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우편에 계시지 않았다면? (시편 124)


 

(124: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124:2, 개역)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124:3, 개역) 그 때에 저희의 노가 우리를 대하여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켯을 것이며

(124:4, 개역) 그 때에 물이 우리를 엄몰하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며

(124:5, 개역)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잠갔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124:6, 개역)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124:7, 개역)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124:8, 개역)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네 맞습니다. 제목이 잘못 되었죠.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읽은 것을 그대로 계시록과 연관 시켜 봤습니다.

 

주께서 주의 우편에 서지 않았다면

상대적인 주의 발등상에 원수가 잡히지 않는다 말이죠.

 

마귀는 주의 보좌가 비어 있으니까 괜히 왜 보좌에 아무도 없지 라고

있어야 할텐데 라고 두리번 거리면서 그 보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마귀가 독자적인 존재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좌가 그렇게 마귀의 속성을 꿰뚫고서 그렇게 유발케 하는 겁니다.

 

결국 아 참 마귀 너의 기능은 이거지 참

그래 너의 기능을 작동시켜 주마 라고 나서시는 것이

마귀가 요동하여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간 부자가 다섯형제에게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케 해 달라고 하는 거죠.

이것이 마귀의 기능

곧 지옥의 기능이 부자를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지옥은 천국을 의식해서 그 간극을 나타내도록 하니까 말이죠.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개인적인 경험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격게 되는 것이자

결국 예수님이 격게 되시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선취의 모습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에게 바리새인이나 등등의 마귀세력이 했던 역할들이 기능들이 있었다 말이죠.

곧 다윗으로 치면 그 상대적인 사울왕의 모습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왕 역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끝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에게 반드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고

오늘날 삯꾼 목자들에게서도 반드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벨이 아벨 개인으로 끝나지 않듯이

가인도 가인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 겁니다.

 

그저 사울왕은 자나깨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하겠다고 전전긍긍하면서

이스라엘 왕 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가인이 제사와 번제를 잘 드려야 할텐데 라는 식으로 말이죠.

맏아들 말입니다.

 

그런 기특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

다윗 왕을 일부러 붙여 버리니까

탕자를 일부러 붙여 버리니까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저 다윗을 죽일꼬

저 예수를 죽일꼬 자나 깨나 의논하는 바리새인처럼 죽일꼬 하더라 말이죠.

 

바리새인이 믿음의 대가들 아니냐 말이죠.

말씀을 실천하는 실천의 달인들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라는 경쟁자 앞에서는 되도 않는 엉터리임이 다 들통나는 겁니다.

 

수십년 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모범생으로써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멘토였는데

졸지에 딱 하루 만에

어디서 굴러 들어온 뼉따귀 하나에 의해

그 자리를 빼앗겨 버리는 겁니다.

 

저 자리가 내 자리였는데 라고 짐승처럼 이빨을 갈더라 말이죠.

바리새인과 사울왕이 말이죠.

 

그런데 정작 다윗은 성령으로부터 책망 받기 바쁩니다.

그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빌미가 되더라 말이죠.

 

우리 대신 매 맞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으로 저주 받았다고

저들에게 빌미가 되더라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서 예수님을 다윗을 화목제로 삼는 사랑 곧 주의 인자하심을

바리새인이나 우리나 사울왕이나 다 무시하는 겁니다.

이 간극을 말이죠.

 

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있어서

3일의 간극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바로 다시 살아나면 안되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오빠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을 빨리 오도록 청하자

일부러 예수님은 아직 덜 죽었다고

죽을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드디어 죽었구나 라고 3일이 지나서야

나사로에게 갑니다.

 

가니까 동네 사람들이 사랑한다메? 그런데 죽기 전에 왜 안왔냐고

비꼬면서 비아냥 거리더라 말이죠.

맞습니다. 3일은 바로 무시하라고 주어지는 겁니다.

 

왜 닭이 베드로를 위해 세 번 씩이나 울어야 합니까?

왜 광야에서 이 세가지 물증을 언약궤에 담습니까?

 

무시하라꼬

 

그 무시했던 그 간극 그 세가지 물증이

나를 구원하는 주의 인자하심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진노 속에서 구원 받는 모습인줄 모르고 말이죠.

 

자 이렇게 마귀는 솔로몬 재판에서

박수를 치면서 맞습이다 맞고요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도록

아이를 두 동강 내어서 둘로 나누어 달라고

이 간극을 하나님의 저주로써

무조건 저 여자만 이기겠다 라꼬

잘 되는 꼴을 못 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말이죠.

 

왜 둘로 갈라서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도록

진짜 마귀 말대로 하시냐 말이죠.

마귀가 이 둘로 가르는 이 간극의 의미를 무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를 잡고자 한 올무를 친 마귀가

베드로 잡았다고 좋아라 하면서 도리어 예수님이 친 올무에 잡히는 겁니다.

 

형사가 되어서 범인 베드로를 잡았다고 좋아라 하면서 예수님에게 외치자

예수님이 좋아라 하면서 그래 그래 잘했다고 하는데

가까이 와서 그래 그래 잘했구나 라고 베드로를 껴안는 겁니다.

그래 마귀 잡았어? 그래 잘했어 라고

수갑을 형사로써 마귀가 범인 베드로에게 채운 것을

그래 수고했어 라고 마귀에게 수갑을 채우더라 말이죠.

 

? 이 간극을 무시했걸랑요.

 

바로 이것을 통해서 이 간극이라는 영원한 단절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이 발현하여서

천한 기집을 왕후의 자리에 까지 올려놓는 겁니다.

 

그럼 마귀가 바랬던 심판은?

예수님이 대신 매 맞을 줄 몰랐던 거죠.

 

그러니 마귀는 저 신부된 교회만 망하기를 바래서 하나님의 법으로써의 저주를 퍼부었는데

졸지에 예수님이 대신 맞고

솔로몬이 대신 맞음을 통해서

마귀는 신부를 공격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공격한 결과만을 낳게 되더라 말이죠.

 

즉 마귀의 원천적인 악의 뿌리까지 건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기가막힌 먹음직한 미끼가 될 수 밖에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얼마나 안식일의 주인을 무시하는지를

안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날만 그것도 성전 코 앞에서 손 말라 버린 자를 고치니까

누가 버럭 화를 내면서 비아냥 거립니까?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고치는 일을 하느냐

왜 성전 앞이냐 새고 쌘 장소 다 냅뚜고

그러니깐요 그것이 바로 안식의 주인이니까 안식일날만 골라서 성전 코 앞에서 고치신다 말이죠.

 

자 그렇게 되니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 과연 헌금이 모여지겠습니까?

예배하는 자들이 성전에 모이겠냐 말이죠.

예수님이게 우르를 다 몰릴꺼다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꼬 라는

숨어있는 본색

이 안식의 주인을 무시하는 마음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땜빵질 하는 것을

벗기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때에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기쁜소식이 아니라 나쁜소식이였을 겁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이 개입하면서 이것이 시선이 바뀌게 됩니다.

 

그것도 모르고 거기에 마귀는 박수를 치면서 대 환영했다 말이죠.

베드로에게 나쁜 소식이어야 마귀 자신에게는 기쁜 소식일테니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 단절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몰랐던 겁니다.

그럴줄 알고 너 나를 배신 세 번 할 줄 알고

미리 죄 값을 치렀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나중에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 번 부인한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먼저 기록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먼저 있었다 말이죠.

이 먼저 있었던 주의 인자하심의 증상으로써 세 번 부인함이 나타난 것이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죄 값을 미리 치렀는데 죄 값을 따지게 되는 마귀가 도리어

헛발질을 함으로써 진노의 자식임이 드러나게 되더라 말이죠.

? 이 불쌍히 여기심에 대한 무시 반발성을 드러내니까 말이죠.

이 원수성을 뽑아내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넘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다가

마귀 자신이 베드로의 돌부리에 넘어지게 되더라 말이죠.

 

옙따 베드로를 삼켜서 상어의 그 무시무시한 이빨로 지근 지근 씹어댔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베드로가 돌덩어리인줄도 모르고 씹어대다가

자신의 이빨들이 다 와장창창 깨지면서 괜히 씹었다고 불평하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십자가의 지혜 곧 주의 인자하심이 개입하는 이유인 겁니다.

베드로의 잘잘못을 따지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이렇게 배후의 세력까지 끌여들이시고자
마귀가 친 올무에 다시 십자가라는 올무를 놓으셨던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간극을 마귀가 무시한 겁니다.

이 십자가의 용서 곧 창세전에 유일하게 기록된 것을 마귀가 무시한 겁니다.

 

이 십자가를 또렷하게 밝히 보임으로써

성도에게

죄에 대해서 엉터리로 생각하는 책망하심을

쓸데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기 위함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고 싸가지 없는 베드로로 만들기 위해서

진짜 죄가 무엇인줄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가 생각한 죄

너가 생각한 의

너가 생각한 심판 다 엉터리이다고 책망하시면서

 

마귀까지 끌여들여서

십자가의 영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간극에 놓여지는 겁니다.

고래 등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식으로 이 간극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실상을 보게 됩니다.

주의 은혜가 바탕으로 깔려서 벌어지는 사건임을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였음을

 

결국 우리를 주의 우편에 놓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는 곧

원수를 반드시 주의 발등상에 놓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말이죠.

 

그래서 진노 속에 우리는 놓는 겁니다.

숨어있는 원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이죠.

 

이스라엘은 그런 이유로 주의 오른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단순히 역사적인 존재 즉 태어났다가 죽어 사라지고 마는 의문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 보다 더 또렷한 존재인 비존재로써의 기능인인데

그것이 바로 역사 배후의 세력까지 들추어내는 기능이다 말이죠.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자들이 무슨수로 말이죠.

주님이 다 알아서 합니다.

주의 오른손으로 잡았다는 자체가 바로

이스라엘은 주의 발등상에 원수를 잡아 놓고자 하는 미끼로써 작용한다 말이죠.

 

그러니 그들에게서 가난이나 부요함이나 그 어떤 사태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귀를 추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가 가만히 당할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기생해 버립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됩니다.

사울왕과 다윗왕으로 말이죠.

 

그렇다고 주님이 그렇게 모호하고 흐릿하게 의문으로 썩어 버려서 아무도 풀수 없는 것을

못 풀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누가 성도인지 누가 마귀자식인지 교회에서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처럼 그들이 더 믿음이 좋은 만반의 조건들을 다 갖추었다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즉 주의 인자하심이 다 이루었다 말이죠.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다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의 영을 통해서 오히려 또렷하고 분명하게 갈려지는 겁니다.

 

이것을 마귀들은 싫어합니다.

이 단절을 싫어해요

 

그래서 자꾸 소통하자고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두리뭉실하다 말이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단절을 거부한다 말이죠.

그래서 개방과 소통을 강조한다 말이죠.

 

그런데 거지 나사로라는 선지자를 미끼로 던지면

냅따 물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평상시 무시했던 자였으니까 말이죠.

평상시 본인들이 단절 시켰으니까 말이죠.

소통 개방을 외쳤던 것이 거짓으로 탄로가 나지요.

거지에게 안방을 내어줄 리가 없잖아요

전 재산을 이 거지에게 나누어 줄 리가 없잖아요.

 

이것이 간극을 무시한

주의 인자하심을 무시했던 겁니다.

주께서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주신 그 은혜를 무시했던 겁니다.

 

우리도 똑같아요 무시했어요

그런데 성령을 보내셔서

저들 지옥가는 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무시할게 아니라

너도 똑같이 무시했던 자였음을 책망함으로써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을 돌이키시더라 말이죠.

 

아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작 안 돌이키는데

첫째 아들은 안 돌이키는데

 

둘째 아들인 이방인 니느웨 백성이 돌이켜서

이 책망을 무시하지 않고 듣더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올무를 놓는 주님의 작전(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지혜)

오히려 책망받는

자식이기에 매를 대시는 아버지의 사랑이기에 기쁘지 짝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첫째 아들 이스라엘은 이렇게 올무가 있고 미끼가 되고 그 자체가 싫은 겁니다.

거리끼는 걸림돌 자체가 싫은 거다 말이죠.

 

예수님이 의사 됨을 말하기 위해 환자가 되는 것 자체가 싫다 말이죠.

관계성이 아니라

독자적이다는 겁니다.

 

왜 환자가 되어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어떤 장로는 죄인을 기능이 아니라 존재로 봐서

죄인 맞잖아 라고 죄인 되기 위해 실천을 해요

 

얼마나 의인이였으면 죄인 맞잖아 라고 죄인됨을 실천 할까요?

그 행함을 자랑하더라 말이죠.

 

그러다가 말려들더라 말이죠.

존재적인 죄인이 될려고 발악을 하더라 말이죠.

존재는 독자적이다 말이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짖겠다는 식이니

주님이 속아 넘어갈까요?

 

죄인이라는 것은 기능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자 하는 관계성 개념으로써의 죄인이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죄인 잡는 마귀에게 잡힐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죄인을 잡은 마귀는 졸지에 예수님과 맞딱뜰이게 되는 겁니다.

 

존재적인 죄인은 의사 곧 구원자를 말하기 위한 죄인이 아니기에

마귀가 잡을 리도 없고

그렇게 마귀는 예수님과 맞딱뜨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게 무슨 죄인이냐 말이죠.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원수 취급 죄인 취급 마귀 취급 당합니다.

그 이스라엘을 사울왕이 장악했거든요.

예수님 당시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 놓고 복음을 시작하신다 말이죠.

그 마귀가 잠시 떠나있는데

더 이상 안 나타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활약상에 나타나는데

바로 유대인을 장악한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율법사 서기관 사두개인들 등등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나타나더라 말이죠.

 

철저하게 마귀들로부터 갇혀 있다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 목사들이 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의 내용만 설교로 발설하니까

철저하게 갇혀 있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이니 이런 강도들에게서 마귀의 모습들이 나타나더라 말이죠.

안 그런 교회가 없어요.

 

그러니 그런 자들로부터 마귀 소리 듣는 것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원수라는 둥

죄인이라는 둥

 

즉 본인들이 그렇기 때문에 뒤짚어 씌우는 것이다 말이죠.

도둑이 제 발 저려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마귀 곧 강도의 소굴의 강도들은

이 교회에 매우 집착한다 말이죠.

 

사울왕이 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하겠다는 식으로 강박증으로 교회가 작용한다 말이죠.

 

그런데 다윗왕은 성령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니까

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곧 교회를 포기 해 버리는 겁니다.

이미 다 완료된 새 이스라엘을 봐버렸기 때문에 말이죠.

 

이제 존재로써 공간 건물 민족 나라 개념으로써의 이스라엘은 없고

기능으로써의 이스라엘을 쳐다보는 입장에서

그 새이스라엘은 오로지 주의 인자하심

곧 이 간극만을 외친다 말이죠.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 바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바란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십의 이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자들로 부터의 공격에 놓여진

 

주의 긍휼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자로 놓여지게 된다는 거죠.

 

옳습니다 옳습니다, 솔로몬 왕의 지혜여 참으로 옳으신 재판 공정한 재판입니다.

어서 판결대로 솔로몬 왕이시여 어서 빨리 아이를 두 동강 내어서

저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이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란 이 잃어버림 속에서 눈물로 씨앗을 뿌리게 되는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겁니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도저히 벗어날수가 없는

철저하게 갇혔음을

무슨 수로 이 간계에서 벗어날수가 있겠냐 말이죠.

죽자고 달려드는데

 

못 벗어납니다.

이 심판 속에서 긍휼을 바라는 겁니다.

 

정작 주의 오른편에 놓여진자는

주의 인자하심 곧 주의 우편을 말하고자

심판 속에 놓여지기라도 하지만

 

저들은 깔깔깔 거리면서

주의 심판을 퍼붓는 심판자로써 심판을 무시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마귀의 기능입니다.

이 역할을 마귀가 알아도 소용이 없어요.

기능이 먼저 있어서 마귀는 이 역할 밖에 못하거든요.

 

그러니 뻔히 예수님과 맞딱뜨릴것이 뻔함에 놓여질 수밖에 없는 기능이기에

이 약속에 의해 배치된 그 기능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자로써 말이죠.

 

그러나 긍휼히 여기심을 받기로 작정이 된 자는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자랑하고자

노래하고자

이 간극을 벌리는 성령의 책망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것이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도록 하시고자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다 이루신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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