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시편 성령시편 (시편 147)

흩으신 자를 모으시는 선한 십자가 (십자가행전 십자가시편 성령행전 성령시편 다윗행전)

 


(
147:1, 개역)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2, 개역)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147:3, 개역)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147:4, 개역)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147:5, 개역)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147:6, 개역)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147:7, 개역)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147:8, 개역)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147:9, 개역)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147:10, 개역)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147:11, 개역)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147:12, 개역)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시온아 네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147:13, 개역) 저가 네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147:14, 개역)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147:15, 개역)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47:16, 개역)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147:17, 개역)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 감당하리요

(147:18, 개역)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147:19, 개역)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147:20, 개역)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왠지 시편 147편을 보니 갑자기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이 생각 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아서 다들 뿔뿔히 흩어져 버립니다.

그것도 절망 JM 속에서 말이죠

 

이것을 저는 보편성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즉 인간의 모든 신앙의 끝은 절망 뿐입니다.

즉 의문이였다는 결론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였음이

이미 성경말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베드로가 죽음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장 지진다는 장담 조차도

이미 기록된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다는 말씀을 넘어설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철학자들은 비아냥 거리면서 종교는 마약이지 않냐 라고 합니다만

더 웃끼는 것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철학자들 조차도 저마다의 마약에 빠져 살고 있는

결국 자기자신을 자신의 사상에 쩔어사는 마약쟁이 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사상으로 젊은이들이 매료되어서 많이들 따르게 하게 해놓고서는

한 참 뒤에 자신의 사상은 쓰레기 엉터리이다 라고 정반대로 바꾸어버리니까

젊은이들은 그를 따르다가 갑자기 멈춰버리고서는 어디로 가냐 라고 하니까

너거들 알아서 하라 라고 자유가 아니냐 라고 하니

발길을 옮기는 겁니다.

어느정도 눈치를 챈 거죠 자신의 사상이 마약이라는 것을 말이죠.

 

자 이렇게 성경 비스무리 하게 보편성을 흉내내어도 문제는 구체적 보편성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똥물에 7번 담구어라 라고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확 등떠밀어서 똥물에 빠뜨리는 겁니다.

 

죄인 만들려구요

그런 죄인에게만 주의 인자하심 곧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보게 되니까 말이죠.

 

이렇게 물에 등떠밀어 확 빠뜨리면

존재라는 필연성 곧 자아죠

그 자아가 허깨비 허구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모든 우상은 이 자아가 만들어낸

자아의 손에서 제작된 만들어진 신이다는 겁니다.

 

유대교요? 유일하게 땅에서 쏟아난 생명을 양식으로 한 종교가 아닌

유일하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기적으로 구성된 종교이니까

유일하게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종교이다구요?

 

그런데 우짭니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성전을 헐라 라고 자유롭게 말하시니까

그 자유이신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너무 너무 자유롭게 막 말하시거든요.

 

버릇없다고 죽였을까요?

아닙니다. 그 자유를 정작 자신들은 못 누리니까

그 사랑을 그 주의 인애와 자비를 누릴수가 없어서

누릴려면 자신들의 법을 스스로 깨어야 하니까

시기와 질투심에 죽이는 겁니다.

너무 자유로우니까 꼴보기 싫은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이미 구약에도

그것도 다윗언약에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6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66:3, 개역)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66:4, 개역)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7:46, 새번역)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므로,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거처를'

(7:47, 새번역) 그러나 야곱의 집안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7:48, 새번역)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예언자가 말하기를

(7:49,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떤 집을 지어 주겠으며 내가 쉴 만한 곳이 어디냐? / 66:1; 2

(7:50, 새번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이후로 부터는 사실상 성령행전입니다.

성령 혼자 일을 다 처리합니다.

거기에 동원되는 장기알이 사도들이듯이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이듯이

다윗이후는 성령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움직여집니다.

인간 이스라엘 왕으로 인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움직여지고

참선지자들은 바로 이 성령에 의해 배치당하는 겁니다.

물론 사도행전처럼 거짓된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끝까지 방해하는 것처럼

거짓선지들 또한 성령에 의해 배치되면서 말이죠.

 

오로지 선지자 단 한사람 한사람으로 주의 인자하심의 풍성함이 나타납니다.

다윗 이후로는 인간의 행함을 거부한다는 거지요

다윗 당사자가 지은 성전을 거부하시면서

더 나은 성전을 이미 완료된 성전을 보여주셨으니

다윗 본인 당사자가 구체적 보편성의 성전을 봐버렸으니

이제는 아예 이스라엘 국가나 성전이나 이스라엘 왕 자체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는겁니다.

의문에게 왜 기대를 걸겠습니까?

이미 완료된 이스라엘을 다 봐버렸고

참성전을 봐버렸는데 곧 예수님이지요

그러니 물에 확 등떠밀어서 똥물에 7번 담구어버리는 겁니다.

선지자는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일곱 인 속에 확 등떠밀어서 빠뜨리는 일만 하는 겁니다.

 

끝을 미리 본 사람은 마음 푹 놓고서 등떠밀어 물에 확 빠뜨리는 기능

곧 존재 이전의 기능인 당위를 펼치는 겁니다.

곧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간극 속에 확 빠뜨린다 말이죠.

 

? 그 똥물 속에 예수님이 있거든요.

미래완료가 있거든요.

원인 없는 결과 말이죠.

번제보다 제사 보다 더 나은 주의 인자하심이 있거든요.

 

내가 더럽다고 했던 그 똥물이 내 보다 천만배 더 깨끗해?

결국 내가 똥물 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왠걸 선물 여디디야를 받아버린 겁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줄이야?

선물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가 만드는 것은 보상입니다.

자기가 행한 노동의 댓가죠.

그것은 신부가 아닌 사랑하는 아내와의 관계가 아닌

가정부 취급하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성령이든 선지자든 거룩한 율법이든 모조리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십자가 속에 확 등떠밀어서 확 빠뜨리는 겁니다.

 

마땅한 저주, 마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지요.

비로소 산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참 말 안되는 소리죠

산 소망이라니?

누가 한쪽 강도처럼 죽어가는 마당에 산 소망을 가지겠습니까?

뭐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바로 이겁니다. 너와 내가 라는 관계성에 속하지 않는자는

산소망 자체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뭐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가정부처럼 노동의 댓가인 보상을 바라는 일적인 관계에서는

나올수 없는 사고방식인 말도 안되는 표현이 산 소망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표현 자체가 관계적 언어이기에

오로지 이 한 인물에 달려있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 말이죠.

 

그러니 산 소망이 임해버린 즉 선물 받은 자는 당연히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십자가가 나 보다 더 옳았다고 외치게 되더라 말이죠.

 

분명히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가 받는 형벌이다 말이죠.

그 십자가가 어떻게 산 소망이 됩니까?

어떻게 사랑이 되고

어떻게 용서가 되고

어떻게 찬양이 되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존재인데

그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 이전의 기능으로 안 보인다 말이죠.

 

만약 이런 꾀도 나올수 있습니다.

마치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의도적으로 짖는 것처럼 말이죠.

 

또 정반대로 십자가 라는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내린 자이기에

 

 

(21:23, 개역)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10:39, 개역)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 , '저주가 되심으로써' 21:23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것을 아는 나는 더더욱 저런 형벌을 받지 않고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지 않고자 하는 행동을 지켜왔다 말이죠.

말씀을 지켰다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말씀대로 판결을 내렸다. 율법대로 판결했다

그게 바로 다윗이 시도했던 삶이였는데

그게 우상이다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자아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말이죠.

 

사도바울은 그것이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합니다.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니 우상을 피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더더욱 우상을 세우는 겁니다.

 

괜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즉 피곤한 신세이구나 왜? 갇혔구나 라는 겁니다.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주지?

 

여러분 ~~~ 윤복희

나는 너의 ~~~~~~~~~

 

 

우상을 피하고자 하는 자아가 기특하기 짝이 없는데

그래서 성전을 세우고자 했는데

그 인간의 손으로 세우고자 한 성전이 우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에 미친 자들이 바로 이런식입니다.

그것도 교회에 미친 자를 비판하면서 더더욱 자기자신은 교회에 미치지 않았다고

교회에 미친자를 더더욱 비판 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 올무에 말려들면서 말이죠.

 

자아를 이미 제외 시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말이죠.

자아라는 분자가 아닌 분모는 공통분모로써

모든 인간의 욕망인 같은 욕망이거든요.

강요된 욕망이다 말이죠.

 

빠져나올수 있을 것 같으면

사도바울이 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하겠습니까?

 

(1:15, 개역)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니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사를 진행하는 기획설계자인 본인이

결과적으로 자기가 달려 죽어야 하는 그 십자가를 구상한 셈입니다.

즉 예수님을 매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매달기 위한 십자가를 만들어낸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 그 저주 그 하나님의 저주 예수님을 매달았는 줄 알았는데

자기를 매달려고 만든 것이였으니

 

예수님에게 모든 공이 돌려 질 빠에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라고

두 조각 내어라 라고 물개박수를 치고싶어서

십자가를 만들어냈던 것이

결국 자기가 매달려야 했던 것을 만들어낸 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이것에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지금 저처럼 이런 글을 쓰면서 저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가타부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고를 논하기 전에

이미 뭘 해도 다 가짜인 이유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 때문에

뭘 해도 이 모든 지식 조차도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식이라서

구체적 보편성이 되는 거다 말이죠.

배설물이다는 겁니다. 그 배설물을 스스로 뒤집어 쓰는 거다 말이죠.

그래야 이 모든 것들이 의문덩어리이며 배설물임을 알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구체적 보편성 곧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 결국 내가 달려 죽어야 했다는 겁니다.

이것 보다 더 명료하고 밝히 보이는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뇌과학에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 뇌가 변한다고 하더군요

마치 공관병을 노예 부리듯이 하는 여단장급 부인처럼 갑질을 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누구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말이죠.

그저 제복 한 쪽은 교도관 경찰, 다른 한 쪽은 죄수복 만 입혔다 말이죠.

그리고 다시 반대로 옷만 말이죠.
그랬더니 그 역할을 그대로 반대로 역할을 바꾸어서 했다 말이죠.

 

나는 절대로 사람을 패지 않을 것이다?

이건 뭐 뇌과학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사람에게 돈이 갑자기 주어지면 눈이 뒤집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누구든지 똑같다 말이죠

 

교회 자체가 신부인데

외부에서 거룩한 흰옷으로 꽃단장 시켜줘야 하는데

 

교회 자체가 스스로 강도의 소굴인 가증한 물건을 세우고 싶어서 환장했다 말이죠.

바벨론처럼 모든 것을 삼키고자 돈이란 돈을 다 끌어모으고 싶어 도적질 하는 강도집단인

사단의 회 이더라 말이죠.

 

구원이라는 선택 선민사상이 권력으로 작용하니까 그런겁니다.

 

그러니 지금 저라고 해서 이런 내용을 적는다고 해서 제가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이 짐승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역시나 그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박으라 외쳤던 자들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모세 엘리야도 또 24장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기에

감정이입을 해서 더더욱 상상계가 작동이 되다 보니

동일시 해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만

십자가는 결국 예수님 혼자 독박 쓰도록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빠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구체적 보편성입니다.

부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예수님 혼자 독박쓰게 하고 나는 도망쳤다 라는 겁니다.

 

주를 따라 죽겠습니다 라는 말을 뒤짚었다는 겁니다.

결국 함께 죽겠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고

예수님 혼자 죽으라고 등떠밀었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매국노 친일파 친로마파 세리

성전건설 방해꾼 자손 사마리아인

등등을 우리는 욕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니 혼자 죽어라 라고 등떠밀었으니 말이죠.

참성전을 세우고자 하신 예수님을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성전모독죄로 십자가로 죽였으니 그 십자가가 졸지에 증거가 된 겁니다.

빼도박도 못하는 십자가가 구체적 보편성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팔아먹는 매국노는 결국 이스라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바리새인이였다 말이죠.

오늘날 최근 까지도 그런가요?

적어도 십년전 까지만 해도 고신측은 아직도 친일파 청산을 떠들어대는 것을 확인했는데

아직도 그런지 몰라도 그것도 다 돈 때문입니다. 배부르니까 말이죠.

배고파 봐요 친일파 청산 떠들 힘도 없다 말이죠.

그러니 고신측 자체가 스스로 누워서 침뱉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사기를 치면서 꾀냐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는 결국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은

결국 모조리 다 누워서 침뱉기 하는 인간의 꾀, 노림수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바리새인 본인들이 사단의 회인줄도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보고 그 검은점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삐로 쳐 죽일려고 하는 이유가

결국 자신은 더 큰 들보를 감추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간음하다 잡힌 여자다 말이죠.

아니 왜?

간음 한 적 없는데

주님의 시선은 바로 마귀에게 포로된 자이다는 겁니다.

그럼 마귀에게 포로 되지 않은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삐 든 너도 마귀에게 포로된 증거를 땅에 슥 쓰니까 냅따

돌삐 내팽개치고(아니 거룩한 율법 지켜야지??????) 도망친다 말이죠.

누구는 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거룩을 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또 주님이 땅에 쓱 쓸수 없잖아요

마귀에게 사로잡힌 그 증거 자체가

그 말을 내 뱉거든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다시는 죄 짖지 말라고

뻘건 글쓰로 확대를 막 하면서 화와 분노를 나타내고 있으니

그 자체가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인애와 자비를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또 의문의 반복을 하고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인간의 꾀를 또 그 미완료를 반복하게끔

자기도 안지키는 것을 남에게 짐 지우는 식으로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천국 못 들어가게 한다 말이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 티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들보를 본다는 것은 십자가로 보게 되면

결국 악마는 남이 아니라

원수는 자기 자신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다윗은 자신이 원수임을 알고

아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조차도 앞으로의 미래의 이스라엘

미래의 이스라엘 왕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뭘 해도 엉터리이기에 말이죠.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영광에서 새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왕되신 예수님을 봐버렸거든요.

 

괜히 이스라엘 된 것이 오히려 사단의 회로 작용하는 겁니다. 선민된 것이 말이죠.

 

그래서 마리아가 그리고 한나가 기도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맞냐라고?

이 이스라엘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이스라엘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져달라고 한다 말이죠.

가만히 보니 그 마리아의 찬양이

한나의 기도가 오늘 시편 147편과 똑같습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라고 말이죠.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이 기도를 이미 완료로써 외치고 있지 앞으로 이렇게 되게 해 주세요 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이미 찬양이란 완료성을 내뱉는 겁니다.

앞으로 이렇게 되게 해 주세요 라는 이미와 아직의 뭐 긴장관계라는 인간의 꾀 노림수가 개입할 여지가 일체 없다 말이죠.

 

계시록처럼 일곱교회는 주의 오른손에 사로잡힌바 되고

사단의 회는 상대적으로 주의 발등상에 놓여져서 숨은 정체가 들통나듯이

이렇게 두 패로 가르는 겁니다. 완료성 그 자체로 말이죠.

그래서 이 중간에서 에수님은 비방받는 표적이 되신 겁니다.

곧 십자가(주의 인자하심이라는 3일의 간극)로 가른다 말이죠.

 

자 그런 점에서 흩어버리는 겁니다.

흩어버리고

각기 제 길로 가는 절망 속에서 있던 자들을

사람의 손이 아닌 성령으로 모으시고 성령 혼자 하는 일들을 보자 라는 점에서

성령 행전인 사도행전이

그리고 오늘 시편 147편부터 마지막편 까지의 성령활동

더 나은 인애와 자비가 어떻게 일을 다 처리하는지

그 원인 없는 결과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미래완료를 누리게 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분명 흩어졌는데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말이죠.

그런데 묵시적으로 이미 하나로 모여진 겁니다.

분명 공간도 시간도 역사도 다 따로 따로 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입니다.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하나 된 원인이 안나와요

그냥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처럼 말이죠.

 

그것도 미완료됨이 없이

의문이 없이

의문의 반복이 없이

완료됨으로 미흡함이 없이 완벽하게 말이죠.

 

갑자기 변화산에서 엘리야가 900년의 시차와

모세의 1300년의 시공간차를

한 인물 곧 예수 안에서 하나로 모이게 하듯이 말이죠.

이거 원인 없어요

그냥 결과만 누릴 뿐이니

베드로가 너무 너무 좋아서 집 세채를 짖겠다고 할 정도이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이 이것을 누리게 되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이제 기대를 걸거나 미련을 두겠습니까?

이미 더 좋은 것을 봐 버렸는데?

결과가 덮쳤는데?

끝이 덮쳤는데?

 

좀전 시편 147편 이전 편 까지만 해도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했는데

물에 빠져서 건져달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건짐을 받아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원인 없는 결과를 구체적 보편성으로 누리게 될 때에

이 모든 것은 감사로 성령으로 일을 다 처리했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147편부터 마지막편 까지는

모든 것을 성령으로만 일을 다 처리하셨다는

성령행전의 결과만을 누리는 겁니다.

천사들만이 부저런히 사도들을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발길을 옮기도록

부지런히 부랴 부랴 옮기는 겁니다.

혹 누가 생명나무를 자력으로 따먹을까 싶어서

이 십자가의 선물을 선물이 아닌 자력으로 소유할까 싶어서

사도들을 가만히 두질 않고

좀 친해질 듯 하면 옮겨버리고

좀 친해질 듯 하면 죽여버리듯이

타작 마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종말을 선물해 주고 싶어서 말이죠.

완벽한 거룩을 입혀주고 싶어서

안그러면 666이라는 함량미달의 저울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흩으셨다가 모으심으로

이 간극을 통해서

이 성령의 일을 통해서

땅에 소망을 두는게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게끔 인간에게 일체 맡기질 않고

주님이 직접 부랴 부랴 움직이시는

이 완료성을 때려 부으시는 겁니다.

 

얼마나 밝히 보였으면

다른 것에 눈길이 가질 않듯이 말이죠

 

그러니 찬양하기가 아니라 찬양하기를 지키기가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 보편성 즉 내가 버렸는데 그 내가 버린 돌이

나의 머릿돌로써 부인할수 없는 머릿돌로 작용했을때에

이제 더 이상 찬양하기가 아닌

이미 완료된 것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창세전의 찬양자로 태어났음을

입이 없이 태어났어도

벙어리로 태어났어도

이미 찬양자로써의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존재는 지켜야 합니다. 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필연화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능은 존재 이전에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기에

지킬 필요가 없이

누리도록

기쁨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당위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슬픔으로 몰리고

죽음으로 몰리고

심판으로 몰리고

저주로 몰리면 몰릴수록 더더욱 찬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위 곧 기능

존재 이전의 기능이기에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우연이거든요.

 

이것이 예정된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거든요.

죄인만이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의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할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번제와 제사를 찬양합니다.

? 자기가 드렸거든요.

 

오늘 시편 147편에서

도대체 무엇을 찬양할까요?

흩으셨다가 모으심을 찬양합니다.

이상하잖아요

 

인간의 노래에서 이것을 노래하는 자는 없어요.

유대인 중에서도 이런 노래 부르는자 없습니다.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인데 어떻게 찬양하겠습니까?

 

그런데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이기에

이 영광 그야말로 황공무지로소이다 이기에

그야말로 몸둘바를 몰라 그 영광에 그만 뿅가는 겁니다.

십자가가 너무 또렷하고 밝히 보이니까 눈이 멀어버리듯이 말이죠.

압도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만 당할 수가 없잖아요

선지자는 너도 당해보라는 겁니다.

참 좋은데 뭐라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참좋아서

막 등떠밀어 십자가에 풍덩 빠뜨리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 속에 빠뜨리는 겁니다.

 

이 주의 인자하심 이라는 간극 속에서만 나오는 새노래로써

다윗은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선물을 받았기에 그 기쁨을 감출수가 없어서

다니엘 세친구가 그 불속에서 그 저주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뭐가 그리 좋아서 덩실 덩실 춤을 출까요?

 

새노래 라는 인물이 왔고 그와 함께 춤을 추게 되니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감히 불 속에서 기뻐 춤추고 노래할수 있는 자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러니 그 밝히 보이는 십자가를 노래하는 겁니다.

나 보다 더 몇백배 몇천배나 깨끗하고 거룩하기에

그 완료된 거룩을 흠뻑 적셔주시니 아니 기뻐할 수가 없으니 말이죠

 

이 십자가의 피를 노래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