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의 사기성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오전 11:24:07   김대식


개혁이라는 말은 고정적으로 머물지 않고 날마다 개혁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자 라는 자체가 이미 고정된채로 흐름을 탄다.

흔히 말하는 탈주 또는 노마니즘 이라는 의미가 바로 개혁이라는 의미이다.

개혁이라는 의미가 결국 희망이 되어 버리는 고정이 되어버렸다.

정작 개혁이라는 의미가 부정이라면 과연 인간은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준 기적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개혁 곧 새로움을 상대적인 기존의 것과 비교해서 개혁의 시대 개벽의 시대를 꿈꾸워 왔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또한 그랬다. 얼마나 큰 희망에 부풀어서 잔뜩 기대했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굽나라와 족히 비교가 안 되는 개혁의 세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출애굽하여온 그 신체는 여전히 애굽적이다.
개혁하겠다는 그 자체가 애굽적이다.

왜냐하면 그 신체가 애굽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굽이라는 영역을 빠져나와본들
그 신체는 애굽신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애굽신체를 깨뜨리는 광야교회가 있다.
광야교회란 개혁교회가 아니다.
도리어 개혁교회를 깨뜨리는 교회다.

날마다 날마다 개혁하고 자기부인하고 회개하는 그 신체를 깨는 것이 교회다.

회개하는 그 신체를 깨뜨리는 상한심령이 따로 외부에서 덮치는 것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회개란 늘 조작한다.

내부의 개혁이란 늘 사기를 치는 속임수다.
그 개혁을 배신하는 것이 바로 삑사리 신체 곧 여자의 후손이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5명의 여성은 그 대표적이다.

철학계의 거성들 즉 신학계로 치는 개혁주의에 해당되는 자들의 특징은
이 여성성을 해석 못한다.

아무리 해석할려고 달려들어도 풀어낼 수가 없다. 그저 그 차이성만 남자로써 알 뿐이다.

이 여성성은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남자가 이 여성성으로부터 해석 당해야 할 판국이다.

부정한 여성으로부터 해석 당하는 것은 곧 심판이다.

그럼 왜 부정한가? 성경에서 나온 여성의 월경 등등이 남자 보다 2배나 더 되는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물론 남자는 7일 이지만 여자는 14일 이라고 해서 남자가 상대적으로 날수가 적을 뿐이지 부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남자로부터 여성은 늘 부정타 라는 지적꺼리가 되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래는 식이다.)

남자 때문에 부정하다는 것을 대신 그 부정성을 뒤짚어 썼다라는 자체를
배신의 이미지로써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전제로 남자로부터 늘 부정하고 약하다 라고 반드시 지배받는 피지배의 형식이다. 정치적이다.
결국 늘 가해자로 만드는 구실을 여성성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생명의 창조성을 띤 여성성은 똑같은 방식의 정치성으로써 이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딴 남자 딴 남편 딴 아담을 기다리는 바람피우기로써 배반으로써 그 남자라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약한 몸으로써 갇히고 포로된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직 감사와 기도 뿐이다. 날 구해 주소서 뿐이다. 누구로부터? 악마성 곧 남자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그 남자가 개혁할테니 탈주 할테니 날마다 회개 할 테니까
같이 한 몸을 이루자 라는 식이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모토가 된다.
한 몸 이루기

그러나 그 개혁에 여자의 후손은 반대를 한다.
그 한 몸을 깨뜨려서 다른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걸지 않는다.

개혁 조차도 눈에 보이는 것을 기초로 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출발하는 식이다.

그러니 개혁은 사기다.

더 이상 개혁할 필요 조차도 없는 새로움 자체가 덮치는 것에 대해서
정작 새생명삶의 운동을 펼치는 것들이 시기와 질투를 본격적으로 발현시킨다.

즉 제대로 새로움이 덮치니까
제대로 시기와 질투가 본격적으로 그 어두움의 강퍅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선함이 악마적이였다는 것이다.

그 선함을 기초로 해서 뭐 개혁하겠다고?
그런데 문제는 항상 브레이크가 걸리는 핑계를 항상 돈에 둔다.
그래서 투덜 투덜 거린다. 돈이 없어서 개혁도 못하겠노라고?

또 돈 없이도 개혁하겠다고 은근히 돈을 바란다.
돈 없어도 개혁 가능하다 라고 슬로건을 내밀면서 그것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은 정치를 펼친다. 돈 대신 힘을 모으는 것이다. 결국 돈은 모이기 마련이다.
돈에 대한 초월로써 돈을 끌어모으는 트릭(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다.
성전세가 누구의 형상이든 상관없이 개혁은 어차피 사기다.

그런 몸으로써 천국(진리,지혜)과의 결합을 꿈꾸는 것이다.
결국 모든 철학과 모든 신학은 불교로 모이도록 되어 있다.
개혁주의도 불교다.

인간의 그 신체성을(단순히 육이 아니다. 육이 더럽다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소위 깨끗한 영혼이라고 분류되는 이것 조차도 모조리 신체성에 포함된다.) 천국과 결합 또는 신과의 결합 일치 혼합 하나되기 포개기 등등은 모조리 인간의 머리로써 조작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그 단절성은 누가 뼈저리게 뼈 속 깊숙이 깊숙이 그 심각성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여성성이다. 곧 잃어버린 이스라엘 이다.

그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정작 혈통 이스라엘로부터 핍박받는다.
노마니즘으로부터 핍박 받는다.
늘 이웃사랑 실천에 조금이라도 열성과 힘을 보탤려고 밤낮으로 고민하고 연구하고 잠도 못자는 그들로부터 핍박받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다.

이 잃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선택되고 구별된 거룩한자들로부터의 대립상황이다.
이 잃어버림은 바로 선택된자들로부터 의미가 나오지
그 자체로써 나올수가 없다.

십자가란 바로 그런식이다.
우리 가해자로부터 나온 의미가 십자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란 항상 남이 아닌 내가 거부하는 대상이다.
그 이름 자체가 그런 의미로써 부여된 나의 죄악성이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버림이다.


개혁을 하겠다는 뜻은 버림받기 싫타 라는 뜻이다.
결국 회개하기 싫타 라는 것이다.
회개 하기 싫기 때문에 회개하기로 때우는 것이다.
개혁으로 때우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바로 그런 나로부터 규정된 의미로써 시작 된다.
곧 부정성 이다.

개혁하겠다는 그 부조리를(나의 부조리를)
나로부터 규정당함으로써 그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출발이다.

개혁주의는 죄로부터 출발 할 수가 없다. 개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곧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개혁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죄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부여한 그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인간의 개혁주의 곧 정념이미지(사랑)로부터 탈피한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 곧 죽음으로 그 아들 보내심이다.

결국 이스라엘 내부의 싸움은 이 싸움 뿐이다. 전우주의 싸움이다.
영적 전쟁이다.

인간 쪽에서의 사랑 과 주님 쪽에서의 사랑인 화목제물인 죽음 곧 십자가에 달린 그 아들 보내심이다.

인간 쪽에서의 사랑출발인 개혁주의로써의 대표자들인 바리새인들이 묻는다.

어떻게 해야 믿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까? 믿겠다는 것 조차도 자신들의 숙제로 본 것이다. 인간 쪽 출발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하늘에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숙제 뿐이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꺼리를 주신다. 곧 십자가의 죽음을 믿으라 라는 소리다.
누가 죽는가? 왜 죽는가? 곧 부정성이다. 그 부정성은 바로 이렇게 애굽적사고방식인 악마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 믿겠다? 예수님을 믿겠다 라는 그 사고방식 때문에 죽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는 것이다.

아니 왜?

예수님만이 그 암덩어리를 제거 하러 오신 것이다.

그래서 바로 수술 작업에 들어간다. 환자 아닌 자들은 죄인 아닌 자들은 의사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들이 많다. 그러나 죄인은 함구한다. 의사한테 맡겨진바 되었다.

오죽 하면 의시가 자기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처방전으로
살과 피를 제시하니까 (그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기에 피 아니면 안되는 죽음 그 자체 저주 그 자체 악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살과 피를 먹이신다.)

많은 기적으로 보고 따라 왔던 자들도 다 되돌아간다.

자신은 그 정도로 악한 놈이 아니다 죄인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 짖은 살인마나 하는 짖이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나로써는
도저히 못할 짖이다 라고 거부한다. 아니 환자가 의사 보다 더 똑똑하다.
자기 병을 자기 스스로 처방을 내리니 말이다. 난 식인종이 아니예요 라고 다 되돌아가는 부자청년이다.

그러나 오죽 하면 의사가 그 죄악성을 알기에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늘에서 직접 내려와서 까지 증거하지만 살과 피는 외면 받는다.

살과 피를 먹는 다 라는 것은 배신이미지다.

기존의 것을 배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

부자 청년처럼 평생을 걸쳐서 지켜온 거룩한 말씀을 이 한 순간에 다 날려버리는 배신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배신행위가 바로 십자가다.

율법행위를 배신하는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죽지 않고서는 열매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숙제다 분명 하늘에서 보내신 자의 숙제다.
따라하지 말라. 심지어 이 글 방금 이 문장을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반드시 따라할려는 것이 바로 우리 속의 악마성이다. 이것을 개혁주의의 모토로 삼아버리는 것이 인간의 악마성이다.
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믿음 좋아서 지옥가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악마성의 이것의 유일한 치료는 단번의 제사 뿐이다.

살과 피다.

살과 피 만이 우리 속에 있는 잘 믿고 있는 나를 강퍅케 하는 것은 유일하게 피 뿐이다.

그 강퍅성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도 놀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군요. 죄인 맞군요. 살과 피 주세요.

라는 자는 이미 다 나은 자다.

뭘 해도 죄 뿐이다.
그래서 뭘 해도 용서 뿐이다.

아니 앞 뒤 문장이 모순되지 않나?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뾰료롱 살과 피 (나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지롱)

이제 그 살과 피를 먹은 자는 경계선에 놓인다.

악마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의 전쟁에 멋들어진 미끼로써 놓여지는 경계선이다.

이것을 마귀는 견딜수가 없다.

말씀은 우리 지키라고 준 적이 없다.
말씀은 오로지 마귀만을 겨냥한 것 뿐이다.

이 피부막의 등장은 예수님의 사랑의 세계를 꼴보기 싫어서
그 강퍅성을 점점더 증식 시킨다.

주님이 일을 참 제대로 하신 결과다. 우리는 도저히 그런 사랑은 나타낼수가 없다. 기껏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려는 개수작 뿐이다.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경계선은 바로 잃어버린 자기 양의 모습이다.

여기에 잃어버리지 않고 선택되었다 개혁되었다 선민이다 구원받았다 라고 외치는 특히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 그 경계선을 허물려고 달려들게 된다. 도저히 용납을 할 수가 없다.

어딜 감히 하나님의 일에 더러운 창녀가? 세리가? 비싼 향유를 깨뜨리는 여자가? 문둥병자가?

어딜 감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판국에서의 강도가? 부끄러운 구원인지도 모르는 강도가?

이런 잃어버린 자기 양들이 부끄럽지 않은 구원을 받았다는 성화자로부터 충돌되는 상황을 더더욱 증식시켜서 천국의 완료는 더더욱 확장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투사이다.

곧 십자가의 죽음의 확대이다.

인간의 자기투사인 개혁의 확대에 상대적으로 대립시키면서 말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이야 말로 이웃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빨리 빨리 죽어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토록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일에
사람의 일로써 그 경계선을 허물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개혁주의야 말로 가장 악마적이지 않는가?

이렇게 개혁주의를 비판한다고 자부하는 나야 말로 가장 괴수이다.


아 오늘은 뭐 하고 죽지?

나를 안아줄 여자를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 죽지 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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