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참선지자를 투입 하시는 이유 (점치는 부녀자들을 쳐라) (겔 13,17-23) 

(겔 13:17, 개역)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겔 13:18, 개역)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겔 13:19, 개역)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겔 13:20,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새를 사냥하듯 영혼들을 사냥하는 그 방석을 내가 너희 팔에서 떼어버리고 너희가 새처럼 사냥한 그 영혼들을 놓으며』
(겔 13:21, 개역) 『또 너희 수건을 찢고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지고 다시는 너희 손에 사냥물이 되지 않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22, 개역)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은즉』
(겔 13:23, 개역) 『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 내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13:17, 현대어) 『[미신적인 행위의 종말] 너 사람아, 너는 이제 네 백성 가운데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내서 예언하는 여인들에게 내가 내리는 형벌을 선포하여라!』
(겔 13:18, 현대어)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여인들에게 화가 있어라! 너희는 사람들에게 팔목에는 여러 개의 끈을 꿰매어 달고 머리에는 키에 맞는 긴 너울을 씌워 놓음으로써 사람을 마치 짐승처럼 사냥하고 있다. 너희가 내 백성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하면서도 너희 목숨만은 온전할 줄 알았더냐?』
(겔 13:19, 현대어) 『너희는 몇 줌의 보리나 몇 개의 떡을 위하여서 내 이름을 더럽게 사용하였다. 거짓말에 잘 넘어가는 내 백성을 속여 너희는 휘황찬란한 미래를 약속해 주었다. 너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죽어서 마땅한 사람도 살려 두었다.』
(겔 13:20, 현대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너희의 팔목에서 그 요술을 부리는 끈을 모조리 끊어 내고, 사람의 목숨을 새처럼 잡아 놓는 그 요술의 너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너희가 사냥해 놓은 사람들을 내가 풀어 주고 너희가 잡아먹으려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겠다.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해방시키겠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너희에게 잡혀 죽게 하지 않겠다.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겔 13:21, 현대어) 『(20절과 같음)』
(겔 13:22, 현대어) 『의인들은 네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인데도 너희는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괴롭혔다. 그리고는 오히려 범죄자들을 위로하고 부추겨 그들이 악한 행실을 고쳐서 살길을 찾지도 못하게 하였다.』
(겔 13:23, 현대어) 『그러므로 너희는 더 이상 허무맹랑한 예언을 하거나 점을 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의 횡포에서 내 백성을 해방시키겠다.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현대어 번역에 소 제목이 재미있게 달렸네요

(겔 13:17, 현대어) 『[미신적인 행위의 종말] 너 사람아, 너는 이제 네 백성 가운데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내서 예언하는 여인들에게 내가 내리는 형벌을 선포하여라!』

어디 보자 또 다른 번역은 그럼 어떤지
어라 없군요 현대어만 그렇게 나옵니다

저는 좀 반대인데요
미신적인 행동으로만 아주 극히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점치는 여자로만 국한해 버렸다는 거죠

아닙니다
본문의 취지는 역사 전체로 확대 시키는 겁니다.
지난 주에 큰 성 바벨론 전체가 다 이렇다는 말은 (이사야 사칠팔)
역사를 대표로 하는 바벨론이기에 (마치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유대인을 대표로 하고유대인은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하기에)
모든 민족 모든 국가가 이런 식으로 경영하는
허사를 경영한다는 것을 염두하기에
인간 역사 모두가 바벨론을 지향하고
이 인간 자체가 바로 점치는 여자와 같다는 겁니다.

흔히들 여자는 직감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남자 곧 남편은 아무리 몰래 완벽하게 숨겨서 바람을 핀다고 하겠지만
여자는 그 순간 냄새 자체가 다르다 라는 것을 느낀다는 거죠

그런 직감이 뛰어난 여자에게서 더 직감이 한층 겹겹으로 쌓인
슈퍼직감이 바로 점치는 여자입니다.

점쟁이 중에 여자들이 많은 이유가 이러합니다. (소위 교회에서는 기도하는 권사로 유명세를 떨치거나기도원 들락 거리는 여전도사들 등등 말이죠)
남자는 웃끼게도 꼴에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소위 계산하는 계산기가 뇌 속에 있다 보니
점치는 방식도 논리로 따지는 식입니다.
여기에 무논리인 직감 보다 권력을 쥐는 식이겠지요

직감 보다 더 빠르고 효과를 발휘하는게 힘이거든요
여자는 여기서 조금 밀립니다 ㅋㅋㅋ
그러니 여권사 여전도사보다 장로 말 한마디면 찍 소리 못하는 거죠
다들 기도하는 권사 여전도사 될려고 안해요
장로 될려고 하지 장로부인인 권사 될려고 말이죠

교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권력집단일 뿐입니다
그러니 매일 매일 부수지 않으면 복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고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는 겁니다.

이건 뭐 성평등 시대에 여성을 너무 비하하고 혐오로 조장하는식처럼 보이는데 아닙니다.
그 정도로 머리가 없으면 여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 머리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이유 없이 무조건 꽉꽉 채울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남자는 더 하겠지요 그냥 파워 권력 이거 하나면 되니까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어린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에서
부모의 부재로 인해
아이 스스로가 자신을 삶을 이끌고 나가는데 있어서 거의 강패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니 동생이 있으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식이 되는 거죠
동물들 세계에서는 이것이 본능이라서 당연하지만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정신병으로 취급당하는 식이지요
막상 당사자 입장이 되면 누구나다 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여성을 비하하는게 아니라
저도 그 입장이 되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심지어 곧 늙어 죽는 노인네 조차도 그렇다 라는 겁니다.
아이 또 고령자를 비하하는 것처럼 느낄수 있는데 아닙니다.
장애인은 또 어떻고요 더더욱 결핍이 강하니까 더 심합니다
어허 또 장앤인 비하 까지? 아닙니다

저는 역사 전체를 비하하는 식입니다.
비하 수준이 아닙니다.
아예 불타야 하는 식입니다.

그 기준이 인자 라는 기준이 이미 떴기에 말이죠

자 그래서 이사야서 에서도 언급했고
앞의 에스겔서에서도 언급했듯이

반드시 두 소욕이 한 세트가 되는 식입니다.
거짓선지자가 언급이 되면
반드시 참선지자도 대립이 되어서 상대적으로 구성이 되고

탕자야 돌아오라 라고 하시면
상대적인 점치는 여자들처럼 이스라엘이 아닌 자를 반드시 언급하십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당연히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유대인에게
상대적인 개 같은 이방여자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 입니까
새로운 단어가 나옵니다.
즉 기존에 없던 용어를 쓰심으로써
기존의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스라엘 개념을
새이스라엘로 교체시켜
팔을 어긋맞게 하신다는 거죠

자 이렇게 되면 또 나 라는 자아를 새이스라엘에 둘려고 하지
기존의 이스라엘에 둘려고 하지 않겠죠
그래서 새이스라엘 개념을 포착했다 칩시다
소용 없어요

새롭다 라는 의미는 종말의 영에서 옵니다.
끝에서 와요
미래완료에서 온다 말이죠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새 롭다 라는 신상품을 소유해도
이미 헌술 헌부대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상한심령을 찾는 겁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스라엘 집의 선택받은 양이 외 아니고
이스라엘 집의 왜 잃어버린 양 일까요?

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을까요?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본인을 주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구원받는 자를 주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원하시는 분인
인자를 외치도록 되어 있는
인자 중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선택됨 구원됨 의인됨을 외치는게 아니라
반대로 버립받음 심판받음 저주받음 죄인으로 만드심을 당함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무익한 종 됨으로써 주님을 외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탕자야 돌아오너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이 탕자는 놀랍게도
맏아들 세계에서는 없어져야 할 자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 이다는 거죠

마치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세계에서는 없어져야 할 자이다는 거죠

이렇게 반드시 한 세트로써 맞물려서 나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나올수가 없어요

(눅 4:26, 새번역)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왜 잃어버린 양 일까요?
이스라엘 집의 선택받은 양 이것이 남은자 아닙니까
실제로 남은자 개념을 한국교회들이 언급하는 방식이 다 이스라엘 집의 선택받은 양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니다는 증거가 바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다 말이죠

왜 잃어버린 양 입니까

왜 마음이 부요한 자는 천국이 저희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일까요?

왜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의가 풍성한 자요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이것은 한 세트를 구성함에 있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점치는 여자를 염두하시고서 즉 큰 성 바벨론의 세계관
곧 유대인의 세계관을 염두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인 겁니다.

여기에 참선지자가 투입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은 선악적이라서 헛 됩니다
그 허무를 허무에 그치는게 아니라 반드시 의미 있도록 하고자

(겔 13:18, 개역)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겔 13:19, 개역)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죽을 자를 살리고 여기서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 죽은 자를 살렸다 라는 의미를 부각 시키기 위해서
산 자를 죽이는 식이
인간의 구원관입니다. 헛된 묵시를 반드시 달성한다는 거죠

그렇다 보니
그 죽은 자를 살리고자
산 자를 죽이는데 있어서
아무나 죽이면 된다 싶어서 그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제사 곧 장로의 유전인 거죠)(역시나 오늘날 까지 인간들은 모세언약 중심인 셈이지 새언약 자체를 모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무시험 합격을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졸지에 교회가 되고 말았다 말이죠 탕자를 맏아들은 죽어라고 싫어하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까지 죽였다는 사실에
주님은 드디어 참선지자의 투입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저들이 우상숭배하는데 뭐 냅뚸버리면 됩니다.
문제는 그 우상숭배에 이스라엘까지 재물로 바치는데 있어서 (일종의 전쟁이지요)
바벨론 포로 라는 역사적인 사건은
666 만이 소통 되는 세상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다는 겁니다.
졸지에 걸림돌이 생겨 버렸다는 거죠

그러니 참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재물로 바쳐지는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한 재배치 속에서
666이 소통 되는 헛된 계시가 소통되는 세계에
졸지에 걸림돌이 생겨서 브레이크가 걸려서

새이스라엘만 소통되는 세계로 만들어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라는 
새언약 완성이다는 겁니다.
다윗 언약은 결국 이런 세계관 속에서의 유일한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거죠
그러니 참선지자는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너희들이 죽인 참이스라엘을 곧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다시 살리시고
반대로 살아야 마땅하다는 부자청년(어릴적부터 율법 지킨) 또는 맏아들(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는) (오늘 본문에서는 점치는 부녀자들, 이사야 47:8절 에서는 바벨론 여자들이 왜 우상섬기는 그 이유처럼) 살아야 한다는 자를 죽이시는

너희가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자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사도행전에 너희가 죽인 예수를 주가 되게 하셨다 라고 나오잖아요

(행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 5:31, 개역)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행 5:32, 개역)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33, 개역)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 5:34, 개역)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행 5:35, 개역)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행 5:36, 개역)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행 5:37, 개역)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그래서 회개의 영이 바로 성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구절이 바리새인 문하 가말리엘 문하가 어떻게 말합니까
얼마나 논리적이냐 말이죠 이단이면 스스로 망하니까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 말이죠
이게 바로 거짓선지자의 사고방식인 겁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다 이런 사고방식인 거짓선지자의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단이 설치면 설칠수록 자신들의 가치가 좁혀지기는커녕 더더욱 커지거든요
이게 역사 라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이미 자신들이 차지를 했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엑스트라로 동원이 된다는 식이거든요

그러나 참선지자의 투입은 거짓선지자를 치는 식입니다.
친다고 해서 꼭 죽여 버리는 식이 아니라
그렇다고 가말리엘 문하처럼 고상한척 하면서 저들이 있어줘야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식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저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인 우상숭배자를 살리고
반대로 마땅히 살아야 할 이스라엘 곧 탕자를 부르시는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탕자를 죽이는데 있어서

이런 거짓선지자의 기능 또는 점치는 부녀자들의 기능에 있어서
이들의 기능 곧 소욕을 반대로 치는 겁니다.

즉 이들은 탕자를 막 죽이는데 있어서
참선지자는 졸졸졸 뒤따라다니면서 저들이 죽여놓으면 막 살려놓으니까
사망의 권세가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율법에 근거해서 돌삐쳐서 막 죽여놓으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돌삐로 쳐죽인 여자를 도로 살려놓는 식이 되니까

문제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 
이 놈의 기능이 아무 쓸모짝도 없게 되더라 말이죠
사람은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라서 기능이 아무 쓸모짝도 없이 되면
존재는 있어봐야 좀비일 뿐이다 말이죠
우상숭배가 바로 그런 식 아닙니까

탕자를 죄인을 막 죽였어요
소위 판사나 검사가 말이죠

그런데 변호사 구원자는 죽은 죄인을 졸졸졸 뒤따라가면서 막 살려놓아요
그러면 에이씨 율법이 왜 있냐 말이죠
헌법이 왜 있냐 말이죠
법을 지키는 자는 국가가 나라의 공무원이 살려주고
법을 어기는 자는 국가가 나서서 심판하는 재판관이 그래서 있고
경찰 검사 형사 다 그런 이유로 있다 말이죠

아 그런데 실컷 재판을 해서 심판을 해서 사형을 시켜 놨더니만
(보세요 그래서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한다고 두 사람을 대조 시키는 겁니다.
성전이 이들의 기준이거든요 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의 기능을 몰랐던 겁니다.
성전의 기능은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 성전의 기능을 마치 스가랴서에 나오는 마귀처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제사장 옷 에봇을 더렵혔다고 심판하고자 하는 마귀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고
마땅히 살 자는 나 바리새인이요
마땅히 죽을 놈은 저 세리 이다 라는 이 사고방식이
참성전의 기능
곧 인자의 기능을 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줄 모르고
더더욱 성전을 붙잡고 더더욱 법을 붙잡지
더더욱 저 세리처럼 인자를 붙잡고 긍휼을 붙잡지 않더라 말이죠
성전의 기능은 거꾸로 본 겁니다.)

사형을 시켜버린 자를 도리어 살려 버리니까
헌법도 무용지물 법도 성전도 모조리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니까
이 질서를 깨뜨리는 자인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판국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큰 성 바벨론에서 소통이 되고 매매가 되는 사고방식이지
십자가의 피 용서가 소통이 되는 세계가 아니다 라는 거죠.

심지어 유대인의 성전 회당도 졸지에 십자가의 피 용서가 소통이 되지 않는 세계가 되어버린것이니
바벨론과 뭐가 다르겠냐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돈에 다 빠지다 보니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우상숭배의 본부인 강도의 소굴이 되다 보니
돈의 기능을 살리는데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은
쫏아내고 죽이는 식이 되는
사가랴의 피까지 흘리는 아니 예수님까지 죽이는 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것만 반복하는 자들이 교회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성당 절간 사원 말이죠
인간이라는 신체는 곧 성전은
바로 이유 없이 나는 살아야 한다 라는 그 이유로
반대로 누구는 이유 없이 반드시 죽이겠다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인 겁니다.
나는 살기 위해서 번제와 제사를 드린다는 거죠
무신론자 무교 무종교자도 마찬 가지입니다.

산다 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누구는 죽어야 한다는 거죠
이런 점쟁이 여자와 거짓선지자의 활동에
이 번제와 제사의 활동에

참선지자의 투입은
저들의 번제와 제사가 아무런 쓸모짝도 없게 되는
인애와 자비를 펼치게 되니까

자신들의 번제와 제사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견디질 못해서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살인의지를 발하는 거죠 (주님의 의가 아니였다면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였다면 이것이 악마의 자취였는지를 몰랐던 거죠
(잠 30:18, 개역)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19, 개역)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잠 30:20, 개역)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잠재되었던 것이 비로소 튀어나오게 된 처음부터 있었지
우발적으로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처음부터 숨어 있었던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
캬 자신의 몸이 처음부터 살인의지를 품은 몸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던 겁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님이라는 인자 되신 성전은
처음부터 용서를 말하는 성전이였습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는 이 다윗언약인 새언약을 아니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바벨론이 죽인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는 새 언약을
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들이 죽여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는 일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절대로 살면 안되는 자를 저들은 살리고자 우상을 끌여들였고
반대로 반드시 살아야 될 자인 이스라엘을 저들은 저들의 번제와 제사로 다 죽여버렸다 말이죠

전쟁으로써 적군들을 제물로 바치는 승리의 전리품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전쟁으로 새이스라엘이라는 전리품을 마귀와의 전쟁
사망 권세와의 전쟁을 통해서 이겨 승리한 전리품으로써 이스라엘을 차지했다 말이죠

그 전리품을 도로 빼앗겼던 것을 다시 찾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까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의를 긍휼을 자비를 용서를 베풀었는데

이 의가 바로 인간의 입장에서 반드시 살아야 할 의인을 살리고자
못 된 죄인을 마땅히 죽이는데 있어서
그런 인간의 의에 거룩에 반대해서
주님의 의는 인간의 입장에서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을 다시 살리시는 의요
마땅히 살아 마땅하다는 의인을 마땅히 죽이시는 의로움이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처음사랑이 바로 이 용서에 피 용서에 비롯된 것이니까 말이죠

이 의미 바로 십자가의 표적 외에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이 십자가를 외치는데 있어서 투입이 된 자들이 참선지자로써
거짓선지자의 소욕에 반대되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새언약의 기능을 감당합니다.

이 은혜 외에는 없기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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