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02 너희를 견고(흔들릴 필요가 없는 미쁘신)케 하는 신령한 은사 (롬 1, 8-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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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2 너희를 견고(흔들릴 필요가 없는 미쁘신)케 하는 신령한 은사 (롬 1, 8-12)


복음(예수님)에 사로잡힌 자 사도바울 (롬 1, 1- 7)
로마서 2022 2022. 1. 8. 11:13
22-001 복음(종말;원인 없는 결과)에 사로잡힌 자 사도바울(피 발린 문제아 탕자) (롬 1, 1- 7)

〈로마서 1, 8-12 개역한글, 신약성경 239쪽, 찬송가 172장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178장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찬송가 172장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1. 빈들에 마른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2.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3. 철따라 우로를 내려 초목이 무성하니 
   갈급한 내 심령 위에 성령을 부으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4. 참 되신 사랑의 언약 어길 수 있사오랴 
   오늘에 흡족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아멘


〈찬송가 178장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1.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나 오늘도 언제든지 변챦고 보호해 주시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2.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3.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여 
   구속의 은혜를 내리 시사 오늘도 구원해 줍소서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4. 주님의 깊으신 은혜만을 세상에 널리 전하리라 
   하늘의 능력과 권세로써 오늘도 입혀 주옵소서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아멘


〈로마서 1, 8-12 개역한글, 신약성경 239쪽〉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8, 현대어) [감사기도]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어디를 가나 여러분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얼마나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롬 1:9, 현대어) 내가 여러분을 위해 늘 기도드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아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나누어 주시기를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롬 1:10, 현대어)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을 만날 기회가 와서 순조로운 여행을 할 수 있기를 열심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롬 1:11, 현대어) 내가 여러분을 이처럼 애타게 방문하고 싶어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 여러분의 교회가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믿음을 북돋아 드리는 한편 나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힘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간에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롬 1:12, 현대어) (11절과 같음)


쇠건땡 씨가 자신은 영적인 사람이라서 
사람의 모양이나 생김새 따위를 보는 하수들이 보는 식으로 사람을 보는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 아우라 등으로 판단한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곧 성령의 은사입니까? 
고맙게도 가장 반대되는 의미를 이야기 해 준 겁니다
바로 이 차이로써 신령한 은사가 나타나니까 말이죠

그렇게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때 그때 상황에서 나오는 빛나는 모습을 본다는 사람이
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갈까요?

그런데 이런 무당과 같은 사고방식과 같은 시선으로써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성화론자들입니다 일명 개혁주의자들 말이죠

자칭 빛의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사고방식은 음녀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짐승이라는 국가의 등 위에 올라타서
자신이 제사장 나라임을 주장하고파 하는

그래서 정권 잡았을때에 마음에 안 드는 놈 다 짤라버리겠다 라고 말이죠
목사 놈들이 다 이런 식인데 장로들은 더 해요 더해
또한 그 장로들 쪼무래기들이 권력을 잡아서 휘두른다 말이죠

아니 교회는 바로 그런 놈들에게서 쫓겨나야 하는데 도리어 한 패거리로 살고 있으니
교회에 무슨 놈의 권력이 있어서 그러는지
알고보니 돈이 있는 겁니다
명예욕이 있어요 명예욕

대접 받을려면 그렇게 해야 하거든요

자 이렇듯이
자기 숙제로 교회를 교회 답게 한다는 자체가
자기 관리로 이루겠다 라는
자기 의를 세우는 겁니다

여기에 주님의 은사는 이런 사람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도리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그럼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인데

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오신
쓴 잔을 마시는 분이시다 라는 겁니다

이 분만이 왕이요 이 왕 만이 드디어 새 일을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참 성전을 완성하실 분이시다 라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리 성전을 지어본들 언제 불탈지 모르는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라는 자기의 의로움을 세우는 것이
오늘 겨우 넘어갔다손 치더라도 내일 언제 불타 사라질지 모르는
전전긍긍의 사람의 손으로 성전짖기가 된다 라는 겁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라 말이죠 
이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로 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오는
하나님의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십자가라는 사건에서만 나오거든요
이 믿음이 너희를 견고케
즉 흔들릴 필요가 없게 한다 라고 사도바울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도바울이 누굽니까?

사람의 일에 학을 땐 달인 중의 달인
곧 죄인 중의 괴수 였다 말이죠

그랬던 열심의 최정점을 찍은 양반도 결국은 흔들렸습니다

마귀에게?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피 흘리심 앞에

드디어 흔들려서 무릎 꿇어 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도바울을 흔들 자가 없게 되어버린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믿음도 없는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니까

믿음을 자기 관수 할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믿음을 관수 할려는 자들이 성화론자 아닙니까
그것이 사도바울의 옛적 모습이였다 말이죠

이제 흔들릴 필요가 없는
자기 것이 없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기에

사도바울은 이 흔들릴 필요가 없는 성령의 은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믿음이라고
신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든든한 것이 덮쳐버렸다 라는 거죠
그렇게 흔들리지 않도록 말이죠 이것이 성령의 은사이다는 겁니다

죽음까지도 이기는 사랑이 덮쳐버리면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겁니다

이 든든한 믿음이라는 선물로 말이죠
이 든든함을 미쁘심 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미쁘심입니다
든든합니다

나는 비록 흔들려도 미쁘신 성령의 은사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인간들의 성령론과 은사론은 자기숙제인냥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은사가 주체가 되어서
책임을 지겠다 라고 나서시는 겁니다

내가 사명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사명이 나를 다루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은 깜짝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가 아니 튀어나오고는 못 배길 정도로 감사가 사도바울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사한게 아니라 감사가 사도바울을 휘감아버렸으니까 말이죠

결과가 미리 덮쳐버렸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도를 해서 복음을 믿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는데 아니였다 말이죠)

거꾸로 로마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이 발생했다 라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아니 누가 가서 증거했죠?
네 맞습니다 복음 스스로가 발통이 달린냥 이미 증거했기에
그 증상물이 나타났다 라는 소식을 듣고서

이제 그 복음이 벌린 사태를 목격하고자 사도바울이 동원이 된다 라는 것을
사도바울 본인이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는 그야말로 흔들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인데
졸지에 자기 것이 없이 사는 자가
복음에 의해서 발생되었다는 것에
사도바울은 감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하면서 끝부분에
왜 여기 빈무덩에 있느냐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셨으니 어서 떠나라 라고 천사들이 알려줬잖아요

네 맞아요 복음을 당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복음을 당하는 겁니다

복음을 당하다 
물론 표현이 좀 안 맞습니다만 요즘은 이런 식의 표현을 젊은 친구들이 하더라 말이죠
즉 복음에 스며들다처럼 말이죠

아니 도대체 주님 사도바울에게 또 로마에 있는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로마서 본문을 접하고 있는 자에게
도대체 무슨 짖을 하신 겁니까

이렇게 복음을 기쁜소식을 당하게 스며들게 하신 겁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사도바울이 당하듯이
이제 이 증상물을 확인하는 기쁨을 또 누려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것이 없이는 하루라도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면서 산다 말이죠

하나 라도 잃어버리면 안되거든요

손해가 막심하고 또 그것을 매구어 넣는 일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잔칫집이 괜히 잔칫집입니까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 라는 소리 들으면
1년 내내 입방아에 시달릴텐데
이왕 차리는 것 제대로 잘 차릴려면 그야말로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하고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되겠끔 해여 한다 말이죠

아니 세상에 이런 판국에
말도 안되게
자기 것이 없이, 나의 것이 없이 사는 자가 발생했다
즉 오로지 그리스도의 것으로써 사는 자가 발생한
거꾸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이
자기를 잃어버려도 상관 없는 자가
그리스도의 것으로써 발생했다 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말이 안되냐 말이죠

우리가 이사야와 에스겔을 통해서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것의 사람으로써
여호와의 것으로써의 이스라엘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얼마나 이 이스라엘에게 집착하시느냐 말이죠
자신의 집이거든요
주님은 인간에게 관심 없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집으로써의 성전인 이스라엘에게 집착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다 없애버려서라도 새이스라엘을 건설하시더라 말이죠

육의 시선
사람의 일로서의 인간들의 성전짖기 곧 자기관리를
왕들의 시체처럼 만들어 버리시고

동시에 주님의 시선으로써 불타지 않는 성전 짖기에 집착하시는 겁니다
네 맞아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짖기에 주님은 집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 속에
불 속에
음부의 권세 곧 지옥의 불 속에서
불타지 않는 성전을 짖기에 주님은 자기 목숨 걸어버렸다 말이죠

그 증상물로써 로마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 라는 소식이
그야말로 말도 안됩니다 라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아니 자기 것으로 살지 않는 자가 생겨났다구???????

인간은 누구나 자기 것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이다 말이죠
그래서 인생은 다 허구가 되었고
우상이 되어 버렸다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만이 제대로 유일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즉 은사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 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끊어졌는가 에 대해서 생각하라 라고 권고 자체가 은사가 펼치니까 말이죠
왜 끊어졌는지 생각 자체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육의 소욕이니까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고, 46년 동안 성전 짖기를 하고 그래도 미완료인 상태로 말이죠)

그런 자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짐으로써 이 끊어진 관계가
독생자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연결이 되었듯이
성령의 은사로써 이 관계가 형성이 되면
이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단번에 말이죠

아니 그리스도의 나라가 단 하루만에 1초만에 세워진다니
이스라엘은 수천년을 해도 우상 하나 끊어낼수가 없었는데 말이죠

사람은 이스라엘처럼 평생을 살아도 나의 것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내인생은 나의것
내인생은 나의것
나는 모든것 책임질수 있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나의 것
예수님도 나의 것
성령님도 나의 것

그러나 우리가 이사야와 에스겔을 하면서
우상과 하나님을 썩어버렸으니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의 것은 끝까지 나의 것으로써 주장하더라 말이죠
이스라엘이 그랬거든요 모든 인간의 대표가 이런 식이면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괜히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대표성으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써 까발리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불타지 않는 성전 짖기에 집착하십니다
전부를 걸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만드시는 겁니다
세 번 부인했다 라고 주님 포기 하지 않습니다

이 주님의 포기 하지 않으심을 베드로는 봐 버렸습니다
그것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이런 사랑을 확정해 버려서 나는 이런 고백을 안하고는 못 배기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많이 탕감받아버렸으니 많이 사랑할 수 밖에요

그 창녀 마리아였던가요?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그때는 베드로가 그 여인을 부러워 했거든요
베드로 너 이 여인처럼 발에 뽀뽀하고

(눅 7:45, 새번역)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뭐 약한 여자이니까 주님이 봐 주셨겠지 했지만

베드로 또한 약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 여인의 고백이 그렇게 부러웠던 그 고백이
비로소 자신의 고백으로써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많이 탕감 받았기에 제가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 약하게 만드심이 바로 성령의 은사요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다 말이죠

마침 누가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썻다가 지웠는데 관리자 모드에서는 남아있거든요
얼마나 고민이 되면 말이죠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요약해 봅니다

제발 좀 죄 안짖는 나 이고 싶습니다 라는 내용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죄 안짖는 나]를 자기 것으로 또 소유하게 됩니다
그거 언제 또 무너질지 몰라요

거기에 동원이 되는 죄 안 짖도록 만드시는 하나님도 자기 것이 되고
성령도
은사도
영광도
권세도 다 자기 것으로써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죄를 짖게 만드심으로써 상한심령이 되게 하시는 약하게 만드시는 성령의 은사이다 말이죠

제발 너를 더 이상 너가 쳐다볼 필요가 없도록 말이죠

자기가 바라는 자기의 멋들어진 이미지 그런 상(모습)이 그려져 있기에
그 기대치에 안 맞으니까 실망하고 절망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누가 끝까지 자기 것으로 지니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래서 관리 할려고 자기관리 할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말이죠
어릴적부터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면 또 몰라

이미 수 많은 세월을 허송세월로 다 보낸 뒤에
늦게 나마 출발할려고 하니
돈도 없고
환경도 열악하고

아니 그게 성령의 은사로써 하신 것이다니깐요
자기 것이 없도록 말이죠

니 숙제 땍지 손떼 라고 말이죠

코로나로 지금 벌써 몇 년째 입니까
이제 몇 달 후면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 물가상승으로 인해서
대공황 사태가 벌어진다 말이죠

무슨 수로 버티냐 말이죠

아니 처음부터 없었어요
없었는데 지금까지 입혀주시고 먹여주시고 재워주셨다 말이죠

언제든지 멈추어도 우리는 감지덕지 할 뿐이다 말이죠
버틴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좀비상태일 뿐인데

왜 그런 것에 연연하냐 말이죠

과연 이런 시대에 복음을 믿는 자 곧 자기 것이 없는 자가 발생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기쁜소식이냐 말이죠

그러니 늘 죄 짖는 나로 만드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 라니깐요

아따 안 믿네 그려 ㅋㅋㅋㅋ

자기 것이 단 하나도 없도록 탈탈탈 털어버리는
나를 약하게 만드시고자 죄 짖도록 하시는 겁니다
세 번 부인토록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버림받는 아들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안 그러면 자꾸 자기 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연결 해요

절대로 예수님 세 번 부인 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따라 가겠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장 지지겠습니다 라는
자기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와 연결시켜 버리면

이거는 버림받는 아들과 연결 시킬려는 성령의 은사를 거부하는 식이다 말이죠

꺽으신 뼈와 연결 시킬려면은
회개 눈물 금식 기도 이 4종 세트가 소용이 없도록 만들어버리시는 겁니다

자기 것이니까 말이죠
나의 것으로 끝까지 가겠다 라는 심뽀 말이죠

내 회개 때려 죽어도 안 받으십니다

도리어 내가 늘 무시하는 매일 매일 돈만 생겼다 하면 먹고싶은
그 닭

치킨 맥주 그 치맥의 그 닭

그 닭이 대신 울어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완벽한 회개 
완벽한 금식 
완벽한 눈물
완벽한 기도 백날해도 안 받아 주십니다

반드시 내가 무시해도 너무 너무 무시해서 쳐다도 안 보던
늘 잡아먹는 그 닭이 대신 울어주는 이 닭이

비로소 주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연결해 주는
성령의 은사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네 맞아요 그럼 코로나도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손 땍지 하면서 손 떼라 라는 식으로써 작용한다면
성령의 은사로써 주어지는 겁니다

나의 것을 탈탈탈 털어버리니까 말이죠

그리스도의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직접 숙제를 펼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들 다운 아들로 완성케 하기 위함이다 말이죠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시는데 있어서 하나님 본인이 심판을 날리시고 그 심판을 본인이 당하시는 것처럼 말이죠
정녕 죽으리라를 이루시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드니까 이 정녕 죽으리라를 이룰 수가 없어요
이미 칼이 날라갔는데 인간이 그 칼이 죽어본들 칼은 여전히 멈추지 않으니까 말이죠
이런 칼이 여전히 날라가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멈추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럼 약속이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 말 마따나 이런 까탈스러운 하나님을 왜 믿냐 말이죠
속담도 여호와의 말씀은 더디 이루어진다 아니 안 이루어진다 라고 할 정도이니
오히려 오홀라 사마리아 언니가 음란 짖을 하는 것 보다
오홀리바 예루살렘 동생이 언니의 우상숭배를 욕하면서
지는 지 예루살렘은 더더더 음란 짖으로써
사마리아 구역을 삥둘러가고 금식하고 손 씻고 먹고 이런 것이
더 더 더 음란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는 것에 반발하는 더 우상숭배에 빠지고
성전에 금을 바쳐서 맹세하는 그 우상숭배의 버릇을 그대로 펼치고 있으니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쫓아내시면서
강도의 소굴로 만드시는 것을 이해 할 턱이 있겠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더더더 거룩한 행함을 펼치고 있는데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 라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해석을 하니 말이죠

마치 본 것이 없이 예언하는 거짓선지자가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것처럼 말이죠

말이 자기 마음대로이지
대중을 사로잡을려며는 그 공동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을 예언해야 하거든요

네 맞아요 평강이다 평강이다를 예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에스겔은 그 반대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처럼
너희들 끊어졌도다 끊어졌도다를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모든 행함은 바로 이런 아버지의 은사와 연관 되었다 말이죠
바로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 새 영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 전의 것은 왜 끊어져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이스라엘이어야 하는데
끝났도다 끝났도다 라고 외치기는커녕
도리어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치고 있으니

새 마음을 구하지를 않는 겁니다

끊어졋다 라고 여기지 않으니까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울어야 하는 상한심령 끊어진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뭐 나의 마음은 여전히 괜찮다 라고 여기고 있다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는데 자꾸 있다 라고 우기고 있으니
끊어진 상태가 아니다 라고 우기니

십의 일조 냈구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구요 저 세리처럼 음란하고 삥뜯고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눅 18:11, 공동)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눅 18:11, 쉬운) 바리새파 사람이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 즉 사기꾼, 죄인,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눅 18:11, 한글킹)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시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현대인)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기꾼도 아니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는 사람도 아니며 또 이 세무원과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눅 18:11, 현대어)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눅 18:11, 가톨릭)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니 이런 자기 것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도리어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고
주의 목전에서 항상 범죄 했다 라고 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그때만 세 번 부인 한 겁니까?

늘 부인했어요

아니 다윗이 고때만 간음죄 살인죄 인구조사죄를 저질렀습니까?
그 이전에도 늘 그랬다 말이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 말이죠

이것을 모르니까 욥은 아니 당신 시키는대로 해서 나는 늘 옳았는데
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주십니까?
왜 날 배신 합니까
당신 시키는대로 했는데
이것은 결국은 불타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불타지 않는 성전이 될려면
음부의 권세가 이지기 못하는 교회가 될려면

주님은 반드시 마귀만을 상대하시지 나를 상대하지 않는다 라를 것을 알게 하실려고
마귀한테 잡혀 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마귀 이길 생각 말고

죄를 이길 생각 말고

왜 나는 죄를 못 이깁니까 라고 자꾸 죄를 이기는 그런 나를 꿈꾸지 말고
그런 나의 것을 내가 소유하고파 하는데
그것이 마귀가 노리는 것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그런 사람의 일을 생각하냐 말이죠
하나님의 일을 왜 생각지 않냐 말이죠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끊어진 나로 만들어서

성전의 참 기능을 펼치시고자
은밀한 처소죠
아껴둔 내(하나님의) 이름 거룩한 주의 이름이지요
기념 이름이지요
이 기능이 펼쳐지도록
마귀에게 잡혀 오라는 겁니다
즉 죄를 가지고 오라 라는 겁니다

자꾸 만민이 기도하는 집 곧 하나님의 집에
죄는 안 가지고 올려고

십의 일조 한 멋들어진 나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것을 성전에 가지고 온 나

그런 나의 것으로 가득찬 나를

주님은 어딜 냄새나는 똥내 냅따 치우라꼬
귀를 막고
코를 막고
너희들의 수 많은 제물 아이고 이렇게나 피를 많이 흘리셨었었었었어요
치워라 제발 
너희들의 기도 안 들을린다 라고 고개를 돌리신다 말이죠

도리어 주님 저 마귀를 못 이깁니다 라고
죄를 가지고 올때에

비로소 인자의 죽음에
새 마음에
새 성전에 딱 맞는

죄인을 부르러 오심이다 말이죠
의인을 부르어 온게 아니라 ~~~~~~

누가 죄인 될려고 교회에 옵니까
기여이 교회에 와서도 자기 것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죄인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것으로써
그리스도만 자랑케 하시고자 말이죠

나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였으면
단 하루 라도 살수 없는 자입니다
지금 당장 죽이셔도 할 말 없습니다 가 되는 겁니다

도리어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그 산 소망이 이루어지니까
오히려 더 좋죠
어서 이 육의 장막에서 떠나는 것이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하냐 말이죠
이 땅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말이죠
육을 뒤짚어 쓴 것은 마치 설거지 할 때 고무장갑을 몇몇몇 겹으로 쓴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다 말이죠

그 정도로 나의 것은 끝까지 나의 것 이라는 나의 주장 보다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프다 라는 거죠

이것이 성령의 은사로써
사무엘하 7장 14절에 다윗과 약속한 내용과 연관 된 겁니다
아들 되게 하실려고 범죄한 것에 대한 매질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유지를 위해 대신 매 맞는 분
곧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을 보내시겠다 라는 겁니다

(삼하 7:14, 개역)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4, 새번역)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저의 자식을 매로 때리거나 채찍으로 치듯이, 나도 그를 징계하겠다.
(고후 6:18, 새번역)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 ㉧삼하 7:14(칠십인역); 렘 31:9; 사 43:6; 삼하 7:8
(히 1:5, 새번역) 하나님께서 천사들 가운데서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시 2:7(칠십인역) ㉡삼하 7:14

이것만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라 라는 말을

내 숙제로써 거룩을 지키겠다 라는 엉터리 해석을 오늘날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 교회가 사기를 치고 있는데
본 것이 없이 예언하는 거짓선지자 이지요

예수님만이 본 분이다 말이죠
아버지의 뜻을 말이죠 제대로 봤어요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상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셨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시는 하나님의 의요 거룩인데
엉뚱한 거룩
지 마음대로 해석한 거룩을 냅따 지키고 있으니
강도의 소굴이라는 소리 들을만 하죠

이 버림받는 아들의 죽음만이
유일하게 본 것이 복음을 믿는 자요

안그러면 억지로 자기마음대로 해석한 눈물을
억지로 짜 내는 식의 눈물이요 기도요 금식이요 회개일 뿐이다 말이죠

꺽으신 뼈로만 기뻐해야 하는 복음인데

다른 것으로 즉 나 눈물 흘렸다
십일조 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
토색하지 않았다
삥뜯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
불의하지 않았다를 가지고서 기뻐할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화로다 화로다 나는 천부당 만부당 망해야 할 자이냐 말이죠
썩은 동앗줄을 잡고서 말이죠

욥처럼 나 옳았지 않습니까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 라는 엘리야처럼
그래 그렇게 나 옳았고 내 열심히 특심이념 뭐 어쩔건데요

아이를 살려내기라도 하냐 말이죠

괜히 십계명 그것도 일 계명에서 삼사대가 우상숭배 땜에 망하고
부모 잡아먹고 자식 잡아 먹는다 라고 괜히 기록이 된게 아닙니다
실상이다 말이죠

결국 하나님 잡아 먹고
독생자 자기 아들을 잡아 먹었잖아요

그래 그래 니 옳타 치자
아무리 옆에 노아 다니엘 욥이 있어도
니는 그래 구원 받았다 치자

니 자식은 ~~~~~~~

예수님께서 태어난 출생부터 죽으실때까지
전 인생이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이였다 라는 것은

사실상 내가 처음부터 버림받은 자였다
고아 과부 나그네 였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새약속으로써 다 이루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아들 됨의 조건을 갖춤으로써

예수님의 모든 행동들이 이 버림받는 아들로써 펼쳐지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곧 쓴잔을 마시는 모습이다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그저 내 옳았음을 주장하는
세베데의 두 아들처럼 여의정 좌의정
한 자리 해서 백수 안되게
나의 형편을 개선되게
좀 더 
더 나은 나의 모습을 갖추어서 좀 인간답게 인간 구실할 수 있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는 제대로 된 참 수제자가 될 수 있도록

그러나 이런 일들은 사탄아 썩 물러가라 이것은 모조리 다 사람의 일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일은 이 쓴잔을 마시는
버림받는 아들의 운명 속에 다 집어넣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왜 저런 사람의 일들이 끊어져야 하는 지를
성령의 은사로써 펼쳐지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의 숙제요
성령의 숙제요
은사의 숙제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의 일 밖에 생각하지 않는 나를
늘 자기 것 나의 것만 끝까지 챙기는 나를

어떻게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어가는지는 내가 나를 목격하는 식으로 봐야 할 판국에 놓여졌다 라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도리어 복음이 어떻게 로마에 사는 복음을 믿는 자들을
어떻게 복음을 믿게 했는지를 사도바울이 그 속에 투입이 되어서
목격해야 하듯이 말이죠

어 나만 사로잡힌 자가 아니네
너도 사로잡혔네 라고 말이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성령의 은사는 이 버림받은 아들을 믿도록 하는 능력이니까 말이죠
즉 더더울 자아를 약하게 만드시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강하게 하시니까 말이죠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는 없는데
이 버림 받은 아들을 믿을수 있는 능력을 성령의 은사만이 부어주니까 말이죠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이 그리스에서 매사에 종교성이 많은 철학자들의 도시를 거쳐봤다 말이죠
종교에서는 버림받은 아들을 도저히 믿을수가 없어요

도리어 선택받은 자신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지
아니 누가 버림받을려고 종교를 믿겠냐 말이죠

로마도 그리스처럼 만만치 않는 동네이거든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신화가 가득해요

종교가 가득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신화란 결국 영웅 아닙니까
이 시대의 영웅 곧 구원자 선택 받은 자 아닙니까

어라 그런 곳에
버림받는 아들을 믿는 자가 생기다니 말이되냐 말이죠

이 말도 안되는 일인 하나님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서

마치 아들이 된 다윗처럼

아들이 된 이스라엘처럼

자녀가 된 교회처럼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1절 성신을 구하게끔 하시는 겁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아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이죠

성신 보다 미리 회개 할려고 하지 마시고요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제대로 된 회개를 하시지
나는 늘 엉터리 회개만 할 꺼 뻔하니까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성신을 구하라 말이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에스겔을 하면서
이 새 마음을 구하고
새성전을 주시겠다 라는 것은

참 성전의 기능으로써 작용하도록
하심이니

되도 않는 사람의 손으로 성전 짖기는 어차피 불타는 성전이요 강도의 소굴일 뿐이고

성령으로써 새성전 참성전의 기능을 펼치심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버림받은 아들의 죽음과 연결시킴으로써

그가 찔림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하시는
주님의 기쁨에 들어가기 위함이지

나의 기쁨을 따로 뽑아낼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잔칫집을 주체자도 아닌 주제에
사람들이 형성한 잔칫집 큰 길 넓은 길로 감으로써 결국은 망하는

그러나 함께 동행하는 한 몸으로써 신랑이 가신 그 초상집에서
인자의 죽음 어린양의 죽음으로 우리가 나았다 라는
이 복음으로만 기뻐하도록

주님은 갈바를 알지 못하는 끊어진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셔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 버림받은 아들의 죽음에 어떻게 해서든 연결 시키고자 말이죠

그래서 죄 안짖는 멋들어진 나를 추구 할려는 그 사람의 일에
하나님의 일은
곧 성령의 은사는 도리어 거꾸로 죄 짖게 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 버림받은 아들의 죽음
곧 인자의 죽음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도록 하시고자

왜냐하면 인자가 먼저 있었고
인자의 죽음
새마음 새성전이 먼저 있었고

우리는 이 새마음에서 태어나야만 하기에

그래서 다윗은 죄 지음으로 인해서 성신이 없음을
정직한 영이 끊어졌음을 알고
더더욱 구할 수밖에 없도록

이것이 인간 쪽에서 바치는 제사가 아닌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참성전의 기능으로써
우리는 긍휼의 그릇

긍휼이 선택받은 자의 뜻이 아니라
버림 받은 아들이 불쌍히 여겨주어서 그 긍휼을 담게 된 그릇
즉 세리 매국노 죄인이다 말이죠

도리어 진노의 그릇은
거룩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안 지킨게 아니라 너무 너무 잘 지켰지만
아무리 거룩을 지켜도
함량미달인 것을 우짜냐 말이죠
그래서 나쁜 짓 해서 진노가 아니라
함량미달이라서 진노의 그릇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다시 긍휼의 그릇은
함량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아들의 거룩됨이 아들됨이
반칙으로
부조리함으로써
불의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자신의 만땅 거룩을 아무것도 없는 빈그릇과 바꿔치기해 버리는
이 불쌍히 여겨주심 때문에

이거 기쁘심으로써 하실려고 주님이 버림받았다 말이죠
쓴잔을 마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셨다 말이죠

이 기쁜소식을 로마에 사는 성도가 받은 것에 나도 나도 좀 줘 나도 나도

또 사도바울은 목말라서
나도 나도 영생수 달라는 듯이 기뻐하는 겁니다

이것이 흔들릴 필요가 없도록 하시는 미쁘신
믿음직 스럽게 든든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왜 안흔들리느냐? 흔들릴 나 라는 것이 없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새 영 새 마음을 받은 에스겔처럼 참선지자들처럼 삐딱하게 자꾸 끊어진자 만들어서 버림받은 아들 곧 예수님의 죽음에 접붙이고자 부정적인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마치 벌거벗은 몸으로 3년 동안 증거하듯이 이런 참선지자들의 기능과 같은 이스라엘을 해체 시키는 그럼으로 더 이상 흔들릴필요가 없는 미쁘신 든든한 주님의 죽음 속에 집어넣는 기능
왜? 의인은 믿음으로 사니까 유일하게 다시 사는 분이시기에 곧 아들이시기에
이 인자의 죽음 속에 집어넣기 이것이 새성전 걸어다니는 성전 곧 함께 동행하는
한 몸 되신 분이시기에 노예(가정부)와 아내의 차이는 곧 거룩 구분 구별은
이 신랑과 같은 운명이다 라는 것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고)

(합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매일 매일 나를 삭제 시키는
겉 사람은 날로 날로 지워지고
속 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게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드시는 숙제를 너끈히 하시기에

신나게 성령으로부터 지워짐을 당하는 기쁜소식을 누리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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