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7 살진 양과 마른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사다리 걷어차기) (겔 34,17-22).mp3
7.13MB

21-097 살진 양과 파리한(야윈)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사다리 걷어차기) (겔 34,17-22)
2025. 8. 3. 

살진 양과 파리한(야위어 약한) 양 사이에 공의로 심판하리라(두 언약) (사다리 걷어차기)

그 양을 찾을 것이라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목자) (겔 34, 7-16)
에스겔 2019 2025. 7. 13. 05:39
21-096 그 양을 찾을 것이라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목자) (겔 34, 7-16)

〈에스겔 34,17-22, 개역한글, 구약성경 1205쪽, 찬송가 431장 새 549 내 주여 뜻대로, 찬송가 434장 새 384 나의 갈길 나 가도록〉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새찬송가 549장〉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새찬송가 549장.mp3
3.39MB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중에도 낙심케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찬송가 434장 나의 갈길 나 가도록, 새찬송가 384장〉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새찬송가 384장.mp3
6.08MB

1.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2.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3.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 나라 갈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아멘


〈찬송가 43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새찬송가 383장〉

1.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나를 도와 주시네
   너의 발이 실족잖게 주가 깨어지키며 
   택한 백성 항상 지켜 길이 보호하시네

2. 도우시는 하나님이 네게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너를 상치않겠네
   네게 화를 주지않고 혼을 보호하시며 
   너의 출입 지금부터 영영 인도하시리   아멘


〈에스겔 34,17-22, 개역한글, 구약성경 1205쪽〉

(겔 34:17,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수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겔 34:18, 개역) 너희가 좋은 꼴 먹은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 마신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겔 34:19, 개역)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겔 34:20, 개역)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겔 34:21, 개역)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겔 34:22, 개역)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겔 34:17, 새번역)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양 떼야,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겔 34:18, 새번역) 살진 양들아, 좋은 초원에서 뜯어 먹는 풀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먹다 남은 풀을 발로 짓밟느냐? 너희가 마시는 맑은 물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마시고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혀 놓느냐?
(겔 34:19, 새번역) 내 양 떼는 너희가 짓밟은 풀을 뜯어 먹으며, 너희가 발로 더럽혀 놓은 물을 마시고 있다.
(겔 34:20, 새번역)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그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직접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겔 34:21, 새번역) 너희가 병든 것들을 다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너희의 뿔로 받아서, 그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어 흩어지게 하였다.
(겔 34:22,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해 주어서, 그것들이 다시는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내가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먼저 문해력이 약한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잘 안 쓰는 단어 또는 저처럼 잘 못 이해한 단어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단어 형용사 파리한, 파리하다 뜻

AI 개요
"파리하다"는 형용사로, 몸이 여위고 핏기가 없어 창백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주로 얼굴이나 낯빛이 핼쑥하고 혈색이 없어 보이는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또한, 사업이나 영업 등이 잘 안 되어 한가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자세한 의미:
1. 신체적인 의미:
몹시 여위고 창백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얼굴이나 낯빛에서 핏기가 없어 보이고 혈색이 나빠 보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병을 앓거나 영양 부족 등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2. 비유적인 의미:
영업이나 장사가 잘 안 되어 손님이 뜸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파리 날린다"는 관용구는 손님이나 고객이 없어 한가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파리 날린다 는 형용사가 아니라 곤충 파리를 의미합니다


단원 여윈 뜻 다른 번역은 여윈을 많이 사용했더군요

AI 개요
"여윈"은 "여위다"의 관형사형으로, 몸에 살이 빠져 파리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몸이 홀쭉해지고 야윈 모습을 나타냅니다. 여러 국어 사전과 어학 관련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여위다"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몸이 파리하게 되다:
살이 빠져서 몸이 가늘고 야위어 보이는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오랜 병으로 몸이 여위었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과 어학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림살이가 궁핍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여윈 살림에 큰일을 치렀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과 어학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윈"은 "여위다"의 활용형이므로, 문맥에 따라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단어 야원 뜻
AI 개요
"야윈"은 몸의 살이 빠져서 파리하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입니다. 즉, 몸이 홀쭉해지고 앙상한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은 마침 우리가 이재명 대통령의 대출규제와 부채탕감을 다루었는데 그 내용과 딱 맞습니다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서 빛의 아들들은 마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강도만난자를 그냥 스쳐 지나가버립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기 위함인 것이지요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안되니까 가망없는 강도만난자 곧 시체가 될 운명을 모른척 하고 지나쳐버립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만난자를 병원비를 포함해서 다 나을때까지의 여관비 몇 달치 까지 다 대어줍니다

여기서 누가 강도만난자의 진정한 이웃인가? 와 불의한 청지기 라는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율법의 껍데기를 지키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는 빛의 아들들의
주인에게 고자질 소위 형사 고소 인거지요

이들은 율법의 속 알맹이 인 사랑 곧 오늘 본문의 정의 공의
정의가 하수 같이 흐르는 이 성경 구절 딴나라당이 심심하면 외치는 구절 아닙니까
주로 세계적 정치 성향이 보수가 기독교적이고
진보가 천주교 성향입니다
미국을 따라 흉내내다 보니 말이죠
유럽은 좌파가 보수적이고
우파가 체제 전복을 꾀하는 진보적인데 더 보수로 향하고파서입니다
이슬람도 비슷합니다 이슬람 시아파 수니파에 대한 강의를 듣다 보니
쉽게 이해할려면 수니파는 순하다 라고 외우면 된다 라고 하더군요
시아파는 단어가 잘 안외워지던데 이들은 체제전복을 추구하는 진보적인데 유럽처럼 더더더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파서 인거지요
순한 수니파는 이슬람 전체 85-90 % 이고 과격한 시아파는 10-15 % 이다 라고 합니다

주로 시아파가 이스라엘과 많이 싸우고 있지요

오늘 본문의 공의는

(암 5:24, 개역)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암 5:24, 새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4, 공동)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암 5:24, 쉬운) 오직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의의 강이 마르지 않게 하여라.
(암 5:24, 킹흠정) 오직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시내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한글킹) 그러나 공의는 물같이, 의는 큰 시내같이 흐를지니라.
(암 5:24, 현대인) 오히려 너희는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흐르게 하라.
(암 5:24, 현대어)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정의와 격류와 같이 넘쳐 흐르는 선행이다!

딴나라당 놈들이 말하는 그런 공의 그런 정의가 아니라
오늘 제목처럼
심판을 두고 말합니다 사생아에게는 없는 징계의 사랑인거지요

우리가 주로 에스겔에서 살펴본 용광로 즉 불순물 오예물을 썩은 것을 불순물 뺄려고
용광로 속에 집어 넣었다 배는 그런 의미가 공의 이다 라는 겁니다

즉 거룩이지요

아브라함이 목격한 여호와의 불이 제물을 두 조각낸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말이죠
이렇게 두 패로 두 언약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나누는
땅의 계집종 언약 하늘의 자유하는 여자 예루살렘 언약으로 나누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은 구라 인거지요
정의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바리새인과 같다 말이죠
정의 인용하면서도 왜? 성경말씀 권위를 차용하면서도
그 거룩인 공의를 대놓고 더럽히고 있는 놈들이 바리새인이요 성화론자들이다 말이죠
그 이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말이죠

우리가 호세아를 살펴봤잖아요
포로 잡히기 전 북이스라엘 멸망하기 전 이다 말이죠
멸망 후 에스겔 때 남유다는 그럼 깨끗할려고 할까?
아니지요 오홀라 오홀리바처럼 더더더 남유다는 더 더럽고
남유다는 이 정의를 아예 짖 밟는

자기는 정의 아주 기초적인 것 딱 하나 지켜 놓고
남들은 못 지키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는 모습이

포로 후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곧 바리새인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성화론자들에게도 여전히 계속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진보도 그런 놈들이고 보수는 더 한 놈들이고 그런 보수를 진보가 더 따라할려고 발악하고 있다 말이죠 이 진보와 보수가 두 언약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
이 두 정치집단을 찢어버려야 그 속에서 새로운 집단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등장해야 그것을 종말론적이라고 하지요 이미 결과를 누리는 자들
두 언약으로 나타나는 이 공의가 하수 같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두 정치집단은 이 결핍을 채울려고 마치 로마집단과 유대인 집단처럼 써로 자리 다툼한다고 싸우도록 되어 있지요 지금 현재에서도 그런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로마라는 짐승 국가의 등 위에 올라탈려는 음녀 사탄의 회 유대교처럼 말이죠
유대교는 모든 종교의 대표성이니까 모든 종교는 그래서 돈에 미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돈을 사랑하는 자라 바리새인를 정곡으로 예수님께서 찔렀죠 제대로 들통난 겁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라고 저들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씁니다
로마 이 딴나라당 놈들 보다 바리새인 이런 좌파들 진보들을 더 공격하시는 겁니다

민주주의 라는 망상을 심어넣는 바리새인들과 똑같거든요

공의는 망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마침 부채탕감 사건이 벌어져서 그 부분을 칭찬했지만 그 뒤의 내용은
또 망상으로 빠지는 역시나 의문의 반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형상 회복이라는 깨어진 도자기 청자를 본드로 붙이겠다 라는 식의 개혁주의자들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같습니다

하나님 본인이 분절 곧 쪼개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자신을 복속 시켰다 말이죠
이게 거룩이다 말이죠

아니 성화론자들 중에 자기를 둘로 쪼개어서 율법으로 남을 7번 용서하는 그 자신을 버리고
도리어 7에 70번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환자로 의사의 화목제를 외치는 그런 성화론자를 본적 있습니까? 다들 마일리지 쌓기에 미쳐 있어요
그런 자기 의를 쌓는 자가 하나님의 의에 복종 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의 의인 이 공의에 이 정의에 복종하셨다 말이죠

이게 십자가 곧 공의의 완성입니다

결국 공의 정의가 완성할려면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는 바리새인 껍데기 적이라 더더더 위선적일 뿐입니다
지도 공의에 안 들어가고 남도 공의에 못 들어가도록 하는
딴나라당 놈들 정의가 하수 같이 라고 심심하면 외치는 그런 식입니다
민주당 놈들은 더 심하게 아예 망상을 전체적으로 심고자 자신들이 무장을 하고 말이죠

결국 성령이 이 공의를 직접 실행해야 한다는 말은 종말적이다 즉 결과로 미래완성으로
과거까지 삭제를 해야 한다 라는 식입니다

부채 탕감처럼 저들의 죄악을 삭제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의 이다 말이죠
그러면 자기자신이 더러워 져야 하는데 누가 하겠습니까

디들 강도 만난자를 거룩을 실천해야 하는 제사장 레위인이 모른척 피해 갔다 라는 말은
그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참고로 나쁜 제사장과 레위인 비유 라고 안 한 이유는여전히 이 정의로 공의로 종말적으로 해서 두 언약으로 두 패로 갈라내시고 있다 라는 점에서갑자기 궁긍해서 이 질문을 했는데 그냥 참고해 보세요

==================

나의 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 에서 성경은 반대로 선한 사마리아 인데
왜 제목을 저렇게 했는가?

ChatGPT의 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책에서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차용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반대로 사용됩니다.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선한 사람을 뜻하죠. 하지만 장하준은 그 반대의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하준의 책 제목에서 "나쁜 사마리아인"은 주로 서구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행하는 경제적, 정치적 착취를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서구 국가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개발도상국들에게 "개발"의 길을 제시하지만, 그 방법은 실제로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으로 약탈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나쁜 사마리아인'은 겉으로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도움이 피해를 주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장하준은 서구 국가들이 국제 경제에서 개발도상국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주는 '개발 원조'나 '정책 조언'이 실제로는 개발도상국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은 성경에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전통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뒤집어서, 서구의 경제적 패권주의와 이기적인 행동을 지적하는 의도로 사용된 것입니다.

----------------------------------------------------------------



나의 말:
그냥 역설적인 자극으로 전복 시켰다? 정작 성경 그대로 차용하면
니쁜 제사장과 레위인 이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지???

ChatGPT의 말:
맞아요, 사실 성경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하면 '나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성경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돕는'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지나친 사람들로 묘사되거든요.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겐 적대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나서서 피해자를 도왔다는 점에서 "선한" 사람으로 등장하죠.
장하준은 아마 이 점을 의도적으로 역설적으로 활용한 것 같습니다. 즉, 성경 이야기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정작 사회적으로 낙인 찍힌 존재인데, 오늘날 서구 선진국들이 세계 경제에서 하는 일이 사실은 '선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 거죠.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보다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역설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서구의 '선의'가 실제로는 어떻게 불균형을 강화하고,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지 비판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죠. 그들의 원조나 정책이 실제로는 다른 국가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고 보는 거죠.
결국 제목 자체가 장하준의 주장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전략인 셈이네요.


----------------------------------------------------------------


나의 말:

장하준이 나쁜 사마리아 이후에 오히려 한국의 경제관을 재벌을 유지해야 한다 라고 나쁜 사마리아와 반대의 주장을 했는데 아마 민주 시민 단체의 재벌 해체에 반대해서 그런 줄 아는데
왜 그런 자신의 저서와 반대되는 입장을 펼쳤는가?

ChatGPT의 말: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 것과 그 후의 주장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은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기업을 해체하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과 *"재벌의 존재를 인정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 사이에는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나쁜 사마리아인"에서의 주장:
장하준 교수는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선진국들의 경제 정책이 후진국을 착취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자유무역, 시장경제, 그리고 국제 금융기구(IMF, 세계은행)와 같은 다국적 기구들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침해하고, 실제로 그들에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한국 경제의 재벌 중심 모델이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고 보았죠.
2. 재벌 해체 반대 입장:
장하준 교수가 후에 재벌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현실적인 경제적 측면:
장 교수는 경제학자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특수성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재벌은 한국 경제 성장의 중요한 축이었고, 빠른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이끈 주체였습니다. 특히, 한국은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력이 낮은 상황에서 재벌을 통한 집중적이고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따라서, 재벌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하준 교수는 후에 재벌이 경제를 독점하는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재벌이 더 나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 보다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개혁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해체보다는 구조적 개혁"**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섰을 수 있습니다.
(2) 시장 경쟁의 중요성:
장하준은 또한 시장 경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대기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은, 단순히 대기업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일정 부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건전한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재벌을 그대로 두되, 그들이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일 수 있습니다.
(3) 민주적 가치와 실용적 경제적 가치의 균형:
그는 민주 시민 단체나 사회적 가치와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경제적 민주화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과도한 이념적 접근보다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그에게 재벌 해체가 과연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인지를 고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하준 교수는 이론보다는 실용주의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경제 시스템을 너무 급격하게 바꾸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지지했을 수 있습니다.
(4) 경제 구조의 변화:
또한, 장 교수는 경제 구조와 관련된 "규제" 문제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과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벌들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완전히 해체가 아니라, 재벌의 부당한 권력 남용을 제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결론: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강하게 비판했던 경제적 체제와 후에 재벌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은 그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실용성과 현실적 조건을 반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경제가 단순히 이론적인 모델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구조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반대라기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의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용적인 접근의 효과 보다
시민단체의 우려 대로 재벌의 갑질 곧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해서
중소기업들의 무덤이 되는 입장이 되었다
코로나 사태를 격으면서도 세계 경제는 더더욱 저성장으로 인해 더욱더 재벌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
여기에 정치권은 그런 재벌을 더욱더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실용성을 계속 기대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저런 자극적인 책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그떄만 반짝 한 것이 아닌지? 서구 열강의 횡포나 자본가의 횡포가 결국 같은 성질의 것인데 그것을 충분히 예상 했으면서도 불구하고
저런 가능성 없는 허공에 외치는 주장으로 변질 되었는지?

ChatGPT의 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네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보여줬던 비판적 시각과 그 후의 재벌에 대한 실용적 접근 사이의 변화, 그리고 재벌의 갑질과 정치권의 옹호가 여전히 문제라는 점은 실제로 복잡하고 심각한 경제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변질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특히 현재의 경제 현실에서 드러나는 재벌의 횡포나 갑질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더욱 부각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하는 대신,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유지한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용적인 접근의 한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1. 재벌의 갑질과 중소기업의 현실
말씀하신 재벌의 갑질, 즉 사다리 걷어차기는 중소기업들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저성장과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대기업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여전히 낙후된 위치에 있습니다.
대기업의 횡포와 정치권의 옹호는 그 자체로 정치 경제적인 구조가 얼마나 편향적이고 불평등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문제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과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장 교수는 시장 경제와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상당히 현실적인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려 했으나, 재벌 중심 경제 시스템이 일으킨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성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2. 장하준 교수의 ‘실용주의적 접근’ 한계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제시한 서구 열강과 자본주의의 횡포에 대한 비판은 매우 강렬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중심 경제 모델에 대한 비판을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풀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가 당시 예상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가 이후 재벌의 실용성을 인정하는 주장을 펼친 이유는, 한국 경제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대기업이 없으면 경제가 더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성장하는 방식이 공정성이나 소수의 이익에 의존하는 방식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실용주의적 접근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벌의 횡포와 갑질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필요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정치권의 태도와 경제적 현실
재벌의 횡포를 옹호하는 정치권의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한국의 정치권은 경제적 실용성을 내세우며 재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재벌의 지배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형 경제 모델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 중소기업이나 서민 경제를 위한 지원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하준 교수의 재벌 유지론이, 경제 현실과 맞지 않는 허공에 외치는 주장으로 변질되었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과도한 자본 집중과 불평등의 문제를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들이 실제로는 경제적 변화나 개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4. 장하준 교수의 ‘변화’가 가지는 의미
장하준 교수의 변화가 단순히 타협적이고 변질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재벌 해체보다는 개혁적 접근을 택한 이유는, 실질적인 경제적 변화를 위해서는 재벌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가 단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에서 나온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의 초기 비판적 접근과 나중의 실용적 주장의 차이점을 이해하려면, 변화하는 시대와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는 저성장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경제적 위치는 여전히 확고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장 교수의 **“자유 시장 경제”**와 **“재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
결국,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경제학적으로 실용적이고 정치적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가 경고했던 서구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재벌 중심 경제의 한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단체가 지적한 재벌의 갑질과 사회적 불평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으며, 정치권의 대응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장 교수의 주장이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이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현실 속에서 점점 더 커져 가는 논란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나의 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 에서 성경은 반대로 선한 사마리아 인데왜 제목을 저렇게 했는가?

ChatGPT의 말: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책에서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차용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반대로 사용됩니다.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선한 사람을 뜻하죠. 하지만 장하준은 그 반대의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하준의 책 제목에서 "나쁜 사마리아인"은 주로 서구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에 대해 행하는 경제적, 정치적 착취를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서구 국가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개발도상국들에게 "개발"의 길을 제시하지만, 그 방법은 실제로 그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으로 약탈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즉, '나쁜 사마리아인'은 겉으로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도움이 피해를 주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장하준은 서구 국가들이 국제 경제에서 개발도상국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주는 '개발 원조'나 '정책 조언'이 실제로는 개발도상국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은 성경에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전통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뒤집어서, 서구의 경제적 패권주의와 이기적인 행동을 지적하는 의도로 사용된 것입니다.

----------------------------------------------------------------



나의 말:
그냥 역설적인 자극으로 전복 시켰다? 정작 성경 그대로 차용하면니쁜 제사장과 레위인 이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지???

ChatGPT의 말:
맞아요, 사실 성경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그대로 차용하면 '나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성경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돕는'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지나친 사람들로 묘사되거든요.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겐 적대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도 나서서 피해자를 도왔다는 점에서 "선한" 사람으로 등장하죠.
장하준은 아마 이 점을 의도적으로 역설적으로 활용한 것 같습니다. 즉, 성경 이야기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정작 사회적으로 낙인 찍힌 존재인데, 오늘날 서구 선진국들이 세계 경제에서 하는 일이 사실은 '선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 거죠.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보다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역설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서구의 '선의'가 실제로는 어떻게 불균형을 강화하고,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지 비판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죠. 그들의 원조나 정책이 실제로는 다른 국가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고 보는 거죠.
결국 제목 자체가 장하준의 주장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전략인 셈이네요.


----------------------------------------------------------------



나의 말:
장하준이 나쁜 사마리아 이후에 오히려 한국의 경제관을 재벌을 유지해야 한다 라고 나쁜 사마리아와 반대의 주장을 했는데 아마 민주 시민 단체의 재벌 해체에 반대해서 그런 줄 아는데왜 그런 자신의 저서와 반대되는 입장을 펼쳤는가?

ChatGPT의 말: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 것과 그 후의 주장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은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기업을 해체하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과 *"재벌의 존재를 인정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 사이에는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을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나쁜 사마리아인"에서의 주장:
장하준 교수는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선진국들의 경제 정책이 후진국을 착취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자유무역, 시장경제, 그리고 국제 금융기구(IMF, 세계은행)와 같은 다국적 기구들이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침해하고, 실제로 그들에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한국 경제의 재벌 중심 모델이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고 보았죠.
2. 재벌 해체 반대 입장:
장하준 교수가 후에 재벌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현실적인 경제적 측면:
장 교수는 경제학자로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특수성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재벌은 한국 경제 성장의 중요한 축이었고, 빠른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이끈 주체였습니다. 특히, 한국은 자원이 부족하고 기술력이 낮은 상황에서 재벌을 통한 집중적이고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따라서, 재벌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충격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하준 교수는 후에 재벌이 경제를 독점하는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재벌이 더 나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보다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개혁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해체보다는 구조적 개혁"**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섰을 수 있습니다.
(2) 시장 경쟁의 중요성:
장하준은 또한 시장 경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대기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은, 단순히 대기업을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일정 부분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건전한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재벌을 그대로 두되, 그들이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일 수 있습니다.
(3) 민주적 가치와 실용적 경제적 가치의 균형:
그는 민주 시민 단체나 사회적 가치와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경제적 민주화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과도한 이념적 접근보다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그에게 재벌 해체가 과연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인지를 고민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하준 교수는 이론보다는 실용주의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경제 시스템을 너무 급격하게 바꾸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지지했을 수 있습니다.
(4) 경제 구조의 변화:
또한, 장 교수는 경제 구조와 관련된 "규제"문제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과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벌들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완전히 해체가 아니라, 재벌의 부당한 권력 남용을 제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결론: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강하게 비판했던 경제적 체제와 후에 재벌 해체에 반대하는 입장은 그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실용성과 현실적 조건을 반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경제가 단순히 이론적인 모델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구조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반대라기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의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실용적인 접근의 효과 보다시민단체의 우려 대로 재벌의 갑질 곧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해서중소기업들의 무덤이 되는 입장이 되었다코로나 사태를 격으면서도 세계 경제는 더더욱 저성장으로 인해 더욱더 재벌의 횡포는 더 심해졌다여기에 정치권은 그런 재벌을 더욱더 옹호하기에 바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실용성을 계속 기대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보니저런 자극적인 책 제목임에도 불구하고 그떄만 반짝 한 것이 아닌지? 서구 열강의 횡포나 자본가의 횡포가 결국 같은 성질의 것인데 그것을 충분히 예상 했으면서도 불구하고저런 가능성 없는 허공에 외치는 주장으로 변질 되었는지?

ChatGPT의 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네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보여줬던 비판적 시각과 그 후의 재벌에 대한 실용적 접근 사이의 변화, 그리고 재벌의 갑질과 정치권의 옹호가 여전히 문제라는 점은 실제로 복잡하고 심각한 경제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변질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특히 현재의 경제 현실에서 드러나는 재벌의 횡포나 갑질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더욱 부각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시스템을 완전히 해체하는 대신,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유지한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용적인 접근의 한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1. 재벌의 갑질과 중소기업의 현실
말씀하신 재벌의 갑질, 즉 사다리 걷어차기는 중소기업들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거치며 저성장과 경제적 불확실성속에서 대기업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여전히 낙후된 위치에 있습니다.
대기업의 횡포와 정치권의 옹호는 그 자체로 정치 경제적인 구조가 얼마나 편향적이고 불평등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문제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과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장 교수는 시장 경제와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상당히 현실적인 경제적 조건을 반영하려 했으나, 재벌 중심 경제 시스템이 일으킨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반성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습니다.
2. 장하준 교수의 ‘실용주의적 접근’ 한계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에서 제시한 서구 열강과 자본주의의 횡포에 대한 비판은 매우 강렬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중심 경제 모델에 대한 비판을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풀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가 당시 예상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가 이후 재벌의 실용성을 인정하는 주장을 펼친 이유는, 한국 경제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대기업이 없으면 경제가 더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성장하는 방식이 공정성이나 소수의 이익에 의존하는 방식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실용주의적 접근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벌의 횡포와 갑질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필요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정치권의 태도와 경제적 현실
재벌의 횡포를 옹호하는 정치권의 태도도 큰 문제입니다. 한국의 정치권은 경제적 실용성을 내세우며 재벌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재벌의 지배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형 경제 모델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 중소기업이나 서민 경제를 위한 지원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하준 교수의 재벌 유지론이, 경제 현실과 맞지 않는 허공에 외치는 주장으로 변질되었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서구의 자본주의가 보여준 과도한 자본 집중과 불평등의 문제를 충분히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들이 실제로는 경제적 변화나 개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4. 장하준 교수의 ‘변화’가 가지는 의미
장하준 교수의 변화가 단순히 타협적이고 변질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재벌 해체보다는 개혁적 접근을 택한 이유는, 실질적인 경제적 변화를 위해서는 재벌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가 단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에서 나온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의 초기 비판적 접근과 나중의 실용적 주장의 차이점을 이해하려면, 변화하는 시대와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는 저성장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경제적 위치는 여전히 확고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장 교수의 **“자유 시장 경제”**와 **“재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
결국,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경제학적으로 실용적이고 정치적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가 경고했던 서구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재벌 중심 경제의 한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시민단체가 지적한 재벌의 갑질과 사회적 불평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으며, 정치권의 대응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장 교수의 주장이 변질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은 이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현실속에서 점점 더 커져 가는 논란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거 보세요 현재에도 계속 되고 있는 현실 즉 종말적이다는 겁니다결과과 미래완료가 여전히 과거를 삭제하는 사건이 이 십자가의 사건 곧 공의가성령으로 인해서 벌어지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개입할수 없는 사건 말이죠자 계속해서 이어가보면

하필이면 저들 거룩한 자라고 선민이라고 하나님의 백성 자녀 라고 자부하는 선하다 거룩하다 라는 자들에게서부터
더럽다 라고 취급 받는 사마리아 인이어야만 이 두 언약을 곧 정의를 곧 심판을 종말성을 실행 다 이룬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불의한 자가 공의를 실행하도록 되어 있지 이것이 성령의 일 하나님의 일이지
깨끗한 의인은 절대로 정의를 싱핼 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우연히 하게 된다면 종말성 즉 원인 없는 결과는 유예 되고
의문의 반복으로만 남는 거지요

아니나 다를까 박구땡 철학자가 부채탕감과 사다리 걷어차기를 아주 쉽게 잘 설명해 줬는데
과거는 이 놈들이 천재입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손도 못 대요
그 대안책을 그 다음 강의에서 하는 말 들어 보니 기가막힙니다
종교도 문화도 민족도 다 실패 했다 말이죠
결국 헌법주의? 만이 답이라 라고 또 의문의 반복을 이야기 해요

차라리 모르겠다 라는 지젝이 낫지요 그래서 그것도 실패를 해야만 하는 실패를 반복하자 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자 라고)

또 의문을 반복하자 이게 무슨 정답 입니까?

바로 이런 사탄의 깊이인 초등학문을 거쳐서 십자가 라는 공의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아 그 다음 내용요? 제가 편집 녹음을 따 봤습니다
처음 것은 올렸지만 그 다음 것은 지금 올려 봅니다 둘다 비교해 보세요


https://youtu.be/WqGGLtDKyzE

이게 이전 게시물들 중에서도 올렸던 것이구요

(박구용 250707 월 매불쇼 악마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재명 대통령! [코너별 다시보기]

박구용 250707 월 매불쇼 악마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재명 대통령! [코너별 다시보기].mp3
4.75MB

이게 첫 번째 내용의 음성만 추출한 것이고요

박구용 250716 수 김어준 뉴스공장 부채탕감 도덕적해이

박구용 250716 수 김어준 뉴스공장 부채탕감 도덕적해이.mp3
2.66MB

이게 첫번째랑 같은 의미가 뉴스공장에서도 언급이 되었는데 음성만 추출한 것이고요
아래 주소는 전체 영상입니다

https://youtu.be/1P0qNgC4zKc

두 번째를 찾을려고 하니 어라 안 보이네요

두 번째 파일은 못 찾았는데

아 맞다 매불쇼가 아니라 뉴스공장인테 한참 찾았네요 ㅋㅋㅋ
부분으로 된 영상은 없구요 제가 따로 편집해서 녹음을 따 놨습니다 

이게 둘째 파일입니다
박구용 250717 목 김어준 뉴스공장 헌정 애국주의 김진한 변호사

박구용 250717 목 김어준 뉴스공장 헌정 애국주의 김진한 변호사.mp3
3.26MB

아래 주소는 전체 영상입니다

https://youtu.be/Lk1NBMTFwrw

)


아무튼 과거의 지난 것들은 원인만 파악하면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있어서 천재적인데
진짜 문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은 역시나 의문의 반복이였다 말이죠

헌정 애국주의를 답이라고 제시한 꼬라지를 보니 한심하더라구요 또 반복이다 말이죠
한 국가 에서는 문제 없는 것 같으나
두 나라가 서로 부딧히는 그 상황 속에서의 공의 곧 정의는 과연 헌법 애국주의로 통할까요
두 나라가 상극인데 로마와 유대나라와 말이죠(한 나라만 있다면 가룟유다의 헌정애국주의를 주님이 칭찬했겠죠그러나 두 나라 이기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룟유다 독립운동의 반대 나라인 적국의 시민을 의도적으로 칭찬할려고 합니가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 라든지 선한 사마리아이라던지 저들의 악마를 오히려 칭찬하지요 그래서 베드로를 저들의 적국 로마가 아니가 상극의 두 나라 대립구조에서 새로운 상극 더더더 상극인 부정의 부정인 예수님 나라라는 적국의 백성으로 베드로를 편파용서를 하니까 그 탕자 같은 베드로에 대한 용서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 가룟우다는 죽어라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상극의 적국인 로마와 손 잡고
베드로 용서라는 공의 하나님의 의를 파괴하고자 사다리를 걷어차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적국인 에숭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새로 만들어서 베드로를 용서하는 새나라 새언약의 용서의 완성을 곧 졸지에 선악나라의 대결 구도에서 사랑의 나라를 새로 만들어 저들의 적국의 백성으로 만들어 버리니
저들의 헌정 애국주의 조차도 의문의 반복으로 남 7번 용서라는 모세언약을 휴지조각 만들어버립니다 무의미 하다 라고 세례도 성찬식도 절기도 모조리 다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히려 저들이 더 무의미하다 라고 외치는 다윗언약이라는 새 언약을 완성해 버립니다
이 새 언약이 아니면 저들이 목숨건 절대적인 믿음이 휴지조각인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저들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 곧 상여소리 누워서 침뱉는 자기 눈 찌르기 라는 헛짓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두 헌법에 서로 상극인 애국주의자가 부딧히는데 거기서는 무슨 수로 정의를 찾냐 말이죠
그래서 독립운동 이라는 것이 악마적인 행동이 되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그 짓의 대가 아닙니까
주님의 나라는 이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 말이죠

공의 정의는 이 땅에서 안 이루어 집니다
땅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인간은 땅의 계집종 하갈이 될 뿐인
가정부이다 말이죠 노예죠 노예

자유하는 하늘의 예루살렘 여자가 못 되는 겁니다

자유를 줘 봤자 줘도 못 먹어요 육체 자체가 노예근성으로 물들여졌기에
또 애굽으로 약속의 땅을 도배합니다
그래놓고 자유하는 아브라함 자손 이래요 글쎄 그게 바로 강요된 선택의 자유의지 이지요
이런 초등학문인 철학사상이 신학의 출발점이 된 교리가 되었으니
왜 모세언약만으로 충분하다 다윗언약 곧 새언약 필요 없다 라고 했는줄 이제 아시겠지요
악한 세대가 기적을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부자가 구원받을 자의 대표성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구원으로 자리잡아버린 것이지요 그것을 박살내는 오늘 본문처럼 심판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 악한 세대에게서 애굽으로부터 탈출이 바로 구원입니다
애굽을 사망을 죽음을 심판 할 줄 모르면 그냥 가만히 두면 그게 무슨 구원 입니까
그래서 노예답게 기계 답게 민주주의 기계처럼
독립운동기계처럼 공상과학 SF 영화를 보세요 로봇기겤들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잖아요 그냥 주는거 싫어합니다 자기 스스로 획득하는
박정희처럼 자주국방처럼 말이죠

바로 그게 기계의 자유 민주주의 달성 아닙니까

요즘 동물에게도 동물권존중을 해주듯이 해야 한다 라고
동물복지를 히틀러가 주장한 것에 이 놈 얼마나 많은 사람 죽였습니까 ㅋㅋㅋㅋ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 라는 놈이 지 마누라에게는 목숨 걸었잖습니까

자 이렇게 여기까지 서두로 남겨놓고
즉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의 곧 공의에 복종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공의를 외치는 놈들이 다 사기꾼 강도의 소굴이였다 였고
공의를 짖 밟는 자들이였다 라고 서두로 제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보면

그럼 이 공의를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바로 옛마음을 찢고서 나온 새마음 만이 해결할 수 있다 라는 점에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놀랍게도 이 공의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여러 철학자들 곧 그 당시의 신학자들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사회 문제를 해결할려고 나선 구원자 였으니까 말이죠

안철수가 정계에 입문하게 되니까 다들 메시아 라는 말을 유행시키더라 말이죠
지금에 와서 보니 메시아 이기는커녕 초딩보다 못한 자 였음을 보게 되었지요

자기 깨끗한 것만 주장하는 망상가 였던 겁니다

왜 좀 되었는데 언급한지 말이죠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아마 초딩도 아니였죠 6살 여자아이가 사감선생같은 검은옷 원피스만 주로 입고서 횡단보도 건널때에 손들고 건너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하면서 울어버리는
그런 일이 다반사라서 동네에서 유명한
그게 바로 안초딩과 똑같은 모습이다는 겁니다 얼음공주 닭그네와 같은 수준인 것이지요

상징계 속에 못 들어온 겁니다 아버지의 법 이라는 죽음의 법 속에 못 들어오고
거욱단계 어린아이 상상계에 머물고 있는 겁니다

딱딱한 음식을 못 먹은 거지요 그게 저번에 말한 제가 다녀본 우리나라 최고의 성화론
그냥 저 수준 낮은 성화론인 박땡선 목사보다(저들의 평가로 저들이 하는 말로)
자신들이 수준 높은 성하론자들이라고 그래서 어린아이 같은 성도들을 잘 이끌어 줘야 한다 라고 책임감을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라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자기들이 그 만큼 어른이다 라고 우기면서 어린아이로 둔갑 시킨 교인과 대조를 이룰려고 하지
정작 그 교인들을 어른으로 만들려고 딱딱한 음식을 먹일려는 짓을 하나도 하지 않아요
네 맞아요 오히려 남은 좋은 꼴을 먹고 자기들 보다 더 많이 성정 할까봐
도리어 남은 꼴을 발로 밟아 못 먹도록 더럽히는
남은 물을 발로 밟아 못 마시게 하는 사다리 걷어차는 놈이였다 말이죠
그래 놓고 대충 대충 먹여놓고서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자기 가족들 보험들어 놓는 그 기특한 일을 자랑하면서
거 봐라 나를 대우 해주면 이렇게 복 받은 모습이다 라고 내처럼 되어라 라는 식으로 과시하더라 말이죠
교인들 등에 빨대 꽃아서 피 빨아 먹고서 말이죠

그것이 수 십년째 되어서 그런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서
저의 눈에만 보이니까
아 이 습관화 된 것 아무도 그것에 시비를 거는 자가 없다는 것 자체가
그 목사가 우상이 된게 아니라
그 환경 자체가 우상이 되니까
그 환경 안 꺠뜨리는 이상
사람이 바뀐다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님을 그 때 알았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 살진 양과 말라 비틀어진 양을 누가 그 환경을 조성했는가 보니
저들 악마들이 아닌 주님이 그렇게 조성을 했다 라는 겁니다

왜죠? 왜 이런 심판 받을 짓을 주님께서 나서서 조성하신 것입니까

네 바로 정답을 맞추셨습니다
방금 반문한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의 매 사랑 곧 구원이기 떄문입니다
그래여 빠져나올 탈출 이라는 잃어버린의 의식이 생길 것 안닙니까
일어버림이 없는데 어떻게 싸매어 주심을 볼 것이며 아 아니다 되찾아주심을 볼 것이며
심판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볼 것이며
찢으셨음이 없는데 어떻게 싸매어 주심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마귀의 시선을 이용해서 마귀는 오로지 인간에게는 생명 따위는 없다 라고
시체 위에 독수리로만 보는 그 시선을 가지고 와서
주님 또한 마귀의 시선으로 우리는 심판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렇게 걸러낼 자를 걸러내시고서
주님을 이 심판이 옳았습니다 라고 외치는 그 처음자리에서 첫사랑을 간구하는
긍휼을 바라보는 자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겁니다

그럼 그 창조하는 그 완성 언약의 완성은
기존의 구원구조를 깨뜨리는 옛언약을 깨뜨리시으로부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서 펼쳐서

새언약 백성으로써
이제 옛 언약 곧 율법으로 난 자가 아닌
새 언약의 새 믿음으로 난 자 새로 태어난 자로써

두 채로 가르시는 이 토기장이 비유를 펼치시는 겁니다

이 토기장이 비유에 그 어떤 신학 교리도 동의를 하기는커녕 다 반발하는 완악함을 들추어내심으로써

맞습니다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진노의 그릇입이나 라고 하는 자에게
도리어 긍휼의 그릇으로

저는요 긍휼의 그릇 답게 행동했어요 라는 자들은 진노의 그릇으로

달음 박질 함도 아니요 원함으로도 아닌

오히려 긍휼히 여기실 자를 여기시고
태어나기도 전에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기로 함으로써

악한 세대가 기적을 바란다 라는 바로 그 종교
결국 모든 종교는 악한세대의 요구인 구원을 바라는
유대교 또한 우리가 이미 자유하는 아브라함 자손이라 라고 우기잖아요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악마는 저주는 죽음은 돈 없는 겁니다
돈이 주인이 된 세상에 돈이 주인이 없어봐요
평생 노예로 살아라 평생 포로 됨으로 살아라
고아 과부 나그네 떠돌이로 살아라

나그네 노마니즘 유목민 사상이 유행했지요 광고에도 나오는 노마드 들
어디에도 안 얽매이는 자유하는 자의 삶이라고
그것 마저도 욕망을 자극해 또 자유의지라는 강요된 선택을 추구하겠끔 하는데

그래서 코로나때 마스크 쓰기도 거부하고 내 동선 활동선을 파악하지 말라
내 개인정보를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 라고 마치 노마드 적인냥 했지만
그런 놈들이 온갖 세균을 다 퍼트리고 다니더라 말이죠

노마드 라는 유목민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정착민 농경민의 반대의 의미로써

사실상 인간은 떠돌이 나그내 라는 처음자리를 말한다 말이죠

그런 떠돌이 주제에 조금 쪼매 짧은 기간에 정착하게 되어버러니까
바로 교만하게 되어서 어떻게하면 자기의 영역을 확장 시키느냐 라는
자기 가치의 확대를 꽤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정착생활 속에서 법이 발달하게 되고 그 법에 의해사 계급이 나누어져 버리니

남을 7번 용서가 사랑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없애버린채 
법이라는 틀 껍데기만 갖춘채로 도리어 공의를 짖밟는 사다리 걷어차는
계급을 형성하더라 남 6번 용서 한 너 보다 나는 더 높다 라고 누가 크냐 라는 싸움이 매일 매일 벌러지는 겁니다

니체가 우생학 무엇이 더 깨끗하냐 자꾸 자꾸 그 머물렀던 자리를 어서 어서 떠나는 그것이 깨끗한 거룩이다 싶어서 성경에서 차용한 것을 그 당시 기독교는 더럽기 짝이 없어 꼴보기 싫어서 도리어 유목민은 언급해도 별 반향도 없는 반응도 없기에
불교가 이 우생학에 딱 맞다 라고 치켜 세워주니까 이 불교 놈들이 지들이 깨끗한 줄 알아요 ㅋㅋㅋㅋ 니체의 장난에 놀아난 거죠

불교가 제일 깨끗하다 라고 게급을 높여 주니까 자기들이 제일 큰줄 알고 니체의 말에 희죽 희죽 거린다 말이죠

아까 우리나라 최고의 성화론자 목사처럼 교인들을 성화로 누가 누가 잘하냐 라고 계급화 시키니까 교인들이 얼마나 자기를 어른대우 해 주는지 혼자 희즉 희죽 거려요 글쌔
이런 광명한 천사를 깨뜨리는 것이 복음인데 말이죠

그렇게 그런 자신을 홍보 광고 하고 돌아다냐야 하니
아는 선배가 자기 교인 안 돌보고 맨날 싸돌아 다닌다 면서 결국 자기 힘들 때 상담한번 안 해주는 대화를 할수 없으니 그만 나가 버리더라 말이죠

어린성도로 머물게 하는 어른목자 되기 놀이 때문에 말이죠
공의는커녕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으니 말이죠

계속 어린성도 가지고 놀기 놀이를 해야 하니까 말이죠

자 이런 심뽀로 인간은 자기는 늘 선의 자리에
남은 늘 악의 자리에 놓아야
이 계급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남을  7번 용서할려고 하는 것이지
진짜 사랑이 있어서 하는게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 있다면 진짜 공의가 있다면
바로 그런 남 7번 용서했다 라는 그 증거물
그거 완전히 갈기 갈기 찢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에게 너의 처음자리인
저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라고 했을때에
못 하는 겁니다

자기의 처음자리를 자기 스스로 저주하고 있으니 못 돌아가는 겁니다
첫사랑을 그 긍휼을 그 용서를 구하지 않고

내가 알아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이렇게 부자로 갖추었다 라고 하니까

도리어 용서 받는 자리에 못 앉는 겁니다

왜? 내가 남을 충분히 용서 할 수 있는 자기 되었다 라고
그 게급을 유지하겟다 라고

바로 이런 속내를 까발리고 들통내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인간의 거룩
성화는 이런 것을 흉내 조차도 못 냅니다

뭐든지 다 따라하고 흉내낼줄 알기 떄문에

일부러 주저의 자리에서 그 용서를 다 이루니까

이 십자가를 따라 했다가는 부자청년 본인이 거지가 되어버리니
자기 별명이 부자청년인데 그 부자를 자기 힘으로 유지할 수 없는
그 자기 의를 손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본다 라는 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불뱀에 물려죽게 되었을때에 살수 있는 기적의 치료약을 원하지
요나의 표적인 아무도 못 구하는

아니 구할까 봐 싶어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평상시 본인지 저주하고 심판받아라 라고 외쳤던
그 십자가가 나의 구원이라 라고 할 수 있는 그 반전은 있을 수 없도록 하겠다 라는 것이 인간의 믿음 곧 살인의지이다는 겁니다

갸룟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나는 자살할 만한 짓을 안 했기 때문에 자살한 겁니다

즉 나는 정당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완악한 마음에는 예수님이 다 이룬 약속한 성령
곧 새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실 리가 없기 때문에

들어강 틈도 없이 나는 정당하다 만 빽빽하기에
그래서 자살 한 겁ㄴ다

똑같은 짓을 베드로가 했지만
자신은 뭘 해도 사망의 몸일 수 밖에 없음을
장대 높이 달린 인자의 죽으을 보고
나는 세분 부인해도 안해도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달려 죽으시러 왔구나 라고
내부의 생각이 아닌 선악이 아닌
외부의 다 이루셨다 라는 사랑의 용서의 생각이 덮쳐지니까

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은 줄 주께서 더 잘 안다 라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구하니까
없응께 구 하잖아요

구하니까 주셨잖아요

구론데 가룍유다는 끝까지 자기는 정직한 영이 있데요 글쌔

채팅에서 주의 이름 누구든지 부르면 구원하신다
그래 줘 봐 내가 불러 줄게 이런 놈은

주문 이방인의 중언부언처럼
그런데 사실은 유대인의 중언부언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쓸데 없는 아무 의미 없는 바울의 세레처럼
아무 의미 없는 성화를 하니까 계급이니 따지고
누구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더 가치 있냐 라고
나는 베드로
나는 바울 이름으로

이런 짓을 하니
바울파 베드로차 안 생기고 배기겠냐 말이죠

웃끼게도 너튜브 메인 화면에
인문학 강의를 찾는 검색을 하다 보니 알고리즘 연관된 콘텐츠로 메인 화면에 여러개 중에

천주교 사제가 올린 종교 개혁이 아니라 종교 뷴열 이다 라는 영상이 있길래 봤습니다
아니 본게 아니라 10초 듣고 꺼버렸다 말이죠
젊은 사제 이던데

개혁이 아니라 분열이다

만약 개혁이라고 해 버리면 끊임없이 분열을 해 버려야 하기 때문에
종교 개혁 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말이죠

그러나 분열이라고 해 버리면 누구 하나는 뭔가 잘 못 한거 맞다 라는 주장이 정당성을 입게 됩니다
그래 그래 개신교 너거들 주장대로 우리 큰 형님인 천주교가 잘못한 것 있는거 맞다
그러나 그렇게 분열해 나가 놓고서는 너거들은 뭐 제대로 한 것 있기는 하냐 라는 비판이 정당래 진다 말이죠 둘이 같이 빠져 죽자 라는 물귀신 작전인 거지요

그래 그럼 저는 분열이라고 치자 그러면 하나 될 마음이 있기는 하냐 말이죠
물귀신 작전처럼 너도 천국 못가고 남도 못 가도록 삥이나 뜯는 이 역사 반복하겟다 라는 심뽀 아니냐 말이죠

개혁이라면 계속 끊임없이 분열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바울바 게바파 등긍으로 나누워 진거 그렇게 야단 맞고서
하나 되기는커녕 더더더 나누어 져야 한다고요?
더더더 분명이 되어야 한다 구요

세상사람들이 비꼽나더 얼마나 많은 개신교 파가 있는지
이제 어느 정도의 계급인 성공한 재벌 교단이 되지 못하면
신흥 교파는 무조건 형님에게 상납금 안 바치는 이단 취급 받게 된다 라고

그래서 이렇게 많은 교파가 나누어진 것은 그 정도로 타락해서 그렇다 라고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 너무 너무 분열이 아니되어서
저 젋은 천주교 사제 신부의 주장의 반대로
너무 너무 분명이 아니 되어서 타락한 거다 라고 봅니다

계속 계속 분명 붕명 쪼개고 쪼개고 쪼개어서
더 이상 쪼갤수 없는 바닥의 바닥
제일 밑 바닥 까지 챠 봐야
더 이상 분열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재가 바닥 나 봐야

그제서야 이미 하나 였음을 누리는 것을

우리가 살펴본 로마서 내가 십자가 졋더냐 라는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된 겁니다

그카이 그 젊은 사제나 기독교 성화론자들이나
왜 개신교는 그렇게 분파가 많으냐 등등의 질문들은

다들 배불러 터져서 나오는 겁니다

아직 징계의 매를 덜 맞아서 쪼개고 쪼개고 더 이상 쪼갤 꺼리가 없어져야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더냐 라는 의미가 비로소 들리는 겁니다

즉 배부른 정직한 영이 있다 라는 그 주장이 빈손 빈공백으로 탈탈탈 털리지 않는 이상
교만한 목 완악한 수건 외부에서 안 벗기는 이상 다 배불러 터진 소리만 하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따위를 바랄 뿐이다 말이죠

그카이 처음자리인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심판이 없으면

자기가 가해자 인 줄 모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살진양 과 배짝 말라 비틀어진 야윈 파리한 양을

주님이 의도적으로 계급 체제 구조를 형성한 이유는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새언약이 이미 떳기 떄문에
모든 인간을 배불러 터진 살진양 가해자의 자리에 놓고

오로지 예수님만 아벨의 축복처럼 형 가인에 돌삐 맞아 죽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아벨의 자리에 놓으신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 곧 거룩이 있는데 공의가 있는데

성화론은 자기 자신을 율법 지켜서 거룩의 자리에ㅔ 놓을려고 하니
도리어 사다리 걷어차는 다윗의 우리야 장군 살애화 같음을 못 보게 하는
완악한 수건으로 누가 크냐 라는 모세의 자리 앉기 게임을 하더라 말이죠
의자 뺏기 놀이처럼 둥글게 둥글게 등굴게 등굴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처럼
3명씩 짝을 하면 한 명을 탈락 시키는

네 맞아요 남 7번 용서는 의자 뺴앗기 놀이 사다리 걷어차기 놀이입니다
한 명 탈락 이다 말이죠 그 도리어 용서 받은 7명은 탈락 시켰다 라고 자랑하는 식입니다

바로 그런 자기 의를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하시고자
자기 의를 찢어버리시는 이 하나님의 심판만이 진짜 제대로 된 거룩이요

주님 혼자만 말라 비틀어진 우리를 대신해서 매 맞는 분이고

우리는 여전히 배불러 터져서 남 7번 용서 했다??? 둥 사다리 걷어차고 의자 빼앗기 게임에서 이겼다 라고 좋아라 하는 그런 배불러 터진

살진 양 곧 가해자 임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다위을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의 모습으로써

감히 감히 하나님과 같이 된 나에게 왕 다윗에게

목숨 걸고 나단이 목숨이 천개 있는냥 무모하게

무의미한 바울과 대조되는 헛되지 않은 십자가 곧 하나님의 공의로써


너희들이 냅다 걷어찬 그 사다리를

하나님께서 너히가 죽인 그 예수를 다시 살리사 주가 되게 하심으로써

더럽힐수 없는 기념이름 그 주의 이름을 주가 되게 함으로써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처음자리에서 부르는 첫사랑


주는 나의 첫사랑 되시네 라고 춤추며 불렀던 그 가스펠 노래 순 엉터리였던 거죠
그거 부르면서도 계급 높이고 누가 크냐 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신경썻지

그런 악한 세대가 구하는 기적 따위만 바랬지

누가 요나의 기적으로 배불러 터진 자들을
모조리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랑이 옳았습니다 라고

이 헛되지 않은 십자가

싫어버린 바 된 십자가를 기뻐하며 외칠수 있겠냐 말이죠

주님 본인도 나단처럼 목숨 내 놓고서 왕이 된 다윗
신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진짜 신이 목숨 걸고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목숨 걸고

이 헛되지 않은 십자가를

그러나 이미 벌써 인간들에게서는
특히 하나님의 백성 선민 유대인이든 고린도 부자 교회 교만한 자이든
이미 헛되게 취급되어 버렸고
반대로 게바파 바울파 그따위 장로교 합동축애서 탸어났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그 따위 무의미한 것을 도리어 자랑하고 있다 라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 복음을 전하는 발길을 막아서고 잇다는 사실을 까발리고 있다는 것에

제대로 까발림 당하게 하시는

이 헛되지 않은 십자가
그 정도로 모든 인간은 특히 마귀는 이 십자가 만큼은 왜곡 시키고자 힘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헛되지 않은 십자가를 전하고자 바울을 세워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을 세워서

쪼개고 쪼개고 더 이상 쪼갤 꺼리가 없도록 바닥의 바닥을 쳐서
원래부터 하나 였음을 그 하나만 남기고

그 화목제만 남기고 모조리 다 찌끼 불순물로 버리신다 라는 사실에


이 십자가만 남기신다는 것을 기빠하는 자를 부르셨다 라고 기뻐 노래하는 자로 
새창조 새마음을 심어버리십니다

이 밭갈이 아니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지옥 백성이기에 말이죠












=====================================================================





25-007 헛되지 않은 십자가의 도와 멸망하는 자들 (고전 1;17-18)
2025. 8. 10. ( 8월 2일 녹음)

세례 준적도 십자가 진적도 없는 무의미한 바울과 헛되지 않은 복음 (고전 1;13-17)
고린도 전서 2025 2025. 7. 19. 12:32
25-005 세례 준적도 십자가 진적도 없는 무의미한 바울(세례요한)과 헛되지 않은 복음 (고전 1;13-17)

〈고린도전서 1;17-18, 개역한글 신약성경 263쪽, 찬송가 27장 새 27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송가 498장 새 441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 새찬송가 27장〉 

1.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
   해 같이 빛나네

2. 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없는 자비를
   뭇천사 소리 모아서 찬송드리네
   늘 찬송드리네

3. 영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날 위해 지셨네

4. 나이제 생명있음은 주님의 은사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5. 주님의 보좌있는데 천한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
                                             아-멘


〈찬송가 498장 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새찬송가 441장〉 

1.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 속에 지금 오셨네

2. 말씀 위에 서서 내 뜻 버리고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믿음 완전해지고
   내가 이제부터 주만 붙드네

3. 내가 염려하며 계획하던 것
   믿고 기도하며 주께 맡기고
   나의 모든 소원 던져버리고
   주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네

4. 믿음으로 닻을 주께 던지고
   끊임없이 주를 찬송하면서
   전엔 나를 위해 일해 왔으나
   이제 주만 위해 힘써 일하리

5. 나의 소망되는 구주 예수님
   이 세상에 다시 강림하겠네
   나의 등불 밝혀 손에 들고서
   기쁨으로 주를 기다리겠네

<후렴>
 나의 생명 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고린도전서 1;17-18, 개역한글 신약성경 263쪽〉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7, 현대어)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내 설교가 빈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려운 말이나 현학적인 사상 따위를 섞어 설교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러한 말재간으로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1:18, 현대어)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는가를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방해적인 요소를 대조해서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를 증거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도가 귀하다면 그 상대적인 헛짓들꺼리들과 대조를 해서 알려줍니다

귀한 것과 헛된 것의 대조 이지요

그러나 거꾸로 십자가 복음이 귀하지 않은 헛된 것으로만 취급받는 상황 구조임을 드러내시면서
저절로 자기들의 속임수 그 헛된 그림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도록 만들어버리십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둘의 차이의 좁힐수 없는 간극을 저들의 손에서 벌리시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카이 저들이 욕한 이 십자가를 믿겠습니까 자기가 욕한 그 십자가를 믿으면 그 욕소리 속에 들어가는 셈이니 그 어리석고 미련한 짓 임마누엘 구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라고 억수로 똑똑한 척 하지만 그것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도록 지 눈 지가 찌르는 식이 되는 거지요

일단 십자가의 도 만이 귀한 것이다 라는 기준이 서버리게 되니까
자동적으로 귀한 것의 반대인 헛된 것들을 제시하면서 그 차이의 간극을 벌립니다

마치 실상은 귀한 가치가 있지만 상대적인 그림자는 아무리 가치를 높야준다고 해서
그림자에게는 백날 헛짓꺼리 밖에 안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 헛짓꺼리들이 뭔지를 언급합니다

바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파로 나누기 짓입니다 즉 정치짓 인 거지요
정치란 자기 쪽에서 간택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나은가 싶어서 선택 간택하는 거지요 마치 선택권이 있는냥 말이죠 십자가의 정치는 그 반대입니다
간택 권이 없어서 십자가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겁니다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자아가 삭제 당한 자 만이 하는 겁니다자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세례 안 주는 것도 의미 없고요 계파 안 나누고 초교파 하자 라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그림자 주제에 이래 해 본들 저래 해 본들 해 아래 새것이 없는 짓들만 골라서 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자 라는 취지로 동원이 된 몽학선생 곧 화살표 인데방향성 제시 인데 졸지에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겁니다

누가 여행길 떠나는 길에서 화살표를 보고 저 쪽으로 가시오라는 팻말을 보고
실제를 만났다 라고 우상숭배하고 진리라고 외칩니까? 화살표 대로 화살표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안 가는 자들이 꼭 그런 헛짓들을 하 잖아요
그 양탈무리 사모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안 지킨다고
여고괴담처럼 뻘건 글씨로 점점 크게 막적고서 울분을 토하더라 말이죠 귀신들린 증거죠

화살표눈 무대 뒤로 빠지는게 아니라 엑스트라가 주인공처럼 계속 안 죽고 계속 남아버리면
감독은 어쩔수 없이 컷 컷 컷 저 놈 짤라라 라고 합니다
왜 그림자가 자꾸 주인공인냥 실체 노릇을 할까요

교회 또한 누락 되어야 할 것인데 왜 자꾸 주인공 예수님의 자리에 앉을려고 할까요
마치 유대인들이 모세의 자리를 앉고자 완악한 수건을 안 벗듯이 말이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 만큼 헛된 그림자를 귀하게 보고 있고

또 반대로 우리가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정작 귀한 것인지를 모르니까 말이죠
임마누엘 안 구할란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안 쳐다볼란다
유월절 어린양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안 볼란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카이 세례요한을 죽이는 자들과 한 패거리가 되는 겁니다
로마와 손 잡고 예수님을 역시나 똑같이 죽이는 이 죽음 이 살인의지
이 제대로 죽는 절대죽음 조차도 아닌 주제에 죽음인냥 까불어 대는 겁니다

아름다운 것을 다들 고개를 돌리면서 싫어하고
정작 싫어해야 할 것을 아름답다 라고 온 몸에 쳐 바르고
하나님께 보이러 오니
왜 똥을 쳐 바르고 오느냐 내 마당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마침 궁금한게 있어서 또 물어봤지요 복사해서 캡쳐를 한글문서에 해서 다시 블로그에 올리면 좀 글 문장 줄들과 간극들 등등이 깨어지는 것 같아서 에라이 그냥 바로 올려놓고 나중에 다시 캡쳐 해야 겠다 싶어서 미리 올려놓고 그거 복사하면 괜찮으니까 말이죠 눈이 덜 불편할 겁니다

사도바울의 트릭(속임수)을 올렸다 말이죠https://crosslamb.tistory.com/391534댓글에 이것이 곧 십자가의 트릭 속임수 라고 했습니다 안 그러면 인간의 믿음이라는 그것도 순수 믿음이라고 우기는 속임수를 까발려지지 않을 테니까요
실제로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은 안 속거든요
심지어 그거 생명을 죽이는 짓임을 증명까지 해 버리니까 화가나서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아니 바울 본인이 손할례를 그렇게 공격해 놓고서는이제 와서 디모데를 할례 시킨다 말이죠그런데 이것이 그 상황 속에서의 사건으로써 나타나는 이유는
정작 복음은 우물에 빠진 살리기 위한 생명 구하기 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율법주의자들이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더라 말이죠
그 환경 속에서 디모데를 살리는 길은 율법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거 역설적이지요 본인이 말한 것을 뒤짚어 엎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지
개인 생명 구하기의 목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생명을 구하고자 앞으로도 복음을 증거할 디모데를 살리고자 율법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때가차면 언제든지 죽이시기로 작정이 된 사도들의 운명처럼 그때가서 복음에 맞게 복음이 알아서 죽이시니까 말이지요 그 전까지는 복음을 위해 살리시는 겁니다

또 이런 내용을 너튜뷰에서 언뜻 스쳐지나가면서 제목만 봣는데다시 검색해서 찾을려고 하니 바로 못 찾겟더군요 
(직접찾아서 댓글 달아주세요
하도 의미 없는 댓글이 많아서리 싹 다 정리했더니만 또 바로 달아버리네요
그런 의미 없는 것 말고 복음을 위해서 말이죠)
그냥 썸네일과 제목만 보니까사도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이 정당하냐 라는 그런 의미의 제목이더라 말이죠
즉 이중국적자 이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 안 믿을때에 땃던가 아니면 자동적으로 태생적으로 취득한 국적이던가
마치 미국에서 출생하면 미국 시민권 주듯이 지금은 트럼프가 다 밟아버렸지만 말이죠

그럼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적어도 로마 시민권은 버려야 할 것 아니냐 라는 주제로 내용을 언급했지 싶은데 말이죠 추측입니다 제발 이 추즉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전혀 의심해 본적 없는 생각이였다 말이죠 그저 당연한 줄 알았고오히려 그 로마시민권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방해꾼들의 방해를 피할수 있는데 사용이 되었길래 그것으로 당연히 여겼는데 이것이 윤리적이거나 아니면 신앙적태도에 시비를 걸 수 있는 문제가 되는 줄도 미쳐 몰랐다 말이죠(심지어 어떤 목사는 자기 블로그에 자기가 좌파요 진보주의자 라고 밝히면서 여러 글 중에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을 다루면서 과연 아비가일이 정결하고 지혜로운 여자 맞기는 하냐 라고 의문의 글을 남기더라구요 나발이 돈에 미쳐 있음을 지적하고 죽자 마자 다윗에게 시집 가버리는 그 모습이 과연 정당하냐 라고 따지더라 말이죠 이거 나발사건을 오래전에 살펴보다가 발견했던 블로그인데 함 찾아보기소 주소 댓글 달아주삼 ㅋㅋㅋㅋ)

마치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참말이냐 거짓말이냐처럼
화이트 거짓말 이냐 검은 블랙 거짓말이냐처럼
의도에 따라 결과에 따라 상황윤리처럼 결과가 달라질수 있는 거짓이 아니었었네 가 된다 라고 말이죠

참 아직도 블랙요원들 돌아다니고 있나요? 빤스 바람으로 저항하는 도리도리 보니까 아직도 멀어 보이던데 ㅋㅋㅋ

참말이더라도 생명 구하지 못하는 참말이면 그게 거짓인 거지요
젊은애들 그렇게 죽여놓고도 지 잘났데 글쎄 ~~~~

오늘날 목사를 보면 딱 이 놈 모습하고 똑같아요
지도 죽고 남도 죽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중간에 가로막아서
돈이나 삥 뜯는 거리의 깡패들 야야야야 야야야야 너 이리와바 너 돈 있냐?

성경말씀 그대로 맞아요 약대 낙타 부자는 삼키고 하루살이 거지는 쫓아내더라 말이죠
목적이 돈 인데 돈 없는 하루살이들은 퍼뜩 걸러내어야지요

고린도교회가 부자교회인데 과연 하루살이를 걸러내지 않고 배길까요?
오히려 사도바울도 가만히 안 둘려고 할 텐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사도바울이 고린도 부자 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 내어놓은 겁니다 그 정도로 귀한 것에 목숨 걸었으니 신나서 죽이든지 말든지 하는 식인 거지요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런 바울에게 야단 맞듯이 이런 잔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 만큼 환경 적으로 귀한 복음은 내 팽개치고
헛된 그림자는 주변에 유혹꺼리로 천지삐까리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카이 그 유혹 이기든 지든 의미없고 이미 다 이룬 복음만큼은 아무리 너희가 천히게 여겨도 귀하디 귀할 수밖에 없고 귀한 사건에 너거들 이미 휘말릴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왜? 이미 다 이루었응께 아브라함이 그래서 이삭의 화목제물에 됨 사건에 휘말리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호세아서가 생각 나지요

모든 재산 모든 소유물 심지어 아브라함 너도 이 이삭의 죽음에서 나왔다고 바로 예수님의 죽음인 거지요
그것을 오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출처 그 태생
그 처음자리 그 출생의 비밀을 말이죠

아참 서두로 히틀러 ; 악의 탄생 이라는 드라마 평을 적은 것을 보고 오늘 본문이랑 딱 맞다 싶어서 생각했는데 그 단새 까먹고 바울의 트릭을 먼저 언급했네요
아무튼 그 내용을 다시 올려보면 이렇습니다https://crosslamb.tistory.com/844


히틀러 : 악의 탄생 (Hitler : The rise of evil. 2003)
영화 감상 2010. 5. 4. 12:19
히틀러 : 악의 탄생 (Hitler : The rise of evil. 2003)

히틀러 (2003)
Hitler: The Rise of Evil

방영정보 미국CBS | 2003-05-18 ~ 2003-05-20
요약정보 캐나다, 미국 | 총 4부작
제작 크리스찬 두가이(연출) | 존 필마이어(극본)
홈페이지 http://www.cbs.com/specials/rise_of_evil/
출연 로버트 칼라일 (아돌프 히틀러 역), 스토커드 채닝 (클라라 히틀러 역), 줄리아나 마굴리스 (헬레네 역),

초반에 나온 자막 문구가 이 영화의 전체를 말해 준다.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에드먼드 버크(1729-97)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선이 자신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악을 활성화 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정의 다.

인간의 정의 보다 가장 악마적인 것이 없다.
인간의 긍정 보다 가장 더러운 더러움이 없다.

왜냐하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조는 무시하고 자신만이 정의롭고 긍정적이면 된다는 식이니 이것보다 더 악마적인 것이 어디있는가? 우물 안의 개구리 이다.

예수님만이 알아야할 선악을 쓸데없이 괜히 알아서
인간들은 자신의 선에 의해 좌우 되는 세상을 꿈꾼다.
나태하고 게으른 선에 의해 악이 꽃핀다는 저 독재적인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이런 악마와 같은 인간의 선악의식을 가지고서 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선하심과 영광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신다.

애굽왕 바로 왕과 애굽 군사의 강퍅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동원이 된다.

그들이 강퍅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선하심이 드러나지 않는다.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그래서 그들은 악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주변에 늘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에 대한 회의감을 털어놓는 종교인꾼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 말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 말을 할 조건이 될려면 자신은 악에서 벗어난 입장에서 악의 외부에서 말해야 한다.

물론 뻔뻔 스럽게도 악의 밖에서 그런 말을 외친다고 당당히 말하지만
웃기는 소리이다.

그렇게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 라고 말하는 그 자는 악이 아닌가?
또 그렇게 운운하는 그 하나님은 과연 진짜일까? 악마일까?

차라리 왜 나같은 악마에게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십니까? 라고 물어봐야 한다.
자신이 악마인줄 모르기에 하나님 위치에서 저딴 악마적인 소리를 외친다.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 하시는가? 라고 말이다.

바로 이 표현을 이 영화에서는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에드먼드 버크(1729-97)

이런 소리로 악마를 퍼트린다.

히틀러를 핑계 대지만 정작 히틀러와 같은 한 아담 속에서 자신은 한 아담이 아닌 한 아담 바깥이라고 우기는 식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한 아담이다.

히틀러를 악마 취급하고 악마로 판단할줄 아는 자신은 정의요 선이요 저런 인간에 아파하고
저런 인간과 차이나는 양심의 소리, 선한 소리를 외칠줄 안다고

선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 생각 자체가 악마가 아니고 무엇이랴?
차라리 히틀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 아담 속에 있는 악마를 천기누설하듯이 보여줬으니까 말이다.

히틀러는 국가를 세우고 다스리고 국가를 충만케 하고픈 백성을 대변해 준다.
바로 그 국가 라는 폭력적인 악마성은 다수의 백성인 집단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국가에 집착하는 이유는
딱 하나 이다. 왕이 싫어서 이다.
자신이 이미 신이요 왕인데 다른 왕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리해 주는 스타를 내세운다.
그것이 히틀러이다.

정작 히틀러를 움직이고 조정하는 것은
바로 저런 소리를 외친 자들이다. 어떤 소리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
에드먼드 버크(1729-97)

정의를 외치는 양심이 바로 저런 히틀러는 조정해 놓고서는 정작 히틀러는 악마취급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악마를 감출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모든 인간의 악마성을 히틀러 한 개인에게만 뒤짚어 씌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뒤짚어 씌운다.

정의를 외치고 양심을 외치고 선을 외치는 그 인간에게서 조차도 악마를 적극적으로 뒤짚어 씌워서

예수님 자신의 선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신다.
차라리 히틀러를 보면서
진리에 아무리 개입할려고 몸부침쳐도 소외 당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요 진리이다는 것을

너무 너무 감사하는 것이
유일한 선하신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악마임을 들추어내신 십자가 사건을 통해
밝혀졌다는 것을 말이다.
자 이런 내용이 오늘 나온 본문과 똑같습니다
헛된 것과 귀한 것
영원한 것과 멸망해야 할 것을 우리는 반대로 추구해 왔음을 말이죠

히틀러를 악으로 판단한 줄 아는 본인은 그럼 악 아니냐 말이죠

이 말귀를 못 알아먹고 댓글로 무슨 소리인줄 모르겠다 라고 추상적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추상적이다 듣기는 들어도 무슨소리인줄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는
추상적이지 않으면 도와 달라고 어디 어디가 무슨 말인지
어느 어느 부분이 잘못된 생각 아니냐 라고 비판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무슨말인지 모르니까 툭 그냥 던져버리는 겁니다

알필요도 없다는 식이냥

히틀러는 계시록이나 에스겔서에서 나오는 열국에 해당되는 원조 애굽의 강퍅함을 나타내시고자
지옥에서 끄집어낸 세력입니다 왜?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시고자 하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사랑을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라시고자 함인데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 의를 쌓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 헛짓인데 극도의 자기 의를 쌓는 애굽왕처럼
시대 시대 마다 세워버려서

하나님의 의과 대조를 이루는 멸망 받을 자를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런 히틀러 아니다 동조한 적 없다 라고 만 한다고 해서

생명을 구하는 능력을 쫓느냐 말이죠
역시나 히틀러처럼 경건의 모양으로 생명을 죽이는 짓을 지금도 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짓 밖에 없거든요

그카이 율법으로 아예 도배를 해서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속임수 벗기고자 더한 속임수인 히틀러 같은 자를 붙이시는 것이지요
앗수르를 북이스라엘에 붙여서 멸망 시키듯이
바벨론을 남유다에게 붙여서 심판 하시듯이

그런데 남 유다 만큼은 하나님의 능력 곧 다시 살리는 되새김질처럼
나그네처럼 아무것도 없는 광야 죽음 사막 속에서도

외부에서 끊임없이 살려주시는 생명공급이 늘 계속해서 이어주고 있는 겁니다

너 잘나서가 아니라 생명 구하기를 하시는 이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피 흘려주심을 말하고자 말이지요

그러나 나그네 본향을 향해서 가는 자가 아닌
정착민이 되니까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누가 크냐 라 먼저 벌어지니
이것이 곧 남을 죽이는 경쟁으로 갈 수 밖에요

정착 더더욱 곤고히 자기 손으로 미쁜 바위 견고한 튼튼하고 든든한 가인의 에녹성을 건설하다 보니 영웅들이 나오는 겁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맨 맨 맨 들이 말이죠

창 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그가 성을 건설하고 그 성의 이름을 아들 에녹이라 하였더라“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이마표를 받게 되니 그제서야 하나님을 점쟁이 찾듯이 이마에 부적을 달고 난 뒤 부터는 국가 건설의 근원이 되는 에녹성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벨탑의 원조이고
국가탄생의 시초인 거지요 바로 국가라는 짐승 말이지요

그 결핍을 슈퍼맨맨맨 이라는 영웅으로 채우지 않으면 하루도 못 사는 겁니다

이것이 멸망하는 자들의 대표성으로 언급되는 겁니다
그 영웅놀이라는 자들에게 있어서

젖먹이 임마누엘을 구하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라는 반응이 당연하지요

가치가 있으면 바로 즉각적으로 믿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달인들도 마다하는 헛된 거리끼는 걸림돌인 십자가를
누가 믿었으리요

아무리 보다 우리 꽁꽁 감춰둔 속임수 보다 더한 속임수 같아
안 속을래 라고

안 속는 자가 속게 되고
속은 자가 남은자처럼 돌아오는 것이지요

말이 속은자 이지 완전 하나도 남겨진 것 없이 탈탈탈 다 털린
절대단절인 그 잃어버림 속에서 비로소
남겨둔 한 씨를 보고서 돌아오듯이

49일 째 되어도 예수님 죽인 것 하나도 양심에 거리낌적도 없었는데
약속한 성령이 50일 째 되니까 비로소 그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서
무릎 박살나고 눈 다메섹에서 눈 다 가버리고 멀어지고
모조리 다 탈탈탈 다 털린 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그냥 누구든지 주의 이름 부르는게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

너가 핍박한 너가 죽인 나사렛 곧 이단 예수다 라고
이단으로 몰아서 처참하게 갈기갈기 너가 죽인 예수님을 만나야

비로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즉 그 동안 헛되다고 여긴 이름 예수님 때려죽어도 안 부르겠다 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고

부르지 않던 자리에서 부르신바 되고

결국 그 동안 멸망하기로 작정된 자기 이름만을 위하여 살다가
그 자기 이름을 위한 짓 꺼리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그카이 헛된 자기 이름을 박살이 나지 않으면
절대로 부를수 없는 이름인데
그 이름이 마구잡이로 쳐들어 와서
천국과 같은 내 이름
에덴 동산과 같은 내 이름 애굽을 박살을 내고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저 귀하디 귀한 주의 이름을 누가 부르겠습니까

죄인 환자가 아니면 죽어도 못 부를 이름이니 말이죠

그래서 환자 죄인 만들어 버리니까
가장 귀한 이름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
그 귀하디 귀한 복음을 우리는 헛되게 취급한
멸망받아 마땅한 자인데

그 죽은 자 원수를 살리시고자

능력
죽은자를 건지시는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그 참성전 걸어다니는 거룩한 참성전
3일 만에 되살아나는 새김질 하는 성전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생명을 얻게 되었다 말이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도리어 남의 생명을 갈취하는 강도의 소굴 뿐이였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거룩의 취지를 실상으로 그대로 담은 것은
그림자의 반복이 아닌

진짜로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싫어버린바 된 죄인으로 모습으로 오셔서

멸망 당해 마땅한 자를 생명으로 옮기고자
친히 화목제물이 되신
이 실상 앞에서

교회에서 벌어지는 그 헛짓꺼리들은 사실상
살인의지들 밖에 안된다는 것을 까발리고
밭갈이 기경하심으로써

다시 매일 매일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 처음자리에 걸맞는 첫사랑이 이미 떳기에
매일 매일 밭 갈이 당하는

안 그러면 우리는 또 부정한 짐승처럼 
떠날려는 마음 없고
잃어버린 대의 곧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땅의 정착해 버리고 아예 그 땅에 고정화 될려고 하는
물이 고여 썩게 되니까 자기가 우상이 되니

저 도리도리처럼 양 사방에서 우겨쌈으로 공격해 옴에 있어서
그 자기방어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니
빤스만 입고 배째라 라고 나오듯이
그 결핍 채우기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가 지 스스로 매일 매일 무거운 짐을 점점 더 해 버리는 겁니다
연자맷돌을 아이들에게 얹혀서 물에 빠뜨려 죽이더니 이제는 자기 차례가 되니까
안 빠져 죽을려고 발악을 하면서 땡깡 부리는
저 결핍 채우기가 얼마나 헛된 멸망의 길이냐 말이죠
그런 도리도리를 옹호하는 놈들만 같은 길을 가는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자들 히틀러 비판하는 놈들 또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은 맹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아무리 봐도 십자가는 속임수 같아 보이거든요
인간의 속임수를 까발리고자 자기 꾀에 휘말리는 올무가 되도록 보이는 그 십자가를

누가 믿겠느냐 말이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누가 믿느냐 말이죠

아니 본인이 심판을 날린 하나님인데
그 심판에 어떤 하나님이 달려 죽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꽉 꽉 그것도 좋으신 하나님 이라고 교회 지분에다가 글짜까지 새기면서
그 좋으신 하나님이 꽉 차 있는 자들에게

이 어리석고 미련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는 들어갈 틀이 없는 겁니다

그 속임수를 깨뜨리는 속임수 보다 더 한 죽음 보다 더한
시기 질투의 사랑이 아니면

누가 죽음 그 속임수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빠진 자에게만
요나의 표적을 구하지

안 빠졌다 라는 자에게는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
곧 멸망의 길 밖에 없는 겁니다

이 멸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또렷히 대조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영국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지옥행 멸망의 길이 천국처럼 에덴동산으로 포장된 애굽의 잔칫집이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속임수 같다고 나 다시 돌라갈래 라고 했던 그 광야의 3일길 그 절대 단절의 길인 십자가의 죽음이 오히려 생명을 건지시고자 대신 매 맞은 길이다 라는 겁니다

막상 잔칫집이 아닌 초상집에 데려다 주는 지혜는
내가 배 고픔을 견디는게 아니라 외부에서 끊임없이 죄를 지적해 주심으로써
벤또 도시락 생명의 양식을 늘 끊임없이 공급해 주시는
그 대신 매 맞으심을 보여주실때에

이 사랑이 없으면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이 없으면
멸망한 자 였음을
소돔과 고모라 였음을
하루 하루
닭살 돗듯이 쭈뼛 쭈뼛 소름끼치게 느끼면서

헉 으악 이런 죄도 용서하시다니 말도 안된다 라고
그 말도 안되는 길을 그 죽음의 홍해를

그 땅끝이라는 죽음의 바다로 너끈히 넘어서도록
벤또 도시작 외부에서 살려주시는 되새김질로써

늘 우리의 부정을 불태워 흠향하시고
죽은자로 만들었다가 다시 되 찾는 생명을 구하시는

그 사랑이라는 능력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죽음에서
다만 악에서 건져주심 만이

참 능력인 십자가의 도 였음을

우리가 기뻐하고 찬양케 하시고자
멸망할 자들과 대조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

댓글 

마치 예수님은 건강한 자 의인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어리석고 미련한 어린아이와 같이 무능한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듯이

자꾸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 귀신들린자 고치듯이
매국노 세리 죄인 강도 창녀
개같은 이방인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 
그리고 심지어 탕자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같은

결국 의인이라고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일부러 삥 둘러서 가듯이 찾지 않는 자들을

주님은 그 잃어버린 자들에게만 자신을 자꾸 자꾸 나타내시는 겁니다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듯이

자 이렇게 멸망할 자들과의 대조를 통해서
생명 구하기
죄인 구하기
환자 구하기를 펼칠때에

여기에 반발하는 자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그 맏아들 같은 자가
진짜 멸망할 자요 살인자요 죽음이 가득한 자임을 까발리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