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우는 굶주린 악인, vs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의인 (시편 59편)
(시 59:15, 개역)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시 59:15, 공동)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빈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울어댑니다.』
(시 59:15, 쉬운)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먹이를 찾지 못하면 울부짖습니다.』
(시 59:15, 킹흠정) 『그들이 먹을 것을 찾아 위아래로 헤매게 하시고 만족하지 아니하면 불평하게 하소서.』
(시 59:15, 한글킹) 『그들로 먹을 것을 찾아 위아래로 헤매게 하시고, 배부르지 않으면 울부짖게 하소서.』
(시 59:15, 현대인) 『그들은 개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다니다가 배를 채우지 못하면 울부짖습니다.』
(시 59:15, 현대어) 『주린 배를 끌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밤을 지새웁니다.』
(시 59:1, 개역)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시 59:2, 개역)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시 59:3, 개역)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시 59:4, 개역)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시 59:5,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셀라)』
(시 59:6, 개역)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시 59:7, 개역)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
(시 59:8,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
(시 59:9, 개역)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 59:10, 개역)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시 59:11, 개역)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
(시 59:12, 개역)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시 59:13, 개역)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
(시 59:14, 개역)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시 59:15, 개역)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시 59:16, 개역)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7, 개역)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시·공간이란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가 되는 겁니다.
(삼상 19:11, 개역)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그 사건이 벌어진 때를 다시 시편은 언급을 하면서
즉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반복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다시 반복하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건이란 십자가사건만을 말합니다. 다른 사건은 사건도 아닌 겁니다.
흔히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건의 철학, 곧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건은 창조성을 말하는데
그들은 십자가사건을 창조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을 관찰하고 해석할줄 안다는 눈이, 지식이 있다고 본 겁니다.
십자가 사건 조차도 사건의 한 부분으로 볼 뿐이다는 거죠.)
어떤 주석은 이 시편 59편이 시로써는 시의 형식에 맞지 않다고 합니다.
뭐 하긴 그 긴박한 상황에서 시의 형식을 맞추고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고 한다 더군요.
그런데 그게 말이 안됩니다.
그 사건 당시에 시를 적었거나 시로 노래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시는 시편을 기록할 때에 그 사건을 상기해서 부르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의 형식을 갖추어도 더 잘 갖추어야 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시가 아니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그 사건을 다시 반복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시(노래, 사건) 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저 펜일 뿐입니다. 연필이지요.
성령이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지
다윗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노래하시고자 즉 계시 하시고자 한 사건은 십자가 사건 뿐입니다.
십자가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복이란 철학자들이 말하는 반복이라는 이중성이 아니라
반복적인 횟수의 숫자가 아니라. 원형의 확장 증폭의 의미입니다.
물이 바닥에 쏟아지면 휴지를 만나면 휴지에 확 퍼져버리고
다른 사물을 만날때 마다 그 사물의 성질이 바뀌어지는 사건을 말합니다.
횟수의 의미보다 다른 사물의 성질이 변형되는 증상을 일으키는 ...
다윗이 십자가 사건을 만난후 어떻게 변합니까? 찬양자로 변하듯이
이것을 기준으로 이스라엘 전체에 까지 확대 시키는 겁니다. 전국 방방 곳곳으로, 이스라엘 에게만)
성령이 다시 그 사건을 이스라엘 속에서 다시 반복시키는 사건을 또 벌리시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다윗 개인의 사건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사건으로 확대 되는 것이요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 사건인 거지요.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지만
창세전에 십자가 사건이 먼저 있었고
역사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이의 간극 속에서
다윗 때에 소급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
먼저 있었던 십자가 사건의 증상으로써 다윗 때에 돌출이 되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다윗 개인의 사건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은 다시 돌출시켜 반복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그 사건의 노선에 따라서 십자가사건이라는 실상이 드디어 나타나는 겁니다.
다윗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의 그 긴 공백은
결국 이런 사건들의 반복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역사가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그 다윗의 정신으로 참선지자는 활동하도록 되어 있고
그 실상은 결국 십자가 사건이고
동시에 상대적으로 대조되는 거짓선지자의 활동은
이 십자가 사건의 보충물로써 다윗에 대립된 세력으로써
사울왕이 죽고 난 뒤에도
사울 왕 개인의 미움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사울왕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서
거짓선지자까지 이어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이 십자가 사건의 증상인
다윗이 격었던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어 다시 이스라엘 속에서
흔적을 남기듯이 홈파기를 해서 반복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의 역사가 아닌
성령의 계시, 묵시 활동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이스라엘 속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 이스라엘 이라는 무대에
사울왕과 다윗이 대립을 이루듯이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다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다시
악령을 받은 자와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의 대립으로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십자가 사건은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오늘 시편 59편에서 이 악인을 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는 자기 배를 채울때까지 밤을 새운다고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자기 배입니다.
이것이 이미 확정된 악인의 심판입니다.
이유 없이 자기 배를 채워야 합니다.
즉 자기 배가 그 목구멍이 결국 지옥구멍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밤을 지새우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는 지옥상태를 보여주는 신체인 겁니다.
짐승의 몸이요. 개의 신체인 겁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미 확정된 찬양자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더 높이 찬양을 한다고 합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찬양하도록 되어 있는 찬양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침이라는 것은 지지난 시간에도 언급이 되었듯이
새벽을 깨우리라에서
이 새벽이 캄캄한 밤을 거쳐서 나온 이른 아침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기나긴 밤을 통과한 새벽입니다.
부활의 의미입니다.
죽음도 무덤도 다 깨우는 겁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아침이 없습니다.
여전히 길고 긴 그 캄캄하고 어두운 밤을 아직까지도 지새우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지옥이 땡기고 있기 때문에
그 기나긴 터널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어두운 밤입니다.
새벽도 없고 아침도 없고
찬양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그 어두운 밤을 드디어 통과해서
죽음도 통과 패쓰하고
무덤도 통과 패쓰해서
새벽을 맞이 하는 겁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나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나이다
(시 92:1, 개역) 『[안식일의 찬송 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2,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3,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 92:5, 개역)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예수님이 나의 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나를 노래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뻔뻔하죠
내가 무슨 자격으로 노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확정해 버리심 때문에
나는 주님의 노래가 되어버림바 된 겁니다.
그의 노래에 대한 화답입니다.
노래란 저절로 기쁘고 즐겁다는 겁니다.
조건이 맞아서 노래가 아니라
노래할만한 목 상태가 되면 노래하는게 아니라
비록 벙어리일지라도
아니 벙어리 이기 때문에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 없이 노래하는
예수님이 나의 노래가 된다는 겁니다.
나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딱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만이 어둡고 캄캄한 기나긴 밤을 지나가게 하는
유일한 아침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교회가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진적이 없습니다.
누가 아침을 오게 합니까?
누가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뿐이였습니다.
잠자는 영혼아 일어나라 이제 깰때라 일어나라
일어나면 뭐 하는데요?
일어나는 이유는 딱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살아계신 분은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왜 이스라엘로 삼았습니까?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드신 겁니다. 예수님이 말입니다.
새창조 하신 이유입니다.
잠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는
죽음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죽을 자격이 없습니다.
무덤에 머물 자격 또한 없습니다.
밤새도록 굶주림에 허덕일 자격 조차 없습니다.
계속해서 잠 잘 자격이 없습니다.
깨어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혼자 깨면 다입니까?
새벽이도 깨워야 하고
아침이도 깨워야 하고
모든 피조물들을 깨워야 합니다.
잠에서 말입니다.
왜? 일어나야만 합니까?
죽지도 못하고
무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잠을 계속해서 자지도 못하는
그 이유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노래하기 위함입니다.
오로지 그 십자가의 용서 말입니다.
그 자비, 그 인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겁니다.
십자가만 밝히 보이기 때문이지
다른 것 교회나 축복이나 율법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 자기유익에 끌어당기는 것이지만
십자가는 자기유익에 끌어당겨 봤자 자기만 당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 겁니다.
오로지 그런 걸림돌 거리끼는 십자가만을 노래하는 이유가
그 거리끼는 십자가만이 아침을 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십자가만 그만 캐라
이제는 부활의 시대이다
십자가는 이제 지나갔다 라고 구라를 칩니다.
그런 목사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모든 기독교의 대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이란 십자가의 증상입니다.
결국 부활 곧 아침이란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이지
십자가를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있어야
희생 때문에
화목제물 되심 때문에
죄 씻음이 있지
화목제물이 없이 죄 씻음이 없습니다.
또 모호한 밤을 지새우는 채울수 없는 배고픔으로
그들은 굶주린 개들처럼 밤새도록 울부짖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만 밝히 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이 십자가 사건의 영광을 위해서
상대적으로 악인은 어떻게 보충되고 동원이 되는고 하니
도저히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나는
배를 아무리 채울려고 밤새워 기다리고 기다려도 채울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배를 채울수가 없어서 잠을 못 자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는 잠을 주십니다. 아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움받는 자는 잠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배가 고프니 잠이 오지 않는 겁니다.
자기의 굶주린 배를 채울수 없도록 되어 있고
캄캄하고 어두운 기나긴 밤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그 어두운 밤에 머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아침이 없고
새벽도 없습니다.
영원히 빛이 없습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의 주의 인자하심 곧 긍휼과 자비가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뭐 그렇다고 잘나서 주님의 긍휼과 자비인 인자하심이 있는 겁니까?
물론 없습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조건적으로 말하는 거짓영을 받은자들이 많습니다.
그 어떤 조건도 없이 베푸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는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고
화목제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독생자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이 하나님의 눈물과 아픔을
악인들은 무시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과 아픔을 우리는 마음판에 새겨진 바 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오로지 자기 배를 채울 뿐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예수도, 하나님도, 십자가도, 구원도 믿는 겁니다.
이유 없이 밤을 지새우는 겁니다.
저희의 목구멍은 입을 쩍 벌린 무덤이다고 합니다. 그 혀는 멋익감을 녹여버리는 독이다고 말이죠.
(시 5:9, 개역)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롬 3:13, 개역)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저는 이 부분을 볼때마다 늘 떠오르는 생각이
(롬 3:9, 개역)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개역)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개역)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개역)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개역)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개역)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개역)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바로
(롬 1:21, 개역)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구절이 같이 떠오르는데 하나님을 안다고 했는데
여기에 유대인 헬라인 다 포함된다는 겁니다.
즉 교회사람도 예외가 될수 없이 다 포함된다는 거죠.
결국 교회 다니는 것이 안전빵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모르도록 하는 사기집단 속에 들어가게 되는
교회가 세상보다 예수님을 더더욱 가리우는 존재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재로 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더 또렷하게 알수 있듯이 말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라
교회가 예수님을 완전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는 더 위험한 자들일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교회 탈출을 시도해야 합니다.
인간이 거룩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면 무조건 도망쳐야 합니다.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그러나 의인은
(시 5:11, 개역)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 5:12, 개역)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랄 뿐입니다.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을 믿을 뿐입니다. 자기 믿음조차도 거짓이기에
예수님의 믿음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 대조를 시편 59편은 다윗에게 나타난 사건을 상기하면서
다시 반복하고 또 다시 예수님에게서 그 실상이 나타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실상이 나타날때까지
이 사건은 비밀사건으로써
성령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지
한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버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결국 다윗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건은
모두다 비방받는 표적처럼
이 쪽과 저 쪽으로 갈라서 구분 구별되게 차이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마치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
양쪽의 강도가 이유없이 두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증상물로써
한 쪽은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천국이 땡기는 증상물로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지옥이 땡기는 증상물로써
두 개의 갈라진 세계를 나누는
그 기준으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셨다고 외치는
심판의 주이시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사건
십자가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
모든 사건은 벌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의 증상물로써 말입니다.
이미 두 쪽으로 갈라지는 사건으로써 말입니다.
아무리 한 나라 한 민족 같은 이스라엘 속에 있어도
또렷하고 명료하게 두 세계가 땡기는 증상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아무리 똑같은 강도짓을 한 같은 강도일지라도 말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속에서도 그렇고
같은 교회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를 오늘날 목사들은 증거할 줄 모릅니다.
왜일까요?
개 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배를 채우고자 하는 짐승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교회에서 짤립니다.
그럼 배를 굶게 되는 거지요.
이들에게는 찬양이 처음부터 이미 없었습니다.
이미 확정된 악인으로써 심판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장사를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어머니와 식사 중에 대화를 하다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없다고
가수 지망생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성가대가 없어서
노래 연습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성가대 대장 돈 안줘도 되고
성가대 지휘자 돈 안 줘도 되고
다 돈인데 괜찮네 라고 하시길래
대뜸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왜 성가대가 있는줄 아십니까?
성가대는 결국 돈 내라고 동원이 되는 자들이지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찬양이란 계시, 곧 묵시이지
사건이지
음악이나 노래가 아니다는 겁니다.
진짜 찬양자는 이런 교회의 목구멍인 열린무덤과 독사의 혀와 같은 독을
거부하면서
죽음을 통과하여 아침을 맞이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건이 찬양자에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가짜 찬양자 거짓찬양자는
이런 교회의 사기술에 같이 속아넘어가고 같이 또 속이고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개들끼리
짐승들끼리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같이 늑대같이 우우우 울부짖는 소리일 뿐입니다.
밤새도록 울부짖을 뿐입니다.
배를 채울수가 없기 때문에
밑빠진 장독대처럼 배는 늘 굶주려 있기 때문에 밤이 끝남이 없이 계속 배고파서 울부짖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함이 없이 무조건 배를 채울려고 아무이유없이 살인을 하는
짐승의 배요 지옥무덤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찬양자는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본인이 믿음이 좋아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음을 알았기에
그렇게 외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찬양하기를 실천해서가 아니라
비록 강도일지라도 처음부터 이미 찬양자로 태어났음을
십자가에 매달려서 드디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하신자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 두 세계를 갈라놓는
그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심을 알았기에
그 영광된 일에 참예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해서
아니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또 두 문둥병자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외칩니다.
비로소 외칩니다. 찬양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것이 사건으로써의 찬양입니다.
왜 그들이 문둥병자로 그 동안 살았겠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이미 아침을 맞이하는 자입니다.
누가 봐도 문둥병자요 누가 봐도 흑암의 백성이고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앉은뱅이인데
오히려 이들이 찬양자가 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오히려 실로암 소경을 정죄하는 멀쩡하다고 우기는 바리새인들이
짐승처럼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일꼬 하는 살인의지를
비로소 드러내는 겁니다.
그 동안 아무도 본적도 없었던 그 살인의지가
거룩으로 똘똘똘 포장되었던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자들이
진정한 악인들이였던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기준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감추어진 것들을 들추어내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도 그 속임수를 눈치채거나 알아본자가 없는데
예수님의 등장으로 드디어 그 거짓들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예수님은 죽기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끝까지 악인으로 몰리는 겁니다.
이것도 참 신비입니다.
즉 예수님 조차도 아침을 맞이하고 새벽을 깨우기 까지는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인줄 모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끝까지 오해 할 수 밖에 없도록
모든 인간은 저들 악인들의 살인의지에 휩쓸려서
같이 예수님을 죽어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같이 외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 마저도 주님이 뜻하신 바 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자력으로 이 예수님의 사니리오를 수정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사랑은
내가 그 용서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 마저도 주님이 하신 바입니다 라고
주님의 믿음이 옳았다고 외치는 찬양이지
찬양의 조건을 어떻게든 맞추어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찬양자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처럼
다윗이 그랬듯이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운명으로써 다윗이 격는 사건이
예수님의 증상물로써 다윗이 동원이 되고
찬양자도 동원이 되는 겁니다.
똑같이 악인으로부터 악인으로 취급받고 살해 당하는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운명입니까?
동참이나 참예 또는 연합할 자격 조차도 안되는 죄인일 뿐인데
참예 시키시는 그 주님의 열심에
그만 뿅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그렇게 원수들에게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하고
괴롭힘 당해도
결과적으로는 늘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보면 그렇게 악인들로부터 당하는 모습이
처량하고 늘 쫏기는 신세에 낙망할 뿐이겠지만
이런 일들의 사건을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벌리신 사건임을 봤을때에
기뻐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찬송임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점점점 다윗을 더욱더 괴롭히고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다윗은 더 기쁘게 찬양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보는 악인들은 점점점 채울수 없는 배를 채우고자
지옥의 무덤처럼 밤새도록 울부짖고
다윗은 점점점 더 크게 새벽을 맞이하면서 찬양부르는 겁니다.
이 사건을 벌리신 주님이 옳았다는 겁니다.
이 사건이 이렇게 미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악인들이 비아냥 거릴 때
오히려 이 사건이 하나님의 참 지혜였다고
이 지혜를 더 크게 외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이다고 노래 부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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