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사 5: 1-12)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사 5:1, 개역)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 5:2, 개역)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사 5:3, 개역)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사 5:4, 개역)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사 5:5, 개역)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사 5:6, 개역)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사 5:7, 개역)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8, 개역)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사 5: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사 5:10, 개역)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사 5:11, 개역)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사 5:12, 개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사 5:1, 새번역)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사 5:2, 새번역)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사 5:3, 새번역)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사 5:4, 새번역)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사 5:5, 새번역)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사 5:6, 새번역)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사 5:7, 새번역)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사 5:8, 새번역)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사 5:9,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나의 귀에다 말씀하셨다. "많은 집들이 반드시 황폐해지고, 아무리 크고 좋은 집들이라도 텅 빈 흉가가 되어서, 사람 하나 거기에 살지 않을 것이다.』
(사 5:10, 새번역) 『또한 열흘 갈이 포도원이 포도주 ㉠한 바트밖에 내지 못하며, ㉡한 호멜의 씨가 겨우 ㉢한 에바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 ㉠약 6갈론(약 22리터) ㉡약 12말 ㉢약 1말 2되』
(사 5:11, 새번역) 『아침에 일찍 일어나 독한 술을 찾는 사람과, 밤이 늦도록 포도주에 얼이 빠져 있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사 5:12, 새번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거문고와 소구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일도 거들떠보지를 않는다.』
(마 21:33, 공동)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 ㉠이사 5:1-2.』
(막 12:1, 공동)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하나 만들어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그것을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 ㉠이사 5:1-2.』
(눅 20:9, 공동) 『그 때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 ㉠이사 5:1-2.』
(약 5:4, 공동)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 ㉠칠십인역 이사 5:9; 레위 19:13; 신명 24:14-15; 말라 3:5.』
(마 23:1, 개역)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개역)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개역)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 23:5, 개역)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마 23:6, 개역)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마 23:7, 개역)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8, 개역)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개역)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개역)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마 23:11, 개역)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 23:12, 개역)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4, 개역) 『(없음)』
(마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개역)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마 23:18, 개역)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19, 개역)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 23:20, 개역)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마 23:21, 개역)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마 23:22, 개역)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 23:2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6, 개역)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먼저
(사 5:1, 새번역)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사 5:2, 새번역)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주님 쪽에서 노래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면 노래가 나올까요?
자유의 증상 아닙니까?
그 정도로 주님은 사랑하시기로 작정이 되어 있으신 겁니다.
즉 주님 쪽에서 이미 벌써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다 내어주실 정도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즉 저런 주님의 마음을 심었는데
정작 열리기는 들포도 라고
엉뚱한 열매를 맺었다고
포도 농사를 망쳤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아엎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 5:1, 개역)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 5:2, 개역)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 5장 1절 2절을 보시면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랬다는 거죠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해 포도원을 노래 한다고
즉 출애굽은 바로 결혼 혼인잔치인 겁니다.
일방적으로 쳐들어 와서 빼내셔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신거다 말이죠
그리고 기름진 산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이지
쌍방의 계약이 아닙니다.
그래서 돌을 제거하고
즉 가나안 족속들이지요
그리고 극상품인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사랑을 담은 이스라엘을 심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가장 미약했던 민족이였고 가장 소수였던 자들을
가장 강한 민족과 붙이심으로써 그 심판 당하는 애굽
불타는 애굽에서 빼내주신
사랑의 열매로써 이스라엘을 기름진 땅에 특상품으로써 심었다고 합니다.
어 그런데 이 특상품 포도나무가
좋은 특상품 열매는 맺는게 아니라
들포도 즉 애굽과 다를바 없고
가나안 민족과 다를바 없는
약속이 무색해 지는
주님의 특급사랑이 무색해 지는
일반적인 포도
특이성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구지 기름진 땅이 필요가 없어도
약속의 땅이 필요가 없이도
들에 허벌나게 열매를 맺는 들포도를 내고 있으니
왜 특급상품과 기름진 땅이 무슨 놈의 소용이 있겠냐는 둥
들포도 열매를 맺어버리면
이건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그 원인을 찾아서 주님 쪽에서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거죠
자 방금 출애굽이라는 이스라엘 역사를 언급했지만
지금 이사야 아닙니까
즉 소위 이스라엘 열왕기 상하를 거치는 입장에서 볼 때
결국 아무리 이스라엘에게 역사 곧 시공간이 저렇게 똑같이 반복해 본들
특급열매 좋은열매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백날 반복해 본들 역시나 들포도로 나올까요 안나올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역사라는 시공간을 반복해 본들
같은 현상으로써의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점에서
지금 그 문제를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분명 약속의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약속과 전혀 무관한 민족들만 나오더라는 거죠
지금 현대 2000년대의 현재 이스라엘을 보세요
약속의 민족 맞나요?
본인들은 선민이라고 역사를 우려 먹어요
그런데 전혀 십자가 정신 곧 성경 전체의 내용인 사랑과 무관한 이스라엘이더라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진짜 의로움, 곧 정의는 이것을 심판을 해야할까요? 냅뚸 버려야 할까요?
당연히 심판해야지요
자 그래서 역사에 이런 의문의 반복인 역사에 묵시가
곧 종말이 쳐들어 와서
역사가 해결못하는 즉
약속을 심었는데 엉뚱한 것이 열매맺는 이 문제를 해결 못하는 이 역사를 심판하고
밭을 갈아엎어버리고
무조건 약속의 열매로 맺어버리도록
묵시가 종말이 등장
아에 종말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불타서 사라져야만 하는 입장이 되는 거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다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의란
바로 이런 사망의 권세를 멸하는 겁니다.
오랜만에 외우는 것 없이 지내다가 한번 외워봤는데 맞네요
어차피 잊어버리겠지만 뭐 큰 기대하지 말고 외워봅니다.
이사야 이오팔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계 21:4, 공동)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이사 25:8.』
이것이 의입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자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했는데
오해하기를 열심히 땀 흘려 농사 지으면 열매를 얻는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생존법칙입니다. 선악이다 말이죠
(시 126: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시 126:2, 개역)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3, 개역) 『여호와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시 126:4, 개역)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시 126:5, 개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6, 개역)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1, 새번역) 『㉠주님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 ㉠또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회복시키셨을 때에'』
(시 126:2, 새번역)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나라 백성들도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
(시 126:3, 새번역)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시 126:4, 새번역)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 보내 주십시오. / ㉡네겝 시내는 늘 말라 있다』
(시 126:5, 새번역)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시 126:6, 새번역)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여기서 눈물은 단순히 땀흘려 노력하는 부지런한 농부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게 아니라
심판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선지자가 등장해서 개입하는 이유입니다.
곧 선지자는 주님의 의를 위해서
사망권세를 멸하시는 주님의 의를 외치고자
우리를 심판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다시 되찾는 겁니다.
그 사이에 뭐가 벌어질까요?
네 맞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멸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영광인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거죠
본인들이 애굽이니까 말이죠 오늘 본문에 등쳐먹는 자들이다고 나오잖아요
그리고 이방인 헬라사람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합니다.
즉 애굽왕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따르겠냐?
그럼 그들은 뭘 따를까요? 네 맞습니다. 모든 종교의 신들인 우상을 따르지요
곧 자기를 위한 신
이 탐심이 우상인 겁니다.
자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이 아니라 거리끼는 걸림돌인 이유가
애굽에서의 탈출해서 구원인데
본인들이 애굽이니까
애굽에서 탈출이 없이 구원을 외치게 되니
졸지에 십자가가 까시처럼 목에 걸리는 겁니다.
도리어 본인들이 애굽으로써 이 십자가를 따라는 자들을 핍박하는
졸지에 애굽인들을 판박이처럼 따라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가 발가벗고 삼년동안 돌아다녔잖아요
그러니 유대인이 곧 사단의 회 였다는 거죠
그런데 본인들은 아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곧 선택받은 구원받는 약속의 자녀이다 라고 하면서도 정작 애굽인들의 모습만 나타내는데 있어서
어쩌면 이 십자가로 인해 다 들통나버리니까
이 십자가에 부르르 이를 갈더라 말이죠
지금 현대도 그래요
한국 교회가 다 이래요
애굽하고
앗수르 하고
큰 성 바벨론
곧 육육육과 너무 너무 닮아 있어요
본인들만 몰라도 남들은 다 아는데
여기서 벗어날 자신이 있나요?
매매가 중단되면 단절 되면 이미 죽은 모습인데?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사망의 권세에서 무슨 수로 벗어나냐 말이죠
그래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이유 없이 무조건 나는 무조건 심판 받아야 할
뭘 해도 죄인 밖에 안된다는 것을
제대로 된 심판의 주를 만났기 때문에 나오는 회개입니다.
안그러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세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듯이 현재 이스라엘처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보세요
끝까지 구원받은 백성 선민이라고 우기잖아요
그것이 도리어 올무가 된 거죠
차라리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또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끝까지 나는 믿는자 이다를 우기게 되니
심판의 주를 보여줘야할 기능은 없고
존재만 가득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그것을 내세우게 되니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리를 핍박해요 글쎄
오늘 본문에 사랑이 안 나오고
등쳐먹는 그래서 부르짖음이 들려온다는 겁니다.
마치 강퍅케 하니까 애굽왕 때문에
부르짖듯이
이제는 유대인 곧 이스라엘 곧 마태복음을 올렸는데 종말 때 에 해당되는 마태복음 23장에
반드시 벌어지도록 그것도 무한반복으로 동결된 십자가가 몰고온 의의 사건 정의의 사건
종말 사건으로써
아니 글쎄 유대인이 애굽인들처럼 핍박자가 되어 있더라 라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다니는 자들이 말이죠
그러니까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교회 속의 교회라고 했다 말이죠
진짜 교회는 교회로부터 핍박받는 교회이다 라고
반드시 가짜 교회인 사단의 회 또는 발람의 꾀 또는 니골라당 등등등
반드시 이들과의 대조로써 한 세트를 구성하는 일곱교회이지
그냥 딸랑 따로 국밥처럼 독자적인 일곱교회는 없다 말이죠
반드시 그 차이성으로써의 교회인 교회 속의 교회이다는 겁니다.
가짜와 진짜의 대조로써 대립각을 세우면서 말이죠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말이죠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겁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말이죠
자 그러니 눈물이라는 심판 속에 놓여지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펼치시는
의의 길 평화의 길을 여시는 평화의 왕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이루신다 말이죠
그런 눈물의 의미에서 볼 때 회개란 시간적인 후회와 반성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미래적입니다. 미래완료를 보고
그 미래완료 앞에서 무조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의사이신 구원자 예수님을 말하도록 되어 있듯이
눈물 흘리는 자로써
심판 받는 자로써
예수님의 의 곧 거룩 곧 정의인
사망권세를 멸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의를 외치라고
심판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뭘 잘못해서 심판 속에 들어가는 시간의 순서가 아닌
그 반대가 회개이다는 거죠
상한심령이 되는 거다 말이죠
종교꾼들은 회개의 달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회개 아니다는 거죠
회개 지키기죠
종교꾼들은 뭘 해도 다 지키는 쪽입니다. 행함 곧 노동입니다.
댓가를 바라는 겁니다.
구지 주님의 십자가가 없어도
장대 높이 달린 인자의 들림이 없어도
그들은 눈물 꾼들입니다.
미래완료가 없어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가 없어도 말이죠
대제사장이 참람하다고 옷을 찢잖아요
너가 하나님 아들이냐? 내가 그로다
그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회개케 하겠다고 옷을 찢어요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짖겠다 라는 주님의 거룩 선포를 듣고
비로소 애굽인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법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하는 대리자로 나서는 겁니다.
오늘 본문 보세요 딱 이 상황과 같잖아요
(사 5:7, 개역)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것이 문서선지자로써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 역사 속에서는 이 상황이 무한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벗어날 인간이 없다는 거죠 이게 역사이다는 겁니다.
자 그러니 차라리 묵시 속에 들어가게 되면
바로 눈물 흘리는 거죠
우는 자가 복 된다는
종말 속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끝을 땡겨와서 보는 시선인 거죠
모든 역사의 끝을 땡겨올 때
답은 심판의 주 밖에 없다는
이 심판의 주가 아니면
의를 볼수가 없고
이 의로 인한 사망권세가 멸하는 것을 못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통해서 볼수 있는 기회인데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수 없는
그저 역사 속에서의 존재로만 남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 역사가 찢어져 부도난 수표인데도 말이죠
역사 속에서 아무리 선민 구원받은자 되면 뭐해요? 묵시에서 보면 애굽인 인데!!!
약속의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묵시 속에서 곧 종말 속에서
끝을 당겨와서 주님의 의를 보고 외치는 자라면
아무리 역사 속에서 실패하고 거지나사처럼 개무시 당해도
주님의 의만 옳았다 라고 율법 외에 한 의를 외칠꺼다는 겁니다.
율법 지키기 라는 동일시가 우상이요
그런 우상숭배자들로부터 핍박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심판 받는 눈물 흘리는 자가 아무리 되어도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126편에서
(시 126: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꿈꾸는 것 같았도다 라고 하잖아요
얼마나 행복하면 허걱 말이 안나와요
기쁨에 감격해서
이것이 아름다움 곧 심판 속에 집어넣었는데 다시 살더라 라는
이 의를 아름다움이라고 했잖아요
독립운동 마치 가룟유다처럼 독립운동 하지도 않았어요
땅 자체가 걸쳐져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려고 하는 탐심 곧 우상숭배가 벌어지겠지만
왜? 말씀을 지켜서 동일시 해야하기에
아예 땅은 빼앗겼고 아예 바벨론으로 아예 포로되어서 아예 이동 자체를 해 버리게 되니까
독립운동 한 적도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행복하냐 말이죠
아니면 독립운동했기에 보탬이 된 구원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거 구원 압니다.
노동의 댓가 행함의 보상이다 말이죠 일하는 자에게는 삯으로 여긴다 말이죠
그러나 은혜는 빚입니다. 못 갚는다는 겁니다.
아예 갚을 생각 조차 하 덜덜 말아라 말이죠
박땡선 목사 말 마따나 쪽팔려서라도 갚아야 한다고 우기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요
왜냐하면 또 빚지도록 되어 있거든요
몇 번? 7에 70번
평생
영원히
빚지도록 노력하자가 아닙니다. 이건 또 일한 댓가로써의 삯이다 말이죠. 은혜가 아닙니다.
행함이 됩니다.
우리는 늘 일만 달란트 빚지기 바빠요
공기세금 햇빛세금 내신적 있습니까? 거봐요 빚지고 있고 앞으로도 빚져야만 하잖아요
이것 뿐이겠습니까?
은혜 땜에 은혜 덕분에 이런 죄도 용서받았는 줄 그 동안 몰랐구나 라고 기뻐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행함 땜에 아니라 일함 때문에 가 아니라
전혀 몰랐던 죄악을 용서 받았다는 것을 은혜가 알려주지
행함은 절대로 안 알려줘요
행함은 나의 존재의 가치성을 높여주는 헛배 허구 우상만 심어요
그러니 십자가의 도가 뭡니까?
사망의 권세 곧 죽음을 멸하는 의, 정의,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심판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 사이에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롬 4장에 의로 여긴다는 것은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복의 사람으로 주님의 의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행복한 자가 된 다윗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복의 근원이 된 이유도
주님의 의로움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거죠
곧 복이란
불법을 행하고서도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겁니다.
수치를 제거 당하는 겁니다.
허물치 더 이상 허물치 않겠다고 주님께서 모든 허물을 덮은 것을 말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자 그러나 종교꾼들은 이 십자가 마저도 자신의 존재와 결부시켜서 동일시 합니다.
즉 우상화 한다는 거죠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물의 달인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왜? 그 댓가 그 삯인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는 말씀이 있기에 지킨다는 거죠
그럼 이건 일한 댓가의 삯이지
은혜가 아니잖아요
빚이 아니잖아요
눈물꾼들은 그래야 장사를 하거든요 은혜로 안 봅니다 아니 못 봅니다.
삯으로 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강도만난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즉 7에 70번 용서 받는 빚이 아니라
그들은 남을 7번 용서 해야만 하는
막살면 안되는 제대로 살아야만 하는 일한 것의 삯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이건 행복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더 많이 질려고 스스로 동일시 하다가 나중에는 정반대로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밑의 사람의 부려먹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 23:1, 개역)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마 23:2,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3, 개역)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 23:4, 개역)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래서 번제와 제사 결국 카스트 제도처럼 성화론처럼
계급을 따져서 곧 등급을 매겨서 갑질 할 수밖에 없는
행함의 서열이 되어버리는 거죠
높은자일수록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우리가 앞의 글
이사야에서 왕의 존재를 통해서 봤습니다.
다윗도 이스라엘 왕으로 안된다는 것이 들통나 버렸습니다.
그런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도
그 불법을 사함을 받는다면
이것 보다 땡 잡은 행복한 자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우와 대박 진짜 복 받은 사람이네 라고 다들 부러워 죽을꺼다 말이죠
그런데 바로 앞의 다윗의 모습은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자꾸 은혜를 안 쳐다보고
주님의 의를 안 쳐다보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보고
자꾸 남을 7번 용서하듯이 일을 할려고 하니 삯만 따지더라 말이죠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했는데
복을 스스로 차 버리더라 말이죠
이런 다윗에게 쓰리 3 희생 번트가 투입이 됩니다.
밧세바, 우리야, 장군 꺽으신 뼈
다윗에게 덮쳐진 마귀를 제거하시고자
주님은 3명의 죽음을 이미 벌써 창세전에 기록
결정
고정시켜 버렸습니다.
아무리 먹보다도 검은 죄
주홍빛 같이 붉은 죄도
흰 눈 같이 희게 되는
눈 녹듯이 녹여버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초라한 모습으로써 싫어버린바 되신
이 의
이 율법 외에 한 의가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더라 말이죠
다윗 개인에게 우와 복 받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이사야서는 대상이 유다지파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이스라엘 전체 12지파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복 받았다는 겁니다.
개인 구원 없어요
유다 라는 남은 그루터기로
그 불가능한 나머지 11지파 예수님 당시에는 다 사라졌다 말이죠
그 사라진 죽은자도 다시 살려내서 12지파의 구원인
이 약속을 반드시 다 이루십니다.
무엇으로?
십자가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3일의 간극으로 말이죠
그 어떤 방해에도 끄떡없이 미쁘시게 든든하게 넉넉히 다 이루셔서
이미 벌써 완성된채로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지적하시고 매를 대시고 나무래시고 하신다는 자체가
이미 완성된 채로 벌어지는
의의 완성의 증상으로써 나타나기에
제가 제목을 저렇게 적었지만
정작 내용은 오늘 정반대로 적었는데
저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나무래시는 자체가
이미 완성된 채로 벌어지는 증상이기에
우리는 저 화있을
복받는 자와 정반대죠
행복한 자와 정반대인
화 있을 자인 바리새인과
예루살렘 곧 선지자를 죽이는 예루살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지적을 당하는지
여러분이 이제 아시게 될 것입니다.
네 바로 그겁니다.
다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는데
정작 딱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의 포도가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죠
무엇이 빠졌습니까?
의가 빠졌습니다.
이 의가 빠졌다는 것을 지적 하신다는 것은
곧 주님이 이 의를 이루시겠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실까요?
네 맞습니다.
심판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살려내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99마리 양이 아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의를 펼치심으로써
우리를 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그 의로만 구별 구분 차별이 되지
인간의 의는 행함이기에 삯을 바라지
은혜로 빚으로 여기지 않는
더더욱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게 되는
조상과 같은 짖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조상도 똑같은 소리를 했거든요
주님의 의를 쳐다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여부에서
그런 행동 안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한다는 자체가
여전히 은혜를 안 쳐다보겠다는
늘 습관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똑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지
반드시 율법을 지키겠다는 다짐 일 뿐이지(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호라 오히려 나는 사망의 몸에 갇혔구나 라고 했다 말이죠 롬 7장)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죽은자를 살리는 그 의를 쳐다보는 겁니다.
율법이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를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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