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8-61 이름 없는 유일한 구원자와 그 이름 없는 자의 증인, 목격자 소경 (사 43,10-13)
(출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사 43:10,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며,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이렇게 한 것은, 너희가 나를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고, 오직 나만이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지음을 받은 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이후에도 있을 수 없다.』
(사 43:11, 새번역) 『나 곧 내가 주이니, 나 말고는 어떤 구원자도 없다.』
(사 43:12, 새번역) 『바로 내가 승리를 예고하였고, 너희를 구원하였고, 구원을 선언하였다. 이방의 어떤 신도 이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 일에 있어서는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사 43:13, 새번역) 『"태초부터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빠져 나갈 자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돌이킬 수 있겠느냐?"』
(사 43:8, 개역)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 43:9, 개역)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사 43:1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 43:11, 개역)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2, 개역)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3:13, 개역)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주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면
구지 없는 신을 들먹이면서
나만 신이다 라고 외칠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신이 없다면서요
아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나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 라고
자꾸 자꾸 이야기 하신다는 자체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 말은 단 한번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오해를 받아가시면서까지
참으로 모욕적이지요 주님이 이런 수욕을 당하면서 까지
자꾸 강조하시는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모욕과 수욕의 차이는
모욕은 우리가 아는 그런 내용이고
수욕은 짐승 수 獸慾 욕심 욕를 한자로 쓰던데 짐승 같은 욕심인 거죠
즉 하나님을 저 짐승같은 우상과 섞어버린 것을 미리 아신냥
첫계명으로 만드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말은 단한번도 인간은 율법을 지킨적이 없는
십계명 첫계명부터 안되더라 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다시 출발 하시는 겁니다.
과거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여호와 이심을 구원자 이심을 다른 신이 없음을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리바이벌이 없잖아요
애굽이 없어요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다시 애굽에 탁란이 되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출 탈출 해서
다시 어디로 입 해야 합니까?
애굽이 있어서 탈출 빠져나왔고
가나안 땅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리는 땅이 있어서 입장 들어가게 되었다 말이죠
그런데 이사야 43장은 도대체 어디를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일까요
더 큰 문제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꺼 아니겠습니까?
무작정 막살수 없거든요
마구 마구 빠져나올수가 없다 말이죠
과거는 장소와 시간 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다 말이죠
그것을 다시 리바이벌 하듯이
애굽은 이제는 바벨론 포로로 장소를 택한 것일까요?
그럼 다시 입국해야할 들어갈 장소는 어딜까요?
성경은 리바이벌 없어요
장소와 시간이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새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공간과 시간이라는 역사는 날라가 버리고
인물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이라는 인물 속에 들어가고자
상대적인 인물 짐승 속에 탁란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일을 벌리시겠다 라고
나 외에는 이런 새 일을 벌릴 자가 없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 라고
울법의 완성자로써 이미 떴기에
모든 인간은 이 구원자의 활동에 의해
기준, 중심으로 인해 배치 당하고 펼쳐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앞의 글 마태복음 13장의 그물 비유처럼 그물 중심으로 배치된다는 거죠
그물이 물고기를 잡아서 의인과 악인으로 갈라 놓듯이
포도주틀 기능을 하는 겁니다.
이런 천국 되신 예수님의 기준 되심 앞에
상대적인 짐승 같은 애굽의 기준
곧 우상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겠지요?
바리새인의 기준 말이죠 곧 우상의 기준 말이죠
바로 부자청년의 주장에 모든 것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이런 질문을 하는 아이가 없거든요
즉 이들 우상숭배자 곧 하나님과 우상을 섞은 겁니다.
단순히 우상 조각을 숭배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수준 낮은 성화론이 아니라 자칭 수준 높은 성화론을 펼치는 자들
오늘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준은 바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 라는
자기가 자기 의를 세워서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이들 우상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멋들어진 구원인 거죠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구원 표적 기적 행복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는
그야말로 모욕적인 처참하기 짝이 없는
아무것도 없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흠모할 모양도 없구요
아름다운 풍채도 없어요
그것으로 끝나면 참 좋은데
뭐라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싫어버린바 되어서
적극적으로 다들 고개를 휙 하고 돌려버린다는 겁니다.
참으로 모욕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 정도로 십자가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저주인 심판이요
수치요 치를 떨면서 경멸하는 모욕 수욕꺼리가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발가벗고 3년 동안 돌아다니셔야만 했나요
즉 의도적으로 바리새인에게 정죄 받는 일만 골라서 하셨는가요?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발가벗고 3년 동안 돌아다녔듯이 말이죠
이 부끄러움을 왜 의도적으로 표출 시킨 겁니까?
이사야서를 통해서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반사 거울을 비춰 보여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발가벗었다 라는 것을 말이죠
이 얼마나 치욕스럽습니까?
그럼 십자가는 뭡니까?
하나님의 저주는 예수님이 받은게 아니라
실상은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외치는 너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이다 라고
거울로써 반사 시켜서 비추어 주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 라고
이것이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라는 의미에서
출애굽이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우상 이라는 어떤 인물과 대비되는
싱대적인
누구 누구의 아들 인 인자 라는겁니다.
인자는 우리의 이런 죄악을 대신 다 담은 하나의 죄악을 담은 박스로써
거울을 비춰 주는 겁니다.
누가 장대 높이 달려야 하느냐 라는 겁니다.
너희가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인자가 대신 장대 높이 달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은 다 이룬채로 떴습니다
이제 그 증상물로써
이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자와
안 쳐다 보는 자로
그물로 인해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자는
의인이 아니라
자신이 불뱀에 물려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알기에
환자로써 의사를 찾는 자는 볼 것이고
내가 왜 죄인인데? 나 이대 나온 아니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야 왜 이래 라고
바리새인의 기준이 뭐라고 했지요?
바로 자기 의를 쌓아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그물망에
천국 같은 그물망에 걸려져서 지옥 불에 들어가는 자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어서 나를 심판해 달라고
어서 나를 잡아 달라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찾아 나서신 겁니다.
99마리 양 곧 잃어버림이 없는 99마리 양
말이 되는 양 냅따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직접 찾아 나서시는 그물 예수님 이라는 거죠
자 그렇기에 일부러 부정한 자만 골라서 찾으십니다.
의인 건강한 자에게는 다가가질 않습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은 반대였다는 거죠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 가고
또 강도 만난 자를 못 본채 그냥 지나가고
또 예수님이 선지자 이다면서 어떻게 더러운 창녀 마리아의
(눅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졸지에 예수님의 기준인 그물 곧 실족케 하는 기준 때문에
바리새인의 기준이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거리끼는 걸림돌에 말이죠
어떻게 저 더러운 여자가 당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냐 말이죠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이 여인의 죄를 사하냐 말이죠
이 참람죄
죄를 사할 자는 하나님 밖에 없는데 이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했는데
아예 대 놓고서 정면대결 하듯이 바리새인의 하나님에 시비는 걸더라 말이죠
날 빨리 잡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식으로 말이죠
(출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또 누구길래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하냐 말이죠
나 여호와 외에는 구원자가 없는데 말이죠
(출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사 43:11, 개역)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럼 이 향유를 부은 여인은 그럼 어떤 기준일 까요?
놀랍게도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장사를 치르는 겁니다.
이 얼마나 모욕적이였으면 바리새인도 이처럼 반발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다 반발 했고
특히 가룟유다가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요 12:4, 개역)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개역)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개역)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 12: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마 26:6, 개역)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7, 개역)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 26:8, 개역)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마 26:9, 개역)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10,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 26:11,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 26:12, 개역)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4, 개역)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 26:15, 개역)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6:16, 개역)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 가룟유다의 기준이 바로
의로움을 실천해서
이 나라를 어서 저 로마로부터 해방 되게끔 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 때문에
예수님은 쓸모 없다고 팔아 버린거다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앞의 마 13장 그물 비유 글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인간은 결국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기자신의 메시아 됨이
그물같은 천국에 의해서 들통나 버린 겁니다.
들통 났으니 들추어낸 예수님을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자 결국 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 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스스로 자기구원을 위해서 활동하는 구원자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 자신은 버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여기겠냐 말이죠
누가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앞당겨 치르는
화목제물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외치겠냐 말이죠
그래서 더러운 창녀 마리아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소경 만들어서 귀머거리 만들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입에 발에 뽀뽀하는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에게 희년을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희년 기쁜소식을
갇힌자 포로된자 억눌린자에게 구원자가 왔다 라는 소식에
헐래벌떡 향유를 부은 여인은 기뻐서 영접했는데
베드로 너는 내가 베드로 너의 집에 들어갔을때에 발 씻을 물을 주기라도 했냐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나 예수의 발을 씻었다
베드로 너는 내게 입맞추었냐?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 때부터 발에 입맞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베드로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를 붓지도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부었다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왜? 자신의 죄악을 씻어주기 위해서
모욕의 십자가를 지실 구원자임을 죄용서 하실 자임을 알기에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니까 말이죠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자 그래서 베드로의 기준을 깨뜨리기 위해서
이 여인 곧 비싼 향유를 부은 더러운 창녀 마리아의 기준으로 만들기 위해서
많이 탕감 받도록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토록 만드셔서 죄인의 자리에서
많이 탕감 받은 자로 만들었기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러운 인간
모욕적인 십자가의 구원을 베푸시는 겁니다.
멋들어진 구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같이 달려서 함께 죽는 그런 멋진 구원이 와장창 깨어지면서 말이죠
그래 되면 적게 사함 받았으니 적게 사랑하니
안되는 겁니다.
많이 사랑하게끔 만들려고 말이죠
그렇다고 또 내 쪽에서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일부러 지을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것도 울리는 꽹과리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많이 사랑할려는 마음이 결국 추호도 없는
여전히 멋들어진 구원을 노리는 우상숭배인 거죠
일부러 막사는게 아니라
노리고 있는 그 속임수에 십자가가 넘어갈 리가 있갰냐 말이죠
도리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 곧 부정의 부정인데?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 되도다 라고 했거든요
복 될려고 하지 마시고
실족 당함으로써
주여 누구십니까
제가 알던 예수님 맞나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왜 당신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외쳐야만 하는 증인이 삼았기에
많이 탕감 받도록 하시고자
모욕적인 구원을 베푸시는
멋들어진 구원을 와장창 깨뜨리시고
내가 나를 구원받도록 하고자
자기 의를 세우는 방식이 아닌
도리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부끄럽게 시리
염치 없게 시리
면목 없게 시리
화목제물로써
죄 사함을 펼치시는 증상물로써
이 여인이 나타남으로써
다들 모욕을 퍼붓는 겁니다.
그들 앞에 도리어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으로 저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복음이 증거 되는 곳 마다 이 여인을 기념하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의 손에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정죄 받은 여인이
도리어 기념이 되도록 하시고자
거울 비추듯이 비추어서 부끄 부끄 만드시는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나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 라는
우리 인간 속에 있는 가짜 메시아 곧 나의 구원을 위한 내가 우상이 된 그 우상의 기준
엉터리 기준을
모조리 실족케 하는 천국이야 말로
감사하고 고맙기 짝이 없는
이런 지적하시고 간섭하심만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로우심 만이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었도다 라는 언약의 완성
약속의 완성임을 우리는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이 기쁜소식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증거자로 삼으시는 구원자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입니다.
자 그럼 어디로부터 탈출해서
어디로 입국 하는 겁니까?
나 라는 우상으로부터
가짜 구원자 노릇하는 나를 내가 구원하는 나 라는 메시아로부터 탈출시키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
나 라는 인물 버리도록 하시고
저 인물 안에 들어가도록 하시는 것이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라는 주님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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