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4 주로 말미암아 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기이함 (마 21,42-46)
을의 반란,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 (마 21,33-41)
마태복음 2018 2020. 9. 27. 10:55
18-103 을의 반란,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 (마 21,33-41)
(마 21:42-46, 개역)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마 21: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 ㉬시 118:22;23』
(마 21:43,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마 21:44, 새번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마 21:45, 새번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채고,』
(마 21:46, 새번역)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무리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무리가 예수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 118:2, 개역)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시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5, 개역)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마 2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시 118:26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마 21: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 ㉬시 118:22;23』
(마 23:39,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하고 말할 그 때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시 118:26』
(막 1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시 118:25; 26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여기에는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막 12:10, 새번역)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 ㉠시 118:22; 23 ㉡또는 '모퉁이 돌'』
(눅 13:35, 새번역)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시 118:26』
(눅 19:38, 새번역)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 ㉡시 118:26』
(눅 20:17,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 ㉢시 118:22 ㉣또는 '모퉁이 돌'』
(요 12:13, 새번역)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 ㉢'구원하여 주십시오!' 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찬양에서 쓰임 ㉣시 118:25; 26』
(행 4:11, 새번역)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 ㉢시 118:22』
(히 13:6, 새번역)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 / ㉢시 118:6; 7』
(벧전 2:7, 새번역)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 ㉡시 118:22(칠십인역)』
시편 118편을 보니
(시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 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아니 주의 날이지
나의 날이 아니잖아요
마치 일종의 주님의 생일날처럼 주님이 생일날인데
왜 우리가 우리 생일날처럼 기뻐하냐 말이죠
바로 이겁니다
주님은 주님 자기자신만 구원하십니다
그 구원의 날이
어떻게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의 구원의 날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 구원은 성경에 없어요
너희가 버린 예수를 주님께서 구원하시겠다만 나오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의 날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주의 날에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의 생일날
주의 혼인잔치날에 초대를 받았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그 무시무시한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린 천국비유를 함 보세요
잔칫날이 아니라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육의 날이 아니던가요?
(마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종말의 비유이거든요
종말이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인 역사를 단물 빼듯이 확 빼버리니까
끝을 현재로 땅겨야 하는 사고방식이니까
선악의 사고방식에서는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비유 곧 비밀이 되는 겁니다.
정 알고프면 자신의 죽음을 심판당함을 전제로 해서 들어야 듣길까 말까 이다 말이죠
듣기는 들어도 도통 깨달을수가 없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것이 천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 놈의 천국이 비밀이 도리어 빠져 버리니까
지나 개나 다 천국장사를 해서 돈 버는 장사를 해요 글쎄
그 즐거운 천국 잔치 곧 혼인잔치가 종말잔치이거든요
나의 사랑 헵시바야 나의 어여쁜자 쁄라야
그 약속의 땅과 결혼하신 주의 혼인날에
우리는 그 약속의 땅 천국의 땅의 초대를 받아서
그 약속의 땅의 내막을 알게 되는 겁니다.
어떤 내막?
청함을 받은 자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라는 내막
청함 받은자는 뭐고 택함 받은 자는 뭐냐
원래 우리는 창녀 중의 창녀
우상 숭배자 중의 더더더 우상 숭배자인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마치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앉은뱅이와 같은 가망없는 창녀
흑암의 백성인 지옥백성 곧 간음한 자 음란한 자 이거든요
그런 자와 글쎄 결혼을 하겠다 라는 것이 주의 날
주가 구원받으신 날
그러면서 왜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 속에 빠졌다가 다시 살려내심을 당했는데
자기 신부를 건지시고자 지옥으로 뛰어드셨다 말이죠
아가서에서 그 여인 곧 솔로몬 왕과 불가촉천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
노래 중의 노래 이거든요
술람미 여인이 이쁜가요? 아니거든요
머슴아 같아서 손을 돌처럼 딱딱하고
가슴이 ~~ 가슴이 ~~~ 앞 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이다 말이죠 달려라 하니가 말이죠
그런데 솔로몬 왕은 이 여자에게 미쳐버렸다 말이죠
사실은 자신의 사랑이 발려버렸거든요
그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건 역사적으로 따지면 아가서도 율법서에 해당 된다 말이죠
지혜문서들이 다 그래요
그런데 이것이 끝에서 종말에서 즉 예수님이라는 한 인물에게서 새 것(예수님의 죽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 율법 외에 한 의가 실현이 되어버리면
두 인간 솔로몬과 술람미 라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수님이라는 이 관계로써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지들끼리의 사랑노래가 아니였단 겁니다
그것은 그저 그림자 였고
이제 실제적으로 구체화 될 때 종말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역사가 아니라 시 공간이 아니라
그러니 앞의 글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의 의도적으로 주님은 간음한 여자로 만들어요
마치 베드로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로 만들 듯이
이것은 이제 인간이 선악이라는 죄의 소원을 넘어서는 개인 숙제는 이제 안통한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이제 아들의 소원대로
그까짓 선악이 뭔가 라는 내막을 들추어내시고자
마귀의 소원대로 욥을 생명만 빼고서 다 건드리시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나누어 지는 법이 없다 라는 주님 자신의 믿음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저 마귀는 인간만 공격할 줄 알았지
예수님을 공격하면 할수록 자신의 치부만 더 드러나는 멍청한 짖을 하더라 말이죠
괜히 미끼를 덮썩 물었던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마귀는 베드로를 잡아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잖지 않습니까
주님을 세 번 배신 때렸잖습니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선악 선악 법대로 합시다 법
그 법 그 선악법 그게 믄 대수냐 그래 죄 값을 치러주마
아니 주님 말고 베드로 족쳐버립시다
안할란다 내 죽음 이라는 이 새 것, 이것만 구원할란다
아니 그런 반칙 말고요
어허 법 대로 하자메?
아이고 내가 졌습니다
이 선악의 소원
죄의 소원의 내막을 알아야
아들의 소원을 알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음부의 권세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 속에서만 새 길 새 생명을 보게 되니까 말이죠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그 슬픔 속에서 기쁨을
우는 자가 기쁨으로 돌아온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다윗을 이스라엘 왕 다운
양탈무리 사모 말 마따나
하나님이 거룩하니 다윗도 거룩하기 위해서 거룩을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을 바르기 위해서
다윗을 일급 살인자로 만들어야 할까요?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인간 말쫑 만들어야 할까요?
주님의 의로움은 곧 이사야 258
마귀의 소원 선악의 소원 죄의 소원 음란의 소원 음부 곧 지옥의 소원 우상의 소원을 거치지 않고서
아들의 소원으로 바로 가는 법은 없습니다.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사망을 누가 멸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사망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물 위를 세 번 걸을때는 못 봐요 그건 종교마약 먹은 상태라서 말이죠 선악을 먹고 있어서
물에 빠뜨려 죽음 속에 놓일때에
풍랑도 잠잠케 하시는 사망을 멸하시는 주님을 볼 때
비로소 구원 개념이 달라 집니다
구원이란 종교의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떨여져도 천사들이 탁 받쳐주는
이런거 히어로 물에 나오는 만화 내용 아니냐 말이죠
그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거 선악의 소원이구요
반대로 구원이란 수치 중에 상 수치로 만들어서
창녀 중에 창녀
죄인 중에 괴수
다윗이라는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어서
수치 덩어리 중에 수치 덩어리를 만들어서
그 수치를 가려주는
십자가의 피
이 십자가도 사실은 모든 인간은 다 거부하는
특히 교회에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거부하는 그런 무시받는 십자가로써
수치를 가려주는 방식만이 구원이라고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정반대 개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남녀노소 모든 인간이 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악마성이란 악마성은 모조리 다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이 십자가가 옳았다 라고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자작극 인 거죠
네 맞습니다
다윗을 일급 살인 자 중에 살인자로 만드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라는 새 것(예수님의 죽음)의 자작극 이였던 겁니다.
어라 이래도 안 넘어와?
동산 중앙에 궁궐 중앙에 벌거벗은 여인이 목욕하도록
가장 잘 보이도록 했거든요
네 맞아요
다윗을 일급살인자 즉 창녀 중에 창녀로 만드시는 것은
예수님의 새 일입니다
새 언약 이다 말이죠
그래야 선악의 소원의 내막을 볼 것 아니겠냐 말이죠
욥을 사탄과 내기를 해서 욥을 치시는 것은 주님의 자작극 이다는 겁니다.
다윗이나 욥이나 모세 베드로 바울 등등
이들 또한 개인숙제로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 라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열심히 자기 숙제를 내 놓는데 있어서
절대로 손 뗄 인물들일까요?
믿음의 영웅이라고 하면 할수록
남의 눈을 그것도 대중이라는 다수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더더욱 손을 못 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선악의 소원에 다 넘어간 입장에서
손을 절대로 못 떼는 입장에서
이것이 바로 역사 시 공간이라는 행함이거든요
이 행함을 박살내시고자
주님의 믿음이 펼쳐지는데 있어서
정작 예수님의 믿음은 인간의 믿음 아닙니다 인간의 믿음을 개무시 합니다
인간의 신앙 신념은 그냥 죄의 소원 선악의 소원일 뿐인 음란일 뿐이다 말이죠
배 배 배 배신이다 말이죠
그래 그 배신 그것도 배신이가 라고
배신의 바닥을 치시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꼴에 선악의 소원이라꼬
그래 함 해 봐라 말이죠
에 게 게게게 겨우 남을 7번 용서하는 것? 그런 선악의 소원으로
문턱을 넘어 설수나 있겠니?
에 게 게게게게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라고 그래가지고 모든 죽은 자 곧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 심지어 너의 목숨까지 나누어 주어서 저들 죽은 자를 살릴수 있겠니?
어딜 감히 선악의 소원을 들이대냐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인간의 구원을 막으시는 겁니다.
오로지 주님은 아들의 소원만 구원하시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선악의 소원을 들이대면서
내 마당만 밟는다 제발 오지 말라고 해도 기여이 오는 그런 선악의 소원을 들고오는
똥덩어리 냄새를 교회에 풍기러 오는 자들에게
너희는 나에게 보일려고 온다 라고
(사 1:12, 개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런 교회들(음란한 우상숭배자)에게서 오로지 아들의 소원만 구원하시더라 말이죠
마치 교회 속에서 성경을 구출하자
교회 속에서 예수님을 구출하자 라는 식입니다.
드디어 구출했다 라고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세
즐거워 하세 즐거워 하세
내 속에서 예수님을 구출하시는 겁니다.
수많은 구원자들 속에서 구원을 구원하신다 말이죠
그런데 그 주의 날 희년이
주님의 생일이
주님이 구원 받으신 날이
졸지에 우리에게 까지 비추이는 겁니다.
어떤 우리???
정작 의인이요 건강한 자요
불가촉천민이 아닌 자에게는 비추이지 않는
아무것도 내세울 꺼리가 없는 창기 세리 강도가 먼저 천국에 가듯이
창녀 세리에게 말이죠
신기한 빛이 말이죠
주의 날 곧 안식은 평안은 바로 이렇게 성취가 된다는 겁니다.
자 그럼 그 빛이 떳기에
그 빛은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까요?
에스겔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들던가요?
인간의 믿음이 다 튀어나옵니다
주변의 강대국을 배치하니까
인간의 믿음은 곧 행함은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로 일관해요
북이스라엘 왕이든 남유다 왕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더러운 음란함이 다 튀어나옵니다
본색이 나와요
국가 라는 역사와 곧 시간이지요
문화 곧 공간입니다 종교시설들처럼 행한 시간을 담은 항아리처럼 공간
그 역사와 공간이라는 국가를 날려 버리니까
단물 쏙 빼니까
인간의 온갖 실상들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곧 음란 이다는 겁니다.
남들은 안 들키는 것을
주님은 이스라엘 만큼은 들키도록 해서
자신의 피를 바르시겠다 라는 그 옛날에 했던 언약을 성취 하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부정한 여인 다섯이
안 깨끗합니다
절대로 안 깨끗해요
더럽기가 짝이 없는 여인 다섯을 예수님의 족보 속에 넣으신것처럼
이 다섯 여인 덕분에 살았는줄 알아라 이것들아 라고
선배님 선배님 예수님 예수님 딸랑 딸랑 딸랑 아부하는 안영미와 같은 선지자를 막 보내시는 겁니다.
개콘의 분장실의 강선생님에 나오는 안영미가
바로 여자의 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남자에 의해서만 발생되는 여자의 기능이니
여자는 남자를 의존하듯이
졸지에 선지자들은 곧 인자는 저들의 죄악을 뒤짚어 써서
마치 음란한 여자처럼 말이죠
발가벗고 3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거울로써 반사 시키는데
이 비밀은 그것을 자신들의 발가벗은 모습 곧 음란한 모습인줄도 모르고
선지자를 여자를 죽여 버렸다 말이죠
남자를 외치는 여자를
여자의 기능을
그렇게 선지자를 죽였는데
정작 바벨론 포로 속에 들어가게 되니
본인들이 이제 그 선지자의 기능
여자의 기능으로써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는
부정의 부정 곧 종말을 외치게 되니
왜? 새 신랑이 떳기에
그 신랑에 알맞은 새 신부로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가
곧 예수님의 죽음이 말이죠
어라 그런데 안 죽어요
최고의 무기가 살인 아닙니까 죽음 아닙니까
자기가 죽을까 싶어서 즉 살고 싶어서
남을 죽여야 하는 이 선악의 소원의 바닥을 치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살겠다 구원 받겠다 라는 자체가 선악의 소원인 죄의 소원
우상의 소원 음란의 소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 이라는 새 것을 보니
어라 괜히 무거운 짐을 낑낑 메고 있었넹
왜 여자의 기능을 무시하고
억지로 남자의 기능을 할려고
행함 곧 역사와 공간을 꽉꽉 채워서 오늘밤 내 영혼아 편히 쉬자 라고
창고 공간 역사 피땀눈물을 괜히 흘렸어야 했냐 말이죠
여자는 남자만 외치도록 되어 있는데
여자의 기능이 없으니
독자적인 존재가 되니까
누구 누구 라는 인물을 외칠수가 없어요
타인은 모두다 지옥이고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으로써
모두다 하나 하나 이겨야 할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제자들이 심심하면 누가 크냐 라는 싸움이 늘 벌어졌듯이 말이죠
누가 작냐 라는 싸움은 아무도 안 벌려요
누가 막사느냐를 지켰느냐 라고 시비거는 어떤 멍청한 장로가 있었는데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져버렸다 말이죠
자꾸 행함을 들이대요
역사와 공간을 차지하겠다 라고
공간에서 나가라 라고 말이죠
아이고 더러버라 그래 니 해라
뭐 그게 대단한 거라꼬 ㅋㅋㅋㅋㅋ
썩는 것
냄새나는 똥 내 꼬야 손대지마 너는 특히 손 대지마 라고
그래 그래 니 했뿌라 ㅋㅋㅋㅋ
딴데 가서도 여전히 그 짓을 해요
양탈무리 영국버전이 부산에도 있어서
어떻게서든 손 잡아서
다시 공간을 차지하겠다고
결국 돈이 들거든요
돈 들면 손 뗍니다 ㅋㅋㅋㅋ
사도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밥도 잠도 안 자겠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슬그머니 흐지부지가 됩니다
누군가는 행함 곧 희생을 해야 하거든요
서로 안 할려고 해요
돈을 누가 내고? 소는 누가 키우고 말이죠
밥 안 먹는다고 돈 안드는게 아니라
그 밥이 썩으면 또 쓰레기 봉투를 사거나
처리 비용을 내어야 해요 글쎄
잠 안 자면 또 각성제를 먹던가 커피를 사서 먹던가
나중에 다시 잠 다시 잘 오게 할려면 수면제 먹던가
이 모든 것에 돈이 든다는 겁니다.
그거 뛰어넘어서는 선악의 소원을 넘어서보던가 말이죠
그 음란한 짓을 딴 사람한테 화 풀이 하듯이 지금도 해요 글쎄
인간의 믿음은 살인의지입니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음란의 소원인 우상숭배이다 말이죠
결국 인간은 예수님을 믿은적 없어요
자기를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와서 이용했지
오로지 인간은 자기만 섬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직접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숙제를 펼치셔서 건져 구원해 내시는 자는
즉 청함을 받은자가 아닌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사탄의 깊은 것의 내막을 선악의 소원 내막을 알려주셔서
그것을 거쳐서
아들의 소원
하나님의 깊은 것
은혜의 왕 노릇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남 용서 7번이 아닌)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 하니
즉 모세의 온유는 가장 그 무리 속에서 가장 비천한 여자
구스 여인
소위 가장 불가촉천민인
창녀 중의 창녀
마 ~~~~~~ 리 ~~~~~~~~~~ 아 ~~~~~~~~~~~~~~~
향유 마리아 ~~~~~~
이 여인을 택하셔서
자신의 피를 발랐다 라고
그것을 어찌 알고
그 종말의 믿음을 어찌 알고
주님을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이라로 붕대 칭칭 감듯이
미리 시체에 향유를 붓듯이
예수님을 미리 장사 치르더라 말이죠
즉 새 것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다른 새 것은 없거든요
그저 서로 누가 크냐 라는 싸움만 하는 제자들이
화를 내면서 그 아까운 비싼 향유를 왜 바닥에 허비하냐
적어도 천만원 넘을텐데
그거 가난한 자 한테 왜 주지 않느냐?
특히 가룟유다는 더더욱 화를 내어야만 한다 말이죠
감추어야 하니까 말이죠
자 이렇듯 계속해서 이런 충돌의 사건이 반복이 복음서에서 반복이 됩니다
부정의 부정인 종말의 사건이니까 말이죠
시간은 안 흐릅니다
사건만 반복 될 뿐
가인과 아벨의 그 사건이 지금도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이 벌어지듯이
사건만이 변이가 되어서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주로 말미암아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자작극 만이 구원이다 라는 거죠
자신이 심판 주 이시고 자신이 심판 당하시고
자신이 버림받고 자신이 되찾는
이 하나님 자신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구원 이라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의 곧 창조 원리 이다는 겁니다.
이 창조의 원리를 이스라엘 만큼만은 담고자 했는데
정작 이스라엘 당사자들이 이 창조의 비밀을 외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냅따 발로 차버리고, 다 내팽겨 버리고
우상을 쫒았지만
그런다고 주님이 포기 하시느냐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시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건축자의 버린돌이 머릿돌 되게 하시는 것이
주로 말미암았다 라면
건축자는 버리기 싫어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주체가 아니라 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주체는 주님이시거든요
그럼 건축자는 왜 버릴까요
당연히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자란 건축물을 짖는 자 아닙니까
그러니 그 건축물에 맞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니 당연히 버릴 수밖에 없겠죠
자 이렇게 우리는 인자를 그렇게 죽였습니다
비록 우리의 어두운 눈이 인자를 죽였지만
그래도 용서는 얻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이 없다 말이죠
성령 훼방죄 라는 죄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종말의 영을 거부한다는 자체가
이미 선악의 소원을 못 넘어서고 담당하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마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눅 12:10, 개역)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하니까 말이죠
지난주 마태복음 악한농부 비유에서
포도원을 주인이 세로 줬다 말이죠
그 포도원은 바로 약속의 땅이다 말이죠
그럼 그 약속의 땅의 속성에 맞는 소출
열매를 농부는 월세 내듯이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데
약속의 땅의 열매가 뭐냐 말이죠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뭡니까
뭐뭐뭐 아니요 뭐뭐 이다
번제와 제사가 아니요
인애와 자비 이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는 뭐고
인애와 자비는 뭐며
이것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무슨 상관이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번제와 제사만을 목적으로 하는 건축자들이
인애와 자비를 드리는 예수님을 버린돌 취급했다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자신들이 짖는 건축물이랑 안 맞거든요
약속의 땅의 속성과 안 맞는 열매요 소출이라면 버려야 하듯이
건축자들도 건축물의 속성과 안 맞는다 싶어서 버렸다 말이죠
결국 건물 짖는 건물이 서로 달랐던 겁니다
건축물을 건축자들은 아름답고 흠모할 모양으로 짖고픈 그런 건물이다 말이죠
마치 남을 7번 용서하고
금식주간에 금식을 하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그런 속성의 건물
그런데 정작 버린돌이 짖는 건물은 그 반대입니다
도리어 7에 70버 용서 받아야 하고
금식주간에 세리와 죄인을 살리고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을 거꾸로 하고 있고
전 재산 아니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흑망의 백성 곧 지옥백성 그리고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자
앉은뱅이와 같은 죽은 자를 살리고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그런 건물의 속성을 지닌 건축물을 짖는 버린돌이다 라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짖는 건물은 곧 사람의 손으로 짖는
행함 곧 역사와 문화를 담은 건물이고
마치 국가를 이스라엘 국가를 그런 식으로 말이죠
이것이 번제와 제사라는 속성을 담은 건물이고
버린돌이 짖는 건물은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짖기에
버려도 다시 떼굴 떼굴 굴러오고
또 버려도 다시 떼굴 떼굴 굴러오고
또 또 버려도 다시 떼굴 떼굴 굴러와서
삼일 만이 머릿돌이 되는 참성전을 짖더라 말이죠
저들이 짖는 성전과는 속성 자체가 다르더라 말이죠
인애와 자비로 짖는 성전 말이죠
그러니 행함으로 짖는 성전을 도리어
이 버린돌은 돌 위에 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깨어 부수는 겁니다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이것은 국가체제이기도 하고
성전은 당연하고 오늘날 교회들 말이죠
또 인간의 몸이라는 신체성이기도 합니다
이 세가지 다 인간의 손이라는 행함이 담겨져 있다 말이죠
번제와 제사 라는 역사와 문화(종교) 말이죠
그 시 공간을 버린돌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서뜨려서
삼일 만에 다시 짖겠다 라는 겁니다.
아니 46년 동안 짖는 성전을? 무슨 수로 3일 만에?
아니 왜 46년 이나 걸리는 겁니까
아무리 현대가 아닌 과거일지라도 너무 오래 아니냐 말이죠
그 정도로 오래 정성을 드렸다 라는 것 보다
헤롯 총독이 유대인을 다스리고자 정치적인 속임수가 담겨져 있다 말이죠
밀당을 해야 한다 말이죠
유대인의 입장에서도 성전만 있으면 덤비지 않고 고분 고분 따라 줄게 라고 하고 말이죠
양 두 쪽이 성전을 가지고서 장난질이나 하는 세월이 46년 동안이나 걸린다 말이죠
그것도 여전히 미완료 상태로 계속해서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행함입니다
죄의 소원 행함의 소원에 저 놈의 헤롯의 장난질이 끼여 있다 말이죠
설사 없다손 치더라도 유대인의 손에 지어진 성전이 제대로 지어질까요?
완공요? 설사 완공 했다 칩시다
주님이 또 저런 헤롯의 장난질처럼
과거 에스겔 때나 이사야 때처럼
성전을 불태워 버리면 또 다시 지어야 할 테니
도대체 언제 완공이 되겠냐 말이죠
아무튼 완공은 둘째 치고 이런 인간의 행함의 속성에 의해
건축자들은 성전을 짖는데 있어서
아무리 아무리 지어도 그 건축물의 속성과 안 맞는다고 판단되는 쓸모없는 버린돌은
어쩔수 없이 버려야 한다 말이죠
참선지자들이 그랬어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이스라엘 국가를 지켜야 하고 계속 유지 보수하고
계속 이어 나갈려고 하는데 있어서
정작 참 선지자들은 도움은커녕
이 나라 쫄딱 망해야 한다 라고 나오니
참선지자를 버린돌 취급하듯이 죽여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또 죽이면 또 등장하고
또 또 죽이면 또 또 등장하고
도대체 다른 이방나라는 안 그런데
이 놈의 이스라엘 국가 라는 약속의 나라는 왜 이런 신기한 일이 벌어지느냐 라는 겁니다.
버림당한 돌이 머릿돌이 되다니?
이스라엘 뿐만 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대표성이나
앞으로 모든 나라가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이방인이 마치 기생라합처럼
자기 나라 버리고
자기 민족 버리고
자기 신을 버리고
토지를 미리 냅따 왕 대통령에게 묻지도 않고
여호와께 팔아버리듯이 항복 하고 나아오고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어머니의 국가를 쫄딱 망하게 하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라고
야야 내가 이렇게 버림받은 돌 되었는데
이 쫄딱 망한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리 하나
어무이 하나님이 머릿돌 하나님입니다
왜? 아니 왜 그렇게 보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부수니까 말이죠
어머니를 괴롭히는 하나님이
미움과 버리셔서 손을 탈탈 털게 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족보 속에 집어 넣는 하나님 이십니다 라고 말이죠
정작 인자의 나라를 며느리는 보는데
이스라엘 당사자들은 못 보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약속의 땅의 속성은
그 약속에 걸맞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는
7에 70번 용서 라는 속성을 담고자
그 반대인 남을 7번 용서하는 그 멋들어진 구원을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자 부서뜨리는 버린돌이다는 겁니다.
버린돌로만 성전을 짖는다는 거죠
귀히 여지기 않은 버린돌로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담겨져 있다 말이죠
그 의가 뭡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삼일 만에 다시 사는 믿음이라는 속성 말이죠
이 믿음에 반대 되는 행함은 무조건 다 깨어지고 부서진다는 겁니다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롬 9:33, 새번역)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사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벧전 2:8, 새번역)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 ㉢사 8:14』
(사 8:14, 개역)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사 8:15, 개역)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사 28:16, 개역)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5, 개역)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 28:16, 개역)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7, 개역)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추를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사 28:18, 개역)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아무리 너희가 이스라엘이라는 속성
이 특이한 약속의 속성을 아무리 거짓으로 더렵히고
무가치하게 여겨 버려도
아무리 버려본들
이 이스라엘의 속성을 약속의 속성을 반드시 다 이루겠다
아무리 거짓으로 도배를 하고
거짓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도 말이다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이 부딪히는 돌에 거치는 반석에 걸려 넘어진다는 겁니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게 말이죠
아니 누가 건축물을 짖는데 있어서
멋들어진 돌로 지어야 멋들어진 건축물이 되지
누가 부딪히는 돌로
거치는 반석으로 성전을 짖냐 말이죠
사람들이 짖는 성전 오늘날 교회를
누가 말이죠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 합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것 가지고 와요
십의 일조를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번제와 제사를 가지고 옵니다
절대로 저 세리처럼 삥 뜯는 삶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집을 이런 기도로 채웁니다 이런 기도로 성전을 지어요
얼마나 다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냐 말이죠
아 그런데 세리는 머리도 못 들고
저 성전 구석에 찌글어져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어떤 목사 말 마따나 자꾸 죄 죄 죄 고만 캐라
아니 멋들어진 목회 하고 싶은데
멋들어진 교회 만들고 싶은데
자꾸 죄 죄 죄를 카니 지겹지도 않냐 라고 말이죠
아무것도 가져올게 없어서
그저 용서만을 긍휼만을 바라는 기도를 합니다
못 난 놈
얼마나 못 낫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올 것이 없냐 말이죠
아 그런데 이것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속성에 딱 맞다 라고
예수님
버림받은 돌이 외치더라 말이죠
에라이 예수 너도 버림받아라 라고
괜히 미끼를 덮석 물어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46년 동안 온갖 아부를 하면서 조심 조심 정성스럽게 보수를 하고
온갖 마음에도 없는 알랑방구를 떨어가면서 비위를 맞춰주고
심하다 싶으면 때론 저항운동 촛불시위도 하고
그렇게 온갖 밀당을 당겨가면서 짖고 있는 성전인데
인간의 손으로 짖는 성전은 바로 이렇게 뇌가 조작해 낸 스토리를 담거든요
이야기 꺼리
인간은 이런 이야기 꺼리가 없으면 죽어요
역사와 공간을 날려 버리면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다 말이죠
그래서 온갖 간증꺼리로 꽉꽉 채우잖아요
십의 일조 냈숩당 이레에 두 번 금식 바쳤숩당
이런 스토리텔링을 말이죠
이 스토리 텔링이 돈이 되거든요 오락이 돈이 되요
이런 선악의 소원을 무슨 수로 넘어서냐 말이죠
무슨 수로 담당하냐 말이죠
이렇게 아무리 거짓으로 도배를 해도
다 깨뜨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스토리텔링이 전혀 없으니
버려야 한다 말이죠
그래서 버렸는데
어라 그 버린돌이 머릿돌이 되네 그려????
도대체 무슨 스토리텔링이 있을까?
어라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내 세울 꺼리가 없는
이 창녀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가는
그런 천국만을 건설하는 버린돌이다 라는 겁니다.
히스토리 그의 스토리 라고 말만 하지 말고(저에게 전도를 했던 음악선생님이 이것을 무지 강조했는데 속으셨던 거죠)
내세울 꺼리를 내어보라 말이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용서하시다니
이것이 바로 약속의 속성
천국의 속성
버림받은 예수님의 속성 이다는 겁니다.
그 예수 안에는
참선지자들이 죽음이 담겨져 있거든요
그런데 다시 살아서 예수 안에서 살아서
천국의 속성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버림 받았는데 어떻게 머릿돌이 되냐 말이죠
참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어떻게 참성전의 건축물로 구성이 되냐 말이죠
인간의 손으로 짖는 국가에서는 전혀 있을 수가 없는
기이한 일이다 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괴기 스럽냐 말이죠
괴물처럼 말이죠
기이하다 해석불가
비밀이다 라는 겁니다.
이 비밀성을 이스라엘이 아무리 발로 차 버리고
거짓으로 도배해도
주님은 반드시 다 이루셨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바로 이런 십자가의 피 속성을 담은 교회로써
인간의 행함을 모두다 거부하고
그저 아무것도 내세울꺼리가 없는
창녀 세리로써 천국에 가는 믿음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행함을 깨뜨려 가면서 말이죠.
교회를 부서뜨리고 깨뜨려 가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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