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사 48, 1-16)

우상의 특징 딱딱함 VS 성령의 특징 부드러운 마음

73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사 48, 1-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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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8:1, 개역)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들을지어다』
(사 48:2, 개역) 『[1절과 같음]』
(사 48: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고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
(사 48:4, 개역)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사 48:5,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옛적부터 네게 고하였고 성사하기 전에 그것을 네게 보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 말이 내 신의 행한 바요 내 새긴 신상과 부어만든 신상의 명한 바라 하였으리라』
(사 48:6, 개역)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것을 다 보라 너희가 선전치 아니하겠느뇨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보이노니』
(사 48:7, 개역)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지 않았더면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였으리라』
(사 48:8, 개역)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사 48:9, 개역)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사 48:10, 개역)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 48:11, 개역)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8:12, 개역)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사 48:13, 개역)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사 48:14, 개역)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예언하였느뇨』
(사 48:15, 개역)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사 48:16, 개역)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사 48:1, 새번역)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이라 일컬음을 받는 유다의 자손아, 주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진실이나 공의라고는 전혀 없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사 48:2, 새번역) 『스스로 거룩한 성읍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아, 그의 이름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자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이 말을 들어라.』
(사 48:3, 새번역) 『"내가, 이미 옛적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었다. 내가 직접 나의 입으로 그것을 예고하였고, 내가 그것을 직접 들려주었으며, 그 일을 내가 홀연히 이루었다.』
(사 48:4, 새번역) 『내가 알기에, 너는 완고하다. 네 목 힘줄은 쇠붙이요, 네 이마는 놋쇠나 다름없다.』
(사 48:5, 새번역) 『옛적부터 내가 네게 알리고,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네게 들려준 까닭은, 네가 '내 우상이 이 일을 이루었으며, 내가 조각한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이 일을 명령한 것이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 48:6, 새번역) 『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아라. 네가 인정하지 않겠느냐? 이제 내가 곧 일어날 새 일을 네게 알려 줄 터이니, 이것은 내가 네게 알려 주지 않은 은밀한 일이다.』
(사 48:7, 새번역) 『이것은 이제 내가 창조한 일이다. 옛적에 일어난 것과는 다르다. 지금까지 네가 들어 본 일이 없는 일이다. 네가 전에 이것을 들었더라면 '아, 바로 그 일,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만은 그렇지 않다.』
(사 48:8, 새번역)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성실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모태에서부터 반역자라고 불러 마땅한 자로 태어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가 너를, 듣지도 못하게 하였고, 알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옛적부터 네 귀가 트이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사 48:9, 새번역) 『내 이름 때문에 내가 분노를 참고, 내 영예 때문에 내가 자제하여, 너를 파멸하지 않겠다.』
(사 48:10, 새번역) 『보아라, 내가 너를 단련시켰으나, 은처럼 정련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의 풀무질로 달구어 너를 시험하였다. / ㉠또는 '고난의 화덕에 넣어서'』
(사 48:11, 새번역) 『나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겠느냐? 내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사 48:12, 새번역) 『야곱아, 내가 불러낸 이스라엘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내가 바로 그다. ㉡내가 곧 시작이요 마감이다. / ㉡또는 '시작하는 것도 나요, 마감하는 것도 나다'』
(사 48:13, 새번역) 『내 손으로 땅의 기초를 놓았고, 내 오른손으로 하늘을 폈다. 내가 하늘과 땅을 부르기만 하면, 하늘과 땅이 하나같이 내 앞에 나와 선다."』
(사 48:14, 새번역) 『너희는 모두 함께 모여서 들어 보아라. 우상들 가운데서 누가 이런 일들을 알려 준 일이 있었느냐?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니, 그가 바빌론을 공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의 능력을 ㉢바빌로니아 사람 앞에서 드러낼 것이다. / ㉢또는 '갈대아'』
(사 48:15, 새번역) 『"내가 말하였고, 내가 그를 불러냈다. 내가 그를 오게 하였으니, 내가 그 길을 형통하게 하겠다.』
(사 48:16, 새번역) 『너희는 나에게 가까이 와서, 이 말을 들어라. 처음부터 나는 은밀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이 생길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제 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고 그분의 영도 함께 보내셨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후 우리야 장군을 죽인 뒤에
자기 스스로 수치를 가리고자 한 내용이 바로

나단 선지자가 알려준 그 범죄자에게
율법으로 네 배나 갚으라 라고 법을 쥐는 모습이였습니다.

바로 그 범죄자가 바로 너야 너 라고 했을때에
자기자신의 수치를 몰래 감추고자 했던 율법으로는
자신의 죄악을 감출수 없었음을
비로소 우상 곧 딱딱한 마음을 들통 당하면서

내 속에 정직한 영
부드러운 마음이 없다 라고
상한 심령을 달라고
인애와 자비를 요청하게 됩니다.

이 회개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은 태어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왕으로써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교회를 교회 답게 하고자
율법으로 네 배나 갚아야 한다 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집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더더욱 딱딱하게 하는 우상이지 (움직이지 못하는)
부드러운 마음인 새 신 새 마음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결국은 율법 지키기 라는 행함은
그 행한 노동의 댓가를 바라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즉 행함이지요
어떻게 하면 구원 얻느냐 라고 집요하게 예수님을 괴롭히는 겁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 하는 거죠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구나 라고 말이죠

이 완악한 딱딱한 마음에 대비한
부드러운 마음은

다윗에게서는 이 정직한 영이 없어서 비로소 상한 심령이 되어서 달라고 합니다.
누가 상한 심령을 구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다들 행함에 대한 댓가를 구하거든요 이게 우상이고

사랑은 내 죄를 대신해서 심판받은 이 십자가의 용서를 보고서
눈 녹듯이 녹아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목숨 곧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예수님의 목숨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전부를 다 받은 겁니다.
뭐 더 받을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노동은 반드시 댓가를 바라는 딱딱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노동이기에 행함이기에
반드시 댓가를 바라는 완악한 마음 곧 우상입니다.
탐심입니다.

아내와 가정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내는 사랑의 관계이기에
남편의 목숨을 이미 받은 자입니다.
교회죠

그러나 가정부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에
주님의 목숨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믿어줬으니까 댓가만 달라고 할 뿐입니다.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고
구원 이라는 댓가 곧 보상을 받을수 있다면 어떤 노동을 해야 하냐라고 묻을때에

예수님은 전재산을 전목숨을 이 가난한 자에게 다 내어줄수 있냐 라고 합니다.

사랑의 관계성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입니다.
시형제 결혼법,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은 모두다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알맹이를 빼버리면
그것은 딱딱하고 굳은 행함의 댓가를 바라는 움직이지 않는 성전인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인 성령 곧 새 신
새 마음을 부어준다 라는 말은

더 이상 내가 할 숙제 곧 노동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부드러운 마음 뿐인
사랑 뿐입니다.

누가 결혼을
남녀간의 사랑을 노동하기 위해서 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은 끝까지 노동하기 위해서 결혼해야 한다는 식으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데 있어서

성전에서 십일조 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다
자꾸 했다 했다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 라고
하라 하지말라를 지켰다 외에는 내세울게
기도할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6장 전체에서처럼
보이지 않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노동의 댓가 는 오히려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되는 겁니다.
골방에서 기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 구석에서 숨은 듯이 합니다.
세리는 심판의 주를 보고
그 심판을 대신 받으신 그 사랑을 보고
웁니다.
상한 심령이 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숙제 행함을 내세운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는
눈 녹듯이 녹는 그 부드러운 사랑 앞에서
그저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비로소 구원자 때문에 비로소 죄인이 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되는
의사 때문에 비로소 환자가 되는
의인이 될 필요가 없는 그저 이 의사가 나를 고치실 유일한 자임을 외치는 
죄인의 자리

앞의 마태복음 16장의 누룩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라는 글에서

이스라엘의 의미가 과연 바리새인의 교훈 곧 행하고 지키기에서 나왔는가 (남을 7번 용서?)
아니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는
불쌍히 여겨주심에서 나왔는가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에서 나왔는가?)
이것 때문에
이 새 언약의 완성 때문에
새 영 새 마음을 부어주심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자리 곧 처음사랑의 자리는
죽었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주님의 의를 덮어주심
수치를 가려주심인

열두 바구니 잉여인 열두지파
일곱 바구니 잉여인 일곱 교회로써
그 풍성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 이들 이스라엘이 먹는 떡에 집착하고 걱정해야 합니까

그것은 지키는 자들 행하는 자들만이 숙제요 걱정이거든요
부자청년이 아무리 부자여도
행함을 쫓기 때문에
완악한 수건이 벗어지는 불안과 공포 때문에
전재산을 나누어 줄 수가 없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차게 되는 겁니다.

부드러운 마음 곧 새 마음 새 신 새 영이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저 딱딱한 마음으로만 가득차서
가정부처럼 행한 것의 댓가로써 구원을 탐하는
탐심으로 가득찬 우상숭배자였음이 드러나는 거죠

아니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는데?
그것이 우상숭배였다니
인간은 다 속아 넘어갔는데
예수님은 안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누룩이다 라고 조심하라고 하신다 말이죠
아니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누룩이였다니
그야말로 충격적인 들추임이였다 말이죠

다들 좋아라 하는 것이 누룩이였고
다들 싫어라 했던 저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사랑이였다니
부드러운 새 영이였다니

이 새 영을 부어주시겠다 라고
광야의 3일 길에 몰아넣어서
그 심판과 저주인 죽음 속에서
새 이스라엘 이라는 열두 바구니 열두지파와
새 이스라엘 이라는 일곱 바구니 일곱교회인
피로 사신 교회인 신부의 의미를 강조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가정부가 아니라 나의 아내 라고

그런데 바리새인은 사두개인은
오늘날 목사들 종교지도자들은
다들 가정부로 만들어서 그저 돈이나 삥 뜯더라 말이죠
눈에 보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성전
그 딱딱한 성전에 집착하도록
교리 플러스 실천 이라는 불교를 집어넣어서
세뇌 시켜서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가로막는

광명한 천사 곧 평강이다 평강이다 만을 외치는 거짓선지자들이였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 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서에 나오는 네 짐승의 성분 구성이 다들 딱딱하고 영원한 힘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머리 금신상 바벨론
어깨 가슴 은신상 메데 파사
그리고 하체 허벅지 까지 동신상 헬라
그리고 그 이하 종아리에서 발까지 철신상 로마

그리고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모양 조차도
뿔이 머리에서 밑에 까지 아예 박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다들 부러워 하는 힘과 권력이라는 딱딱한 철 무쇠 놋이 되는 거죠
이것을 행함과 실천으로 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음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육체의 법칙을 반대로 거스린다 라는 거죠
행함의 법칙을 말이죠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백세를 일부러 넘기도록 해서
아이를 갖게 된다 라는 겁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식인 거죠

고목에 꽃이 피는 것은 말도 안되는 부조리 부조화 이다는 겁니다.
육체의 법칙은 말이 되는 부조리가 없는 당연한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말이 되는 거죠
그런데 늙은 백세 넘은 남자가 아이를 갖게 되고 혼자 그런게 아니라
아내도 죽은 태인데 어떻게 임신을 하냐 말이죠
다들 비웃거든요
그래서 비웃었다 말이죠
그 비웃음을 웃음으로 만드는 겁니다
누가? 성령이
인간이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말도 안된다고 여겨서 비웃었다 말이죠
그런데 성령은 그 비웃음을 웃음으로 만드는 겁니다.

젊은이가 환상(계시)을 본데요 글쎄
이삭이 제물이 된다 라는 겁니다.
진짜 죽음(새언약)을 보여주는 자가 젊은이 이다는 겁니다.

말이 안 됩니다.
젊은이가 도리어 꿈을 꾸고 아이들을 순풍 순풍 잘 놓는 건강한 아이를 갖도록 해야 하는데
도리어 막 죽어 나가요

부모가 예언해서 아이들은 인도해야 하는데
자녀가 예언해서
임마누엘 스알야숩 마할살렐하스바스가 예언해서
아하스 왕을 인도한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였으면
아하스 왕이 임마누엘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이사야의 아들이지요 곧 인자를 구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라고
수치를 자기 스스로 가리고자
도리어 수치를 가릴려고 수치인 애굽을 의지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가 발가벗고 3년 동안 예언 하는 겁니다.
애굽을 의지 하지 말라고
딱딱한 힘과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부드러운 아기 젖먹이 임마누엘을 구하라 라고

누가 이 부조리를 구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어차피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언약인 새 언약이거든요

다윗은 딱딱한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려보겠노라 라고 행함을 실천했지만
정작 그 죽어가는 아이가 그 다윗의 딱딱한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서
남을 7번 용서할 생각 말고
너 다윗 너나 7에 70번 용서나 받으라 라고
꺽으신 뼈로 즐거워 하겠끔 하시겠다 라고
성령을 
부드러운 마음을 부으시는 겁니다

꺽은 뼈 라는 것이 뭡니까?
이사야가 발가벗음은 저들의 발가벗은 모습을 반사 시키는 거울로써 보여줬듯이
이름 없는 아기가 꺽어진 뼈가 되었다 라는 말은
너 다윗 너 딱딱한 다윗
고래 심줄 같은 완악한 고집
목이 곧은 백성의 무쇠 같은 목 힘줄
딱딱한 놋 이마를
우상이 된 이마를 꺽어버리겠다 라고
화목제물이 되셨다 라는 겁니다.

이 새언약에
너 다윗은
너 이스라엘 전체는
완악한 수건을 벗고
부드러운 탕자로써 돌아오도록 하시겠다 라는
주님의 자기 맹세이다 라는 거죠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마 라고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우리는 기존의 하나님 곧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그 엉터리 가짜 신앙을
부서뜨리시는 진짜 주님의 활동상을
즉 우리를 3일의 광야로 죽음으로 몰고가서
마땅히 심판 받아 쫄딱 망해야 할 자임을 알도록 하시는
목이 곧은 백성을
누룩으로 가득찬 백성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불뱀에게 물려 죽게 함으로써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지금 보세요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 곧 고레스 왕을 앞에서 예언했잖아요
이것이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했잖아요
출애굽기 때에는 광야 였지만
170년 뒤에 고레스를 예언함으로써
바벨론 포로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목이 곧은 이스라엘의 목을 꺽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계시록으로 치면 큰 성 바벨론 짐승의 입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목이 곧은 백성의 무쇠를 꺽겠다 라는 겁니다.

진짜 죽음을 통해서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이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만나게 하겠다 라는 겁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를 만났듯이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는 그 죽음 속이 아니면
가짜 죽음 말고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 말고 그것은 죽음도 아니니까
진짜 죽음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목이 곧은 백성인 나의 목을 꺽겠다 라는 겁니다.

이 우상 숭배를 해결 할 길이 없는 인간이기에
죄악의 문제
죽음에 이르는 병인 누룩 문제
바이러스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에

죽으면 죽으리라 속에 집어넣어서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트 무적을 모조리 다 꺽어서
녹여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이 주님의 맹세인 약속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그저 힘을 쫓는
행함으로 법을 지켜서 우상을 쌓기 바쁜
거기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그래서 베드로를 바리새인의 누룩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고자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마귀의 활동상을 들추어내시면서
그 차이로써
그 딱딱한 마음의 차이로써

부드러운 주님의 마음인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때려죽어도 배신하지 않겠노라
죄인 되지 않겠노라
탕자 되지 않겠노라 라는 딱딱한 마음을 꺽어서

광야에서
죽음에서
심판 속에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부드러운 주님의 마음을 보고
눈 녹듯이 녹는

이 피로 사신 피용서인 인애와 자비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누룩(광명한 천사)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딱딱한 가정부의 권세 곧 노동의 댓가 보상으로써 바라는 구원을 탐하는
그래서 의인이 되고자 
말이 되는 의인
멋들어진 구원이 되고자 했던
말이 되는 구원이 되고자 했던 그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부어서
피로 사셔서
아내로써 신부로써 사랑하시는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냐 라고
아가페(희생을 강요하는 선택)이 아니라
에로스
여호와를 아는 지식(사랑=십자가의 피 용서)를 통해서
신부 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열두지파
곧 일곱교회는
십일조 했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자랑하는 딱딱한 자가 아니라

이런 죄인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외치는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피 흘리심 이라는 죽음 속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3일의 간극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임을

이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목이 곧은 백성에게
완악함을 꺽겠다 라고 자신의 맹세를 펼치시는 겁니다.

이 꺽으심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비웃음꺼리 속담꺼리 밖에 안되는
수치를 어떤 누구도 가려주는 자 없이
스스로 수치를 가리고자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고
행함을 강조하면서
구원이라는 보상을 해 달라고
우상을 쫓는
헛된 묵시를 뿜어대는 자신의 육체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시는 이 새 마음을 부으시겠다는 약속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피 용서만을 노래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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