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는 미움(심판, 진노, 십자가의 저주)을 구체화 하기 (시편 74편)
(요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2, 개역)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3, 개역)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개역)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개역)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7,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 15:21, 개역)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 15:22, 개역)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요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 74:1, 개역) 『[아삽의 마스길]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시 74:2, 개역)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시 74:3, 개역)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4, 개역)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시 74:5, 개역)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시 74:6, 개역)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시 74:7, 개역)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시 74:8, 개역)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시 74:9, 개역)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시 74:10, 개역)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 74:11, 개역)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시편 74편 전체 다를 올리지 않았고 뒤에도 있습니다. 23절까지 있는 것을 중간에 생략했습니다.
아무튼 왜 하나님의 성전이 다 부셔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만히 있습니까?
저들 원수들이 오히려 더 기고만장해져서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데 더 자신만만해 졌으니 제발 주의 오른팔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의 진멸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소마저 즉 시온 마저 다 불태움 당해 버리면 악인은 진멸하기는커녕
더욱더 확장이 되는데 주님은 가만히 계실 껀가요? 라는 다급함의 외침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구원이나 승리의 내용을 언급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요 15장을 제가 제시하면서
미움 받아야 함을 응하게 하시고자 한다는 내용을 언급해 버리면
구원이 구체화 되는게 아니라
승리가 구체화 되는게 아니라
악인의 진멸이 구체화 되는게 아니라
미움이
십자가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의 활동, 원수의 활동이 옳았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연고 없이, 까닭없이, 이유 없이, 원인 없이 미움 받는다는 것이 원인이지
악마의 활동, 원수의 활동이 원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원인 해소하면 그러면 악마로부터 승리할수 있을까요?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나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악마로부터 승리해서 기뻐하지 말고
악마로부터 까닭없이 미움받는 것을 더 기뻐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마귀는 하나님의 보충물이다는 겁니다.
어떤 보충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된 이유가 자기 죄인지 부모 죄인지를 따지는 것이 마귀들입니다.
그 마귀들 이겨본들 의미 없어요
그 마귀들을 더욱더 마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유 없이 미움을 발산하게 되거든요.
그 미움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발산케 해야 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라고 했을때에
비로소 이유없이 미워하는 것이 발현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기들만의 특권이요 지적재산권처럼 자기들 소유인데
어딜 감히 예수가 지적재산권을 침해해서 표절하느냐 말이죠.
표절했기 때문에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고 말려드는 겁니다.
몇 년전에 개혁주의 라는 표현을 왜 너희들이 쓰냐 라고 표절했다는 식으로 달려들길래
마치 자신들만의 특권처럼 소유의식을 가지고 있더라 말이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은
축복을 구체화 하는게 아니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음 성화했습니다를 구체화 하는게 아니라
까닭없이 연고없이 이유없이 미워하는 그것을 구체화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즉 자주 언급했듯이 마귀를 거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출애굽의 구원은 곧 애굽의 진노 속에서, 애굽의 심판 속에서 펼쳐진 겁니다.
애굽의 심판이 없는데 어떻게 출애굽의 구원사건이 있을수 있냐 말이죠.
분명 실로암 소경은 어두움에 속한 자입니다.
빛을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어두움에서 빠져나올길이 없습니다.
흑암의 백성이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요
부정한 자 입니다.
그 소경을 신학장난 교리장난 믿음장난을 펼치는 언어의 장난을 하는 바리새인들로부터
빼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바로
난 소경이 아니다 난 눈으로 본다고 하는 자를
소경화 시키지 못하는 요나의 표적, 하나님의 영광은
가짜 영광이다 말이죠.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바리새인이 곧 바로 소경이 되어서
눈봉사되어 발걸음을 절게 만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눈 시퍼렇게 떠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못 볼 뿐이지 평상시처럼 잘 보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죽이는데 반드시 활용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한 인물에 대해서만 미움을 제대로 발현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말한 예수님이
정작 바리새인 보다 먼저 죽고 먼저 죽임을 당하고 먼저 눈 감게 되면
소경은 누가 소경이 되는 겁니까?
눈을 누가 먼저 감게 되는 겁니까?
바리새인이 그것을 노리는 겁니다.
빨리 죽여버려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소경이 된 증거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미움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온 되신 예수님
악의 진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구체화 될 때
정작 시온 성소가 되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니까
구체화 되기는 뭐가 구체화 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예수님이 어리석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어리석게도 말이죠.
미움으로 죽음으로 모든것을 다 해결해 버리는 바리새인이 승리한 것이고
예수님은 죽음으로 오히려 그 모든 말들이 허사로 하나 마나하게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미움을 구체화 하는 십자가 지혜 말입니다. 요나의 표적 말입니다.
그럼 시편은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를 바탕으로 쓰여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조리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시편이니까 말이죠.
그럼 오늘 시편 74편에 하나님의 성소가 모조리 불태움을 당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스라엘 집단의 문제인 바로 예수님이 당하는 미움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개인들이 미움을 받아서가 아닌
원수들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당하는 너희들에게 영향이 미치는 미움이니
오히려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사울편에 서서 다윗 하나 죽일려고 하는데 혈안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입니다. 처음자리 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자기 운명을 다윗 하나 미워하면 축복이 될 줄 알았는데
이스라엘 쫄딱 망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을때에
아버지는 침묵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이다는 겁니다.
즉 축복받음을 구체화 하는게 아닙니다.
미움을 구체화 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심판 진노 저주를 구체화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다는 겁니다.
즉 원수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사건이 벌어지냐 말이죠.
전쟁의 대상이 없이 구원이 어디있나요?
전쟁 속에서 건짐받음이지,
전쟁 바깥에서 전쟁의 종식이 없이 어떻게 구원이 성사 되냐 말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있고 그 싸움전쟁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이 구원인데
대상도 없이 구원받는 다는 것이 인간들이 꿈꾸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허구를 쫏는 자들이 성화론자인 바리새인들입니다.
여기에 늘 상 원수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에게서
미움을 구체화 하시는 겁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설정한,
이웃을 마음대로 설정하듯이 원수를 설정해서
사적인 복수심을 펼치더라 말이죠.
(대상이 없으면 안된다고 하니까 자기자신이 원수가 아닌
남을 의도적인 대상물로 만들어서 원수만들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야 유대인들 자신은 선택받은 자가 되니까 말이죠.
시온의 의미를 지난 시간에 말할때에
그런 인간의 선택의 꼼수를 미리 아시고 시온은 모든 인간의 선택을 거부하는 겁니다.
자기는 정작 선택하지만 자기 보다 약한 놈은 늘 원수만들기를 의도적으로 해서
강한 놈 한테는 아부를
약한 놈 한테는 갑질을 하는 유대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도 못하는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 입니다.
자기 보다 못한 자 보다 성화됨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어야 하니 말이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그들 보다 못한 자를 편애하심에 있어서
그들은 미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저절로 미움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바로 그런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자체가 소위 믿음이라는 종교성 자체가
원수만들기입니다. 사적 원수만들기 말입니다.
가룟유다가 왜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에 미쳐있는 자신에게 예수라는 인물은 하등 필요가 없었을까요?
저는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를 보면 가룟유다가 생각납니다.
최근에 나온 암살이라는 영화들처럼 말입니다.
이건 사적원수만들기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까지도 원수 아닙니까?
친일파 청산이라는 구호를 아직도 고신측은 외치고 있습니다.
복음과 가장 무관한 자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덜 퇴색한 다른 종파보다는 가장 깨끗하다고 정통이라고 칭송받는 것 보면
얼마나 엉터리 기준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적원수 만들기에 예수님이 거부하십니다.
분명 민족의 원수라고 주장함으로써 사적원수가 아니다 라고 우겨도
예수님에게는 안 통합니다.
가룟유다가 그래서 필요 없다고 팔아넘겼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그런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음 이라는 축복받았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는 것에 동의를 하시는게 아니라
정반대인 미움을 구체화 했냐 말이죠?
미움받음을 구체화 하지 못했다면
인정받을려고 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미움받고자 해꼬지 하러 돌아다녀야 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 있는, 연고있는 미움이겠지요.
연고가 없는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인물 때문에 받는 미움이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닙니다.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습니다.
인간들 머리 속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고요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도 안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누가 봐도 인간이지 하나님 아니다 말이죠.
그런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아?
누가? 내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성이요 단절입니다.
약속의 민족이 된 마당에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선택을 버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에게 있어서 구원은 사적인 구원, 사적인 천국이 되고만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이라는 한 인물, 그 개인 한 사람 때문에 받는 미움이라야
하나님께 영광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은 사적인 원수 만들기에 미쳐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도 동일합니다.
교회에 왜 다닙니까?
미움받고자 다녀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교회로부터 미움받고자 말이죠.
그런데 이것 자체가 안통하는 교회인데
그럼 교회는 무엇에 관심있을까요?
사적인 원수 만들기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사적인 구원, 사적인 천국 따위 만을 관심 둘 뿐입니다.
성화론자들이 그 대표성 아닙니까?
그러니 마귀 소굴에 다닌 겁니다.
교회로부터 쫏겨나는 것처럼 기쁜소식 복음은 없습니다.
사적인 구원에 미쳐있는 마귀들이니까 말이죠.
왜 교회 다니고
왜 예수 믿고
왜 충성 봉사 하고
왜 기도 하고
왜 찬송하고
왜 헌금하고
왜 성경 읽고
왜 십일조 내는 겁니까?
미움받기 위함입니다.
그것도 연고 없는 미움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미움받는 겁니다.
즉 미움을 구체화 하기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사적인 구원에 매달린 결과이다는 거죠.
십의 이조 드렸으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사적 원수 만들기
이레에 두 번 금식했으니 저 세리(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사적 원수만들기
토색하지 않게 해 주셔서 저 세리 친일파와 같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는 사적 원수 만들기
이것이 소위 인간들끼리 서로가 칭찬하는 신앙이라는 원한 복수심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뭘해도 복수심입니다.
어떤 누가 저 목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소리를 못한다 라고 떠들고 다니는
그 떠들어 댐 조차도 소위 복수심에서 나오는 거지
설마 사랑해서 나오는 것일까요?
말씀실천인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해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래놓고 그 목사 이름만 나오면 애가 맛이 가요 부들 부들 이빨을 갈아요
그래놓고 더 황당한게 그 목사 흉내를 내면서 지금까지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스릴려고 해요
참 역설적이지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해 버리면 미움받지 않고 인정받게 되잖아요?
말라고 그런 짖 합니까?
어차피 인간의 믿음은 사적인 원수만들기요 복수심이요 원한 한풀이인데
차라리 가만히 말을 못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저들이 꼬뚜리 드디어 잡았다 라고 좋아라 하는 겁니다.
바보들 오히려 말려든줄도 모르고
그런데 그 놈한테 많은 목사들이 달라 붙어요
미움받고자 은사를 받은 것이
졸지에 인정받고자 은사받은 꼴이 되니
목사라는 은사가 참말로 사적인 복수심에 다 말려들더라 말이죠.
왜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일들을 펼치시느냐?
이 세상에 예수님에 대한 연고없는 미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세세히 펼치시는 겁니다.
솔로몬 지혜에
오히려 솔로몬의 지혜에 박수를 치는 쪽이 거짓엄마이고
솔로몬의 지혜에 반발하는 쪽이 진짜 엄마입니다.
누가 박수를 친다고요? 복수심에 가득한 가짜 엄마 말입니다.
미움을 구체화 하니까
심판을 구체화 하니까
마귀가 박수를 쳐요
박수 물개 박수 역시 솔로몬 왕은 최고이십니다요 라고 아부의 극치를 달립니다.
그러나 진짜 엄마는 이게 무슨 지혜이냐 라고 따집니다.
따지면 따질수록 더욱더 미움받지
누가 이 재판을 엎을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엎어버리는 재판을
진짜 엄마는 대들어야 하는 겁니다.
못 엎어버린다고 해도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해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무조건 덤비는 겁니다.
덤비면 덤빌수록 마귀는 물개 박수를 칩니다.
이 미움을 구체화 하는 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진짜 엄마이지요?
더더욱 미움 받을텐데 말이죠.
여기서 사적인 원수, 복수가 아닌 집단구원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너희의 처음자리가 이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이 처음자리를 다 버리고 발로 스스로 자기자리를 차 버리니까
남는 것은 그저 인정받기 위해서 남을 사적인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
율법지키기에 미쳐있는 겁니다.
율법 지키기
말씀 지키기 자체가
사적인 복수심이요 사적원수만들기인데???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요나의 반발성이 바로 니느웨 백성의 회개에 있다고
그럼 니느웨 백성은 요나선지자처럼 사적인 복수심을 발현케 한게 아니라
오히려 미움을 구체화 한 십자가의 지혜를 펼친 겁니다.
씩씩 반발하는 것은 오히려 요나 선지자이지요.
요나야 ~~~~~~~~~
이제 알았니 이제 너가 이 미움을 구체화 하거라 ~~~~~~~~
예 써 ~~~~~~~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진영(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있으면서도 여호와의 영광을 봐 버렸으니 이제 난 타죽었구나
즉 미움을 구체화 했다는 겁니다. 심판 진노 부정함을 구체화 했다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됨을 구체화 했다는 겁니다.
왜? 거룩을 만났기에
여호와의 영광을 봐 버렸기에
구원자를 만난 죄인이기에 말입니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거꾸로 복수심이요 원한이요 한풀이인 이유가
미움받아 마땅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가 아니라
반대로 저놈들 원수와 저는 다르지요?
저는 착하지요?
저는 인정받을만 하지요? 라고 나오기 때문에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숩니다 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절대 성소 성전은 부서지면 안된다는 겁니다.
만약 이거 건드리면 나는 너를 원수 삼을 거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을 일부러 유대인들 코 앞에서 편애 하시는 겁니다.
철천지 원수이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날 부정한 자를 고치시는 겁니다.
왜? 미움을 구체화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다 결국 예수님은 너무 너무 이렇게 부글 부글 사적원수심에 불타오르는 인간들에게 까불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훈이 ~~~~~ 너도 너무 까불면 다쳐 ~~~
미움 받는짓을 하지마 ~~~~
이렇게 사루비아 같은 인정받기 위해서 행동하라고 수지씨가 알려주는 겁니다.
아니 수지씨가 뭐야 ~~~ 누이 라고 불러 ~~~~
결국 믿음 되신 예수님은 뭘 해도 미운 짓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는 국어문법 파괴도 사실상 미운짓으로만 보여야 합니다.
여기에 신기하게도 걸려드는 놈이 생길 정도이니
얼마나 복음이 지혜롭습니까?
저런 아재 개그를 쳐도 결국 다 미움받을려고 한다 말이죠.
누구에게? 복수심이 가득한 놈이 걸려들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소위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놈들이 걸려드는 겁니다.
종말때에
종말은 시간과 공간이 날라가 버리고
때 라는 인물이 사건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에
때 때 때 때 라는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그러니 인물과 연관된 때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써 표현이 되는 것이
막살자입니다.
그런데 시공간을 의식하는 인간의 육체는 이 막사는 부정한 자를 졸지에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자꾸 막살자 라는 언어에 예민해 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 당연히 막살면 안된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막살자 가 사건 개념인데 때 개념 종말 개념인데
막살면 안된다 라는 것이 사적인 구원 사적인 원수 사적인 복수심이 되는 겁니다.
종말에는 사적 구원 사적인 복수란 없어요.
개인 믿음 없어요.
자 이렇게 되면 무슨 뜻인줄 아시겠죠
그야말로 연고 없는 미움이 대대적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종말때에 부어지는 은사 도
미움을 구체화 함이다 말이죠.
누구? 우리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일들을 벌리셨나요 라는 반발성입니다.
감사가 나오지 않지요.
이 십자가의 저주를 구체화 함에 있어서 예수님이 도리어 심판 당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아니 심판 당했다면서요?
네 그게 구원입니다.
아니 저주 당했다면서요?
네 그게 구원입니다.
아니 미움 당했다면서요?
네 그게 구원입니다.
사적인 구원인 자들이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평생을 사적인 구원만 들었지
유대인들도 모르는 소리이니
당연하겠지요.
이 사적인 구원을 깨뜨리는 것이 십자가의 저주
십자가의 미움입니다.
사적인 구원만 십자가의 저주로부터 깨뜨려져도
저절로 무슨소리인줄 알게 되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이 사적인 말씀 지키기에 달인이였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집단적 사랑인 이웃환대법을 이야기 하니까 등돌리고 갑니다.
도저히 예수님을 사랑 못하겠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인정해 버리면 자기도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오해를 한 겁니다.
웃끼죠
꼭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자기식으로 사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결국 너가 가난한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자 라는 사적인 것이 깨어지지 않으니까 깨면 안돼 라고
이것을 키울려고 얼마나 노력해왔는데 왜 사적인 복수심을 깨뜨릴려고 하는거야?
안돼 내가 마일리지로 쌓은 이 원한 한풀이를 천국에 가서 보상 받아야 해
그래서 등 돌리고 가는 겁니다.
지가 지 스스로 지옥 가겠다고 발악한 거죠.
그렇게 소위 신앙이라는 것이 개인장난감 개인의 취미가 되었던 겁니다.
성화 말씀지키기 기도하기 찬양하기 봉사하기 등등이
사적인 구원을 위한 장난질이였던 겁니다.
부활 조차도 개인 부활이나 탐하더라 말이죠.
무슨 보험 일오사사 응에 응에 응에 보험들 듯이 개인적으로 돈 투자 하듯 말입니다.
그런거 자꾸 부자청년처럼 들고 오기 때문에
예수님은 일일이 깨뜨려 주시는 겁니다.
애야 복수심 키우지마
애야 원수만들지 마
애야 원한을 품지마
애야 한풀이 하지마
라고 조목 조목 꼼꼼하게 깨뜨려 주십니다.
제가 정치가 뭔지 몰라서 정치 좀 공부해 볼려고
김어준의 방송을 자주 듣습니다.
다른 것은 일단 재미가 없거든요.
애네들을 보면 다 복수심입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최근에는 오히려 이명박에 대한 복수심이 이제는 안철수에게까지 확장된 겁니다.
오로지 우리 노무현 애들끼리만 뭉치자입니다.
그래서 복수심을 키울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끌어모읍니다.
동시에 자신들 노무현 신앙을 키우는 것이 되는 동시성을 추구하는 거죠.
소위 인간이 정의롭게 선하게 착하게 살겠다는 것은
즉 막살지 않겠다는 것은
복수심이요 원한을 가득 쌓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 너의 주장처럼 미움받을려고 하는 것이 옳냐?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오죽 불가능하면 은사를 받아야 미움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종말의 때 벌어지는 때 사건이지
인간의 행함 여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일입니다. 종말의 사건입니다.
지금 옳냐 틀리냐를 말하는게 아니라
그것 조차도
옳으면 덜 복수심, 쪼매 미워할께
틀리면 많은 복수심(살인의지) 밖에 안되니까, 많이 미워할꺼야 ~~
그런 구조가 아니라
딴 구조가 있다는 겁니다.
저들은 저런 구조 밖에 없으니까 저기서 결판을 내는 운명이지만
딴 구조가 덮쳐진 자에게는 저런 구조에 말려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구조 밖에 없어서 여기서 결판을 내니 마니 하면서 생사를 거는데
왜 너는 딴 구조가 있느냐 라고 미워하는 겁니다.
딴 구조를 이야기 하지 말라 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소에게 갈라지는 구조인데
제가 그림을 그려서 어머니께 설명했습니다.
일단 로마 라는 원수가 있습니다.
이 로마를 원수로 삼은 유대인 그룹이 있구요
쌍방화살표를 그려서 서로 원수지간 이라고 표합니다.
자 이렇게 해 놓고서 로마 밑에 쌍방화살표를 그려서 세리 매국노 라고 적으면
그럼 이들 관계는 일단 원수지간은 아니다 말이죠. 미움지간은 아닌겁니다.
그럼 세 꼭지점 로마 유대인 세리의 관계에서
유대인과 세리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원수지간입니다.
이것은 꼭 유대 역사 뿐만 아니라
어떤 민족의 역사 속에 다 있습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특히 한국은 설명하기 딱 좋은게 일제치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아직도 일제청산이니 하면서 한류청산을 외치는 것처럼
어떤 나라도 똑같습니다.
지극히 정상이다 말이죠.
저들이 나를 미워했으니 나도 저들을 미워함이 마땅하다 라는
역사는 곧 원수갚기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 세 꼭지점 곧 로마 유대인 세리의 삼각형 구조에
졸지에 예수님이 등장해 버리면 졸지에 골치 아파 집니다.
네개의 꼭지점에서 서로의 관계가 역설적이게 됩니다.
원수지간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로마야 당연히 이방이니 원수이고
세리와 유대인(바리새인)의 관계도 원수인데
여기에 예수님이 유대인을 인정하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세리를 인정하는게 아니라
세리에게 오호하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저 분에게 미움받는 것은 당연해 라고
세리에게 심판으로 십자가의 저주로 나타나니까
세리는 그 앞에서 심판에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말못하는 짐승인 나귀 눈에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거짓 선지자인 발람 눈에는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세리를 용서함에 있어서 졸지에 원수지간이 아니라
긍휼의 관계가 되니까
세리와 원수지간을 고수하던 바리새인은 그럼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형성이 됩니까?
당연히 세리와 똑같은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세리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니까 말이죠.
친구이니까 같은 동무로 취급하니까 같이 미워하는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그렇게 그렇게 안그럴려고 했는데 어쩔수 없이 그렇게 여겼다가 아니라
아예 예수님 쪽에서 적극적으로 원수지간 되는 방법만 골라서
미움받을 짖만 골라서 예수님 본인이
믿음 본인이 그렇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말이죠.
친구니까
(요 15:13, 개역)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개역)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개역)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7,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예수의 친구이니까 같이 미워하겠다는 겁니다.
세리의 친구인 예수이니까 말이죠.
동무 동류 이니까
이것이 인간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복수심인 원수만들기입니다.
이것 전문가들이 바로 소위 믿음을 가진자 라는 겁니다.
미워하겠다는 겁니다. 복수심이요 살인의지를 펼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안막살겠다 라는 것은 살인을 품겠다는 겁니다. 무섭지 않나요?
인간이 믿는다 믿겠다 라는 표현은 누굴 죽여버리겠다는 살인의지를 표출하는 겁니다.
차라리 막사세요 살인을 품을바에 살인을 당하는 미움을 받겠다고 여기세요.)
이것이 얼마나 까닭없는 미움이였으면, 연고없는 미움이였습니다.
자기들이 로마와 손잡고 예수님을 죽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거죠.
그래서 이유없어야 합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로마 앞잡이 한다고 그렇게 정죄했고 부정한 놈들들이고 욕했던 세리였는데
세리 보다 더한 모습으로 로마와 손잡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적극적이니 말입니다.
로마 앞잡이 보다 더한 로마 앞잡이가 된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미움받겠다입니다.
그래서 미움을 구체화 시키는 때 때 때 때를
곧 사건을 자꾸 터트리시겠다는 겁니다.
괜히 복음을 선포하기 직전에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받은게 아닙니다.
이미 모든 구석 구석이 마귀가 장악한 세계이다는 증거 입니다.
그 세계와의 전쟁입니다.
그 사건이 오늘 미리 앞당겨져서 터지는 것이
성소파괴입니다.
미움이 구체화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종말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기뻐해야 합니다.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서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되어감에 있어서
종말이라는 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성소 다 뿌셔져도 예수님은 다시 사셨거든요.
이 3일의 간극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지
눈에 보이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소는 원래 깨지도록 되어 있는데
쓸데 없이 원수들이 성소를 깨뜨리면 뭐 되는냥?
지성소를 깨뜨리면 대제사장이 죽듯이 죽게 되는줄 알았는데
아무 일이 안벌어지거든요.
이미 휘장을 찢었는데 늦게 와서 뒷북치고 있으니
종말의 때인줄도 모르고
역사의 연장인줄 안 겁니다. 역사는 복수심이니까
지성소 찢으면 죽나 안죽나 한번 해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이미 다 완료되었기에 벌어지는 때 사건입니다.
사건은 이 이미 다 이루었다를 채우는
때가차매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더 기뻐해야지요.
물론 사적인 기쁨이 아니기에 불가능합니다.
주님 혼자 아주 아주 기뻐하시는 겁니다.
연고 없이 벌어지는 미움을 구체화 시키는 십자가 사건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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