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사 49, 1-14)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는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사 49:1, 개역)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사 49:2, 개역)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사 49:3, 개역)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4, 개역)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사 49:5, 개역)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49:6, 개역)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7, 개역)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사 49:8, 개역)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사 49:9, 개역)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사 49:10, 개역)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 49:11, 개역)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사 49:12, 개역)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사 49:13, 개역)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사 49:14, 개역)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 새번역)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사 49:2, 새번역)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사 49:3, 새번역)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사 49:4, 새번역)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사 49:5, 새번역)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사 49:6, 새번역)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사 49:7, 새번역)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사 49:8, 새번역)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구원해야 할 때가 되면,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겠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날에는, 내가 그 간구를 듣고 너희를 돕겠다. 내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겠으며, 너를 시켜서 뭇 백성과 언약을 맺겠다. 너희가 살던 땅이 황무해졌지마는, 내가 너희를 다시 너희 땅에 정착시키겠다.』
(사 49:9, 새번역)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는 '나가거라. 너희는 자유인이 되었다!' 하고 말하겠고,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곳으로 나오너라!' 하고 말하겠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먹거리를 얻게 할 것이며, 메말랐던 모든 산을 그들이 먹거리를 얻는 초장이 되게 하겠다.』
(사 49:10, 새번역) 『그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샘이 솟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사 49:11, 새번역) 『내가,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만들고, 내 백성이 자유스럽게 여행할 큰길을 닦겠다.』
(사 49:12, 새번역) 『보아라, 내 백성이 먼 곳으로부터도 오고, 또 더러는 북쪽에서도 오고, 서쪽에서도 오고, ㉠아스완 땅에서도 올 것이다." / ㉠사해 사본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시님'』
(사 49:13, 새번역) 『하늘아, 기뻐하여라! 땅아, 즐거워하여라! 산들아, 노랫소리를 높여라.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또한 고난을 받은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사 49:14, 새번역)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마치 출애굽때 이스라엘을 부르짖도록 만드시고자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셔서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스라엘로부터 영광 받으심이 아니라 애굽왕(강퍅케 만들어서)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얻으심으로써 나 여호와 인줄 알게 아신다는 겁니다.실제로 기생라합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닌 더 정확하게는 마귀를 이기신 주님의 일하심을 듣고 간담이 녹아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를 기다렸다 말이죠 그 부록에 선물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첨가 되었으니 말이죠)
그러니 자기 영광만을 구하는 자였던 개인구원밖에 모르던 이스라엘이
바로왕을 강퍅케 만드니까
졸지에 자기 영광은 이 바로왕을 넘어설수가 없으니
그의 강퍅함을 이길수가 없으니
음부의 권세를 이길수가 없으니
하나님을 부르짖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도록 만드시는
죄인의 자리
환자의 자리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들을 이끌어낸 여호와 로라(십계명 전문)
(출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곧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애굽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희년을 기뻐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로 만드시는
자기 백성 직접 만들기 이시다는 거죠
그렇게 하심으로써
너는 나의 종이다
나는 너의 주인이다는 거죠
너는 주인의 영광만을 나타낼 자이다는 겁니다.
누가? 맏아들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바로 탕자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밖에 없어요
곧 지옥이 땡기는 자와
천국이 땡기는 자입니다.
이것은 곧 남을 7번 용서 하고자 하는 자와
그 반대로 도리어 남이 아닌 본인이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하는자 이다는 거죠
이것을 다시 또 대조해 보면
99마리 그냥 양이고
그 반대인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이 되는 거죠
지난주 에스겔 내용으로 치면
선지자의 죄악 이라는 글에서 말이죠
자기가 직접 자기 스스로 하나님 백성 되고자 하는 자 곧 인간숙제와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 백성 만들기 가 되는거죠 예수님 숙제 말이죠
이것은 곧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인간의 숙제는 의문의 반복이지만)
죄인을 부르러 환자를 부르러 오셨다는 겁니다.(예수님의 숙제는 또렷하게 보이는 미래완료)
결국 거짓선지자의 주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고
그것을 못하는 자를 바리새인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처럼 사냥하고 죽이는데 있어서
번제와 제사에 집착하고
반대로 참선지자는 바로 그런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너희들이 죽인 자를 도리어 살려내는
오로지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고
오로지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심을 받는
단 한 사람에게만 보내심을 받는 겁니다.
곧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기쁜소식이 되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전혀 하나도 안 기뻐요
의인에게는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죄인만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사 49:4, 개역)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4절에서 신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기쁨이 된다는 거죠
이 말은 신원 곧 보호자 변호사
마치 성령을 보혜사 라고 하듯이
하이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듯이 말이죠
고아에게는 기업이 없는 고아에게 아버지가 졸지에 생기는 곧 기업 물려주는 고엘의 하나님이 되어 기업이 되어주고
과부에게는 남편이 되어주고
나그네에게는 임금없이 나라 없이 떠도는
문서 없는 난민에게 임금이 되어 주겠다 라는
이 신원
이 변호사
이 구원자가 되어 주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원하시는 자가 되어준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나는 죄인 환자가 된다는 거죠
그 범죄자인 죄인 중의 괴수에게 신원자이신 변호사가 되겠다 라는 겁니다.
어디 신원 뿐이겠습니까?
보응이 된다고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누가복음의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낙망하지 말고 이미 받은 줄 믿고 기도하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이미 갚은바 된
억울한 사정이 보응 곧 다 해결이 된 성취로써 기도하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러니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으면
하나님 백성을 자기가 스스로 될려고 하는
선지자의 죄악과 다를바가 없는 거죠
이 유혹을 이긴 자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이거든요
아 참 정확한 표현은 이긴자가 아니라
이미 이긴채로 다 완료된 믿음을 선물 받은 겁니다.
이겼다 라고 해 버리면
자기 숙제인냥 착각하고
선물이라고 하면
내 내부가 아닌
나의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다 말이죠
오히려 그런 나를 도리어 삭제하는 거죠
외부에서 말이죠
나 라는 개인이 없는
삭제 시키는
누락 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
교회 만들기
그것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만들기 이다는 거죠
참으로 감사하게도
세상의 모든 장치들은 우리를 잃어버리게 하는 장치들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게 만들어서
돌아오라 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결국 형 에서 와 vs 동생 야곱 의 차이가 뭡니까
99마리 양 과 vs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의 차이가 뭘까요?
남을 7번 용서하는 자 와 vs 도리어 7에 70번 용서를 남이 아닌 자신이 받아야 할 자 의 차이가 뭘까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죽이셨다가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의로움 곧 살과 피가 발렸냐 안 발렸냐 라는 차이라는 겁니다.
이 차이의 반복 뿐이다는 거죠. 한 세트로써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복중에서 불렀기 때문에
이 야곱을 맏아들 곧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는 맏아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을 탕자로 만들어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를 먼저 준비해 놓으셨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증상물로써
야곱은 죄인 곧 탕자가 되어야 하는
남을 7번 용서하는 자가 아닌
도리어 남이 아닌 자신이 오히려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탕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야곱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봐야 하는
불뱀 물려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으로써
되돌아 와야 하는
주님의 의를 외치는 사명
이 십자가의 피 용서가 옳았다를 노래하는 사명자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나님의 영광인 십자가를 노래하고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고자
남들은 때려 죽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려고 하는 그 속에서
반드시 되돌아 와서
초라한 새성전이신 예수님을 노래하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케 만드시는 겁니다.
이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노래하기 위해서
태중에
태어나기도 전에 복중에 이미 나의 종 이스라엘로 삼았다 말이죠
마치 6개월 먼저 였던가요? 세례요한이
오로지 예수님만 외치는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자 먼저 태어나서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바로 세우고자 개혁을 외치는 것도 아니요
(그렇게 되면 아직도 여전히 이 땅에 미련을 두는 식인 기대치가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바리새인이나 가룟유다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친 것도 아닌
그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서 길바닥을 딱는
먼저 죽는 일 외에는 보여줄 게 없는
그는 흥하고 나는 패 해야 한다 라고
나는 망해야 한다 라고
누락! 퍼뜩 퍼뜩 누락 되는 것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세상의 모든 장치들이 (가족이든 교회든 유대인이든)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핍박 받아 죽도록 하신 장치들이니
조금만 건드리면 안 죽이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거든요
교회가 그렇게 누락 되고 죽어나가는 기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장치들처럼 사냥하고 핍박하고 성도를 죽이는 장치로써 작용한다는 것은
본인들이 죽기 싫어하기에 그렇게 되는 거다 말이죠
그러나 고맙게도 주님께서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시기에
주님 자신의 종으로써 부르셔서
자신의 의로움을 덮으셔서 나타내시는 겁니다.
야곱은 탕자로써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십자가라는 의의 간극(이사야 이오팔, 사 25:8)을 통해서
주님의 신원
변호
고아에게는 아부지가 되어주셔서 기업이 든든한 기업이 되어주시고
남편이 없는 과부에게는 사랑의 남편
즉 이 말은 결국 상대적으로 세상의 장치들은 이 과부 하나 못 죽여서 안달이 나게 만드신다는 거죠
그리고 나그네에게는 섬기는 임금이 졸지에 생기는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냐 말이죠
그야말로 소경인 눈 먼자는 눈을 뜨고
저는 자 앉은뱅이는 걷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단순히 병고침이 아니라 상대적인 이들이 고침을 받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을 염두하시고 고치심의 십자가의 정치입니다.
(마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즉 마귀 보란 듯이 고쳐요
병고침을 넘어서서 신부로까지 삼으심이 이들을 격동케 하시는 방식입니다.
이들 율법 지키는 자들인 바리새인 곧 독사의 자식들이
격동하지 않는다면 진짜 복음이 아니다 말이죠
이들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케 하시는 것이 지혜이거든요
안그러면 지혜가 아니다 말이죠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지혜가 펼쳐지는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곧 저들의 무기
사망권세
음부의 권세
이 힘이라는 무기가 최고이다 라는 그 무기 속에서
과연 예수님을 죽일수 있는지
하나님이 아니라 저들이 펼치는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게 함으로써
그 죽음이 과연 죽음인지?
아니면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인지?
그 죽음 이후에 만난 주님을 외치는 것이 진짜 진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을 펼치는 음부의 세력이 숨어있다가 드러나야 하고
그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이
죽음 뒤에 더 강한 사랑이 진짜 진리이다는 거죠
그 속에 우리를 초대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능 곧 사명은 죽는 것 밖에 없어요
살리는 몫은 주님의 숙제일 뿐이고요
우리의 숙제는 나를 죽였다가 다시 살아날 재간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거룩은 함량 미달일 뿐이니 거짓일 뿐이다 말이죠
차라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다 말이죠
타 죽어야 하는
이유 없이 타 죽어 멸망 당해도 마땅한 자일 뿐이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한 계집을 신부로 삼으실 때
반드시 마귀 보란 듯이 말이죠
그럴때에
세상이 견디질 못하는 이 지혜에 반격하고 격동케 만드심으로써
이들 마귀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부된 교회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내 영광을 위해서 야곱을 태어나기도 전에 부르셨다 라는 겁니다.
이 사명을 이미 다 이룬채로
미래완료로써 태어나기도 전에 심어버렸으니
우리는 당위, 기능 마땅히 아니하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는 당위로써
그 증상으로써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 라는 존재가 먼저 있었던게 아니라
기능이, 당위가, 사명이 먼저 있었기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 신앙이나
말씀실천으로 쌓은 거룩한 의로움은
마귀가 하나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이 야곱을 흉내내는
마치 앞의 글 에스겔의 세 사람 노아 다니엘 욥을 멘토로 삼아서
따라하는 신앙의 모범으로 아무리 삼아도
마귀는 미끼로 덮썩 물지 않더라 말이죠
도리어 네 가지 징벌
칼(전쟁) 저 애굽 마귀와 전쟁하시는게 아니라
이 구원의 뿔이 나와 전쟁을 펼치시고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말이죠
자꾸 베드로랑 싸울려고 전쟁을 하시니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간극을 벌리시는 전쟁이니까 말이죠
전능자 나를 괴롭히는 자 나와 전쟁을 하시는 자 로써 말이죠
마치 다윗과 싸우시는 분만이 진짜 하나님
다윗을 치시는 그리고 다시 싸매어 주시는
다윗을 뚫고 격파 해서 뚫고 통과 하시는 전쟁의 신 여호와 전능자 말이죠.
(삼하 22:3, 개역)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18:2, 개역)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눅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그 다음 기근
무화과 나무 열매 없애버리고
포도 열매 없으며
감람나무 소출 없고
밭에 식물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 소가 없을 지라도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더라 말이죠(부림절)
(합 3:1, 개역)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합 3: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3, 개역)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합 3:4, 개역)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합 3:5, 개역) 『온역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 발밑에서 나오도다』
(합 3:6, 개역)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합 3:7, 개역)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도다』
(합 3:8,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 3:9, 개역)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살을 바로 발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하수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합 3:10, 개역)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합 3:11, 개역)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주의 번쩍이는 창의 광채로 인하여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합 3:12, 개역)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에 돌리셨으며 분을 내사 열국을 밟으셨나이다』
(합 3:13,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
(합 3:14, 개역)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합 3:15, 개역)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단절 속에서 마귀가 이 미끼를 덮썩 물더라 말이죠
얼마나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졌으니 말이죠
그리고 그 다음 사나운 짐승을 풀어서
통행하지 못하도록
바벨론 포로가 잡혀 가도록 하신다 말이죠
예루살렘에 돌아갈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시해 놔라
다시 70년 만에 돌아오도록 하시겠다 라는 약속을
이 죽음(소통이 단절이 된) 속에서 펼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온역, 질병, 전염병을 퍼트려서
누가 진짜 더러운 바이러스인지
손 씻지 않고 먹는 자 인지
아니면 마음을 씻지 못하는 자 인지
주님이 70년 동안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시고
다시 되돌아 오게 하셨을때에
누가 바이러스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정작 세리는 저 더러운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고
반대로 바리새인은 저 더러운 세리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반드시 하나님 뒤에 숨더라 말이죠 노아 다니엘 욥 뒤에 숨듯이
과연 그들이 구원해 줄까요? 십자가를 대신 진 적이 있을까요?
누가 주님의 사명자 입니까
원인을 갖추는 자 에게서는 없습니다.
그냥 결과만 나타나는 자 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탈 바벨론 출 바벨론 해서
오로지 장대 높이 달린 초라한 인자
내 대신 심판 받으신
죄 값을 치르신 그 인자만을 쳐다보기 위해서
돌아오는 사명을
결과로써만
원인 없는 결과로써만 누릴 뿐입니다.
모든 것이 누리는 것이지
지키는 것 하나 없어요
사명도 누리는 것이지
지키는게 아니다 말이죠
이미 원인 없는 결과로
태어나기도 전에 이 사명을 심어버렸으니
사명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지
이스라엘이 사명을 지키고자 이끌고 가는게 아니거든요
오로지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돌아오는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 잃어버림의 경험을 격고서 말이죠 당해서 말이죠
그리고 다시 살아나
의인 야곱으로써 인자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게 아니라
새성전을 짖는게 아니라
죄인 탕자 야곱으로써 돌아와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이 인자를 노래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니 바벨론에게 물렸는데
뱀에게 물렸는데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본다고 낫겠는가 라는
이 보편성이 깔린 가운데서
구체적 보편성인 졸지에 남은자가 원인 없는 생겨서
바벨론 뱀으로부터 물려 죽는게 아니라
우리는 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지 않아서 죽는다 라고
외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남은자가
돌아오는 겁니다.
남은자란 죽은자로써
죽은 뒤에 다시 살려낸
남겨둔 자 이거든요
이 남겨두시지 않았더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다 말이죠
남은자가 아니라 남겨둔 씨를 쳐다보고자 남은자로써 돌아가니까
이 남겨둔 한 씨를 쳐다보는 목격자로써 사명을 아니 감당 할 수밖에 없기에
되돌아가서 남겨둔 한 씨를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태어나기도 전에 사명을 심었으니
그 증상물로써 나타나는
원인 없는 결과물이 바로 야곱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이 나의 종을
나의 영광인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죽이시는
사명을 다 감당케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장막에서 벗어나는 그 날까지
이 주님의 약속의 증상물로써
신나게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를 자랑하도록
신나게 노래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실컷 노래하다가 주님 곁으로 드디어 본향으로 가시면 되는 겁니다.
이 산 소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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