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다 이루었다)로 통치하는 예수님의 나라 (시편 146)


 

(146:1, 개역)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146:2, 개역)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146:3, 개역)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146:4, 개역)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146:5, 개역)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6:6, 개역)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146:7, 개역)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146:8, 개역)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146:9, 개역)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46:10, 개역)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십자가가 주체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알곡은 곳간에 쭉쩡이는 불에 태우신다 하고 합니다.

마치 게시록 14장에 낫을 든 예수님께서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듯이 말이죠.

농사꾼은 알곡을 곳간에 넣듯 포도꾼은 포도열매를 포도주틀에 넣어서 짜는 겁니다.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런데 이 십자가가 주체가 되고

이 십자가의 대상물이 되는 인간은 알곡과 쭉쩡이로 나누어 지는데 있어서

인간은 십자가의 대상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두 패로 가르는 현상이

정작 본인이 알곡이라고 나서는 모습이 바로

십자가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타넘는 식으로써 알곡 됨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을 자랑하더라 말이죠

 

이게 종교 곧 짐승의 표를 받은 자의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 중

바리새인이 정죄하는 저 세리 매국노 친일파 친로파가

고개도 못 들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더라 말이죠.

즉 심판의 주로 보았다는 겁니다.

 

뭘 해도 자기는 죄 밖에 안나오는 죄인이며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심판 앞에서 불 앞에서 그 불에서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직시하는 판국에

 

바리새인은 지금 현실을 못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종교생활로 도 닦은 것을 들이대는 겁니다.

 

그것이 마치 구원받는 조건인냥 구원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마치 마귀의 세가지 시험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입니다.

짐승이 유혹하니까 넘어가버리는 이적을 바라는 겁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 바로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아닙니까?

기적적으로 천사가 두 손으로 받쳐주면

이것이야 말로 기적의 사람이다 말이죠.

시편 91:12을 인용하면서 까지 말입니다.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91:13, 개역)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91:14,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91:15, 개역)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응답하라 하나님!! 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 시편 91편이 실현되는 예수님의 시편대로 기록된대로 이루어지심에서는

정작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다 말이죠.

이게 현실입니다.

 

세리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을 제대로 봤다 말이죠.

이게 제대로 된 현실이다 말이죠.

어디 함량 미달인 것들을 들이대냐 말이죠.

뭘 해도 함량 미달인데

거룩이 채워지질 않는데

 

예수님 조차도 버림받는 모습인데 말이죠. 뭐 선택받은 티를 내겠다굽쇼?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불러도 대답 없는 너 ~~~ 김종서의 노랫말처럼 답이 없어요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7:47, 개역)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27:48, 개역)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27:49, 개역)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27:50, 개역)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19:28, 새번역)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 69:21

(19:29, 새번역)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19:30, 새번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만약에 답이 있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인터넷 글을 보게 되었는데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가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버림 받은 것이냐 라고

미국에 유학간 딸이 한국에 어머니에게 묻더라 말이죠.

아니 그 쪽에서 교회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목사 전도사 다들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길래

오죽 답답했으면 어머니께 물었냐 말이죠

어머니도 아는대로 대답했는데 정작 본인도 잘몰라서 다시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에게 물었다고 하더라 말이죠.

 

사실 제가 이 글 비슷한 내용을 아마 이 글인지도 모르겠는데

오래전 5년 전이였던가? 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로 대논쟁이 벌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인터넷사이트에서 벌어진 것이라 잠깐만에 다시 잠잠해 졌지만

댓글들이 장난이 아니였다 말이죠.

그런데 다들 한결같이 저 유학간 딸처럼

그 답답함이 댓글 속에서 막 쏟아져나오더라 말이죠.

아무도 이 부분을 속 시원히 이야기 해 주는 사람들이 없어

확 불 일 듯이 확 번지더니 삽시간에 잠잠해 지더라 말이죠.

일반인들은 모르겠어 답답해 하고

목회자들은 괜히 아는 척 했다가는 공부 안한 티 날까봐 손해 볼 것 같아서 나서지는 않더라 말이죠.

 

만약 엘리 엘리 라바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물음에 하나님이 응답을 해 버리게 되면

 

그것은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대한 속시원한 답을 주겠다는 하나님을 시험한 마귀의 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말이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라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짐승의 표인 666은 측량저울에 모잘라는 함량미달이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는 돌을 떡덩이 되게 하는 경제문제 해결하는 기적을 베푸는 메시아를 요구한 겁니다. 그거 해결 한다고 완료가 될까요? 택도 없습니다. 여전히 미완료입니다. 이런 의문의 반복을 왜 하냐 말이죠.

그러니 시험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보여주려고 온게 아니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버림받는 예수님 외에는 보여줄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 버림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으니까 말이죠.

 

그 유학간 딸은 왜 버림받냐 라는 질문인데

뭐 아버지 라는 어원을 찾아서 답을 하지 않나

시편 22편을 읽어보라 거기서 답 찾으라 라고 답해놓고서는

정작 본인들도 시 22편의 내용이 뭔지 모르니까

다시 재질문으로 시편 22편의 내용이 뭔데요 라고 다시 묻더라 말이죠.

 

(22: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버림 받은 것 맞아요 맞습니다 맞고요

 

지금은 그때의 댓글들이 없길래 로그인 안해서 그런가? 안그러면 댓글은 다 삭제시켰나?

아무튼 댓글들이 장난이 아니였던 것이

바로 절대로 예수님은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봐라 다시 살아났잖아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다들 저 솔직한 유학간 여대생 말처럼 궁금은 하면서도

세뇌 당한 교리로 그냥 대충 어차피 답은 없다는 식으로 저런 댓글로 마무리 되더라 말이죠.

그럴 것 같으면 왜 댓글의 논쟁이 그렇게 활발했겠냐 말이죠.

 

저는 놀랬던 것이 구지 목회자들이 나서지 않아도

일반인들 스스로가 이 확 일어난 분위기를 잠잠케 해버리더라 말이죠.

 

이야 박수 ~~~~

 

목사들이 세뇌 하나는 끝내주게 잘 했넹 박수 ㅉㅉㅉ

 

하나님의 아들인데 버림받을 일이 없다는 겁니다.

거봐 어차피 다시 살아났으니 다 해결되었지? ~~~

 

버림받은 것 맞습니다

만약 버림받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차피 다시 살아나잖아요?

그러게요

어차피 다시 살아날꺼면 왜 버림받는 과정이 왜 구지 필요하겠냐 말이죠

 

 

버림받을 일은 없다 거봐 다시 3일만에 짠 하고 다시 살아났잖아 라고 주장하는 쪽이 바로

종교라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기적으로 보고 있다 말이죠.

 

이것을 매매하는 겁니다. 구원 매매

 

여러분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

 

그러니 성령을 그들은 단절로 보는게 아니라 개방이요 연결이요 소통으로 본다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그럴꺼 같으면 왜 버림이라는 사건이 왜 구지 필요하냐 말이죠

 

누구 말마따나 십자가 십자가 고만 카라 라는 겁니다.

죄 죄 죄 고만해라 마이무따 아이가 라는 겁니다.

 

장사(매매)를 해야 하는데 십자가 그리고 죄라고 하면 장사 안된다 쪽빡 찬다 라고 한다 말이죠.

 

사람들에게 소통꺼리를 줘야지

왜 단절꺼리를 줘야하냐 라는 겁니다.

 

자기들끼리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질문을 싸아악 잠재워서 언제그랬냐는둥

단절은 빼버리고 소통꺼리들로 대체시켜 버리더라 말이죠.

 

말 되는 소리를 해야 소통이 되지

말 안되는 소리를 하면 불화가 일어난다 말이죠.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불화케 만드는 복음인데 말이죠.

그런 기쁜 소식을 인간에게 맞는 맞춤형으로 만들더라 말이죠.

그래야 매매 곧 돈이 된다 말이죠.

 

돈 안되는 인간은 교회에 덕이 안되기 때문에 나가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버림받을 일이 없다

그래야 구원이 말이 된다 라는 겁니다.

 

심판이 곧 구원이요

버림이 곧 구원이다 말이죠.

 

잃어버림이 없는데 어떻게 되찾음이 있을수 있냐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림을 만드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3일만에 부활하심이라는 두 꼭지점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두 꼭지점을 잇는 변, ,

이 두 간극의 사이가 중요하기에

3일의 간극이 바로 예수님께서 만드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거기에 뭐 있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아니네?

네 맞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은 버리고

의미 있는 것만 찾자

 

예수님은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었다 말이죠.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146:7, 개역)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146:8, 개역)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146:9, 개역)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압박 당하는 자

주린자

갇힌자

소경

비굴한자

고아

과부

 

말이죠.

 

이들은 항상 상대자가 있다는 겁니다.

 

압박당하는 자가 있다면 갑질하는 자가 있다는 거죠

우리때는 당번병이라고 다들 꿀보직이라고 부러워했는데

이건 뭐 노예가 따로 없죠

전자팔치를 차고 심심하면 호출 당하더라 말이죠.

 

주린자 즉 상대적인 배부른자를 의식해서 말하는 겁니다.

존재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능으로써의 주린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능의 상대적인 의미인 존재가 소환당하는 겁니다. 배부른자 곧 부자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라는 거죠.

 

또 누가 있죠?

갇힌자 즉 상대적인 가두어버린 포로로 만든 자가 있다는 것과

또 동시에 이 포로된자를 해방시키는 해방자가 상대적으로 기능적인 차원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세 꼭지점의 관계성 꼭지점을 잇는 삼각변을 생각하시면

이 변, 세 변이 바로 기능이다는 겁니다. 기능은 관계적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원수 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겁니다.

 

또 누가 있죠? 소경

 

여러분 이 시편은 예수님이 시편 그대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복음서에 다 나오는 사건입니다.

실로암 소경 사건에서

소경 혼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는 절대로 소경 아니다 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이 실로암소경을 미끼로 삼아서 반드시

눈 멀쩡히 뜬 자를 소경 만들어 버리는 식입니다.

 

그리고 소경 아니다 라고 우기는 자의 특징이 바로

짐승표를 받은 티를 팍팍 낼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 말이죠.

? 실로암 소경 앞이기에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

 

바리새인 본인들이 미끼를 문줄도 모르고

예수님을 시험해요 글쎄 ~~~~~~

 

시험하지 말라 라고 하셨잖아요

 

주린자를 배불리게 돌을 떡 덩이 안 만든다메?

그럼 안 만들어야지

왜 기적을 행해서 반칙을 하냐?

기적 안 한다메????

 

그럴줄 알고 기적을 행하셨다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거든요.

 

예수님 자신이 실족케 하는 자로써 예수님 자체가 요나의 표적

3일의 간극인 걸림돌이 되었다는 겁니다.

 

정작 세리나 실로암 소경은 주님의 처분에 따랐다 말이죠.

심판 받았다 말이죠.

 

어라 심판인데 졸지에 구원이요 고침받음이더라 말이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심판 받고자 하는 자는 고침받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심판 안 받고자 하는 자는 도리어 소경이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계시록 14장에 포도주틀을 준비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나라에 집어넣을려고 성도들을 포도열매송이처럼 쫘아악 짜서

포도주를 만들 듯이 말이죠.

 

(14:14, 개역)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5, 개역)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14:16, 개역)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7, 개역)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8, 개역)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4:19, 개역)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개역)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알곡을 곳간에 채우듯이 말이죠.

 

그 타작마당 그 십자가 틀이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에 의해서 두 패로 갈라지는 현장인

종말의 현상이다는 겁니다.

 

이 종말을 만드시는 겁니다.

공간도 아니요 시간도 아닌

사건을 만드시는 겁니다.

 

포도주틀을 만들어서

타작마당을 만들어서

 

분류작업을 하신다 말이죠.

 

그러니 버림받는 것 맞습니다 맞고요

이 잃어버림을 통해서 되찾는 겁니다.

 

자 요한복음에서 갑자기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마태 마가에만 나오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는 느닷없이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해 버리십니다.

 

아니 버림 받았다메요?

그런데 다 이루었대요 글쎄

 

앞 뒤 맞나요?

맞는 것 둘째 치고

완전 정반대의 모순 아닙니까?

버림 받았는데

다 이루었대요

이게 말이 되나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해 놓고서는

갑자기 롬8장으로 넘어가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외칩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 말이죠.

 

시편은 다 이런 식입니다

주여 살려주세요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그렇게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불 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더니

갑자기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라고 찬양하더라 말이죠.

 

뭐가 중간에 뭔가 벌어졌는데

알길이 없어

그냥 원인 없는 결과 뿐이야 ~~~~

 

시험을 쳐야 합격여부를 가릴텐데

무시험 합격이래요 글쎄

 

자 그렇기 때문에

이미 다 이루었다 속에 집어넣고

미래완료를 덮어버리고서

후차적으로 다시 그 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누가 나옵니까?

압박당한자

주린자

갇힌자

소경

의인 의에 목마른자

비굴한자 천한자 비천한자 라는 의미죠

고아

과부

 

(146:7, 개역)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146:8, 개역)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146:9, 개역)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저런 기능을 만들어 낼수가 없고요

 

왜 실로암 소경은 어릴적부터 태어나기전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느냐에 대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라고 붕뜨는 소리를 하시느냐 하면

 

저런 기능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기 위해서 부여받은것이지

본인이 구원받을려고 저런 기능을 조건으로 갖춘게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조건으로 갖출려고 환장한 자는 바리새인이였으니까

상대적으로 주님이 부여하셨다 말이죠.

 

그런데 저들은 이 기능을 버림받았다 저주 받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기능을 부여받았다 라고 보는데 말이죠.

 

저런 기능을 부여받을까봐 아예 방벽을 치는 겁니다.

어이 어이 썩 물러가라 바이러스야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 버림받음이 바로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예수님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곧 여호와의 이름 이지요

이 이름에서 태어난 자가 이 이름을 찬양하는 십사만 사천이구요

 

이 주의 인자하심에서 태어났기에 주의 인자하심이라는 처음사랑의 자리에서 죽는 겁니다.

거꾸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이 처음자리로 돌아와서 거기서 죽듯이 말이죠.

출애굽때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듯이

홍해라는 물 그 죽음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 긍휼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불 속에서 노래하고 춤 추었듯이 그 처음자리로 말이죠.

 

이 십자가의 자리

이 처음사랑의 자리

곧 버림받은 자

곧 죄인

곧 환자는 의사를 말하기 위한 의사의 기능을 노래하기 위해서

새노래로 만들어졌고 새노래로 부르기 위해서 말이죠.

 

바리새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좋다 싶으면 당장 배우겠지요 따라하겠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도저히 노래 할 수가 없더라 말이죠.

방금 자기들 손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예수를 자기 손으로 십자가에 죽였는데

그 십자가를 노래 하다니?

그런 모순적인 행동을 할수 없다고

완악한 수건을 절대로 안 벗을려고 한다 말이죠.

 

뭐 그칸다고 모순적이지 않을까요?

뭘 해도 다 모순적인데? 이중적인데?

인간에게는 일관성이 없어요

그 일관성을 깨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이중모순입니다.

부정의 부정이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로 곧 다 이루었도다

곧 원인 없는 결과로 통치하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 새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자가

십사만 사천입니다

 

저들 666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저들에게서

해방 되었거든요.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 같이

 

새 보세요 날개가 있습니다.

 

자유 아닙니까?

 

마음껏 나는 것이 바로 막살기입니다.

새에게만 막살기가 있어요

날개가 있거든요.

 

그런데 꼭 날개 없는 것들이 막살면 안된다고 합니다.

?

날개가 없으니까 zzzzzz

 

원래 그들은 막살지 못해요

날개가 있어야 막살던가 하지요.

 

주님 때문에

해방자 때문에

마음껏 날개짖 곧 막살기를 하는 겁니다.

 

날개가 없으니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마음껏 공격하라고 별명을 붙이는거다 말이죠.

 

얼마나 자유롭지 못합니까?

막살지를 못하니까

날개없는 티를 팍팍 내면서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고

마음껏 날개짓으로 하늘을 맘대로 날면 안된다고

이것이 짐승의 표를 받은자들이

오로지 표 로만 666 수로만 매매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강요된 선택으로 노예 만드는 식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자유의 날개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말이죠.

 

다윗이 얼마나 자유로운 날개를 달았으면

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본인이 이스라엘 왕으로써

해볼 것 다 해 봤거든요

희망 있다?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망하라고 물에 확 등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이미 새이스라엘은 미래완료로 완성 되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도리어 버림받는 자가 되라고 확 등떠밀어요

날때부터 소경이 된 실로암 소경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십자가 라는 사건의 공간을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라고 말이죠.

죽음 속으로

심판 속으로

버림 받음 속으로 말이죠

 

확 등 떠밀어 버립니다.

 

바로 이들

 

1 압박받는 자 2 주린자 3 갇힌자

1 소경 2 비굴한자 3 의에 주린자

1 2 고아 3 과부

 

(146:7, 개역)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146:8, 개역)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146:9, 개역)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울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희년 기쁜소식을 만나라고 말이죠.

 

그 버림받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3일만에 다시 함께 사는

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다시 태어나라고 말이죠.

 

이것이 시온산에서 노래하는 십사만 사천명이라는 어린양의 이름에 속한자 들입니다.

 

(146:10, 개역)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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