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 시온에서 주의 이름을 노래하다 (시편 87편)
세상의 근원에서 우물가의 여인이 그리스도를 외치다.
(시 2:6, 개역)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 87:2,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5, 개역)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 87: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시 87:2,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3, 개역)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 87:5, 개역)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 87:6, 개역)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시 87:7, 개역)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요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 개역)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 개역)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 개역)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 개역)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개역)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 개역)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 개역)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 개역)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 개역)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9, 개역)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0, 개역)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 4:41, 개역)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 개역)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왜 하필이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외치고
세상의 근원이신 구주 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왜 유대인이 아니냐? 말이죠.
이것을 요즘식으로 하면
왜 하필이면 한국교회 다니는 자가 아니라, 역사 속에 원수로 자리 잡은 일본인이 예수님을 구주라고 외치고
세상의 근원이신 구세주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왜 한국 독입 운동을 펼친 기독교인이 아니라, 매국노 친일파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시온이라는 의미입니다.
시온이 부각되는 것은 사울 왕이 죽고 난 뒤부터입니다.
사울 때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은 그럼 사울이 죽기 전에는 몰랐나?
네 몰랐습니다.
사울이 죽고 난 뒤에도 몰랐습니다.
다윗은 그럼 언제 시온의 의미를 알았는가?
한 참 뒤의
그 유명한 밧세바라는 남의 아내 곧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난 뒤부터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안 겁니다.
그야말로 다윗의 범죄는 십계명의 율법에 정면 도전한 셈입니다
무슨 수로 벗어날수 있겠습니까?
원수가 되었는데
철천지 원수가 된 다윗인데 ~~~
그래서 원수로 만든 미래에서 시온이 덮쳐져서 벌어진 사건인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 곧 십자가의 때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앞의 글들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주로 하는 착각이, 저나 여러분이나 오해를 하는 것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고 했을때에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와 마 25장의 종말의 3종 세트 비유에서 나오는데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비유 자체가 우리와 연결을 시도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예 동일시 할려는 마음을 처음부터 접어버리자 말이죠.
나와 상관이 없이 여겨라 말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내 쪽에서 그 조건에 부합되는 것을 만들어 낼수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오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의미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조건을 내 쪽에서 갖추어버리면
주님 쪽에서 다가오심으로 만들어낸 긍휼에 의해 오히려 실족케 됩니다.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 예수님이 미워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낯을 변하게 만들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긍휼의 자리이지
우리가 긍휼에 맞는 그 어떤 조건도 만들어 낼수가 없습니다.
고로 인간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뭘 해도 거짓되는 믿음이기에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안그러면 자꾸 나와 어떤 연결 고리를 억지로라도 연결 시키고자 발악을 하게 됩니다.
이게 소위 성화론자들 아닙니까? 개혁주의도 마찬가지.
성령이 단절이 아니라 개방이다고, 가능성이다고 우기는 놈들도 이런 일치성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종교성이다는 겁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오기와 신념인 겁니다.
차라리 "있는 자는 더 받고" 에서
우리 자신을 "있는 자"에 넣지 말고
차라리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없는 자"에 넣어버리라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 자체가 동일시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뭘해도 엉터리 이기 때문입니다.
그 언어장난은 성경을 가지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마귀가 놓치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마귀가 들어가서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고
마치 예수님을 디기 디기 생각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은
언어장난에 빠진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사단아 썩 물러가라 라는 소리를 사랑이신 예수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충격을 먹고 인간의 언어장난에 놀아나지 않는다 말이죠.
자기 자신의 언어놀이에 놀아나지 않게된다 말이죠.
언어는 어디까지나 소유욕이거든요.
나의 예수는 십자가 지면 안된다는 거거든요.
어떤 목사는 이것을 다시 역으로 해서
십자가를 외친다고 해서 그 말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고 다시 말장난을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여전히 수준높은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또다시 말장난을 고수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물과 기름이 썩여질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치는 겁니다.
마치 육과 성령이 하나가 될수 있다는 성화론이라는 가능성을 말이죠.
이 가능성이 과연 의문의 죽이는 것이 아니다는 보장이 될수 있을까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아닙니까?
물론 저들도 방금 한 이 말을 다시 역으로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한다고 공격해 버리면
역시나 똑같은 방식이 됩니다.
고로 저들이 원수를 사랑하자 라는 말을 지키겠다는 것이 거짓인 거죠.
이단 만들기 참 쉽죠?
언어의 권력으로 눌러버리면 마음에 안드는 놈 다 이단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령은 이단 감별사로 자처하도록 만들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냥 이단 감별사들로 부터 정죄 당하는, 그냥 이단 중의 이단 되시면 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는 소욕싸움이 벌어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물론 저들에게는 거짓으로 들리겠지만
이게 성경에 나와요
예수님이 이단 중의 이단이 되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어차피 육 곧 사람의 일은 관심이 없거든요.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 두신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왜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 구주라고 칭하심을 받는가
가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아 사마리아인이 동원이 된다고? 이단 사마리아인?
아니요 ㅋㅋㅋㅋ
유대인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성화론자들이 동원이 되어야 하고
개혁주의자들이 동원이 되어야 하고
정통 정통 이라고 우려먹는 자들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왜? 주의 이름 때문에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누가 가장 반발하고 거부하는고 하니 주의 이름을 늘상 내 뱉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소위 믿는자들이 늘 상 내 뱉는 자들이 동원이 되어야 하지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심인고 하니
주의 이름을 절대로 부를수 조차도 없는 개같은 이방인
즉 주의 이름이 뭔지도 조차 모르는 자들
이렇게 명확하게 규정당한 자들에게서
주의 이름을 외쳐질때에
누가 시기를 한다?
늘상 주의 이름을 내 뱉음으로써 성경과 동일시했던 자들
일치 시킬려고 했던 소위 종교인들이
비로소 이 주의 이름 때문에 시기를 하게 된다 말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이 뭔지 아는데 정작 주의 이름 앞에서 주의 이름을 못 부릅니다.
왜냐 우리가 늘 상 내 뱉었던 주의 이름이 진짜 주의 이름 되신 예수님과 일치 안하더라 말이죠.
얼마나 얼마나 성경말씀과 일치할려고 주의 이름을 불러왔고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말씀적으로 제대로 된 사상으로 전수시켜왔던 주의 이름인데
정작 실상인 예수님을 보니 주의 이름은커녕
아주 아주 일치와는 거리가 먼 정반대로
매국노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죄인의 친구로써 막사는 자더라 말이죠.
주의 이름에 맞는 신부가 되고자 얼마나 막살지 않을려고
조신 조신 안막살기 운동을 펼쳤는데
이건 뭐 예수님이 각설이네? 술에 거하게 취해서
저 거렁뱅이들과 죄인들이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차다 말이죠. 이게 무슨 구주이냐 말이죠.
구세주가? 그리스도가? 메시아가? 예수가
막살기의 달인으로 자처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예 대 놓고 막살아요 막살아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니
가장 그 부분에 예민한 바리새인에게
아예 이단 삼으라 제발 제발 아 제발요 ~~~ 라고
코 앞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이기는커녕 마귀 중의 마귀인 대마왕 바알세불 귀신이 들린 마귀 대왕이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일치성과 개방성과 가능성을 추구함에 있어서 말씀을 연구한 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의 이름도 모르면서 주의 이름을 외치는 사마리아인은
구주 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시온에서 비로소 외치는 구주이다는 거죠.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시온은 세상을 중심입니다. 거기서 누가 나냐? 누가 태어나냐? 바로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결국 주의 이름 때문에 시온이 세상의 근원이자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마치 빈공터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이지 않습니다.
보고 있어도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수가 없습니다.
구주, 구세주 되신 분인줄 알수 없다, 눈치 챌수가 없다 말이죠.
예수님 본인도 내가 누구인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숨기십니다.
숨길려면 이렇게 숨겨야 합니다. 24시간 확성기로 대남방송을 틀 듯이
예수님은 구주 이시다 크게 방송하고서는 내가 구주인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숨겨야
그것이 진짜 숨기는 것이다 말이죠.
마치 오른손이 한 일을 대놓고 방송해 놓고서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겁니다.
즉 불가능성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결국 주의 이름을 안다 우리는 안다 라고 우기는 말장난 하는, 언어장난 하는 자들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누굽니까? 물론 의도적으로 멀다 가깝다 라는 것을 우리가 설정할 수 없으니 하도 하도 인간이 그런 말도 안되는 언어장난을 펼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부정에 부정으로써 가장 멀리 있는 자를 앞세워서 언어장난이라는 일치성을 깨뜨리는 겁니다.
그러면 가장 멀리 있는 불일치성인 언어장난을 잘 할줄 모르는 문맹자
언어와 단절된자.
특히 소경, 벙어리, 문둥병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등
특히 날 때부터 소경,
사고로 인해 중간에 시력을 잃은자가 아니라
문자를 알았는데 시력을 잃어버러서 소경이 된자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소경이라서 문자도 글도 아예 모르는
빛을 아예 뭔지로 모르는
주의 이름이 뭔지로 모르는 그런자에게서
주의 이름이 불리어 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 그 자체 라는 겁니다.
그런 개같은 이방인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에게서 주의 이름
곧 그리스도 라고 외쳐진바 되는 일을 곧 사건을 곧 때를 벌리신다는 겁니다.
시온이 벌리는 겁니다.
시온을 의인화 인물화 하면, 시온이가 이런 사태를 벌리는 겁니다.
이것이 불가능성으로써의 은혜 개념입니다.
은혜의 모태가 되는 것이 바로 시온이고 말이죠.
다윗 이전에는 이 시온이 없었거든요.
모태 말입니다. 예루살렘성 말입니다.
다윗의 후예, 솔로몬 왕이 짖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태로써의 근원지
긍휼의 자리
처음 자리
바로 앞의 글에서는 소자의 자리
이 은혜의 자리가 바로 시온이며
그 시온에서 태어난 자가 뭘 외친다?
주의 이름을 외치는 겁니다.
그럼 그 처음자리를 유대인이라면 오히려 더 잘 외쳐야 하는데
입으로는 찬송하나 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 자들이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약 3:8, 개역)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9, 개역)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약 3:12, 개역)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찬양의 달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찬양 할 줄 모르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 라고 외치지 못하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일치성이 아니라
은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려는 탐욕이 될수 없는 은혜이기에
찬양이는 반드시 출애굽 사건을 다시 발생케 하는 겁니다.
찬양이가 말이죠.
찬양과 춤은 바로 이 시온에서
세상의 모든 근원지인 시온에서 벌어지거든요.
구약은 그래서 땅이 중요합니다. 씨앗이 이 땅을 근원으로 해서 열매를 맺으니까 말이죠.
그냥 땅이 아닌 약속의 땅 말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땅도 무대뒤로 빠져 버립니다. 그냥 씨앗 그 자체로 열매 맺습니다.
지난 번에 땅과 약속 (시편 65편)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땅 그것도 약속의 땅만 신경 쓴다고 했습니다.
곧 시온입니다.
인간 구원 관심 없어요.
시온만 관심 있다 말이죠.
그러니 모든 인간 다 사라져도
시온만 있으면 거기서 다시 태어나게 해 버리면 됩니다.
뭐가 아쉬워서 인간 구원하는데 신경 씁니까?
시온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돌들을 취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들면 됩니다.
예수님 자체가 땅 곧 근원이 되고, 씨앗도 되고
혼자 1인 3역 혼자 다 하십니다.
구약은 스크린 이라는 보이는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신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이미 다 완성해 버린 겁니다.
그 찬양과 춤이 바로 출애굽사건으로 인한 구원으로 인한것이거든요.
이것이 시온에서 벌어지니까 말입니다.
시온에서 나오는 것이 찬양과 춤이니까 말입니다.
(시 87:7, 개역)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이 시온에서 태어나서
세상의 근원이 되는 그 중심인 시온에서 태어나서 노래와 춤을 추는 겁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습 3:9, 개역)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니』
(습 3:9, 새번역) 『그 때에는 내가 뭇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습 3:9, 공동) 『그런 다음 뭇 민족의 입술을 정하게 하여 모두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를 섬기게 하리라.』
(습 3:9, 쉬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 날> “그 때에 내가 모든 나라 백성의 말을 깨끗이 하겠다. 누구나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 함께 나를 섬기게 할 것이다.』
(습 3:9, 한글킹) 『그때에 내가 백성에게 순수한 언어를 돌려주리니, 그들이 모두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한마음으로 그를 섬길 것임이라.』
(습 3:9, 현대인) 『그 때에 내가 모든 민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협력하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습 3:9, 현대어) 『[이방인들의 전향]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때가 되면, 내가 뭇 민족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더 이상 어떤 우상의 이름도 부르지 않도록 하겠다. 그들은 모두 입술이 정화되어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한결같이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모든 인간의 입술이 부정하지 않은자가 없는데
말로 언어로 장난질 안 하는 놈이 없는데
그 부정한 입술을 숯불로 지져서 깨끗하게 만드는 사건의 근원지가 바로 시온
바로 십자가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노래와 춤을 추게 하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은혜의 언어가 아니라, 선악의 언어에 빠져서 동일시가 안되면
그 어떤 동기부여도 없이 노래나 춤이 나오질 않도록 되어 있는데
원인 없는 결과로 노래와 춤이 막나오는 겁니다. 막살아요
그 이유가 바로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긍휼이 일방적인 편파해석을 해서 그런 겁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인 시온에서 벌어진 것으로써
때가 차매
사건으로써 때 가 참으로써
주의 이름이 벌리는 자작극이 됨에 있어서
모든 열방들이 동원이 되고 배치가 되는 겁니다.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 87:5, 개역)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 87:6, 개역)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구스 여인이 모세의 온유로 인해서 긍휼을 입지요?
그것을 미리암이 방금 찬양해 놓고서는 시기를 해서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모세의 기도로 인해 다시 들어오게 되듯이
이방나라 구스 여인이 새롭게 태어나는 긍휼을 입는
은혜를 입어 새롭게 태어나는 장소가 바로 시온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온유 때문이다는 겁니다.
구스여인아 너 어디에서 태어났니? 저는 구스에서 태어난게 아니요 시온에서 태어났어요.
이것이 구약적 표현으로써의 장소 개념이고
신약에서는 공간 장소 시간 개념이 날라가 버리니까
이렇게 표현이 됩니다.
구스 여인아 너 어디서 태어났니?
저는 구스도 아니요, 야곱의 우물도 아니요, 예루살렘 성도 아닌
십자가에서 태어났어요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그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겁니다.
베드로야 너 어디서 태어났니?
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 자리에서 나는 태어났고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예수님이 더 잘알아 라고
입에 침도 안바르고 뻔뻔스럽게 세 번 부인해 놓고서도 세 번 사랑한다고 외치는 겁니다.
그것은 베드로 라는 인간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베드로는 구원받는 자신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이 중요하고
시온이라는 처음자리 은혜의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벌린 자작극으로써 베드로는 십자가의 피 용서 사건을 누린 겁니다.
그럼 다윗은?
긍휼을 베푸는 자리인 남을 7번 용서라는 자리
또는 율법에 따라 네 배나 갚으라 라는 판결의 자리입니까?
그 놈이 너다 ~~~~~~~~~
아니면 긍휼을 베품 당하는 죄인의 자리인 용서의 자리입니까?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3일의 간극인 용서의 자리이냐 말이죠.
왜 다윗이 시온을 외치는 겁니까? 자신이 거기서 태어났거든요.
십자가 라는 장소가 아닌, 어떤 사건으로써의 십자가 사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건이라는 때 라는 개념입니다.
십자가는 장소개념이 아니라 사건개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장소에 성지순례 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장소 개념이 되어버리면 시오니즘으로 빠질수 밖에 없겠지요.
요즘은 유대인들 중에 시오니즘이 잘못되었다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던데,
십자가에서 태어나는 영의 또렷함을 거부하기는 역시나 마찬가지 입니다.
의문의 반복이니까 말입니다. 주의 긍휼이 덮쳐지지 않는 이상 벗어나봐야 제자리 뛰기 입니다.
역사가 아니라 묵시가 역사 속으로 쳐들어 오는 개념을 "때" 라고 "사건"이라고 하는데
역사는 오히려 나 아니요 라고 배경으로 깔리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때 또는 사건이 옳았습니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부정당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 남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요 자기부인입니다.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저는 성경 처음 읽었을 때의, 아니 읽었을 시간에 요한복음을 읽으라고 하길래
읽었는데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구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라고
그냥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시간"이 오나니 곧 이 "시간"이라 라고
시간이라는 표현을 쓰면 될 것을 왜 구지 어려운 “때” 라는 생소하고 낯설기 짝이 없는 표현을 쓸까?
예배드릴 시간이다 라고 하지, 예배드릴 때 이다 라고 하지 안하잖아요
아 현대표현이 아니라 옛날 문서의 표현의 바탕으로 해서 그랬구나 라고
단순히 "때" 라는 표현을 "시간"과 동일하게 봤는데
"때"가 그런 "시간"이나 "역사" 개념이 아니라, 그런 동일시가 아니라 정반대로 차이성이다는 겁니다.
차이 곧 간극이다 말이죠. 때는 카이로스 사건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 미래에서 쳐들어오는 방식이고
시간 크로노스는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이다는 겁니다.
사건 개념 곧 사마리아 여인에게 출애굽사건으로써 벌어진 의미이다는 겁니다.
시간의 반복이 아닌, 출애굽시간이 아닌, 출애굽사건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문의 반복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차이의 반복 말입니다.
3일의 간극의 반복인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시온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족히 역사와 비교가 안되는 거죠.
사실 역사 라는 과거는 승자의 기록물을 바탕으로 합니다.
기록이 없으면 알 길이 없고
그 기록물 마다 저마다의 시선을 좁히고자 하는 객관적시선이 따로 있어야 하니까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무슨수로 주관성을 배제하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사건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인간 역사 속에서는 사건이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때" 가 있을 수 없어요.
시온이 있을수 없다 말이죠.
때 때 때 때 때 때 때 때 주주클럽이 백날 때 때 노래 불러도
때는 없어요 그저 나는 나 일 뿐이다 라고 의문의 죽이는 것만 반복할 뿐입니다.
아제 개그 ㅋㅋ
시온에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이 없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어쩔수 없이 역사를 객관이라고 우기는 말장난을 하면서
(철저하게 주관적이지 말이지 말입니다.)
정작 본인들이 말장난에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거죠.
누가 와서 알려주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누가 알려주겠습니까? 빌립 아닙니다.
성령만이 하신다는 겁니다. 빌립은 성령에 의해 배치를 오히려 당하죠.
빌립이 믿어야 할 판국입니다.
그럼 성령이 가능성이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정반대이지요. 단절성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의 자리입니다.
거룩이 휘감아서 둘을 만나게 한 겁니다.
이 단절성 곧 거룩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일치성을 추구하는
안식일 지키기를 하는 유대인 코 앞에서
안식일을 어기는 안식의 주인이 벌리시는
주의 이름을 단 한번도 부른적도 없는
개같은 이방인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의 입에서
주의 이름을 노래하고 춤추도록 하시는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이 거룩한 자리에서
시온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곧 주의 이름을 노래하고 춤추는 자를 새롭게 우연히 만들어 내는 겁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라고 했을때에
인간에게는 신령도 진정도 없습니다.
다윗은 정직한 영이 자기에게 없다고 했습니다.
자 보세요. 우리는 차라리 없다 없습니다 없는 자 입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괜히 있다고 있는자 라고 우기시면 더 얻어터집니다.
그래서 정직한 영을 없기 때문에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말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령을 주겠다 말이죠.
왜? 없으니까 안되니까
정직한 영이 아무리 해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달라고 합니다.
성령은 곧 단절성이지 개방이나 가능성이 되는게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고 했는데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3종 세트 비유에서
있다고 여겼던 자들이 오히려 없게 되고
없는 자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서 있게 된 씨뿌림이다는 겁니다.
양 될려고 한 적이 없는 아무리 봐도 염소인데
그 염소를 양으로 만들고
누가 봐도 양으로 여김받아서 행동했는데 도무지 모르겠다고 염소로 예수님이 취급하시는 겁니다.
앞의 글 중에 소자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인간들이 저마다의 기준으로 신앙생활 한답시고 그것을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 기준에 맞추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준
상상도 못했던 낯선 기준을 생뚱맞게 들이대십니다.
소자 한데 하지 않았던 것이 나에게 하지 않았다는 소자를 들이대시는 겁니다.
언제 예수님이 목말랐고 헐벗었으며 배고팠습니까?
그런 일을 하는데 우리가 달인인데 말입니다.
소자라는 불가능성을 들이대신 겁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거죠.
그리고 누가 봐도 염소같은 이방인에게는 무조건 뒤집어 씌워 편파해석을 합니다.
너는 내가 목마를때 배고플때 헐벗었을때
때 때 때 때 다 해주었구나 라고
아니 언제요? 전 그런 적이 없는데요?
무조건 뒤집어 씌웁니다. 편애를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시선 구약으로 치면 시온의 시선입니다.
악한 종과 충성된 종도 그러합니다.
있는 자는 풍성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는
열처녀 비유도 그런 식입니다.
누가 봐도 슬기로운 처녀는 미련하게 기다렸던 처녀이고(미련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가 되고)
누가 봐도 미련한 처녀는 그 때 오면 맞이하면 된다고 했던 슬기로운 짖을 했던 처녀입니다.(슬기로운 실용적인 처녀는 미련한 처녀가 되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뒤집어 씌웁니다. 편파적으로 말입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조건 즉 원인을 만들어 낸다는 자체가
종말에서는 즉 성령의 때에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불가능에 불가능으로 나아가시는 겁니다.
종말인데 불가능인데
역사가 아니라 묵시인데
자꾸 자신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내고 그런 자신을 주장할때
돌삐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고
불가능의 불가능을 펼치시는 겁니다.
불가능을 만들어 냈다고 가능했다고 우기니 말이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먼저 된 자 나중되게 만들고 나중된자 먼저 되게 하시는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 쪽에서만의 긍휼히 여기심이지
인간이 긍휼이 여김을 받는 조건을 갖추어서 나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차라리 긍휼이 뭔지도 모르고 불쌍히 여겨달라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거죠.
다윗은 아무리 봐도 정직한 영이 없는데
그 정직한 영이 없음을 누가 들추어낸 것에 대해 또렷하고 명료하게 밝혀졌습니까?
주님 본인 아닙니까? 그러니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들추어냈는데 주님이 감싸안으십니다.
주님이 그 정직한 영을 부으시니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부으시니까
다윗은 뿅 가버리는 겁니다.
시온을 부를짖기 시작합니다. 시온을 노래 합니다.
시온에서 주의 이름을
다윗은 죄인이 되어서 이방인이 되어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되어서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시온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만남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얼굴이 없습니다.
그냥 없는 채로 얼굴을 새롭게 만들어 달라 하면 되는데
가면을 쓰는것이 인간들 세계에 먹혀들다 보니
주님의 얼굴을 보는데 있어서 가면을 쓰더라 말이죠.
성화 라는 가면
믿었다는 가면
부자청년의 가면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했다는 가면
다 먹혀들었고 자기자신에게도 먹혔는데
예수님에게는 씨알도 안먹혀들던 가면이더라 말이죠.
차라리 얼굴 없는 자에게 가시더라 말이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 말이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일부러 얼굴 없는 자에게 주님이 주님 얼굴을 나타내셔서 만남이라는 관계를 형성하니까
가짜 얼굴들 소위 자칭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말려들더라 말이죠.
발악을 하면서 달려든다 말이죠.
꼭 일부러 그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 보는 그들 얼굴인 가면 앞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얼굴을 나타내시고, 주의 오른팔을 나타내시니까?
안색이 변하는 얼굴로 반드시 대조를 이루더라 말이죠.
이 사건이, 이 시온이 이런 긍휼의 사건을 십자가 사건을 발생시켜서
용서를 퍼붓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조건을 갖추고 원인을 갖추는 시간이 아니라
사건으로써 "때"가 "시온"이 우리의 얼굴을 새롭게 만들어내듯이
우리는 시온에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때가 발생시키는 겁니다.
사건이 발생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공간도 시간도 아닙니다.
3일의 간극에서 태어난 자이기 때문에
오로지 관심사는 개인 구원이라는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이 아니라
오로지 주의 이름만 노래하고 춤추는 겁니다.
그것도 꼭 유대인이라는 동일시하는 자 코 앞에서
일부러 안식일을 어기면서
동시에 안식의 주인을 노래하는 겁니다.
그 주인의 긍휼을 자랑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자의 삶입니다.
은혜 주시는 자는 이런 사건만을 통해서 태어난 자를 통해서
주의 이름을 노래하고 춤추도록
주의 주 되심을 찬양하도록
늘 출애굽 사건을 시편기자가 반복하듯이
십자가 사건을 매일 매일 터트리시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이 십자가의 용서를 노래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길수 없는 마귀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한 피흘리신 용서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곧 시온에서 태어난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뻐 노래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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