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동행하리요? (사 33: 1-2)
율법(인과법칙)이냐 은혜냐, 예루살렘(가시나무 떨기)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은혜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시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사 33:1, 개역)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사 33:2, 개역)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사 33:3, 개역)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시므로 인하여 열방이 흩어졌나이다』
(사 33:4, 개역) 『황충의 모임 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의 뛰어 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 오르리라』
(사 33:5, 개역)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 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사 33:6, 개역)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사 33:7, 개역)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사 33:8, 개역)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며』
(사 33:9, 개역)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 마르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 갈멜은 목엽을 떨어치는도다』
(사 33:10,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니』
(사 33:11, 개역)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사 33:12, 개역)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베어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사 33:13, 개역)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나의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사 33:14, 개역)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사 33:15, 개역)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사 33:16, 개역)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33:17, 개역)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사 33:18, 개역)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사 33:19, 개역)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 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사 33:20, 개역)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사 33:21, 개역)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사 33:22, 개역)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사 33:23, 개역)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사 33:24, 개역)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 33:1, 새번역) 『약탈 한 번 당하지 않고, 남을 약탈하기만 한 자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배반 한 번 당하지 않고, 남을 배반하기만 한 자야,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너의 약탈이 끝나면, 이제 네가 약탈을 당할 것이며, 너의 배반이 끝나면, 이제 네가 배반을 당할 것이다.』
(사 33:2, 새번역)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아침마다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시고, 어려울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십시오.』
(사 33:3, 새번역) 『주님의 우렁찬 소리에 백성이 도망 치며,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우리편이 되어 싸우시니, 민족들이 흩어집니다.』
(사 33:4, 새번역) 『민족들아, 사람들이 황충이 떼처럼 몰려들어서, 너희가 약탈한 전리품을 빼앗을 것이다. 메뚜기 떼가 뛰어오르듯, 사람들이 그 탈취물 위에 달려들 것이다.』
(사 33:5, 새번역) 『주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저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시온을 공평과 의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사 33:6, 새번역) 『주님께서 너로 안정된 시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늘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혜와 지식을 주신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보배다.』
(사 33:7, 새번역) 『용사들이 거리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평화협상에 나섰던 사절이 슬피 운다.』
(사 33:8, 새번역) 『큰길마다 위험하여 행인이 끊기며, 적이 평화조약을 파기하며, ㉠증인들이 경멸을 받으며, 아무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 ㉠사해 사본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그 성읍들이'』
(사 33:9, 새번역) 『땅이 ㉡통곡하고 고달파 하며, 레바논이 부끄러워하고 메마르며, 샤론은 아라바 사막과 같으며,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진다. / ㉡또는 '마르고'』
(사 33:10,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활동을 시작하겠다. 이제는 내가 일어나서, 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 보이겠다.』
(사 33:11, 새번역) 『너희는 겨를 잉태하여 지푸라기를 낳는다. 너희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간다.』
(사 33:12, 새번역) 『뭇 민족은 불에 탄 석회같이 되며, 찍어다가 태우는 가시덤불같이 될 것이다.』
(사 33:13, 새번역) 『너희 먼 곳에 있는 자들아, 내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들어 보아라! 너희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깨달아라!"』
(사 33:14, 새번역) 『시온에서는 죄인들이 공포에 떨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사르는 불을 견디어 내겠는가? 우리들 가운데 누가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견디어 내겠는가?" 하고 말한다.』
(사 33:15, 새번역)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
(사 33:16, 새번역)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 돌로 쌓은 견고한 산성이 그의 은신처가 될 것이다.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고, 마실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 33:17, 새번역) 『네가 다시 한 번 왕의 장엄한 모습을 볼 것이며, 백성은 사방으로 확장된 영토를 볼 것이다.』
(사 33:18, 새번역) 『너는 지난날 무서웠던 일들을 돌이켜보며,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서슬이 시퍼렇던 이방인 총독, 가혹하게 세금을 물리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던 이방인 세금 징수관들, 늘 너의 뒤를 밟으며 감시하던 정보원들,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 33:19, 새번역) 『악한 백성, 곧 네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며 이해할 수도 없는 언어로 말하던 그 악한 이방인을, 다시는 더 보지 않을 것이다.』
(사 33:20, 새번역) 『우리가 마음껏 절기를 지킬 수 있는 우리의 도성 시온을 보아라. 옮겨지지 않을 장막, 예루살렘을 보아라. 우리가 살기에 얼마나 안락한 곳인가? 다시는 옮겨지지 않을 장막과도 같다. 그 말뚝이 영원히 뽑히지 않을 것이며,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 33:21, 새번역) 『거기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이 되시니, 그 곳은 마치 드넓은 강과 시내가 흐르는 곳 같겠지만, 대적의 배가 그리로 오지 못하고, 적군의 군함이 들어올 엄두도 못낼 것이다.』
(사 33:22, 새번역) 『주님께서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세워 주시는 분이시며, 주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시다.』
(사 33:23, 새번역) 『그리로 들어오는 배마다, 돛대 줄이 느슨하여 돛대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돛을 펴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탈취물을 얻을 것이다. 다리를 저는 사람들까지도 많이 탈취할 것이다.』
(사 33:24, 새번역) 『거기에서는 아무도 "내가 병들었다"고 말하지 않겠고, 거기에서 사는 백성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시 24:1, 개역) 『[다윗의 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24:2, 개역)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시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5, 개역)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시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8,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10,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이스라엘을 하나의 개인의 모집으로 보고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있기에
개인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지난 시간에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를 입히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로 만들고자
의가 먼저 떳음으로 인해
죽은자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공간 개념도 되고
패역한 딸 예루살렘이라고 이스라엘을 말하기도 하고
아무튼 인간은 항상 역사 곧 시공간을 염두하는데 있어서
즉 인간의 신체성인 몸이지요
그런 시공간의 몸 개념을
예수님은 오늘 나오는 예루살렘이라는 공간 개념 조차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공간으로써
인간이 기댈 곳 조차도 아예 다 싹쓸이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마치 지옥간 부자가 여전히 자기가족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 달라고 여전히 자신만의 공간과 자신만의 시간개념으로 포기하지 못하듯이
그러니까 지옥이듯이 개인의 사적인 공간과 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조차도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의 공간으로 만듭니다.
즉 예루살렘 속에서 인간들이 자기 잘났다고 십일조 내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하고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자꾸 울퉁불퉁 첩경을 산당처럼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을
교회도 우후죽순처럼 유행처럼 생겨났다가 다 사라지는
그런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가짜였죠
진짜 교회라면 오늘 본문처럼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겁니다.
한 순간에 다 불도져로 다 밀어서
평평케 만들어 버리는 첩경을 평탄케 합니다.
아니 왜?
바로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려면
예루살렘에서 그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이미 말씀이 떳기에
예루살렘은 죽을 수밖에 없고 그 죽은 예루살렘을 다시 살리는 말씀으로 인해서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먼저 말씀이 있었는데 마치 뒤에 나오듯이 보이지만
이 죽은 예루살렘을 다시 살려내시는 말씀이었기에
뒤에 말씀이 새로 생성이 된게 아니지요
예루살렘이 오히려 새로 생성이 된 거죠
그러니 기존의 예루살렘에 대한 모든 관념들이 다 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은 단 한 번도 안 이루어진적이 없지만
정작 인간의 꾀는 그렇기에 기존의 예루살렘에 공간에 살림살이를 꾸려놓으면 된다고 보고 있던 것이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산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 입니까?
즉 오늘날로 치면 교회 의 의미가 뭐냐 말이죠
천국백성이라는 의미가 뭐냐 말이죠
기뻐하심을 입은 의(주의 인애와 자비)가 덮쳐진 이스라엘이라는 의미 아니냐 말이죠
그러니
이 의 때문에 공적인 자유 때문에 자유를 나타내도록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 주어라 라고 하십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더 웃끼는 것은 오늘날 개혁주의와 성화론자들이 이것을 지키겠데요 글쎄
그것이 의를 바래서가 아니라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다는 심뽀로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 라는 심뽀로
그런 인간의 속임수로 자꾸 지킬려고 한다 말이죠 숙제를 하라고
목사들이 강요를 해요 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마 5:38, 개역)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개역)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개역)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개역)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산상수훈은 율법 강화입니다. 간따나 못 지키는 율법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한 율법을
더더욱 강화 시켜버리면
죄인이 아닌 아예 원수가 된다 말이죠
이런 원수를 누가 사랑할 수 있겠냐 말이죠
자기 친한 친적을 도와주는 그런 이웃사랑을 이웃사랑실천했다고 우겨요
양탈늑 모임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했었는데
들키니까 바로 잠수를 타 버렸죠
원수를 이웃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없어요
도리어 율법 지키듯이 하게 되면 도리어 본인이 선악을 아는 하나님 같이 되었다고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그 본성이 팍팍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초반부터 불가능한 말씀을 해요
유대인 곧 이스라엘도 안 되는데
개같은 이방인인 우리는 더더욱 안 됩니다.
말씀이 아주 특이합니다.
(사 33:1, 개역)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화 있을진저 너는 학대를 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학대를 당하지 않으니까
너가 도리어 학대하는 자가 되었구나
너가 속임을 당해야 하는데
너가 속임을 입지 아니할려고 속이는 자가 되었구나
너가 학대하는 것을 그치게 되면
너가 도로 학대를 당하게 되고
너가 속임수를 그치게 되면
너가 도리어 속임수를 당하게 되리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속임수와 학대를 그만 두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속임 당하고 학대 당하라는 말입니까?
속임 당하고 학대 당하면 끝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도리어 그렇게 당했기에 너도 학대하고 속인다는 말입니까?
물론 저의 이런 의문을 보고
지식인척 하는 자는 차라리 학대 당하라고 하고 차라리 속임을 당하라고 합니다.
그것을 제가 몰라서 의문을 가지는게 아닙니다.
차라리 학대를 당하고 차라리 속임을 당했뿌라 로 끝나면 참 좋은데
뫼비우스 띠처럼 계속해서 챗바퀴 돌게 된다 말이죠
그렇게 학대 당해도 너는 반드시 학대자로 최종적으로 귀착이 되고
그렇게 너가 속임수를 당하는 피해자가 되어도 결국은 너는 반드시 속이는 사기꾼으로 최종 적으로 도착하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에 갇혀 버린 인간의 실상이다는 거죠
이거 무슨 수로 해결할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 갇혀 버렸구나
바로 그겁니다
너는 사망의 몸에 갇혔다는 겁니다.
여기에 딱 걸려버린 자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그래서 시편 24편을 언급하는 겁니다.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수 있겠냐?
너 손 깨끗하니 너 내가 누군지 아니 너 맘 청결하니? 라고 도끼 들고 세례요한이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아예 산상수훈!! 아예 산에서 가르쳐요 글쎄
산 아래에는 이제 도끼들이 막 우수수수수 막 떨어진 셈입니다.
지키면 살고 못 지키면 죽습니다. 사기꾼 성화론자들은 지킬수 있다고 막살면 안된다고 합니다.
아직 그들에게 산상수훈의 말씀이 안 보이니까 실상을 못 보고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외치는 놈 뺨을 때려 보세요 다른 뺨을 도리어 감추어버립니다.
이것은 율법 외에 한 의를 말하고자
의가 너거 이거 못하제? 그래 죽어라
죽여놓고 다시 살리는 이 의가 옳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어라 라고 하니까 여기서 다 뿔나고 여기서 율법 지켰는데 왜 죽이냐 라고 나오는 겁니다.
차라리 안 지켰으면 주여 죽어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세리처럼 나올것인데
괜히 지키는 바람에 하나님과 같이 동일하게 된 입장인데 왜 죽이냐 라고
도리어 하나님과 동등함을 버리시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도리어 죽이게 되는
이 역설의 율법 올무에 빠져나올길이 없이 말려들게 된다 말이죠
그 사망의 몸 그거 찢어버리자 하고 나서는 분이 바로 의의 문이신 예수님입니다.
너거 그 엉터리 몸
선악의 몸
인과법칙의 하나님과 같이 된 가짜 몸을
십자가에 못 박자 라고 나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말이죠
이 나의 몸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십자가를 다 이루신 주님이 옳았다는 겁니다.
분명 예루살렘은 묵시의 골짜기 환상의 골짜기
은혜의 의의 성읍인데
인간들은 거기에 법을 지키는 공간으로 도배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선악의 골짜기 가증한 물건이 서게 되는
우상의 골짜기
하나님과 같이 된 울퉁불퉁 첩경이 되어버린 척박한 도시가 되어버린 겁니다.
어쭈 은혜의 성읍을 선악의 도성으로 만들어버렸어? 우상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어
그래 너거들 법칙 그래 한번 얼마나 잘 지키나 보자
너 자신이 학대를 안 당하면 너가 학대자가 되고
너 자신이 속임수를 당하지 않으면 너가 속이는 자가 될거야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왜 의의 성읍인 예루살렘을 너거들 인생과 같이
수에 칠 가치도 없는 허구인 우상
그 안개와 같은 인생과 같이 예루살렘도 그렇게 만들어버릴려고 하느냐
뭐 새노땡명땡교회라고 만들면 영원하겠니 아니면 수에 칠 가치도 없는 허구 안개가 되겠니
세습은커녕 너가 도리어 갈기 갈기 찢겨서 분해 될꺼 뻔한데?
마침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를 통해서
북이스라엘 왕조와
남 유다의 왕을 비교를 하니
주님은 북이스라엘을 지옥간 부자처럼 창고를 늘리자 라고 하는 부자에게 불쑥 나타나서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저 창고에 쌓아 둔 것 누구것이 되겠니 라고 하신다 말이죠
느부갓네살 아들 벨사살에게 불쑥 나타난 손가락이
모잘라 모잘라 함량미달 이라고 하듯이
애굽처럼 창고 피라미드를 아무리 세워도 영원하지 않고
오늘밤 그 밤 이 밤 저 창고 누구것이 되겠냐 라고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우짤래 라고 나온다 말이죠
거룩한 성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왕 좌 자리를 서로 차지할려고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아니 차지해서 뭐하게요?
못 차지 하면 자신의 왕권이 하늘에서 허락하지 않은게 되니까
이 성전이 졸지에 요물로 변하는 거죠 요물
꼭 가증한 물건 자체가 서는게 아니라
이런 사고방식이 그 성전 공간의 주변으로 형성 된다는 자체가 이미
울리는 꽹과리 무기를 잔뜩 쓰레기처럼 모아서 쌓고 있는 겁니다.
강도의 소굴이지요
반면에 남유다 왕들 쪽은 역시나 마찬가지이긴 한데
졸지에 주님의 징계가 있다 보니
남겨둔 한 씨 때문에
자꾸 누락 누락
누락을 당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학대 당하기 싫고
때려 죽어도 속임수 당하는 사기 당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학대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사기 당함으로써
도리어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내가 주님을 학대하고 사기친 십자가의 지혜가 옳았다고 외치는
이 의를 바라보게 되는
의가 덮쳐진 족보가 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막 죽이심에 의해 막 죽임당하는 막 누락당하는 왕 계열을 나타내는 거죠
반면에 북이스라엘 왕조는 다른 개같은 이방 나라 왕조와 다를바 없는
칼 과 창이 떠나질 않지만
반대로 남유다는 칼을 쳐서 쟁기로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드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의가 평화의 왕이 의의 왕이 막힌 담을 허무시는 분이 화목제물로 오게 되는 겁니다.
이 조금 남겨둔 씨가 아니였다면
남유다 왕조 또한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다 말이죠
그래서 따로 개별적으로 뚝 떨어져서가 아닌
그 칼과 창이 난무하는 그 엉터리 예루살렘 속에서
새예루살렘을 칼 뿌라 뿌고 창 뿌써뜨려서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인데
아니 바리새인들은 말씀이 여기 있는데 자꾸 말씀을 지켰데요 글쎄
말씀은 지키는게 아니라
안 지키는 못 지키게 되는 상황에서는 남이 되는 별개가 아니라
지키든 안 지키는 말씀 자체가 얼굴과 얼굴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막상 말씀이 얼굴로 다가오니
얼굴을 다들 돌려 버려요
관계를 거부해요
나 너 모른다
난 너 얼굴 본적 없고 얼굴 모르는데
여호와가 누구지? 누구관데 자꾸 내 한테 얼굴 들이내 미니?
다들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라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말이죠
자기가 동일시 했던 그런 선악의 얼굴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럼 은혜의 얼굴은 뭐냐?
학대 받는 얼굴
속임 당하는 얼굴
결국 저 뫼비우스의 띠를 끊는 방법은
내가 학대했는데 남이 아니라 예수님 곧 하나님을 학대한 자로써의 그 얼굴을 거부한 겁니다.
내가 짖 밟아 놓은 얼굴인데 내가 안 볼려고 해요 글쎄
내가 속여놓고 어느 손이 널 때렸게 라고 놀려먹은 그 얼굴을 내가 안 쳐다 볼려고 한다 말이죠
선악의 얼굴 하나님과 같이 된 얼굴로써 심판자가 되었고 꼴에 그 심판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갈기 갈기 찢어 놓았는데
왜? 나는 대자대비한 인자한 얼글을 바랬는데 예수의 얼굴은 완전 엉망진창이니까 말이죠
아 그런데 그 얼굴 너가 그랬다는 겁니다. 너
율법 4배나 갚으라 라고 다윗 너
베드로 너
꼬끼오 너야 / 꼬끼오 너 라니깐 / 꼬끼오 어허 너여 너
닭이 선지자 되어
남유다 왕에게 왕 하나에
선지자 하나 하나가 붙어서
꼬끼오 라고 닭처럼 울어 대는 겁니다.
이웃사랑 실천할려고 하지 말고
너가 예수님이라는 이웃에 의해 그 사랑으로
너 같은 원수도 용서 받는 그 용서받는 죄인의 자리에 놓여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눈은 그저 종교성 동일성으로 흠모할만한 풍채있고 아름다운 얼굴을 찾고 있었으니
얼마나 그 기대감이 와장창 깨어지는 거꾸로 살기가 넘치게 되니 얼마나 웃끼냐 말이죠
이런 가짜 다윗의 자손상
가짜 메시아 상을 다 깨부수는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곧 예루살렘을 잃어버림을 당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제 의를 배웠기에 말이죠
배워서 배움을 실천해서가 아니라
이미 다 배웠다고 선언하는 반칙을
의가 먼저 떳기에
그 증상으로 뒤에 나타나는 겁니다. 물론 역사라는 시공간에서는 거꾸로 먼저 나타나지만
그래서 다시 되 찾은 이 예루살렘을 영원한 예루살렘으로써
더 이상 육체를 자랑할 수 없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막 속에서 샘을
광야 속에서 꽃길을
예루살렘을 사막 만들어서 샘물을 내시는 말씀을 내시고
예루살렘을 광야 만들어서 다시 3일 만에 살려내 꽃길 곧 말씀이 나오는 의의 길
평화의 길을 내시는 겁니다.
다시는 칼과 창으로 전쟁 연습할 필요가 없지요
전쟁할려고 하니까 울리는 꽹과리를 모으는 겁니다.
그럼 울리는 꽹과리 그래 그래 많이 모았나 그럼
전쟁 벌려서 평화가 오게 하려므나?
평화는커녕 전쟁이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더 커지는 겁니다.
아니 그럴꺼면 말라꼬 울리는 꽹과리를 모았니?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그래서 율법 지키듯이 말씀 지키고 막살면 안된다고 잔뜩 모았다 말이죠
모으면 뭐해요? 평화가 안 와요 평화가?
그럼 말라꼬 모았냐 말이죠?
말라꼬 말씀 실천했냐 말이죠
평화를 오지 못하게 하는데?
남을 7번 용서하니까 8번 용서한 자를 용서 못해요 그래서 9번 용서해야만 하는 괴물로 변하더라 말이죠
차라리 나는 처음부터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의의 왕은 저분
평화의 왕은 저분입니다 라고
저는 그저 원수 짖만 했을 뿐입니다 라고 저 분을 외치는
저분만이 원수를 얼마나 원수였으면 7에 70번 용서해야만 할 정도로
고아 과부 나그네 즉 책임을 누구 하나 져 줄 자가 없는
이런 죽은자를 책임질 분입니다 라고 외쳐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다행이도 이사야가 오늘 이렇게 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를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포로 잡혀 갈 때 박수 치고 기뻐 노래하며 춤추는 겁니다.
이스라엘 너거들 이제 구원 받았다고
탈탈탈 털리는 광야 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죽은 자가 되어서 그 광야에서 꽃길을 본다고
아까 북이스라엘 왕조는 마치 지옥간 부자와 같고
남유다 왕조는 마치 거지나사로처럼 개가 햩는 무시받는 누락 꺼리로 당하는 왕조가 되는데
정작 실상은 아브라함이 이 거지나사로를 다 대변해주는 겁니다.
대신 알아서 처리해 줘요
반면에 지옥간 부자는 물 한방울이 없을 정도로
누구 하나 책임을 져주지 않습니다.
진짜 사생아와 같으니 자기가 자기 스스로 선지자를 보내야 한다는 둥
숙제할 꺼리가 아직도 남아서 여전히 미완료 상태라
그러니 거지나사로는 할게 없어요
그저 아브라함 품에
약속의 품에
언약의 박스
곧 예수님의 몸 박스에 담겨져서
이런 죄인도 용서하셨다 라고
저절로 울림이 찬양이 퍼져서 우주에까지 퍼지는 겁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 것 마냥 말이죠
누가 공적인 자유를 외친 자 입니까?
부요한 부자입니까?
부요하다는 것이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공적인 자유를 외치라고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사적으로 이용해 먹는 겁니다.
지혜 지식 능력 역량 등등 남들 보다 조금 우월한 이런 모든 잉여들은
결국 자기 개인 적인 사적으로 이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비한 심판에 대비한 공적인 자유인 의(정의, 공의)를 외치라고 주시는 거다 말이죠
아무리 공립유치원이 아닌 사립유치원이라고 해도 개인 재산을 위해 국가에 공금을 주겠냐 말이죠
공립유치원이 부족해서 취한 조치를 사적으로 이용해 먹으니
지옥가는 부자와 뭐가 다르냐 말이죠.
(약 5:1, 개역)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약 5:2, 개역)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약 5:3, 개역)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4, 개역)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약 5:5, 개역)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약 5:6, 개역)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 5:7,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개역)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9, 개역)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약 5:10, 개역)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약 5:11, 개역)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약 5:12, 개역)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약 5:13, 개역)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마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막 10: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도리어 거지 나사로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긍휼을 바라는 이것이 공적인 자유를 외친 공무원(예수님)의 외침이 되어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의는 당신 뿐이다는 거죠
사망 권세를 이기는 분 말이죠
죽은 자의 자리에서 부활을 외치는 겁니다.
진짜 이웃을 사랑한 분은 저분 예수님이고
고아 과부 나그네를 살리는 기쁜 소식은 당신이다고
나는 원수로써 이웃사랑을 당한 7에 70번 용서함을 당한 자이다 라고
의사 (공적인 자유를 선포하는 자)를 외치는 환자일 뿐이다 라고
졸지에 사적인 영역이 사라진 환자가 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적인 공간을 다 없애 버리는 겁니다.
이 공적인 자유의 터를 불도져로 싹 다 마 밀어버려서
평평한 의의 성읍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니 구약의 유대인이든 신약의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또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이든
그 어떤 누구 하나도 말씀을 단 하나도 지킨 자가 없어요
있다면 의의 성읍 회복해 보라 말이죠
막힌 담을 헐어 보라 말이죠
지키면 지킬수록 막힌 담이 허물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담을 높이 높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장벽처럼 더더욱 높이 세운다 말이죠
창과 칼이 더더욱 많이 많이 쌓아요
울리는 꽹과리인 무기를 말이죠
그래놓고 말씀 지키는 자래?
오늘날 성화론자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돈을 쌓고자 하는 이유가 다 이래요
이게 무슨 교회요
이게 무슨 예루살렘입니까?
돈 속에서 말씀이 올까요?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올까요?
그래서 의를 발라야 하는 겁니다.
피를 발라야 하는 겁니다.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그래서 예루살렘을 죽이고 허물고 다시 3일 만에 짖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유대인들 당장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들 수 밖에 없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두운 눈인 우리를
이 십자가의 지혜로 다시 살리시고자
살았다고 우기면서 죽이는 살인자를
도리어 살리시고자
대신 죽는
왜?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오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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