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파리 탕자와 고난의 종]
반드시 탕자(똥파리)로 만드셔서 보여주시는 사랑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 속에서
탕자는 이 세상에 없다.
오로지 탕자는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 탕자만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천사들이 기뻐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작품이다.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런 작품이 되길 원치 않는다.
이런 새로운 피조물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이로다 라는
그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는 새피조물을 원치 않는다.
오로지 자기 신앙으로 자기를 꾸미고 인테리어하고 자기가 자기를 조각하는
여전히 자신이 신이 된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적인 종교성과
율법적인 행함으로 자신을 열심히 조각하는 자기 믿음으로 인한 작품을 꿈꾸고 있다.
거기에 예수님은 조금도 양보할 뜻이 없다.
자기 피조물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시고자
직접 뛰어 드신다.
어떤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창조를 하기 위함이다.
곧 소멸로 인한 창조요
심판으로 인한 구원이요
원수로 만들어서 용서하는 사랑이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음으로 그 십자가 죽음에 접붙임으로 인한 부활이요
어리석은 지혜로 인한 더 나은 제사의 완료이다.
이 보다 더 뛰어난 지혜가 없을 정도이다.
바로 십자가로 인한 새창조이다.
얼마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지
아무도 그 비밀을 캘 자가 없다.
은폐 되고 은폐된 감추인 보물이다.
아무도 해석할 길이 없다.
도리어 그 감추인 보물에 의해서
해석 당해야 할 입장 뿐이며
용서의 대상이 되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맏아들은 그 원인 없는 결과로 주어진 사랑을
자신의 행적과 비교해 보니
그 더 나은 제사를 알 길이 없다.
자신의 행적만 보이기에 그저 억울할 뿐이다.
그러나 탕자는 그 사랑 외에는 보이질 않는다.
자신에게서 이미 모든 행적들은 부도맞았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도 부도 났고 미래에도 회생 불가이고
자기 행함도 부도 났고 미래에도 회생 불가이고
인간 됨됨이도 이미 벌써 부도 났고 미래에도 회생 불가이고
그저 아버지로부터 떨어지는 꽁꼬물이라도 받아 쳐먹을
그 뻔뻔스러운 마음에 주인의 긍휼로만 먹고사는
개가 되는 그 저주와 심판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심정으로
그저 그저 아무것도 원치 않는
심판해도 할 수 없고
죽여도 할 수 없고
지옥 보내셔도 할 수 없는
모든 가능성이 제로가 된 끝장난 인생임을 비로소 알고
다소 곳이 경찰서에 자진해서 들어가 수갑채워달라는 범죄자와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왠 일이랴?
그 다소 곳이 자수하러 경찰서로 향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 너무 기쁘다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자가 천사와 같은
육이 도통 해석할 길이 없는 영의 마음을 품은 자인 아버지다.
얼마나 도통 알길이 없었으면 맏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길이 없다.
천사들만 기뻐하고 박수치고 잔치를 벌린다. 죄인 하나 돌아 왔다고
죽었다가는 아들이 되살아 왔다고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았다고
아버지는 기쁘기 짝이 없다.
자진 자수해서가 아닌
모든 재산인 향유를 깨뜨려서 땅에 허비한 아까운 향유를 다 투자해서가 아닌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치셔서 나온
그 살과 피의 영생을
용서와 생명의 젖을
탕자만이 달라고 울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 준비된 생명의 젖을
어머니는 기쁘게 젖을 짜서 먹이고자 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서 살리고픈 마음으로만 일관하면서
살려주고자 미리 미리 집 앞 멀리 멀리 나가서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다.
빨리 빨리 생명의 젖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다리셨다.
(눅 15:20, 우리말) 『그러고서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얼마나 숨을 쉴 수가 없는지?
...
똥파리의 주인공이 그렇게 울어보고 싶었던 뜨거운 눈물이 아닌가?
개 만도 못한 똥파리 인간. (짱아 보다 못한 인간 : 짱아 - 강구만 장로를 주인으로 아는 개)
이제 아버지 품에서 실컷 운다
원없이 운다
벌레 만도 못한 똥파리에게
채색 옷 (더 나은 옷, 약속의 옷, 지독한 미움이 묻지 않는 지독한 편애의 피 옷 = 어버지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의 증표, 물증, 보혜물)
살진 소 (아버지의 모든 기업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그 기쁨에 아버지 자신에 베푸는 그 사랑에 자신이 도취되어 모든 빚과 미래의 모든 허물까지 다 덮어버리겠다는 기업무를자인 고엘의 진면목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아버지임을 유감없이 드러냄)
금가락지 (어떤 누구도 이제 아버지가 불쌍히 여긴 그 용서의 사랑에 끊을자 없다는 확정물, 마치 한 몸 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단 하나의 유일한 선물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언 놈이든 시비를 걸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대외적인 선포)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파적이고 불공평 중의 불공평임이 드러났는지
그 대외적인 선포
그 새로운 사랑에 도저히 해석할 길이 없어서
대외적으로 선포된 사랑에 반대 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며 육체보다 뛰어넘을 정도이다.
맏아들은 묻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행적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불공평한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는 것을
바로 그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버지는 이룬다.
그렇기에 창조가 맏아들에게 해석 될 리가 있을까?
평생을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 민족과 그 역사를 통틀어서
창조를 믿었다고 자부했건만
그들은 창조를 단 한번도 믿은 적이 없다.
이 맏아들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되는 것이 뭔가?
나를 창조 했다는 것이다.
탕자는 졸지에 자신의 창조자를 비로소 만났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걸쳐 기독교인들이 창조를 입이 부러터지도록 외쳤다.
그러나 그 창조를 외친 당사자들이 창조를 단 한번도 믿은적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안식에 목숨까지 걸었던 이스라엘이 단 한번도 안식을 믿은적이 없듯이
할례를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듯이
인간에게서 지켜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란 인간에게서 인식당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맏아들은 이 탕자라는 새피조물을 창조한 아버지의 사랑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자로써 창조가 드러내는 차이성인 나누어짐을 보여준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거룩이요 창조이기에
천국을 탕자로 채우고
지옥을 맏아들로 채우는
그 나누는 거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도저히 이해불가인 거룩이다.
살려주심과 산 것의 차이다.
이해케해주심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다.
불쌍히 여김 당함과 용서실천자의 차이다.
탕자와 맏아들의 차이이며
천국과 지옥의 나누임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여럿 있는 과부들 중에 한 과부에게
여럿 문둥병자들 중에 오로지 한 문둥병자에게만
이 편파적인 불공평의 사랑이 드러남으로
한 쪽은 격분케 한 쪽은 그저 불쌍~~히 여김으로만
자신의 창조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아버지 사랑의 진면목이다.
한 쪽이 격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랑
이것이 창조의 진면목인 나누심이다.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이 나누심의 진면목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요
이 나누심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창조자에 대한 반발세력인 죽음의 실체들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시는 창조자만의 권한을
아무리 성경믿고 예수믿고 교회다니고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고
단 한번도 말씀에 벗어난 삶을 또 그런 마음을 품은적이 없어도
나누시는 그 창조자 앞에 나누심을 당하는 그 피조물은
나누어지는 것이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를 동원하여 증거 되는 차이나는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십자가란 나누기 위한 창세전의 예정이었음을
이 예정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려는 자들은
이 걸림돌에 다 넘어지는 나누어짐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 알았으리요?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는가?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자에게
단 한번도 예수 이름을 불러 본적 조차 없는 탕자에게
오히려 단한번도 아버지의 말씀 밖에 벗어난 적이 없는 자에게는
알길이 없는 사랑으로만 비밀다움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의도적으로 짖는다는 것은
은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은혜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낸 집단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이스라엘이였고 (해석불가인 창조를 엉터리로 해석)
오늘날 기독교들이 은혜를 어떻게 해서든
사적으로 포착하고 인위적으로 조작해내고
반드시 포착해내고야 마는 그야말로 창조를 제대로 거부하는
오로지 선악만을 쥐겠다는 그 완악함이
저절로 나누시는 창조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인간에게 믿음이 가능한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닌
도저히 믿음이 불가능한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창조를 믿을 재간이 있는 자는 없다.
그러 탕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덮쳐지듯이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로만 드러나는 사랑일 뿐이다.
범죄자에게만 나타나는 십자가의 예수님이지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도 듣기지도 포착되지도 않는 고난의 종이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에서 죽다 : 강구만 장로 (1) | 2009.07.19 |
---|---|
목사를 협박하자 (1) | 2009.07.16 |
성화론자들의 설교의 핵심 (0) | 2009.07.15 |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0) | 2009.07.12 |
성경의 영원한 주제 삼각관계 (1) | 2009.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