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원수 예수를 사랑하라 (시편2)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1, 개역)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2,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2:3, 개역)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2:4, 개역)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2:5, 개역)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2:6, 개역)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7, 개역)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2:8, 개역)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개역)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2:10, 개역)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2:11, 개역)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6:35, 개역)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19:19,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2:39,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12:31, 개역)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원수라는 표현은 일단 거부감과 불편함을 줍니다.

반대로 이웃은 포근함과 따뜻함을 주는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원수과 이웃은 서로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좋게 느껴집니다.

그 거리감을 멀리 멀리 벌리면 벌릴수록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이 원수와 이웃 간의 사이의 가깝고 가까울수록 불안해 지는 겁니다.

 

이웃은 가까우면 좋지만

원수는 가급적이면 저 멀리

아예 단 한번도 평생에서 마주치질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마음을 뒤로하고

성경은 항상 원수 개념을 우리에게 늘 수셔댑니다.

동시에 이웃 개념도 늘 언급합니다.

 

즉 원수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웃개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이 설정하는 원수와 이웃개념은 늘 엉터리이다는 겁니다.

 

이웃개념을 원수 개념을 거치지 않고 설정하고

원수 개념을 이웃개념을 거치지 않고 설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럼 원수를 거쳐서 나오는 이웃은 누구인지?

이웃을 거쳐서 나오는 원수는 누구인지를

성경말씀이 말하는 원수와 이웃은 누구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인데

이것이 저에게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시편2편은 진노와 대적 허사 라는 단어가 눈에 확 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 본문을 보자마자

마태복음 21장의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무슨 연관이 있어서 떠올랐을까?

전혀 상관이 없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

왜 이 본문이 떠올랐을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또 그 본문만 떠오른게 아니라

대적이라는 의미에 의해

출애굽기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의 열방에는 각나라의 왕들이 있습니다.

왕이란 어떤 일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일!! 일까요?

 

답이 쉽게 떠오르질 않아 머리 아파 하는 가운데

뉴스를 보다가 아 이거구나

땅콩 일병 구하기 라는 내용의 뉴스를 보다가 생각이 난 겁니다.

 

즉 반대의 일을 통해서 왕이 하는 일이 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반대의 일은

왕들이 허사를 경영한다는 겁니다.

 

열방 곧 국가는 분노를 하고 있고

민족은 허사를 경영하고

군왕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한다고 합니다.

 

표현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국가는 분노를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모든 국가의 역사를 다 살펴봐도

분노가 끊이지 않을까요?

지금도 마찬가지

수 많은 국가와 열방 민족들이

늘 분노에 가득차 있습니다.

왜 분노 할까요?

여호와께서 강퍅케 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강퍅케 하지 않으면 절대로 분노치 않습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출 4:21,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7:3,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출 7:13, 개역)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개역)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8:19, 개역)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9:12,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 9:35, 개역)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출 10:20, 개역)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0:27, 개역)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출 11:10, 개역)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사를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 13:15, 개역)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8, 개역)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국가와 민족의 속성을 드러내는 왕이

결국 모든 국가와 민족들을 대변하는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가짜 왕이 저렇다면

진짜 왕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진짜 왕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 왕이 하는 일 곧 국가와 민족의 분노가 무엇때문인지를 알게 될 겁니다.

 

진짜 왕은 바로 저런 왕들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애굽왕 코 앞에서 다른 제사 곧 더 나은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강퍅케 하는 겁니다.
관심도 없는데 그 다른 제사가 뭔지에 대해서 때려죽어도 대조 비교하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꼭 코 앞에서 말입니다.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 제사가 그렇고
바리새인 코 앞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는 더 나은 제사 곧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유대인들도 결국 예수님의 다른 제사 곧 더 나은 제사와의 대조 비교 때문에
강퍅하기 싫어도 분노하기 싫어도 분노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 더 나은 제사가 바로 십자가의 피 흘리심입니다.

이 십자가 라는 더 나은 제사를 드리게 되면 인간들의 제사의 허사가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을 드리는 자만이 분노를 들추어내는 참된 왕이요 심판의 주 입니다.
 

그런 진짜 왕이 있을까요?

그런 진짜 왕은 바로 지난 시간의 내용처럼

 

(2:11, 개역)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만을 섬기며 떨며 즐거워 하는 왕이다는 겁니다.

 

즉 왕은 여호와로 인해 떨며 즐거워 하는 자 라는 겁니다.

 

왕의 할 일은 그럼 예수님으로 인해 떨며 즐거워 하는 겁니다.

왕에만 해당 되는 왕의 일이기만 할 까요?

아닙니다.

 

왕이란 국가와 민족의 증상물 표출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백성들의 마음을 대표적으로 대변하는 표출물 증상물이니

 

백성의 마음이 곧 왕의 마음이다는 겁니다.

왕이 지멋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백성의 속내를 대변하는 무의식으로 깔려있다는 겁니다.

 

왕만 제대로 세우기만 하고 백성이 개판짓을 더하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운다면

똑같이 그 대통령 또한 권력에 의해서

악한 왕이 기존 왕을 쫏아내고 세워지게 마련입니다.

 

결국 왕이란 허사를 경영하는 것과

여호와를 경외하고 섬기며 떨며 즐거워하는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것을 못 본척 한다면

여호와로 인해 떨며 즐거워 하는 자가 아니다는 거죠.

 

예수님으로 인해 떨며 즐거워 하지 않는다면

허사를 경영하고 분노하며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불문율입니다.

 

예외가 없이 여기에 다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시편 초반부터 이런 내용이 언급이 된다는 자체가

출애굽을 보면 알수 있을 겁니다.

결국 전쟁입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자는 반드시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도록 되어 있고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허사를 경영하는 자로부터 백성을 건지는 일

 

이 일을 왕이라는 자가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가 생각난 겁니다.

왕과 왕이 대적하는 기름부은 자와의 충돌은

결국 신들과 신의 싸움인 겁니다.

 

그럼 허사를 경영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까요?

간단하고 우리가 흔히 봅니다.

 

소위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복 개념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 자리가 섬기는 자리인지 아니면 권력만 탐하는 허사를 부리는지

 

미끼를 던져 보면 안다는 겁니다.

 

그 미끼가 기름부은 자입니다.

 

시편 2편을 보고 마태복음 21장의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와의 연관성은

 

어떻게 농부가 악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로 포도원 주인의 아들 곧 상속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그들의 숨어있는 속성을 비로소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아들을 농부의 속내를 들추어내시는데 사용하는 미끼로써는

너무 위험하고 무리수를 던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동시에 비유의 목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허사를 경영하는 것에 일체 양보가 없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악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편의 핵심은 여호와의 진노가 급하다 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사랑에 대해서는 일체 양보가 없다 라는 겁니다.

 

사랑은 투기처럼 강하다

죽음보다 강하며 투기와 시기와 같다 라고 합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여호와의 진노가 곧 여호와의 불이 사랑이다.

잔혹한 사랑이다 라고 한 것은

 

허사와 악한 분노, 강퍅함으로 기름부은자에 대한 대적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출애굽기를 소재로 해서 나오는 영화를 보면

대부분 인간의 정의성에 초점을 맞추어 모세를 조명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정의로움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에

여호와는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아니 누가 인간의 정의라는 애굽권력에 시비를 걸겠습니까?

아무도 그 권력에 시비거는 자가 없습니다.

 

유독 여호와만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아니 믿음이란 의미를 아무도 모르는 입장에서

믿음만이 이 허사에 대해 시비를 건다는 겁니다.

허구라는 초대형권력 소위 세상권세요 사망의 권세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애굽에 시비를 거는 자가 없는 입장에서 말입니다.

 

오히려 더 당당합니다.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진노가 급하게 임한다고 합니다.

 

제가 제목을 네 원수 예수를 사랑하라 라고 했는데

사실은 말이 안되는 제목입니다.

 

성경말씀에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되어 있지

예수님을 원수 라고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네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도 사실은 말이 안됩니다.

아무도 지킬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런 원수 개념을 거쳐서 이웃개념을 살펴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도

사실은 말이 안됩니다.

아무도 이웃은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왜 성경말씀은 이 불가능한 말씀을 그것도 실천하라는 명령어로 적은 것일까요?

 

지킬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어길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금기 자체가 어기는 것을 더 더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지키라 라는 명령어는 어기라 라는 결과가 무조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외인 자가 없습니다. 명령어에 걸려들면 다 이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는 육의 언어가 아닌 묵시언어이기 때문에

무의식을 장악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육이 아무리 실천해 본들 무의미 하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무의미한

하나 마나 한 것에 충성하는 것이 묵시입니다.

 

이런 묵시의 일방적인 편파적인 결과에

역사는 그냥 표출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했을때에

인간에게는 원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계속 끊임없이 원수 원수 원수 라고 집요하게 강조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드디어 원수를 활성화 시켜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왜 애굽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창세기에서 이들의 땅이 바로 함과 가나안 이 거주하는 약속의 적대관계를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놓여지게 되는데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출애굽기 이후에 가나안 땅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끝나기 까지

심지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기 까지

그 가나안 땅의 속성을 그대로 표출하면서

약속의 적대관계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애굽은 진멸했지만

가나안 땅은 여전히 그 속성이 끝까지 남게 되는 거죠.

 

자 이렇게 원수 개념은 주님이 설정해 놓고서는

그들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해 버리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애굽이라는 일방적인 원수를 하나님이 설정했지만

그 애굽을 치는 이스라엘 또한 애굽의 원수성과 별반 다르지 않게

가나안 땅 중심으로 그대로 펼쳐지게 되니

원수가 원수를 갚게 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손에서는 원수를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니까

정작 원수를 해결한 적도 없으면서

예수님이 무능하게 이 땅에 오심을 보고

예수님을 죽여버림으로써

원수로 몰아버리고 원수를 갚았다고 하는 겁니다.

 

힘있는 자 앞에서는 힘도 발휘해보지도 못하면서

정작 약한 자 앞에서는 힘과 신앙을 발휘하더라 말이죠.

이게 무슨 거룩을 행하고 실천한 것이겠습니까?

 

이웃 개념도 역시나 같습니다.

자기가 평상시 알아온 지인들과의 이웃개념은 이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저히 이웃으로 여길수 없는 불편하게 불쾌하게 하는 자를 이웃으로 삼아라

즉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했을때에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라는 거죠.

 

힘있는 자 앞에서는 굽신 거리고

약자 앞에서는 힘을 과시하는 원리와 같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의 활동상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행위에

시시비비를 다 걸어버렸기에

그야말로 딱 비기싫은 보기도 싫은 원수와 같았던 겁니다.

그런 원수가 늘 소동을 펼치고 돌아다니니

과연 사랑할 수 있느냐 말이죠.

더군다나 가장 소중히 여기는 율법과 성전을 자기마음대로 건드리니까 말이죠.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살인자도 아니고 밥먹듯이 살인을 펼치는자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유일하게 딱 한 사람만 죽이는데 열정적이였고

그 외에는 절대로 나쁜 짖을 더 이상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예수님이 알기 때문에

저들의 살인의지를 딱 한 부분에만 집중시켜서 죽임을 당한 겁니다.

그 한 부분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등등 유대인들이 살인을 벌리는 자가 아닙니다.

절대로 행동을 함부로 하는 자가 아닙니다.

 

어려분들이 그들과 한번 적어도 1개월 충분히는 6개월이나 1년 가까이 지내보세요

과연 예수님을 죽일수 있는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꿈에도 상상 못할 겁니다.

 

자 이렇게 원수나 이웃 개념을

과연 인간이 찾아낼수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수시로 원수 개념과 이웃 개념이 바뀌는 입장이다 라고만 몰아 붙일게 아니라

인간 자체에서는 원수 개념이 없다니깐요.

고로 이웃 개념도 역시나 없습니다.

원수 개념이 있어야 그 원수로부터 끄집어냄을 당하게 되는

도움을 주는 이웃 개념이 생길 것인데

 

원수 개념이 있어야 뭐 이웃을 보기나 할 것이니 말이죠.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더 어려운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 원수 개념은

로마일 것입니다.

과거 애굽과 같은 존재가 로마일테니깐요

 

그런데 그 원수 로마를 모두다 겨냥한 입장에서

각종의 파들이 형성되어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입장에서

로마가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원수 로마와 손을 잡고 예수님을 원수로 잡았다는 점입니다.

 

얼마나 어렵지 않나요?

저는 이 부분이 너무 어렵습니다.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4:27, 개역)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4:28, 개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4:29, 개역)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4:30, 개역)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27절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지키기 위해서

율법에 평생을 바치던 자들도

한 순간에 원수를 예수님으로 설정하는데 있어서

자기들 원수라고 우겼던 빌라도와 합동하여

예수님을 원수로 삼았다는 겁니다.

 

우리 솔직하게 이 본문 인정할까요?

아마 교회 다닌다고 해서 인정하기는커녕 더욱더 거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인정 안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도리어 어기라고 준 겁니다.

제가 어기라고 주었다고 하니까

어기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겨 일부러 새삼스럽게 어길려고 하는데

못지킨다는 불가능성의 단절성과

그 단절성을 지키겠다는 행함의 당위성은 다른 의미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것은 나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이 말씀을 누가 이루는가를 봐야할 입장에 놓여졌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긍휼을 바라는 자 라는 겁니다.

 

어차피 못 지킬 명령어 라면 내 멋대로 살아야지 가 아니라

내가 못 지키기 때문에 누가 지키는가 라는 소망이 새롭게 생기는 겁니다.

나는 비록 단절되었고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지만

그 절망 속에서

제대로 된 소망을 본다는 겁니다. 이것이 절망 속의 절망

부정의 부정

폭력 속의 폭력

종말의 종말이다는 겁니다.

 

그 분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알고보니 내가 원수로 몰았던 그 예수님이

나 라는 원수를 제대로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 사랑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원수와 이웃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는 내가 못 밖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관한 십자가가 아니라 말이죠.

 

내가 허사 허구 곧 엉터리 메시아

마귀가 심은

원수가 심은 엉터리 메시아에 빠져서

허사를 경영하고 헛된 율법 지키기에 빠져있을때에

십자가 라는 사건이 모든 시뮬라시옹의 껍데기를 벗겨버리더라 라는 겁니다.

 

오죽 제대로 벗겨버렸으면

지금 한국교회나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나 카톨릭이나

모두다 이 십자가 사건을 시뮬라크르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황금십자가로 포장하면서 말이죠.

 

허사를 경영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말이죠.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조상의 잘못된 일을 따라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정작 조상의 잘못을 마저 채우는 짖을

더 적극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절대로 우리는 그런 일을 안 한다고 하겠지만

복음은 이미 너는 그런 구조 속에 놓여졌다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 외부에서 나를 지적하는 것을 봐야 하는 겁니다.

 

그 지적이 바로 마태복음 21장의 종말의 상황 곧 하나님 나라 비유인 겁니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구약에서 조상 유대인들이 벌렸던 일이 자신들에게는 반복이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이 본문을 보고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일은 더 이상 반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나라의 비유는 이미 그 사건의 상황

즉 종말의 사건의 상황에 놓여졌기에 우리가 직접 실천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이 종말 속에 놓여진 나와 무관하지 않는 나와 상관이 있는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은 종을 어떻게 대적할까요?

나는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요?

내 속에 마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애굽왕 파라오왕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빼앗고자 나복을 죽이는 아합 왕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아름다운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빼앗고자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이는 것이

다윗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1:6, 개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래서 마태는 일부러 유대인의 영웅인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야 장군을 집어넣는 겁니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유대인들의 이런 뭘 해도 죄 밖에 안되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닌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 속에 허사를 경영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아합 왕 만의 일이 아니라

다윗 또한 역시나 그 범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이 예외 없이 걸려들었고

왕이란 결국 백성의 대변성이기에

유대민족의 속성이 악한농부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의 본성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용서하시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나의 외부인 예수님의 일이였다 라는 겁니다.

동시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도 나의 외부인 예수님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도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자 라고 할게 아니라

그것이 강요가 되고 법이 되면 결국 그 원인 있는 것 때문에 결과가 날라가 버리고

인간 자체가 또 모호한 조직체의 똘마니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못 지킴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이 결과가 와버렸다면

나의 외부에서 누가 이런 일을 결과적으로 달성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은 이런 단절성을 외치는 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원인 없는 결과가 긍휼로써 덮쳐졌다 라는 겁니다.

이 긍휼은 이해불가며 원인없는 결과이며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단절성인데

이것이 설명이 가능해져 버리면 결국 종교화가 되어버리는 교리 플러스 실천이라는 불교가 되는 겁니다.

 

그래되면 바리새인처럼 성전 안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더 이상 죄 죄 죄 카지 말고 죄인 죄인 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와 반대로 세리는 성전 안에서 단절성을 보게 됨으로써 긍휼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뭘해도 죄 밖에 안되고 뭘해도 다 원수짖 밖에 안되는데

그런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원수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의 믿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자 네 원수 예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은 제가 역설적으로 표현했지만

정작 우리가 예수님을 원수로 몰아서 죽인 십자가사건을 염두한 것입니다.

이런 원수짖만 골라서 해 놓고서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자 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제발 원수를 사랑하지 맙시다.

제발 나의 이웃을 나의 몸 같이 사랑하지 맙시다.

 

오히려 나 같은 원수를 사랑하는 내가 원수로 몰아버린 그 원수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합시다.

나 같은 원수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예수님이라는 이웃을 사랑하십니다.

유일한 이웃은 예수님 뿐입니다.

즉 이웃을 사랑할려고 하지 말고

말도 안되는 나를 이웃 삼으신 나를 이웃으로 삼은 분을 사랑합시다.

 

왜 예수님은 나의 대적자로 오시는 것일까요?

원수도 이웃도 자기의 유익대로만 설정하는 우리에게

미운오리털 밖힌 원수로 오셔서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시는 허사를 경영함으로써

여호와의 기름부은 대적할 수밖에 없는 자로 오시는 것일까요?

 

아무도 우리의 어두운 때문에 그가 질고를 진다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는다고 여겼고 뒤짚어 씌웠습니다.

 

바로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숨은 모습으로 오시는데

과연 무슨 수로 길거리에서 아들을 보고 입맞출수 있겠습니까?

무슨 수로 하나님의 급박한 진노를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새롭게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진노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진노 속의 진노는 정작 전혀 진노스럽지 않은

예수님 자신이 묵묵히 지고 가시는 십자가 였습니다.

우리는 고성 고함으로 그 십자가가 나에게 닥칠까봐

예수님에게 어떻게 해서든 뒤짚어 씌울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긴박하고 급한 진노는 정작 예수님이 지시는 겁니다.

아무리 급한 진노라고 해도 우리는 의식 자체를 못하는 무감각한 자일 뿐인데

오히려 예수님에게 급하게 십자가의 저주를 뒤짚어 씌우는데

일사천리로 처리했습니다.

 

그런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오히려 우리를 용서하시는 겁니다.

진노 속에서 보여준 용서인 겁니다.

 

이 용서를

나의 원수를 사랑하는 실천력으로 증거하는게 아닙니다.

이 용서를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행함으로 증거하는게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7번 용서를 해서가 아닌

정반대로 770번 용서를 받음으로써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저들이 손가락질 할 겁니다.

아무 증거 안된다고

 

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증거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 증거하는 겁니다.

 

하나 마나 한 것에 충성합시다.

바로 7번 용서하자가 아닌

770번 나처럼 용서 받으세요 라고

 

이 말이 왜 차이가 나는고 하니

유대인이 베드로처럼 7번 용서 하자 몇 번 더 용서할까 라는 교리입니다.

그들의 교리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7번 용서 하자 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종교는 딱 이거 하나입니다.

그래야 천국 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노를 통과 못합니다.

복음은 딱 하나입니다.

정반대입니다. 행함의 정반대인 믿음입니다.

여러분 나처럼 770번 용서 받읍시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과 합동으로

기름부은 받은 종 예수를 거역한 겁니다.

사도들을 잡아서 어쩔수 없이 풀어주면서까지

제발 이것만은 외치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7번 용서하자 는 유대인도 외칠줄 알고 이방종교 모두, 또 대표적인 불교도

다 외치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역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때려죽어도 못 외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770번 나처럼 용서 받읍시다

바로 우리가 죽인 예수님으로부터 말입니다 라고 하면

그들은 제발 이것만은 외치지 말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도 제발 이것만은 외치지 말라고 합니다.

제가 경험해본바 모든 교회가 다 그랬습니다.

 

제발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살리셔서 주의 주가 되게 하셨다

고로 770번 용서 받자

 

라는 소리를 교회가 가장 거부하면서 제발 제발 외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허사를 경영하는 모든 국가와 열방의 민족들

그리고 그것들의 증상인 왕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전쟁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시편은 바로 전쟁 전에 미리 나팔을 불며 이미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노래입니다.

전쟁 선포의 노래입니다.

 

이미 주님은 이기셨습니다. 무조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그럼 주님의 이 십자가 전쟁에 누가 패할 수밖에 없는가를

시편 초반부터 선언하는 겁니다.

 

살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레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승리가 무조건적인 승리 일 수밖에 없는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급하신 진노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즐거워 하면서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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