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 떠난다는 기쁜소식, 값없는 속량의 기쁜소식 (사 52, 7-12)

85 떠난다는 기쁜소식, 구속의 기쁜소식 (사 52, 7-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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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사 52:8, 개역)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사 52:9, 개역)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사 52:10, 개역)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사 52:11, 개역)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사 52:12,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사 52:7, 새번역)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사 52:8, 새번역)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 52:9, 새번역)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사 52:10, 새번역)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사 52:11, 새번역) 『너희는 떠나거라, 그 곳에서 떠나 나오너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그 가운데서 나오너라. 주님의 그릇을 운반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사 52:12, 새번역)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너희 앞에 가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너희 뒤를 지켜 주시니, 너희가 나올 때에 황급히 나오지 않아도 되며, 도망 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사 52:1, 현대어) 『[노예 소녀에서 여왕이 될 시온] 시온아, 깨어라! 어서 깨어 일어나 힘을 내어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지극히 화려한 네 예복을 다시 입어라! 할례받지 않고 부정하기만 한 바벨론 군대가 이제부터 다시는 너를 짓밟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 52:4, 현대어)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는 여호와] 나의 주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 맨 처음에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이방인으로 체류하였고 맨 나중에는 앗수르 족속이 와서 이유도 없이 내 백성을 탄압하고 노예로 잡아갔다.』
(사 52:7, 현대어) 『[해방의 희소식]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시온을 향하여 `네 하나님께서 세계의 왕이 되셨다.'고 외치면서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이의 발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 52:13, 현대어) 『[여호와의 종의 노래(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시킨 대로 할 일을 다할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이 그를 높이며 아주 높이 존경할 것이다.』

현대어 번역에 소제목이 참으로 특이해서 한번 올려봤습니다.

(사 52:1, 현대어) 『[노예 소녀에서 여왕이 될 시온] 시온아, 깨어라! 어서 깨어 일어나 힘을 내어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지극히 화려한 네 예복을 다시 입어라! 할례받지 않고 부정하기만 한 바벨론 군대가 이제부터 다시는 너를 짓밟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지혜란
노예 소녀를 여왕으로 만드는 겁니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바로 인물이 말이죠
지혜 라는 인물이 말입니다.

김지혜 박지혜 최지혜 이지혜 말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값없이 용서 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부자청년처럼 나아오는 것처럼

인간의 구원은 자꾸 값을 치를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없는고 하니

값없이 팔렸음이 없는 거죠

이게 바로 인간의 자기 의로움입니다.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겁니다.
복종치 않는다 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이사야 이오팔 25:8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곧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간극 벌리기가 바로 주님의 의로움 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찢을 줄도 모르고 또 다시 싸매어 줄 줄도 몰라요
죽은 자를 무슨 수로 다시 살리며
잃어버린 자를 다시 되찾을 수 있겠냐 말이죠

도리어 율법 지킴으로써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 잃어버린 자를 
앞의 마태복음처럼 더더욱 업신 여기지요
저렇게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가 될까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까봐

더더욱 우상숭배를 
하나님과 탐심을 동시에 섬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원하지 않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 하겠다는 높은 마음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높은 마음
이웃사랑 실천 했다는 율법사의 높은 마음
(상대적인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하셨다 말이죠 낮추시는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부자청년의 높은 마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탕자의 형 맏아들의 높은 마음

이 모든 것이 선악으로 곧 우상숭배로 자리 잡고 있음에 있어서
우리는 이 소자와 같은 낮아진 마음을 늘 무시하고 업신여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겠습니까?

바로 지혜자가 우리를 저 소제목처럼
천한 계집 노예에서 여왕의 자리로

분명 값없이 팔렸는데 (날 때부터 창녀인 무조건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도리어 값없이 도리 속량 구원이 되는 (이유 없니 무조건 구원 시키는)

이 간극을 좁힐 것이 없는 
이것이 놀라운 
말도 안되는 구원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구원은
자기 존재가 생각해낸 구원을 투사 시키다 보니
자기 육체에서 계시가 뿜어져 나오는 그 엉터리 계시이다 보니

이 간극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마귀가 격동하질 않아요

지혜란 세상이 견디질 못해 격동케 하는 구원 곧 사랑을 펼치는 것이
천한 계집이 왕비가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로부터 무시 받는 가장 밑바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왕비가 되었을때에

마귀가 견디질 못하고 격동한다 말이죠

이것이 지혜라는 인물이 펼치는 의로움인데

인간은 그런 의는 하지 못하면서
자기를 구원시키고자 하는 의는 냅따 쌓더라 말이죠
그것이 유대인이라고 사도바울이
자신이 그런 짖의 대가 였다 라고
그게 바로 배설물 똥칠이다 라고 

주님의 의로움에는 복종을 안하더라 라고 하고 있다 말이죠

왜? 주님의 의로움은 임마누엘을 구하라 이거든요
그런데 안 구하겠데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데요
아니 지금까지 실컬 시험해 놓고서는
갑자기?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시험하지 않겠다가 왜 거기서 나와? 갑자기?

여태껏 실컷 막살아 와 놓고서는
갑자기 막 살면 안된다 라고
갑자기 거기서 나오더라 말이죠

임마누엘 곧
인자를 이야기하면
꼭 그렇게 튀어나와요 갑자기

즉 값없이 팔린 줄 모르는 겁니다.
그렇기에
값을 예수님이 아닌 자기가 치르겠다 라고
빚을 갚겠다 라고
그래야 박땡선 목사처럼
쪽팔리지 않는다 라고
그게 성화론이라고

모욕적인 구원 보다
멋들어진 구원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여전히 배불러 터진 겁니다.

이런 모습은 
마귀를 거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시기하는 구원이어야 진짜 구원 아닙니까?
부정이 부정하는 구원이어야 진짜 구원인데

마귀가 시기도 하지 않는
도리어 마귀가 긍정하고 있는 구원 받아 봐야 그거 썩은 동앗줄 아니냐 말이죠

세상이 견디질 못해서 격동하는 구원이어야
그게 진짜 구원이다 말이죠

바로 천한 노예 계집이
그것도 날 때부터 태생 자체가 말이죠
그런 천한 노예가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왕의 아내

지난 주 거룩한 예루살렘 성아 너는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계시록의 흰 옷을 입어라 정결한 옷을 입어라 라고 말이죠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점이
우리가 계시록도 살펴봤잖아요
이사야도 꼭 그래요

이거 뭐 심판이 장난이 아니다 말이죠
이사야 때는 아직 닥치기 직전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 혼자 심판 받은 것 같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말이죠

곧 닥칠 심판을 자기 혼자 다 뒤짚어 쓴냥
혼자 말도 못할 무시 무시한 심판을 증거해요

아무도 안 듣는데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이니 뭐 다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요

자기 혼자 이사야 혼자만 심각해요

그것도 말도 안되는 판국인데

아니 그럼 계속 심판만 외치면 되는데
그래야 일관성이 있어 보이잖아요
아 그런데
이것은 뭐 히스테리 희숙대리도 아니고

왜 이랬다 저랬다 하듯이

이제는 기쁘지 한량 없는 놀랍기 짝이 없는 구원의 기쁜소식을 전하냐 말이죠

앞에는 심판 뒤에는 구원
이 간극이 모순 되게 그대로 있지
좁혀져서 하나로 합쳐지질 않아요
모순 그대로 남겨 두고 있더라 말이죠

계시록도 그래요 살벌하기 짝이 없는데 
그 심판 속에서 도리어
결혼의 하이라이트 최 절정을 보여주고 있더라 말이죠

그야말로 계시록은 겁나는 무시무시한게 아니라
기쁜소식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는 결혼식 딴 다 다 다 ~~~ 딴 다 다 다 ~~~

결혼행진곡 같아요 ~~~~

이사야서도 그렇고
계시록도 그렇고
뒤로 가면 갈수록 다 해요. 최절정의 기쁨으로 도배가 되더라 말이죠

(사 52:12,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12절에 황급히 나오지 말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나오는데
출애굽 때에 이랬다 말이죠

급히 먹어라
허리에 띠 띠고 신발 신고 말이죠
도망치듯이 말이죠

얼마전에 에스겔 서를 통해서
행구 와 깜짝 깜짝 놀라면서 먹어라 라고
출애굽 때를 생각하라 라고 에스겔 선지자가 원맨쇼를 보여줬었다 말이죠

그 정도로 다급하고 급박하고 빠른 구원이다는 거죠
가까운 의로움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바를 해도 너무 오바를 할 정도로
(진리는 과잉된 오바에 있다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이제는 이 탈출이 즐기는 즐거움이 된다고 하는 겁니다.
떠나는 즐거움 말이죠

방탈출 게임을 조마 조마 하게 심장이 쫄깃해 질정도로 제한된 시간안에 벌어지면
즐기는 것 하나 없게 되겠죠

아 그런데 이제는 떠나는 여행처럼 즐길 것 다 즐기면서 떠나는 기쁜소식이고
그 정도로 말도 안되는 구원이다는 거죠
그리고 값없이 속량해 주시는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말이 안되냐

세상이 안돼 라고 마귀가 반칙이야 라고 격동하면서 견디질 못할 정도로
말이 안되는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이들에게 이런 화나는 구원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구원이다는 거죠

아니 창녀에게 아름다운 신부 옷을 정결한 새 옷을 입혀 보세요
얼마나 반발 하겠냐 말이죠
비웃어요

업신여기면서 무시해요
그러나 그렇게 무시 받는다는 것은
그 정도로 아름답고 정결한 거룩한 새 옷이다는 증거이다는 거죠

즉 시셈하지 않으면 가짜인 거죠

앞의 글 에스겔에서
심판을 품은 자가 성도이고
인간의 꿈과 희망을 품은 자는 높은자 곧 사단의 자식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심판을 품은 자로써 십자가의 소식을 전하는 자를
오늘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은

우리에게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닌 주님 혼자 좋은 소식이고
우리에게는 도리어 나쁜소식이다 말이죠

왜? 값없이 팔려야 하니까
이유 없이 무조건 창녀로 태어났어야만 했으니까

그 소식이 심판 받아 이미 죽은 종말을 품은 자가 선지자 인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래요 글쎄

또 여기서

평화를 공포하며

이 평화가 바로 샬롬 아닙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 죽었다 
간밤에 안 죽었구나 라고 말이죠

안녕 이라는 우리나라 말도 언제부터인가 외세의 침략이 하도 많다 보니
밤새 안 죽고 살아남았구나 라는 의미로 섰다 라고 누가 카던데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사법
새해 저주 심판 많이 받으세요 라고
샬롬 이라고

바로 이 평화가 바로
불도져로 이유 없이 무조건 심판을 퍼붓는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에 의해 정죄 받는 겁니다.
이유 없이 찢으심 이다 말이죠

이게 바로 의입니다.
내 속의 죄악을, 우상을, 선악을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으로 죽이시고 심판 하시고

이것이 사실상 청결케 하는 부정함을 제거하는 수치를 물러나게 하심인 거죠

마치 총과 칼을 쳐서 보습으로 곡갱이 낫으로 만드심인 거죠

그러니 평화는 전쟁을 도리어 벌리시는 거죠
그래야 전쟁이 종식이 되니까
전쟁이 마침이 없이 계속 되면 평화가 없잖아요
평화의 소식은 이제 전쟁 없다 라고 선언 하면서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을 벌리심이 바로 평화 이다는 겁니다.

전쟁의 마침이 되게 하는 전쟁

이제 총과 칼을 들 필요가 없는

그러니 선지자는 이 심판을 퍼붓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로써 산을 넘는 거죠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평화 전하며 복된 소식을 외치네
주 다스 리시네 ~~~~~

주님이 직접 이 이스라엘을 다루심을 보여주는 자들인거죠

이스라엘 자기들 손에서 움직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건 시드기야 였고

마리아의 기도
한나의 기도처럼
높은 자 낮추시고 낮은자 높이시는
주님이 직접 다스리는
이 이스라엘

그런 이스라엘 그런 교회
그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 베드로는

값 없이 이유 없이 팔려야 할까요 안 팔려야 할까요?
베드로야 너는 닭 울기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이건 뭐 이유 없어요
이게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에 의해서 무조건 우리는 이유 없이 죄 아래 갇혀야 해요
값 없이 팔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었따가 다시 삼일 만에

요셉이 은 20냥에 팔려 굴에 파 묻혀 죽어야 했듯이 말이죠
이것이 은 30냥에 팔린 예수님의 운명에 참예된 것이다 말이죠

이 심판이 옳았따 라고
이 간극을 오히려 선물 받는 겁니다.

그래야 기쁜소식이지
목이 마르지도 않는데 물을 줘 보세요 당연한 줄 알지요
사막에서 아무리 찾아도 없는 물
그래서 목 말라 죽었는데
그 죽은 자에게 영생수를 주니까 펄떡 일어나더라 말이죠

밤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안 주는 영생수를
이미 벌써 죽은 자
개같은 사마리아 혼혈족인 여자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가서 생명수를 먹이시니까 벌떡 살아나더라 말이죠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사냐 말이죠
어떻게 더러운 창녀가 거룩한 신부가 되냐 말이죠

말도 안된다 말이죠
이 모욕적인 구원을

주님은 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 곧 사랑으로 창조하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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