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세상 죄 지고가는 왕이 의로 통치 하실 것이다 (사 32: 1-20)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마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막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사 32:1, 개역)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사 32:2, 개역)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사 32:3, 개역)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사 32:4, 개역)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사 32:5, 개역)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사 32:6, 개역)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사 32:7, 개역)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어니와』
(사 32:8, 개역)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
(사 32:9, 개역)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라』
(사 32:10, 개역)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사 32:11, 개역)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하여 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사 32:12, 개역) 『좋은 밭을 위하며 열매 많은 포도나무를 위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사 32:13, 개역) 『형극과 질려가 내 백성의 땅에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사 32:14, 개역) 『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산과 망대가 영영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의 즐겨하는 곳과 양 떼의 풀 먹는 곳이 될 것임이어니와』
(사 32:15, 개역)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 32:16, 개역)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사 32:17, 개역)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8, 개역)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사 32:19, 개역) 『먼저 그 삼림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사 32:20, 개역)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은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사 32:1, 새번역) 『"장차 한 왕이 나와서 공의로 통치하고, 통치자들이 공평으로 다스릴 것이다."』
(사 32:2, 새번역) 『통치자들마다 광풍을 피하는 곳과 같고, 폭우를 막는 곳과 같게 될 것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흐르는 냇물과 같을 것이며, 사막에 있는 큰 바위 그늘과 같을 것입니다.』
(사 32:3, 새번역) 『"백성을 돌보는 통치자의 눈이 멀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요구를 듣는 통치자의 귀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사 32:4, 새번역) 『그들은 경솔하지 않을 것이며, 사려 깊게 행동할 것이며, 그들이 의도한 것을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사 32:5, 새번역) 『아무도 어리석은 사람을 더 이상 고상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간교한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 32:6, 새번역)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하며, 그 마음으로 악을 좋아하여 불경건한 일을 하며, 주님께 함부로 말을 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을 주지 않습니다.』
(사 32:7, 새번역) 『우둔한 사람은 악해서, 간계나 꾸미며, 힘 없는 사람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거짓말로 그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사 32:8, 새번역) 『그러나 고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계획하고, 그 고귀한 뜻을 펼치며 삽니다.』
(사 32:9, 새번역)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일어나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사 32:10, 새번역)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딸들아,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다.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다.』
(사 32:11, 새번역) 『안일하게 사는 여인들아, 몸부림 쳐라. 걱정거리가 없이 사는 여인들아, 몸서리 쳐라. 맨몸이 되도록 옷을 다 벗어버리고 베로 허리를 둘러라.』
(사 32:12, 새번역) 『밭농사와 포도농사를 망쳤으니, 가슴을 쳐라.』
(사 32:13, 새번역) 『나의 백성이 사는 땅에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자랄 것이니, 가슴을 쳐라. 기쁨이 넘치던 모든 집과 흥겨운 소리 그치지 않던 성읍을 기억하고, 가슴을 쳐라.』
(사 32:14, 새번역) 『요새는 파괴되고, 붐비던 도성은 텅 비고, 망대와 탑이 영원히 돌무더기가 되어서, 들나귀들이 즐거이 뛰노는 곳, 양 떼가 풀을 뜯는 곳이 될 것이다.』
(사 32:15,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사 32:16, 새번역)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사 32:17, 새번역)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사 32:18, 새번역)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사 32:19, 새번역)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사 32:20, 새번역)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바로 앞의 글 마태복음 글 끝에 다음 시간 이스라엘 왕의 기능 또는 역할에 대해서 다음 주에언급한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이미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주일에 이사야 2장을 하면서
주께서 의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의를 곧 십자가의 도를 배우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럼 그 의가 뭔가?
(사 2:4, 개역)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사 2:4, 공동)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사 2:4, 쉬운) 『주께서 나라들 사이를 재판하시고,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신다. 나라마다 칼을 부러뜨려서 쟁기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는 나라들이 서로 칼을 들지 않으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 2:4, 현대인) 『그가 모든 민족을 심판하고 국제 분쟁을 해결하실 것이니 사람들이 칼을 두들겨 보습을 만들고 창을 두들겨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끼리 전쟁을 하거나 군사 훈련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 2:4, 현대어) 『국제 분쟁들을 주께서 직접 해결하시며 수많은 민족들의 문제를 주께서 직접 중재하실 것이다. 세계 각국들은 ㄱ) 무기를 모조리 부수어 평화의 도구로 바꿀 것이다. 그때에 가서는 마침내 모든 전쟁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모든 군사 훈련이 없어질 것이다. (ㄱ.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의란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의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1장도 의의 족보로써 반드시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의 개념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1장 족보를 들따 봐도 부활이 어디있냐? 말이죠
부활을 먼저 찾을게 아니라 짤리는 죽음을 먼저 보세요
누구를 짜른다 라고 했지요?
그 누구를 짤라버린다는 말은 곧 그 사상 교리를 믿고 있는 유대인들 모두를 짤라 버리는 식입니다.
이게 의 라는 겁니다.
나를 제대로 심판 할 줄 모르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가짜다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심판 받아 죽은 나를 다시 살려내지 못하는 의도 가짜입니다.
이 두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니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자들이 말한 의 곧 거룩은 순 엉터리인 거죠
그들은 정결에서 정결로 나아갑니다.
유에서 유처럼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부정에서 정결로 나아갑니다.
즉 수수께끼 비밀은 어떻게 이렇게 선악의 법칙에 의하면 또는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데
이 부정한 것을 어떻게 의로 거룩으로 만들어내느냐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가짜이다는 셈이죠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땅에서 온 것인지 에 대한 질문에
대답 안해주겠다고
비밀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닫아 버립니다. 열쇠를 잠궈 버려요
잠굴수 있는 기능이 없다면 그것도 가짜 열쇠죠 열기만 하는 것은 가짜다 말이죠
열고 닫고를 다 할수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심판과 곧 죽음이지요 제대로 된 거룩을 입히는 다시 살리는 이 의가 아니면
아무리 인간 쪽에서 거룩하다고 지켰다고 가져와도 순 엉터리입니다.
그러니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 일부러 안식의 주인으로써 손 마른자를 고치신다 말이죠
왜 그렇게 하실까요?
열고 닫고의 기능은 너희들에게 없다 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심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끝까지 이 밝히 보여주심 앞에서 사기를 치고 인간의 꾀로 밀어 붙입니다.
다윗의 자손을 믿겠다고 말이죠
내 말이 그러니까 그 다윗의 자손이 나 이다 라고
이것을 거꾸로 말씀하십니다. 비밀로 말씀하셔요
어떻게?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의해
졸지에 열쇠로 열리지 않고 닫혀 버립니다.
바리새인 곧 유대인들은 제사장 나라로써 열고 닫고 하는 기능이 있어야 하는 공무원인데
도리어 본인들이 닫혀 버렸다 말이죠 자기 꾀에 말이죠
땅에서 이 수수께끼 비밀도 못 푸니까
지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삥이나 뜯는 겁니다.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죠
물론 자기 최면이라는 종교로써 자기 스스로도 최면을 걸어야 그 일을 끝까지 수행하지
아무나 못 합니다.
그러니 모든 관심사와 그 사상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항상 돈으로 도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돈 울리는 꽹과리이다 말이죠
이에 상대적인 한 세트가 되는 주님의 의는
아예 가차없이 죽여버립니다.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자 이렇게 하니까
거봐 거봐 너의 하나님이 너를 버렸구나 라고
더더욱 놀려 먹습니다.
그때 다시 살려 내버리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그들은 이 올무에 이 십자가의 지헤에 다 걸려 넘어져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잡혀 버린 사건 현장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게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진리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산 적도 없었고 죽은 좀비처럼 움직였을 뿐 생명이 없었음이
이 십자가의 표적으로 인해 들통납니다.
이 십자가의 표적이 옳았다 라고 외칠 자가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주의 오른 손 곧 의의 손이 아니면 이 어두운 두 눈의 소경 됨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아무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다 끌어 모아 보세요
이 비밀이 풀리나?
그래서 이 의로 인해 들통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의란 바로 칼이라는 무기 곧 울리는 꽹과리를 쟁기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살인이라는 무기 죽음이라는 무기 사망이라는 무기를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공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기 라는 칼을 글쎄 땅 파는 쟁기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자 이럴 때 얼마나 우싸 스러울까요?
칼이 인간의 최고의 무기인데 곧 죽음이 인간의 최고의 무기인데
무기를 쥔 이유는 본인이 죽음이 두렵기 때문 아닙니까
그 무기가 소용없도록 죽어도 다시 살아 났뿌면
더 이상 칼이라는 기능은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칼로 아무리 찔러 죽여도 안 죽고 다시 살더라 말이죠
안 죽는게 아니라 죽기는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뿌더라 말이죠
그리고 다시 사는 의의 최대의 무기는 바로
안죽는게 아니라 죽기는 죽었는데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남으로써
이 간극이라는 꼬끼오 꼬기오 꼬끼오가 최대의 무기가 되는 겁니다.
두 간극의 꼭지점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두 꼭지점을 선으로 그으면
이 변이 이 면이 이 간극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게 뭐라꼬 사람들이 두려워 하겠냐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죠
다들 무시해요 그 꼬기오 꼬끼오 꼬끼오를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고 싫어버린바 되어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아니 울리는 꽹과리를 부자청년처럼 전재산같이 손에 꽉 쥐고 있는 자들이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그 나약하기 짝이 없는 흠모할 모양이 없는 사랑을 쳐다보겠냐 말이죠?
보라 보라 보라 아무리 캐도
안볼란다 안볼란다 안볼란다 라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아니 글쎄 이 울리는 꽹과리인 죽음 을 이기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글쎄 죽음을 이겨요
우리는 그 죽음을 겁내지만 사랑은 어린양은 주님의 의는 무시하고요
죽음은 이 사랑에게만 지도록 되어 있는
참 희한한 삼각관계 입니다.
우리가 무서워 하는 죽음을
우리가 무시하고 시시하게 시답게 여기는 사랑이 이겨요 글쎄
그런데 아무도 이 사랑을 쳐다보는 자 없어요
보라 들어라
안 볼란다 최경환
안 들을란다 최경환
백날 들으라 이스라엘 이라고 노래 불러보세요
그 노래 부른다는 자체가 안들을란다 라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인정할건 인정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거룩을 무시하도록 되어 있어요
왜 나의 의만을 쌓고 있기에 그거 안 깨어지는 이상 무시합니다.
바리새인이 얼마나 예수님을 무시했습니까? 우리도 똑같아요
나도 믿음 있다고 우기니까 나도 행한 것 있다고 우기니까 말이죠
그 가짜 의가 가득 차 있는 내가 우상이고
울리는 꽹과리이기에
사랑은 곧 의는 이 울리는 꽹과리인 나를 아작 내시고야 마시는 겁니다.
그랴서 이스라엘 전체를 바벨론 포로 되게 사자 입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의가 떳기에 말이죠
이게 의 곧 거룩인데 이게 도대체 뭐길래 두려운 무기이냐
바로 칼이라는 인간의 살인을 무효화 시키는
울리는 꽹과리를 무효화 시키는 사랑이 바로 최대의 무기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랑 때문에 이 간극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어떻게?
바로 광야 속에 놓여지고
죽음 속에 놓여지고
사막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광야 속에서만 꽃길을
이 사막 속에서만 샘물을
죽음 속에서만 생명을 보시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평탄케 한다는 평화 라는 의미입니다.
의의 왕 만이 평화를 가지고 오지
인간의 의는 백날해도 오히려 평화가 되는게 아니라 평탄케 되는게 아니라
더더욱 첩경이 더 심해지는 겁니다.
개혁주의자들 성화론자 놈들이 꼭 이래요
바리새인 보다 더 해요
십의 일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를 했다는 것을 구별짖기를 할려면
반드시 자기 보다 못한 사람과 대조를 합니다.
그래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한다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이것을 노골적으로 하면 들키니까
안 들키도록 조장해요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강도의 소굴인 셈입니다.
아무도 의를 바라는 기도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기능을 무시하더라 말이죠
명당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무리 예루살렘에 살아도 의를 안 쳐다보고
전신에 새 따까리로 산당을 지어서 도배를 하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를 어떻게 하면 더 크게 더 많이 짖겠다는 심뽀 밖에 없더라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맨날 그런 대형교회 비판하는 작은 교회 또한 그렇게 못 되어서 반발하지
막상 마음에는 애굽으로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이라는 약속이라는 의의 명당을 줘도
정작 땅의 애굽이라는 명당을 따로 꼬불쳐서 마음에 두고 있더라 말이죠
그러니 명당을 줘 봤자 인간은 자신의 탐욕 곧 우상숭배로 도배하기 마련이다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선한게 아니라 더더욱 부자보다 더 악하다 말이죠
둘 다 의를 안 쳐다 보기는 마찬가지인 강도의 소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사야처럼 아무도 발가벗고 3년 동안 못 돌아다닌다 말이죠
엘리야처럼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자가 없더라 말이죠
즉 그래서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을 불도져로 밀어 평평케 합니다.
다시 새로운 광야 곧 바벨론 포로 라는 마귀 입 속에 집어넣는다 말이죠
그래놓고 이제야 너거들 구원 받았다고 박수치며 노래합니다.
때려죽어도 시온의 노래를 안 부르던 시온의 사람 시온의 딸이
바벨론 포로 속에서 어이 시온의 노래 한번 불러 보렴이라는 말에
그제서야 시온의 노래를 부르는 찬양자가 되는 겁니다.
의가 덮쳐졌다는 거죠
이렇게 평평케 하시는 화목 평화 평판케 하시는 주님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들이 주주장창 외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순엉터리 해석이다 말이죠
그래놓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고 교인들을 다구쳐요
본인들은 더 없으면서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은 핑계고 돈 내라는 거죠 돈
본인들이 믿음 없는 것을 교인을 족쳐서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성도 여러분 반대로 그 목사를 족치세요
그래야 명땡교회 김땡환 목사와 그 일당들처럼 안 됩니다.
우리라고 해서 그 모습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말이죠
안그러면 다 자살하도록 되어 있어요 ㅋㅋㅋ
첩경을 뻔히 보고도 평탄케 하지 않는다면 그거 가짜 성도입니다.
자 !!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쟁기로 만들고
창을 부서뜨려서 낫으로 만든다는 것은
오늘 본문처럼 쟁기로 만들어 농사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낫으로 만들어 밭갈아라는 말이 아니라
평평케 한다는 겁니다.
첩경을 말이죠
높은산 깍아 버려서 평지 만들고
움푹파인 웅덩이를 매꾸어 버림으로써
평평하게 만든다는 것은
중간치의 중산층 중간 계층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모조리 다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만들어 모조리 다 심판 속에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에 다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광야 속에
사망 속에 말이죠
그리고 의의 손을 구하라 라는 겁니다.
비로소 본인 자체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서
저 강도의 소굴처럼 굴었던 첫째는 영의정 둘째는 좌의정 자리 달라고 할게 아니라
주여 백부당 만부당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였군요 뭘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
바로 의의 손 구원의 손을 외치는 찬양자이다는 겁니다.
결국 선지자 의 기능은 곧 평평케 한다는 것은
잘난놈 못난놈 다 주의 진노 속에 집어넣음오써
되도 않는 666이라는 모잘라는 저울
엉터리로 재고 있는 그 엉터리 저울인
선악을 없애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거 못 없애는 의는 가짜 의요
이 선악을 없애는 의 야 말로
칼을 쥘 생각 조차도
창을 들을 생각 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의의 나라
사막에 샘이 넘치고 광야에 꽃이 피어 향내 나고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넣는다고 해서 창을 들고 독사를 죽일 필요가 없이
물지를 않으니까 안 죽으니까
우리가 본적도 사고해 본적도 없는 그런 세계가 바로 의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의의 족보의 세계
부활의 세계
어딜 거기에 맏형수와 일곱 번째 막내가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남녀 개념이 그 세계가 있겠냐 말이죠
그거 있으면 사두개인처럼 또 더러워서
즉 선악을 또 따져야 돼
그개 무슨 의의 세계 입니까
아 그런데 강도의 소굴인 교회가 그런 선악을 더 따지고
정작 말해야 될 의는 단 하나도 못 외쳐요
기껏 나 십일조 지켰다 주일성수했다 말씀 지켰다를 가지고 와서 서로 경쟁해요
그러니 강도의 소굴 맞지요
말씀을 많이 지킨 나는 선 곧 천국 갈 가능성 커지고
말씀을 적게 지킨 너는 악 곧 천국 갈 확률이 자꾸 떨어지는
이라는 그 굴곡을 없애기는커녕 더더욱 키우더라 말이죠
그래서 선지자 보내면
어디서 굴러 들어온 뼉따귀가 안방 차지 할려고 박힌돌 빼낼려고 하느냐 라고 쫏아내더라 말이죠
제발 쫏겨나세요 실상은 그들이 이미 쫏겨났기에 그런 모습을 갖출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척박한 땅에 살면 활과 화살을 손에 쥐어야만 살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거다 말이죠
이런 우리의 속성을 매일 매일 깨뜨리는 주님의 의가 덮쳐지지 않으면
강도의 소굴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의는 거룩은
울리는 꽹과리를 부러뜨려서 다리미로 만든다는 겁니다.
이것을 공의 라고 공적인 자유라는 진리 라고 한다 말이죠
아니 오늘날 교회들이 참 신기해요
칼과 창을 못 부러뜨리는 의는 왜 그리 많이 쌓는지
결국 그 가짜 의 자체가 칼이요 창이였던 거죠
그렇다고 민주화운동하는 해방신학의 구원신학의 운동들은
과연 칼과 창을 부르뜨리는 의를 추구하느냐
정의사제구현단들처럼 촛불운동처럼 의를 추구하느냐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도리어 독재가 되는 겁니다.
다윗 보세요 1급 살인자 되잖아요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무슨 수로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냄을 당하냐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주님이 이 공적인 자유인 영역 곧 첩경을 평탄케 하시는 의를 펼치지 않으시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율법 외에 한 의가 오지 않는 이상
우리 또한 율법이라는 전남편처럼 이혼도 안해주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는 강도 짖만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첩경을 더더욱 울퉁불퉁 세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셔서 부셔 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 겁니다.
그 부르짖음을 지금 이사야가 함으로써
이미 의가 떳기에
이제 칼이 부서지는 과정
창이 낫으로 부러지는 과정을 우리는 이제 목격하는 목격자가 되는 겁니다.
이 의의 주가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그 통치 다스림을 내용들이 바로
광야 속에 집어넣고 꽃길을 내는 이 과정을 목격하는 목격자 찬양자 증인자로 삼는 겁니다
이것이 의의 통치하시는 모습입니다.
(사 32:15,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다시 우리에게 영을 보내 주시면,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다.』
(사 32:16, 새번역) 『그 때에는, 광야에 공평이 자리잡고, 기름진 땅에 의가 머물 것이다.』
(사 32:17, 새번역)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사 32:18, 새번역)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사 32:19, 새번역)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사 32:20, 새번역)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성령의 부어주심이란
결국 따로 국밥처럼 따로 개별적으로 광야의 땅 따로 있고 아름다운 땅을 새로 만드는게 아니라
그 광야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그 울퉁불퉁한 그 첩경 속에서 평평케 모든 성읍을 가루로 만드는 뜨인돌 시온에서 나오는 돌로 인해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시온에서 나옴으로써
모조리 다 뿌셔 가루로 만들어 버려서
다 죽여 놓고
다시 살리는 말씀 곧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시는 겁니다.
이 평화를 우리는 우리 신체에 매일 매일 새겨짐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의의 왕이 떳다는 이유로
그의 통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써
그 증상물로 이 세상에 내 던져진 겁니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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