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놓는 비유로 옛 비밀을 자손에게 전하라 (시편 78편)
(시 78:1, 개역) 『[아삽의 마스길]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 78:2, 개역)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시 78:3, 개역)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4, 개역)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마 13:35, 새번역)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할 터인데, 창세 이래로 숨겨 둔 것을 털어놓을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예언자 이사야' ㉨시 78:2』
(요 6:31, 새번역)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 ㉩출 16:4; 5; 시 78:24』
비밀은 은밀하게 숨겨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암호해독이 필요한 거죠.
그러면 이 비밀을 자손들에게 전수할려면 비밀을 풀어서 전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참재미있게도 이 비밀은 풀면 풀수록 더더욱 비밀이 되고 비유가 됩니다.
즉 해석불가입니다.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단절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해석불가요 아무도 못 알아먹는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못 알아먹는다고 해 놓구선 저절로 알아먹다니!!!
해석 풀이를 아주 쉽게 해서가 아니라
그 불가능한 단절성을 그대로 인채로 날것으로, 해석도 안된채로 말귀를 알아먹게 되니
여전히 불가능이요
여전히 단절인데도 불구하고
알게 되더라 말이죠.
법이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어기라고 준거다 말이죠.
오히려 법을 지키는 자는 사생자요.
법을 어기는 자는 아들이다 말이죠.
결국 법은 관계를 말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거죠.
어떤 관계?
바로 사랑의 관계 말입니다.
사랑에 무슨 놈의 법이 개입할 수가 있냐 말이죠.
결국 비밀이란 비밀 그대로 간직하라고 있는게 아니라
풀리도록 하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못 풉니다.
아무도 법을 못 지킵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법이 있는 겁니다.
그럼 이 비밀을 어떻게 합니까? 풀수도 없는데
그런데 비밀이 직접 일방적으로 다가와서 나에게 비밀이 되어버린 겁니다.
마치 당신은 나의 비밀입니다.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비밀은 둘 만의 약속입니다. 너와 나의 비밀이다 말이죠.
여기에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배제되고 소외됩니다.
아무도 못 알아먹는다 말이죠. 둘 만의 비밀 둘 만의 약속이니까 말입니다.
그 비밀을 너 기억하고 있니?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비밀이다고 손가락 걸고 했던 것 너 기억하고 있니 라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왔던 일방적으로 새끼손가락 걸고 비밀이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한
그 비밀을 걸었던 그 분이 너 기억하고 있니 라고 묻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랑 나랑 했던 약속 기억하니?
비밀을 기억하니 라고 말입니다.
그럼 그 비밀이 뭔데요?
이 비밀을 알려면 먼저 비밀 아닌 것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비밀을 먼저 알게 되면 도대체 이게 왜 비밀이야? 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즉 천국이 왜 비밀이야? 당연한거 아니야? 라고 반응하게 되는데
천국이 비밀이 될려면 지옥맛을 봐야 천국이 진짜 비밀 맞네요 라고 반응하게 된다 말이죠.
자 그럼 이미 답이 나왔네요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비밀이 되는 것이 됩니다.
지난 번에 78편 글을 올렸을때에
이것을 광야라고 표현했거든요.
시편 78편의 긴 내용이 사실상 출애굽 보다 출애굽한 후의 광야생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원망한 내용 말입니다.
출애굽은 전도용 선교용 영화나 기독교 전도에 많이 인용이 됩니다만
정작 그런 영화에서 항상 빼먹어 버리는 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봐도 이스라엘을 빼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물없는곳 양식없는 곳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구원의 하나님에서 졸지에 원망을 유도하는 여호와라는 이 모순점을
숨기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숨기고자 하는 부끄러움을 자랑스럽게 여길수 있는 자가 없다는 점에서
바로 이것을 자손대대로 전하라 라는 겁니다.
부끄러움을 싫어버린바 됨을 과연 자랑스럽게 전할수 있겠냐? 아니면 빼버리고
숨겨버리고 감추어 버리고 안전하느냐 라는 점입니다.
자랑 스러움과 부끄러워 하는 것과의 대조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사실상 예수라는 인물 자체는 부끄러움이 되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자 이런 점에서 저번 78편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생각났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대대로 바로 이 예수 라는 인물을 부끄러워 해서
선지자를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똑같은 방식으로 죽였듯이 구약에 참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까정 죽이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이라는 사도이전의 바울의 청년이 주도해서 말이지요.
불편한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의 사건을 자손대대로 전하라 라는 겁니다.
자 그럼 비밀을 말하는데 있어서
비밀 아닌 것이 무엇이고
그 비밀 아닌 것을 붙잡았기 때문에
도리어 참선지자를 죽였고
예수님도 죽이고
스데반 집사까지 죽이는
십자가 라는 비밀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럼 그 비밀 아닌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붙잡는 바람에 이 십자가사건의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이 비밀을 자손대대 전하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시 78:67, 개역)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 78:68, 개역)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시 78:69, 개역)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시 78:70, 개역)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시 78:71, 개역)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시 78:72, 개역)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 78:51, 개역)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비밀 아닌 것을 붙잡은 자들이 비밀인줄 착각하고 붙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편 78편은 선지자 시대 들어가기 전에 구약역사를 쭈욱 훌터서 나열한 겁니다.
스데반 설교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붙잡은 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성전 곧 성막입니다.
십자가가 왜 교회와 양립불가인지 아시겠습니까?
함장막을 떠나는 방식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장막을 떠나는 방식이 바로 다윗의 출애굽 요청 기도입니다.
요셉 장막을 싫어하며 에브라임 지파의를 택하지 않고 오직 유다지파만 선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탁란과 연관된 겁니다.
애굽에 이스라엘을 탁란 시켰고
그 이스라엘 속에서 다시 유다지파를 탁란 시켰고
그 유다지파를 깨고 떠나고 다시 예수님을 탁란 시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드디어 애굽을 깨고 이스라엘을 깨고 유다지파를 깨고 교회를 깨고
비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특징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예수님은 거리끼는 걸림돌이라서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고 싫어버린바 된 것이지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거든요.
그런제 자랑꺼리가 된다는 말은 비밀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비밀이였던 거죠.
나머지는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 아닌 것을 붙잡아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스데반 집사는 죽인 사도바울이 이 비밀을 스데반으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서 증거합니다.
이 비밀 앞에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과거의 스데반을 죽인 죄책감이 걸림돌로 작용할수 있느냐 말이죠.
오히려 비밀을 더더욱 비밀 스럽게 만들어버리니
자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너무 밝히 보여서 너무 너무 자랑스러운데
되도 않는 것으로 꾀지 못한다는 겁니다.
에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비밀 앞에서
부끄러움이 될 수 있냐 말이죠.
오히려 더 자랑스러워서
더더욱 뻔뻔스럽게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더욱 잘 아시면서
라고 더욱 과잉적인 애교를 펼치는 겁니다.
이 비밀을 자손대대 전하라 라는 겁니다.
그래야 비밀 아닌 것을 붙잡은 우리의 모습마저도 깨고서
주님은 비밀을 완성했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비밀 아닌 것에 마귀는 꾀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마귀는 이 십자가라는 비밀의 보충물로 작용될 뿐입니다.
무엇이 더 큰 비밀입니까? 십자가의 용서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과거의 죄들입니까?
아니면 스데반 집사를 죽인 과거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였습니까?
우리는 이 참된 비밀 때문에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았지만
이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비밀의 완성을 보기 위해서
엉터리 길로 갔던 모습이였습니다.
그것이 지옥이였으며
거기서 건져내신 겁니다.
우리는 이제 압니다.
비밀 아닌 것을 붙잡아서
마귀한테 붙잡혀서
지옥을 경험해 봤습니다.
광야에서 10번 이상 원망을 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못해 어떻게 해서든 모세라는 선지자를 죽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용서는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자손대대 이 비밀을 전하라 하십니다.
비록 광야라는 교회 속에서도
교회가 비밀이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가 비밀이였다는 것을
조상들의 잘못된 모습을 그대로 자손대대 알려주면서
이것이 비밀 아닌 것을 붙잡은 모습이고
이것이 비밀을 붙잡은 모습으로써
이 둘이 반드시 대조를 이루면서 벌어지는 십자가사건이라는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는 비록 선지자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고 스데반도 죽이고 사도들도 죽이고
성령받은 자도 죽였지만
그 바톤을 이어받아서 우리또한 죽어도 상관없는 자로써
교회가 아닌 십자가의 비밀을 증거하는 자로써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자손대대 전하라 라는 겁니다.
이런 죄인임을 들추어내심으로써 그 피로 용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10:12, 새번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준다.』
(약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새번역)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존자(안식의 주인)의 찬양 (시편 92편) (0) | 2016.06.04 |
---|---|
인격적 만남? (0) | 2016.06.02 |
뛰어내려라!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마귀와 예수님의 시편 싸움) (시편 91편) (0) | 2016.05.26 |
원인 찾기에 급급 (마귀는 원인만을 따지고, 예수님은 결과만을 물으신다.) (0) | 2016.05.25 |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편 77편) (0) | 2016.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