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게는 수치로 다윗에게는 면류관 (시편 132)

 

원수와 다윗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

 

 

(132: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132:2, 개역) 저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132:3, 개역)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132:4, 개역)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132:5, 개역)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132:6, 개역)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132:7, 개역)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

(132:8,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132:9, 개역)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132:10, 개역)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132:11, 개역)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132:12, 개역)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32:13,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32:14, 개역)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32:15, 개역)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

(132:16, 개역)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

(132:17, 개역)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132:18, 개역)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성경말씀을 읽고 계셔서

 

어머니 아침 드시기 전에 말씀 읽고 계시는군요

그래 어느 부분에 읽고 계신가요? 라고

식사 중에 물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계신다더군요.

그러면서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 받아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용감하게 증거하더라 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제가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작 거기서 베드로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령이 중요한데

성령께서 이 베드로를 마치 장기알 다루듯이 배치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체가 못 된다는 거죠.

하나의 장기알처럼 로봇 기계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분주하게 바쁜고 하니

베드로가 아닌 성령이 무지 무지 바쁘다 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하시는 겁니다.

사도행전이 베드로와 사도바울이 자주 언급이 되더라고

 

네 맞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바울을 부지런히 움직이시는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오늘 시편 132편과 연관 됩니다.

며칠전부터 이 내용이 떠나질 않고 계속해서 맴도는데

마침 사도행전을 보셨다길래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 베드로와 사도바울을 부지런히 바쁘게 성령께서 바삐 바삐 움직이시는데

왜 한 군데 찐득하게 머물러서 말씀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배우고 하도록 가만히 두질 않고

왜 자꾸 여기 저기로 옮기시는 것일까요?

사도행전은 그야말로 성령행전으로써

전인권 노래처럼 행진 ~~~~ 무지 무지 바쁘게 돌아다녀요

왜 한 군데 가만히 있질 않을까요?

 

한군데 진뜩하게 머물러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그 속에서 사람들도 한 자리씩 떠 맡고 얼마나 좋냐 말이죠.

교회에 오래 다니면 언젠가는 한 자리 주거든요.

장로 권사 막 줘요.

 

그런데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에서는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막 돌아다녀

좀 있을만 하면 또 이동하고

또 쫌 있을만 하면 또 떠나버리고

그래서 아시아에 복음을 확 퍼트리는 계기가 되나 싶었는데

경로를 확 꺽어버려서 로마로 가도록 폭풍으로 배를 뿌셔서 경로를 틀어버리는 겁니다.

무인도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로마에 죽이시고자 로마로 가도록 한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니 뭐 하나 포착할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어요.

손에 잡히질 않아요.

 

한 군데 찐뜩하게 앉아 있으면 뭔가 건질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냐 말이죠.

그런데 바로 바로 이동해 버리니까

포착 불가능하다 말이죠.

 

왜 이럴까요 어머니?

 

그것도 그 이동 장소가 매맞는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니 말이죠.

죽을 곳으로 자꾸 이동 시켜요

왜 이럴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란 무시 받는 자가 성령 받은 선지자 곧 사도이다 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성령 안 받은 자는 자꾸 인정 받을려고 하고

대접 받을려고 한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라고 예외를 두는게 아니라

자꾸 자꾸 이동 시켜서 매맞는 곳으로 이동 시킨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란 무시 받으라고 주어지는 은사이다는 겁니다.

일 잘 하라고 주는게 아니라

무시 받으라고 주시는 거다 말이죠.

 

결국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은 바로 인정 받을려고 하는 것이 된다 말이죠.

 

왜 무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간극 때문입니다.

이 간극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지요?

 

곧 거룩입니다.

인간이 행하고 지키는 마치 결백증 증상의 그런 거룩이 아니라

간극이 곧 거룩 이다 말이죠.

저쪽와 이쪽의 차이를 두는 그 간극 말이죠.

 

예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지옥간 부자가 천국에 있는 거지나사로를 여전히 무시하면서 부려먹는 겁니다.

거지나사로를 지상 땅 보내서 선지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서 다섯형제가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이죠.

 

캬 이거 너무 신앙적인 사람 아닙니까? 회개케 증거해 달라고 요청하니 말이죠.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옥간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나사로를 대변하면서 나서기를

너 지금 금 밟았다고 합니다.

왜 금을 무시하냐 라고

금 밟지 말라고 한다 말이죠.

 

동문 서답이네?  네 맞습니다.

지금 심각하게 회개 운운하고 있는데

너 나 잘 하세요. 너 금 밟지 말라고!!

나도 너에게 넘어갈수 없고

너도 나에게 넘어올수 없는

이 금을 무시하지 말라고

 

소를 누가 키우냐 라고 난리 법석을 치는 개그맨처럼
간극을 누가 키우냐 간극을 ~~~

왜 금을 무시하냐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아니 다섯형제 구원시켜 달라고 회개케 하는 선지자 보내달라고 하는데

이 요청을 무시하고 왜 금을 밟았다고 금긋기 쳐져있는 그 선을 왜 무시하냐고 도리어 따지는 겁니다.

 

대화 자체가 안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다섯형제 무시하지 말라고 외치는 그것이 정작 너는 왜 금을 밟고 넘어오느냐 라는 겁니다.

왜 선이 그어진 금을 무시하냐 라는 거죠. 골드 황금 말고 금 아니고,  선 라인 말이죠.

무시의 무시입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그럼 이 그어진 선을 안 무시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결국 성령이 임한 사도나 선지자는

무시 받는 짖만 골라서 한다는 겁니다.
왜? 무시가 중요한게 아니라 간극이 중요해서 강조한다 말이죠.

그러니 한 군데 찐뜩이 앉아서 존경받기만 하면 될 것을 거부하고

자꾸 이동합니다.

친해 질만 하면 떠났뿌고

또 친해질만 하면 떠낫뿌고

 

그렇게 자꾸 무시 받는 곳으로만 골라 간다 말이죠.

왜 이러느냐?

 

바로 이 간극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는 겁니다.

 

이 보이지 않는 간극에서 무엇이 나온다?

바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온다는 겁니다.
원래 처음부터 있었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유일하게 기록된 것이다 말이죠.

우리가 무시하는 주의 인자하심 이다 말이죠.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간극을 말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은 또 사도들은 움직임을 당하는 장기알로 배치 된다 말이죠.

 

그 반대되는 일은 바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 곳에 오래 오래 머무르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저절로 한 자리씩 다 차지하게 된다 말이죠.

 

이 두 소욕이 끊임없이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시편 132편에

 

원수는 수치를 당하고 다윗은 면륙관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인데

이 간극을 벌리는 그 양 끝의 중간에 간극이 있다 말이죠.

마치 세겜에서 말씀을 선포하면 6지파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상대방 산을 향하여 외치고

또 다른 6지파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상대방 산을 향하여 외치듯이
팔을 어긋맞게 한다 말이죠.

결국 
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그 중간에, 그 사이에

그 간극에 뭐가 있다?

말씀이 있다 라는 겁니다.

 

(132:18, 개역)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2:30, 공동) 다윗은 예언자로서 하느님께서 자기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주시겠다고 하신 맹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 시편 132:11(시편 89:3-4; 2사무 7:12-13 참조).

 

그렇다면 베드로나 사도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서 활동하는게 아니라

그래봤자 그들은 이 간극을 형성할 수가 없어요.
베드로와 사도바울은 이 간극의 증상물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데, 비존재인데 증상물을 통해서 아 처음부터 있었지 라고 증거물을 통해서 알수 있다 말이죠.

오히려 그 간극에서 나오는 주의 인자하심의 혜택을 입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주체가 간극이고 그 간극의 증상물로써 대상이 되는 겁니다.

본인들이 형성해 버리면 도리어 이 간극을 무시하는
무시를 무시하는

지옥간 부자와 다를바 없지요.

 

그러니 성령께서는 이들 베드로와 사도바울을 무시받도록 자꾸 이동 시키는 겁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성령은 부랴 부랴 이동시킨다 말이죠.

 

또 한가지 예를 들었는데

아나리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설교자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꾸 협박 공갈을 한다 말이죠.

성령을 무시하면 이렇게 두 부부처럼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그래서 교회에 충성 하라고 협박 공갈 한다 말이죠.

결과적으로 돈 내라고 주로 협박용으로 자주 언급이 되는데

 

바로 그 설교자가 성령을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

적반하장의 설교를 아나리아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 하고 있다 말이죠.

 

성령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말 자체가 설교자 본인이 성령을 무시하는 식이다 말이죠.

? 그 자리에 안주 할려고

무시 받지 않을려고

자 봐라 나 이렇게 바르게 성경 해석 하잖아 라고

본인이 정작 그 말씀을 무시한다 말이죠.

성령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을 함으로써 성령을 무시하고 있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또는 바리새인이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안식의 주인을 무시하듯이 말이죠.

 

결국 맞물리게 하는 성령이지

나는 절대로 성령 무시하지 않겠다 라고

안 무시할 방법이 과연 있냐 말이죠.

없다 말이죠.

 

요나도 3일만에 돌아라 라고 했는데

하루 만에 돌아서 성령을 무시했다 말이죠.

그래 놓고 자기가 삐져가지고 자기가 시위를 한다 말이죠.

이 이방인도 여호와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있으니

요나를 돌이키시는 겁니다.

 

결국 요나의 표적이란 이 간극을 형성하는 겁니다.
요나 본인이 무시했던 그 간극을 본인이 증거해요.
죄수복을 입고서 말이죠.

이 간극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말이죠.

이 간극이 십자가이다 말이죠.

즉 십자가란 어리석고 미련하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써의

 

무시 받는 십자가이지

인간들로부터 대접받는 십자가가 아니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는 자체가

이 십자가의 긍휼 곧 주의 인자하심 곧 피 흘리심을 무시한다 말이죠.


주여 남들은 다 무시해도 저는 절대로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러면 장 지질께요
안 무시해야지
? 그럴 방법이 없다니깐요.

무시함을 받는 방식으로만 이미 쳐들어 오는 겁니다.

 

마치 우리는 여리고성과 같은 육체에 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의 히브리민족처럼 어깨에 언약궤를 매고서

자꾸 뺑뺑이를 도는데 어떻게 도는가 하면

나는 광야에서 주님을 10번 원망 했습니다.

그 증거물이 세가지 꼬끼오 십계명 두돌판, 꼬끼오 아론의 싹난 지팡이, 꼬끼오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그 증거 원망한 증거물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6바퀴를 하루에 한번씩 돌다가

마지막 날 칠일에 곧 주의 날에 그날 하루는 7번 돌면서

뿌부뿌 나팔을 불면서 나 죄 용서함 받았습니다 라고 돈다 말이죠.

 

우리는 여리고성에서 그 장면을 보고 비웃는다 말이죠.

무시한다 말이죠.

재네들 전쟁터에서 총 칼 들지 않고 뭐하는 거니?

십의 이조를 드렸거나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거나

저 세리처럼 국가의 매국노처럼 민족의 배신자처럼 토색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런 무기 그런 힘을 내세우지 않고

다들 무시하는 그 간극,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왜 뺑뺑이 도느냐

칼에 화살에 맞아 죽을려고 환장했나?

왜 저러지?

 

라고 저들에게는 이 간극

곧 무시 받고자 하는 이 십자가의 간극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왜 어깨에 십자가를 매실까요?

왜 이스라엘사람들은 왜 어깨에 언약궤를 매고 원망한 죄인이다고 여리고성을 뺑뺑이 돌까요?

왜 두 소욕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할까요?

 

그것은 무시 받으라고

뭘 무시해?

바로 이 간극 자체가 이 성령 자체가

무시 받는 것 자체가 사실상 유일하게 긍휼을 얻는 유일한 길인줄 모르기 때문에

이 긍휼을 증거하는 거다 말이죠.

나 처럼 용서 받아야 한단다 라고 말이죠.

너가 살고 죽고 하는 것은

이 간극

우리가 무시한 이 십자가의 긍휼 곧 주의 인자하심이지

너의 총칼이 너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이 저주에서 벗아나는 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오호라 이 곤고함 에서 벗어날수 있는 길은
나의 거룩도 나의 행함도 나의 믿음도 아닌, 내가 사랑함이 아닌,
예수님의 값없이 흘리신 피 값을 대신 치르신 십자가의 죽음
곧 화목제물 되심이다 말이죠.

나의 총 칼은 다섯형제를 구원 못 시켜요 회개로 될 것 같았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인간의 회개로 될 것 같으면 벌써 했다 말이죠. 안 통해요.
유일하게 통하는 것은 이 간극 뿐입니다.
다윗이 그래서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 가라오케 노래방에서 마이크로 뿌뿌뿌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미리 이 간극을 외침으로써

이 주의 인자하심 만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긍휼을 자비를 베푸시는 간극이다고 소개하는거다 말이죠.
어차피 내가 나를 챙겨봤자 의문의 반복일 뿐이다 말이죠.
어차피 잃어버릴 것은 잃어버려야 되요
결국 주의 손에 달린 것이다 말이죠.
내 손을 떠난 문제이다는 겁니다. 뿌뿌뿌~~~

 

그러니 간극이 얼마나 간극 다운지

보이지 않으니

개무시 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이미 손에

이미 소유에 총 칼이 쥐어진 자에게

이 간극을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무시 하라꼬 있는 셈인데

왜 그럼 무시할걸 말라꼬 외치냐 어차피 무시하는데

무시 할 것 같으면 외칠 필요가 없잖아

 

그러니깐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 듯이

무시 하라꼬 죽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 이미 거지나사로를 무시해서 부려 먹잖아요

그런데 거지나사로 자체가 선지자예요

그러니 이미 무시하면서 무시하고 있다 말이죠.

그러니 거지나사로가 아예 그 지옥간 부자에게는 안 보이는 겁니다.

여전히 땅에 있던 거지 취급하듯이 자신은 여전히 땅의 버릇처럼 부자라꼬 부려먹을 생각만 하더라 말이죠.

 

그것을 콕 찝어서 아브라함이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을 언급 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너 자체가 이미 선지자를 개무시하고 있는데

선지자를 보내본들

또 이미 선지자가 있는데 여전히 너의 소욕들인 다섯형제들이 너처럼 선지자를 무시하더라

아무리 회개케 하게 해 달라고 외치는데

그 회개 자체가 회개를 무시하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마치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 한다는 자체가

언약의 약속을 종교성으로 바꾸는

십일조를 무시하는 십의 이조이고

금식을 무시하는 금식이고

기도를 무시하는 기도이다는 겁니다.

 

저번에 언급했듯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의 주인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믿음 되심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왜죠? 아니 말씀을 지키는 것이 기특하기 짝이 없지 않나요?

그럼 그 결과가 예수님을 안 죽여야 하는데

반드시 죽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뭘 해도 죄 이다 라고 자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는데


졸지에 거리끼는 걸림돌로 봐 버리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싫어하더라 말이죠.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불편해서 거부하게 되더라 말이죠.
이 간극이 눈에 안 보인다고 짜증내는 겁니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으니 당연한 겁니다.
그 사라질 영광을 벗을 생각이 없으니 가려져서 어떻게 보겠냐 말이죠.


여전히 나는 주를 위해서 뭘 했다고
또 앞으로도 주를 위해서 뭐 하겠다고 우기니까 말이죠.


꼴에 그것도 한 거냐 라고
번데기 앞에 주름 잡은 것이 들통나야 하는데

손을 놓아야 하는데

절대로 꽉 쥐고서 손놓지 않고 수건을 벗지 않더라 말이죠.

 

주의 전을 향한 열심히 주를 삼키더라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나도 눈에 보이잖아요 그거 가짜입니다.

그럼 진짜는 뭔가?

없어요

즉 안 보여요

 

양탈무리는 없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 사기를 치는데

절대로 완악한 수건을 못 벗겠다고 아예 과시를 해요
난 완악한 수건 안 벗었지롱 이라고 자랑을 해요
그 자랑을 교회 지도자 이니까 하는 겁니다.
지도자 아니였다면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자기가 이끌어 가야 한다고 여기니까
이 간극을 무시할 수 밖에 없이죠.
나 사기꾼 입니다 라고 여기면 안그럴텐데 말이죠.

눈에 보이는 가짜들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붙들겠다는 심뽀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다고 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니까

 

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꼬 라는 단어 문자를 성경에 있다는 이유로 문자크기를 점점점 크게 해서

게시판에 막 올리더라 말이죠.

즉 화가 났다는 겁니다.

완악해 졌다는 거죠. 마귀가 따로 없더라 말이죠.

 

(8:10,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개역)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그들은 지키는 것만 관심 있지

그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이거든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간극 곧 주의 인자하심을 말할 줄 몰라요.

당연하지요

그들은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라고 단언을 해 버리니까 말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간극을 보여줄주 몰라요 당연하죠 안 보이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충성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 빈자리를 반드시 채우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도 무시받지 않는 교회

인정 받는 교회 말이죠.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 또는 동아리가 아니다 말이죠.

교회라는 정의는 딱 하나입니다.

요나의 표적 때문에 무시받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무시받는

예수 이름만 쳐다보는 주의 긍휼을 쳐다보는 자이지

완벽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 말이죠.

그거해서 뭐하게? 완벽한 신학 해서 뭐할려고
자기를 인정해 달라 왜? 완벽한 신학을 했으니까

결국 그들이 그것에 미쳐버린 이유는

그거해서 뭐하게? 고기 사먹을려고 한다 말이죠.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임금 되어주지 않고 도망치시는 이유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는데

자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 바로 기적을 바란다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자꾸 달래요.

 

누가 무시 받는 요나의 표적만 보여달라고 하겠냐 말이죠.

 

교회는 그 자체로써 무시 받는 성령의 전인데

 

자꾸 눈에 보이는 인간의 전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간판만 양동아리 라고 하니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지요.

곧 이 간극을 무시하는 겁니다.

안 보인다고

 

지옥간 부자와 같다 말이죠.

 

어떤 자살한 목사는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나사로가 되자 라고 외치는데

그 자체가 이미 무시받음을 무시하는 거죠. 거지나사로를 무시하는 거다 말이죠.

지옥간 부자가 거지나사로를 시켜 선지자를 보내 회개케 하면 된다 라는 사고방식과 같다 말이죠.

 

왜 자꾸 말씀을 내 쪽으로 끌어오냐 말이죠.

지킬려고

그냥 말씀에 질질 끌려가면 될 것을

자꾸 끌어와요 지키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안 된다 왜 간극 때문에 안 되더라 라는 말을 못해요.

 

이미 거지 나사로인데 뭘 자꾸 거지 나사로 자꾸 되제??

거지 나사로 되어서 뭐하게? 거지나사로를 무시할려고 하거든요.

 

그러니 거지 나사로 되지 마세요

? 거지나사로를 무시하게 된다 말이죠.

 

그냥 탁 깨놓고서 지옥간 부자의 말처럼 구원받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회개케 해달라고 하니 얼마나 믿음 좋냐 말이죠.

그런 믿음 좋은 사람 되게 해 달라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런데 그 자체가

자꾸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주의 인자하심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십자가의 3일이라는 간극을 무시하고 있다 말이죠.

이번 주에 주일 예배때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거든요.
일부러 나사로에게 빨리 가지 않고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딱 죽으니까 가시는 겁니다.
막 도착하니까 다들 무시해요
저가 나사로를 사랑했다메? 사랑한 꼬라지 참 좋다 라고 다 무시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듯이 민망하고 쪽팔려서 우시는 겁니다.
간극들이 간극을 무시해요.
왜? 너무 너무 잘 믿어서
부활 교리를 너무 잘 믿어서 정작 부활을 안 믿어요.
부활은 인물이지 교리나 신학이나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부활을 너무 잘 믿다 보니 예수님이 부활임을 안 믿어
안식일을 너무 잘 지키다 보니 안식의 주인을 안 믿어 무시해
결국 성령 없이 그들은 자기 숙제로 숙제했다고 우기는 거다 말이죠.

그래서 이 십자가라는 요나의 표적 곧 간극을 무시 할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미 날 때부터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이미 날 때부터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것이 부당하다고, 이 간극이 부조리 하다고 
토기장이에게 그릇 주제에 따질수가 없다 말이죠
.

 

왜냐하면 나는 저런 약속 거부해

나는 회개해서 반드시 구원 받을 거야

내가 안되면 다섯형제를 회개케 해서 구원받게 할 거야 라고

이미 모든 인간이 자기 구원에 전념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릇 주제에 따질수가 없다 말이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27:46, 새번역)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 ㉪시 22:1』
(마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간극을 다들 무시하는 이 간극을 외친다 말이죠.
 

즉 토기장이가 부당한거 맞아요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토기장이를 무시하는 우리의 본 모습이거든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너와 나 사이의 간극을 왜 무시하냐 라고 했지요
과연 안 무시할 인간이 있기는 있냐 말이죠.
부자청년이 어릴적 부터 말씀 다 지켰다고 하는데
정작 간극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간극을 다시 세우십니다.
그랬더니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서 가버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간극을 무시하냐 말이죠.

율법은 오직 예수님만이 완성 하도록 되어 있는데 뭐 니가 지켰다고 어디 어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토기장이는 이 부당함을 곧 무시받는 것을 앞장세운다 말이죠.
내가 안 지키는 이상 남이 완성한 것을 인정할수가 없고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육의 속성이다 말이죠.

그래서 바로 간극을 그것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간극을 주장하시는데

이것이 오늘 시편 132편에서는

원수는 수치를 받기 위해서 이미 나기도 전에 수치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고

다윗은 면류관 받기로 되어 있다 말이죠.

 

그 다윗을 우리는 자꾸 개인 다윗으로 보는 이유는

구원을 자꾸 개인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나 또한 개인적으로 다루어 주길 바라는 심뽀다 말이죠.

남들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난 절대로 안 버립니다. 장 지진다 말이죠.

또 누구처럼 십의 이조 드렸다는 바리새인과

거지 나사로 되자 라고 개인으로 본 자살한 목사나

또 지옥간 부자처럼 개인구원으로 본 다섯형제 회개케 하는 선지자파송 요청과
또 부자청년처럼 어릴적 부터 다 지켰다고

이 모든 것이 개인으로 본다 말이죠.

개인으로 곧 자기 숙제로 보는데 누가 남을 보겠냐 말이죠.
율법 외에 한 의를 볼리가 없잖아요
이미 무시하는데 
내가 아닌 이상 나 외의 것은 무시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을 개인으로 보는게 아닙니다.

집단으로 봐여

요나 선지자의 큰물로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 경험을 개인 경험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시키듯이

십자가의 죽음 또한 개인 예수님의 경험이 아니라

집단으로 확대 시켜서

이제는 개인의 경험 없이도

이미 다 완료로 끝낸 겁니다.

자꾸 개인 경험으로 끌어들일 생각 말라 말이죠.

 

그러니 다윗 니는 좋겠다 면류관 받아서 좋겠다 라고 볼게 아니라

다윗은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 개인은 없는 겁니다.

다윗은 존재하지 않아요.

다윗은 기능으로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어떤 장로가 죄를 지을줄 모른다고 죄인이 되는 방법으로 골프를 치는게 죄인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죄인 곧 존재로 본 것이고


집단적인 곧 기능적인 죄인은

관계성으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거다 말이죠

그러니 구지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지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 개인 쪽으로 끌어당길 은혜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 거지나사로 되기 할 필요가 없다니깐

이미 거지나사로인데

왜 뭘 자꾸 거지 나사로 되자 라고 해????
그래서 자살 한 거다 말이죠.
거지 나사로 될려고
요때 해야지 변질 될 가능성이 있으면 불리해지니까
가장 싱크로율이 가장 높을때 떨어지기 전에 자살해 버리는 겁니다.
부자청년 보세요 싱크로율이 확 떨어져 제로가 되어버리니까 등돌리잖아요.

 

성령을 받은 자는 이 간극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어요

개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베드로도 안되고

사도바울도 안되요

각자 개인인 자신들이 보여주는게 아니라

성령이 베드로를 다루고 사도바울을 다루어서

이 간극을 보여준다 말이죠.

 

면류관을 받은 24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치는 그 무리 바깥에 있던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 무리 속에 있던 자들이였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의 긍휼로 면류관을 받았기에

당연히 면류관을 반납한다 말이죠.

아 반납하니까 겸손하네? 그게 아니죠.

여전히 이 간극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간극이 회개이다 말이죠.

 

우리는 죄인으로써 예수님을 증거하지

의인으로써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는다 말이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간극이니까
그래야 원수들이 이 간극을 무시하거든요.
성령의 일을 무시해요.

 

왜냐하면 내 증거가 증인으로써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증거하라꼬 나를 죄인 삼으셨기에

이 간극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예수님의 의사 되심 때문에 졸지에 우리는 환자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 간극을 저들 원수는 무시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주의 발등상에 원수들이 놓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오른 손에 잡히는 겁니다.

 

그러니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한 자는 이 간극을 보여주지 않고 있고요

오히려 세리는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이 간극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24 장로처럼

 

바로 이 간극이

저들 원수 곧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바리새인 되지 말고 거지 나사로가 되자 라는 둥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아 라고 글자크기를 점점 크게 더 빨갛게 하는 자들에게는

이 간극이 시시하게 보이고

무시할 꺼리로 밖에 안보인다 말이죠.

 

다윗이 그래 밧세바를 취하고 난뒤에

바로 우리야 장군을 고이적으로 죽이고

또 이름없는 아이를 눈물로 회개로 기도로 금식으로 살려내지 못함에 있어서

 

도리어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한다고 했을때에

 

왕이라서 다들 참고 있었지

차 포를 떼고 다들 계급장 떼고 같은 선상에 놓여져 있다면


그 우리야 장군 죽인 일로 끝까지 물고 늘어질꺼다 말이죠
.

 

다윗 본인은 정작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데
뒷북 치듯이

이스라엘 전체는 이 사울왕

그것도 자살한 사울 왕의 힘을 믿고서

그 허구를 믿고서

다윗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라 말이죠.

 

이미 이 간극을 무시한채로 활동 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할게 아니라

세 번 부인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여 긍휼히 여겨주심에 나팔 뿌뿌뿌 불면서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겁니다.

 

이 노래

이 간극을 노래함에 있어서

 

정작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던 맏아들이

이 간극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미 그 자체로써 갈라진채로 나열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미리 눈치채고 예방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리 포기 한다고 그것도 믿음 좋은것도 아닌

나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미 창세전에 기록된 유일한 주의 인자하심으로만 되어 진다는 것이

오히려 기쁘기 짝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없어도 열매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하리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뻐한다고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자랑하지 아니하고는 못배기는 찬양사건 곧

간극 사건을

성령에 의해서 배치 당하면서 노래부르는 겁니다.

 

(132:18, 개역) 내가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2:18, 새번역) 그의 원수들은 수치를 당하게 하지만, 그의 면류관만은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게 해주겠다."

(132:18, 공동) 그의 머리에는 빛나는 면류관을 씌워주고 그의 원수들에게는 누더기를 입혀주리라."

(132:18, 킹흠정) 내가 그의 원수들에게는 수치로 옷 입힐 것이로되 그의 왕관은 그 위에서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32:18, 한글킹) 내가 그의 원수들을 수치로 옷입힐 것이나 그는 그의 면류관으로 찬란하게 하리라.

(132:18, 현대인) 내가 그의 원수들에게는 수치로 옷을 입히고 그에게는 면류관을 씌워 빛나게 하리라.'

(132:18, 현대어) 원수의 얼굴에는 먹칠을 하고 그의 왕국은 뻗어 나가게 하리라. 번성하게 하리라.'

 

그래서 제목을 일부러 틀리게 했는데

다윗에게 면류관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 곧 예수님만 면류관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24장로들이 면류관 반납하지요.

 

또 중요한 것은

다윗의 원수가 아닙니다.

다윗 개인의 원수는 없어요.

어떤 누구도 개인적인 원수는 없어요.
다윗 개인도 없는데 무슨 놈의 원수가 있겠어요.

그럼 누구의 원수입니까?

그렇죠.

예수님의 원수이지

하나님의 원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도 없어요.

그건 존재이니까요. 존재는 무시를 받지 않아요.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존재에 투사시킨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름은 지나 개나 다 무시한다 말이죠.

24장로도 무시했던 이름 이다 말이죠.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자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그건 없고요.


하나님의 이름의 원수만 있지요
.


바로 예수님의 원수 만 있는 겁니다
.

곧 십자가의 원수 말이죠.

 

이 간극을 벌리시는 겁니다.

간극 스스로가 말이죠.

 

(132:17, 개역)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132:17, 새번역) 여기에서 나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큰 왕이 되게 하고,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왕의 통치가 지속되게 하겠다. / , '한 뿔이 자라게 하고' , '내가 기름 부어 세운 이를 위하여 한 등불을 준비한다'

(132:17, 공동) 여기에서 다윗의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내가 세운 왕의 등잔에 불을 켜주리라./ 후손을 불씨로 본 것이다. 2사무 21:17 참조.

(132:17, 킹흠정) 내가 거기서 다윗의 뿔이 싹을 내게 하리라. 내가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한 등불을 정하였도다.

(132:17, 한글킹) 거기서 내가 다윗의 뿔을 돋아나게 하리라. 내가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위하여 한 등을 임명하였도다.

(132:17, 현대인) 내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위대한 왕이 되게 할 것이니 내가 기름 부은 자를 위해 등을 예비하리라.

(132:17, 현대어) 이곳에서 다윗의 자손을 골라 위대한 왕으로 세우리라. 내가 뽑은 그 왕의 왕좌가 든든히 서게 하리라.

 

제목을 의도적으로 틀리게 했는데

그런 오해와 오독 곡해를 거쳐서

 

그의라고 수정하면

평상시 자신이 염두했던 인물을 적으면서

그 속에 다 집어 넣어 보세요
뭘 해도 다 틀리겠지요?
네 바로 그겁니다.

아 이 사람도 아니야 
저 사람도 아니요


아 아니야 아냐


바로 이 아니요를 거쳐서

단 한 인물에게만

곧 존재가 아닌 이름에게만 모이도록 함이다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 다들 다윗의 자손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 말이죠.

성경박사들이 다 알려줬으니깐요.

그런데 그 이름을 받은적 없어요.

그 이름 자체가 간극(거리끼는 걸림돌, 무시받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지혜)이니까 말이죠.

천사로부터

성령으로부터 직접 받지 않는 이상

이 간극을 ~~~ ~~~길 없습네다~~~

 

제목을 수정하면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그의 머리에는 면류관으로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