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편 77편)
더 나은 제사와 지존자의 오른팔의 날
(히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 11:28, 개역)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히 11:29, 개역)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시편을 해석하는 자들이 시편에 나타난 원수가 누구인가를 모른다는 점에서
시편은 해석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시편에 의해서 해석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편을 달달달 외운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오히려 시편을 달달 외우지 않은 자들에게서만
주님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달달 외운자들 보란 듯이 시편을 완성하시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원수가 누구냐 라는 난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은 항상 원수를 끌어들임에 있어서
계속해서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애굽이 바로 원수이다는 입장인 거죠.
그러나 지금의 애굽이 누구냐 라는 입장에서는 다들 해석불가입니다.
다윗언약에 근거한 다윗과 시편기자들은 계속해서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즉 원수를 언급합니다.
그 원수를 언급함에 있어서 상대적인 주의 오른팔
시편 77편에서는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포로된자 갇힌자 눌린자에게만 해당되는 오른손의 해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자의 오른손을 언급하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곧 찬양자만 신났어요
아무도 신나지 않았는데
혼자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혼자 신났죠.
다들 왕이시여 혹시 정신이 어떻게 되셨나요?
아니다 나는 멀쩡하다
내가 이렇게 용서를 받았는데
즉 원수 문제를 해결했는데
모든 인생 문제, 허무한 인생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겠느냐 라고
신나게 춤 춥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날 곧 구원의 날이 덮쳤거든요.
해 곧 날은 날짜 개념이 아닌 시간개념이 아닌
사건개념 인물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에서는 모조리다 인물 개념입니다.
사건 개념이라는 말은 사건의 주체자가 누구냐
지존자이다
그래서 사건은 항상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 라는 관점 충돌입니다.
사건을 발생시킨 주체 말이죠. 인물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언급한다는 말은 곧 원수를 언급한다는 말이고
그 원수를 언급함으로써, 뒤에 오는 구원자 지존자의 기능을
원수와 결부시켜서 언급한다는 겁니다.
원수가 언급 되지 않으면 지존자의 기능을 설명할 길이 없지요.
구원자는 구원자인데 그 구원의 기능이
뭐로부터 구원이냐?
당연히 원수 애굽으로 부터의 구원입니다.
글쎄!! 앞의 원수가 언급히 되지 않으면, 그와 대비된 구원이라는 기능을 말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항상 원수 보란 듯이 펼쳐지는 구원입니다.
뭐뭐로부터 빼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으로부터 탈출 곧 자유케 했다는
그 애굽이라는 원수를 지금 시편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설명하기를
방금 읽은 본문에서
(시 77: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부르짖음이 먼저 있지요.
(시 77:2, 개역)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 77:3, 개역)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시 77:4, 개역)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시 77:5, 개역)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그 부르짖음은 바로 환난날에 닥쳤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했는 겁니다.
마치 욥기서에서 마귀와의 내기를 기여이 성사시켜서
제발 욥을 건드려라 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 환난날이 닥쳤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여두둔의 법칙 십자가의 사건방식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으로 인해 옛날 곧 이전의 해
즉 출애굽때의 구원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 때의 사건을 환난날이 아니였다면 생각이나 했겠냐 말이죠.
즉 환난이 아니면 우리는 약속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약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 77:6, 개역)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시 77:7, 개역)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시 77:8, 개역)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시 77:9, 개역)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자 이렇게 상한심령이 되는 겁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말이죠.
이것이 주님의 자작극에 의해서 벌어지는 출애굽사건이였듯이
다시 다윗에게 그 사건이 덮쳐지는 겁니다.
진노 속에서의 구원으로써 말입니다.
(시 77:10, 개역)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 77:11, 개역)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시 77:12, 개역)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시 77:13,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시 77:14, 개역)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으시고』
(시 77:15, 개역)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시 77:16, 개역)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시 77:17, 개역)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시 77:18, 개역)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시 77:19, 개역)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시 77:20, 개역)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자 여기서 제가 어머니께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그때 출애굽때는 눈에 가시적으로 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크게 거시적으로 눈에 확확 들어왔습니다.
압도적인 스케일로써 안믿고는 못배길 정도로 자극적인 시각체험입니다.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회리바람
우뢰 소리
번개가 세상을 비추고
땅이 요동하고
주의 길이 죽음의 홍해를 갈랐고
주의 발자취가 깊은 골짜기 큰 물에 있었지만 흔적이 없어졌다고
그 홍해를 건넜다 죽음을 건넜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게 다 증거가 되었지만
지금 이 시편 이 상황에서는
애굽이 누구이며
즉 원수가 누구이며 알수가 없습니다.
출애굽 때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명료하게 누가봐도 구별 식별이 가능했지만
이 시편 상황에서는 아무도 구별 못하는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겁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그런 거시적인 것, 초자연적인 현상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도 없는 가운데서
시편기자 혼자
다윗 혼자
믿음의 눈으로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겁니다.
출애굽 사건을 말입니다. 그 구원전쟁이 벌어졌다고 말이죠.
출애굽때의 그 압도적인 장면
충격적인 가시화된 시각들이 일체 없음에도 말입니다.
그럼 누가 애굽입니까?
이스라엘 내부에서 저런 출애굽때의 그런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다윗 혼자 출애굽사건이 터졌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다윗이 왕이 아니겠습니까?
왕인데
그럼 왕이면 이스라엘을 잘 다스려서
그런 애굽적인 성향을 다 없애고 제거해버리는 그런일들을 벌려서 이스라엘 왕 다움 을 펼치면 될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왕이
한 나라의 왕이 자기혼자 출애굽을 외쳐 버리면
백성들은 왕 빼고 백성들은 졸지에 백성이 아니라
백성 하나 하나가
강퍅한 애굽왕 하나 하나들이 되고
오히려 다윗왕은 왕의 품위 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가장 낮은 백성 중의 백성인 모습처럼
일개의 백성 보다 더 못한
왕자리 버린듯이 도리어 가장 미약한 백성처럼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단 한 명의 이스라엘 많은 과부도 아닌 이방인 많은 과부도 아닌 오직 시돈 땅의 단 한명의 과부 사렙다 여인처럼
이스라엘 많은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인의 많은 문둥병자도 아닌 오직 수리아사람 단 한명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처럼)
환난을 격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왕이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을 요청하는 겁니다.
가장 비천한 백성처럼 간구하는 겁니다.
뭔가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게 아닙니까?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편 77편을 외치는 다윗 왕을 보면서
왕이여 와카십니까?
당신이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누가 당신을 괴롭힙니까? 라고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다윗이 출애굽을 운운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찬양자가 출애굽을 노래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되는 거죠.
그러나 다윗왕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애굽을 보고서는
출애굽을 펼쳐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즉 원수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쉽게 표현해서
어떤 목사가 자기교회에서 자기가 최고 책임자이면서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건드리는 족족 다 나가떨어졌는데
자기 혼자 출애굽을 요청하는 겁니다.
교인들은 목사여 와카십니까?
누가 당신을 괴롭히던가요?
제가 그 놈을 당장 처치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의 눈에는 교인들 하나 하나가 강퍅한 애굽왕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교회 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게 먹혀들 이야기 입니까?
자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머니께서 시므이가 그랬지 라고 하시더군요.
(삼하 16:5, 개역)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삼하 16:7, 개역)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삼하 16:13, 개역)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꼴좋다 다윗아 니가 니 자식에게 쫏겨나는 구나
사울왕을 그렇게 만들더니 자업자득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이놈아
에라이 저주나 받아라
그러니 사울왕 족속의 시므이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나
하나 하나가 강퍅한 애굽이다 말이죠. 라합이다 말이죠.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 89:10, 개역)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 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사 30:7, 개역)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사 51:9, 개역)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시 87:4, 새번역) 『"내가 ㉠라합과 바빌로니아를 나를 아는 나라로 기록하겠다. 블레셋과 두로와 ㉡에티오피아도 시온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 / ㉠이집트를 가리키는 시적 표현 ㉡히, '구스'. 나일 강 상류지역』
(시 89:10, 새번역) 『주님은 라합을 격파하여 죽이시고, 주님의 원수들을 주님의 강한 팔로 흩으셨습니다.』
(사 30:7, 새번역) 『"이집트가 너희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이집트는 '맥 못쓰는 라합'일 뿐이다."』
(사 51:9, 새번역)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주님의 팔이여! 오래 전 옛날처럼 깨어나십시오! ㉠라합을 토막 내시고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 ㉠전설적인 바다 괴물,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함. 때로는 이집트의 상징』
그러니 다윗 조차도 손쓸수 없는
심지어 자기자신 또한 애굽이니
그 자식의 그 애비라고 압살롬이 원수짓을 하니 자기 또한 애굽 아니냐 말이죠.
원수 아니냐 말이죠.
그 원수에게서 탈출케 해 달라는 겁니다.
자기자신에게서 자기를 구출해 달라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봐도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기에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정직한 영을 달라는 겁니다.
결국 이런 시선을 가진다는 자체가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가 덮쳐진 겁니다.
종말이 덮쳐져서 종말의 시선으로써 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존의 모든 것을 무엇으로 본다?
원수로 본다.
애굽으로 본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자신도 말이죠.
이것이 더 나은 제사가 덮쳐져서 그렇다는 겁니다.
자 더 낫다는 말은 앞의 것 보다 비교해서 나온 결과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 더 낫다는 말은 앞의 것은 미흡하다 부족하다 의문의 것이다 라는 것이 됩니다.
심지어 그것도 자동적으로 되는 겁니다.
어제까지 더 나은 것이 나타나지 않아서 기존의 것이 옳았다 하더라도 뒤에 오늘 더 나은 것이 나타나버린 이상
자동적으로 앞의 것이 어제까지 아무리 옳아도 오늘부터는 자동적으로 의문의 것이 되는 겁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실상이 나타난 이상 그림자는 누락 되어야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바꾸는 환전책상을 엎어버리고 채찍으로 양과 소를 쫏아내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자신이 성전으로써 등장해 버렸다 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실상이니 그림자는 물러나야만 하니까 말이죠.
어딜 감히 실체가 나타났는데 그림자가 깝죽대냐 말이죠.
부족하고 미흡하면 무조건 엉터리인 셈입니다.
가짜죠
다윗이 자기자신을 가짜로 여기니까
출애굽이 보여서 요청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상입니다.
제사와 더 나은 제사의 차이구별은 인간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반드시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구별(거룩)이요, 분리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아닌 믿음의 구분이기 때문에
행함은 반드시 반발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행함이과 믿음이를 둘다 주체 또는 인격체로 제가 표현했는데,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지금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히브리서의 특징이 반칙을 대놓고 보란듯이 한다는 점 입니다.
이렇게 반칙을 대놓고 보란듯이
즉 행함이에게 대놓고 보란듯이 한다는 것이
바로 더 나은 제사, 믿음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실행해 버리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을때에 어머니께서도 바로 "믿음장" 이라고 바로 언급하시던에
과연 믿음이 뭐냐 말이죠.
제가 서두에서 히브리서 구절을 부분 올렸는데
더 나은 제사와
모세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믿음으로 모세는 애굽왕 파라오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정작 구약에서는 두려워 도망쳤다고 했잖아요.
성경 본인이 그렇게 적어놓고
성경 본인이 안 두려워했다고 하면
이거 반칙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반칙이 바로 믿음이다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인물이 그렇게 편파적으로 불법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왜? 믿음으로 자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거다 말이죠.
이게 믿음이다는 겁니다.
아참 인간의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입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믿고픈 것만 골라서 믿고
가능한 것만 골라서 믿을려고만 하니까 말이죠.
순 엉터리 믿음이니 아예 배제해 버리고
믿음을 인물로써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대표적인 사례를 말하니까 어머니께서 이해를 하시던데 말이죠.
딸랑 30분 일한 자나
1시간 일한 자나
12시간 일한 자나 똑같이 월급을 주면
그게 무슨 선한 주인이냐 말이죠.
일꾼들이 지 입으로 선한주인이다 라고 해 놓고서는
정작 자기생각대로 일삯을 안주니까 화를 내면서 악한주인이다 라고 하니
선하다는 의미가 바로 그때서 기능하는 겁니다. 즉 구별되는 겁니다.
믿음이 사건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악한 종을 내어 쫏는 기능으로써 선한 의미의 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분명히 악한 자는 마귀입니다.
그런 마귀가 월척을 낚았다고
예수님의 수제자를 잡았다고 룰루랄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 잘 잡아왔다 라고 베드로를 칭찬하니까
아니 내가 잡았다니깐요.
마귀는 자기가 잡았다고 선한일 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악한 자가 과연 선한 일을 할수 있냐 말이죠.
선한 분이 그래서 베드로를 미끼로 삼아 마귀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라는 오른손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주님의 선하심을 자랑합니다.
마귀가 심은 죄책감에 머무를수 없습니다.
주의 사랑을 외치기 바빠요 !!!
분명 모세는 선하지 않아요.
그런데 선하심이 덮쳐져서 편파해석을 합니다.
모세는 애굽왕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다고
편파해석의 부조리가 바로 믿음이다고
이것이 실상이다고
이것이 믿음의 증거 즉 증상이다는 겁니다.
믿음이 덮쳐지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죠 라고 뻔뻔해 집니다.
누가 기가막힙니까? 마귀가 모든 증거를 다 확보해서 잡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내 죄책감 보다 더 중요한
존재 보다 앞선 당위 곧 기능이 바로 주의 용서를 외치는 겁니다.
여기에 마귀가 아무리 나의 모든 죄악을 낱낱이 퍼트리고 증거를 확보해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 되신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의 피흘리심의 결과요 그 증상 증거입니다.
더 나은 제사이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자 다시 한번 언급하면
아무도 다윗에게 갑질을 하지 않아요.
왕인데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갑질 당했다고
눈물을 흘려서 주의 병에 담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요청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출애굽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실 말이 내부이지
이스라엘 전체가 강퍅한 애굽이예요.
다윗 지 혼자 이스라엘로써 출애굽을 요청하더라 말이죠.
숫자 개념의 혼자가 아닌
인물 개념으로서 예수님 혼자 유대인의 왕으로써 오셔놓고서는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예수님 혼자 출애굽을 외치는 겁니다.
이 혼자 라는 의미가 숫자 하나 개념이 아니라
종말의 시선에서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이 인물에게 다 모이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그래서 딸랑 혼자 세워지는 겁니다.
죽으면 또 혼자 누가 세워지고
반면에 거짓선지자는 백성 전체를 이미 다 장악하고서 설쳐대는 겁니다.
오죽하면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딸랑 혼자 외쳤겠냐 말이죠.
그런데 그 혼자 라는 그 속에, 땅콩처럼 까보니까 7천명이 남은자로 넘쳐흐르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인 거죠. 숫자 개념을 전복시켜 가로지는 겁니다.
채널돌리기, 종말의 시선으로 돌리기를 하니까
혼자 남은게 부정한게 아니라 오히려 넘쳐흐르는 겁니다.
관계개념이요 원인 없는 결과적인 의미입니다.
약할 때 강함이더라 말이죠.
인물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제사 곧 “믿음으로” 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부정함을 믿음이 편파조작하는 겁니다.
주의 선하심으로 말이죠.
선한 분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겁니다.
여기에 토를 달수 없는데
반드시 불합리 하기에, 부조리 하기에 마귀원수는 토를 달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토를 달수 밖에 없도록 하는 자들이
더 나은 제사가 덮쳐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들인데
기존의 것을 가지고서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더 나은 것이 아닌 것으로 말이죠.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가 왜 매일 매일 벌어져야 합니까?
주님의 편파적인 불합리한 용서가 벌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죠?
원수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용서란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사건은 그때 그 당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미 완료로써 명료하기에 그 승리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벌어지는 겁니다.
즉 죄인만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원수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구원은 그저 인간의 탐욕일 뿐일테니 말이죠.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죄인이 용서 받는 것을 원수마귀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 77편 기자는 출애굽전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원수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를 바라보고서 말입니다.
그 사랑이 그 십자가 용서가 무조건 이유없이 옳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이처럼 명료한 증거가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고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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