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진노와 긍휼을 노래하는 모세 (시편 90편)
종일, 평생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은, 허무에 굴복한 인생과 모세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9, 개역)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개역)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2,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개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개역)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개역)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시 90:1, 개역)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 90:2, 개역)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3, 개역)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 90:4, 개역)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시 90:5, 개역)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시 90:6, 개역)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시 90:7, 개역)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시 90:8, 개역)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시 90:9, 개역)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개역)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1, 개역)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시 90:12, 개역)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3, 개역)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시 90:14, 개역)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 90:15, 개역)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시 90:16, 개역)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 나타내소서』
(시 90:17, 개역)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모세의 기도가 시편에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이유를 말하는 자가 없더군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시편에서까지 모세의 기도가 있는지 말입니다.
시편 전체는 오로지 전부 다 다윗과 연관된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지금 드네요
실로암 소경에게 너 누구 제자야 난 모세 제자야 라고 외쳤던
그 바리새인이 시편에 기록된 이 모세의 기도를 알았다면
사실상 그런 말이 안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말이죠.
이상하게 그들이 난 시편 다 외워 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시편에 모세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 모세 제자야 라는 말이 안나오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더욱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로암 소경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 속에 우리 모든 인간이 다 있는데
정작 그들은 그 진노 속에 있지 않고
자신들은 빠진채
오히려 저 실로암소경이 있다고 본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바깥에서 보는 시선으로 말이죠.
결국 시편의 모세의 기도가 오히려 부추긴 셈이다는 겁니다.
너 시편에 모세의 기도가 있는거 알어?
난 알지 그러나 넌 모르지?
그러니까 너는 소경이 된 거야 라는 식이다는 겁니다.
즉 죄를 거꾸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게 되자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봤는데
예수님은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고 보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다는 겁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꼴에 안다고 우겨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까
진노 바깥의 위치에 있다고 보니까 자신은 저주 안받았다고 본 겁니다.
결국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방식이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죄가 무엇인가 라는 장난을 치는 겁니다.
바로 그런 평상시의 버릇이 도리어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식으로써
예수님이 실로암 소경으로써 하나님께 영광드리는데 있어서
말려드는 강퍅한 자가 바로 바리새인다는 겁니다.
누워서 침뱉은 거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속에 집어넣는 십자가라는 지혜가 펼치는 사건입니다.
어떤 장로가 죄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자기는 안다고 수준낮은 저에게서 수준높은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고자
너 죄가 뭔지 모르지? 한 수 가르쳐 주마 라는 식으로 알려주더라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즉 이 말은 “너 죄가 뭔지 아냐?” 라는 말은
나는 죄 위에 있기에 죄를 해석 곧 제대로 해석할 줄 알아
넌 죄도 해석못하는 엉터리로 해석하는 자이지 라는 것과 같은데
저는 덕분에 큰 것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바로 죄가 그렇게 작용한다는 겁니다.
죄란 십자가의 영광을 말하기 위한 철저한 보충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죄를 인간이 알면 그게 무슨 죄입니까? 죄 아니지!!
죄는 인간이 모르도록 인간 위에 있는 것이 죄입니다.
절대로 인간은 죄를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발생하도록 되어 있는 매일 매일 벌어지는 사건인 겁니다.
즉 죄는 아냐 모르냐 라고 따지는 앎에서 벗어나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죄란 놀라지 마세요 저는 인물이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구체적인 인물 말입니다. 마귀죠. 당연히 마귀죠.
즉 상대적인 인물인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보충물이다는 거죠.
그런데 안 보입니다. 안보이기 때문에 그 인물이 없다고 보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시선이요 죄에 놀아날수 밖에 없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죄를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논리로 이성으로 풀이하고
하는 모든 짓들이 다 죄인줄 모르고 나타나는 것임이 밝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알고자 해석하고자 풀이하고 달려드는 자들이 바로 인간이거든요.
죄는
인물이다 말이죠.
사상이 아닙니다.
사물도 아닙니다.
죄를 짓는다 라고 해서
어떤 행위가 아니다는 겁니다.
어떤 형태도 아니예요.
죄 위에 있는 자만이 죄를 해석하고 풀이하고 해결할수 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자는 죄가 뭔지도 모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래서 죄를 아예 인간 보다 우위의 자리에 놓고서 성경은 언급하고 있는데
정작 놀랍게도 인간들이 죄를 운운하는 방식이 자신을 죄 위에서 운운하니까
죄를 자기보다 아래로 취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죄에게 잠식당한 상태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죄가 무지 무지 똑똑하지요?
인격체처럼 똑똑하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죄를 해석할려고 달려들지
누가 달려 들겠냐 말이죠. 유일하게 인간만이 달려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만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단지 성화론자들의 주장처럼 단지 조력자일 뿐입니다.
밧데리 떨어지면
충전하기 위한 용도로써의 성령을 주장하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라는 인물에게 잠식당한 인간 자체가
우상 곧 자기를 위한 존재로써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90편은 인간이라는 표현 보다 인생 이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 인생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구이냐 라는 겁니다.
죄란 이런게 죄다 가 아니라
죄란 인물이다 라는 겁니다.
인간에게 죄를 풀이하고 해석하도록 달려들도록 만들게 하는
인물 뒤의 인물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겁니다.
참 기가막힌 소리를 하죠. 간따나 이단인데 또 이단같은 소리하고 있죠.
죄를 인물로 봐버리면 인간들은 골치아파 집니다.
어떻게 해서든 없애버려야 하고 해결해야 하거든요.
죄를 하나의 생명체로 봐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없애 버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엉뚱한 인물을 잡았는데 바로 예수님이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없애버리면 해결 될 줄 알았다 말이죠.
자 이러니까 죄는 인물입니다.
엉뚱한 인물을 잡을 정도로
죄라는 인물이 인간을 가지고 노는 겁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활동하냐 말이죠.
인간 보다 더 구체적으로 활동적인 인물이니 말입니다.
결국 죄를 인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관계성 때문입니다.
마귀와의 관계에 놓여진 자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을 자꾸 의미 있게 만들고자 합니다.
여기에 반기를 드는 자가 바로 오늘 시편90편을 말하고 있는 모세입니다.
인생은 의미 있는게 아니라 허무하다 라고 합니다.
허무주의를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뭘 해도 허무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의미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허무를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증거하는 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래서 긍휼을 바랄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이 의미있는커녕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서 허무하기 짝이 없는데
그 진노를 외치는 자가 바로 모세이다는 겁니다.
그럼 왜 진노를 외쳐야 하는데?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기에 허무하기에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진노 속에서 말입니다.
진노 바깥에서가 아닌
실로암 망대 18명 안에서 이지
실로암 망대 무너져 깔려 죽은 그 18명 바깥이 아닌 그 18명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 18명 속에서 외쳐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시 말할께요
죄는 인물이다. 그 인물이 인간에게 잡힐까요?
안 잡히죠.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으로써 잡혀버렸습니다.
인간들이 죄를 잡겠다고 하는 열심히 인해서 말이죠.
캬 !!! 죄가 그 정도로 인간 머리 위에서 노는 겁니다.
그럼 이 죄라는 인물이 그 정도로 인간 머리 위에서 장난치도록 허용하신 분은 그럼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지요.
그럼 왜 예수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 곧 십자가의 사건을 왜 벌리시는 겁니까?
당연히 죄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인물 곧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사 보다 인간은 짜증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예수 니는 왜 죄를 이길수 있고, 왜 나는 죄를 못 이기냐 하는 겁니다.
고마움은커녕 왜 나는 못 이기는데 라고 따지는 식이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율법을 모르는자가 아니라 아는 자 일수록 더 하다는 겁니다.
다른 성경은 몰라도 시편 전체만큼은 어릴적부터 달달 외운
마치 어릴적부터 율법지킨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이 시편 90편 모세가 기록한 시편마저도 다 아는 자일수록 말잉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가 주를 삼키는 이유입니다.
마귀를 예수님이 이겨도, 즉 죄를 이기셔도 정작 우리는 하나도 안 기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도 내가 포함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나는 누락되는 방법으로써 이기시니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라는 겁니다.
자 이렇기 때문에 죄가 인물이 되어야 하지 않나요?
인물이란 주체적이다는 겁니다.
왜 나는 죄를 못 이기고 왜 너는 이기냐 라는 주인공 독립적 주체라는 독자적 존재가 못 되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는 마귀라는 인물과 연관된 자라는 겁니다.
모세 또한 똑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고맙게 시리 인생을 허무하게
하나님의 진노 속에 다 집어 넣어버리신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른 말로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하나님의 진노 바깥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보게해 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죄를 이길수 있도록 하게하면
그 방법을 취하면 그것이 무슨 복음이겠습니까?
이길 줄 아는 인간을 숭배하면 될 것을 따로 복음을 왜 믿어야 하나요?
다행히도 인간의 역사는 그 숭배를 내내 해 왔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 말입니다.
곧 자아 숭배입니다.
우상숭배가 바로 그런 겁니다. 죄를 숭배하는 겁니다.
죄를 왜 나는 못 이기느냐 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죄숭배입니다.
자기를 위한 ~~~
죄를 이기게 해 달라고
저주에서 벗어나 승리케 해달라고
이미 승리했는데 뭘 또 승리해요?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승리이지
나의 승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독자적인 승리도 좀 누려보자 라는 트릭이 바로
성화론 아니겠습니까?
실로암 소경이 그래서 반드시 나와 줘야만 하는 이유 아닌가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죄라는 인물을 이기시는 한 인물이 정작 싫은 겁니다.
오히려 죄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인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허무하다고 노래하는 겁니다.
자 이럴 정도로 죄를 사랑하는 인간을 뭐가 좋다고 구원하시느냐 말이죠.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모세는 이 구원의 일에 동원이 되는 심부름꾼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무수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도
정작 이스라엘은 엉뚱한 길로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말라꼬 건지십니까? 나 모세도 지칠정도로 다 허무하기만 한데 ~~~~
즉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 구원의 일을
하나 마나 하기 때문에 더더욱 하시겠다는 겁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말이죠.
의미가 있으면 하겠는데 인간이면 한다 말이죠.
인간 구원이 목적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의미가 없고, 하나 마나 하기 때문에 한다는 겁니다.
허무하기에 말입니다.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약속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니까 말입니다.
성경말씀은 오로지 예수님을 구원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 구원은 줘도 못 먹어요
마치 일만달란트 용서 해줘도 용서 못 먹어요
그럼 일만달란트 용서 하지 말아야지요.
정작 그 비유에서 놀라운 점은 용서 받은 자는 없어요.
없는데
그럼 하나 마나 한 짓을 한 거죠.
그러나 그 하나 마나 한 일만달란트 용서는 더욱더 빛납니다.
하나 마나 한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심지어 모든 피조물이 이 허무에 굴복합니다.
심지어 태양도 바다도 산도 모조리 다 동원이 됩니다.
왜? 헛되기 때문에
허무하기 때문에
굴복 복종 순종하듯이 하는 겁니다.
의미 있다면 안합니다.
의미 없기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기 때문에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죄라는 한 인물인 마귀에 빠져서 모든 인간은 [의미 있음]에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의미 있는 삶인 인생을 꿈꾸고 있습니다.
죄 안짖는 인생
막살지 않는 인생
가난하지 않는 인생
미움받지 않는 인생
절대 허무하지 않는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을
의미 있는 인생 등등을 말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인물에 사로잡혀서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졸지에 이 인물 때문에 모든 인생은 졸지에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이 인물만 아니였다면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지지 않는데
졸지에 이 인물땜에 허무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벨 곧 허무를 죽여버려서 허무하게 만들어 버렸고
가인 본인은 이 제사를 기여이 의미 있게 만들려고 정작 타인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자기자신이 의미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사람을 허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의인화된 죄라는 인물입니다.
자 여기서 가인이 죄를 지었다 라는 표현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가인이 죄라는 인물과 함께 사귐에 빠졌다는 관계로 보세요
인물과 인물의 만남으로 말이죠.
이것이 모든 세상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이것을 깨뜨리고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정작 그들의 손에 죽어나가는 인물
바로 허무 아벨이다 말이죠.
그럼 아벨은 역시나 인물로 따져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의 시선인거죠.
아벨은 예수님의 때를 보는 겁니다.
가인은 그 인물을 못 보기 때문에 자기인생 자기 제사가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의미가 없도록 만들어버린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원인을 없애 버림으로써
결과를 다시 도출해 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의 소원은 이미 가인을 장악해 버린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죄의 소원이 덮쳐졌기에
늘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꿈 곧 망상에 사로잡혀 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제사가 의미있도록 다시 복원 시키는 거죠.
누가 손해입니까? 당연히 우리가 봐도 아벨이 허무하게 죽었으니
아벨만 손해입니다.
참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일을 예수님을 아벨 곧 허무에게 하신 거죠.
그것도 모잘라서 성경에 아예 당당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와 동일하게 모세의 기도가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 일까요?
아니 의미 두면 안되니까! ㅋㅋㅋ
무슨 허무 일까요?
무슨 의미이냐 하면 모세 지도 마귀에게서 죄에게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실컷 가나안 땅으로 인도 했는데 정작 본인도 탈락 ~~~
참 허무 하다 그쵸 ~~~~~~~~~~
그런데 그 허무에게 한 인물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 인물이 바로 종말입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진노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을 즉 이름(기능)을 진노라고 합니다.
종말이가 찾아온 겁니다.
경사 났네 경사났어
이제 모세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얼마전에 종말이가 [불타는 청춘]에서 뽀뽀했다고 뭔가 해서 기사를 봤는데
그 종말이
박종말 김종말 차종말 이종말 최종말
그 인물의 등장 때문에 게임 오바 ~~~~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난 것이 모세에게는 구원이 나타난 겁니다.
지도자 해본들 자기는 실패했죠.
때려죽어도 안따라 주죠.
따라와 주면 오히려 더 골치 아파요.
그것이 오늘날 목사들이 모세를 모르는 이유입니다.
모세는 구원자 노릇 선지자 노릇 실패한 자입니다.
성공하면 큰일 나요
성공한다는 그 사르비아 같이 달콤한 말에 속아 죽어요.
성공하면 의미를 두도록 되어 있고, 의미를 두면 말라꼬 종말이라는 인물을 기다립니까?
마귀로도 충분한데 ~~~~~~~~
그래서 주님의 심판 속에 거하는 것이
그가 다른 인물을 보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말이죠.
주의 진노 속에 거하는 것이 악마의 천년 보다 더 낫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영광 보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을 귀히 입히시는
주의 궁전이 더 낫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산 상에서 느닷없이 나타나서 예수님에게 다짜고짜
주여 빨리 빨리 죽어주시옵소서
왜? 나에게 죄라는 인물이 자꾸 주인노릇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주인 전쟁을 벌려달라는 겁니다. 보호자 싸움 말입니다.
이건 내 전쟁이 아니니 뻔뻔스럽게 보호자 전쟁을 요청하는 겁니다.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와 같은 겁니다.
철저하게 갇혔다는 말이죠.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내 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아니 이런 불경스럽게 예수님에게 자꾸 빨리 죽어달라니???????
그러나 모세가 율법 대표자로써 유일하게 외칠수 있는 말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율법 외에 한 의
이 인물이 등장 해 줘야
저쪽 인물이 드디어 속내가 드러난다 말이죠.
율법 외에 다른 인물 그 분만이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심으로써
모든 인간을 모조리 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넣어야
이것이 살 길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거든요.
자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성도가 외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만을 외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외치는 것이 성도의 외침입니다.
모세 자신은 율법으로 가르쳐 봤고
구원의 길로 인도도 해 봤고
백날 해 본들
저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 하나 없이
내가 소경인데
내가 본다고 우기는, 소경 아니다 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러니 가나안 입성에서 탈락 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율법 대표자이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 외에 한 의가 올때까지
죄 아래 갇히게 하는 인물 말고 다른 인물이 올때까지
그렇게 기다렸다가 드디어 나타나니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인 십자가의 저주를 이루어 주세요 라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만이 율법의 대표로써 하는 유일한 말입니다.
주여 제발 십자가에 달려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보자 마자 입맞추고 발에 뽀뽀하고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을 미리 장사치르는 행동을 하는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은 행동이다는 겁니다.
뻔뻔스럽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놓고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십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다들 엉뚱한 행함 있는 믿음을 마치 성경적인냥 우기더라 말이죠.
미움 하나도 안 받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여러분
모든 피조물도 허무에 굴복하는 판국인데 ~~~~~
하나님의 진노를 구체화 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한테 인정받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외치고 있으니 악마들이지요.
그럼 무엇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데?
예를 들면 이겁니다.
복음을 제대로 증거하는 목사가 있다고 칩시다.
물론 단 한명도 없습니다.
없지만 있다고 치고 예를 들면
그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가 자기동네에 왔을때에
어떤 한 여인이 남들이 보는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남사스럽게 발에 뽀뽀를 한다 말이죠.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흉내내지 마세요.
남들은 궁시렁 거립니다. 어머 목사가 바람났나? 사모에게 스마트폰으로 인증썃 보네 말어?
그런데 그 여인이 관을 가지고서 그 목사를 관에 집어 넣고서 그 관을 닫고 비쌴 꽃을 막 뿌립니다. ㅋㅋㅋ
참 엽기적이지요.
관을 끌고 다니는 장고 같아 ~~~~~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따라하거나 흉내낼 생각 아예 하지 말아라 말이죠.
너무 지나치게 지마음대로 억지해석한 것 아니냐?
그것이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야고보서에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그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또 예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묵시의 활동이지 육의 활동이 아닙니다.
얼마나 더더더 엽기적이냐 말이죠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 기생라합이 거짓말 한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불가능성의 개념이지
우리보고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게 되면 또 그것을 자꾸 의미를 둔다 말이죠.
평생 기념비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 세가지 예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외쳤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마귀의 외침은 의미있는 인생이다는 거죠.
그런데 복음은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로 그런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그 진노 속에서 죄라는 인물이 아닌 이제야 다른 인물
율법 외에 한 의를 비로소 보게 된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소경 됨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진노 속에서
저주 받았기에 죄 맞지? 그런데 자기 죄인지 부모 죄 인지
아직 교리로 만들기에는 결론을 못 내렸다 라는 악마들로부터
한 의라는 의의 인물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허무 속에서
진노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 본단 말입니까?
소경인데
그런데 [행함이 있는 믿음(인물)]을 보게 하신다는 거죠.
누구에게만 죄인에게만
이 관계성이지
저것을 진짜로 의도적으로 행해 버리면 독자적이지
인물을 말하기 위한 관계성이 아니다 말이죠.
오로지 누구를 말하기 위한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허무에도 진노 속에도 들어와 본적이 없는
의인에게 무슨 의가 보이겠습니까?
그 인물을 만날길이 없이
영원히 죄라는 인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모세의 기도는
오늘 시편 90편의 모세의 노래는
우리에게 절망을 말할려고 시편에 등장한 겁니까?
갑자기 느닷없이 변화산에서 허무만을 말할려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겁니까?
하나님의 진노 자체가 구원이다는 겁니다.
한시도 매 맞지 않은 날이 없는 것이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에서 다윗이 태어날때부터 미움받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당신은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그래서 자신의 수명이 단촉 되었다고 합니다.
무지 무지 짧을 정도로 허무하다는 겁니다.
의미를 두고 싶어도 의미 둘 시간이 없이 바빠요
도망친다고 쫏겨난다고 피해다닌다고 늘 바빠
워낙 미움만 받고 살다 보니 더 단축이 된 것 같다고 합니다.
결국 모세든 다윗이든 성도를 자꾸 예수라는 인물과 만나게 해 줄려고
저 다른 인생들과 차별 구별 거룩이 덮치도록 하는 방식이
예수님의 운명 속에 놓이게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너무 너무 짧아
겨우 33세
누가 억지로 단축시킨 듯 같아
사실상 더 일찍이 죽은거나 마찬가지
2살 밑으로 다 죽일때에
그때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거죠.
인간들의 미움은 어디 가질 않으니까
그거 모세 지도 겪은 것 아닙니까?
두 살 밑으로 다 죽이는 그 사건 속에서
물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이 바로 모세 라는 이름 아닙니까?
모세 자기는 120살까지 살았는데
변화산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40살도 못 채운 예수님에게 빨리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하니
앞 뒤가 안 맞잖아요.
그런데 그게 우리가 손가락으로 세는 숫자가 숫자 맞기는 맞냐 말이죠.
천년이 하루 같은 묵시세계에서
손가락으로 세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 말이죠.
묵시적으로 행동하는 표현이 빨리 죽어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맞지요.
역사적으로 하지 않았으니까!
관계적인 인물을 말하기 위함이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행동파들
어떤 계파든 다 한번쯤은 행동파 했거든요.
특히 지금 신천지 이단만 욕하고 있지
여름 부흥회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또 들고나와서 사기를 친다 말이죠.
그런 역사적 행동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허무를 노래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노래할 마음이 그런자들은 추호도 없거든요.
물론 돈 뜯어낼려고 협박하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대표적인 공갈협박용으로 쓰이듯이
헌금 내겠다고 해놓고서 안내니까 협박하기에 기가막히거든요.
그리고 헌금 잘 안내는 교인들 겁주기에 딱 좋구요.
주님은 돈 받는 분 아닙니다.
오히려 주시는 분입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목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퍼부울줄 아는 성도가 나타나야 그 교회가 살아요.
안 그러면 죽은 세상과 다를바 없는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다고 선언하고 출발하는게 마음편해요.
그러면 당연히 목사 건드리면 3대가 망한다고 목사와 교인들 전체가 달려들겠지요.
자 이렇게 성령께서 사건을 터트리는 식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지
인간이 나서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건은 존재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기능 곧 인물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바로 종말이(율법 외에 한 의) 에게서 말이죠.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결국 자기는 아니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자신이 한 의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는 그저 우상일 뿐이다는 거죠.
주님이 기가막힌 소리를 저쪽 바리새인을 통해서 발설케 합니다.
뭐 너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에라이 돌삐로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라고 요한도 언급했듯이
너 누구 제자야 나 모세 제자야
너 예수 제자이지? 어디서 지방대 나온 놈이 까불고 있어? 라고
모세가 그만 우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을 모세가 부인하느냐?
모세가 더 잘알아요
그런데 모세를 운운하는 놈들만 몰라요.
모세가 도리어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 하게 되면
나 모세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너 뭐라고 했니? 나는 제자를 둔적이 없는데!!!
어! 난 모세 제자인데 모세 당신은 예수 제자라고?
바리새인이 실로암 소경에게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런 막장드라마가 어디있나요?
모세가 가장 쎈줄 알았는데
정작 모세가 예수님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되니
모세가 가장 힘쎄다고 했던 놈들은
모세에게도 안들어가고
예수님에게도 안들어가고
낙동강 오리알 된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난 사생아야 라고 스스로 누워서 침뱉기 해 버린 셈이다 말이죠.
자기도 천국 안들어가고 남도 천국 못들어가겠끔 중간에서 삥뜯는 깡패 아닙니까?
한국 교회가 이런 깡패짖을 해요!!! 지도 천국 들어갈 마음이 추호도 없어 ~~~~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낼줄 알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실천해 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오히려 삥뜯어요
지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가는 꼴을 못 보겠고
즉 마귀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믿음은 거짓인데
그냥 난 거짓믿음입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목사가 안달이 났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닦달을 내
지도 믿음도 없으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더더욱 없으면서
교인들을 닦달을 내는 겁니다 안타깝다고 발동동 구르면서
그것도 젊을때이지
늙으면 그저 뒷쥠만 지는 거죠. 만사가 다 귀찮거든요.
그래서 뒤에서 조종하고 딴 놈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가장 적게 움직여서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로 공갈치기가 제일 좋아 ~~
남들이 힘들게 공들여 이룬 것을 가로채기만 하면 되거든요.
자 이렇게 허무를 주님은 보편화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속에 넣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 속에서 봐야
다른 시선이 보입니다.
불 바깥에서
진노 바깥에서 보는 시선이 아닌
불 속에서의 시선에서
거룩 분별 구별 차이의 시선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선이 소경인 우리에게 눈에 보여주십니다.
그 인물을 만나기 위해
진노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은
진노 속에 놓인 자에게만 해당 됩니다.
진노 바깥에 있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오른팔입니다.
이것을 모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긍휼이신 오른팔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말이죠.
그리고 모든 피조물도 이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그 실로암망대에 깔려 죽은 그 18명 바깥이 아닌 그 18명 속에서
허무에 굴복하면서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말입니다.
어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긍휼인 십자가의 용서 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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