의 사람인지는 후차적으로
그 차이성을 꽉꽉 채우는 식입니다.
삼각형의 꼭지점이 진리가 아니라
그 변이 진리인 겁니다.
간극과 시차
관계를 잇는 그 변
꼭지점이 아닌 변이 진리이다는 겁니다.
아 그래서 다윗은 복 있는 사람 맞군요 라고
일방적인 선포에 화답하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그래서 죄인 곧 악인 다윗을 불렀기에
의인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 당해서(예수 안에서) 후차적으로 의인이 된 것이지
다윗은 의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오히려 성경말씀이 더 적극적으로 밝히고 밝히고
또렷하게 밝히는 그 간극을 만드시는 것이 약속 그 자체이다 라는 겁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내용을 채우시는데 있어서
그 간극을 빈간극으로 채우는데 있어서
반발하는 세력이 나와주어야만
복있는 사람이 복 있는 이유로써 타당성을 더욱더 풍성하게 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미리 인간들이 다 조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악인으로 몰아서
자신들이 선민이요 복있는자임을 정당성 확보에 열심히였다고 ...
그 중에 한 사람이 사도바울 곧 사울이라는 청년이였지요.
자 이런 판국이니
가짜인지
진짜인지
과연 우리가 판단할수 있는 안목과 권리가 있느냐 말이죠?
나사렛 예수 라는 자가
어떻게 복있는 자가 될수 있느냐 말이죠.
나사렛에서는 선한 자가 나올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를 더욱더 언급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성하게 표현해 버리는 겁니다.
가짜 속에서 진짜이다는 식입니다.
오히려 진짜들 속에서는 진짜가 하나도 없는 가짜들 뿐임을 들추어내면서 말이죠.
아무튼 진짜 가짜를 우리가 가려낼 안목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인 없는 결과인 겁니다.
필연이 아닌 우발적이고 말이죠.
자 이런 서두를 깔고
오늘 시편 1편을 저는 마태복음 1장 곧 예수님의 족보와 연관시키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배경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입니다.
즉 가짜들에게 향한 복음입니다.
가짜 곧 유대인을 향한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참고로 이방인을 향한 복음이고요
이들은 원인 없는채 너희들은 구원받은자야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들어가는 식이니
유대인들 보랍시고 펼쳤으니 얼마나 약발을 올리는 것이겠습니까?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짜요
악인입니다.
상대적으로 유대인은 선민 곧 복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가 이를 뒤짚어 엎어버리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고 시작하면서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정작 보란 듯이 다윗을 빼 버리면
다윗의 자손이 안되지 않나요?
그리고 다윗을 빼 버리면 이게 무슨 말씀의 세계가 되느냐 말이죠
이런 반발을 오히려 더욱더 유발케 하기 위해서
14대로 세 번의 구멍을 뻥뻥 뚫은 후에
남자는 아무 쓸모짝도 없이
이 다섯명의 여자 에게서 다 채워버리는 겁니다.
다윗만 빠져야 할 판국이 아니라
머슴아 들은 다 빠져야 할 판국인 겁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된 적이 있다 없다?
없다
오히려 그들이 욕을 하고 무시하고 찌끄래기 취급한
즉 배설물 똥덩어리 쓰레기 취급한
그 여자들이 주객전도가 되어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는데
접붙임 역할을 했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이방여자가 말이죠.
즉 아무리 뜯어 보고 뜯어봐도
복을 받한만한 구석은 일체 유대인들은 없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님의 자리를 앉아버린 상태인
자기가 곧 하나님이 되어버린 겁니다.
심판자들 뿐입니다.
그럴 권리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복있는 사람이라고 미리 설정한다는 자체는
주님은 바로 그 악마성을 건드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다들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을 만난 것이 되는 겁니다.
다윗은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넘어져서 눈에 비늘이 벗겨져서 보게 되니(사도바울처럼)
내가 죽인 예수님이 바로 복있는 사람이였다는 겁니다.
이제 다윗은 증인으로써
이 복있는 사람이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와서
자신의 피 자랑
곧 십자가의 용서
곧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
그 간극을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을 목격하고서
증인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다윗은 그저 악인의 꾀를 부르다가
심판을 견디지 못한 자였음을 들통났고
그런 다윗이 의인의 회중에 들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움을 당한 것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도 똑같은 섬김의 배려를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누리는 차원에서 시편 1편을 우리는
그 삼일이라는 간극을 거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보게 되면
시편 1편은 예수님만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 눈에는 아무리 안 보이는 예수님을
다윗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목격자로써 말입니다.
무엇을 봐서 입니까?
그 간극을 봤기 때문인 겁니다.
동일하게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아무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 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만 빼고 다 등돌리고 도망치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는 곳만 빼고 다 갑니다.
부활만 등지고 가는 겁니다.
성경말씀 참 적나라 하지요?
우리는 감추고 싶은 사실을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자는 없었다 라는 겁니다.
예루살렘만 빼고 각기 제 길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예루살렘에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약속의 땅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장소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곳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서 또 다시 흩어집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흩어버립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이 아닌 곳이 없도록
모든 장소와 시간과 공간이 예루살렘화 되어서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흩어진 예루살렘인 것이 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무한반복의 장소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만개가 되어서
십자가 사건이 안 나타나는 곳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퓨리 라는 영화를 보면 이사야 6장의 나를 보내소서 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고 아하 했습니다.
그것이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독일군의 땅 속에서 독일인을 죽여야 한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미 이스라엘 속에 있는데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보낼 필요가 없이 이미 보내진바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왜 하느냐
확인작업과 같은 겁니다.
즉 강조 이중강조인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미 보내진바 된 이사야는
이제 이스라엘을 향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이스라엘 였다고
시편 1편은 바로 이스라엘 속에서
복있는 사람과 악인을 가르는 겁니다.
단 한 사람도 복있는사람이 없었다 라는 사건으로 인해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증인으로써 목격자로써 외치는 증거는
자기부인의 회개인 셈입니다. 시편 1편은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복있는사람 예수님은 다윗인 나의 꾀를 쫏지 않고
나 다윗의 죄의 길에 서지 않고
나 다윗의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그 말씀을 성취한 분입니다.
이 예수님은 시절을 쫏아 과실을 맺는 나무처럼
모든 만사가 형통하신 분입니다.
나 다윗인 죄인은 그렇지 않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심판을 견디지 못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예수님의 족보에 들지 못하지만
대저 의인인 예수님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분이지만
악인인 나 다윗은 마땅히 망해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 예수님만 옳으시면 됩니다.
즉 우리 모두는 유대인 외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은 예수님 앞에서
귀신들린 딸의 어미 그것도 더러운 이방인 여자와 같은 입장일 뿐인 겁니다.
다윗이 비로소 여호와의 긍휼을 보고서
그 긍휼만이 옳았다 라는 것을 외치듯이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주인의 긍휼 곧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 외에는
진리가 없다 라는 것을 외치는 것이 증인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복있는 사람으로 외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은 악인의 꾀를 쫏아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야 장군을 죽였을 뿐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찾아온 일방적인 용서야 말로
그 간극을 제대로 벌려놓는 시차라는 간극이 진리였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만의 용서만이 옳았다 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증거를 목격하는 증인으로써
다윗은 예수님만이 옳았다 라는 것을 외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유대인에게 안 보이는 소식
시편 1 편 어디에도 없는 전혀 기쁘지 않는 소식이
다윗에게만 기쁜 소식으로써 이스라엘 속에서 외쳐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악인 다윗도 넉넉하게 용서하는 십자가의 피 라고
시편을 시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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