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시편 10)

 

고아 인듯, 고아 아닌, 고아 같은 왕!!

(
10:14, 개역)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0:1, 개역)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2, 개역)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10:3, 개역)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10:4, 개역)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10:5, 개역)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10:6, 개역)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10:7, 개역)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10:8, 개역)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10:9, 개역)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10, 개역)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0:11, 개역)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0:12,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0:13, 개역)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0:14, 개역)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0:15, 개역)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10:16, 개역)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0:17, 개역)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0:18, 개역)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0:1, 공동) 야훼여, 어찌하여 멀리 계십니까? 이토록 곤경에 빠졌는데 모르는 체하십니까?

(10:2, 공동) 악한 자들이 으스대며 미약한 자를 박해합니다. 저들이 던진 올가미로 저들을 덮치소서.

(10:3, 공동) 악한 욕망 품고도 자랑스레 뽐내고 탐욕으로 악담하며 야훼께조차 코웃음칩니다.

(10:4, 공동) 악한 자 우쭐대며 하는 말, "벌은 무슨 벌이냐?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그의 생각 전부입니다.

(10:5, 공동) 당신의 심판은 아랑곳없이 날이면 날마다 그의 생활 흥청거리고 반대자를 비웃으며,

(10:6, 공동) "내가 망하는가 두고 보아라. 나에게 불행이란 없으리라." 하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10:7, 공동) 내뱉으면 저주요, 입 안에 찬 것은 거짓과 폭언,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뿐입니다.

(10:8, 공동) 마을의 길목을 지켰다가 죄없는 자 쳐죽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엾은 사람을 노립니다.

(10:9, 공동) 숲 속에 숨은 사자처럼 불쌍한 놈 덮치려 불쌍한 놈 기다리다가 그물 씌워 끌고 가서

(10:10, 공동) 죄없는 자를 치고 때리며 가엾게도 거꾸러뜨리고는 하는 말이,

(10:11, 공동) "하느님은 상관없지. 영영 보지 않으려고 얼굴마저 돌렸다."

(10:12, 공동) 일어나소서. 야훼 나의 하느님, 저들을 내리치소서. 가련한 자들을 잊지 마소서.

(10:13, 공동) 악인들이 어찌 감히 당신을 깔보며 "벌받지 않는다."고 뇌까릴 수 있사오리까?

(10:14, 공동) 이 서러움, 이 억울함을 당신은 보셨습니다. 손수 그들을 붙들어주시니 당신은 가엾은 자들의 의지이시며 고아들의 도움이시옵니다.

(10:15, 공동) 저 악하고 못된 자들의 팔을 꺾으소서. 저들의 죄 사정없이 물으소서, 깨끗이 벌하소서.

(10:16, 공동) 야훼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오니 뭇 나라가 주의 땅에서 사라지리이다.

(10:17, 공동) 야훼여! 당신은 미약한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 마음 든든하게 해주시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10:18, 공동) 억눌린 자 고아들은 권리를 찾게 하시고 다시는 이 땅에 겁주는 자 없게 하소서.

 

 

지난 시간에 십자가 곧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는 반드시 인간의 꾀 곧 악인의 꾀, 마귀와 반드시 맞물려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냥 십자가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즉 이 말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간 구원을 목적으로 삼는 인간의 꾀, 마귀의 노림수와 맞물려서 상대적인 대조로 나타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마귀 곧 인간의 꾀는 이 십자가를 무지 무지 싫어하도록 되어 있고

십자가는 그런 인간구원론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이원론을 인간은 본성상 싫어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구하는 기적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구하는 기적에 상대적으로 맞물리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세상은 기적을 갈구 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니체나 들뢰즈의 사상에서 말하는 긍정성입니다. 초인사상인 겁니다.

저는 초인이 단순히 니체의 영향으로 인한 슈퍼맨을 낳은 사상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주 단순한 내용이고

초인은 바로 유대인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 만큼만 볼려고 하고

아는 것 만큼만 아는

그래서 믿고픈 것만 골라서 믿는

이런 내용을 니체가 인용하면서 그의 사상에 그대로 쓰며들었는데요

그래서 무한긍정 무한창조 무한도전 무한리좀으로써 한계점을 없애버릴려고 한 것이

바로 초인 사상 즉 위버맨스 겸손한 자 라는 겁니다.

 

한계란 없다는 거지요

이것은 결국 반작용으로써 유대인들은 늘 한계점에 부딧히는 운명을 타고난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계점을 불평할게 아니라 긍정해서 보는 시선을 가진 것이 유대인이라는 거지요.

유대인은 유대인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지극히 잉여적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이 잉여성이 얼룩으로써 작용함에 있어서 감당할 길이 없어서

자신들의 걸림돌로써 작용하는 거지요.

 

지금 현대철학은 이상하게도 이 유대인에 대해서 잉여성으로 또는 대상 소문자 a

실재계로써 작용하는 현실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의 고아 였습니다.

그들의 처음 자리는 무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가장 미약한 백성

가장 적은 소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이스라엘 속에서 다시 고아가 발생하고

가장 미약한 자가 발생하는 분절이 생겨버린 겁니다.

즉 처음자리에서 다시 더 더 더 처음자리가 발생했다는 겁니다.

 

고아 속에서 고아가 또 발생했다는 겁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미 가장 밑바닥인 가난한 자들인데 그 보다 더 밑바닥인 가난한자들이 그들 가난한자 속에서 발생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앞의 가난한자는 더 이상 가난한자가 아니게 된 겁니다.

더 이상 고아가 아닌 셈이다는 겁니다.

더 더 더 가난한자가 부자 속에서가 아닌 가난한 자 속에서 발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적만을 쫏는 백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 속에 요나의 표적이 또 발생해 버리니까

앞의 기적은 가짜 기적 곧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또 다른 이스라엘의 발생으로 인해서

앞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닌 가짜 이스라엘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 이다는 겁니다.

 

 

제가 한번은 서점에 갔는데 찾는 책이 없어서 머슴쩍어 그냥나오기도 뭐해서 값싼 물건을 하나 샀는데

그것이 바로 아주 작은 신약성경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부록으로 시편과 잠언이 있습니다.

네 눈치 채셨지요

우리는 수 많은 성경책을 서점이나 아니면 교회나 심지어 집에서도 많은 다양한 성경책이 있는데

그 중에 흔히들 가지고 있는 작은 성경책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아마 제가 고등학생때에 주변에서 주는 성경책도 작은 신약성경인데 거기에 반드시 시편이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 시편이 포함되었을까?

그냥 단순히 쉽게 생각하면 기도문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으로 치면 어릴적부터 달달달 외우고 다니는 것이 시편인 겁니다.

시편 그대로 오신 예수님이니까 시편이 그야말로 기도문으로써 딱인 거죠.

그러니 처음 믿는 분들에게 안성맞춤이다는 취지인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것 보다.

이 시편이 마치 주의 기도문에 상대적인 이방인의 중언부언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편이 이방인의 중언부언이라고?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시편이 반드시 이방인의 중언부언처럼 사용될 수 밖에 없도록 인간들은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주의 기도문도 결국은 이방인의 중언부언이 되어버리는 식과 같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주의 기도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주의 기도문이 졸지에 중언부언이 되어버렸다고

 

물론 주의 기도문을 인간들이 아무리 중언부언만들어도 중언부언이 되지 않지요.

그러나 인간은 마치 주문 외우듯이 주의 기도문 뿐만이 아니라 시편

심지어 성전도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기능도

교회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결국은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본능인 겁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장사하는 곳 이듯이 말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잖아요.

 

안그럴 재간이 과연 인간에게 있을까요?

없다 말이죠.

안그런 교회 있으면 말해 주세요.

 

나름대로 다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자들도 결국은 돈 이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시편은 그야말로 함정을 파 놓은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정을 파 놓은 악인과 같다는 말이냐?

아뇨

인간의 꾀가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 듯이

인간이 파 놓은 함정에 인간이 빠지는 또 다른 더 큰 함정이 시편이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실지로 시편을 지금까지 10편까지 보면서 놀라운 점은

이상하게도 뭐든지 과잉된 오바를 지나치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뭔가 이상하다 또는 언발란스하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고

아주 아주 부자연스럽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나는 부자연스러울 거야 그러니 빨리 눈치채야 해 라고 시편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그런고 하니

가장 크게 도드라진 모습이 바로(노골적으로 자수하듯이 티나게 하는 점이)

이 시편들은 대부분 다윗이라는 개인으로 모아지고

동시에 개인이 아닌

개인 인 듯 개인 아닌 개인 같은 다윗인데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저자들은 대부분 왕들인데

바로 이 부분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시편연구한 것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 공부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또렷하게 드러나는고 하니

왕인데 왕이 마치 궁시렁 궁시렁 거리는 듯한 소리

앓는 소리를 하더라 말이죠.

 

다들 왕이란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아무도 건드리지도 못하잖아요

최고의 권력과 최고의 부와 최고의 부러움 최고의 높은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시편 기자들을 보면

이건 왕인데 왕이 인 듯 왕이 아닌 왕 같으면서도

그야말로 개차반 벌레 보다 못한 처지에 놓여진

철저한 모순의 모습을 보이더라 말입니다.

네 바로 그겁니다 제가 말하고픈 것은

이 모순적 간극입니다.

왕인데 최고의 권력자인데

오히려 가장 거지 최저의 거지 중에 거지인 상거지가 시편 기자들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을 보여주는게 아닙니다.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은 오히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 집단성이면 다수성이어야 하는데

다수성이 아니라

철저한 소수성으로써 집단이니까

오히려 다수성의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로써

다윗은 개인이 아닌 집단을

곧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증거함으로써

이것이 바로 누구의 운명

예수님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집단(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이 지금 울부짖고 살려달라고 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거죠.

욥기를 봐도 그렇습니다.

한 개인의 욥이 고난을 격어서 울부짖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욥 속에 이스라엘이라는 집당성이 울부짖는 겁니다.

그런데 욥 바깥의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욥을 공격하더라 말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처럼 지금까지 살펴본 시편 1편에서 9편까지의 다윗이 당하는 모습이

다윗 개인이 당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당하는데

이 이스라엘 전체는 사실상 다윗을 공격하기 바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 전체가 당하고 있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겁니다.

 

껍데기 이스라엘 속에서

껍데기 교회 속에서

참 이스라엘이 당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유대인도 유대인의 의미를 알 길이 없는

예수님이 비밀이듯이 졸지에 덩달아 이스라엘도 유대인도 교회도 비밀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도대체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거죠.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7번 남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꾀요

인간들이 주장하는 필연성인데

곧 인간과 인간끼리의 비교인데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드리기 인데

 

770번 도리어 용서를 받아야 할 판국은

예수님과의 비교로써 우연이다는 겁니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그냥 결과로써 원인이 부재인 겁니다.

저쪽은 결과가 부재로써 원인만 가득할 뿐이고 말이죠.

그러니 제사와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로써

세리는 긍휼만을 바라는 겁니다.

맏아들이 아닌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겁니다.

 

자 이 둘의 간극적 차이입니다.

 

그러니 시편은 그냥 주어진 원인 부재의 결과인데

인간은 이 결과를 인간의 꾀를 삽입시키다 보니

시편 자체를 원인으로 삼아버리는 바람에

마치 7번 남을 용서하듯이

어릴적부터 달달달 외워버려서

이 시편을 지킬려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반드시 시편을 외운자들의 손에서만 반드시 죽으시러 왔다는 겁니다.

 

이야 이 무슨 모순성입니까?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을 정도로 가장 부조리한 스캔들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과연 쳐다볼수 있겠냐 말이죠.

 

모세가 장대 높이 든 구리놋뱀 쳐다 본다고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가 물러가겠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닙니까?

뒤늦게 혹시라도 해서 쳐다보고자 해도 고개가 안 돌아가는 겁니다.

다른 것을 보는데는 고개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데

인자가 높이 달린 모습은 안 돌아가는 겁니다.

아무리 해도 말입니다.

 

바로 그런 기능으로써 작용하는 것이 시편이다는 겁니다.

 

쳐다 봤기 때문에 안죽는게 아니라

(쳐다봄이 고침을 받게 된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로 주어졌고

안쳐다봄이 죽게 된다는 그 어떤 결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인으로 주어진 겁니다.)

 

결과가 원인 곧 쳐다보는 원인으로 나타난 고쳐주심이 아니다는 거죠.

십자가는 그냥 애초부터 결과로써 온 겁니다.

십자가 쳐다본다고 낫는게 아니라 말이죠. 결과로써 이미 주어진 겁니다.

시편도 결국 그런 겁니다. 결과로써 주어진 겁니다. 원인이 아니라,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편이 그렇다면 모든 성경은 결국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오신 겁니다.

 

그런데 시편을 외우고

율법을 지키며

메시아가 어서오라고 했던 자들은

그런 원인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막상 오니까 싫은 겁니다.

 

남의 민족이 오라고 한 적이 있던가요?

정작 이스라엘만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해 달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 인간의 요청에 의한 오심이 원인이 되어버리면

백날 구원해 봤자

결국 그 구원은 모호해지는 겁니다. 구원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구원해 달라는 요청이 원인이 되니까 말입니다.

구원은 원인 부재로써의 결과인 겁니다.

그러니 왜 나 같은 것 구원하실 이유가 하등 없는데 왜 하시지? 라는 생뚱맞는 구원이어야

결과로써의 구원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런 겁니다.

 

나는 예수님을 부른 적도 없는데

예수님이 덜커덩 와 버린 결과물이였던 겁니다.

그 어떤 연결고리 하나 없이 말입니다. 십자가도 그렇고 다 그런 겁니다. 선물 개념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결과만 댕기러니 남아버린 겁니다.

 

바로 그런 기능으로써 작용하는 것이 시편이다는 겁니다.

시편은 원인이 아닌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을 구약의 율법적 시선이 아닌

십자가에서 다시 재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원인이 아닌 결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시편은 온통 예수님 이야기 뿐이지

다윗 이야기 없습니다.

다윗은 예수님만 말하고 있는데

오로지 유대인만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서

달달달 외우는 원인만을 갖춘 꼴이 된 겁니다.

 

오늘 본문 보세요. 한마디로 그럴 신분이 아닌 이스라엘 왕이 징징 거립니다.

아니 백성 중에 가장 가난한자가 이런 소리를 하면 그야말로 딱 맞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장 높은 자가 지금 징징 거립니다.

 

요즘 웃찾사를 보면 왕이 얼마나 근엄하고 목소리도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

오죽하면 북한 김정은이가 할아버지 김일성 목소리를 흉내내어야

백성들을 속일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웃찾사에서 왕이 분명 왕이고 어른이고 다 장성한 자인데

목소리가 변성기를 거치지 않는 바람에 아기목소리가 되다 보니

죄다 다들 무시하는 겁니다.

왕 스스로도 목소리가 이래서야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근엄한 목소리이어야 할 왕의 음성이

아기 목소리이니 얼마나 웃기냐 말이죠.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왕이 참으로 미쁠정도로 든든해야 합니다. 안정감이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왕이 팔랑개비처럼

오히려 백성 중에 가장 미약한 가난한 자 보다 더 가난한 가장 가난한 자처럼

살려달라고 합니다.

 

왕의 위엄 채통 근엄 그 딴거 다 부도맞은 휴지조각처럼

왕은 바짝 엎드려서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편 전체는 이 말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건 뭐 왕인지? 거지인지?

 

왕과 거지 라는 동화가 있듯이

완전히 뒤 바뀐 입장이다 라는 거지요.

 

마치 지난 시간처럼

강도만난 왕 같다는 겁니다.

 

왕이 강도를 만날 정도면

왕이 원수를 만날 정도면

얼마나 그 왕이 미쁘기는커녕 늘 시험이 드는 모습이지 않겠냐? 말이죠.

왕이 이런 판국이면 백성은 늘 시험이 들겠지요.

미쁘심의 반대말이 시험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왕은 백성을 대표해서

보이지 않는 원수와 직접대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왕은 미쁘심 곧 든든함과 안정감과 근엄함을 버리고

가장 백성 중에서 나약한 백성이 맨날 격는 그런 시험

시험에 빠지는 그 상황에 독대하는

보이지 않는 원수와 대면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구지 건질 필요도 없는 고아를

그 고아를 대신해서 그들이 격는 시험에 대면하느냐 말이죠?

 

고아는 백성 속에 있어도 나그네나 마찬가지인 버림받은자와 같은 겁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인 왕 본인이 이 고아와 같은 상황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고아가 격는 늘 시험에 빠지는 상황을 격게 됨으로써

비록 고아가 입이 있고 다 있어도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구하지 못함을 대신 구하는 겁니다.

? 고아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빌 수 조차도 없습니다.

있어야 빌죠.

없으니 못 비는 겁니다.

 

그런데 왕은 고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아가 늘 빠지는 상황인 시험에 빠짐으로써

마땅히 빌 바를 알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대신 비는 겁니다.

고아가 빌지도 못하니 왕이 비는 겁니다.

 

그러니 왕이 졸지에 고아처럼 울부짖는 겁니다.

그냥 잠시 아버지가 없는 입장에서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 어디계세요? 아들이 부릅니다 라고 부르짖는 상황이 아니라

 

아예 아버지 얼굴 자체도 본적이 없는 날 때부터 아버지 없이 산 그런 고아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자체가 없으니까 고아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런 고아를 대신해서 아버지를 비로소 부르짖는 겁니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라고

왕은 고아처럼 울부짖는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다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왕이 왕의 위치에서가 아닌

고아의 자리에서 부르짖으니까 말입니다.

 

고아의 외침은 그 어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외침이니까 말이죠.

 

아버지 자체가 애초부터 부재 한 존재로써의 고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겁니다.

왕이 자기 스스로 고아 라고 외쳐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섭섭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왕을 이렇게 받들어 모시는 판국에

왜 왕이 왕의 보좌를 버리고

고아가 되어서 부르짖냐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느냐 말이죠.

같이 따라서 고아가 되어야 하냐 말이죠.

 

지난 시간에 시험을 만나며는 온전히 기뻐하라 라는 말씀을 어머니와 나누었는데

어머니께서 며칠동안 이 야고보서의 시험을 만나며는 온전히 기뻐하라 라는 말씀 때문에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온전히 기뻐하기는커녕 안 기쁘더라 라고 말이죠.

 

우에 시험을 만나면 기쁘냐 말이죠. 오히려 불안하지!!!

 

그래서 불안하더라 라고 솔직하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래놓고 야고보서 그 뒷부분에는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

사람이 시험드는 것은 자기 욕심에 미혹이 되어서 그렇다 라고 하니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이랬다 저랬다 괜히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식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주의 기도문을 저번에 나누었듯이

이번에는 시험을 만나면은 온전히 기뻐하라 라는 야고보서

 

(1:1, 개역)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개역)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개역)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개역)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개역)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개역)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1:9, 개역)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10, 개역)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1, 개역)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12, 개역)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개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15, 개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6, 개역)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17, 개역)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18, 개역)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19, 개역)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1:20, 개역)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21, 개역)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1:22, 개역)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3, 개역)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1:24, 개역)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개역)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6, 개역)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개역)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나누었는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 시험이 왜 시험이겠습니까?

이길수 있어서 시험입니까? 아니면 도저히 이길수 없기 때문에 시험이겠습니까?

시험을 합격 시킬려고 시험치는 것일까요? 아니면 탈락 시킬려고 시험치는 것입니까?

못이기니까 시험이고, 탈락 시킬려고 시험 치는 것이다 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바로 그겁니다. 어머니 우리 시험에 들면 그냥 시험에 듭시다.

못이깁니다. 합격 못합니다. 탈락 떨어집시다.

그것이 시험 맞다니까요

 

유혹이 괜히 유혹입니까? 이길수 있는 유혹은 유혹이 아니잖아요

못이기 때문에 유혹이고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혹인 겁니다.

 

시험들고 유혹에 빠지는 것을 기쁘게 여깁시다 어머니!! 라고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 하니 웃잡다고 ㅋㅋㅋ

 

그런데 어무이 여기서 중요한 것 기쁘게 여기는 것은 지키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중강조합니다. 온전히

그냥 기쁜게 아니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건 내 숙제가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온전히 기쁘게 여길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성경말씀은 말도 안되는 소리죠.

 

모세가 장대 높이 달아 올린 구리놋뱀 쳐다 보면 낫는다 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 맞습니다 맞고요

그거 쳐다 본다고 낫는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바로 이것이 성경말씀이다는 겁니다. 말이 안되는 것만 골라서 적힌 겁니다.

똑똑한 자와 수준높은 자는 이 말이 안되는 것을 말이 되도록 이해해서 성경말씀을 알수 있는게 아니라

 

똑똑한자에게 맞게 수준높은자에게 맞게 역시나 말이 안되게

즉 떨어뜨릴려는 목적 자체를 품고서 나오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주님 쪽에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고

여기에 반발하는 것이 인간 쪽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온전히 기쁘게 여길려고 지키는 자들이 야고보서로 사기를 친다는 거죠.

 

그거는 온전히 기쁜게 아니라 기쁜척 하는 것이고

온전히는 성령께서 전담하는 부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왜 온전히 기쁘냐? 성령의 개입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오늘 시편 10편이 그러한데

왕이 고아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고아처럼 징징거리면서 울부짖습니다.

 

오히려 고아가 당황하셨어요 라고 놀랍니다.

아니 왕이시여 왕은 고아도 아닌데 왜 고아인 저희들처럼 고아같이 우십니까?

도통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왕의 위엄 근엄 이런 미쁜것들 안정적이고 든든한 모습들은 다 사라지고

늘 하루 하루 왕따나 당하는 부모 없는 자식 취급당하는 자 같이

왜 왕이 그런 모습을 취하냐 말이죠?

 

그것은 왕만이 볼수 있는 보이지 않는 원수 때문이다는 겁니다.

고아는 이미 잠식된 상태라 볼 수 없는 그 원수를

왕만이 인식을 해서 그 원수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김을 당하는 고아처럼

왕은 고아가 되어서 운다는 겁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주의 기도는 그야말로 실재상황이다는 겁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게 말이 안됩니다.

 

즉 주님이 시험에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매일 매일 만든다는 겁니다.

그 시험은 결국 보이지 않는 마귀 때문인데

그 마귀를 인식하는 분은 예수님 뿐이니

이렇게 기도하라

즉 이렇게 기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원수들을 풀어서 말이죠.

 

이 주의 기도 외에는 다 중언부언이다는 겁니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바라듯이 똑같이 중언부언이다는 거죠.

 

주님이 하라는 기도는 이것 뿐입니다.

주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즉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럼 하나 마나 한 기도 아닙니까?

 

하나 마나 한 기도를 왜 하냐 말이죠.

어차피 못 이기는 시험이고

어차피 탈락 당할 수 밖에 없는 시험을

남도 아닌 마귀도 아닌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매일 매일 조성하시겠다는 것인데

 

ㅋㅋㅋ 어머니께서 이런 소리는 또 처음 듣는다고 하시면서 눈을 반짝 반짝 귀를 귀 기울여서 들으시는 겁니다.

 

주님이 자기 피 자랑 할려고

마귀를 지옥갱에서 풀어서

우리를 매일 매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기도를

실제상황을 벌리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모두다 말려 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얼마나 온전한 기쁨입니까?

 

발 등에 불이 떨어져 보세요

기도하지 마세요 라고 해도 안하고는 못배기도록 한다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함으로써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말이죠.

 

왕의 신분이고 뭐고 체통이고 뭐고 살려달라고 얼마나 부르짖는 모습이 다윗의 모습 아닙니까?

자신은 시험을 너끈히 이길수 있어서 비는 겁니까? 아니지요!!

도저히 이 시험을 못 이기니까 비는 겁니다.

 

왕이 얼마나 바짝 엎드렸는지

아침부터 울부짖습니다. 울부짖어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품이 좋으나이다 라고

시편을 누가 노래로 지은 것을 제가 지금 적어봤는데요

 

(92:1, 개역) [안식일의 찬송 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2,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1, 공동) 야훼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노래하는 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사오리까?

(92:2, 공동) 아침에 당신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당신의 미쁘심을 전하는 일, 그보다 더 좋은 일은 다시 없사옵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문으로 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6:6, 개역)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개역)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6:8, 개역)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9,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개역)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6:12,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침부터 이런 기도를 외칠 정도이면 얼마나 처참한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정도로 진노가 급한 상황이다면

 

다들 누구가 그런 입장에 놓여졌다고 보는고 하니

 

왕이 아니라

 

정반대인 고아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이 지금 고아처럼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를 이렇게 고아처럼 울부짖으라 라고 합니다.

대통령도 이 주의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대통령도 나라의 임금도 고아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을 주가 스스로 주를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0편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기 딱 좋습니다.

아니 왕이여 누가 왕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말씀만 하옵소서 당장 그 놈을 능지처참 해 버리겠습니다.

 

왕이 아기 목소리로 위엄이 다 떨어지는 소리를 외칩니다.

너희들이 나설 군번이 아니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원수를 본 겁니다.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원수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진짜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며

이 영적인 전쟁은 젖먹이 전쟁인 겁니다.

 

아침부터 전쟁났다고 울부짖으면 고요한 아침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자가 있는데

바로 아기입니다.

 

아기는 지금 젖 주지 않으면 나 죽어요 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울어재끼는 겁니다.

 

아기가 아닌 자는 아침부터 우는 자가 아닌 자들인 겁니다.
무능한 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무능한 자는 젖먹이 뿐입니다.
이런 자를 앞장세워서 치르는 전쟁이니
인간이 생각하는 전쟁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왕이 지금 그런 울부짖음을 부르짖습니다.

왕이 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기처럼 웁니다.

젖먹이 보다 강한자가 없다는 영적전쟁인 겁니다.

왕이 고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고아처럼 울부짖습니다.
왕 자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미쁨의 존재인데
어떻게 잃어버림의 존재인 고아일수가 있냐 말입니다.
그 어떤 이유와 원인이 없니 왕은 고아처럼 웁니다.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말하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안 빠질려고 하는게 아니라

시험이 오면 백프로 빠질 수밖에 없으니 그냥 빠지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기록되지 않은 숨겨놓은 자를 보라는 겁니다.

이 시험은 바로 그 숨겨놓은자의 등장 때문에 온전히 기뻐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바로 마귀 곧 원수입니다.

 

그 원수의 등장으로 인해 온전한 기쁨이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겁니다.

 

봤죠? 봤죠? 주님이 보셨지요?

원수가 이런 짖을 한 것을 말이죠?

주님께서는 보셨습니다.

 

시편 1014절의 말씀입니다.

 

(10:14, 개역)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즉 이 말은 상대적인 원수가 하는 말에 반대를 위한 반대의 표현인 겁니다.

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안 본다고

너희들이 짖밟히든 말든 아예 쳐다도 안 본다고
절대로 버림받은 자를 돌보아. 되돌아 봐 주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10:13, 개역)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아니 세상에 고아를 누가 쳐다보느냐 라고

가난한 자를 누가 보느냐 라고

 

강도 만난 자를 다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부정한 것, 시체, 등등을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 쳐다보고 안 돌아본다고

 

?
만지면 부정하니까! 거룩하지 못하니까!
성화해서 마일리지 쌓기 바쁜데? 뭐 가난한자들에게 그 마일리지 다 주라고?
괜히 부자 청년이 등돌리고 간게 아닙니다.

 

그래서 원수는 더더욱 자신 만만한 겁니다.

 

즉 이것은 정치 영역입니다. 곧 선택(언약)의 영역인 겁니다. 무의식의 영역이듯이 말이죠.

정치란 얼마전에 끝난 재미있던 드라마인데 물론 모든 사극이 다 비슷한데

한석규가 나온 김창완 가수가 나온 드라마였는데

왕이란 결국 주변의 신하들이 권력으로 세운 꼭두각시인 겁니다.

그 신하들은 백성들의 땀을 빼앗아서 권력을 취했고 말이죠.

그러니 그런 신하들에 의해서 권력을 등에 입고서 세워진 왕은 그야말로 꼭두각시죠.

이병헌 나오는 영화 광해도 그렇구요

 

그러니 고아는 결국 신하들에게서 양성되는 자들인 겁니다.

 

결국 정치의 달인 신하들이 펼치는 정치 속에서

전혀 다른 상상도 못했던 정치 속의 정치가 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정치 속의 정치인 겁니다.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

정치 속의 정치
언약 속의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고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너희 신하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왕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왕의 왕 됨이 신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왕의 왕 됨이

주의 주 되심이

자신의 인애와 자비 곧 사랑에 의해서 주가 주 되심을 스스로 이루겠다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가 아닌 방식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신하들이 해주는 왕자리를 마다하고 말이죠.

? 왕이 고아를 직접 건지겠다는 말인가 말이죠?

그 정도로 고아는 그야말로 아무도 건져주는자가 없다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불가능성인 겁니다.

신하들은 고아들을 피빨아 먹어야 권력을 유지하고 그 권력으로 꼭두각시 심부름꾼 왕 하나를 세워서

선비의 나라, 양반의 나라로 다스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택(김창완)이 했던 말인데요

 

원래 조선은 군주의 나라도 아니요 백성의 나라도 아닌

오로지 선비와 양반의 나라이다 라는 것이 조선의 나라이다는 겁니다.

엘리트 국가죠. 왕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인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바로 그런 원수가 마련해주는 왕의 자리가 싫다 라는 겁니다.

 

이들 양반에 의해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고아에게 뛰어들어

늘 양반에게 피 빨려서 그 어떤 능력으로도 빠져나올수 없는 시험에 빠진 자를 건지기 위해서

직접 고아가 되어서 부르짖는 겁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라고 말이죠.
모든 곳이 주의 목전이다 라고
다윗 본인이 그 원수가 아니냐 말이죠.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주께서 봐버렸다고 시인해 버립니다.
 

얼마나 다들 자신만만하게 절대로 고아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안 돌아보신다 라고 자신만만한 그런 상황에서

판을 뒤 엎어버리는 겁니다.

 

모두다 잠식된 상태인데 말입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고아를
심지어 들을 귀도 볼 눈도 외칠 목소리도 다 제거 당한 갇혀버린 자를 포로된 자를 얽눌린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를

 

그런 고아가 마땅히 울부짖어야 할 소리를

소리 조차도 못 내도록 목소리 제거 거세를 당해 버렸는데 

무슨 희망이 있다고 
 

왕이 직접 뛰어드느냐 라는 겁니다.

 

문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아에게 안 뛰어들어도 그 어떤 손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연고 없이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 마나 한 짖이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그저 불쌍해서입니다.

제사와 번제를 싫어하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뛰어들 필요성이 전혀 없는 왕인데

그 왕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서

뛰어듬으로써 비로소 원수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을 만나며는 온전히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즉 갇혔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서

양반이 주사를 놓아서 마약에 취해있던 고아들이

갇혔다는 인식을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고아 속에 뛰어들어서 부르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왕이 있다는 겁니다.

주가 떳다 라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선지자가 떳어요?

뭔가 이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세상을 바르게 잡는

왕이 떳다 라는 겁니다.

주가 떳다

주가 나타나셨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라는 외침인 겁니다.

즉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라는 겁니다.

 

(10:38, 개역)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1:6, 개역)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2:10, 개역)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일? 착한일?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착한일 선한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19:16, 개역)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선한일 착한일이란 상대적인 악한일(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악한일이 아니죠!) 곧 원수가 한 일의 상대적인 일인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마귀가 한 일을 우리가 모르는데 어떻게 선한일을 알겠습니까?

 

그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 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보셨다 라는 겁니다.

 

원수를 가만히 두시는 분은 선한 분이 아닌 거죠.

 

결국 고아는 미끼였던 겁니다.

왕이 왕 스스로가 고아에 뛰어듬으로써 미끼가 되셨습니다.

숨어있는 원수의 정체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원수가 하는 짖을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원수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희 고아들

곧 버림 받은자들을 안 돌아본다는 겁니다.

 

너희 잃어버린 자를 절대로 찾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왕은 외칩니다.

왕의 자리에서가 아닌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아낌없이 목숨까지 다 내어주시면서


99마리 양이 아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자 말입니다.
 

곧 고아의 자리에서 외치시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감찰하셨고

주님께서는 보셨으며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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