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여호와께 나오는 이스라엘 장로들 (겔 14, 1- 8)
(겔 14:1, 개역)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겔 14:2,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4:3, 개역)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겔 14:4, 개역)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겔 14:5, 개역)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겔 14:6, 개역)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겔 14:7, 개역)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겔 14:8, 개역)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4:1, 현대어) 『[우상숭배자들은 죽는다] 이스라엘 장로 몇 사람이 와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자 기다리는 중이었다.』
(겔 14:2, 현대어)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겔 14:3, 현대어) 『`너 사람아, 이 사람들은 언제나 우상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는 일에만 매달려 사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자들의 물음에 답변을 해야 옳겠느냐?』
(겔 14:4, 현대어)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든지 온갖 우상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일에만 빠져 지내던 자가 내 예언자를 찾아 와서 내게 무슨 답변을 듣기 원한다면, 나 여호와가 그에게 직접 응답을 해주겠다.』
(겔 14:5, 현대어) 『내게서 멀리 떠나 온갖 우상들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내가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교훈을 주겠다.'』
(겔 14:6, 현대어) 『그런 다음 너는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너희는 우상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모든 가증스런 것들에게서 눈길을 돌려 내게로 돌아오라!』
(겔 14:7, 현대어)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사는 이방인이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를 버리고 떠나서 온갖 우상에게 마음을 쏟고 스스로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일에만 빠져 지내던 자가 내 예언자를 찾아와서 내게 무슨 답변을 듣기 원한다면, 나 여호와가 그에게 직접 대답해 주겠다!』
(겔 14:8, 현대어) 『내가 몸소 그를 만나보고 그의 문제를 직접 다루겠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에게 경고가 되어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겠다. 내가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잘라 내어 죽여 버리겠다. 그러면 그제서야 너희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번역에 이렇게 소제목을 달던데요
(겔 14:1, 현대어) 『[우상숭배자들은 죽는다] 이스라엘 장로 몇 사람이 와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자 기다리는 중이었다.』
(겔 14:12, 현대어) 『[막을 수 없는 형벌]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겔 14:1, 쉬운) 『<우상 숭배를 멈추게 하시다> 몇몇 이스라엘 장로들이 내 앞에 나아와 앉았다.』
(겔 14:12, 쉬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정작 주제의 핵심은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입니다.
(겔 14:8, 개역)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4:8, 새번역) 『내가 이 사람을 정면으로 보고, 그를 징표와 속담거리로 만들며, 마침내 나는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끊어 버릴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겔 14:8, 공동) 『그가 내 눈총을 받아 내 백성 가운데서 잘리리니, 너희는 그가 망하는 모양을 보고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겔 14:8, 쉬운) 『내가 그를 저버려 후대를 위한 표본과 속담거리가 되게 하겠다. 내가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없애 버릴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겔 14:8, 킹흠정) 『내가 그 사람을 향해 내 얼굴을 고정하고 그를 표적과 속담거리로 삼으며 내 백성의 한가운데서 끊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14:8, 한글킹) 『내가 그 사람을 외면하며 그로 표적과 잠언이 되게 할 것이요, 또 내가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라.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겔 14:8, 현대인)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를 본보기로 처벌하고 웃음거리가 되게 하여 그를 내 백성 가운데서 제거해 버리겠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속담거리 라는 말은 비웃음꺼리 즉 수치덩어리로 만들어서 수치를 가려주는 자가 없도록 하겠다 라는 겁니다.
즉 구원의 의미는 지금의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더 나빠져야 마땅한데
즉 심판 받아 마땅한 쫄딱 망해야 하는 자 인데
봐 주신다 라는 긍휼의 의미를 입히는 새 옷을 입혀주시는 수치 가려줌이 바로 구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구원의 의미가 바로 이 반대인 엉터리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지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 앞에 나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오는 것이 마치
대단한 겸손이고 신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우상과 하나님을 섞어버린 상태이니
마치 오늘날처럼 구원을 더 잘 되게 해 주시는 의미에서 자꾸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더 잘 되게 해 달라는 식입니다.
잘 아시다 싶이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상황임을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전 곧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 집에 두 사람이 들어와서 기도를 합니다.
한 사람 바리새인은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 라고 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덧 붙이는 것 저 세리 매국노와 같이 토색치 않게 해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스라엘 장로들이 선지자에게 찾아와 여호와의 응답을 받겠다 라고 오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자 이렇게 한 무리가 구성이 되고
이에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인 세리의 기도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긍휼을 바라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아무리 봐도 자기는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쫄딱 망해야 하는 자임을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제대로 보고서
심판주 이심을 보고서 무조건 머리를 쳐 박고
재를 뿌리고 생일을 저주하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여호와가 누구인줄을 제대로 본 자 입니까?
아니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봐도 그들은 경건주의 또는 회개운동 또는 하나님나라 회복 운동 또는 신앙개혁 등등
이런 것들로 자신들을 칭칭감아서 도배를 했으니
저런 기도를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가 누구인줄 전혀 모르고서 나오는 행동들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상을 섞은 모습이다는 거죠
진언
지난 주 녹음에서 진언 소위 종교기술을 익힌 겁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기술을 익혀서
마술 주술 등등
이것으로 밥벌이 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 모여서 큰 성 바벨론을 형성한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큰 성 바벨론이라는 모든 민족들이 다 부러워서 그들의 신 GOD을 수입해서까지
심지어 이스라엘 까지 바알과 말둑을 섬겼으니까
이것은 상대적인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야곱아 돌아오라
세리야 돌아오라 라는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이 새 언약이 먼저 떳기에
상대적인 비웃음꺼리 속담거리로써 설정하는 한 세트를 구성하시고자
이들이 우상을 섬겨야만 하는
심지어 이스라엘 장로들 조차도
장로가 뭡니까? 지도자들 아닙니까
지도자가 이런 모양이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런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식이
당연한 줄로 알고 있고
심지어 바리새인이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까지 와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더라도
당연한 줄 그것이 신앙이요 겸손이다 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보는데 있어서
(겔 14:8, 개역)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늘날 격어 봐도 그래요
안 그러는 교회가 없어요
성화론 그것도 아주 수준 높은 개혁주의이자 수준 높은 성화가 된 교회를 가 봐도 그래요
가장 개혁이 실제로 되었구요
가장 성화가 된 교회를 가 봤어요
그러나
이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줄 모르고
도덕으로 도배를 한 모습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똑같았지
세리처럼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기도하는 자는 없었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가 나타나면 쫓아내기 바빠요
자기들처럼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우상을 안 섬긴다 라고 말이죠
왜 너는 의로움이 저 매국노 세리처럼 없으냐 라고 말이죠
이런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하셨거든요
누룩 곧 바이러스가 뭡니까
죄악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왜? 의사 앞에서 환자는 죄악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수치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다들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등등
자기의 의로움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것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하나님의 집과 무슨상관이 있냐 말이죠
누룩은 결국 더러운 바이러스가 아니라
소위 자신의 의롭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옳음과 정의 등등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오니
성전의 기능이 뭡니까?
제사장의 기능이 뭡니까
더러움을 거룩으로 이동 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미 이들이 스스로 구원을 펼치다 보니
자기 깨끗한 것을 자랑하고 있으니
오히려 깨끗한 것이 누룩이 되는 겁니다.
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인 줄 모르는 겁니다.
자기 의를 자꾸 가지고 와요 글쎄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말이죠
참성전은 그거 해결 해 주는 분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꾸 찾아옵니다
마치 부자 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 라고
자 이제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말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속담꺼리 비웃음꺼리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이 얼마나 겸손한 질문 아닙니까?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어서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낮은 자세로써 질문하고 그 응답에 실천하겠다 라는 자세 말이죠
그런데 어라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부자청년이 냅따 도망을 치는 겁니다.
그것도 근심하고 등돌려서 말이죠
속담 이라고 하면 누가 생각나는고 하니
다윗 왕과 한 세트를 구성하는 마치 동생 야곱과 한 세트를 구성하는
사울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형 에서 말이죠
사울왕도 선지자 맞긴 맞더냐 라는 속담이 아주 아주 유명한 이스라엘 속담 아닙니까?
그렇게 속담까지 만들어 가면서 이스라엘이 비웃었던 사울왕의 모습이
지금 이스라엘 장도 즉 이스라엘 전체의 지도자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런 식이다 라는 것이죠
자 이렇게 바리새인의 기도가 이렇다면
이스라엘 선생으로써 바리새인이 이렇다면은
주님은 탕자야 돌아오라 라고 부르시는 그 음성은
그 반대의 대비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뽑아내시는데 있어서
그냥 뽑아내시면 저들 바리새인 곧 이스라엘 장로들과 다를바 없는 우상이니까
진짜 하나님 이시라면
진짜 내가 여호와 인줄 알 것이다 라는 그 진짜 여호와 이시다면
저들의 손에서 뽑아내시는 동생 야곱
또는 세리의 기도
또는 다윗 왕이라면
이들 야곱 세리 다윗을 죽였다가 다시 3일 만에 살리시는
예수님 본인의 의로움 곧 피를 이 원수에게 발라서
원수 마저도 사랑하시는 이 율법의 완성을 제대로 보여주시겠다 라고
주님의 자신의 피 흘리심 곧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방식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 라는 지혜가 아니면
인간은 자기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계시인 헛된 묵시를 쫓도록 되어 있는 우상숭배
곧 이유 없이 나는 고아 되면 안되고 과부 되면 안되고 나그네 되면 안된다 라는
이 바알 숭배자 말둑 숭배자의 우상의 사고방식과
대조 되는 식으로 차이나는 식으로 자신이 여호와 인줄 알리라 라고
이미 이 새 언약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선언 하시면서 나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곧 탕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십자가의 간극 이라는
주님의 의로움을 격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자기 의로움 때문에 다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말이죠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보고 다들 싫어하고
에라이 어차피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에 달려 죽으니까
어차피 죽을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어아 죽여라 라고
모든 인간들의 원수성이 다 드러났다 말이죠
이 원수성이 바로
십의 일조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히고 저 매국고 세리처럼 토색(삥뜯기,갈취)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하다 라는
이 인간의 자기 의로움 쌓기, 성화 쌓기, 이웃사랑 실천 쌓기 가 바로 누룩이요
죽음에 이르는 죄악인 바이러스 이다는 겁니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보면서
진짜 더러운 바이러스는 누구인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데이터 정보를 감추는 중국 정부나
일본은 자신들의 더러움이 드러날까 싶어서 자꾸 감추는 겁니다.
아니 그럴려면 말라꼬 자기 아들을 의사로 시키냐 말이죠
바이러스는 이런 우리의 죄악이라는 수치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선지자의 일을 하고 있는 바이러스에게
이스라엘 장로들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 라는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듣겠다 라고 선지자에게 찾아오는 식이니
지난 주의 이스라엘 부녀자들 점치는 여자들과 뭐와 다를까요
이런 이스라엘 속에서
주님은
당당하게 뭐 하나 손해 본 것이 없이
자신의 이스라엘을 돌아오라
탕자야 돌아오라 라고
죄인을 뽑아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천부께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히듯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듯이
남은자만 돌아오겠끔 하시고
나머지는 우상숭배자로써 반드시 미워하시겠다 라고
형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라고
이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물론 상대적인 동생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이죠
이 일로 인해 선지자는 투입이 된다 라고 하십니다.
두 패로 갈라 버리시고자 말이죠
결국 우리는 주님 앞에
이들 이스라엘 장로들처럼
소위 바리새인 누룩처럼
누룩을 다들 오해를 하기를
더러움이다 라고 착각하시는데
그 반대입니다
자기들 따나 가장 의로운 것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가장 좋은 것 바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그 정도로 철저하게 경건한 생활을 바쳤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누룩이다 말이죠
네 맞아요
깨끗한 것이 누룩이다 말이죠
이 누룩을 조심하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런 것들은 심판의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다 녹아 버려요
순금 몇 프로 인지를 알려면 용광로에 집어 넣어 봐야 한다 말이죠
정금 같이 나올려면 말이죠
아무도 못 살려요
도리어 웃음꺼리 속담꺼리 밖에 안되요
남을 7번 8번 아니 100번 천번 만번 용서 했다 칩시다
과연 남을 살릴수 있는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용서인지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빼내어 보자 말이죠
신과 함께 라는 영화에 자꾸 착한 짖을 했느냐 로 심판의 기준을 삼는데
그 착한 짖이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말이죠
모든 종교가 다 이거 주장해요
이 누룩을 조심하라 말이죠
착한 짖을 했냐 안했냐로
소위 오늘날 교회들이 저 우상숭배자들과 똑같이 주장하는
말씀을 지켰냐 안 지켰냐 로써 심판의 기준을 삼는
그런 누룩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 용서
곧 도리어 남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죄인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비로소 심판 주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라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심판주로 고백하는 이것이
진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시는 주님의 숙제가 다 완료되어서
덮쳐짐을 당해 다시 살게 되는 자 곧 탕자야 돌아오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로써 그 음성을 듣고 죽음 속에서 나오는 자 이다는 겁니다.
어떤 누가 죽음 속에서 나올수가 있겠습니까
자기의 의로움 백날 갖추어도 못 빠져 나와요
그 수치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삭이라는 진짜 죽음을 비웃었던 아브라함도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나 진짜 죽음이 아니면 그 비웃음을 그 속담꺼리를 그 수치를
덮쳐줄 자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벌거벗은 저 애굽을 의지하여서 수치를 가리고 (그래서 이사야는 3년 동안 벌거벗고 돌아다니죠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에스겔 때에는 전체 이스라엘이
점치는 이스라엘 부녀자
우상을 마음에 둔 이스라엘 장로
오늘날 장로들은 교회를 통해서 명예를 추구하는 돈에 미친 자들이거든요
목사를 닮고 싶어 환장해요
서로 서로 돈 누가 더 사랑하냐 라는 싸움 밖에 안해요
또 다음 주의 거짓선지자 곧 이들 대중의 흐름에 맞춰주는 자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유대사회를 다 장악한 모습
오늘날 한국 교회 자한당을 보시면 아실터니고
천주교는 민주당을 보시면 아시듯이
다들 헛된 묵시에 빠져 살도록 되어 있는
이 우상이 배경으로 깔려있는 그 어두움 속에서
주님은 빛으로써
어둠을 배경으로 깔고서
자신이 여호와인줄 알게 해 주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모두가 다들 구원자로 자처하는 가운데에
구원자가 아닌 심판의 주로써
이들 우상숭배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들은 속담꺼리 웃음꺼리가 되면서
동시에 그렇게 비웃었던 본인들 조차도 언제 비웃음꺼리가 될 줄 모르는
사울왕도 선지자에 있더냐 라고 비웃어 놓고서도
정작 자신들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몰라서 전전근근하는 식으로
이 얼마나 급박하고 가깝고 즉각적인 하나님의 의로움인지를
즉각 펼치시겠다 라고
자신이 누구인줄 알려주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 심판 주 앞에
우리믐 무조건 이유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써
주님의 의사 됨을 외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피 용서를 자랑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영광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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