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 도살장에 끌려가는 잠잠한 양 (사 53, 1-12)

87 도살장에 끌려가는 잠잠한 양 (사 53, 1-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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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 새번역)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 ㉠또는 '우리가 전한 것을'』
(사 53:2, 새번역)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사 53:3, 새번역)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 53:4, 새번역)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사 53:5, 새번역)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사 53:6, 새번역)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사 53:7, 새번역)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 8:17, 새번역)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 ㉥사 53:4』

(눅 22:37,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 ㉬사 53:12』
(요 12:38, 새번역)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 ㉨사 53:1(칠십인역)』
(행 8:32, 새번역)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것이었다.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이, 새끼 양이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것과 같이,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사 53:7; 8』
(롬 10:16, 새번역)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 ㉩또는 '기쁜 소식' ㉪사 53:1(칠십인역)』
(벧전 2:22, 새번역)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사 53:9』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신과 곧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모든 인간의 육체는 마치 자신의 하나님 됨을 매일 매일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자신의 구원되고자 함을
예수님을 이용해서라도 달성하고파서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 라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구원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관에 이런 신 관에

예수님은 전혀 인간이 가질수 없는 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는
그런 심판 받는 하나님을 말이죠

즉 이렇게 되면 상대적인 것이 반드시 한 세트를 이루어지게 되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들고 나오는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 받는 하나님과 같이 된 나 라는 것은 다 우상으로 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고개를 돌리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 안 볼란다 (이름 갑자기 까먹었네 있는데 있는데 궁금하면 5백원 카는 개그맨)

하나님과 같이 된 나에게 걸 맞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와야 하는데

어라 도리어 심판 받는 하나님 으로 왔으니
모든 것이 처음부터 첫 단추가 단 하나도 맞는 것이 없게 되는 겁니다.

단 1도 맞는게 하나 없더라 말이죠

얼마나 짝짝 딱딱 맞게끔 할려고 얼마나 수고했냐 말이죠

다 소용이 없을 정도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안 맞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지금이라도 맞추면 될꺼 아니냐 말이죠
아 그런데 아예 접근을 할수 없을 정도로

마치 코로나 사태로 거리두기를 해야 하듯이
가까이 가면 그 질고 그 질병에 감염 될까봐

마치 호주 여성이 동양인만 보면 코로나 라고 개 패듯이 달려 들어서
주먹을 크게 휘갈겨 얼굴을 날려버리듯이

왜 왔어
나가
다가오지마 지가 다가가서 쭉빵 날려놓고서는
그렇게 발로 차더라 말이죠

니 같은 바이러스는 가라 라꼬 말이죠

단순히 인종 차별의  차원이 아니라
병균 취급해서

병균 소독하듯이
방사기(불을 뿜어내어서 적군을 불태워 죽이는 무기)로 병균을 태우겠다는 다짐으로써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겁니다.

지금 귀히 여기냐 안여기냐 판국이 아니라
불태워 죽이냐 마냐 하는 판국이다 말이죠

손톱의 때 보다 더 못한 취급으로써
병자가 왜 오냐 라는 겁니다.
병자가 ~~~~~~~~~~

도대체 누구 에게 병을 옮길려고 왔냐 ~~~~~~~

한 순간에
병을 고쳐서 죽은자를 살려주는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라

병을 퍼트리는 남을 죽일려는 심판의 하나님 아니 심판 받는 하나님
에라이 너도 하나님 한테 저주 받았으니 우리 한테도 저주 받아라 라고

병균 퍼트리는 자가 뭐를 하겠냐 라고 저주를 마음 푹 놓고서 퍼붓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악하게 보이거든요

선악에 의하면 딱 악 그 자체 이다 말이죠
병균 이니까
질고 이니까

(마 8:17, 새번역)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 ㉥사 53:4』
(사 53:4, 공동)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마 8:17, 공동)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이사 53:4.』
(벧전 2:24, 공동)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 ㉠이사 53:4, 12.』


아니 메시아 라면
구원을 해주는
병을 고쳐주는 의사 이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도로 병을 퍼트리는 환자로 왔다면

누가 귀하디 귀한 의사로 보겠냐 말이죠

환자 인데

그런데 이 마음을 품으래요?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죄인으로 오셔서 낮아지셨다 라고 말이죠

안돼요 안돼
왜 낮아지십니까

내 병을 고칠려면 높으신 분으로 와야 하고
귀한 분으로 와야지

내 보다 더 낮아진
내 보다 더 병든 모습으로 오면
지금 당장 내 병을 누가 고쳐 줍니까

과연 고쳐 줄려고 온 것 맞기는 맞나요?

바로 이겁니다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앞에서 얼마나 사치 스럽고 배불러 터진 소리인지를

욥 처럼
예레미야 처럼

생일을 저주 하고
머리에 잿더미를 뒤집어 씌우고
머리를 쳐 박고 해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밤새도록 벽돌로 끍어대는 그 피부병이
이 질고를 지고 가는 예수님 앞에서는 그야 말로 배불러 터진 사치였다는 겁니다.

이 새 마음 새 영
부드러운 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 속의 선악 곧 죄 죠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 죄와 형제가 언급이 되었는데

이 선악이 이 우상이 바로 질고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실상인 모습으로 인해서 들통이 나는 겁니다.

내가 믿었던 하나님
내가 믿엇던 예수님은 가짜였다고

내가 내 자신을 투사시켜 놓고서는
하나님이다 라고
예수님 이다 라고 평생을 믿을꺼 아니냐 말이죠

그 증거가 바로 유대인 이거든요
유대인 욕할 입잡이 못 될 정도로

저런 자들도 저런 판국인데

우리는 오죽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이 모습이 아니면
우상이 들통이 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이 섬기심을 누가 귀히 여기겠으며

주의 팔이 뉘게
누구에게 나타나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말이죠

이것이 주님의 믿음입니다.
인간의 믿음과 차이나는

주님 자신의 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우상적인 믿음은 다 무너지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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