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꺽으신 뼈] 와  [단 번에]

2011년 4월 7일 목요일 오후 6:02:11  김대식


어제 잠결에 꺽으신 뼈가 생각 났습니다. 그래서 또 편지 배달 합니다.
편지는 반드시 도착합니다.

꺽으신 뼈는 명료하고 또렷합니다.
그러나 회개 금식 눈물 이라는 3종 세트는 전혀 뚜렷하지도 않고; 흐릿하고; 모호합니다.
의문 덩어리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흐릿하고 의문스럽고 모호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윗은 그런 모호한 것을 아예 몸 전체, 이스라엘 전체, 짐승까지 칭칭감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회개의 최고봉을 추구하고
금식의 최고수준을 추구하고
눈물의 최상위를 보여주고자 애씁니다.

나단은 그런 모호하고 흐릿한 것을 말하지 않고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고 생생하게 또렷한 것을 증거합니다.
죄를 명료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결탁 시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꺽으신 뼈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보다 더 또렷하고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단 번에 제사 드렸다 라고 하는 겁니다. 1회 라는 숫자 개념이 아닙니다.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고 흐릿한 그림자인 의문의 것들의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그런 것들을 뒤틀어 쥐어짜는 가로지르는 의미입니다.
늘 수시로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반대되는 불가능한 의미입니다. 상상 조차 못했던 겁니다.

(롬 6:10, 개역)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 7:27, 개역)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 9:12, 개역)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26, 개역)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8, 개역)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피 흘리심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에 단 번에 드린 것입니다.
이제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은 가라 꺼져라 입니다.

그러니 회개 하지 마십시오
금식하지 마십시오
눈물 흘리지 마십시오

그런 모호한 것 나단 선지자가 말한적 없습니다.
(혹시 있나 싶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봤습니다. 못 찾았습니다. 혹 찾으신분 있나요?)

오히려 [단 번에]를 막아보고자 다윗 쪽에서 자발적으로 드리고자 나섭니다.

나단은 [단 번에]를 외칩니다. 곧 죽음 보다 더 또렷한 사랑이 없습니다.

꺽으신 뼈입니다.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다윗은 이 꺽으신 뼈의 상황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가로 막고자, 모호하고 흐릿한 것들을 방패막으로 삼아서 최후까지 버티고 저항한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곤고함만 더 할 뿐입니다.

아니 꺽으신 뼈 라는 명료하고 또렷한 것이 제대로 덮쳤기에 그런 반응 곧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제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죽음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회개요? 몇분? 몇시간? 며칠을 할까요?
금식요? 옷 몇벌 찢을까요? 7번? 7 곱하기 70 490번 찢을까요? 죄 없는 옷 찢어서 뭐하게요?
차라리 숨도쉬지말아야 금식 금숨(금지공기) 입니다.
눈물요? 몇 리터를 흘려야 눈물 다울 까요?

이 얼마나 모호합니까? 추상적입니다.

시대마다 자기인식마다 상황마다 달라지는 그 모호한 짖
해도 해도 티도 안나는 시치프스의 신화처럼 아무리 돌을 올려본들 답이 없습니다.
그 의문의 증서는 찢겨졌습니다. 그런 저주는 예수 안에는 없습니다.
예수 안에는 예수님이 단 번에 피 흘리신 꺽으신 뼈가 명료하고 뚜렷하게 이미 넉넉한 승리로, 완료로 있습니다.

다른 완료 다른 [단 번에]는 없습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 나머지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혼탁할 뿐입니다.

이 명료한 죽음{꺽으신 뼈]만을 나단은 다윗에게 증거합니다.

물론 우리는 다윗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공감해야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기에 막을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막아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것에 막히면 될까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베드로를 살리는 길은 명료한 꺽으신 뼈 일 뿐입니다.

다윗은 비로소 그 명료한 죽음 때문에,
꺽으신 뼈 때문에 용서 받고

뻔뻔스럽게 주께만 범죄 했으니 깨끗하다 라고 그 꺽으신 뼈의 의미를 명확하게 화답합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곱하기 세 번 !!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만 범죄 했습니다 아 깨끗해 졌군요 감사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때는 언제고 말이죠?
참으로 뻔뻔스럽지요

명료하고 또렷한 것이 흐릿하고 모호한 베드로의 사랑을 쳐 버립니다.
다윗의 모호하고 흐릿하기 짝이 없는 회개 금식 눈물을, 명료한 죽음 꺽으신 뼈가 쳐 버립니다.

그것이 유일한 사랑입니다.
(전남편 율법에서 새남편 율법 밖의 [한 의 = 단 번에]로 넘어갈 길이 없습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질투입니다. 질투(시기 배신 부조리 부정의 불의한 십자가)

눈에 보이는 교회 따위나, 눈에 보이는 목사 따위나, 눈에 보이는 교인 따위들
그런 모호한 것들에 마음 빼앗기지 마십시오

명료하고 또렷한 것이 밝히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종이 될 필요 없습니다.
허깨비는 언젠가 다 사라집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도 언젠가는 다 허물어 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다 안개일 뿐인 껍데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명료한 단번에 드린 제사가 있습니다.
다른 제사들과 차이나는 단 번의 제사입니다.

바울은 참 뻔뻔스럽게도 눈하나 깜짝이지 않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부조리) 합니다.

우리 눈에 명료하게 보이는 것을 모조리 다 모호라고 흐릿한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명료하다고 밝히 보인다고 참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그 죽음만을 들으대면서 온 교회에 온 세상 구석 구석을 수셔대고 돌아다닙니다.
아니 헛된 허깨비 수셔서 뭐 할려고요?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할까요?
눈에 보이는 것이 모호하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더 모호해서 감히 발설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소통언어인데 오히려 더 뻔뻔합니다.
꺽으신 뼈가 있는데,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데, 너가 죽인 예수님의 피가 있는데
이것 보다 더 명확한게 어디있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꼴보기 싫은 겁니다. 그 질투가 사랑입니다. 우리야 뭐! 당해도 싸죠.

그 부조리가, 그 부당거래(보이지도 않은 십자가의 죽음과 결탁시킬려는 부정한 여자 다말의 부정스럽기 짝이 없는 불의한 재물-도장-도장끈-지팡이에 충성하는 것처럼)가 옳았습니다.

부당거래 [대신 죽으심-여디디야] - 아니 대신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가장 부조리죠.

자기 죄는 자기가 심판 받아야지 왜 남이 받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자기 죄를 자기가 심판받아본들 죄가 사해지질 않으니 문제죠. 다른 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 사함이 됩니다.


나단 선지자는 이 부당한 죽음과 결탁시킬 뿐입니다.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다윗의 몸에서는 나는 것 일체 안 받습니다. 다른 몸입니다. 딴 몸입니다. 우리 몸 바깥)

꺽으신 뼈입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은 기뻐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왕이여 정신이 헷까닥 하신 것이 아닌지요? 좀 전까지만 해도 회개 금식 눈물이더니만?
왠 잔치? 왠 춤? 왠 먹기를 탐하고, 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며, 왠 세리와 죄인의 친구?
안다 나도 안도 그 모호한 것들이 혹시 알아줄까 했는데 역사나 였다.

명료하고 뚜렷한 것이 왔을때는 모호한 것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 부조리를 넉넉하게 수용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 노래합니다.

가장 장성한 자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디지기 얻어터져야 이 부정한 십자가가 옳았음을 우리가 알까요?)

(삼하 12:1, 개역)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2, 개역)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개역)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개역)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삼하 12:5, 개역)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개역)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삼하 12:7, 개역)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삼하 12:8, 개역)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삼하 12:9, 개역)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삼하 12:10, 개역)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 12:11, 개역)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삼하 12:12, 개역)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삼하 12:13, 개역)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4, 개역)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삼하 12:15, 개역)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삼하 12:16, 개역)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삼하 12:17, 개역)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삼하 12:18, 개역)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복들이 아이의 죽은 것을 왕에게 고하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의 죽은 것을 고할 수 있으랴 왕이 훼상하시리로다』
(삼하 12:19, 개역)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삼하 12:20, 개역)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삼하 12:21, 개역)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삼하 12:22, 개역)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삼하 12:23, 개역)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4, 개역)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개역)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ps) 세례요한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천국이 회개 곧 죽음으로써 너희 손에 죽는 천국으로 왔다는 뜻입니다.
(회개 세례 라는 의미 자체가 죽음이라는 의미죠 우리 죽음 말고 대신 죽은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그래야 가짜 천국이라는 우상이 드디어 드러나는 겁니다. 선지자의 외침 한마디 한마디가 오로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겨냥한 겁니다. 우리 회개 해봐야 천국은 우리 상대도 안합니다. 아니! 올라가는 천국이 아니라 땅에 내려온 천국인데?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그러니 그 나팔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백번 만번 지옥 마땅히 가야합니다. 벌벌벌 떨어야 합니다.

오로지 꺽으신 뼈 곧 [대신 죽으심] 만을, 인자 를 쳐다볼 뿐입니다. 그 부조리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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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주  11-04-09 09:50 
 
기쁨의 눈물, 감사의 눈물은 감격입니다.
아직도 회개중, 금식중 은 이미 꺽은뼈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완전 뻔뻔함, 부조리가 내안의 증거입니다.
춤추고, 뛰놀고, 크게 노래 부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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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기 vs 기도 되기 

2011-04-09 10:54:05 김대식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 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 보고 생각나서 올립니다.

몇 년전에 수련회때 같은방에 배정받게된 어떤 분과 대화를 했는데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기도를 왜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는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 기도 안 받습니다.
그렇다고 기도 안 할 위인들이 우리들은 못 됩니다.
당장이라도 사단이 일어나면 다말을 기도의 힘으로 쳐 부술려고 합니다.

기도했다 라는 것을 가지고서 성령의 놀라운 탄식의 기도를 듣게 되면
기도하기가 배설물인줄을 비로서 알게 됩니다.
기도는 하는게 아니라 [되는 것] 임을 누리게 됩니다.
이 양쪽 다 우리는 격으면서 둘의 차이 곧 둘의 소욕, 원수지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자청년처럼 여전히 기도하기로 근심하며 돌아섭니다.
기도 되기 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기도 되기 가 덮치면 그분은 기뻐할 겁니다.

[하기]는 습관, 욕망 욕구입니다. 몸이 달아오르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가능성 입니다.
가래가 끓어오르면 자신의 성향 곧 욕망에 따라 삼키는 자가 있거나
쾍하고 뱉어버리는 자가 있거나 그러다 벌금물거나 안그러면 벌금영역 벗어난 곳에서 하거나 다양합니다.

그러나 [되기]는 사건입니다. 사건이란 충돌 스파클 sparkle 어떤 외부의 것과 충돌 꽝하고 부딧혀서 한 쪽과 다른 한 쪽이 그 이전과의 차이성이 나버렸다는 겁니다. 죽든지 찌그러졌든지 사망했든지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발적이라서 인위적으로 맹글어 낼 수가 없습니다. 상상못했던 겁니다. 무를수도 없는 영원한 빚진자, 영원히 무능한 [하기]가 찌그러지는자로, 망한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은혜 입니다.


여기 성경사건이 있습니다. 사건이란 [되기] 입니다.
성경 모든 말씀의 사건은 [하기]와 [되기]의 차이성을 벌려놓습니다.

[하기]의 대표자 시아버지 유다는 기도의 달인 약속의 자녀의 달인이다.
상대적으로 개같은 이방여자는 그 약속의 자녀 유다의 집안을 풍지박살내는 악녀입니다.
부정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 부정한 여자가
기도하기를 추구하는 유다에게 상대적은 기도되기로써 쳐들어 오게 된 겁니다.
천국이 침노한 것이죠.

기도 하기와 기도 되기의 싸움입니다.

기도 하기는 기도 되기를 꼴상 사나워서 죽도록 미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되기는 기도 하기를 반드시 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두 소욕의 싸움 곧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싸움입니다. (소욕이란 욕망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맏아들은 기도 하기 인간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기도 되기 인간입니다.

이 둘은 충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사랑 아닌 것을 짤라내기 위해서 벌어진 자작극(부당거래)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 와 회개되기 의 차이는 곧 지옥과 천국의 차이요 간격이요 건널수 없는 강인 간격 곧 차이성입니다.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의 사람 되세요
회개하지 마시고 회개의 사람 되세요
금식하지 마시고 금식의 사람 되세요
찬양하지 마시고 찬양의 사람 되세요
예배하지 마시고 예배의 사람 되세요
교회 다니지 마시고 교회 되세요

뭘 넣어도 이 둘의 간격은 서로서로가 원수지간입니다.

한쪽은 행함 책이 땡기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책이 땡기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 책이 갈라놓지 인간의 믿음행위 따위가 갈라놓지 않습니다.

믿지 마시고 믿음의 사람이 되세요
(자기 믿음은 늘 예수님의 믿음 으로 인해 짤려 날라가는 차단성 삭제성 단절성 차이성을 격게 되는 것이 믿음 되기입니다.)

회개 하지 마시고 회개의 사람 되세요.
(나의 회개는 예수님의 회개 곧 죽음으로 인해 죽는척만 연기하는 이단성을 늘 지적받는 상한심령 되기로써 짜르십니다. 이것 아니면 우리는 광야에서 목이 곧은 자일 뿐입니다.)

어 회개 할 마음 추호도 없는데 회개 되네?
왜 이렇게 낯설지 나 아닌 것 같아 누가 찾아 왔나봐?

누구세요?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믿기의 달인 바울에게 찾아온 예수님은 뻔뻔스럽게 죽음을 드리댑니다.

니가 핍박하고 죽인 나사렛 예수 다.

(행 22:8, 개역)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4:5, 개역)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염병 - 욕이죠, 요즘말로 개새끼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로소 믿음의 달인을 부정하고, 부정한 나사렛 이단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나사렛은 부정하다는 의미입니다. 부조리, 인간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자로써의 나사렛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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