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만남?

시편 2016. 6. 2. 22:35

인격적 만남?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날씨가 무척덥습니다.

그동안 잘지내고 계신지요?

일하다가 궁굼한점들 생각하다가 삶중에 해결받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오늘은 전에 제가 좋아하던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햐 한다는 말씀에 굉장히 궁굼했습니다.

도대체 인격적 만남은 어떤 만남인가?

맞는말같기도하고, 틀린말 같기도하고

무슨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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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한번 새롭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냥 인간의 말 언어는 무조건 틀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사람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구조 아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계기로써

나도 틀렸고 그도 틀렸으니

어쩔수 없는 인간이니, 인간 밖에서, 세상 밖에서 찾는 기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답을 주님께 새롭게 오늘 얻는 식으로

주님께 물어보는 계기로 삼으면 됩니다.

 

먼저 이 세상은 자본주의 구조아래에 있다는 것을 염두해 보시면

언어 조차도 그 구조아래에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아래에 종교도 있기 때문에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이든 천주교든

인격적이라는 표현은 결국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른다는 겁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좋게 대우할려는 취지이니

너도 나에게 최선을 다한 대우를 해야한다는

서로간의 상호인정 상호기대 상호기만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는

암묵적인 폭력을 서로에게 가하고 있는 가해자로 자리잡았구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것을 확대 확장 시켜서 예수님에게까지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할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럼 그런 인간의 태도에 어떤 반응인가 하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기특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오히려 나무래시는 겁니다.

 

당연히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구나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라는

베드로에게 했던 답변을 하실겁니다.

 

즉 사람들 간에 소통하는 방법을 예수님에게까지 써먹을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복음은 소통이나 가능성 개방성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으로 통해서만 일하시는 단절성 차단 불가능성으로써만 일하십니다.

 

사람들끼리 써먹는 방법은 사람들끼리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런 것은 통하지 않고요

십자가로써 우리를 대우하시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싸가지 없는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또 같은 이름의 같은 사람인지를 모르겠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 마리아도 해당됩니다.

 

둘 다 싸가지 없지만

정작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는 이들이 기념적으로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기도 한데

바로 좋은 것을 택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는 시선이 바로 죽으시러 왔다는 겁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 죽음이 바로 모든 것의 완료이다는 겁니다.

미래가 덮쳐져서 원인 없는 결과를 선물로 주시는 분임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르고 있고
(머리에 발에 향유를 부어 머리카락으로 시체 딱듯이 딱음, ? 다시 3일만에 살아나시기 때문에)

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무릎에 앉아 말씀을 듣는

둘 다 상대적인 종말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눅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반대로 언니 마르다는 여러일로 바쁘고

향유를 부인 여인을 나무래는 제자들과 가룟유다는 저 아까운 향유를 가난한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죠

얼마나 폭력적인 가해자의 모습입니까

자기의 선악을 이 여인에게 강요합니다

자기가 강요된 선택에 무릎꿇어 굴복했으니 너도 굴복하라는 겁니다. 말도 안되죠.

 

자 이렇게 정작 반대입장에 놓인자들이 오히려 더 인격적입니다. 강요된 선택이거든요.

 

예수님을 대접할려고 바쁜데 일손 딸리는데

동생은 싸가지 없이 예수님 발에 엎드려 말씀이나 듣고 있으니 말이죠.

 

또 그 비싼 향유를 환전하여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는 그 인격적인 행위를 왜 땅에 허비하냐 말이죠, 아깝죠 아까워 ~~~~

 

그러나 그것은 종말의 시선에서는 거짓되죠.

왜 남들은 다 보편적인 시선에서 행동하는데 왜 너는 종말의 종말적 시선에 튀는 행동을 하냐 말이죠.

 

인격적으로 대하겠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행동하는 나도 인격적으로 대해달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우상적 보편 선택인 겁니다.

서로가 좋은게 좋은거니 윈윈 전략으로 사람 사귀고
관계를 맺는 것도 전략적으로 하자 라는 겁니다
.

 

그런데 오히려 저들의 시선에서는 싸가지 없는 마리아가 너무 너무 튀니까 거짓되죠.

왜 윈윈 전략을 하지 않냐 말이죠. 뚝뚝 끊어지는 단절성이 너 때문에 벌어진다고
졸지에 불편한 관계가 되느냐 말이죠
.

 

그러나 종말의 시선에서는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요

사탕아 물러가라

어딜 감히 사루비아 같은 그런 달콤한 말로 예수님을 넘어뜨릴려고 하냐 말이죠.

 

서로가 서로를 거짓되다고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하는 가운데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차피 거짓되는 것이라면

그딴거 신경쓰지 말고
더 더 더 거짓되는 종말의 종말
(죽음을 미리 앞당기는)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즉 죽는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죽으시러 오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말이죠.

화목제물이 되는 분을 믿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일인 화목제물을 믿는 그 반대일은 바로 인격적으로 대하겠다는 기특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자 이렇게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사 죽음으로 이루었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인격적으로 대하지 마시고

인격적이다는 거짓 보다 더 더 더 거짓되는 목숨을 걸어서 죽음으로 대하십시오.

 

그렇다면 아 우리는 모조리 다 거짓된 언어에 갇혀있구나 라고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제가 질문하신 분에게

내 모든 것을 걸어 전 재산 향유를 부어서, 목숨 걸어서, 죽음으로 답변하지 않듯이

저도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판국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말이죠.

목사 말도 듣지 마세요.

저의 말도 물론 듣지 마시고요.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이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인간의 트릭은 그 부담감(걸림돌을 제거하여서)을 줄여서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인간들끼리 통하는 말을 서로 서로에게 써먹고 있는 겁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격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걸어서 대하시는 겁니다.

억수로 부담을 팍팍 주시고 있으니

마음껏 누리시면 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도

자기 목숨을 걸어서

전 재산 팍팍 걸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십자가에 대답, 화답하고 있습니다.

인격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서 말이지요.

 

인간은 그저 예수님마저 목숨걸어서가 아닌

목숨까지 거는 것을 싫어하는 증거로써 인격으로 대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목숨걸기 싫다는 거죠. 그런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담을 팍팍 줍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팍팍 다 탈탈 털어서 다 주었다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인격이라는 말로 꾀더냐 라고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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