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확정된 악인에 대한 심판 (시편 58)

 


(
58:1, 개역)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58:2, 개역)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주는도다

(58:3, 개역)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58:4, 개역)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8:5, 개역)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6, 개역)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58:7, 개역)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58:8, 개역)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58:9, 개역)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58:10, 개역)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58:11, 개역)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이미 확정된 찬양이 있다면

이미 확정된 심판이 있다는 것이겠죠.


이미 확정된 찬양자가 있다면

이미 확정된 악인도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상당히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 심판의 강도가 큽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이 시편 찬양자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인가 싶을 정도로 센 발언입니다.

 

즉 이것 또한 이중확정으로써의 저주입니다.

그렇기에 저주의 강도가 초과잉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심판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독선적인 모습에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배타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거부감이 들 정도입니다.

 

58:8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태어난 피조물이라면 햇빛을 단 한번이라도 쪼이게 되어 있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욥아 내가 왜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물과 비와 햇빛을 주는 줄 아느냐?)

 

그런데 그 공의 조차도 악인은 악으로 갚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이 공의를 거두실 정도로 진노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공의 조차도 넘어서는 진짜 공의는 악에 대한 진멸입니다.

즉 인간은 그런 공의까지는 원치 않는 거죠.

 

지난 시간에 무조건적인 찬양자를 아무런 원인도 없이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남은자처럼 뽑아내어서 말입니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증거하듯이

 

예수님은 모든 유대인을 거부하고 또 이방인 중에 많은 과부 중 단 한 과부에게만,

또 많은 이방인 중의 문둥병자 중에 단 한 명의 문둥병자에게만

 

보내신바 되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누구에게? 한 과부. 한 문둥병자.
즉 누구는 아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아니다.

오직 이방인 중에 여러 과부 중에 한 과부
이방인 중에 여러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에게만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그 예수님의 증상물은 오로지 죄인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죄인

의사를 말하기 위한 환자

 

라는 취지에서 구원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받는자가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자를 말하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더 심하죠

아예 일만달란트 탕감이라는 용서의 비유를 하나님나라로써 증거함에도 불구하고

너희 유대인들이 특히 바리새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인데

용서 받은자가 없는 용서하시는 분만 덩그라니 남아버린 초과잉 용서의 왕의 비유이다는 겁니다.

 

정작 용서 받은자는 없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일만달란트 빚진자 비유는

바로 유대인을 겨냥한

용서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처음사랑을 등져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런 어리석음을 유도하여 지혜를 발하는 예수님나라의 지혜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독단적이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다고요?

유대인에게는 더 심합니다.

 

이것이 공의 보다 더 공의로운 진짜 공의

즉 악을 끝까지 제대로 지적하고 들추어내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유시민 전 장관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논리적으로 정당화 하던데

아무리 봐도 논리적이지는 않더라 말이죠.

 

기억나는 것이 제가 다닌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 바로 이런 식이였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때인데 그렇게 얼굴 하얀 사람이

얼굴이 새빨개 지면서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낼 때

웃겨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두 사람 다 모순적이게도 신약은 욕을 하지 않는데

구약의 여호와는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의 여호와는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사람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 한다고

아무리 적국이라고 해도 말이죠.

구약부터 사랑을 외쳤는데 말이죠.

그게 무슨 사랑이냐고? 얼굴 빨개 지면서 흥분을 하면서 외치더라 말이죠.

 

그런데 웃끼는 것은 그게 저는 위선으로 보이더라 말이죠.

윤리선생이니까 그 부분만큼은 윤리적인 사람 답게 큰 소리로 외쳤고
(생전 안 그런 사람이, 정의로움이라고는 단 한번도 보여준적이 없는데, 갑자기 생뚱맞게)

전 장관은 그 순간 만큼은 격양된 식으로 그 억울하게 죽은자를 대변하는 자인냥

불끈 힘주어 목소리를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 없이 하더라 말이죠.

그게 오히려 저에게는 참으로 사기꾼 같아 보였습니다,

 

마치 이런 자들을 보며는 누가 생각이 나느냐 하면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같은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정작 주님은 어중이 떠중이를 이용해서 영광의 구원을 펼칩니다.

다들 한결같이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거짓말쟁이들이지요.

 

이런 거짓된 부정한 자들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부정한 자를 구원자로 사사로 받아들일까요?

정 안되면

그들을 사용한 여호와의 구원을 감사할까요?

 

안합니다.

물론 겉으로 억지로 하는 자도 있겠지요.

그러나 끝까지 거부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반드시 다 들추어내시고야 맙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구원이 헛되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인간 구원은 헛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게 무슨 사랑이냐고 따지는게 아니라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냥

이 두 사람은 여호와의 공의에 거부감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마귀죠.

 

악한 짓을 하는 것이 마귀가 아니라

인간을 변호하겠다는 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광명한 천사이니까 말이죠.

 

거짓선지자들이 부정적인 말을 하던가요?

늘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치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마치 자신은 그런 자격이 있는냥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런 권리 조차도 애초부터 없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마시고 있는 공기 햇빛 물 기타등등

무세금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것 조차도

자기들이 욕하고 있는 잔인한 여호와로부터 주어지고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공기 물 햇빛 생명을 제공 받아서 실컷 누리고서 하는 말이

기껏 그런 소리냐 말이죠.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런 속성 때문에

주님은 늘 공기처럼 지적해 주시는 관계를 펼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악에 대한 심판

철저하리 만큼의 진멸입니다.

 

지난 시간에 무조건적인 찬양자 만들기처럼

무조건적인 악에 대한 진멸입니다.

 

사랑이라면 악에 대한 미움이

죄에 대한 심판을 하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맞아 맞아 라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그 참상을 볼 때 덜커덕 참혹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58:8, 개역)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58:8, 공동) 유산하는 여인의 몸에서 핏덩이가 쏟아지듯이, 달팽이의 진액이 말라버리듯이,

(58:8, 쉬운) 그들이 움직일 때, 몸이 녹아 없어지는 달팽이 같게 해 주시고, 해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는 갓난아기 같게 하소서.

(58:8, 한글킹) 달팽이가 녹듯이 그들 모두가 없어지게 하시며, 여인에게서 조산한 아기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게 하소서.

(58:8, 현대인) 그들을 움직이기만 하면 점점 녹아 없어지는 달팽이 같게 하시고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서 나오는 사산아 같게 하소서.

(58:8, 현대어) 달팽이 속살덩이가 말라 비틀어지듯 말리시며 저것들이 해를 보지도 못하고 사산한 핏덩이처럼 되게 하소서.

 

 

소멸하는 달팽이 같게 해달라 가 무슨 말인가 해서 다른 번역을 보니

달팽이의 생명은 찐득 찐득한 점액질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침이 입안의 건강을 지켜 줍니다.

 

당연히 피조물로써 창조주가 배려한 이런 보호막 때문에 인간은 그나마 유지하는 겁니다.

그나마 달팽이도 유지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보호장치가 그 보호막을 제거해 달라

? 생명의 보호자이신 여호와를 거부하니까

당연한 조치로써의 공의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막상 너무 심하다 싶지만은

너무 과한 처벌이다 싶지만

정작 이들 악인들 스스로가 그것을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처사인 겁니다.

보호막 싫어 이 귀찮고 쓸데 없어 보이는 것 떼어 낼 거야 라고 할 때

그래 그러렴 이라고 공의를 발하는 겁니다.

 

이것인 사랑이 없는 여호와가 아니라

저들 악인이 사랑을 거부해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그 두 사람을 때려죽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저 자신의 위신을 위한 지식층다운 발언을 했다고 주장할뿐이지

지식인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던가요?

없거든요.

 

오히려 깡패 삼손, 산적 입다 이런 자들을 사용해서 구원한 겁니다.
불의한 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얼마전에 봤던 영화도 언급했지만

 

참말, 바른소리, 옳은 소리로 수천명을 죽이는 것과

거짓말로 수천명을 살리는 것
 

어느 것이 낫습니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진 자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과

안식일을 어겨가면서 물에 빠진 자를 건지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 안식일이냐 말이죠!!

 

헬라인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함이요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걸림돌, 거리끼는 지혜이다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이유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전쟁은 신에 대한 전쟁입니다.

문제는 그 신을 공격하는데

인간들이 가만이 있으면 됩니다.

이스라엘이란 인간으로써 신과 전쟁을 벌리는 귀신잡는 해병과 같습니다.

신과 싸우는 자입니다.

그런데 저 쪽 신에서 인간을 앞세우는 겁니다.

왜 그런 신에게 놀아나냐 말이죠.

신과 싸울 뿐인데 인간은 빠져라 말이죠.

 

그런데 죽어라고 안 빠지고 끝까지 개입하겠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는 너 이스라엘은 왜 신들의 전쟁에 개입하노?

나는 사람이 아니므로소이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 저들이 반감하면서 말려드는 거죠.

 

그래서 양쪽다 가장 극치의 모습인 인간 내부의 모든 내막을 다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똘마니일 뿐이다는 거죠.

한 쪽은 생명의 신으로써의 똘마니

다른 한 쪽은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는 사망의 신의 똘마니

 

이것이 천국과 지옥의 대립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무조건적인 찬양자로써의 천국이 땡기는 자가 시편 57편에 찬양자로 세우심

또 무조건적인 심판으로써 지옥이 땡기는 자로써의 시편 58편에 심판이 확정된 자의 모습

 

이것이 시편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 무수히 언급이 됩니다.

 

무조건적인 찬양자 우물가의 여인

무조건적인 심판당하는 자 로써 바리새인 니고데모

 

이 둘의 대조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무조건입니다.

찬양자 다운 구석 없는데 찬양자이고

심판받아야만 하는 구석이 없는데 심판당하는 자입니다.

 

오히려 원인은 그 알리바이를 후차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식입니다.

거봐 거봐 그러니까 넌 천국 자식 답잖아

거봐 거봐 그러니까 넌 지옥 자식이야 라고 말입니다.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웁 받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이고 (시편 57)

오늘 본문은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이다 (시편 58) 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보세요

그 조건을 뒤 엎어버리거나

그 원인이 뭔지를 알아낼수 있는지

 

없습니다. 무 조건입니다.

 

만약 사랑에 조건이 있으면 사랑이 아니구요

미움에 조건이 있으면 그것 또한 미움이 아니지요.

 

그래서 후차적으로 알리바이를 뒤짚어 씌우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가 되니까 거리끼는 것이고

 

이 십자가의 저주가 사랑받은자에게는 왠 은혜인지????????

 

아무리 봐도 사랑받은 자격이 아무리 아무리 따지고 따지고 따져봐도 없는데

 

저 지옥가는 자와 하등 다를바 없는데

더 못나고 못났으면 더하면 더했지

 

저들에 비해 조금도 나은 것 하나 없는데

이 십자가가 왠 은혜인지

 

그러나 무조건적인 미움은 십자가가 오히려 화를 더 돋꾸는 식입니다.

십자가가 이유없이 미운 겁니다.

어리석은 지혜라고 몰아버리고

미련하다고 더 저주를 퍼붓습니다.

도저히 무조건적인 용서를 인정못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무일도 하지 않고 용서받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겁니다.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저 십자가가 더 미운 겁니다.

 

자 이런 취지에서 오늘 시편 58편은 상대적으로 대조 되겠끔 반드시 나와줘야 하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찬양자가 있다면

무조건적인 저주받는자가 있다는 것

 

이것이 거룩이라는 분별 차이입니다.

공의가 뭡니까?

얼마나 정의롭냐 말이죠.

 

그런데 악인의 입장에서는 이 공의가 무조건적으로 미운 겁니다.

그래서 보호막을 다 거덜내라 라고 하니까

그래? 그럼 니부터 하나님의 베푸신 보호막을 거두어 주마 라고 하니까

 

이빨이 없이 어떻게 먹을수가 있겠습니까?

잘개 잘개 쓰려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소화가 되는데

이가 없이 먹게 되니 그냥 그 딱딱한 것이 그대로 넘어가서

소화 되기는커녕 모든 장기들을 하나 하나 거덜내고 있는 겁니다.

 

달팽이에게 점액질을 거두어 버리면

그 보호막을 거두어 내면

그 긍휼을 거두어 버리면

말라 비틀어 버리는 겁니다.

 

만삭이 되지 못하여 태어난 것도 위험한데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 햇빛까지 다 차단 당하면

모든 질병이 다 그냥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면역성이 아예 없으니까

햇빛을 받아야 면역성이 생겨서 질병과 싸우든 말든 할텐데 말이죠.


간따나 미움받는 편파성에 장자권 까지 빼앗기게 되니 원~~~
이중 확정입니다.
 

(58:8, 개역)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 13:19, 개역)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마 13:20, 개역)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13:21, 개역)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2, 개역)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 13:23, 개역)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4, 개역)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 13:25, 개역)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 13:26, 개역)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 13:27, 개역)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 13:28, 개역)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 13:29, 개역)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 13:30, 개역)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위에서 언급한 두 사람의 발언이 악마적인 이유가

마치 인간에게서의 면역체계를 다 없애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 마음대로 말이죠.
공기를 다 없애버려라!
태양을 없애버려라! 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더 옳다!! 저런 살인마 여호와 보다. 저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고 라고

자기의 사고방식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자기가 욕한 그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진 보호막을 걷어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찍 소리 못하는 겁니다.

 

원래 마귀한테 큰소리 못 치는 인간들이

딴데 가서 화풀이 한다고 하잖아요.


어떤 교수가 집권당 한테는 한번도 못 이겨본 화풀이를
자기 보다 못해 보이는 no철수에게 화풀이를 하더라 말이죠.

이렇게 모순되게 저들의 독재권력을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은 권력서열을 세우는 겁니다.
어딜 힘도 없는 것이 까불고 있어 라고 행패부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평생을 그런 원망만 하고 살아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더 화를 돋꾸는 건가요?
그게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고요?
그럼 악에 대한 심판을 내버려 두신다굽쇼!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 하나 만으로도 황공무지로소이다를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자칭 기독교에서 지옥의 의미를 거부하는 자들이 한둘이가 아닌데

그런 신학자 목회자 영향 아래에 있는 자들을 따져보면 어마 어마 합니다.
자기가 옳기에 성경도 옳은 자기에 의해서 지 마음대로 만들어 냅니다.
부정적인 요소를 다 빼버리자 라는 식입니다.
 

자 이렇게 저절로 시편 58편이 말하는 악인의 특징에 대해서 다 언급했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내어버려 두심으로써의 진멸입니다.
이미 확정된 심판이기에 그 증상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저런 자들을 아직도 살려두시는 이유는

이들의 말 하나 하나가

언어 하나 하나가

행동 사고방식 하나 하나가

전도자의 전도처럼 퍼트려서

지옥을 꽉꽉 채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신다는 점입니다.

마귀를 괜히 활동하도록 내버려 둔게 아닙니다.

마귀도 다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대조를 이루는 지옥을 채우기 위해 보충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지옥이 땡기는 자 답지 않습니까?

 

지금 시편58편에 언급된 악인 또한

이스라엘 바깥의 타민족이 아닙니다.

 

말씀도 다 알고

율법도 다 알고

이스라엘 역사도 다 아는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 이스라엘사람을 빨리 이스라엘 바깥으로 추방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느냐 말이죠.

퍼트리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 한 사람으로 인해 다 장악되는

이와 똑같은 사고방식에 젖어 버리도록 만드십니다.

마치 이 사울왕의 사고방식과 또 대조를 이루는 다윗의 모습은
미움받기로 작정된 에서와 사랑받기로 작정된 야곱의 확장판입니다.

이 말은 따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내신다는 겁니다.

꼬불쳐 놓은 딴이스라엘이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기존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인데

또다른 꼬불쳐 놓은 딴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에 반발합니다.

 

맞습니다. 반발하라고 꼬불쳐 놓은 겁니다.

 

반칙이야 반칙

 

네 맞습니다. 반칙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사울 패거리와

안식일 어기는 다윗 딸랑 한 명

 

누가 더 안식의 주인의 마음에 드느냐 말이죠.

 

한 놈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고

다른 한 놈은 탕자로써 오로지 아버지의 긍휼 곧 보호막만 바라보는 탕자일 뿐입니다.

 

누가 구원자의 구원 대상일까요?

이것이 후차적으로 알리바이로 형성되듯이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처음부터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 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 된 겁니다.

 

주님에게는 의인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 의인이라고 자청하고 남들도 그렇게 다 알던 그 의인이

시편에서는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의인으로부터 쫏겨남을 당하고 악인 취급받던 자는

 

정작 이 보호막을, 주의 긍휼을 바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의인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죄인인 악인은 예수님을 거부해야 하는데

 

의인이 예수님을 죽인 악인이였고

그런 의인들로부터 악인이라고 취급받던 죄인이 예수님의 긍휼을 바라본 자였다는

 

이 역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겁니다.

 

괜히 거리끼는 불편함이 아니지요!!!

 

유대인이 맞다면 예수님과 끝까지 공방을 해야지

왜 죽입니까? 불안했던 겁니다.

예수님과의 그 동안의 공방 즉 말씀해석에서 참패를 했습니다.

말씀을 아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엉터리 지식이였음이

들통나 버린 겁니다.

 

조금 모자라는 지식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정반대의 악마의 해석으로 그 동안 선생짓을 한 것이 들통이 나서

 

죽여버린 겁니다.

 

바로 이런 내막을 끝까지 추적해서 밝혀내는 심판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 진짜 사랑이 공의로 제대로 악과 선을 제대로 판결하니까

걱정말고 너희는 이 심판 받기로 작정이 된 악에 동조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사랑이 승리 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였었던 사도바울이 이 악에게 제대로 속아 봤던 자로써 증거합니다.

(교회가 속이고, 율법이 속이고, 행함이 속이고, 선민이 다 이 속이는 악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것도 이미 확정된 악에 대한 심판인데도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오지 않은 거룩으로 포장된 의미들은 다 거짓임을 말입니다.)

 

너희가 부조리하다고 여긴 이 십자가가 오히려 하나님의 참 지혜이다고

 

그러니 어딜 감히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냐고

 

이미 악에 대한 승리는 십자가로 완료 되었다고 말입니다.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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