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8 두 계명,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마 22,34-40)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부활과 산 자의 하나님 (마 22,23-33)
마태복음 2018 2020. 10. 25. 09:32
18-107 부활과 산 자의 하나님 (마 22,23-33)

(마태복음 22:34-40, 신약성경 38 쪽,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4,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마 22:35, 새번역)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율법 교사'가 없음』
(마 22:36, 새번역)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마 22:37, 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 ㉣신 6:5』
(마 22:38, 새번역)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마 22:39, 새번역)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 ㉤레 19:18』
(마 22:40, 새번역)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강령이 무슨 뜻인가 해서 검색해 보니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 라고 나옵니다.

(마 22:40, 공동)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 22:40, 쉬운)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 22:40, 킹흠정)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하시니라.』
(마 22:40, 한글킹)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고 하시더라』
(마 22:40, 현대인)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 22:40, 현대어) 『모든 다른 계명과 예언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모든 가지는 뿌리 줄기에서 나왔다 라는 거죠
핵심이다 
두 계명에서 나왔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아따 골자 도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네요

말이나 일의 요점이나 핵심. 골갱이. 순화어는 `요점', `핵심', `골갱이'.
여러말 말고 핵심만 말해라 라고 하듯이 말이죠

그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그럼 뭡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우리가 아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그 정반대죠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주사 화목제물이 되게 했다 라는 겁니다

솔로몬 재판에서 이게 무슨 지혜냐
이게 무슨 사랑이냐 라고 해야
그것이 진짜 지혜요
진짜 사랑이다는 겁니다.

제 삼자의 시선에서는 지혜나 사랑이 나오지 않고 해석도 못합니다

당사자에서만 나오는 것이 사랑이요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로운게 아니라
어머니가 지혜로왔던 겁니다

솔로몬은 죽음 속에 놓이지 않았거든요
어머니 또한 죽음 속에 놓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오로지 아기에게만 해당됩니다

다들 남 이야기 하듯 하지 죽음 속에 놓여진 당사자 입장이 아닙니다
아기가 무슨 자기 입장을 변호하겠습니까?
아기 조차도 자기 구원 하나 챙길수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 뿐입니다
그 죽음에 뛰어듬 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음 속에 뛰어듭니다

사랑은 이 버림 속에서만 나타납니다.

주님은 바로 이 버림 속에서만 나타나는 사랑만을 원하십니다
곧 인애와 자비 말이죠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앞의 글 모압의 멸망에서

이스라엘이 특이한 것 하나 없이 일반이다 라고 모압이 판단 합니다

그럼 그 일반은 더더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됩니다
다른 특별함의 해석이 따로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저런 특이함은 특이함이 아니다 라고 보고 말이죠
어떻게 흠모할 모양이 없고 아름다운 모양이 없는데
그를 구원자로 보겠냐 말이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허물이 죄악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특이성이다 말이죠
이 특이성을 미끼로 덮썩 무는 겁니다.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여

아무리 봐도
여호와의 이름이 이 이스라엘과 동행할 그 어떤 원인
조건
그럴만한 특이성이 아무리 봐도 없어요

없으니까 다른 이방 민족은 다른 특이성을 갖추는 겁니다
그것이 그들의 우상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그저 이 이름 밖에 없어요
그저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이요
흠모할 모양도 없는 이름이요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연말이 다 되어가는 한 달 남게 아니 11월의 시작이니 두달 남게 되었는데
연예인들이 상을 탈 때 하나님에게 감사하다고 하잖아요

즉 이 말은 나는 복 받을, 상 받을 만해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니까 말이죠

어린아이도 다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데

근데 허물 많은 가끔 어떤 연예인이 예수님에게 감사하다 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약간 분위기 깨는 이름이 에수 라는 이름이 되더라 말이죠

하나님과 예수님이 믄 차이가 있길래?
하나님은 보편화가 되지만
예수님은 아직 그렇지 않거든요
서서히 그렇게 되어가겠지만
아직도 거슬리는 이름이다 말이죠
분위기 쏴 한 얼음땡이 되는
분위기 못 파악하는 사람 취급 받는 거죠
어린아이야 뭐 다들 넘어가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아직도 그 이름 들먹이면 쏴 해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주간에만 십자가 십자가 캐야지
1년 내내 십자가 카면 헌금 안 들어온다 라고
목사가 적극적으로 말리더라 말이죠

죄 죄 죄 고만 캐라 라꼬

그럼 이들은 뭡니까
네 맞아요
번제와 제사 곧 선악
곧 편안함
안주함에 빠진 겁니다
우상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허물에 이방나라들은 특별함도 아닌데 왜 미끼를 문 듯이 달려들어야만 할까요?
이방인과의 차이성 때문입니다

앞의 글 에스겔만 인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의 운명 속에 놓여지듯이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의 운명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한 몸 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마치 예수님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다 라고

찔림 이라는 얼룩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상함은 이라는 그 상처를 보고

그 허물을 보고 이방나라가 다 달려들어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네 맞아요 이스라엘의 멸망은(최근 에스겔서에서 다룬) 자기 지 혼자만의 멸망이 아닙니다
한 몸 곧 하나님이 심판주이자 하나님이 심판 당하시는
그 같은 운명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가 덮썩 미끼를 물꺼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허물을 보고
약점을 보고 못 넘어가도록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저놈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면 내가 이방인 내가 높아질꺼다 라고 나오는
선악의 법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이 된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다 말이죠
율법이 없는 저 이미 망한 이방나라가 아닌
율법이 있어서 망하지 않는 이스라엘로 삼으심은

율법 자체가 우리를 자꾸 죄인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은 죄인을 부르러 온 거죠
구원자는 사랑이 있거든요
죄인에게는 없어야 하거든요

또 그 죄인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 조차도 없음이 들통난 그 죄인을
그 죄를 미끼 물 듯이 마귀는 덮썩 물어야 하고요

괜히 허물을 보는게 아니다 말이죠

베드로를 마귀가 덮썩 물어야 하듯이 말이죠
그래야 주의 이름이 동행 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왜냐하면 베드로는 기존의 하나님으로 인해 안주 했습니다
기존의 이름으로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는 자꾸 떠나자 라고 합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라요
바로 그 떠나고자 하는 장소가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주의 이름이 이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갈데아 우르로 떠나듯이
예상이 되는 곳으로 떠나면 그것은 동행이 아닌 겁니다

죽어야만 새 몸으로 이동하듯이
잃어버림을 통해서 되찾는
이전 것은 지나가야지만 새 것이 되는
새 이름
새 신부가 되는
새신랑이 마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즉 이말은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머물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사랑은 우리를 자꾸 동행하시고
동행 한다는 말은
자꾸 안주 할려는 몸을 죽이시고
자꾸 이동하고 자꾸 이 세상을 통과
뚫고서 통과 해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이동을 위해 동원이 되는 것이 바로 마귀들이요 이방나라요 
주변의 우상숭배자 이다는 겁니다

우와 맞어 여기는 머물곳이 아니구나 라고 말이죠

횟감이 되는 물고기를 탱크에 담으면
오랫동안 차량이동으로 인해 폐사가 되어 죽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래서 천적 한 마리를 집어 넣으면
무브 무브 안 움직이면 죽거든요
(그러나 바로 이런 메기효과는 활어차의 횟감 물고기가 싱싱해 지는게 아니라
싱싱해 보일 뿐이다 라는 착시 효과 이다는 거죠
오히려 실제로 스트레스로 폐사율이 4배나 높아진다고
즉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로 자기가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런 편파사랑이 싫다 라는 거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사랑을 받아달라 인데
안 받아주니까 주를 삼키는 겁니다.)

인간은 교회가 있어버리면 그 곳에 안주해 버립니다
거기서 복도 나오고 먹을 것도 나오고
뭐 하나 불편함이 없는
졸지에 시설 종합복합시설건물이 되어버렸어요
심지어 풀장 까지도 만들 판국이다 말이죠
오락시설은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요양시설에
어린아이 유치원 레크레이션 강좌에 온갖 문화 강좌시설

그런 시설들이 그냥 나옵니까 돈내라 헌금내라 라고 닥달을 내어야지요
코로나 덕분에 있는 것 마저도 다 팔아야만 할 정도로 경영 위기에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그 동안 헛짓 한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했으니 말이죠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지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기에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자꾸 떠나게 자꾸 이동케 만드시는 겁니다
믿음이 우리는 무브 무브 자꾸 이동 시키는 겁니다
여기도 안주하면 안되는 곳이야
그래 저기도 안주하면 안되는 곳이야 떠나야 해 라고 통과 통과
패쓰 패쓰
자꾸 패쓰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패쓰 하라고 그 지역을 잠깐 머무는 곳이지
정착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이제 공간이 아닌 정신, 마음의 차원에서)
뭘 해도 죄인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 인간 뿐만 아니라
그 인간으로 인해서
주변이 오염이 되고 주변환경이 저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땅이나 주변인물이나 본인 자체 즉 모든 환경이 저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나 자체가 멸망 덩어리 이다는 겁니다
에덴 동산에서 왜 추방 당해야 하는지
천국에서 왜 쫓겨나야 하는지를 말이죠

에스겔에서 창녀의 딸로 태어난 태생부터 자체가 버리움 받아야 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네 맞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뭘 해도 범죄자 이구나

그러니 이런 지적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만 있다 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고아 과부 나그네 이다는 겁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없다 라는 지적이다는 거죠
즉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있는 징계요 매 이다는 겁니다
사생자에게는 이런 아버지의 매가 없다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은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며
에덴 동산에서 마땅히 쫓겨나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주변인에게 외쳐야 할 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히려 주변인에게 미끼로 작용이 됩니다
너 때문에 환경이 좋지 않구나 너만 없으면 환경이 좋아질텐데 라고 달려들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 되는 거죠

거봐 너의 아버지도 너에게 매를 대 잖아 라고
허물을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뭘 해도 죄인이다 라는 율법이 있음이
도리어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들을 화나게 하는
저들의 우상 곧 선악의 법을 무서운 날카로운 숨은 발톱을 들추어내는 빌미로 작용케 된다는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없다면 그렇게 미움 당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차이가 없고 이질적이지 않으니까 말이죠
모압의 주장처럼 이스라엘에 뭐 특별하노 아무것도 없네
특별하기는커녕 우리와 다를바 없는 일반이네? 라고 말이죠

매 맞는 것이 특이함 인줄 몰랐던 거죠
그들의 특별남은 그저 복 받고 잘살고 모든 전쟁에서 이기는 신의 전쟁인데
도리어 이스라엘이 쫄딱 망하더라 말이죠
과거의 애굽을 쓰러뜨린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디 갔냐 말이죠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로 바알과 아세라를 무너뜨린
그 여호와가 도대체 어디 갔냐 말이죠
그 멋들어진 여호와의 구원이 도대체 어디로 갔냐 말이죠

질투의 사랑을 못 본 겁니다 엘리야 조차도 말이죠

오히려 이 매 앞에서, 이 징계받음 앞에서 어딜 감히 자기 사랑을 들고오냐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를 속이냐? 너의 특심인 열심이 너를 속이더냐?

제가 매를 맞겠습니다, 차라리 날 죽이세요
어딜 속일려고

안돼
맏이 댈꼬와
너는 안돼
맏이 만을 때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 댈꼬 와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낳은 후사 댈꼬와
부활 아니면 안돼

부활 할수 없는 것들을 어딜 감히 들고오냐 말이죠

한번은 동물의 농장이였던가? 오래전에 봤던 내용인데
고슴도치 여러마리를 키우고 있던데
한 놈이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약간 차이나고 이질적인 다른 모습이였다고 합니다
마치 백인 속에 흑인 한 사람처럼 색깔이나 생김새나 뭔가가 이질적인 아무튼 그랬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새끼들이 그 고슴도치의 털을 쪼아대면서 뽑아 버리다 보니
민머리 독수리 머리처럼 대머리처럼 될정도로 공격을 하도 받다 보니
비실 비실 병을 앓고 털이 빠진 자리에 상처가 나 있고
또 거기를 다시 계속 쪼아대면서 공격을 하다 보니
너무 너무 불쌍하게 되어서 주인이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다른무리들과 격리 시켜서 키우더라 말이죠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것이 있으면 동물들도 이렇게 공격을 하는 판국인데
인간이면 오죽 하겠습니까

아 그런데 이스라엘은 대 놓고 그런 이질적인 것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 중앙에 세우는 식입니다

미움 받으라 라는 거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이것은 아무리 율법이라도 싫은 겁니다
다들 싫어버린 바 되어서 고개를 돌립니다
유대인에게서 이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듯이
우리에게도 싫은 거입니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무도 이 여호와 이름이라는 특별함을 귀히 여기는 자 없어요
기생 라합이 40년간 이 이름으로 인해 간담이 녹았다 라는 것을 오히려 비웃어요
뭐 니가 하나님 이라고?
비웃어요
그 비웃음을 허물을
웃음으로 바꾸시는 이동 곧 동행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다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는데
동행이래요 글쎄

자기 쪽에서의 동행은 아예 없애버리는 동행이 바로 진짜 질투의 하나님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이 상황을 이 이해 불가와 불가능성을 어떻게 대처를 하는고 하니
바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았다 라는 증거물을 제시함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에서 저주에서 벗어났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하는 간증 말고 그 뒤로부터 살이 붙는 간증으로 인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식처럼 말이죠

욥의 세 친구가 바로 이런 식이였죠
뭔가 법을 어긴게 있으니까 뭔가 잘 못을 한 게 있으니까 저주 받았으니
어서 회개 하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엘로힘 이라는 가짜 하나님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여호와 란 전쟁의 하나님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바로 선악법의 하나님 인거죠

바로 그런 하나님을 치는 것이 바로 여호와 곧 전쟁의 신이다는 겁니다
뭔가와 싸우겠다 라는 것은
전쟁하겠다 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바로 여기서 인간의 생각과 갈라지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준비했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 사랑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전쟁, 죽음 보다 강한 사랑 곧 질투의 의미가 없다 말이죠
사랑 받았으니까 사랑하겠다 라고 나오니까 말이죠
바로 이것이 질투가 없는 사랑이기에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탬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바로 여호와 이름 전쟁 이다는 겁니다
그 가짜 사랑을 깨뜨리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원초적으로 나는 무조건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범죄자 이다 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 곧 질투의 사랑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어서
머리를 쳐 박고 잿더미를 뿌리고 생일을 저주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생일 저주
태어난 날을 저주

아니 생일 축하 합니다 라고
가장 축복 받는 날이 사실은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 라는 것을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고백한다 말이죠
뭘 해도 죄인이다 범죄자 이다 라고 말이죠

우리의 태생 자체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것을 율법이 알려주는 겁니다

마땅히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한 것만 알려주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 곧
내 속에 죄 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
곧 죽음만이 가득함을 율법이 알려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대신 땜빵을 했는고 하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땜빵했다 말이죠

베드로가 그랬구요
베드로는 잡는 마귀가 그것을 요구해요

그 율법 지켜서 뭐하게요
정작 예수님은 죽는걸요

내가 구원 받으면 뭐해요
바로 옆에 노아 다니엘 욥이 있으면 뭐해요
내 자식이 구원을 못 받는데

여기서 자식은 이스마엘과 같은 육의 자식이 아니라
이삭 이라는 영의 자식이다 말이죠
네 맞아요 후사 는 곧 예수님 뿐입니다

내가 백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본들 무슨 소용이 있냐
그내 너 자신은 구원 받는다 치자
너 자식은?

결국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그 마음 바탕은
정직한 영이 없는 그 바탕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율법은 못 지키도록 준 율법을 지켰다 라고 우기는데 있어서
우리는 지독스럽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겠다는 그 심뽀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소환 하는 겁니다

율법은 전남편으로써 도저히 못 지키도록 했다 말이죠
그러니 뭘 해도 죄인이요
뭘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만들어요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할수 조차도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케 만드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는 그 핑계가 그 속임수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있어서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주셨다 라는

이 질투의 사랑을 주님은 피력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즉 오로지 주님의 사랑으로만 베드로는 신부로 만들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신부가 되는 방식은 없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왜? 그것은 질투가 없거든요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시기하는 사랑
죽음을 시기해서 나오는 질투해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죽음 속으로 몰아가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마저도 깨뜨리면서 이루겠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냐
너 자신이냐? 그 놈이 니 놈이다 라고

율법은 오로지 내 자신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내가 율법을 지켜서 나를 자꾸 소환해서 나를 만드니까 말이죠

바로 이런 배경을 깐 율법사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 아래에서
율법을 언급 합니다

율법은 사랑이니까
큰 계명이 뭐냐 라고 묻고
그런 사랑의 하나님에 예수 너는 어떻게 이해를 하는지를 보려는 겁니다

(마 22:35, 개역)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개역)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선생님이여 라고 온갖 예의를 갖추는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이 봐라 내가 얼마나 너에게 예의를 갖추고 이야기 하지 않느냐
어떻게 해서든 예수 너에게 사랑의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구나 라고 말이죠

지난 주 사두개인이 예수야 봐라 부활이 있게 되며는
얼마나 심각해 지는지 몰라
너도 이렇게 더러운 모욕적인 구원 모욕적인 부활을 받고 싶니
더러우면 안되잖아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여기에 이미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의미가 깔린 상태로써
부활 교리를 끼어넣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 곧 모세 오경 조차도 취사선택 해야 할 판국이니 말이죠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질투 시기하시는 겁니다

배불러 터졌구나
죽음 속에서 생명을 봐야지만
질투의 사랑을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율법 지키는 방식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자기가 자기를 구원시키고자
율법을 지키는 방식을 취한 거다 말이죠

바로 그것을 질투 하시는 겁니다

질투는 우상에게는 없어요

인간이 믿고 있는 지금 이 율법사처럼 말이죠
인간이 믿는 사랑의 하나님 에서는 질투가 없어요
질투가 없다 라는 것은 움직임이 없다 라는 겁니다
우상, 정착, 안주, 정체 이다는 겁니다.

무브 무브 무브

이동 이동 이동

액션이 없다 라는 말은 행함이 없다 라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사장이
성전에서 무엇을 합니까

죄를 이동 시켜 거룩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 제사장 아니냐 말이죠

그럼 예수님은 안식의 주인으로써
손마른 자의 더러움을 안식일에 거룩으로 이동 시켜서
나음을 입게 한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질투의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죄를 더러움을 손마른 병을 질투하셨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라고
율법을 따지는 겁니다

율법이 바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니까
그렇게 하는데

아니다 도리어 율법을 어긴거다 라고 나오더라 말이죠

마태복음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에 그 예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하셨다 말이죠

(눅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아 여기 본문에 오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나오네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
하나님을 믿는 이유
교회 다니는 이유
예수님을 믿는 이유
십자가를 믿는 이유
뭘 해도 막살지 않겠다 라는 이유

결국 자기를 옳게 보일려고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함이 깔려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질투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저런 사랑들을 속임수로 규정하신다는 겁니다

(눅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개역)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개역)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거봐 거봐

내 죽을게 너 살아라 라는 이스라엘의 위상
너 없잖아

도리어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 시체
더러움을 안 만질려고 피해가잖아
제사장도 그렇구 레위인도 그렇구

거봐 거봐
너희들이 오히려 더럽다 라는 개같은 이방인이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구나

누가 우상 숭배자 인가?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 인가?
대제사장 레위인 인가?

질투의 사랑은 이것을 깨뜨리러 왔단다 내가 왔단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은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과 다르다 라는 겁니다
질투

곧 누가 자기자신을 미워해서 율법 지키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을 주신 겁니다
뭘 해도 범죄자요 죄인임을 드러내는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를 미워하는 자 없어요
오히려 더더욱 사랑 스럽지
머리부터 발끝까지다 사랑스러워
누가? 율법 지킨 자기가

그럼 반대로 율법 안 지키는 자는 ?  무지 무지 밉도록 보이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을 미워 죽는 겁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핵심 뿌리는
바로 이 질투의 사랑으로 인해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는 질투 밖에 없어요

얼마나 죄가 미웠으면 말이죠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어두움을 그렇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실로암 소경을 깨작 깨작 가지고 신학 놀이 하는 바리새인은
죄론 구원론으로 사람 가지고 장난 쳐요
고칠 생각은 아예 없고
너는 날 때부터 율법을 지킬수 없는 놈이니
율법 못 지키는 너는 미움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래? 그 놈이 바로 니 놈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율법 이다 말이죠

뭐 율법 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꼬?
율법이 도리어 그 놈이 니 놈이다 라고 고발 한다 말이죠

이 고발을 당하라고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을때에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자가 구원자
곧 질투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내가 너를 사랑해서 주시는 십자가의 피 용서만으로만 구원시키겠다 라는 겁니다

너가 너를 사랑해서 십자가를 믿는 것 말고
너가 너를 사랑하는 것 보다 예수님이 나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그 질투의 사랑으로만
너는 오히려 안주할려는 우상적인 사랑이고
내가 너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사랑만이
진짜 동앗줄이지
너는 썩은 동앗줄이란다 라고

베드로를 탈탈탈 털어서 더 이상 니 믿음 조차도 아예 없도록 빈털터리로 만들어서 구원시키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안 그러면 또 마귀에게 놀아나요 놀아나

그러니 믿음 포기 하라 말이죠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기도로 주시는 믿음이 따로 있으니까 말이죠
그 믿음은 비로소 질투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마귀 보란 듯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질투의 사랑이 담겨진 고백을 비로소 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 코 앞에서
얄밉게 말이죠

우리는 마귀가 보지도 않는 가운데서 대따 믿음 쌓아본들
모래 위에 성 쌓기 밖에 안되요

죽음 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죽음이 없는 가운데서의 사랑이 아니라 말이죠

죽음이 있는 가운데서 죽음 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없는 가운데서의 교회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빠글 빠글 들끓는 가운데서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세우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짍투의 사랑 밖에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나오지 못해요
음부의 권세는커녕
배고픔 조차도 못 이깁니다

자 그럼 앞의 글 모압의 멸망을 다룬 에스겔서에서의 여호와 이름은 바로 이런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를 죽이시는 겁니다
원래 죽어 마땅했구요
이스라엘도 심판 하십니다
공중분해 됩니다

그것을 마귀들 보란 듯이
이방 나라 보란 듯이 말이죠
덮썩 미끼를 무는 겁니다

뭐 웃어? 아하 아하 하며 꼬시다 라고 웃어
그래 내 이름을 담는 이스라엘 조차도 이런 판국인데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여호와의 이름을 담는 이스라엘도 이런 판국인데
과연 암몬 너는
모압 너는
내 아름을 아는지 보자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예외가 없어요

여자를 아내로 만들고
아내를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말은 바로 질투의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전남편 율법은 책임을 안 집니다 우리를 버려요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말이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인간은 무조건 에덴동산에서 추방 되어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자기 사랑에 빠진 자가 하나님과 같이 되었으니
뭔들 못 하겠습니까?
천국에 마저도 뛰어들꺼 아니겠냐 말이죠

그러니 그 당연한 추방 속에서

그 버림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질투의 사랑을
여호와 이름을
이 특별함을 특이성을 만나게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을 모르면
이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모르면
여전히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 라는 선악을 내세울테니
그런 정착된 우상은
죽은 하나님은 

죽이시는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여서 매일 매일 살리시는 질투의 사랑이니 말이죠

두 계명은 그러라꼬 있는 겁니다
강령 곧 뿌리요 핵심은
바로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문둥병자를 고쳐서 왜 제사장에게 보이라 라고 하셨겠냐 말이죠
아무도 이 죽음의 병을 시기하는 자가 없고
자기 사랑으로 율법 지키기 로만 땜빵하며 때울려는
정착된 안일한 안주할려는 우상을 선악을 까발릴려고
문둥병자 자체를 암행어사 출두요 라고 제사장에게
변사또 에게 보이라 라고 하는 겁니다.

저들의 체제에 도전하시는 거죠
왜? 질투의 사랑이거든요

대충 대충 심상히 고치는 성전 중심의 제도를 깨뜨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인해 주님을 삼킵니다
성전이란 저들의 신체입니다
모든 인간의 신체가 바로 신전
신이 거하는 처소에 집약이 되어 있습니다
성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건드리는 거니까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 본인이 그 하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건드려 깨뜨려야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이 십자가의 사랑만
이 질투의 사랑만

아무도 죽음을 보고도
죄를 보고도

책임져 주지 않는 선악의 세상
우상의 세상에서
책임지시겠다 라고

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사랑으로 동서남북으로 도배를 하는
은혜가 왕노릇하는 세상을 만드시겠다 라고

이 죽음을 시기 질투 하면서 쳐들어 오는 질투의 사랑을
십자가를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내 사랑 조차도 깨뜨리시면서
오로지 주시는 사랑만 받으라 라고 말이죠

율법의 중심은 바로 이런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저분이 너를 책임지시고자 너를 제대로 심판 하시는 분이시다 라고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남을 사랑하는 것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거든요

율법을 완성도 못하고 깨작 깨작 겨우 몇 개 지켜서
자기를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을 펼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다가오는 자들을 다 물리치시고
예수님 본인이 직접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고자
직접 다가가시는
그 질투의 사랑만이
율법의 완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질투의 사랑이 없이
율법사처럼 이 큰 계명 두 계명 율법 내가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자는
오히려 율법이라는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거봐 율법 지켰다 라는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지로 표출이 되니 말이죠
율법 차라리 안 지켰으면 죽일려고 달려들지 않을텐데
이 놈의 배신자가 꼭 남들 다 예수 하는데
혼자 아니요 우리는 배신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배신을 하니

너희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죽이더라 말이죠

(마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자 이렇게 우리는 원수로써 들통나지 않으면
그 원수에게 베푸신 사랑을 못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즉 율법을 잘 지키는 자를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인해 나는 뭘 해도 원수요 죄인이요 추방되어야 할 병자
환자임을 아는 자에게

자기 사랑을 곧 질투의 사랑을
그 병을 그 죽음을 그 죄를 질투하시는 사랑을 확증 하셨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롬 5:8, 개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왜 예수님은 의인으로 오시지 않고 죄인으로 오셔야만 했습니까?

네 맞아요 율법 잘 지키는 자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질투의 사랑이 죄인으로 오심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시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다른 율법 완성은 없어요

내 죽을께 니 살아라 라는 것은

율법 외에 한 의의 방식입니다

의란

이 잃어버림 과 다시 되찾음의 
앞뒤가 모순된 간극이요 공백입니다

이 의에 합한 새이스라엘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자입니다

그 죽이심으로 인해
내가 나를 사랑해서 율법 지키는
특히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거 단 한 놈도 지키는 자 본적이 없어요
아무리 수준 높은 성화론자들도

근처에 가는 꼴을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자기 사랑 밖에 모르는
내가 율법 지켰다 라는 그 율법 지킨 자기 사랑에 미쳐있는 중독자들
종교게임 종교 마약에 쩔어있는 자들 뿐이지

단 한 놈도 본적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잃어버리게 하시는 겁니다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시고자
죽이시는 겁니다

죽여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랑을
질투의 사랑을 확증 하셨다 말이죠

너 예수 나사로 사랑 했다메? 라고
대신 울음꾼 역할을 하면서 비용 아끼는 그 사랑은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상부상조 두레박 정신의 이웃사랑 실천으로
울음꾼 노릇을 하는 이웃으로써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우기지만
그거 사랑 아닙니다
교회에서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낯 간지러운 그런 레크레이션도 사랑 아닙니다
질투가 없고
시기도 없거든요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해요

차라리 나는 죽은 자를 살릴줄 모르는 가짜입니다 라고 나와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그러니 율법사처럼 나 율법 지켰어요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다 지켰어요
큰 계명 두 계명 다 지켰어요 라고 나올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보니
큰 계명 두 계명을 보니
저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요
이스라엘에서 추방 당해야 할 문둥병자 환자입니다
제발 이 죄인을 고쳐주소서 라고

뭐 지켰다는 둥
내가 사랑했다는 둥

그런 것이
죄인에게는 아예 안나오거든요

의인들만 나와요
십의 일조 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바리새인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둥 부자청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 맏아들

그러나 죄인은
도리어 질투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내 죄를 제발 해결해 달라고

탕자가 내세울 꺼리가 있던가요?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 밖에 없어요

성전 미말에서 고개도 못들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세리가
내세울 꺼리가 뭐가 있던가요?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뭘해도 죄 밖에 지은 것 밖에 없다고 합니다

큰 소리로 고래 고래 고함치는 두 소경이 뭘 내세울 꺼리가 있습니까
그저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발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의인에게는
건강한 자에게는
본다고 하는 자에게는
나올수 없는 기도를 합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에게 부르짖거든요
질투의 사랑이니까 말이죠

누구에게 부르짖겠냐 말이죠
바리새인? 사랑이 있나요? 없잖아요
성화론자? 사랑 없어요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오락기 게임 소리 밖에 없어요

질투의 사랑이 있으면
모든 입술을 잠잠케 하십니다

허걱! 헉! 으악~~~~~~~ 말도 안됩니다
이런 죄인을 용서하시다니요 ~~~~~~~~

(합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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