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라고 외치는 거룩한 전쟁 축제 즐기기 (시편 60)

 

 

(60:1, 개역)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60:2, 개역)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60:3,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60:4, 개역)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60:5, 개역)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60:6, 개역)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60:7, 개역)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60:8, 개역)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60:9, 개역)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60:10,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60:12, 개역)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

 

 

지난 시간에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모두다 그 어떤 사건도 십자가 사건으로 회귀되는 의미이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거리끼는 지혜이다고 합니다.

왜 십자가가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고 거리끼는 것이 될까요?

 

그 이유는 아무리 봐도 자랑꺼리가 될 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놀랍게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구원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인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이요

구원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참으로 놀라운 점이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저주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녀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 차이의 갭이 극과 극으로써 갈라지는 겁니다.

 

또 놀라운점은 이 차이의 간극이 오늘날에도 여전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으로써 구원만 딸랑 챙기는 용도이지

거리끼는 걸림돌로써의 차이의 간극을 벌리는 사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거리끼는 걸림돌의 요소가 없이 어떻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까?

말이 어렵나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십자가는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시고 주가 되게 하셨다 라고 외친다는 겁니다.
여기에 십자가가의 외침에 사람 구원이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 교회는 [너희가 죽인] 이 걸림돌의 부분을 빼버립니다. 유대인이랑 똑같죠
그리고서는 은근슬쩍 인간구원을 집어넣습니다.
혼합주의라고 그렇게 욕해놓고서는
교회운영이라는 핑계아래에 돈 때문에 인간구원은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구원장사죠.
이 뻔한 사기를 알면서도
사기치는 놈들도 다 알면서도
서로 서로가 다 알면서도 이것이 통하고 먹혀들고 소통이 된다는 점이
이 또한 신비입니다.
마귀가 괜히 유대인들을 장악해서 메시아의 3대 조건을 예수님에게 시험한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3가지 조건을 하나로 축약하면
인간 구원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아무리 봐도 구원은 커녕 저주이다고 보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져 주세요 라고 하던가요?

인간 구원용으로써의 십자가는 구원용이지 거리끼는 의미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괜히 저런 사고방식을 가진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세계의 정세와 경제와 사회문화를 다 쥐고서 쥐락펴락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의 의식을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다 장악한 자들입니다.
주체죠
주체가 없다고 외치는 철학, 신학의 선두주자들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괜히 세워진게 아닙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유럽문화를 창출하고 부흥시킨 자들입니다.

그런데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얼룩으로 작용하는 잉여입니다.

괜히 잉여가 아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잉여에 더 나은 잉여가 있는데

얼룩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더더욱 얼룩인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트라우마 곧 홈패임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억울하다는 둥, 피해자 라는 둥

핑계치 못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을 악용하여서 유대인 말살이 심심하면 작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로 얼룩으로써 작용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얼룩인 유대인들에게서 마저도 얼룩 취급받는

 

거리끼는 십자가는

유대인에게서는

자랑꺼리가 될 수가 있겠는가? 말이죠.


십자가를 빼고서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하고
십자가를 뺀 모든 사상에서 앞서서 뭐든지 다 할수 있는 유대인이

왜 쓸데없이 십자가를 추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우기면서도

정작 다윗이 말한 취지를 전혀 몰랐던 이유는

다윗 조차도 누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인물에 대해서

다윗을 쫏는다고 하면서도 그 인물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영원한 거리끼는 것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 조차도 그랬고

모세

베드로

심지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은 바울도 그랬는데

왜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이 아니라 자랑꺼리가 된 것일까요?


이 역설과 부조리와 모순과 불륜을 무슨 수로 자랑하겠습니까?
도리어 거리끼는 것인데요

자기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이
구원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큰 실족이 됩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죠.
 

결국 결과적으로 볼 때

결과를 원인으로 봤을때에

유대인들은 다윗을 쫏았다고 하지만

정작 사울왕을 쫏았던 겁니다.

다윗이 기다린 메시아가 아닌
사울왕을 이미 장악한
마귀가 요구하는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기에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이것 조차도 신비입니다.

오늘날도 현대교회를 보면 똑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용으로써의 십자가를 외칠때는 목청껏 외쳤지만

정작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이 자신의 치부와 연결된 상태에서의 자랑꺼리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거리끼는 이유는 자신의 치부와 동뜰어진 의미로 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론을 외치고 개혁주의를 외치는 겁니다.
치부와 맞물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행위와 억지로 연결시키고자 말이죠.
거리끼는 걸림꺼리와는 역여지기 싫은 겁니다.
그것을 기뻐하고 좋아할리가 없지요.
 

그래서 사람의 구원이 왜 헛된지 모른다는 겁니다.

구원과 연관된 입장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따져봐도 인간의 사고의 최정점에서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 봐도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성화론자들의 사고방식이랑 똑같습니다.
성화론자라고 해서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사람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기쪽에서 말씀을 지키겠다는 자들 말입니다.

 

이것이 육의 사고방식입니다.
육이라고 하니까 수준낮은줄 아는데 아닙니다. 인간의 최고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고방식은 바로 그 최고의 지혜를 비켜가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지혜로 일관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최고의 지혜는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에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반드시 맞물리는 거죠.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십자가가 사건이 아닌 셈입니다.

왜 이 사건을 반복하는 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사무엘하 8장에서 언급이 된 이 사건을 오늘 본문 시편 60편에서 왜 다시 언급하고 있는지

또 이것이 예수님의 활동에서 왜 다시 십자가는 반복이 되고 있는지를

유대인들은 알길이 없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사람이 구원받는 방식만 뽑아서 만든 종교인 셈입니다.

그들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종교와 다를바 없는 식의

인간 구원에 목적을 두고 성경말씀을 뽑아서 만들어낸 구원교리를 추구한 겁니다.


바로 이것이 마귀에게 인간은 사로잡힌바이고
갇힌바 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자랑꺼리가 될 수가 없는 거리끼는 저주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을 심판했던 이유도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심판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린 그 이유도

아무리 봐도 자랑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가 어떻게 자랑꺼리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육의 자랑에 십자가가 될 수 있냐 말이죠.
곧 유대인의 자랑에 십자가는 철천지 원수인 싫어버림바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처형에 가장 앞장선 최전방의 주도자 사도바울이

지가 그렇게 주도 해놓고

자기가 그렇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십자가의 지혜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아주 역설적입니다.
얍삽하게 지 혼자만 싹 빠져나온거죠.

 

그런 역설에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처럼 동참을 못하겠다고 거부하는 겁니다.

 

아니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도 다 얍삽하게 그랬는데

왜 이들은 그렇게 못할까요?

행함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령으로 일하시지

인간의 믿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땡겨주는 자가 없어서 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맞제? 라고 물어주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예수님 홀로 베드로에게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베드로를 정죄하기 바쁜데 말이죠.

결과적으로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인 겁니다.

그리고 알리바이로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십자가를 소홀히 여겼다고 말입니다.

거리끼는 걸림돌이지 자랑꺼리가 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십자가가 귀하다면 자랑꺼리로 노래부르고 나발을 불러도 신납니다.
이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노래가 안됩니다.
얼마나 신났으면 노래가 됩니까?
결국 시편은 십자가를 노래 하는 겁니다.
그 피 용서를 노래하고 자랑하는 겁니다.

이런 귀한 것 본적있냐고? 너무 너무 기뻐서 자랑이 멈추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이 귀한 보배가 있는데
이 든든하고 미쁘신 용서가 있는데
또렷한 증거가 있는데
명료한 확증이 있는데

왜 그딴 모호한 것들을 붙잡냐 말이죠? 배설물인데 헛된 것인데
인간의 구원은 우상이다는 겁니다. 약속을 못 지키는 겁니다.
허구 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칭 천국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우길뿐이지

역사속에서는 십자가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가

천국수저를 물고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국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우기면서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라는 복음을 거부하고 거리끼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이 이중성을 무슨수로 믿겠습니까?

십자가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가 천국수저의 천국시민인데

그들은 십자가 대신에 다른 것을 대치하는데

그것이 모세 제자라는 둥 다윗의 제자라는 둥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둥

선민이라는 둥
 

소위 사람을 내세우는 겁니다.

모세 다윗 아브라함의 구원은 헛됩니다.
그들 스스로가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은 헛되다고!!

그들은 정작 누구의 구원을 외쳤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지

자기의 구원을 보고 기뻐한게 아닙니다.

 

참 희한하지요 그들은 자기 구원을 자랑꺼리로 삼은게 아니라

그것은 행함이고

자기의 구원은 도리어 거리끼는 것으로 헛되다 라고 외쳤고

예수님의 구원인 십자가를 자랑꺼리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사람의 구원은 모호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호한 것에 비한 또렷한 것은 뭐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또렷한 것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구 보다 더 사도바울은 사람의 구원에 매진했던 자였고

그것이 모호한 배설물이였음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밝혔습니다.

십자가가 사도바울에게 조명빨로써 밝혀버리니까 다 들통나 버립니다.

거리끼는 것과 자랑꺼리가 분명하고 또렷하게 갈리는 겁니다.

 

누가 너희들 보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더냐?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괜히 성경에 기록된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은 거리끼는 것의 그 이상으로

싫어했습니다.

 

아니 십자가 사건 전 뿐만 아니라

성령행전(사도행전과 누가복음)에서 확정하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싫어했다고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듯 합니다.

구원이 이방에게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반발하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탕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 넘치는 것에 누가 가장 반발을 하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두 패로 갈려져서 사건이 벌어지듯이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도 이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사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사건말입니다.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는 전쟁으로 표현 된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역설적이냐 하면

딴 민족은 메시아 곧 구원자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유독 이스라엘 뿐인데

그래서 끊임없이 전쟁 속으로 집어넣으시는데

주님 혼자 축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죽을 맛이지요.

그런 이스라엘이 구원자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자를 자기 스스로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왜 십자가 일까요?

구원은커녕 예수야 말로 여지껏 나타난 악한 영들린 소위 마귀 중의 마귀이기 떄문입니다.

못땐 바리새인이 주도한게 아닙니다.

온순한 자들도 모든 성경박사들 다 동원해도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구원자(메시아)를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다른 타 민족도 아닌 자신의 민족이 구원자를 죽였다는 것은

인간은 구원 받은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다 라는 겁니다.

 

구원 줘도 못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 주시기만 하면

그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살수 있다고 우깁니다.

구원 줘 봐도 줘도 못 먹습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를 자주 언급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겁니다.

그럼 애초부터 처음부터 이 구원은 누구를 향한 겁니까?

유대인의 반복적인 실수인 뫼비우스의 띠에 언제까지 갇히겠습니까?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입니다.

성화론자들이 전형적인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자들 아닙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사람의 구원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에게 가능성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만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 성령께서 벌린 사건을 한 번 보자 말이죠

왜 사람의 구원이 헛된지!!!

 

십자가 사건에서도 밝혔지만

이 십자가 사건의 증상으로써 미리 벌어진 사건인 이 사건을 보고

왜 사람의 구원이 헛되고 거리끼는 것이고

오히려 예수인의 십자가가 자랑꺼리가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성령의 탄식을 성령의 노래를 통해서 알아 봅시다.

 

사무엘하 8장의 사건을 보면

정작 시편 60편과 뭔가 안맞습니다.

언발란스 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무엘하 8장을 보면 정작 전쟁에서 실패하는 구석은 없고

승승장구하는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전쟁의 승리에

정작 시편 60편은 반대로 우리가 다 죽게 되었사오니 제발 도와 주세요 라고 외칩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전쟁 승리를 외쳐야 하는 시, 노래, 찬송이어야 하는데

제발 구원해 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외치는 것이 사람의 구원이 헛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고서는

정작 전쟁은 승리로 장식이 되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계속 맴돌아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1주일 내내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으로 역설적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사고해야 하거든요.

 

뭐냐하면

제가 자주 로마서 7장 끝부분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고서는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서는 완전 딴판의 내용이 나열이 될 때

이 두 장의 연결 고리가 일체 없다고

그래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인과법칙에 따르지 않는

심은대로 거두지 않는 심은대로 거두는 식이다는 겁니다.

 

(6:7, 개역)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8, 개역)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즉 역순이다는 겁니다.

 

이미 전쟁의 승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가 그 결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원인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가 아니라 전쟁의 승리가 원인이고 즉 우리가 최종결과라고 보고 있는 것이 사실상 원인이고 즉 미래가 원인이고 완료가 원인이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는 과거 곧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로 표현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심는 것은 영이 심지 육이 심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시편 60편의 의미가 이해가 될 겁니다.

분명 전쟁의 승리의 분위기인데

왜 마치 전쟁에서 패하는 분위기로 노래를 할까?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말이죠.

 

사실상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는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해석을 전쟁 도중에 위기가 닥치고 실패 곧 전쟁에서 패하는 분위기가 되니까

 

긴급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다윗의 기도가 먹혀들어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고 이 시편 60편을 해석하더라 말이죠.

 

그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 반대의 해석이다는 겁니다.

 

이미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육의 전쟁이 아니라

또 다윗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본인의 전쟁입니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승리가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 승리의 결과로써 표출되는 것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외침이다는 거죠.

 

시간의 순서상 전쟁에서 패하는 분위기를

다윗의 기도와 호소 때문에

역전이 되었다 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 반대이다는 겁니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그 전쟁승리의 증상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로 외쳐진다 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주님이 승리하신 것 맞네요 라는 겁니다.

 

그럼 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를 집어넣는 것일까요?

 

서로의 소욕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목적이 사람의 구원이 목적이다는 해석이

유대인의 해석으로써 이것이 그만 자랑꺼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자부심이 곧 그들의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앙은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신앙을 거부합니다.

그럼 십자가가 자랑하면서 외치는 것은 뭡니까?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외치는 것이 십자가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니까

사람들이 비로소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보고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쫏아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도망치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판국인데 절대 포기할 리가 없지요.

끝까지 따라잡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왜 자꾸 도망치십니까?

저희가 당신을 구세주로써 믿고자 함입니다.

우리들의 임금이요 구원자가 되어 주세요

 

예수님은 거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는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십자가를 본 까닭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6:16, 개역)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6:17, 개역)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6:18, 개역)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6:19, 개역)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6:20, 개역)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6:21, 개역)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6:22, 개역)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6:23, 개역)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

(6:24, 개역)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6:25, 개역)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즉 표적으로만 관계를 맺는데 이 요나의 표적이

악한세대의 표적과 대치되는 표적으로써 거리끼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왜 십자가가 거리끼는 것인고 하니

유대인은 기적의 신앙입니다. 표적의 신앙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기적 앞에서 안 믿고는 못 배길 정도로

기적이 곧 잉여가 앞도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적 마저도 거부하는 또 다른 더 나은 표적이 있는데

이것이 십자가 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양식을 먹는 유대인이라는 만나를 먹는 민족이

그 만나 마저도 썩는다는

그 기적 마저도 썩는다는 것을 인식 시키는 겁니다.

 

기적이 썩어요 썩어

 

그래서 썩지 않는 양식

썩지 않는 표적을 주시겠다는 데

그 표적을 안 볼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유는 이미 썩는 기적이 자리잡아버린 겁니다.

그 기적이 썩고 부패하고 베설물처럼 여겨져야

싫어하게 될 텐데

 

이미 싫어하기는커녕 좋아해 미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만 펼쳐지는 그 구원이

싫키는커녕 좋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기적을 넘어서는 기적을 받은자들이 졸지에

기적적으로 생겨났습니다.

 

바로 다윗이요 모세요 베드로요 사도바울이요 성령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사람의 구원이 헛되고 냄새나고 썩고 부패하고 배설물임을

그것도 이들이 잘나서가 아닌

주님이 자기 목숨 버려서 겨우 겨우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것을 외치게 되니

사실상 이스라엘에게서는 이단입니다.

아니 사실은 이스라엘 자체가 이단적인 존재인데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도리어 이단이 안될려고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에 말려들게 되는데

그 이유가 사람의 구원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정작 인간 종교의 신앙인 사람구원을 거부함으로써 등장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똑같이 사람 구원이 가치가 있다고 외치는 꼴이 되어 버리니까

 

이스라엘 내부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구원은 마치 지난 시간의

이미 확정된 악인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먹어도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와 같다는 겁니다.

 

사울왕이지요.

이 사울왕 개인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꼭 사울왕의 모습처럼

성화론자들이 외치는 인간구원처럼

그 모호한 의문의 짖을 채워도 채워도 여전히 갈증만 더해지는

지옥의 입과 같은 겁니다.

 

바닥이 없어요 바닥이

밑빠진 장독처럼

그래서 밤새도록 다윗도 죽이고

모세도 죽이고

바울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고

아무리 죽여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겁니다.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여서

잠을 잘수가 없다는 거죠.

 

반면에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고 합니다.

밤을 통과해서 아침을 맞이하는 찬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찬양자는 이 아침을 노래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아침이 끌여당겼기에 맞이한 것이니까 말이죠.

찬양해서 찬양자가 아니라

찬양자로 삼으셨고 찬양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찬양하는 겁니다.

 

이 말은 사람의 찬양은 헛되다 라는 겁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듯이

 

이것이 용서의 왕 중의 왕 비유인 일만달란트 비유에서 나타난

사람의 용서받음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용서의 왕만이 빛나도록 하는 비유가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시편 60편에서 전쟁 승리가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를 외치는 찬양자를 후차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 곧 차이성인 겁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특징입니다.

 

인간이 전쟁에서 승리하던 실패하던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거룩성만이 돋보이도록 되어 있는 전쟁이기 때문에

주님 손해 보시는 것 하나 없습니다.

 

이것이 또렷하고 명료한데

 

왜 인간의 구원이라는 모호한 것에 빠지느냐 말이죠.

인간 구원이라는 강요된 선택과 이데올로기에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또렷하게 그런 것을 박살내시는 겁니다.

어딜 감히 흐릿한 것을 들이대느냐 말이죠.

또렷한 명료한 완료를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찬양자입니다.

 

자기 전쟁 승리를 외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전쟁 승리해 봤자

그 뒤에 또 다시 벌어지는 전쟁에서는 모호해 지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전쟁할 때 붙잡는 칼 병거 창 이런 것들이

사실상 모호한 것들이듯이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사람들은 자기구원을 붙잡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요나의 표적)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잡는 겁니다.

힘이 될까봐?

 

예수님을 붙잡고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도

힘이 되는 줄 알고 붙잡는데

사실은 그거 힘이 안됩니다.

예수님이 전혀 힘이 안되는 겁니다.

더군다나 십자가는 있는 힘 마저도 쪽쪽 빼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호한 것을 붙잡은 셈이니까 말이죠.

썩고야 마는 만나처럼

썩은 동앗줄을 잡은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여호와가 일으킨 거룩한 전쟁은

승리하라고 일으킨 전쟁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했는데 뭘 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까?


정작 거꾸로 하는 전쟁입니다.
항상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전쟁에 참예할때에는
승리하라고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했기에 왜 승리를 누려야만 하는지를 누리기 위해 하는 전쟁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이미 끝난 전쟁을 가시화 하듯이
다시보기 하듯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정작 전쟁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에 몰두합니다.
바로 할례 입니다.

힘의 근원을 모조리 차단하는 방식의 전쟁을 누리는 겁니다.
전쟁은 고대에서는 축제이자 제의의식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할례를 단 한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지도록 되어 있고
할례를 다 하면 전쟁의 양 진영의 힘의 우열과 상관 없이 이기도록 되어 있는
이상한 전쟁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자기구원을 위해 붙잡는 것이 힘을 붙잡는 식이 되면

그렇게 되면 모호한 힘을 붙잡을려고 할테고

또 그렇게 되면 또다시 전쟁에서 또 더 큰 힘을 모을려고 모호한 짓만 반복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보로매우스 매듭 굴레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로또 복권에 미치는 이유는
필요한 만큼의 재원을 원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힘이 되는 것을 모조리 다 끌어모을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유없이 나는 무조건 강해야만 하고
이유없이 나는 힘이 커야만 하고
이유없이 나는 무조건 구원 받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다 힘이 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이상한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마저도
할례 자체가 또 역시나 힘이 되어버립니다.
힘을 빼라고 행하던 할례가
이제는 거꾸로 힘을 추구하는 할례가 되어버리니까
그런 기적(로또)이 되어 버리니까
그런 악한 세대가 요구하고 달라고 하는 기적이 되니까

할례를 넘어서는 할례인 마음판의 할례와
악한 세대가 달라고 하는 기적을 넘어서는 기적인 요나의 표적을 주시겠다고 하니
다들 싫어하고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는 겁니다.

결국 다윗 조차도 힘을 추구하다가 야곱의 허리 부르뜨리듯이
허리를 치시고 힘을 뿌러뜨리니까
이제 다윗은 힘을 빼는 전쟁을 노래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든 이기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외칠수 있을까요?

시편을 어릴적부터 달달 외우고

찬양의 달인들이고

기도의 달인들이고

회개의 달인들이고

구제의 달인들

믿음의 달인들

기적의 달인들

그 어떤 것을 다 갇다 붙여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달인 중의 달인인 유대인들에게

 

이것 하나 만큼은 딱 걸려 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무조건 싫어하고 거부하는

십자가는 아무리 아무리 해도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라는 의미 조차도 힘에서 나오지 않았다.
즉 육에서 나오지 않았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말해야 노래하고 찬양해야 하는 이스라엘이
힘의 전쟁을 자꾸 노래하게 되니
힘을 빼는 거룩한 전쟁을 노래 부르기 싫어하더라 말이죠.

나사렛 예수 이름을 싫어하더라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들은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외치는 다윗의 찬양을

사실은 거부하고 싫어하면서도 찬양 부르는 척을 한다는 거죠.

 

오늘날 우리들이라고 다를바 없습니다.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십자가든 모조리 다 힘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반대의 의미인데

다른 종교들의 신앙 대상물과 똑같이 힘으로 보는 겁니다.

유대인이 인간 모든 인류의 대표성으로써

우리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다들통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찬양 부르는 척 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의해 걸려 넘어져 실족하게 됩니다.

 

진짜 찬양자 앞에서 가짜 찬양이 들통나게 된다는 겁니다.

진짜 찬양자는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를 노래 부르고

가짜 찬양자는 사람의 구원은 그래도 의미가 있다고 노래 부르는데 있어서

서로의 소욕성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는 고맙게도 이런 우리의 속임수를 마구 마구 들통내 버립니다.

어딜 감출려고 하느냐 말이죠.

 

또렷하고 명료하게 밝혀 버리는 겁니다.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신학과 철학과 종교 그리고 교회는

그래서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고 외치는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 마저도 사람구원용으로 포장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십자가가 즉 예수님의 죽음이 사람도 아닌데

움직여서 그런 인간의 활동을 들통내더라 말이죠.

 

뭐 임금삼겠다고? 나를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는

나를 구원자로 삼고자 하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고

 

구원자 되심을 거부하시겠다고 합니다.

 

우와 이거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삼겠다는데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거부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신앙의 대상물로 삼을려고 하느냐 말이죠.

대상물로 삼겠다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는 겁니다.

 

표적을 보게 되면

나의 진짜 속내가 들통나는 겁니다.

저런 십자가에 달린 자를 믿으라고?

나 마저도 죽을텐데???

 

저 십자가가 무슨 구원이 되며

무슨 힘이 되며

무슨 전쟁의 승리가 되느냐 라는

나의 진짜 속내가 들통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나의 임금으로 삼겠다는 자체가 힘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통난 겁니다.

이미 들통내고 시작했는데 바로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님에게
제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구원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세가지 시험이였던 겁니다.


돌을 떡 덩이 되게 하라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쳐주는 기적을 베풀라

(시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받아라


즉 힘이 되어 달라 그런 메시아 그런 구원자가 되어 달라 라고 요구할때

예수님은 거부합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메시아를 마귀가 외치고
오늘날 거짓 영을 받은 자들이 외치는 겁니다.


결국 마귀는 유대인을 장악한 그 내막을 보여준 겁니다. 힘 힘 힘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예수쟁이들은 모조리 다 죽여버려야 해 라고

이단을 잡겠다는 심정으로 스데반도 죽이고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 그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또 더 나아가

나의 가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나의 이웃과 나의 민족과 나의 국가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도 죽이고 예수쟁이도 다 잡아 죽여야 하는 겁니다.


마귀에게 제대로 사로잡힌 자로써 열심 중에 열심이였습니다.

(빌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런 열정이 바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의문의 짖임을 밝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내 손에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라는 요나의 표적이였다 라는 거죠.
내가 그렇게 없에버릴려고 죽이고자 했던 그 십자가가 나의 눈을 제대로 밝혀 버린 겁니다.

(빌 3:1, 개역)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빌 3:2, 개역)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3, 개역)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4, 개역)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개역)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개역)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 3:7, 개역)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개역)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1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개역)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2, 개역)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나의 구원 때문에 죽임을 당한 십자가 라는 겁니다.

나의 구원은 모호한 뫼비우스의 띠인데

그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죽음이였다는 거죠.

 

나의 구원에 전혀 힘이 되지 않는 십자가

 

결국 힘을 쫏았던 겁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그 힘

힘이 없으면 죽어야만 하는 전쟁에서

힘을 쫏지 않는 전쟁이 있다는 것은

있을수 없거든요.

 

그런데 힘으로 하지 않는 전쟁이 바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자는 외치는 겁니다.

힘으로 하지 않는 전쟁

이미 승리한 전쟁으로써

펼쳐지는 전쟁

그러니 믿음의 세계이지

행함의 세계이거나 또는 육의 눈으로는 전혀 볼수가 없는 전쟁이

따로 펼쳐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 속에서만

 

이스라엘도 거부하는 전쟁을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이 전쟁을 볼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하시더라 말이죠.

이것을 보고

이 표적을 보고

다윗을 찬양하는 겁니다.

 

나의 승리, 나의 구원이 아닌

그런 모호하고 썩어야만 하는 흐릿한 전쟁이 아닌

 

명료하고 또렷한 완료의 승리인

십자가의 승리를

지금 찬양자 다윗은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고 ~~~~~~~

 

(삼하 8:1, 개역)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삼하 8:2, 개역)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삼하 8:3, 개역) 르흡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저를 쳐서

(삼하 8:4, 개역) 그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삼하 8:5, 개역)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이고

(삼하 8:6, 개역)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삼하 8:7, 개역)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삼하 8:8, 개역) 또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삼하 8:9, 개역) 하맛 왕 도이가 다윗이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삼하 8:10, 개역)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로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함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삼하 8:11, 개역)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삼하 8:12, 개역) 곧 아람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에게서 얻은 것들과 소바 왕 르홉의 아들 하닷에셀에게서 노략한 것과 같이 드리니라

(삼하 8:13, 개역) 다윗이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이고 돌아와서 명예를 얻으니라

(삼하 8:14, 개역)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삼하 8:15, 개역)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삼하 8:16, 개역)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삼하 8:17, 개역)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삼하 8:18, 개역)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대신이 되니라


(대상 18:1, 개역)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가드와 그 동네를 빼앗고』

(대상 18:2, 개역) 『또 모압을 치매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대상 18:3, 개역)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권세를 펴고자 하매 다윗이 저를 쳐서 하막까지 이르고』

(대상 18:4, 개역) 『그 병거 일천 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고 그 병거 일백 승의 말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대상 18:5, 개역) 『다메섹 아람 사람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을 죽이고』

(대상 18:6, 개역)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대상 18:7, 개역)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의 가진 금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대상 18:8, 개역) 『또 하닷에셀의 성읍 디브핫과 군에서 심히 많은 곳을 취하였더니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들을 만들었더라』

(대상 18:9, 개역) 『하맛 왕 도우가 다윗이 소바 왕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쳐서 파하였다 함을 듣고』

(대상 18:10, 개역) 『그 아들 하도람을 보내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이왕에 도우로 더불어 여러번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파하였음이라 하도람이 금과 은과 놋의 여러가지 그릇을 가져온지라』

(대상 18:11, 개역)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 등 여러 족속에게서 취하여 온 은금과 함께 하여 드리니라』

(대상 18:12, 개역)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을 쳐 죽인지라』

(대상 18:13, 개역)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대상 18:14, 개역)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대상 18:15, 개역)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대 장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대상 18:16, 개역)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비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사워사는 서기관이 되고』

(대상 18:17, 개역)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 다윗의 아들들은 왕을 모셔 대신이 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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